‘신’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200년 가까이 벌인 십자군 전쟁이 실패로 끝나면서 로마 교황청의 권위는 크게 하락했다. 여기에 아랍 세계와의 교역으로 새로운 문물이 유입되고, 사상이 발전하면서 가톨릭은 더 이상 유럽 인을 하나로 단결시키지 못하게 되었다. 여기에 교회의 부패와 세속화도 시민들의 신뢰를 잃게 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십자군의 여파로 상업과 무역 활동이 활발해지면서 새로운 중산 계급이 등장했고, 이에 따라 새로운 사회 체제가 요구되기 시작했다. 이들에게는 중세적인 작은 도시 내에서 이루어지는 교황과 봉건 영주의 보호보다 넓은 상업 활동과 재산권을 보장해 줄 중앙집권적 국가, 즉 왕의 보호가 더 필요했다. 각국의 왕들은 영토 분쟁을 벌여 중앙의 힘을 키우면서 차근차근 중앙집권 체계를 갖추어 나갔다. 특히 프랑스에서는 필리프 4세 대에 들어 왕의 권력이 제도화되고, 중세 장원의 영주 수준이었던 왕령지가 크게 늘어나면서 ‘군주’라고 일컬을 만큼 왕권이 강화되었다. 이 필리프 4세에 의해 교황권은 결정타를 맞는다.
프랑스의 필리프 4세는 프랑스의 통일을 위한 국가 체제를 갖추고 왕권을 신장시킨 왕으로 평가받는다. 그는 즉위 초기 이웃나라들과 있었던 분쟁을 정리하고, 법조인들을 등용해 각종 개혁 정책을 과감하게 단행했다. 프랑스 내에서 세속적인 왕권이 강화됨에 따라 로마 교황권의 입지는 줄어들었다.
필리프 4세에게 무릎을 꿇은 아키텐 공 에드워드
마침내 양측의 갈등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바로 ‘돈’이 문제였다. 1296년 교황 보니파시오 8세는 각국의 왕들이 교회에 과세하는 것을 금지하는 칙령을 발표했는데, 이에 필리프 4세는 국내 화폐의 국외 반출을 금지하는 것으로 대응했다. 필리프 4세의 이 법안은 실질적으로 교황청으로 들어가는 프랑스의 화폐 반출을 막은 것이었기 때문에 교황청에 큰 타격을 주었다.
그러자 1300년 교황은 필리프 4세를 공개적으로 비난하고 나섰고, 필리프 4세는 지지 않고 1302년 귀족과 도시의 대표자 들을 노트르담 성당에 집결시켜 ‘전국 삼부회’를 열었다. 왕이 국민대표에게 협력을 구하는 자문 기관 형태로 ‘국민의회’를 삼고, 귀족과 시민의 지지를 확인한 것이다.
1303년 프랑스 왕의 고문이던 법학자 기욤 드 노가레가 교황을 제거할 계획을 세웠다. 그는 교황 보니파시오 8세가 로마 남동쪽에 위치한 아나니의 별궁에서 휴가를 보낸다는 정보를 접하고 교황의 정적인 코론나 가문과 협력해 9월 7일 교황을 습격했다. 교황은 순식간에 체포되어 ‘이단자’로 규정되었다. 이 사건은 시민들의 반감을 사 보니파시오 8세는 이틀 만에 풀려났으나 그는 분을 삭이지 못하고 한 달 후 숨을 거뒀다.
이후 교황권은 급격히 쇠퇴했다. 보니파시오 8세의 뒤를 이은 베네딕토 11세 역시 필리프 4세의 강력한 견제를 받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을 떠났다. 1305년 새 교황을 선출할 때는 필리프 4세의 마음에 드는 사람을 앉혔다는 말이 나돌 정도로 그의 영향력은 절대적이었다. 이를 대변하듯 새 교황 클레멘스 5세의 즉위식은 로마가 아닌 프랑스 리옹에서 열렸다.
1309년 필리프 4세는 위험한 로마 교황청보다 안전한 아비뇽의 주교관에 거주하라며 교황을 압박했다. 1309년부터 1377년까지 일곱 명의 교황이 아비뇽에 교황청을 두고 지냈던 시기를 고대 바빌론 유수에 비유하여 교황청의 ‘아비뇽 유수’라고 한다. 아비뇽의 교황청은 성벽 높이가 50미터, 두께가 4미터나 되는 거대한 감옥처럼 지어졌다. 이는 외부에 프랑스의 왕권이 교황권을 완벽하게 장악했음을 보여 주었다. 클레멘스 5세는 보니파시오 8세가 발표했던 교황권 우위의 모든 칙령을 철회했고, 성지 순례를 떠나는 사람을 보호하기 위해 프랑스 귀족들이 주축이 되어 만든 ‘성전 기사단’도 해체했다. 성전 기사단이 막대한 부를 쌓고 프랑스 곳곳의 영토를 소유한 것에 불만을 품은 필리프 4세의 지시에 따른 것이었다.
필리프 4세는 성전 기사단에게서 빼앗은 막대한 영토를 바탕으로 절대 왕정의 기반을 닦았다. 그는 법률가들을 측근으로 두고 고등법원을 강화하고, 재정감찰 기관(chambres des comptes)을 두고 국왕의 자문 기관(palais de justice) 등을 두는 등 행정 기구를 체계화했다. 이런 정책을 통해 그는 단순히 신의 대리자로서 권력을 움켜쥐었던 교황과 차별하여 법률적 정의를 실현하는 왕으로서의 이미지를 구축한 것이다. 그의 이런 왕권 강화책은 아비뇽 유수라는 결정적인 사건을 겪으며 성공적으로 완수되었다.
교황청은 1377년 그레고리오 11세가 로마로 복귀할 때까지 아비뇽에 머물렀다. 아비뇽 유수 동안 교황은 모두 프랑스 출신이 선출되었고, 교회의 요직에는 프랑스 출신의 성직자가 선출되었다. 그레고리오 11세가 로마로 복귀했으나 아비뇽 시절을 겪으면서 발생한 교회의 혼란은 끝나지 않았다. 1378년 이탈리아 인 우르바노 6세가 새 교황에 선출되자 프랑스 추기경들은 이에 대해 무효 선언을 하고 프랑스 출신인 클레멘스 7세를 대립교황으로 선출했다. 이후 교회는 40년 동안 분열기를 맞게 된다.
아비뇽 유수는 교황권의 몰락을 상징하는 사건이었다. 이후 교회는 다시 중세 시절의 권위를 되찾지 못했다. 이 시기 동안 교회는 나름대로 재정과 관료 체제를 개혁하는 등 수많은 노력을 했지만 유럽은 절대 왕정을 중심으로 한 통일 국가로 나아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