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트룸
안희연
맡기러 오는 사람이 있고
찾으러 오는 사람이 있다
나는 프런트에 앉아
그들의 마음을 접수하는 일을 한다
다른 계절을 찾아 여행을 떠나려고요
지겹도록 제 자신이라는 사실을 벗고 싶어요
오늘은 맡기려는 사람이 왔다
나는 그에게 열쇠가 든 흰 봉투를 건넨다
문은 잠겨 있지 않지만 잠겨 있다고 믿는다면 열쇠가 필요할 것이다
방 안에는
못 하나
옷걸이 하나
의자 하나
이제 당신은 당신을 벗어 벽에 걸어둘 수 있다
투명해질 수 있다
물고기가 파도에 지치면 어떻게 되죠
시간에 쪼아먹히는 기분이 들어요
마음의 유속을 따라서
모든 반죽 이전에 손이 있다면 손이여,
나를 처음부터 새로 빚어줄 순 없는 건가요
당신이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먼 곳까지 떠내려가 볼 수도 있다
방문 목적에 따라 방의 구조는 재배열된다
색을 먼저 보고자 하는 이에게는 색을
형태를 먼저 보고자 하는 이에게는 형태를 먼저 보여준다
몇 시간이든 원하는 만큼 머물 수 있지만
방 안의 어떤 물건도 밖으로 가지고 나갈 수는 없다
당신은 들어올 때와 똑같은 모습으로 방을 나선다
다만 당신의 손은 어둠의 조도를 맞추는 방법을 배웠고
믿음이 두 눈을 가릴 때에도 묵묵히 그 일을 한다
ㅡ 반연간 시와비평전문지 [포엠피플] 2024 여름호 특집 '어제와 내일 사이에서 만난 시인' 10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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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감상
코트룸/ 안희연
정상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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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24 0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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