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9년 10,26 사건 이후 야당 정치인들이
수권역량을 갖추지 못하였고 아직 한국 사회에서 경제개발이 민주화 보다는 우선이라는 시대적 공감대가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1980년 5.17 군사정변 일어나 새로운 정부가 탄생했으나 불안정한 상황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해 투자 심리가 위축되는 등 다양한 요인이 겹쳐서 1980년에는 경제성장률이 급격히 감소했다.
1980년 격변의 정치를 정리하면
5월 8일• 전국 23개 대학생들, 계엄령 해제와 노동권 보장 등을 요구하며 시위
5월 14일• 서울시내 30여 개 대학 학생들, 도심에 진출 가두시위.
5월 17일• 최규하(崔圭夏) 대통령, 전국에 비상계엄령 선포. 모든 정치활동 중지, 정치 목적의 옥내외 집회와 시위 금지, 전문대학 포함 각 대학의 휴교 등.
5월 18일• 광주에서 학생 · 시민의 대규모 시위 발생.
5월 27일 • 계엄사령부, 계엄군 출동시켜 광주 학생 · 시민들의 시위 진압했다고 발표.
5월 31일• 정부,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國家保衛非常對策委員會) 설치. 의장 : 최규하 대통령, 상임위원장 : 전두환(全斗煥) 중앙정보부장서리.• 계엄사령부, 광주 시민 · 학생 시위에 대한 무력진압으로 인한 사망자 170명으로 발표.
6월 19일• 계엄사령부, 대학 휴교령을 휴업(休業)으로 변경하는 계엄포고 11호 발표.
8월 16일• 최규하(崔圭夏) 대통령, 학생소요 · 광주사태에 대한 책임으로 사임 발표.
8월 27일• 통일주체국민회의, 장충체육관에서 제11대 대통령으로 전두환(全斗煥) 예비역대장 선출. 총 투표자 2,525명 중 2,524표 획득.
9월 1일• 전두환(全斗煥) 제11대 대통령 취임.
9월 2일• 새 내각(內閣) 발족. 국무총리 남덕우(南悳祐), 부총리 신병현(申秉鉉) 등.
9월 25일• 국회 및 모든 정당 해산. 새 국회 구성 때까지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에서 국회 기능 대행.
9월 29일• 정부, 새 <헌법안> 공고. 구속적부심 부활, 연좌제 폐지, 대통령 7년 단임 간선제 등.
10월 22일• 새 헌법안에 대한 국민투표 실시. 투표율 95.5%, 찬성 91.6%로 제5공화국 헌법 확정.
10월 27일• 정부, 제5공화국 헌법 공포. 정당 · 국회 해산,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폐지, 국회기능 입법회의 대행.
11월 3일• 육군고등군법회의, 김대중(金大中)에게 사형 선고.
11웧 17일• 정부, 일간지 등 19개 언론기관 통폐합 결정.
1980년 탄광촌 생활은 더욱 어렵게 되었다.
석탄 채광의 우선으로 자연환경이 오염되자 어린이들의 정서교육에 큰 문제가 생겼다. 고한 갈내국민학교 김ㅇㅇ 교장은 석탄때문에 산과 강이
검게 변하는 시기에 저학년은 미술 시간이면 산과 강물을 검은색으로 칠하는 어린이가 많다고 했다.
광부들은 이런 자녀 교육 문제를 놓고 그들이 겪는 작업 악조건· 저노임 등 만큼이나 가슴 아파하고 있다.
탄차
탄차가 한번 지나가면
먼지가 많이 난다.
먼지 나면
우리들은
마음속 깊게까지 시커먼해진다.
사북국교 4학년 ㅇㅇㅇ
탄광촌 어린이들이 보고 듣는 것은 단조로운 탄광 생활에 관한 것뿐이다. 꼬마들은 흙더미를 굴처럼 파 놓고 나무 꼬챙이를 꺾어 동발처럼 세운 뒤
모의 갱을 만든다.고무신에 흙을 담아 손으로 밀어 굴속을 들락거리며 덜커덕, 덜커덕 탄차 지나가는 흉내를내며 논다."아버지가 뭐하시지."
"사끼야마야"
갱내에서 일하는 선산부라는 얘기다.
선산부란 선임 생산 인부, 후산부란 후임 생산 인부의 약어고 보통 한 막장에 선산부 1명에 후산부 3~4명이 투입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