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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우리가족들의 공자그리고 태산이야기 출발일자 ☞ 7월 18,25. 8월 1, 8, 15 초청경비 ☞ 449,000원(단체비자35,000원별도) 노팁! 노옵션! 노쇼핑! 여권사본(팩스)02-2064-2838 최소출발인원 20명이상시 진행됩니다 문의 및 예약(대)1577-4215, 010-5271-2838 1.공자님 앞에서는 황제도 무릅을 꿇는다!!!
▒ 공자님 고향에는 철로가 못 들어온다 ▒ 곡부는 예로부터 큰 도시였으나, 철로가 통과하지 않아 경제발전이 잘 이루어지지 않었다. 성스러운 곡부에 철로가 들어오면 지맥[地脈]을 끊는다는 생각 때문에 철로를 못 들어오게 했던 것이다. 그래서 태안에서 남쪽으로 내려오던 철로는 "ㄷ"자 모양으로 곡부를 피해가고있다.
▒ 자금성에 뒤지지 않는 공묘의 위용 ▒
곡부의 공묘는 공자의 위패를 모셔놓고 제사지내는 중국 최대의 사당이다. 공자의 업적을 표현하는 데 하나의 칭호로는 부족해서 지성묘[至聖廟],문묘[文廟],대성전[大成殿]이라는 많은 이름을 붙였다. 대성전은 북경의 자금성의 태화전,태안의 대묘와 함께 중국의 3대 고궁으로 불린다. 특이한것은 이 궁전들은 중국황제의 상징인 기둥이 모두 황금색으로 용이 승천하는 모습을 새겨놓고 있다는 사실이다. 옛날 역대황제들이 이곳 대성전을 들렸을때에는 제자들이 대성전의 황금기둥을 비단으로 가려서 황제들의 마음이 상하지 않도록 했던 이야기가 전해온다.
▒ 세계에서 가장 큰 가족묘지 공림 ▒
공자死後 그 후손들의 가족무덤인 공림은 면적 60만평에 공자직계가족의 무덤수만 10만기나 되는곳이다. 공림 입구의 지성문을 들어가면 수수교[洙水橋]가 나온다. 이 다리가 놓여있는 수수와 관련된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 공자는 73세가 되자 죽음을 예감했다고 한다. 공자는 묘지의 풍수가 후손의 미래에 직접 관련이 있다고 생각하고 친히 돌아다니며 묘자리를 찾았다. 결국 곡부 성 부쪽의 사수[泗水]근처의 18경[頃]의 토지로 결정했다. 공자의 제자인 자로는 이곳의 풍수는 좋으나 앞에 강이 없습니다"라고 했고 이에 공자는 "바쁠것이 없다" 진나라의 한 사람이 강을 파줄것이다"라고 하면서 이곳을 묘역으로삼았다
2.하늘아래 뫼-태산, 중국의 황제를 유혹하다
▒ 태산 각석문[刻石文]에서 역사의 별들을 만나다 ▒
태산이 주는 감흥은 어느 곳에서보다도 강렬하고 진하다. 수 많은 역사의 인물들이 올랐던 역사의 현장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곳에서 그옛날 이곳을 올랐던 사람들과 시간의 거리를 뛰어넘어 대화를 나눠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에 흥분하기에 충분한 곳이다. 태산에서 그러한 흥분을 일으키는 첫 번째 장면을 무엇일까? 그것은 바위에 새겨진 글씨들이었다. 태산의 바위란 바위에는 수많은 세월동안 중국 역대의 제왕과 정치인, 시인들이 남긴 글들로 빈자리가 전혀 없다.너무나 많은 글씨가 새겨져 있기 때문에 자연훼손이라고 할 사람도 있을지 모르지만, 이 경우는 절대로 그런 것 같지않다. 선사 시개인이 남긴 암각화를 자연훼손이라고 하지 않는것처럼....
현재 태산 일대에 새겨져 있는 각석은 1,800여곳 이라하는데 그 가운데 비석이 800여 개, 마애석각이 1,000여개 정도나 된다고 하니, 정말 수없는 사람이태산을 사랑하여 남긴 생채기였다고밖에 표현할 수 없다 각석의 대부분은 역대 황제가 봉선의식을 행할때의 시문,사묘를 창건하거나 중수할 때의 기록과 태산을 칭송하는 시문들이다, 그 글들은 수천자로 이루어진 장편도 있고, 한 글자로 된것도 있으며,황제의 것도 았고,이름 없는 민초의 것도 있다. 한무제는 후대인들이 자신의 업적을 평가하라고 무자비[無字碑]를 남겼다. 마치 당대의 여걸 측천무후와 마찬가지로....주은래의 부인인 등영초의 글시도 있다. 그녀는 "태산에 올라 조국의 강산을 내려본다"고 썼는데, 그 글에서 몸서리칠 정도로 감개무량하는 그녀의 모습을 읽어낼 수 있다.
태산에 쓰여진 글중에서 가장 눈길을 끈 글씨는 청대 강희제 시기에 쓰여진 "과연[果然]이라는 한 마디였다. 이 글을 남긴 묵객은 과거의 선인들이 좋은 말을 모두 골라썼기에 할말이 없어서였을까? 아니면 문학적 재능이 부족했던 탓일까? 일물일어설이라는 말이 있듯이 백마디 말이 무슨 필요가 있겠는가? 숨이 막혀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을 그 한 마디는 태산을 평가한 어떤 글보다도 적절하게 느껴진다. 중국의 시인들이 이곳 태산을 오르지 않았을 리 없다. 1,200년 전 이곳에 올랐던 당대의 대표적 시인 두보와 이태백의 시를 통하여 태산을 보는 것도 또 다른 즐거움이 아닐까?
- 망 악[望岳]- 두보
태산은 과연 얼마나 큰 것인가? 제*노의 두 지방에 걸쳐 푸른 모습이 끝이 없다. 조물주는 신묘하고 빼어난 기운을 모아놓앗고 태산의 남쪽과 북쪽은 아침, 저녁이 다른데 첩첩 구름이 생겨나니 마음은 깨끗이 씻기고 눈 가장자리로 철새들이 들어온다. 반드시 산꼭대기에 올라 뭇 산들이 얼마나 작은지를 내려다보리라
이 시는 두보가 태산의 정상까지 꼭 오르겠다는 마음자세를 표현한 것이다. 아마도 두보는 "공자께서 東山에 오르고 나서 노나라가 작다고 여겼고, 태산에 오른후 천하가 작다고 여겼다" 는 말을 몸소 체험하려 했던것같다. 이백은 태산의 아름다운 계곡에 대한 느낌을 표현했는데, 그의 시를 읽으니 또다시 태산을 오르는 듯한 착각이 든다
-유태산[遊泰山]-이백
초여름 사월 태산에 오르는데 가는 곳마다 돌이 평평하여 현종께서 가시는 길이 열려있다 여섯 마리 말이 만길 골짜기를 지나고 산골짜기 구불구불 둘러있다 말발굽의 자취는 푸른 봉우리를 두르고 지금까지도 푸른 이끼에 가득하다 폭포 물줄기 높은 봉우리에서 흩뿌리고 물 경사 급하니 소나무 소리 애달프다. 북쪽을 보니 병풍같은 봉우리 기묘하고 절벽은 동쪽을 향해 꺽여 있다. 동굴 문의 돌문 닫히고 땅바닥에서 구름과 벼락이 일어난다 높이 올라 동쪽의 봉래섬과 영주를 바라보며 휘황찬란한 금은대를 상상한다. 남천문에서 휘파람 길게 부니 만리의 깨끗한 바람이 달려온다 옥녀 너덧이 구천에서 옷자락 나부끼며 내려와 함박 웃음을 머금고 흰 손을 내밀어 내게 유하배를 건넨다 머리 숙여 두번 절하고 술을 마셨는데 신선의 재질 없음이 부끄럽다. 그러나 초연하게 우주를 작게 여기고 썩은 세상을 버리는데 어찌 근심하랴.
중국인들은태산이라는 말만 들어도 흥분한다. 아주 높은 산은 아니지만 광막한 평원지대에서 생활했던 화북인들에게는 태산이 명산중의 명산으로 꼽히는 것은 당연하다. 비록 높이 1,532m 불과 하지만, 사실 히말라야나 알프스를 보았던 사람이 태산을 본다면 그냥 그저 그런 산으로 여길 수 있다. 이것 또한 황토대지에 갇혀서 살아온 중국인들의 세계관이 아니겠는가?
역대 제왕들에게는 평생 이곳에 올라 봉선의식을 행하는 것이 꿈이었다 하늘 가까이 가서 신과 대화하고 싶어서 였다. 진시황도 올랐고,한무제를 비롯 72명의 황제들이 올랐던 태산- 산으로서 의미보다 더 중요한 역사의 산실로서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는것이다 ▒ 태산에서 신권을 빌려 통치를 강화하려는 중국의 제왕들 ▒
윗 사진은 國泰民安 석각은 역대황제들이 泰山에 올라 봉선의식을 행하면서 泰山을 안고 있는 태안市의 뜻을 따서 泰[국태] 安[민안]으로 나라가 태평하고 국민이 잘사는 나라가 될 수 있도록 泰安이란 도시명을 지었던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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