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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퍼 리의 ‘앵무새 죽이기’
작가 ; 하퍼 리(1926-2016)
초판 ; 1960
플리처 상 ‘; 1961
앵무새 죽이기는 는 퓰리처 상을 수상한 하퍼 리의 소설로 1960년에 출판되었다. 출판 즉시 큰 인기를 모았으며, 현대 미국 소설의 고전이 되었다. 이 소설은 작가가 10세 때인 1936년에 그녀의 마을 근처에서 벌어진 사건과 작가가 가족과 이웃을 관찰한 것을 바탕으로 하여, 느슨하게 구성되어 있다. 소설은 공황기에 존경받는 변호사 핀치가 백인 여성을 성폭행한 혐의를 받는 흑인 남성 로빈슨을 변호하면서, 핀치의 가족과 동네에서 벌어지는 일을 핀치의 어린 딸 스카웃의 시각에서 그리고 있다.[1]
짐작은 가나 정확한 사인을 알 수 없는 봅 이웰의 죽음을 놓고 흑인을 변호했던 변호사와 마을 보안관 간의 의견이 팽팽히 맞선다. 죽음의 책임을 누구에게 지울 것인가가 중요한 안건이 된다. 이 부분에 대한 해석은 의외로 <앵무새 죽이기> 소설에서 잘 거론되지 않아 보인다. 인종 차별로 인해 유죄를 선고받은 흑인 톰 로빈슨의 무고한 죽음만 앵무새에 비유될 뿐, 봅 이웰의 죽음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지, 그것을 이해해 보고자 하는 견해는 좀처럼 찾아보기 힘들었다.
작가는 변호사 아버지의 입을 통해 앵무새 죽이는 일은 죄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고 말한다. 앵무새는 노래를 불러 우리를 즐겁게 해줄 뿐, 곡식을 축내거나 옥수수 창고에 둥지를 만들지 않고 그저 온 힘을 다해 노래를 불러준다는 이유 때문이다. 이 소설에서 앵무새는 배심원들의 인종 편견으로 인해 결백하지만 유죄 선고를 받은 흑인 톰 로빈슨을 말한다. 선량한 변호사는 앵무새를 죽음에서 지켜 주고자 편견과 싸워가며 열심히 변호했으나, 그를 끝내 살리지는 못했다.
그런 그에게 또 다른 ‘앵무새의 죽음’이 그를 혼란에 빠뜨린다. 흑인 로빈슨을 변호한 것 때문에 앙심을 품게 된 봅 이웰은 변호사의 어린 아들을 해하려다 자신이 살해당하고 마는 상황이 펼쳐진 것이다. 충분히 의심이 가는 살해자 인물이 있긴 한데, 그는 세상과 소통하지 않고 살고 있으나 아이들을 사악한 봅 이웰로부터 살려낸 이웃집 선한 인물, 부 래들리이다. 사실에 따라, 그를 법정에 세워 판결을 받기에는 마을의 앵무새를 또 한 마리 죽여야 하는 일이 생기게 된 것이다. 변호사는 직업적 정신에 따라 사건의 전모를 정확히 따져 문제를 해결하고 싶어 했고, 자기 아들이 연루된 살인 사건이기에 더 철저하게 조사하기를 원했다. 아들의 정당방위였는지 아니면 이웃집 부 래들리가 아들을 죽음의 위험에서 구해 내고자 대신 싸우다 살인에 이르게 되었는지 그 사이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고 고민한다.
그러나, 사건 현장을 보고 온 마을 보안관은 죽음이 죽음을 묻어버리게 하자며 봅 이웰의 죽음을 부 래들리 소행의 타살이 아닌 자신의 실수로 인한 자살로 몰고 간다. 그때, 어린 딸 스카우트는 보안관 아저씨가 하는 어른의 말을 이해한다는 듯 고민하는 아버지에게 “그건 앵무새를 쏘아 죽이는 것, 그런 종류였지요, 그렇죠?”라고 말한다. 무고한 부 래들리를 놓고 앵무새 죽이기를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딸의 입을 통해 강요받게 되는 것이다. 결국, 변호사도 딸의 말에 힘을 얻으며 소설은 그렇게 끝이 난다.
봅 이웰이라는 인물은 죽어 마땅한 쓰레기 같은 인간이다. 무죄한 흑인 로빈슨을 죽음으로 몬 장본인에다가 유죄 판결을 얻어내고도, 앙심을 품어 변호사 가족을 해칠 계획을 한다. 그래서 변호사의 아이들인 스카우트와 젬의 뒤를 쫓아 살인을 계획하다가 되려 자신이 죽음을 맞이했다. 타살이 아닌 자살로 이 살인 사건을 처리하려는 보안관의 의도는 봅 이웰로 인한 흑인 로빈슨의 불쌍한 죽음에 대한 보답이자 마을 주민을 대표한 양심의 가책으로 인한 결정 같아 보인다. 법정에서 이루지 못했던 정의를 어느 정도 보상해 보려는 마음이 아니었나 싶다. 보안관은 이 사건을 통해 흑인 톰 로빈슨 외에 마을의 또 다른 앵무새, 부 래들리가 죽도록 그냥 놔둘 수는 없었던 모양이다. 사악한 인간이 인과응보처럼 죗값을 치르듯 죽음을 맞이한 것을 당연하고 마땅하게 생각하는 것이 사람들 간의 상식 (그 어떤 편견보다 깨기 어려운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해도, 왠지 마음이 편치는 않다. 진리와 정의와 공명정대한 법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데서 오는 실망감은 둘째 치더라도, 어찌 되었든 사람들의 판단에 따라 이리저리 휘둘리는 앵무새들의 불안한 처지가 법정 앞에 선 또는 앞으로 서게 될 우리들의 자화상처럼 보이기 때문에 마음이 불편하다. 인간이 인간 자체를 판단한다는 것이 얼마나 믿을만하지 못한 일이고, 결국 인간이 만든 편견의 노예는 바로 우리 자신들이 되는 사실을 용납하기가 싫고 힘 들 뿐이다.
피고의 죄목이 명백히 증명되어도 배심원들의 편견이 한 인간을 유죄와 죽음으로 이끈다. 살인을 시도하려 한 누군가는 다른 누군가의 손에 의해서 되려 살인을 당하게 되었지만, 평소 그들이 가진 그 인간에 대한 편견이 그를 본인이 자처한 죽음으로 몰기도 한다. 인간의 편견은 무고한 자도 죽이고, 죄가 있는 자도 죽인다. 법보다 무서운 것이 인간의 편견이라는 생각만 깊이 든다. 바른 편견이든 비뚤어진 편견이든, 우리는 집단으로 자신의 기준에 따라 남을 판단하며 법정의 칼날을 휘두르며 산다. 때로는 그 칼날로 무고한 자를 베기도 하고, 때로는 그 같은 칼날로 편의를 봐 주기도 하면서 말이다.
앵무새 죽이기는 그래서 참 어려운 일인 것 같다. 사람들은 어떤 앵무새는 편견에 쌓여 염치 불고하고 죽이고, 또 어떤 앵무새는 주저하지 않고 죽이려 든다. 그것은 자신의 편견으로 죽은 앵무새를 추모하고 다른 앵무새를 살리기 위한 처사로 또 다른 앵무새 한 마리를 찾아 죽이는 것과 같다. 어떤 앵무새는 죽여도 좋고 어떤 앵무새는 죽이면 죄가 되는지, 소설을 읽고 난 나는 핀치 변호사의 혼돈처럼 앞이 뿌옇기만 하다.
인간의 생명이야 똑같이 소중하다고 본다. 그것이 죄인의 것이든, 그것이 무죄한 자의 것이든 생명을 죽이는 일은 죄, 라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다. 그러나 저자는 앵무새를 파란색 어치 새와 구분하듯 무고한 자와 그렇지 않은 자 간의 생명에 차별을 두고 있는 듯하다. 저자만이 아니라 세상의 보편적인 생각이 그럴지 모르겠다. 물론 봅 이웰과 같이 죽어 마땅한 파렴치한 인간이 세상에 없지 않고, 되려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많다. 그래서 빈 라덴이나 ISIS 테러단체들, 또 북한의 독재자 김정은같이 무고한 사람들의 피를 흘리게 한 인간의 생명에 우리는 당당히 총대를 겨눌 수 있는지 모르겠다. 소설에 나오는 마을의 미친개를 처리하는 주민들의 모습과 매우 유사하다. 미친개는 마을 주민의 안전을 위해 죽어야 한다. 명사수 변호사와 보안관은 늙고 미친개를 명중해 사살한다. 앵무새는 죽이지 말고,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 동물이나 인간은 죽여도 좋은 것이 이 책이 주고자 하는 메시지 전부일까? 사회에 아무런 쓸모없는 인간이나 사회에 해가 되는 인간은 인간 취급하지 않아도 정말 괜찮은 걸까? 인간의 관용과 아량은 거기까지만인가?
흑인 인권 문제에 관한 책을 읽으면서 인권에 대한 마음이 이렇게 불편해질 수가 없다. 인권을 쥐고 흔드는 것이 마치 인간의 권리로 착오 된 것 같아 염증이 나려 한다. 한 사람의 인권을 위해 또 다른 사람의 인권은 무시되어도 좋은 세상. 누구를 위한 누구의 인권인지. 인권의 미명아래 결국 좀 더 강한 자가 약한 자의 권리를 침해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집단을 이루는 어떤 공동체의 편견이라면 무시되어도 괜찮을 수 있다는 인간들의 집단 횡포가 생명을 놓고 죽고 죽이기를 일삼는 것이 두렵다. 무엇의 이름으로든 인간이 인간을 죽이는 것에 타당한 이유가 있을 수 있을까? 생명을 파괴할 만큼 우리가 누군가를 단죄하는 것에 충분한 정당성을 우리는 누구에게로 부터 부여받았는지 묻고 싶다. 생명의 파멸은 또 다른 생명의 파멸만을 요구하도록 우리 마음속에 편견의 씨앗을 심어주는 기제가 될까 우려스럽다.
이 책 때문에 인간의 여러 면을 다시 확인한다. 인간의 집단 편견이 자행하는 또 다른 범죄, 사실보단 자신의 지각과 판단에 따라 판결하는 뿌리 깊은 편견과 자존심, 불공정한 재판에 대한 만회로 봅 이웰를 인간쓰레기로 취급하며 사회에서 외면하는 주민들의 이중적 잣대, 봅 이웰의 어이없는 죽음을 죄의 대가로 대치해야 자신의 양심에 덜 가책을 받는 편리한 심리, 이웃을 위해 선한 싸움을 싸운 부 래들리 같은 인간을 살려줘야 한다는 마지막 남은 연민 내지는 뒤늦은 자각, 그 사이에서 무엇이 최선인지 갈등할 수밖에 없는 인간. 다양한 인간의 모습을 만나니 정신이 혼미하다. 그것이 우리 인간성의 한계이자 진실이라고 본다. 그래서 앵무새는 죽이지 말자고 우리는 계속 노래해야 할까? 우리는 언제 또 앵무새를 죽일 수 있는 완전하지 못한 존재이니까.
이 작품은 강간과 인종 차별의 심각한 문제를 다루고 있음에 불구하고, 따뜻하고 유머러스한 소설로 유명하다. 화자의 아버지인 애티커스 핀치(Atticus Finch)는 완벽한 변호사의 표본이자 도덕적 영웅으로 많은 독자들을 만족시키고 있다. 한 비평가는 자신의 글에서 이 소설이 준 충격을 설명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20세기에 《앵무새 죽이기》는 미국의 인종문제를 다룬 책 중에서 아마도 가장 널리 읽힌 작품이며, 이 작품의 주인공인 애티커스 핀치는 인종차별을 극복한 영웅으로서 가장 오래 기억될 것이다.”[2]
남부 고딕 소설이자 교양 소설로서, 《앵무새 죽이기》의 기본적인 주제는 인종 차별로 인한 불의와 무죄한 자의 죽음이다. 학자들은 저자가 미국 디프사우스의 계층 문제, 용기와 연민, 성 역할에 대한 주제에도 초점을 맞추고 있다고 보았다. 여러 영어권 국가에서는 관용을 강조하고 편견을 비난하기 위한 수업을 할 때 이 책을 학생에게 가르쳤다. 그러나 이 책의 주제에도 불구하고 책에서 등장하는 인종차별적인 언어를 사용하는 대사가 등장해 공적인 교실에서 다루지 말자는 운동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작가는 이 책이 출간될 당시에 많은 사람들이 그런 말을 흔히 사용하고 있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일부 독자들은[누가?] 소설에서 등장하는 흑인 인물에 대한 대우가 정당하지 못하다고 생각하여 불쾌한 심정을 드러냈다.
리의 소설은 최소 서른 개의 신문과 잡지에 감상문이 실렸고, 폭 넓고 다채로운 평가가 나왔다. 2001년에는 시카고 시가 전개한 독서 운동에서 꼭 읽어야 할 책으로 선정되었다.[3] 2006년에는 영국 사서들이 매긴 책 순위인 ‘모든 어른이 죽기 전에 꼭 한 번 읽어야 할 책’ 1위에 선정되었으며, 이 순위에서 2위는 성서였다.[4] 1961년 퓰리처상을 수상[5] 하였고, 1962년에 동명의 오스카 상을 수상한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그레고리 펙이 변호사 핀치 역을 맡은 이 영화는 로버트 멀리간이 감독을 맡았고[1], 시나리오는 호튼 푸트(Horton Foote)가 썼다. 1990년 이래로 소설에 바탕을 둔 연극이 하퍼 리의 고향인 먼로빌에서 정기적으로 공연되고 있다. 이 책은 리가 출간한 유일한 소설이며, 비록 그녀가 사람들이 책이 준 충격에 대해 언급할 때 꾸준히 반응하고 있기는 하지만 1964년 이후로 그녀는 어떠한 개인적인 광고도 거절해왔다.
하퍼리는 원래 앵무새보다 파수꾼을 먼저 썼었다. 출판 담당자의 수정권고를 받고 다시 쓴 게 앵무새 죽이기였다는건 이 책이 출간될 때 여기저기에서 나온 유명한 일화다. '앵무새'는 인종이라는 무거운 주제를 여자아이의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다. 그녀를 둘러싼 가족 이야기가 전개되며 묵직한 주제가 녹여져 오히려 작품 전반에 따뜻한 분위기가 사방에 퍼졌다. 처음 책이 너무 두껍고 번역도 옛날 버전이라(90년대에 나온 중고책 샀더니) 거부감이 컸으나 전적으로 스토리에 끌려 읽었었다. 그런 전작의 따뜻한 이미지가 좋아 파수꾼도 기대를 안고 읽었다.
책 후반부에 역자 후기에도 그렇고 각종 매체의 책소개에서도 찬사 일색이다. 그러나 내가 영미문학에 무지하고 미국 역사에도 무식해서 인지 나는 솔직히 앵무새보다 훨씬 별로였다. 작가가 여러가지 이야기를 한꺼번에 하려는게 강하고 과한 비유와 상징, 인용들이 무지한 사람들이 받아들이기 복잡하다. 사회 이슈를 반영한 성장 소설을 추구하다보니 너무 많은 이야기들이 담겼다.
도시에 살던 스카웃은 휴가를 맞아 고향에 온다. 그곳에는 자신의 삶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친 아버지 애티커스 변호사와 남자친구 헨리가 있다. 사랑했던 오빠가 요절한 곳에는 슬픔이, 흑인 가정부 캘퍼니아와 함께한 부엌에는 추억이 있다. 곳곳이 추억이고 간직하고 싶은 곳이었다. 그곳의 중심엔 스카웃 인생의 파수꾼, 양심으로 삼았던 아버지가 있다. 그러나 아버지가 흑백 차별을 주장하는 주민 조합에 있는 것을 본 후 분노는 극에 달한다. 여기서 분노를 표출하는 부분이 역사와 문학을 모르는 사람에게 낯설다. '강한 믿음의 존재가 내 믿음에 배신했다'는 상황은 공감할만하지만 스카웃이 아버지가 그 조합에 가입한 걸 본 후 작은아버지 핀치박사에게 가 논쟁한건... 과도한 인용에 인용, 번역체로 복잡하다.
아버지와 헨리가 인종차별 조합에 간 것은 그들만의 이유가 있었다. 헨리는 지역에서 존경받고 소외되지 않기위해, 아버지는 인구 수에 따라 정치력을 행사하는 시스템 속에서 흑인 수가 많아 무지한 이들이 득세해 마을을 마음껏 바꾸지 못하게 하기 위해 간 것이다. 결국 아버지와 딸의 갈등은 서로에 대한 이해로 봉합된다. 애티커스가 스카웃 안에 있던 자신의 이미지를 깬 것은 스카웃이 스스로 서게 만드려는 것이었다. 사람은 각자 자신의 의사를 피력할 수 있고 자신이 타인의 의지에 반한다면 왜 그런지 기준을 세우도록 가르치려한 것 같다. 여기서 이 글의 주제가 모호하다. 위선을 말하려는 것인지, 각자의 신념을 존중해 자신만의 기준이 있다면 타인의 의사표현을 존중하라는 것인지. 그래서 인종차별을 주장하는 이들도 좋을대로 하고 반대하는 사람들은 그에 반하는 논리를 가지고 있으라는 건지...... 거기다 오빠의 죽음에 대한 언급이 종종나오는데 글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 불분명하다. 왜 뜬금없이 종종 나오는지 모르겠다.
글 후반부(#17-19)로 가면 글쓴이의 통찰이 점점 부각된다. 글 중간 중간 '차일드 롤런드가 암흑의 탑에 왔다'가 반복 언급되는데 이 시의 전문을 알고 보면 흥미롭다. (이 시는 시인 로버트 브라우닝의 작품이란다.) 차일드 롤런드는 암흑 탑을 목표로 여행 중에 있다. 힘든 여정 끝에 포기하고자하는 순간 암흑탑에 서 있다는 걸 깨닫는다. 사실 차일드 롤런드는 이 모험의 끝에 앞서 떠났던 실패자들과 마찬가지로 자신도 실패할 것을 알고 있다. 실패하기위해 그 곳에 왔다고 고백한다. 그런데도 담대히 자신이 왔다고 나팔을 분다. 나팔을 불어 탑의 괴물에게 '차일드 롤런드가 암흑의 탑에 왔다'고 외친다. 역자는 '암흑의 탑'은 '자신이 가장 두려워 하는 무엇'이라고 설명한다. 이기지 못 할 것을 알면서 도전하는 무엇. 이것은 지난번 신경숙의 외딴방과도 연결될 듯하다. 개인 내면에 위치한 깊숙히 감춰진자아일 수도, 어두움 일 수도 있을 것 같다. 스카웃의 암흑의 탑, 외딴방은 무엇이었을까? 다양한 의견이 있을 수 있겠지만 나는 자기 자신만 옳다고 믿는 고집이거나 양심의 척도였던 아버지와의 결별과 홀로서기가 아닐까 한다.
뒷 부분 역자후기에 파수꾼 집필 당시 사회상 설명이 언급되는데 먼저 읽고 봐도 좋을 듯하다. 뭐든 알고봐야 감동이 두배 오는 것 같다.
(작가 - 하퍼 리)
하퍼 리(1926-2016)는 미국 앨라배마 주 먼로빌에서 1926년 4월 28일에 아마사 콜레만 리의 1남 3녀 중 막내딸로 태어났다.[2] 그녀의 아버지는 한 때 신문의 편집자와 소유주이었고, 변호사이었으며 앨라배마 주 의회에서 1926년부터 1938년까지 활동하였다. 어렸을 때, 리는 남자 같은 여자아이이었고 일찍부터 책을 읽기 시작하였으며, 학교 친구 그리고 이웃 친구와 즐겁게 우정을 나누었다. 그녀의 소꿉친구는 나중에 소설가로 활동한 트루먼 커포티이었다.[3]
먼로빌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후에,[4] 리는 1944년 몽고메리에 있는 여자 대학인 헌팅던 대학에 진학하여 여성 사교모임인 카이 오메가(chi omega)에 가입하고, 학생 잡지에 여러 편의 글을 쓰며 학내 유머 잡지이었던 "레머 제머"(Rammer Jammer)의 편집자로 활동했다.[5][6] 1947년 앨라배마 대학교 법과대학에 들어가 교환학생 자격으로 영국 옥스퍼드 대학에서 1년 간 유학을 했다. 1950년에 뉴욕으로 이사하고 본격적으로 글을 쓰며 동부항공사(Eastern Air Lines)와 영국해외항공(BOAC)의 예약 담당 직원으로 일했다.
여성이다. 본명은 넬 하퍼 리(Nelle Harper Lee). 남부 고딕 사조에 속하는 작가이다. 어렸을 때는 선머슴 같은 성격이었다고 한다.
<앵무새 죽이기>가 이 작가의 유일한 소설이기 때문에 이 작품을 빼면 별로 이야기할 거리가 없다. KKK 같은 인종차별 성향의 극우파 백인들에게 비난과 협박을 받아서 한동안 은둔생활을 했다는 소문도 있고, "<앵무새 죽이기>를 출판할 때 딱 한 번 도시로 온 이후로 40년 동안 도시에 나오기는커녕 시골 고향에서 평생을 보내왔던 것을 보면 그냥 세간의 시선 같은 걸 좋아하지 않는 것 같다." 라는 설도 있으나, 실제로는 영국과 뉴욕에서 8년 가까이 항공사에서 예약업에 종사했다. 사람들 상대로 하는 서비스업에 도시 직종 중 가장 세련된 항공사에서 일한 것이다.
소송 건으로 몇 번 언론에 오르곤 했지만 작품 활동과는 무관한 일이었다.
이후엔 수필이나 칼럼을 투고하며 소일하고 있었다. 아직 살아 있는 작가이니 나중에 뭘 또 내놓을지는 모르겠지만 이미 나이도 있고 해서 <앵무새 죽이기> 이상의 작품을 내기 힘들 거라는 게 중론이었다. 2011년에 밝혀지길 눈과 귀가 멀고 기억상실 증세를 보여서 양로원에 들어갔기 때문에 <앵무새 죽이기>가 정말로 생전 처음이자 마지막 작품이 될 가능성이 높아보였다.
하지만 2015년 2월 3일 뉴욕타임스 보도에 따르면, <앵무새 죽이기>의 후속작이 1950년대 중반에 이미 완성되어 있었으며 2015년 7월 14일에 출판된다고 해서 놀라움을 주었다. 무려 55년 만에 두 번째 소설이 나온 것이다. 제목은 <파수꾼(Go Set a Watchman)>. 놀랍게도 이 작품은 <앵무새 죽이기>보다 먼저 완성되었는데, 원고를 본 편집자가 "아이의 관점에서 다른 작품을 써보라"고 권했고 그 결과 나온 작품이 <앵무새 죽이기>였던 것. 앵무새 죽이기는 전세계적으로 4000만부가 팔렸고 1962년에 그레고리 펙 주연으로 영화로도 나왔는데 한국에서는 알리바마 이야기라는 해괴한 제목으로 소개된 바 있다.
스티븐 킹은 "처음에 너무 대박을 쳐서 다음 걸 못하는 사람"이라고 언급했다. 사실 킹 같이 다작을 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리를 이해 못하는 게 당연할 수도 있다. 실제로 하퍼 리 본인도 몇 번 소설을 쓰긴 썼지만 도로 밥상 뒤집기를 시전했던 일화를 보건대, 작가가 완벽주의 성향이 강해서 작품을 완성시키지 못한 듯하다. 그 외에 본인이 "<앵무새 죽이기> 때처럼 언론의 주목에 시달리기 싫고, 했던 이야기를 또 하는 건 안 하겠다." 라고 했던 걸 보면, <앵무새 죽이기> 때문에 지나친 관심에 시달린 데다가 다음 작품에 대한 강박관념 때문에 차라리 쓰는 걸 포기했던 것 같다. 그 탓에 1950년대에 써둔 후속작 <파수꾼>을 2015년에서야 출판하게 되었다.
그런데 파수꾼은 논란이 많은데 앵무새 죽이기에서 인종차별을 성토하던 주인공의 아버지 애티커스 핀치가 ‘파수꾼’에서는 인종차별주의자로 나오기 때문이다. 나이 90에 달하는 작가 마지막 작품이 된다고 하여 화제 속에 일단 책은 초반부에 많이 팔리고 있긴 하지만 평은 그리 안 좋다. 무엇보다 1950년대 쓰던 소설을 지금 보자면 인종차별을 긍정하는 반응이기 때문...
그러나 파수꾼은 사실 앵무새 죽이기의 후속작이 아니라 초고로, 과거 이것을 읽어본 편집자의 의견을 받아들여 새로 다시 쓴 것이 바로 앵무새 죽이기였다고 한다. 앵무새 죽이기가 파수꾼 프리퀄 그리고 파수꾼은 따로 출간할 생각도 없이 수십년 동안 잊혀져 있다가 우연히 원고가 다시 '발견'됨으로써 출간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이 과정과 관련해서는 고령으로 요양원에 들어가 있는 하퍼 리의 온전치 못한 건강 상태를 악용, 이 책으로 금전적 이득을 보게 될 이들이 억지로 밀어붙여서 출간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혹이 제기된 상황이다. '앵무새 죽이기' 55년 만의 후속작 '파수꾼' 논란 전모
여담이지만 트루먼 카포티와 상당히 친한 사이였다고 한다. 그래서 카포티의 생애를 다루는 작품엔 반드시 등장한다. <앵무새 죽이기>에서 주인공 스카웃의 친구인 딜의 모델이 바로 카포티였다고 하며, 카포티 역시 자신의 첫 소설에서 리를 모델로 한 캐릭터를 등장시켰다고 한다. 또한 <앵무새 죽이기> 영화판 주연을 맡았던 그레고리 펙하고도 친해져서 평생 친구로 지냈다고 한다.
2016년 2월 19일(현지시간) 향년 89세로 숨을 거두었다.[1]
첫댓글 책은 못 읽었지만 영화라도 찾아보고 싶어요.
앵무새 죽이기는 제가 잘 아는 걸로 착각한듯 .
글을 읽어보니 전혀 알지 못하는 내용이었어요.
선생님의 글을 읽고
영화 "앵무새 죽이기"
를 보느라 잠을 설치고
근무하느라 오늘 좀 힘이 들지만 마음은 뿌듯합니다.
고맙습니다..^^
앵무새 죽이기 영화보면서 인권을 쥐고 흔드는 것이 마치 인간의 권리로 착오된 것 같아 불편했던 기억이 납니다.
다시 한번 보고 싶은 영화입니다.
늘 문학의 세계로 이끌어주시는 선생님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