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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장 현대시조 비평
1. 현대시조의 태동과 발전 ― 광복 40년의 조감도
1) 해방 전후의 시조 상황
3 1운동 이후 일제는 수습책의 일환으로 문화정책을 표방하였다. 그러나 세계 2차대전을 서두르고 있던 그들은 급기야 조선어 말살 정책을 펴기에 이르렀다. 따라서 동아일보와 조선일보가 폐간되고 <문장>지도 폐간되었다. 우리의 언론과 출판 및 문필활동은 완전히 암흑기에 처하게 된 것이다.
개화기부터 불리워지기 시작했던 신시조의 애국적 열정과 망국의 설움도 더는 노래할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시조 혁신의 주역이었던 이병기도 투옥되었다. 그의 <홍원저조>는 "묵직한 철책문이 덜그럭 닫히는고나"로 시작된 25수의 시조로써 함흥 감옥에서 씌어진 작품이다.
이러한 상황속에서 우리는 8 15해방을 맞았다. 비록 타율적인 힘에 의하여 맞게 된 해방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은 민족 역사의 소생이었으며 時調史의 일대 전환점이 되었다.
시인들은 오랜 칩거에서 풀려나와 감아두었던 붓을 손질하고 해방된 감격을 노래하였다. 그러나 좌우익의 심한 대립과 갈등으로 사회는 혼란하였으며 무정부 상태가 계속되었고 마침내 남북 분단이라는 비극을 맞게 되었다. 해방의 감격도 순간에 그치고 만 것이다.
그후 1948년 민족 진영에 의해 정부가 수립되고, 위세를 떨치던 좌익 문학단체도 정비되었다. 그러나 6 25까지도 문학활동을 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지 않은 非詩的 시기였다. 그리고 시조도 침체와 답보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이러한 시기에 시조를 이끌어간 시인들은 이병기, 이은상, 조운, 이호우, 김상옥, 장하보 등이었다. 특히 이호우, 김상옥, 장하보는 1939~1940년에 걸쳐 <문장>지 추천을 받았으나 활동할 수 없었던 유복자들로써 그들의 역할은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해방전의 암흑기와 6 25전쟁까지의 공백기를 메꾸고 1950년대로 이어주는 과도기의 교량적 역할을 담당해야 했기 때문이다.
이호우는 가람과 노산을 수용하면서도 자연이나 예술지상주의의 베일에 숨지 않고 가열한 시정신과 투철한 삶의 의지로 관념적 낭만주의를 개척하며 시조의 음률형식을 자유시적 기능으로 살려나갔다. 그리고 김상옥은 시조의 형식 안에서 무한한 창조의 가능성과 개성을 꾸준히 천착해 보였다. 이때 《초적》(1947)의 간행은 시조의 형식미학을 확인해 주는 계기가 되었으며 이 두 시인의 영향은 이후의 시조에 계속 미치게 되었다.
또한 장하보의 섬세한 언어 조탁과 정확한 언어 구사의 성실한 작시 태도를 간과할 수 없으며, 이영도의 등장은 해방후 첫 신인이라는 의미 이상으로 그 이전의 여류시인 --김오남, 장정심, 오신혜--들이 미치지 못한 여성 특유의 맑고 경건한 계시주의와 전래적 기다림의 사념을 분재해 내는 탁월한 솜씨를 보였다. 해방전에 씌어진 작품들이 이 무렵 햇빛을 보기 시작하였다. 조주현의 《조운시조집》, 정인보의 《담원시조집》, 이병기의 《가람시조집》(중판), 양상경의 《출범》, 정훈의 《미들령》, 이희승의 《박꽃》등이 간행되어 시조의 활성화와 발전에 기여하게 되었다.
《조운시조집》은 당시 일급 시인들도 어깨를 같이 할 수 없을 정도라는 찬사를 받았다. 삼장 형식에 시상을 펼치는 시재가 뛰어났으며 특히 3행이나 6행의 배행(配行)에 묶이지 않고 호흡이나 의미 단위에 따라 배행한 기사형식은 시조계의 첫 시도로서 가람시조가 보인 언어 감각과 아울러 시조 혁신 의지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해방 공간에는 신시조․혁신시조․현대시조들이 공존하고 있었고, 그것은 타분야와 마찬가지로 그 시대의 한 특징이기도 하였다. <우정록> (양주동 작)은 각 시인들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노래하고 있다.
육당의 '박달나무', 담원의 '인절미떡', '난초'가 가람인가? '봄구름', '무명옷', '암고란'은 누구 누구? 여러 < > 다 갖은 노산을 '늠실바다'라 하리라.
이러한 특성과 경향들이 후대의 시조에 수용 환원되면서 현대시조의 발전이 도모된 것이다.
2) 전후의 개화
현대시조에 있어서 1950년대는 매우 중요한 시기였다.
이미 해방 전야부터 잉태되어 오던 비극의 씨앗이 해방된 지 5년만에 6 25의 전란을 일으킨 것이다. 동족상잔의 비극은 일제치하의 고통과는 다른 것이었으며 더욱 비참한 것이었다.
국토는 초토가 되고 국민은 심한 불안과 죽음의 공포 속에서 살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나 6 25의 가혹한 시련과 참담한 현실은 시조에 새로운 변신의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어쩌면 이 당시의 시조는 전장의 포화 속에 사라져간 이름 모를 병사들의 급박하고 애통한 가슴에서나 있었는지 모른다. 전후의 비참한 양상도 마찬가지였다. 노산의 <너라고 불러보는 조국아>, <고지가 바로 저긴데>는 이러한 시대적 배경을 띠고 이루어졌으며 선도적인 것이었다. 아무리 시조가 서정시의 특성을 지닌다고는 하나, 항상 정적인 문학으로만 머물러 있을 수 없었으며 현실 역시 외면할 수 없었다.
최성연의 <핏자국>은 현실을 직시한 체험의 진실된 표현이었다. 전쟁의 체험이 점차 시화(詩)되기 시작한 것이다. 최성연이 새로운 소재, 새로운 표현법을 보이며 강한 주제의식으로 시조를 썼다면, 박재삼의 <강물에서>는 전통적 시정신으로 한국적 서정세계를 재현하며 구술적 어법으로 공감대를 형성하였다. 정소파가 청징한 시상으로 천의무봉한 서정세계를 보여주었다면, 장순하는 지적 바탕 위에서 명확한 언어 구사를, 최승범은 고전적 풍격과 감각적 표현을 보여준 것이 각각의 특징이었다. 역사적 현실은 마침내 송선영에 이르러 현실 서사의 시적 승화가 이루어졌으며, 현대시조의 한 영역을 개척했다고 할 수 있다.
사르르 눈감으면 흰 고지가 저기인데
쓸쓸히 산화해간 백조여 너 지금 어디?
피어린 지도를 안고 혈서쓰던 정열이여.
<설야> 중에서
<설야>와 <휴전선>은 "우리의 불행한 시대가 낳은 심각한 작품"으로서 문학이 인생의 표현이며 시대의 반영이라 할 때, 이 시조는 시대적 산물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내적 성숙과 발전이 진행되는 동안 학계 일각에서는 논쟁이 전개되었다. 이른바 제2의 시조 논쟁이었다. 제1의 논쟁은 1920년대 카프문학파와 국민문학파의 논쟁이었다.
육당의 <백팔번뇌>로 비롯된 이 논쟁이 결과적으로 시조가 민족문학의 정통으로서 전통시의 위치와 기반을 확립시킨 시조부흥론이었다면, 1950년대 중반 제2의 논쟁은 시조형식의 현대문학적 기능에 대한 회의론과 긍정론의 대립이었다. 학자간의 논란은 문단적 관심사로 확대되었고 창작 실제상의 문제와 작품화된 시조들의 실상은 긍정론의 이론적 뒷받침에 의해 일단락되었으나 부분적으로 제3의 논쟁도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이 때 시조 창작을 겸한 당대의 이론가였던 이태극의 시조에 대한 이론적 확립은 이후의 시조 발전에 크게 기여하게 되었다.
한편 시조 시인들은 자신의 문학적 성취뿐만 아니라 시조의 현대시적 가능성을 구현해야 한다는 내외의 압박을 받게 되었다. 그런데 이호우의 《이호우 시조집》, 이영도의 《청저집》, 정소파의 《산창일기》, 최성연의 《은어》와 같은 성숙된 시조집이 나옴으로써 시조단은 왕성한 의욕과 무한한 가능성을 보여주었으며 이러한 성과들은 시조사적 의의에 한 획을 긋고 있다.
이호우의 완숙한 경지를 보여주는 작품,
꽃이 피네 한 잎 한 잎
한 하늘이 열리고 있네.
마침내 남은 한 잎이
마지막 떨고 있는 고비
바람도 햇볕도 숨을 죽이네
나도 아려 눈을 감네.
<개화>는 그의 대표작일 뿐만아니라 현대시조의 대명사로서 전통시의 금자탑을 세운 작품이었다.
1960년대에 접어들면서 시조는 1950년대의 연장선상에서 개화기를 맞는다.
박경용은 시조의 음률에 충실하면서 능숙한 솜씨로 전통적이며 풍아한 멋을 보였으며, 정완영의 경우는 <애모>가 보여주듯이 언어가 제자리를 찾음으로써 결구되는 외적 완결성과 더불어 동양의 유 불 선에 깊이 혼효되어 있는 시상의 유연성과 관조적 세계가 독보적인 것이었다.
그리고 전쟁 소재를 자주 다룬 이근배의 시적 고향은 조국이었다. <산하일기>의 오열과 지향은 여기에서 비롯되며 휴머니즘을 바탕으로 한 자유 정신은 <패랭이 꽃>의 세계에 잘 나타나 있다. 상실된 것, 약한 것, 슬픈 것에서 촉발되는 정서가 세련된 율감으로써 삶의 내면에 닿고 있다. 그는 시조가 정형시이면서 자유시임을 증명해 주었다. 김제현은 시조의 형식을 오히려 산문적 호흡으로 이끄는 독자적인 시조로 이목을 끌었다. <도라지꽃>, <어제표> 등의 작품은 그런 면에서 잊혀질 수 없는 작품들이다. 이상범은 병영의 체험 소재를 시화했으며 이우종, 유성규, 배병창, 이우출, 김준 등의 시인들이 일상적 서정과 無垢한 정서 그리고 분단의식 등을 안정된 형식속에서 노래하는 서정적 특성을 보였다.
1955년 《현대문학》이 창간되고 동아일보 현상문예(시조)가 부활되었다. 《문장》지 추천제도 이후, 사회적 공인제도에 의해 신인이 배출된 것도 이때부터였다. 그러나 각 신문의 신춘문예현상모집에 시조가 부활된 것은 60년 전후였으며 《현대문학》의 추천은 박제삼, 정완영, 김제현 등 3명 정도였다. 관문도 좁고 늦게 열렸으며 발표 지면도 한정되어 있었다.
3) 격동기의 시조와 시인
세계사의 한 페이지를 기록한 한국전쟁의 상흔은 우리 민족의 가슴에 영원히 남게된다.
게다가 연대 초두부터 4 19와 5 16의 역사적 격랑을 겪은 1960년대는 그 후기에 이르면서 물질주의의 팽배와 사회적 모순으로 가치관의 혼란이 야기되고 정신적 황폐화를 가져왔다.
따라서 시조의 경향도 현실과의 대응에서 새로운 반응을 보였다. 물론 이전에도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일군의 시인들에 의해 시조의 전래적 작시법에 대한 반성과 현대 시론적 접근 방법의 모색이 있었다.
서벌은 낭만적인 순수 서정을 보였으나 연가적 발성법을 지양하고 개인적 체험을 전체적 체험으로 확대하는 시법을 체득하고 있었다. <낚시심서> 등 내연된 시상의 경작과 언어의 섬세한 정련은 그의 한 특색이었으며 대상과의 만남은 불교적 사상과 연류되어 있는 것이었다. 이에 비해 박재두는 향토 의식과 단절 의식을 공유하면서 이 양면 의식의 공시적인 표현의 일환으로 음률을 재구성해 보는 시도를 하였다. 종결어(미)를 명사로 대치함으로써 시상의 응축적 표현을 보이면서도 사념에 빠지지 않는 것은 단절 의식이 향토적 정서로 서정화되었기 때문이다. 조오현의 불교적 사상이 침윤된 시상의 깊이도 시조 문학에 심도를 더해 주었으며, 김월준의 상황 수용과 반문 그리고 일상적 소재의 시화 능력도 간과할 수 없는 것이었다.
서벌과 박재두가 중심이 된 《율》은 황희영과 김해성이 중심인 《청자》와 마찬가지로 시인들로만 구성된 본격적인 동인지였다. 두 동인지의 활동은 전국에 산재해 있던 동인 활동의 활성제 역할을 하였다. 기존의 동인지 활동과 새로운 동인 활동이 전개되면서 시조는 침체에서 벗어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었고 시조의 전국시대가 이루어졌다.
지금까지 현대시조의 새로운 혁신은 꾸준히 이루어져 왔다. 그러나 그 시도는 부분적이었으며 미온적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은 시조가 본질적으로 전통시로서 운문미학이기 때문이었다.
윤금초의 연작시조 <내재율>은 한국적인 사념이 정치하게 표현된 작품이다. 예민한 감각으로 포착한 한국적인 소재와 토속적인 언어의 어울림은 서민 의식의 깨어 있음을 잘 말해주는 것이었다. 그의 시정신은 사설시조의 시정신과 맥락을 같이 하고 있으며, <내재율>의 표제가 암시하듯이 시조의 음률을 내재율로 파악한 자각은 탁견이라 아니할 수 없다. 시조의 음률 형식은 처음부터 규격화된 외형률이 아니었으며, 민족의 심상이 자연스럽게 표출된 호흡인 것이다. 시조의 형식을 定型詩이면서 整形詩라 함은 이를 일컫는 말이다. 그는 <독감> 이후 철저한 현실 의식과 분방한 상상력을 표출하기 위해 단시조의 형식적 구속을 벗어 던진다. 강한 주제 의식이 고식적인 형식논리를 거부하면서 발견한 것이 그의 장시조였으며, 서민의식의 현실적 감응은 장시조의 역동적 기능으로써만 표현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이다.
시간적으로 구분할 때, 현대시조의 출발은 사설시조의 비중이 컸던 것이 사실이다.
1906년 <국풍4수>는 단시조 1수와 장시조 3수였다. 육당의 시조에 대한 인식과 부흥의 의지는 물론 민족문학의 발견과 전승이었다. 그리고 장시조의 인식과 자유시의 추구는 같은 선상에 놓여 있다. 신체시 <해에게서 소년에게>의 선행작업이 장시조일 가능성이 짙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의 문학(시)은 장시조가 자유시의 선험이었음을 인정하면서도 서구시의 방법론에 기울어져 민족시론의 정립에 소홀해 왔고, 장시조에 대한 관심도 미미하였다. 다만, 이병기, 조운, 김상옥, 장순하, 서벌, 김제현 등에 의해 실험적 단계를 거쳤을 뿐이다.
사설시조는 장순하 윤금초에 의해 본격적인 작업이 이루어졌고 1970년대의 한 경향으로 시조의 표면에 나서게 되었다. 현대시조의 문예학적 시각에서 형식의 다변화와 형식 속의 변혁은 많은 시인들에게 새로운 개성을 부여하였다.
유제하의 <변조>는 외부세계의 수동적 표현을 거부하고 자아의 내면적인 생명의식을 상징으로 표현하는 신표현주의 시작법을 보여주었으며, 강인한은 참신한 감성으로 새로운 서정의 세계를 열어주었다. 김정휴가 불교의 선을 시화했다면, 진복희의 <부재>는 있음과 없음을 동일선상에서 인식하고 있는 동양적 사유를 보였다.
4) 70년대의 시조 양상
한국 현대사에서 70년대는 기대와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었으나 많은 모순과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유신체제를 둘러싼 정치적 논란과 사회적 불신 풍조, 그리고 급격한 경제 성장에 따른 황금만능 풍조는 정신적 황무지를 만들었다.
4 19와 5 16을 예민한 감성을 지닌 당대의 젊은 시인들은 이러한 정신적 상황 위에 놓인 것이다. 따라서 시인들은 절망하였고, 실존적 삶의 어려움에 부딪치게 되면서 내면의 어두운 심상을 보여주게 되었다.
한분순은 이미지의 섬세한 조각으로 자유시와 동질감을 갖는 형식을 추구하였다. 그러나 그의 <옥적>과 <목숨> 등의 시편에는 벌써 서정이 음각되고 있음을 볼 수 있으며, 시각적 이미지와 청각적 이미지를 조화 있게 구조한 이우걸의 <새벽 종소리>는 여명의 기대적 상황보다는 거부의 몸짓과 공복의 추위가 현실적 상황으로 묘사되기도 하였다. 진실이 통하지 않는 사회에서 선량한 지성은 외로울 수밖에 없다. 열리지 않는 문 밖에서 시인은 언제까지나 공복의 종소리만 듣고 있는 것이다.
70년대의 여러 징후 가운데 박시교는 허무 의식을 바탕으로 한 한국적 리리시즘의 진폭을 보였다. 그것이 시인의 체질적인 고독과 인식 상황이며, 삶의 실체라 하더라도 한국인의 보편적 의식체계이기도 하다. 우리는 식민지 시대에 허무주의와 패배주의에 쫓겼고 6 25는 이를 심화시켰다. 그리고 오늘의 현실은 이의 진동을 일으킨 것이다. 리얼리티를 획득함으로써 더욱 공감을 얻고 있는 <바람집>은 이 시인의 대표적인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소위 70년대의 문학은 산문정신과 어둠이라는 단어로 특징지을 수 있다.
유재영의 <무변기>는 자연의 신비성보다는 현대인의 삶과 문명에 절망하고 인간적 번민과 몸부림으로써 현실의 많은 문제들에 질문을 던지고 있다. 현대인의 고향 상실, 폐쇄적인 현실을 극복하기 위한 과거 지향의 소재와 추억의 언어들이 그것이다. 어떤 경향을 뚜렷이 하지는 않았지만 김남환의 인생론적 사유를 거쳐 나온 서정과 정해송, 정해원, 조병기의 감각과 시론적 이론에 선 시조들은 70년대의 완충지대를 이루고 있다. 이 외에도 박영고, 정시운, 허경만, 허일, 전원범 등과 김광수를 비롯한 《신서정》 동인들의 착실한 정진도 눈에 띄는 것이었다.
또 하나의 특징은 장시조의 본격적인 창작이다. 그만큼 서민의식이 고양되고 있었던 것이다. 풍자와 해학적 수법은 국문학상 장시조로부터 비롯되었다.
서벌과 윤금초의 장시조는 그 성질을 달리한다. 그러나 적극적인 관심과 성과가 70년대의 시인들에 의해 본격화되었다. 앞의 시인들과 그 궤를 달리하고 있는 김상묵의 작품들은 장시조의 정통으로서 시인의 철저한 비판의식과 도시 서민들의 삶의 이야기가 진솔한 표현을 얻어 공감대를 형성하였다.
내 예서 십년은 절어 살아도
서울은 아직도 멀고 가파른 데다.
일곱살쩍 여덟살쩍 그런 시절,
배꼽털이 유독 굵던 개건너 황뭐시나 목청크던 아무개가
괭이 걸음으로 슬금슬금 몰래 뒤로 다가 와서는
느닷없이 싸잡아 번쩍 쳐들던 아픈 귀랑,
그 알불알로 대롱대롱 매달린 채 <보이늬?> 하고 늘어지게 묻는 말에 얼른 <뵈유!>해도
한참을 뜸들여 찡하니 내려주던 그 <서울 귀경>은 그만큼 귓등 얼얼하고 콧마루 시큼한
눈물속에서도
빙긋이 와 물리는 웃음같은 게 밑가슴에 은근슬쩍 고소하더니
이날, 내 아예 여기, 처자식, 몰고와서 솥 걸고 머리 뉘는 세월 뒤로 늘 그러리라고, 정
작 입이 아프도록 줄창 웃어보아도 웬일로 웬일로 노상 얼얼한 속은 그 내력 모를 혼돈
과 함께 떠나질 않고,
정말로 해가 뜨고 진 건지, 거짓말 같은 나날.
하루 하루가 그저 뻐근하게 고달프고 황황스럽다.
서울은, 남헌티 귀잽힌 채루나
잠간 슬쩍 그짓말루 볼 때만 찬란한데가붜
<서울 귀경>
<서울 귀경>의 사설은 역설구조다. 입심도 좋지만 은유와 상징이 어렵지 않게 제 몫을 다해 주고 있다. 관념적(논리적) 언어가 끼어들 수 없는 우리말은 오히려 주석을 달아야 할 정도이다. 읽기조차 힘든 말투와 못생긴 글씨의 육필시집 <토사> 속에 한국의 현대사와 민족사가 같이 숨쉬고 있으며 우리말로만 교육되고 훈련된 이들의 시편에서 시어로서의 국어의 무한한 가능성을 찾게 된다.
이상 살펴본 바는 1970년대 시조의 한 검토일 뿐, 시인의 경향을 규정하는 것은 아니다. 1970년대 시인들은 무한한 가능성과 동시에 가변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재론의 여지는 늘 남아 있는 것이다.
5) 마무리
이상 해방 40년의 시조를 조감해 볼 때, 신속하고 다양한 발전이 이루어졌음을 알 수있다.
물론 전통적인 기법과 서정 세계는 질과 양적인 면에서 주류를 형성하고 있지만, 나름대로의 틀 속에 자신들의 세계를 놓고자 하는 의도도 두드러지게 나타나 있다. 전통적인 방법을 고수 혹은 변용하든지, 아니면 새로운 미학을 추구하든지 간에 양자는 대립적 입장에 놓인 것이 아니라, 상보적 관계에서 현대시조의 발전에 다같이 기여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시조가 현대시론의 접근에서 한국시를 구현하고자 할 때 시론의 빈곤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본격적인 문학론으로서의 시조론의 대두와, 많은 그리고 깊이 있는 연구와 비평의 참여는 시조 발전의 기폭제가 되리라 믿는다.
무릇 학문이 그렇듯이 문학도 작품과 비평의 상보적인 기능이 발휘됨으로써 전체 문학의 바람직한 발전이 이루어진다고 볼 때, 시조의 비평 작업은 작게는 시조 평론이 될 것이며 크게는 순수한 한국 문학론의 정립에 기여하는 일이 될 것이다
2. 체험과 표현
우리가 산다는 것은 운행되고 있는 시간의 質量 속에 있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우리들의 기억 속에는 그 생명체가 거쳐온 시간의 指標들이 찍혀지게 마련이며, 그때마다의 현실적 체험이 문학적(시적) 요소로써 우리의 기억 속에 잠재되었다가 어떤 계기나 충동에 의하여 再生되어진다. 시는 곧 체험 요소의 음률적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달에는 《時調文學》가을호가 출간되고 《韓國文學》과 《月刊文學》도 두, 세편씩의 시조를 싣고 있어 많은 작품을 대할 수 있었다. 時調의 구조와 시간이라는 관점에서 鄭椀永의 <初冬>(時調文學 가을호)과 李相範의 <새벽行>(韓國文學), 姜寅翰씨의 <잠자는 神鐘>(時調文學 가을호)을 골라 보았다.
이들이 공통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점은 시간의 관계 설정(전개)이다.
칸트를 비롯한 많은 사상가들의 時間은 가장 특수한 경험 양식을 보여준다. 그리고 시간은 인상이나 정서나 관념 등과 같은 내적 세계에 관계되기 때문에 공간보다 더 일반적인 경험 양식이라고 《時間과 現象學》에서 한스 마이어흡은 말하고 있다. 우리가 특히 중요시하고 있는 것은 그것이 自我의 개념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이다.
금년에 가장 왕성한 발표욕을 보인 鄭椀永의 <初冬>은 그의 時調 수준을 지키고 있다.
병소주 한 잔으로
霜菊만한 溫氣를 얻고
저는 발 노새 같은
막버스에 실려 간다.
창너머 변두리 마을
등불들이 떨고 있다.
해질녘 혼자 걸어본
仁寺洞 뒷골목길
눈감은 李朝강물
文匣 위에 졸던 木雁
그 木雁 끌고 판 죽지가
내 가슴에 아파 온다.
[막버스], [해질녘]은 현상적인 시간이자 시인의 의식상의 시간이고, [李朝의 강물]은 과거, 즉 기억 속의(상상) 시간이다. 이렇듯 시간을 지시하는(言語상황) 용어들과 자연적 시간의 연결선상에서 이 시조의 詩想이 전개되고 있다.
자기에 주어진 시간(生涯)의 질량이 거의 소진되었음을 인식한 시인은 홀로 고독감에 몸부림치면서도 精神的 至高함을 애써 추구하지만, 이제 그에게 남아 있는 것은 [木雁 끌고 판 죽지가 아파 오는 가슴]의 과거의 시간의 體積뿐이다. 그 체적은 아픔으로 채워진 것이며 그에 있어서 그리운 것은 오직 霜菊만한 [溫氣]이다.
그의 시조에 있어서 늘 느끼는 詩精神의 일률성이나 단조로운 음률 패턴, 그리고 주관적인 진술(술회) 등 달리 기대되는 것이 많으나 이 時調는 構造面에서 시간적인 질서가 파괴되어 이미지의 혼란을 야기시킨다. 물론 우리의 의식 속에 흐르고 있는 시간이 반드시 過去-現在-未來의 방향으로 진행되는 것만은 아니겠지만, [막버스에 실려가]는 시간에 [해질녘 혼자 걸어본 仁寺洞 길목]은 시간의 換置로서는 무리이며 無時間的 영원성이라 볼 수도 없다.
李相範의 <새벽行>은 진행하는 시간의 어느 점에서 그 시간이 같은 질량(시인의 체험)을 共時的으로 나타내 보이고 있다. 앞의 時調가 시간이 詩人의 관념과 연결되고 있다면 이 時調에 나타난 시간 개념은 인상과 결부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저승까지
이어진 전등
자글 자글 市井이 끓는다.
선하품 두어 모금
피곤의 찌꺼길 싸들고
騷音을 파랗게
일깨우며
밤의 꺼풀을 벗긴다.
가난했기에
절실했던
손바닥 같은 삶의 안팎.
퇴색해 가는 불빛
장안을 눈으로 퍼담는다.
부우연 혼이 빠지는
철근의 숲
뼈대여.
여기서 시간은 인상과 관념에 직결되고 있다. [저승까지]의 거리는 관념상의 거리요,
[피곤의 찌꺼기]은 일상적인 생활 관념이며, [가난했기에]은 과거 생활경험을 통한 삶의 개념이다. 그리고 이러한 주관적인 관념의 대상들이 시간의 진행(전이)으로 말미암아 그 질량이 소멸되고, 새로운 시간이 내포하고 있는 物象의 세계가 [부우연 혼이 빠지는/ 철근의 숲/ 뼈대여]으로 인식되고 있다. 종래 그의 시조가 보여주던 인상을 많이 개선하여 보다 감각적인 표현에 애쓰고 있는 점이나 언어의 개발 등은 보이나 아직도 주관적 진술이 주를 이루고 있는 듯하다. 그리고 공시성이란 공간적 조형에 묘가 있는 것이므로 객관적 묘사로써 뚜렷한 이미지를 보여주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姜寅翰의 <잠자는 神鐘>은 진일보한 모습을 보여준다.
한 송이 曼茶羅華
꽃 앞에
서는 어둠.
두드리고
두드려도
쇠는 이제 아니 운다.
鐘머리
틀어감은 채로
부서져 삭는
龍의 울음
썩은 바람 불어가고, 썩은 구름 흘러 간 뒤
깃치던
소리의 새떼
숯이 되어 떨어진 稜線.
이 밤을 帝王의 혀는
靑銅으로
굳어 있다.
이 시조는 역사 의식과 자아 의식을 포용하면서 과거의 시간을 현상의 시간으로 환치시켜 놓고 있다. 울지 못하는 鐘, 靑銅으로 굳은 혀는 [어둠]이라는 외부적인 상황에 의한 것이며 그것이 이 시인이 겪는 현실이라는 시간 개념이다. 자칫 관념에 흐르기 쉬운 思想性을 이 詩人은 잘 서정화하고 있다.
역사적 비극의 상황과 현실적 상황(어둠, 썩은 바람, 썩은 구름)을 대응시키면서 그 조응 속에 자아(존재)를 인식하는 그의 수법은 객관적 묘사를 통해 리얼리티와 선명한 이미지를 이루어 내고 있다. 시조로서 시각적 이미지와 청각적 이미지를 조화시켜 본다는 것은 현대시조의 모색에 한 방법론이 되리라 믿는다.
아무튼 상기한 세 편의 시조는 이 달의 가작에 속한다. 그 중 姜寅翰의 時調는 1970년대의 한 소득이라 할 만하다. 우리가 경험하는 세계는 주로 시각과 청각을 통하여 인식된다. 따라서 그 표현도 시각적이나 청각적인 표현, 즉 감각적 묘사로써 그 리얼리티를 획득해 나가야 할 것이다.
3. 삶의 認識과 發聲法
한 편의 詩(時調)는 生命體의 항상 새로운 최초의 發聲이다. 불교적 倫理에 따른다면 삶의 여러 양상이란 생명체가 具現해 가는 여러 가지의 모습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詩는 생명체의 호소적 욕구가 지각과 감정과 감성의 유기적 혹은 개별적 충돌과 조화로써 이루어진 생명력의 총화라 할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 서면 누구의 시, 어떠한 구절도 경건하고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다.
이 달의 時調는 삶의 철저한 인식과 저마다의 새로운 발성법에 의하여 이룩된 작품들로서 시조의 발전된 모습을 뚜렷이 보여주고 있다.《韓國文學(4)》과 《時調文學(봄)》은 양적으로 뿐만아니라 질적인 면에서도 선별되어 있고 《時調文學》의 新作 特輯은 주목을 끌기에 충분하다. 이 달의 발표작은 대충 서정적 세계와 生의 認識 그리고 生活詩로서 自嘲的 美學을 보인 작품들로 대별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短詩만이 詩]라고 한 A.Poe의 말을 연상시키는 전규태의 <情> <秋情>, 정표년의 <길목> <새><낙엽>(이상《시조문학》)등은 한 편의 서정시로서 다같이 성공하고 있는 작품들이다.
뜨락 어둠 내려
낙엽은 잠들었고
빗소리 바람되어
귓전에 스치는데
마음속
가득 고이는
서먹한 사연이여
<秋情>
바람불어 어찌 할꺼나
상기도 먼 아픔을
옷자락 기운 옷자락같은
내 청춘의 가지에
그대여 하얀 울음 울어
비 내리게 하라
<새>
너 떠나와 울던
그날처럼 바람이 분다.
하그리 설래던 봄도
덤덤히 여위어 가고
쌓이는 연륜 속으로
너도 한잎 낙엽이어라.
<낙엽>
鄭芝溶은 詩語를 꾀꼬리의 울음에 비유하여 [꾀꼬리는 꾀꼬리 소리밖에 發하지 못하나 항상 새롭다. 꾀꼬리가 熱鍊에서 운다는 것은 不名譽이리라]면서 꾀꼬리는 항상 생명에서 튀어나오는 최초의 발성을 해야 진부하지 않다고 했다. 일상적인 용어를 선택하여 음악성을 부여함으로써 詩語로써 생명력을 발휘하고 있는 전규태와 정표년의 시조들은 그대로 심정적 진실을 획득하고 있어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다.
순수 서정이라는 점에서는 오동춘의 <나무잎들>도 포함시킬 수 있으나 <나무잎들>의 밝은 서정은 동심의 맑고 청징함을 노래함으로써 童時調의 한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時調의 그 본령을 유지하면서 삶에 대한 인식과 인생론적 사유의 바탕 위에 선 작품으로 鄭韶坡의 <구두 깁는 노인>과 鄭在木虎의 <돌>, <두꺼비>, <老松> 등을 들 수 있다.
세월의 끝이 닳아
삭정이로 선 고목나무
그 그늘 아래서 안경 낀
노인이 구두를 깁는다
나뭇잎
뙤약 볕빛에
시들어가는
흰 낮에――(中略)
삶을 꾸며 깁는
허기진 긴 날에도
말없는 입가장에
빈 웃음은 하냥 깊어
진종일
매미 소리만
귀에 멍이
들었다.
<구두 깁는 노인>
골목길 한 복판에
우연히 박힌 돌
오가는 발길에
온종일 밟히고 있다.
난세를 살아가는 법을
무언으로 깨우쳐 준다.
( 中 略 )
폭우가 쏟아지면
견디다 견디다 못해
강물에 떠 내려 가는
한 개의 조약돌이 된다.
가다가 멈추는 곳에
터를 잡고 또 삶을 얽으며
<돌>
鄭韶坡는 <구두 깁는 노인>에 인생(자신)을 투영시키고 있으며, 鄭在木虎는 <돌>․<두꺼비>를 통하여 삶의 의식 상태를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전자가 묘사를 통하여 이미지를 추구한 데 반하여 후자는 묘사와 진술을 병용하고 있다는 기법상의 차이를 제외한다면 두 시인은 다같이 生의 實相과 삶의 영위를 조용히 체득해 가고 있다. [말 없는 입 가장에/ 빈 웃음은 하냥 깊어]에서 볼 수 있듯이 이 시인의 달관적 인생의 모습이나 [가다가 멈추는 곳에/ 터를 잡고 삶을 엮으며]에서 볼 수 있는 生의 意志는 다같이 생명의 유기적 지각력에 의하여 토착된 삶의 인식으로부터 출발하여 그 受容에 이르고 있다. 이러한 연장선상에서 내적 구조를 보이는 작품이 韓粉順의 <孤寂>(韓國文學 4)이다.
여름을 살아도
뜨락에 늘 바람인다.
눈물이 되어 펄럭이는
한자락
喪章처럼
가슴을 노상 열어도
도로 닫히는 廢墟.
먼데서만 우는
汽笛은
무슨 까닭인가.
깊은 속을 퍼올리며
밤을 사룬다.
( 中 略 )
바람의 어귀에서
시간을 수놓는 바늘
그 아픔
매디마다에
열리는 나의 처음.
끊일듯 다시 사는 손짓
그는 벌써
꿈이네
인생이 꿈같다 하더라도 현실은 꿈이 아니다. 꿈이 아닌 現象的 생명의 實相을 내면적 공간에 구조해 본 이 작품은 단단한 언어들의 張力으로 유기적 통일체를 이루고 있다.
그의 내면적 현장은 [가슴을 노상 열어도/도로 닫히는 廢墟]다. 이 廢墟는 생명의 의식 상태며 투철한 삶의 의지를 바탕으로 했을 때 파악되는 영혼의 세계다. 그의 고독한 영혼이 삶을 인식했을 때 삶의 새로운 의미를 천착해 가는 과정에서 만나게 되는 슬픔은 생명의 아픔이다. 이 아픔으로 하여 흘리는 눈물을 시인은 生에 대한 애정과 수용적 태도로써 극복하고 있으며, 자칫 감상에 떨어지기 쉬운 서정을 새로운 차원에서 환기시켜 나가고 있다. 아픔 속에 열리는 새로운 삶의 의미가 허무인 듯하지만 이 시의 정신은 허무의 의지로부터 출발하고 있다. 그의 내적 체험이 지적 활동을 통하여 독립된 세계로 형성되고 있는 것이다. 삭막한 廢墟에 나부끼는 喪章처럼 바람(허무)에 감기면서 오래오래 서 있는 슬픔(生)이 시인 자신의 모습으로 형상화 되고 있는 동시에 詩人의 통찰력에 의해 파악된 인간 實相의 제시이기도 하다. 時調의 새로운 進境을 보여주는 韓시인은 <나를 따라와>, <夜山>에서도 성공하고 있다.
지면 관계로 예를 들 수 없으나 金相黙씨의 <일영 송사리>와 <단양 막걸리> 등은 사설 시조의 본질인 풍자와 해학의 특성을 지닌 生活詩篇들이다. 그러나 평범한 생활시가 아닌 인생(인간)의 의미를 현상적으로 구축해 가고 있는 시편들로서, 서민 정신에 바탕을 둔 자조적 미학은 그의 번득이는 지성과 언어에 대한 능력을 높이 평가하게 하고 있다.
4. 시조와 현상학
한스 마이어홉이 말한 바와 같이 모든 현상은 '현재'에서 일어나고 있으며 문학적 시간은 경험으로 포착되는 시간의 요소들과 항상 관계를 갖는다. 그러므로 문학적 시간은 인간적 시간이 되는 것이며 그 시간의 의미는 경험 세계라는 맥락 위에서 터득될 수밖에 없고 인간적 문제와 깊이 관련되었을 때 흥미있는 심중한 의미를 띠게 된다. 그것은 곧 시간이 인생의 수단임과 동시에 서술의 수단이 되기 때문이다.
尹今初의 <對峙와 현상학>(소설문학 1월호)은 역사적 사건을 현재적 주관적 패턴으로 재구한 작품이다.
칭칭 감긴 포위망의
王政을 대지르는,
벗을 것 다 벗어버린
가 야온 그 헐벗음
죽음의 인질로 나선
칼레의 시민들아.
손에 손을 깍지 낀
묵시의 언어였나
끈적한 점액질 사랑
連帶의 여섯 使徒
맨발의 靑銅조각이
다시 살아 숨쉰다.
"칭칭 감긴 포위망" 속의 칼레는 프랑스 북부 도버 해협에 면해 있는 조그만 항구다. 2차대전중에 완전히 파괴되었지만 다시 부흥한 도시로서 1차 대전중에는 영국군의 기지가 되었고 2차 대전중에는 독일군에 의해 점령된 바도 있는 비극적 역사의 도시다.
서부의 성채가 암시하듯이 일찍이 13세기 백년전쟁 때부터 전란에 휩쓸려 영국군에 포위되어 마침내 함락되고 말았다. 그때 여섯 사람의 칼레 시민이 영국왕 에드워드 3세 앞에 스스로 나아가 희생양이 됨으로써 많은 칼레의 시민들을 구할 수 있었다. 바로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깍지 끼고 있는 것이 로댕의 '칼레의 시민'이라는 조각품이다.
이 시의 발상은 바로 예서 비롯되지만 이러한 역사적 사실(객관적 경험)과 시인의 주관적 체험(한국사적 지정학적)이 휴머니즘을 바탕으로 한 상상력에 의해 재구성됨으로써 시적 진실이 제시되고 있을 뿐만아니라 주관적 패턴으로 의식을 제시함으로써 시의 개성, 즉 자아의 통일성을 구현하는 데 성공하고 있다. 괴테가 <시와 진실>에서 시사한 바와 같이 이 두 차원은 모든 문학 형태에 존재하는 것이며 반드시 결합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 시조의 내용은 사실 메시지를 지닌 서사적인 것이다. 화자가 어떤 메시지를 전하고자 할 때 시의 형태는 자연 연작시나 서사시 또는 산문시와 같은 장시의 형태를 취하게 되고, 또 이 시인이 즐겨 쓰는 사설시조나 혼성적 형태(평시조 엇시조 사설시조의 혼성)를 취할 법한데 단형의 단순 시형을 취했다는 점을 간과할 수 없다. 그것은 이 시가 80년대 시의 장형화 내지 사설시조의 무분별한 시도에 대한 묵시적 경계로서의 시사성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바로 같은 지면의 '---1980년대'라는 부제를 단 池聖贊의 <서울의 강(10)>은 연작시조다.
이 강을 건너오는
저 구름을 보지 않고는
이 강에 뜨는 별을
만나보지 않고서는
서울을 얘기하지 마라
가까이도 오지 마라
나는 들었느니라
떠내려가는 이 시대를
한가로이 배 한 척도
띄울 수 없는 불안 속에
맑아서 서러운 강이여
여기 강이 있었느니라
지면 관계로 둘째 수를 생략했지만 이 시인이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무엇인지 잘 알 수가 없다. 연작 시조로서 10회까지 끌고온 그 긴 호흡은 인정할 만하다. 그러나 한 편의 작품으로서의 독립된 이미지나 내용을 갖추고 있지 못한 것 같다. 시조의 각 수는 그 나름대로 독립된 내용을 갖추면서 전체적인 주제의 형상화에 기여해야 하고, 더구나 연작시조일 경우 시간 경험의 연속성과 변화의 다양성뿐만 아니라 이를 관류하는 지속성에 따른 통일성과 개성적 의미가 현상적으로 나타나야 공감을 사게 된다. 아직 계속되는 중간의 작품으로 전체를 이야기할 수는 없으나 관념적인 서술은 지양해야 할 것이다. 만일 그렇지 않으면 이해는 되지만 전달이 되지 않는다. 시조는 감동으로써 전달하는 문학양식이며 그 감동은 성실한 체험의 진실한 표현에서 얻어지는 것이다.
李一香의 <海邊夜話>(현대문학 1월호)는 제목에 비해 훨씬 세련된 표현과 깊은 내용이 잔잔한 감동을 일으킨다.
가을 바람에 실리는
내 은발의 작은 물결
추억은
마른 海草마냥
간간이 밀려오고
등위엔
눈감지 못하는
수평선이 걸려 있다.
밤은 바다 속에 잠기고
등불은 고독을 켜든다.
솔숲에
돋는 달은
무엇을 기웃거리는가
내일은
또 푸른 얘기를
들려줄 저 잠든 산들.
자연의 시간은 스쳐갈 뿐이지만, 인간의 시간은 질량을 갖는다. 그 질량은 과거의 체험과 현재의 시간이 상호 침윤하여 인생의 현상으로 나타난다.
무수한 시간이 쌓아올린 생애의 나부끼는 은발과 마른 해초, 그것이 이 시인이 느끼는 현상적 자아이며, 자아와 시간의 상호 침윤상태에서 보인 현상은 목마름의 역정으로 이해된다.
5. 주제의 개혁
펄벅의《대지》는 우리 나라에서도 많은 독자를 가지고 있는 세계적인 베스트 셀러다.
그만큼 구성이나 문장이 우수하면서도 세계 문학의 百選(서머세트 모옴, 편)에 들지 못하는 것은 주제가 새롭지 않기 때문이라고 한다.
주제가 새롭지 못하다는 것은 곧 작품의 독창성이 없음을 뜻한다.
흔히 전통시로서의 시조를 운위하지만 현대시조로서의 특질과 개성이 잘 나타나지 않는 것도 주제 의식의 빈곤에서 오는 것이다. 치열한 시정신이 없이 시조의 형식만을 갖추려 하기 때문에 오래도록 많은 작품들이 자연의 서정이나 서경, 관조적인 세계에 머물고 있으며 이를 전통 정신으로 오해하고 있는 듯하다.
물론 자연은 한국 시가문학의 특성이요, 시조의 전통적 주제였음을 부인할 수는 없다.
그러나 전통이란 현대적으로 재창조되어질 때, 비로소 진정한 가치와 의미를 지닌다.
시조는 정형시로서 그 형식 요건을 갖추면서 새롭게 음률을 창조(구성)해 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낭만주의 시론에 입각했을 때도 새로운 주제(내용)는 새로운 형태를 요구한다. 이러한 현상을 우리는 시조사적 사실로서 시조(단형시조)에서 사설시조에로의 전이 발전 과정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 것이다. 즉, 유교적 이념에 입각한 주제 의식이 서민 정신으로 대치됨으로써 사설시조가 중흥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주제 의식의 변화는 사실적인 표현과 산문적 서술양식 등 형식상 많은 변화를 가져 왔으며, 이러한 사설시조의 특성들은 결국 자유시의 시원이 되는 것으로 사설시조는 곧 자유시라는 주장의 근거를 마련해주고 있는 것이다.
高斗東의 <白磁賦>(월간문학 2월호)는 주제가 새롭다기보다는 우리의 민족성과 선비정신을 백자의 태깔과 형상성을 통해 나타내어 보인 소박한 작품이다.
점잖고 어리석고
소탈한 기질의 百姓
그들의 心宇에서
짓고 빚은 李朝白磁
만지면 훈훈한 내음이
물을 뿜듯 오누나.
仁義와 禮智 속에
달구어 놓은 그릇이매
어린 듯 태가 곱고
있을 듯한 物慾 없어
쟁유리 청하늘에 나는
한 점 白雲 같구나
팔십 노령임에도 불구하고 언어감각이 참신하며 시상의 전개에도 무리가 없는 완벽성이 보인다. 이는 바로 동양에서 시의 五忌로 삼고 있는 바, 즉
格弱則詩不老
字俗則詩不淸
才浮則詩不雅
理短則詩不深
意雜則詩不純
의 금기사항을 잘 체득함으로써 이뤄낼 수 있는 전형적인 시조다. 이 시인의 수준을 잘 유지해 주고 있는 것이 바로 五忌의 시법이 아닌가 한다.
박시교의 <바람집 5>(현대문학, 2월호)는 어둠으로 표상될 수 있는 우리의 시대 상황에 대한 인식을 바탕으로, 산다는 것의 의미와 삶의 실상을 새롭게 보여주고 있다.
친구여, 오늘 우리가 무엇을 노래하겠나
답답한 가슴으로 켜는 술잔의 무중력
그렇네, 산다는 것은 이름을 지우는 일
애써 지워도 돋아나는 건 이미 별이라네
자네와 더불어 사는 어두운 땅 별이라네
꽃이면 어찌 이보다 더 아름답다 할 것인가
그러나 어깨에는 부릴 수 없는 무거운 한 짐
쉽게 부려서도 안 될 우리들 형벌의 등짐
친구여, 오늘 우리가 무엇을 노래하겠나
대화체의 문체와 일상적인 언어의 구사가 친근감을 주며 언어의 장력이 단단하게 시상을 結構하고 있다.
하나의 사물이 생명적일 수 있는 것은 바로 그 사물이 이름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리고 삶의 영위는 처음 부여받은 목숨의 소모일런지도 모른다. 사는 것은 이름을 지우는 것이라고 하는 철학적 사유와 삶 그 자체를 짐으로 상징하여 무거운 짐, 형벌적인 등짐으로 인식하고 있다. 그러나 함부로 할 수 없다는 데서 우리는 이 시인의 생에 대한 경외와 삶의 성실성을 엿볼 수 있으며, 이것이 시대 상황에 대한 인식과 결부되면서 많은 메시지를 전달해 준다. "친구여 오늘 우리가 무엇을 노래하겠나"의 첫째 수 초장이 셋째 수 종장에 되풀이되는 수미상응의 수법은 의미의 강조보다 첫 줄의 고양된 감정을 균정시켜 서정적 안정을 취하는 데 기여하고 있다. 같은 지면의 <수유리 詩帖>은 감성이 빚어내는 이미지가 맑고 투명하나 지면 관계로 자세한 언급을 피하고자 한다.
이 달에는 시조만을 써오던 시인의 상당수가 자유시를 발표하고 있는 것이 눈에 띠며, 정공량의 경우 지금까지 보여온 시조에 비하여 자유시가 더 낫다는 느낌이다. 자유시를 많이 써 본 다음에야 좋은 시조를 쓸 수 있을 것이다.
시조를 쓰다 자유시를 써 본 다음에 시조를 쓰든, 자유시를 쓰다가 시조를 써 본 다음에 자유시를 쓰든 시인은 정형시와 자유시를 겸작하는 것이 시인 자신의 시적 성취는 물론 한국 시의 발전을 위해 바람직한 일이라고 본다. 자유 시인과 시조(정형) 시인을 구분하는 것은 한국적 현상일 뿐이다.
6. 시조의 다양한 記寫形式
요즈음 시조는 시(자유시)인지 시조인지 잘 모르겠더라는 말을 자주 듣는다. 이 말은 시조에서 음률을 배제하고 극단적으로 이미지만을 추구한 시조를 지적하여 한 말일 수도 있지만 그보다는 다기한 기사 형식에 대한 비판적 견해의 표명이기도 하다.
《靑丘永言》 등 문면에 나타난 최초의 시조들은 1행으로 기술되어 있고 《가곡원류》 등은 점( )으로 장구분을 한 표기법을 취하고 있다. 비록 시조가 기술상 1행으로 되어 있더라도 우리 민족의 선험적 율독 관습에 따라 12음보로 구분하여 음송하기 때문에 시조의 가락이 저절로 살아나는 것이다. 그러나 현대시조에 이르러 1행의 배행 표기는 거의 쓰이지 않고 있으며 최남선의 《시조유취》를 비롯하여 시조의 3장(3행) 배행 기사형식이 취해진 이후 6행 배행 형식과 더불어 시조의 보편적 기사형식으로 전형화되어 왔다. 그러나 근래의 시조의 기사법에는 자유시의 영향으로 시각적인 배행의 다양한 양상을 보이고 있는 것이 사실이며 이 달에 발표된 작품들도 실로 다양한 형식을 취하고 있어 어떤 작품은 시조로 보기 어려울 정도이다.
(1)
그 아뜩한 수렁 같은 官能의 삼각주를
끝없이 벗겨 내는 물살의 음흉한 손길
떨쳐도 떨쳐 버리기엔 너무나 감미로워.
밤마다 섬을 유린하는 그 숱한 무리들의 철새
갈대는 艶聞을 흩날리고
슬픔만 켜켜이 쌓이는 아, 여기 청계천의 끝
(2)
바람이 속민 意匠을
종일 풀다 지친 저녁
水沒地區 廢鑛위로
뜨는 달의 因緣이야
九泉을 싸지르고도
썩지 못한 죄 아니던가
아픔도 炭火해 버린
이 땅의 古生代에는
가난마저 가난에 썩어
기름졌던 우리의 삶
純粹의 허구였었어
썩지 않는 너의 의미는
(3)
가진 것 훌훌 다 털고
가벼운 나들이다
더러는 가슴으로
채워 온 이야기며
애절한 노랫가락은
바람으로 날리고
(4)
살얼음 딛는 오늘
누구 말을 믿고 살까?
참새는 참말하는 새
매야! 잡아가지 마
소나무
푸른 남산 숲
참새마을 이뤄야지
無作爲로 열거한 이상의 예시 중 (1) (2)는 최중태의 <河口 1.3수>와 ,<비니루에게>(月刊文學,5) 全文이다. (1)의 경우는 3장을 3행으로 배행한 전통적 기사형식임은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거니와 (2)와 (3), 김준의 <겨울 나들이,1>(月刊文學,5)도 보편적 기사형식으로 1구를 1행으로 배행하여 6행 1편으로 기사하고 있다. 이는 모두 음률상의 분구며, (4)오동춘의 <참새소리>(월간문학,5) 역시 율격을 기준으로 배행한 것이나 종장 제 1음보의 기능상, 호흡상의 중요성을 감안하여 7행으로 배행한 것으로 일반화된 기사형식이라 할 수 있다. 시조가 율격에 의한 시, 즉 정형시로서 그 기사 형식을 음률 구조에 따라 배행한다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시인의 표현 의도에 따라 의미 단위나 이미지 단위로 행을 배열하는 것을 간섭할 수는 없는 일이다. 하지만 그것이 전달상의 뚜렷한 효과를 거두지 못할 때는 한갓 기교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1)
샛바람 이울다 간
그늘 속 외진 年代
오뉴월 밤낮으로 바람꽃은 울다 핀다
혼절한 네 영혼들끼리
달빛타고 흐른다
(2)
천 조각
만 조각
비늘치는 나날에
흩날리는
꽃잎들을
잠재우고 난 자리
불꿈만
깊었읍니다.
숨은 거울
문지르며.
(3)
잠결에
귓밥 물고
간질이는
그
숨결
문득 밝힌
눈앞 머리
다소곳
벙근 앞섶
참으로
나 못 죽을래라
그 향기
그저 두곤
(1)은 이은방의 <바람꽃,1>(小說文學,5)으로서 3행과 6행의 배행 형식을 혼융한 것으로써 시각적인 변화를 주고자 한 의도를 엿볼 수 있으며 (2) 白利雲의 <白夏,15>(韓國文學,5)와, (3) 추영수의 <蘭香>(現代文學,5)은 음보 단위를 근간으로 배행하고 있다. 물론 이미지를 추구하려는 의도는 보이지만 음보 단위로 배행했을 때 이론상으로는 시조의 율격이 그대로 살아나지 못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이들이 시조의 새로운 의미 구조를 추구하고 있음을 알 수 있고 시조로 파악되어 진다. 이에 반하여 임영석의 <가을비소리>(현대시조 봄)는 시조라고 보기는 어려울 정도이다.
가을비는소리가있다.
비․․․소리․․․비
․ ․
․ ․
․ ․
소리 소리
․ ․
․ ․
․ ․
어둠안고내린비
안개속그리운마을이
모두비에젖고있다
'----거울속의비와거울밖의가을비소리의갈등'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이 시조(?)는 의식의 흐름을 따르는 자동기술법을 취한 듯 띄어쓰기를 무시하면서도 장 구분을 하려는 의도를 뚜렷이 하고 있다. 그리고 초장 2구를 시각화하기 위한 도식을 보이고 있으나 갈등구조도 대단하지 않으며 시조에서의 도식적 시각화란 바람직한 시도라고 보기 어렵다.
시조를 개인적인 시형식으로 형식화하는 것은 시인 개인의 문제이겠지만 적어도 전통시라는 의식을 가지고 시조를 쓸 경우, 정형시로서의 정제된 형식미를 시각적으로도 갖춰야 할 것이지만 시조의 의미 단위와 음률(율격) 단위에 입각한 배행이 바람직한 기사형식일 것이다.
7. 사설시조의 본질과 변용
사설시조 역시 평시조와 마찬가지로 麗末 鮮初부터 있어온 민족 시가의 한 형식이다.
다만 그것이 간헐적으로 이어져 왔고, 17,8세기 실학 사상의 영향으로 중흥할 무렵 외세(개화사상)에 밀려 단절됨으로써 자체 내의 성숙과 지속적인 발전을 이루지 못하였을 뿐이다.
그러나 주지하는 바와 같이 평시조가 주로 양반 계급들에 의하여 향유되어 온 점잖음의 문학이라면, 사설시조는 서민들에 의하여 불리워진 시가양식이었던 만큼 그 특성을 달리하고 있는 것이다. 즉, 성정의 진솔한 표현이라든가, 안으로 抗體意識을 지닌 서민 정신의 표출이라든가, 풍자와 해학적인 수법, 그리고 서민 구송 양식으로서의 산문율 등은 근대 문학 정신으로도 통하는 것이었다.
이 달에도 수 편의 사설시조가 각 지면에 발표되고 있고 특히 《현대시조》의 사설시조 특집은 현대 사설시조의 총체적인 모습을 한 눈에 보여 주고 있다.
徐伐의 <萬念別曲>(현대시조, 여름)과 <이 여름 新刊으로 오는 바다>는 사설시조의 본질성과 현대적 서정시로서의 변용 의지를 내포하고 있는 작품이다. 전자가 현실적 상황을 바탕으로 서민의식을 표출하고 있다면, 후자는 심미적인 세계를 보여주고 있다.
이다지 火急하고 多急한 순간도 저 南山마루를 넘어 나가 가람가람 흐르는 가람 깊은 속으로 깃들어 들리라는 생각
깃들어 들어 서해 延坪島 浩然之氣 둘러 펼친 延坪島께꺼정 가고 가서는 참조기떼 떼비늘, 비늘비늘을, 수 없지만 다 낱낱 씻어 주리라만, 그렇기야 하겠다만 먼저 간 내 사랑은 감감한 어느 굽이에 휘감기고 있는 건지, 설마하니 야지랑 야지랑을 떨다가 象齒焚身된 되잖은 되잖은 어떤 業體처럼, 그처럼 막되지는 않았을 테지. 또 돈 빛깔에 개입되어 한창 시끄러운 어떤 정치빛깔처럼, 그처럼 되지도 않았을 테지 안 그런가, 멍청한 그대
拾萬원 삭월세 만들어 내면서 내 구름 보고 하는 소리란다.
<萬念別曲>
쇠청다리도요 한쌍이 新房 꾸미던 자리, 거기 잘 둘러 주던 6월은 갔는가.
갔으니, 이번에는 靑七月 한 달을 잎이란 잎이 짜서 산에 들에 다 입히리. 산이 들이
입고 시원하다 쌓으면 그제서야 훌쩍 내 떠날 생각할지 몰라. 아래위 분명한 大 小 연평
도 근처, 참조기 떼지어 와 씻겨진 게 내갈거나. 가서, 쇠청다리도요 날듯이 그리 날고
있는 바람하고 놀지 몰라. 놀다가 印唐水, 먼 인당수, 그거 잡아 끌겠구나, 잡아 끈 바다
는 방금 인쇄되어 잡지 막 되고 있는 全紙. 아무래도 그거겠지.
달려가 당장 펴보고 싶구나. 이 여름이 낸 新刊 그 단행본.
<이 여름 新刊으로 오는 바다>
<萬念別曲>의 화자는 서민이다. 매달 10만원의 사글세를 마련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지만, 그렇게 용이한 일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막상 날짜가 되면 당혹스러움과 불안함에 초조한 생각으로 허둥거리는 것은 서민들의 보편적 감정 상태다. 이러한 심경적 상태를 화자는 "火急하고 多急하(다)"고 진술하고 있다. 그러나 그 '火急'은 화자의 처지뿐만 아니라 현실적 상황의 다급함이다.
시상이 은유의 강물을 타고 서해로 흘러드는 과정에서 그 순수의 사랑도 최루가스로 눈물을 흘렸을 것이고, 돈 빛깔로 오염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詩中의 화자는 짐짓 그렇지 않기를 바라는 안타까운 심정으로 먼저 간 사랑으로 定置하고 온전히 순수함을 지키고자 한다. 여기서 이는 대상황(對狀況) 인식의 심리적 갈등상이 만념으로 나타나고 있다. 현실의 증언은 휴머니즘 정신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며 시대적 고초를 겪으며 천갈래 만갈래 수심 속에 살던 옛사람들의 심사가 현실의 풍자나 해학으로 나타났던 것과 그 맥을 같이하고 있다.
이에 비하여 <이 여름 新刊으로 오는 바다>는 진술과 묘사가 적절한 표현법을 얻어 심미적 세계를 보인다. 이처럼 사설시조의 산문적 요소와 시조의 서정적 요소의 조화를 통하여 새로운 형식미(표현미학)를 추구할 때 사설시조의 자유시적 변용이 가능한 것이며, 정형적인 율격 질서가 미약하여 작품마다의 질서가 중요하다는 점에서, 박철희 교수의 지적대로 사설시조는 자유시라는 규정이 설득력을 지니게 된다.
김상묵의 <화분속의 들나생이>(현대시조, 여름)는 서민 구술양식을 취한 풍자적인 작품이다.
쬐금만 더 쬐금만 더 하다가
서울살이 이냥 뿌리내리나부다.
석유파동 어쩌구 할 적 면목동 뚝방촌 뒷방칸에서 무엇해 열어둘 막내 지지배가 어느덧 불광중학 첫학년인데 안작두 난 멍청도 들나무새 타령을 내버리지 못하고 거기 맹물맛 여울가 지갑은 사투리를 못 버리고 향수란 이름으로 진창길난 가슴앓이를 못 버려 앞비알 무서리에 고추잠자리 일던 뼈백인 알배차 밉둥이 여전 그립고 부뜰이네 뒤울께 귀신 걸린 고욤나무 둥치가 그립고 노랑하늘에 횟배앓던 토막집 돌구들이 그립고 장마 끝이면 그 지악스레 자끌대던 깨구락지소리꺼정 몽창 그리워 꿈에서도 서성대다 돌아서는 흙냄새병에 질리다 못해 집래는 눈진물이 나던 새봄날 구파발 효자리 둔덕 들낭생이 두엇을 옮겨다 좁아터진 베란다 비닐화분에 앉혀 놓고 즐창 들며 나며 눈이 시리게 들여다 보고 있다.
인저는 그만 즘 거시기허슈
나생이 눈독들어 죽것네.
3장을 시각적으로 구분하고 있는 점은 앞의 예와 같다. 그러나 앞의 시조가 표준어를 사용하고 있는 데 반해 이 작품은 속어나 전음화된 속음을 그대로 적고 있으며 호흡 및 의미 상의 휴지를 구분하지도 않고 있다. 본시 사설시조(평시조)의 기술은 줄글이다. 그것은 독자(창자)의 호흡과 리듬 감각에 따라 음송하였던 것임을 말하며 특히 사설시조는 행보율에 의하여 율독되고 관습적 율독법의 기대와 충족에 따라 율동의 쾌감을 맛보게 된다. 그런 점에서 이 작품은 재미있게 읽히지만 이 시인이 종전에 보여 준 《土辭》의 재미에는 못 미친 듯하여 아쉬움이 남는다.
송길자의 <外燈>(현대시조, 여름) 역시 중장이 길어진 형태의 사설시조다.
침묵이 宿命인 너 그윽한 눈빛으로 이승을 사네.
허무를 꽃피워서 흩뿌리는 너의 빛 보라, 밝혀줌이 너의 전부인 빛의 꽃 보라 자기를
꺼서 캄캄할 때 周圍를 알아내는 너, 자기를 환히 켜 들어서 四圍를 불러주는 너
이제는 燭數를 다 했는가 눈물어린 눈빛으로 서 있네
대상에 감정이입을 시켜 주관적 묘사를 함으로써 서정을 떠올리고 있다. 사설시조를 이와 같이 서정시화 하고자 할 때 자유시의 형식으로 변모되는 것이지만 자유시와의 구분은 3장의 구분, 즉 의미덩이의 구분이 뚜렷하고 종장 제 1음보가 3음으로 고정된다는 점에 있다.
이 외에도 재미있는 작품들이 있었으나 거의가 중장이 길어진 형태다. 고시조에서도 중장이 긴 형태가 많은 것은 사실이나 그것이 보편적(표준)인 것이 아니기 때문에 사설시조는 중장만이 길어진 형태라는 개념을 가져서는 안 된다. 그리고 각 장을 분구(행)하여 짧은 여러 행을 잡는 것은 독자의 율독 쾌감을 한정시키는 일이 될 것이다.
사설시조가 서민 정신의 한 표출 양식인 만큼 관념성이 배제되어야 하고, 이야기시인 만큼 쉬운 말의 흐름을 타고 자연스럽게 사상과 정서가 표현되어야 한다. 이것이 사설시조의 본질이며 쓰기 어려운 점이기도 하다.
8. 현대시조의 다양한 추구
《시조문학》의 신작 특집과 《현대시조》의 동시조 특집은 각기 시조의 질적 수준을 향상시키는 데 기여하고 있다.
더구나 오랜만에 대하는 金相沃, 李根培, 조오현 등의 작품은 기왕의 평가치를 넘어선 시적 완성도와 새로운 경지를 열어 보이고 있으며, 항상 꾸준한 작시 태도를 견지해 온 宋船影, 李相範, 丁秀子 등의 작품은 현대시조의 위상을 확보해 주고 있다. 한편 鄭椀永, 朴敬用, 徐伐, 景鐵 등의 동시조들은 그 방면의 발전에 직접적인 자극제가 되고 있다.
언뜻, 자유시와 시조의 구분이 어려울 만큼 다양화해 가고 있는 시조의 배행을 전통적 3장 배행의 기사형식을 취함으로써 오히려 안정감을 주고 있는 李相範의 <강물에>는 삶(人生)의 의미와 감각적인 표현이 안정된 형태 속에 조화를 이룸으로써 시적 성공을 얻고 있다.
눈 뜨면 어깨 쭉지 휘감아 달려들던
비늘을 튕기며 물굽일 나꿔채며
슴슴한 눈빛을 들어 이마 위로 흐르던 강.
더러는 가슴의 벼랑 몰래 적셔 울고
더듬듯 깊은 발을 가로 질러 건너가는
찌들은 가슴의 밑창 베고 누운 더딘 강물.
갈대꽃 몇 무더기 별밭 아래 세워 놓고
저승까지 끈이 닿은 하늘빛도 돌려 놓고
길손을 거꾸로 세워 휘적 휘적 끌고간다.
어느 덧 강물이 어깨죽지를 휘감고 이마에 차오른 나이쯤에서 그의 시각은 삶의 실상과 죽음의 경계를 물줄기 따라 걷고 있다. 따라서 여기서의 강은 죽음으로 이어지는 삶의 강이다. 이 은유의 강물 위에 거꾸로 서서 가는 자신을 발견하지만 일체 作爲性을 보이지 않는 데서 운명론적 사유의 용해된 모습이 달관한 듯한 안정된 형자를 취하고 있다.
조오현의 <仁川灣 落照>는 삶과 죽음이 직관을 통해 형상화한 작품으로 禪의 세계를 보이는 작품이다.
그날 저녁은 유별나게
물이 붉다붉다 싶더니
밀물때나 썰물때나
파도 위에 떠 살던
그 늙은 어부가 결국
다음 날은 보이지 않데.
사실 한국 시가 문학상 문면에 나타난 최초(最古)의 작품인 <공무도하가>나 향가의 대표적인 작품인 <제망매가>가 다같이 죽음을 노래한 시가들이다. 그리고 이들 노래가 비록 애절하다고는 하여도 주어진 죽음을 그저 슬퍼할 뿐으로 죽음에 대한 감정이 소박하고 경건하게 표현되고 있다.
그러나 조선조 혹은 그 이후의 시조(시)에 나타난 死觀은 김열규 교수가 지적한 바와 같이 유교의 세속적 공리주의로 얼룩진 死觀으로 말미암아 한 번 가면 그뿐이라는 생각이 유생들마저 [將進酒辭]를 읊조리게 하였고 誤인 줄 알면서도 술 먹고 놀게 만들었다.
죽음의 상념이 갖가지로 굴절되어 비통하고 처절한 심정을 돋구고 질탕한 감각적 도취를 부추긴 것이다.
그들의 생사관은 때로 죽음을 통해 모처럼 허무를 눈여겨 보았다 하더라도 그것이 內省的 무게를 동반하지 못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죽음은 삶의 반성적 계기를 마련해 줄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삶이 더욱 더 교만과 迷妄에서 벗어날 수 없었고 감정의 굴절만이 한국인의 죽음을 유달리 슬프게 만들어 버린 것이다.
바로 죽음의 백지 사상, 그 사상적 부재를 극복해 줄 작품이 나와야 했던 차제에 시인은 오랜 침묵을 깨고 죽음과 삶의 형이상학적 세계를 불교적 사상으로 조응하여 선의 세계를 열어 보인 것이다. 일찍이 찾아볼 수 없었던 시조의 새로운 경지라 아니할 수 없다.
鄭秀子의 <악수>는 삶의 실체적 존재로서의 自我의 자성적 인식상황을 리얼하게 표현한 작품이다.
바람이 바람을 만나
잠시 꿈을 묻듯
어디서든 웃으며
낯선 손을 잡지만
투명히 가로 놓이는
그건 늘
난해한 벽
한 발은 뒤로 뺀 채 가벼이 흔드는 손
놓는 즉시 되찾는 너와 나의 적정 체온
내렸던 빗장을 거는 우리의 견고한 성.
돌아와 혼자 앉아
하루를 씻는 시간의
별이듯 닿지 못할
세상과 나의 거리
누구도 나눌 수 없는
손금 안의
젖는 길.
섬세한 촉수로 포착한 현실적 상황들과 내면적 의식 상황이 이중 구조를 이루면서 현대인의 不信性을 메시지로 전한다. 그러나 이 모두가 허무 속에서 만나는 나와 너임과 동시에 나와 나인 것임에도 불구하고 나의 이기성으로 말미암아 현실과의 아득한 거리에 자신을 놓이게 하고 있는 자아의 발견에서 서정적 정황이 일고 있다. 일상적 소재를 선택하여 시화하는 데 이만큼 성공할 수 있는 것도 시인의 능력일 것이다.
역시 일상의 평범한 소재를 시적으로 승화시킨 이호광의 <바둑을 두며>도 시인의 능력을 짐작케 해 주고 있으며 노중석의 <너는>은 "한 송이/ 피맺힌 봄을/ 터뜨리고 있는가"와 같은 구절의 치열한 시정을 엿볼 수 있는 단단한 작품이라 하겠다.
그동안 꾸준히 전개되어 온 동시조도 이제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음을 알 수 있으며 특히 동시 작가로도 일가견을 가지고 있는 朴敬用의 <여울에>은 청징한 동심의 세계를 잘 표현하고 있으며, 가장 열렬하게 동시조 운동을 추진해 온 景鐵의 <작은 사람> 또한 수준을 느끼게 해 준다.
①
씻기어 잠깬 눈이
여울에 다 모였다.
바닥에 잠겨 앓던
조약돌도 살아 떴다.
어린 왕
뜰을 거닐 듯
일렁이는
달무리?
②
산토끼 노래 부르니
집토끼
춤을 춘다.
큰 바위
작은 바위
속삭이는
이웃인데
사람들
우쭐대다가
서로서로
토라지네.
①은 <여울에>이며 ②는 <작은 사람>이라는 동시조다.
이 외에도 《현대시조》 동시조 특집의 많은 작품을 대하고 마음이 시원해짐을 느꼈으나 필자로서는 작품에 대한 언급을 피하고자 한다. 다만, 동시조가 하나의 독립된 장르를 이룰 수 있는 것인가 하는 의문과, 그것이 시조 문학의 범주에 드는 것인가 아니면 아동문학의 범주에 드는 것인가 하는 의문이 제기됨을 밝히고자 한다. 다시 말하자면 동시조는 먼저 그 개념 규명이 이루어져야 한다.
9. 시조의 감수성과 매너리즘
시인은 감수성이 예민하고, 강하고, 풍부해야 한다고 한다. 감수성이 예민하지 못할 때 새롭고 신선한 느낌을 주지 못할 것이며, 강하지 못할 때 깊은 의미의 세계를 천착하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풍부하지 못할 때 작품의 세계가 단선적이 되고 말기 때문이다.
'감수성'이란 말이 문학과 관련하여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18세기초 영국에서였다. 처음 그것은 사랑, 동정심, 연민과 부드러운 감정을 잘 느낄 수 있는 성격을 뜻했고, 이어서 아름다운 것에 쉽게 반응을 보내는 성격을 뜻했다.
그러나 현대 비평에서 '감수성'이란 말은 엘리엇이 '감수성의 괴리'를 운운한 이래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되었다. 그것은 영국의 형이상학과 시인들이 사상을 감각적으로 체험함으로써 그들의 감수성을 수정했기 때문이다. 이때 감수성은 지성과 감각이 분리되지 않은 상태, 즉 모든 시인들이 희구하는 정신적 상태를 뜻한다. 단지, 사색적인 시인이나 감정적인 시인은 모두 '감수성'이 모자라는 시인들인 셈이다. 진정한 시인은 이성과 감성, 지성과 감각이 화합된 감수성을 가진 사람이라고 《문학비평사전》은 밝히고 있다.
또, 매너리즘이란 '틀에 박힘'이라는 낱말로서 한 개인의 독특한 글투(文體)를 소재나 주제에 관계없이 그대로 과대하게 사용하는 것을 말한다. 기교와 글투는 소재, 주제에 따라 적절히 그러면서도 가장 바람직하게 변하여야만 신선감을 주는데, 어떤 작가(시인)는 어떤 특정한 경우에는 효과적일 수도 있는 특수한 글투와 기교를 아무데서나 버릇처럼 사용하는 까닭에 첫째는 단조로움, 둘째는 불성실함의 느낌을 주게 된다. 곧 매너리즘에 빠진 것이다.
매너리즘이란 본래 16,7세기 서양미술사에 쓰인 말이었으나 같은 시기에 세밀한 수사법과 재치를 보인 문장에 대해서도 쓰여온 용어다. 그러나 현재 문학에 있어서는 비난의 뜻으로 쓰이며, 이 매너리즘은 시인의 능력 또는 성실성의 부족으로 인한 일종의 타락으로 보는 것이다. 작자만 매너리즘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독자도 빠질 수 있다. 문학의 말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사랑'이라는 제목이나 말만 보아도 으레 틀에 박힌 달콤한 정서적 반응을 보이는 것은 매너리즘에 틀림없다.
한국의 양반 시조는 매너리즘으로 말미암아 결국은 사멸하였다. 독자들도 틀에 박힌 반응을 보이기가 싫증났기 때문에 더 들어주지 않았던 모양이라고 한 李商燮 교수의 지적을 전적으로 동감하면서 이 여름철에 발표된 작품들을 이상의 내용(인문)에 비추어 볼 때, 상당한 시인들이 매너리즘에 빠져 있고, 신인들의 감수성에도 한계가 있는 듯한 인상을 지울 수가 없다. 동인지와 <신작특집>이라는 활자에 기대를 걸어 보았다. (타지에 언급한 시인 작품은 제외)
이우걸의 <눈>과 <바다 (1)>(慶南時調 4) 은 그 기대를 충족시키기에 충분한 작품이다.
환각제 가루같은
흰 눈이 내리고 있다.
버려진 지구의 육신을 문지르며
은밀히 감춰 두었던 어둠과도
입맞추며.
눈은 내리고 있다.
일순의 현란한 위장
사람들은 말없이 창문을 닫고 있다
잠깨면 다시 맞이할
덧없는 革命같은 .
이 시조의 소재는 '눈'이다. 그러나 우리가 관념적으로 상기할 수 있는 눈 내린 풍경의 묘사가 아니라 '눈'이라는 사물의 내적 의미와 현상적 상황을 대치 합일시켜 새로운 세계의 국면을 제시한 점에서 흔히 대할 수 있는 시조들과는 그 성격을 달리하고 있다. 즉 "환각제 가루같은 눈"과 "일순의 현란한 위장"이라는 인식은 그의 예민한 감성과 감성의 강도를 짐작케 해주는 구절이며 어둠과 입맞추는 감각과 "잠깨면 다시 맞이할/ 덧없는 革命같은 ."의 복합적 의미 구조는 지성의 바탕 위에서만 이뤄낼 수 있는 세계다. 독자의 시조에 대한 기대는 그 관습적 형식의 율격적 충족감에도 있겠지만 이토록 감수성이 주는 충격과 경이(감동)를 맛보고자함일 것이다. <바다 (1)>도 리얼리티를 획득한 작품으로, 아직도 직정이나 즉물적 서경, 맥빠진 관조, 그만그만한 기교에 빠져 있는 현대시조가 거기서 벗어날 수 있는 통로를 이 두 작품은 열어주고 있다. 같은 誌上의 추성희의 <1985년 12월 31일>은 대담한 언어 구사와 단단한 골격이 어떤 가능성을 엿보이고 있으며 金演東의 <고운 하늘밑을 떠나>도 같은 맥락에서 살필 수 있으나 너무 곱다.
李建善의 <꽃>(시조문학 여름)은 새로운 감수성으로 포착한 사물(대상)로서의 꽃의 형상성보다는 생명의 의미를 해체적으로 구축해 본 작품이다.
I
시작도 끝도 없이
흐름으로 울고 있다.
안겨도 순결하고
안기지 않아도 남이 아닌
한파람
매이지 않는
물이다가 불이다가.
II
먹어도 허기진 가슴
날개 펴서 깃을 치는
하회가면 빛과 어둠
허울 벗어 웃어댄다
메아리
손짓이 될 때
속살 찢어 흩는다.
모든 생명(체)은 흐름 위에 떠 있다는 생각은 불교적 사상으로부터 비롯된다. 그리고 식물의 생태학적으로 볼 때도 마찬가지다. 흔히 꽃의 이미지는 아름다운 상징으로 나타나지만 그 꽃 자체의 의미와 기능은 식물의 발정에 해당한다. 다시 말하자면 종족 보존의 본능에 의하여 발정하고 수태하고 낳고 죽고의 되풀이 현상의 한 과정인 만큼, 역시 흐름 위에 떠 있는 것이다. 이 시조가 이런 식물학적 지식을 원용하고 있지 않고 있으며 또 그럴 필요도 없다. 그러나 "물이다"는 흐름의 속성이며 "불이다가"는 삶의 격정이다.
이렇듯 꽃에 감정을 이입함으로써 서정이 이는 것은 일반적이라 할 수 있지만 꽃을 서민 정신과 애환에 결부시킨 특이한 이미지 연결과 "속살 찢어 흩는" 생명의 아픔이 공감의 폭을 넓혀 준다.
박연신의 <퇴주 잔>은 삶의 번민과 아픔을 거친 다음의 죽음(상실) 앞에 마주하는 잔이다.
너와 나 마주하는
이 작은 유리잔에
별인지 한숨인지
꽃인지 무엇인지
잔 가득 붓긴 했다만
부어본들 도리없네
술이사 얼마든지
천날이고 쏟겠다만
마음 담아 네게 준
미명의 잔 허공이니
뼛골만 불거진 사연
생시에는 묻지 마오.
시조는 자유시보다 더욱 응축적인 표현을 요한다. 그러나 시를 쉽게 쓰기란 어렵게 쓰기보다 어려운 것이다. 삶과 죽음의 대위법을 통해 나와 너로 표상된 자아의 실상과 죽음과의 거리를 유리잔을 통하여 굴절시키고 있다. 죽음과의 이뤄지지 않는 교감, 존재의 뜨거움 삶의 아픔의 무늬들이 평이한 구술체 구문으로 이루어져 쉽게 전달되는 문체상의 특징 외에도 기교를 부리지 않는 소박성과 시상의 진솔한 표현이 이 시인의 개성임과 동시에 시적 성실성으로 보인다.
매달 많은 작품을 대하고 있지만 실로 개성 있는 시조와 만나기가 쉽지를 않다. 개성이 없는 시조 그것은 생명 없는 가화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바로 그 개성이란 개인적 체험에서 비롯되는 것이지만 그것이 시적으로 성공하기 위해서는 세련된 감성과 지적 통솔력이 요구되는 것이다. 현대시조, 풍부한 감수성과 치열한 시정신 그리고 투철한 현실안을 가졌을 때, 매너리즘에서 벗어날 수 있으리라 본다.
10. 도시성 지역성 그리고 서정성
시조는 단순한 형식주의나 소재주의에 머무를 수 없다. 부단히 움직이고 있는 삶의 현실성을 닮아야 한다. 뿐만아니라, 변화하는 삶의 현상을 온전히 반영해야 시조의 값어치 또한 새로운 조명을 받을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고루하게 글자수나 맞추거나 온아한 서정의 여백미만 강조하게 된다면 형식주의나 소재주의에 전락할 위험성이 있다. 지극히 경계해야 할 일이다.
이번 5월은 《시조문학》과 《현대시조》가 나와서 작품의 양이 매우 많아 일일이 거론할 수 없을 정도이다. 그러므로 초점을 예각화해서 특별히 시조에 나타난 도시성을 점검하기로 하겠다. 이 도시성은 엄밀하게 대응될 수 있을지 모르겠으나, 지역성과 견주어질 수 있겠기에 시조의 현실적 대응력을 점검함에 있어서 아주 긴요한 것이라 판별되므로 시조의 도시성과 지역성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허리 굽어 지심매던 애비의 호미 자루가
내 등뼈 속에 걸려 아픈 혹 짊어지듯
도시의 쇠층계 밟고
내가 곱사춤을 추더라.
지금도 빌딩 너머 산 너머 어스름 들녘엔
소 몰고 쟁기질하던 흙잠뱅이 애비가
저무는 아들의 귀가를
언 발로 기다리는데
이 작품은 노명순의 <도시의 꿈 1>(현대문학 5월호) 가운데 일부분이다. 제목이 시사하고 있듯이 현재 머무는 곳이 도시이지만 그곳에서 항시 두고 그리는 대상은 아비가 있는 곳이다. 그것을 꿈이라 했으니 필시 도시가 충족시켜 줄 수 없는 것을 간직하고 있는 곳임을 짐작하게 된다. 따뜻한 부정이 간직된 그곳은 이 시의 화자에게는 적어도 돌아갈 수 없는 곳이거나 꿈으로밖에 희망할 수 없는 곳임을 알 수 있다.
이 작품은 도시인들의 잠재된 의식 가운데 깊은 층위에 도사리고 있는 본디의 고향에 대한 간절한 염원을 드러낸 것이다. 윗세대들이 모질게 가꾸고 일군 덕분에 아랫세대들은 도시의 터전을 마련할 수 있었지만, 윗세대의 부정이 보여준 따뜻함과 희생은 오히려 벗어날 수 없는 부담으로 작용했다. 그래서 작품의 다른 연에서 "애비의 냄새를 닦으려/ 자꾸 물을 끼얹는다"라고 한 것은 그 때문이다. 하지만 더욱 중요한 사실은 도시의 쇠층계 빌딩 / 어스름 들녘 흙잠뱅이로 변별되는 도시와 농촌의 날카로운 대립이다. 이 대립의 근거는 농촌--윗세대와 도시--아랫세대의 대립이라 하겠다. 배척되어야 할 농촌-윗세대는 간절하게 자신을 기다리고 있다고 설정함으로써 매몰된 우리네의 정서를 일깨우는 역설적 희망을 주제로 제시하기에 이른다.
도시에 머무는 이들의 간절한 꿈은 자연스레 이루어지던 아스라한 예전의 따뜻한 세계로의 회귀일 것이다. 그 꿈을 노명순은 작품으로 형상화하여 보여주고 있다.
얼음 상자에서 막 끄집어 내는 순간
진이 빨리고, 속살 다 발겨지고,
적당히 쭈그러진 채
길바닥에 던져진.
( )
도무지 속수무책의 이 구겨박힘을,
넋이 빠져나간 미친 연탄재며
그 온갖 잡살뱅이서껀
머리통을 들이민.
이 작품은 박기섭의 <깡통考>(현대시조 봄호) 가운데 일부분이다. 하찮게 버려지는 도시의 쓰레기 가운데 하나인 깡통의 실상을 적절하게 반영한 작품으로 보인다. 도시라는 공간 속에서 모든 것이 일회용품으로 소용되는 것이 예사인데, 깡통도 그러한 일회용품의 잔해를 반영한 대표적 도시성의 상징일 수 있다.
인용한 부분은 깡통이 되어가는 과정을 보여주고, 도시의 쓰레기와 더불어 깡통이 뒹구는 모습을 묘사한다. 깡통이라는 말을 의도적으로 생략하면서 종장의 끝 구를 통해 환기하는 수법도 또한 깡통의 무용성을 곰곰이 되새기게 하는 구실을 하고 있다.
도시의 황폐함을 지적하기 위해 깡통을 거론하고 있지만 그러한 깡통의 하찮은 잔상을 통해서 본래의 쓸모없는 물건이 지니는 소중한 값어치를 이렇게 뉘우치고 있다.
아늑한 광년의 길섶
이슬 받아 오리니
무생물에 생명을 부여하고 그것이 참답게 부활할 것을 믿는 시인의 예지가 돋보인다.
그러한 예지의 저변에 도시의 황폐함을 지적하고 어떻게 그러한 도시적 근성을 극복할 것인가도 중요한 과제로 부각시켜 놓았다 하겠다.
도시성을 지적한 시조는 한결같이 도시의 의식적 또는 무의식적 층위로 고향이나 농촌을 거론하면서 도시의 파괴되는 실상을 노래하고 있다. 그러나 도시에서 읊어지는 시조의 세계와 지역시의 세계는 사뭇 다르다. 시인의 정신적 기반이 다르기 때문에도 그러한 현상이 나타나겠지만, 더욱 적극적인 입장에서 해석할 때에는 지역시의 가능성을 시조의 뿌리로 삼기 때문에 그와 같은 창작이 가능한 것이라 여겨진다.
가을하늘 다하는
갈랫길
그 언저리
억새밑둥 마르는 종소리 날아와서
못 이룬 들녘의 꿈이
십자가로 앉아있다.
오승철, <고추잠자리>
제주엔 어딜가나
화산회토(火山灰土) 돌멩이뿐.
바람은 돌담을 키우고, 돌담만큼 크는 바람
밥으로 먹는 바람을
대물리는 섬 사람들.
현춘식, <바람 濟州>
숨고르기는 X을 식히는 잴 중요한 호흡법이니라
잘 안되지? 아무려면. 아직은 어림없지!
짜식아, 쇠똥을 봐라.
얼마나 고른 숨을 쉬나.
남진원, <정선아리리 23>
오승철과 현춘식의 작품은 《현대시조》 봄호에 남진원의 작품은 《시조문학》 봄호에 각각 실린 작품이다. 이들 세 시인의 작품은 모두 지역적 특색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앞의 두 시인의 작품은 <한라인의 시조>라는 특집에 마련된 것이고 뒤의 시인 작품은 제목이 표방하고 있듯이 <정선아라리> 연작이다. 우선 눈여겨 볼 것은 산뜻한 표현의 묘미와 신선함이다. 오승철이 고추 잠자리를 묘사하는 기법과 발상은 아주 산뜻하다. 사물과 더불어 밀착해 있으므로 그러한 표현을 터득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현춘식은 제주도 삶의 젖줄이라고 할 수 있는 바람을 곡진하게 각인하였다. 단순한 사실에서 제주도의 굵직함을 터득할 수 있다. 남진원이 연작으로 쓰고 있는 작품에서 풋풋하게 묘사하고 있는 대상은 고른 숨결을 지닌 세계이다. 마치 정선 지역에 전해오는 정선아라리의 굽이를 연상시킨다.
세 시인의 시조에 강한 지역적 특성이나 묘사를 실현한 것은 자신이 머무는 지역의 뿌리를 절감하고 있기 때문이다. 뿌리 없는 삶을 영위하는 도시시의 세계와는 사뭇 다른 특징을 반영하고 있는 셈이다. 그리고 문무학의 <도시 밖에서>(인용 생략)의 종장 "그냥 거닌다" 에 이르면 많은 생각이 머물게 된다.
5월호 시조단을 일별하면서 시조가 살아 있는 현실을 반영하고 있음에 유념하여 특히 도시성과 지역성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검증하였다. 시조가 고루한 시상을 노래하고만 있지 않음을 절감할 수 있었고, 특히 도시성을 반영하는 시조이든 지역성을 반영하는 시조이든 서로가 별개의 문제로만 취급되지 않는다. 도시시이든 지역시이든 문제의 맥락은 하나이고, 서로의 문제가 깊은 유대를 가지고 해명될 때에 시조의 폭넓은 쓰임새는 더욱 중요한 의미로 부각되어 나타나리라 믿는다.
이와 더불어 농밀한 서정성에 기초하여 시조의 경지를 보여준 시인의 작품도 있다. 그러한 시인의 예로 김연동 박연신 정운엽 정위진 등을 거론할 수 있다. 이들 시인의 한결같은 공통점은 오랜 시작을 통해서 단단한 시상과 원숙성을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우선 김연동의 <서성이는 자를 위하여>(현대시조 봄호) 가운데 다음과 같은 구절은 아주 인상적으로 다가온다.
이지러진 신화속을 알몸으로 부대끼며
풀뿌리는 가지런히 땅끝에 꽂혀있고
순백한 밤의 무게는
푸른 등촉만 태운다.
날 무딘 칼을 쥐고 서성이는 사람아
이제는 거울 앞에 전신으로 서야할 때,
치장을 벗어 버리고
빗질을 해야할 때.
인간의 내면에 깊게 자리잡고 있는 순결한 모습을 상기시키면서 자신이 뿌리내리고 있는 삶의 본디 자취를 찾으려는 탐색을 보이고 있다. 그러한 탐색은 단순한 것이 아니어서 신화적인 발상과 오랜 시적 유산을 계승해서 이채롭다. 여기서 우리는 오랜 시조의 가능성을 만나게 된다.
박연신의 <꽃 그리고 변주>(현대시조 봄호)는 섬세한 시적 감각과 시조의 변용을 보여주고 있는 작품이다.
사모의 그 별떨기 내것이 아닌 양
울컥울컥 치미는 핏덩이도 차겁고
설익어 아픈 가슴은 파열음도 없습니다.
이 작품은 꽃이 피는 상황을 강하게 은유하고 있는 부분이다. 이전의 시편들에서는 화자가 꽃이 피는 절정에 교감을 가지고 동참하는 것이 예사이나, 여기서는 그러한 관용적 표현이나 진부한 시상을 깨뜨리고 있다. 오히려 꽃과의 교감을 "내 것이 아니"라고 해서 꽃이라는 사물과 개화의 순간을 차갑게 응고시키고 있다. 이호우 시인의 <개화>라는 작품에서 "나도 가만 숨을 죽이네"라고 했던 것과는 정반대이다. 그러한 냉정한 감정의 절제에 이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래도 자존의 뼈 빙벽을 오르면 ( ) 내 삶은 이리 서러운 빙산으로 섰습니다.
꽃의 개화를 결빙시키고 그러한 대상을 바라보던 자아도 결국 빙산이 되고 만 것이다.
여기서 오랜 시조의 문법을 벗어나 새로운 시의 방법을 터득하고 있는 박연신의 감각이 두드러짐을 확인하게 된다.
정운엽의 <추신>(현대시조 봄호)은 간결한 어조를 통해 순연한 시상을 일구었다.
바다 건너서
엽서 한 장이 날아 왔다.
앓다 못해
가을은
가슴 다 탄 낙엽만 떨구고
그 모습
허전한 安否
허공 하나를 펴든다.
시인은 일상적 사건을 예사롭게 보지 않고 있다. 낙엽이 지는 사건을 통해서 가을이 지니는 공허한 심상을 일깨우고, 비어 있는 공간을 허공이라고 해서 낙엽지는 사연을 핍진하게 전달하고 있다.
공교롭게도 정위진의 <낙엽을 밟으며 1>(현대시조 봄호)라는 작품도 가을을 소재로 하고 있다.
미처 개키지 못한
아침이불 모양새로
포도에 널부러진
낙엽들의 가쁜 숨을
흰 이빨
드러내면서
차운비가 흩고 간다.
가을의 모습을 이렇게 시리게 표현할 수 있는 시인의 감각이 돋보인다. 낙엽이라는 단순한 사물의 현상을 통해서 우리 마음에 자리잡고 있는 감성을 흔들어 놓았다. 시조가 보여주는 가능성은 이처럼 단순한 일상을 높은 시상으로 바꾸는 매력에 있는 것이다.
이상으로 시조의 도시성과 지역성에 이어서 다른 한 편으로 높은 서정성을 얻고 있는 시편을 일괄하였다.
다양한 시상을 통해서 커다란 상과를 획득하고 있는 것이 5월호의 시조단이라고 할 수 있다.
11. 시조의 제재 주제 기법의 확대
시조의 참신함이 해명되어야 시조의 창작 근거와 존재 이유가 해명될 수 있다. 참신함이라고 하는 것은 매우 막연하지만 그와 대응되는 개념을 보면, 쉽사리 그 뜻을 이해할 수도 있다. 참신함은 항상 진부함과 대응된다. 참신함이 진부함이 됨으로써 시인의 시상은 생명을 마감하게 된다. 그러나 진부함과 참신함을 대립적인 것으로 이해하고 말 것은 아니다. 진부함 속에서 참신함의 싹이 자랄 수 있고, 참신함에서도 진부함을 찾을 수 있기도 하다.
일찍이 이러한 문학적 규범은 서정 갈래를 논의할 때에 항상 거론되는 것이다. 이규보가 신의(新意)를 창출한다고 하거나, 이인로가 용사(用事)를 내세운 것은 이에 적당한 사례로 꼽힌다. 서로 보완적인 관계에 있다 해도 논의의 방향은 항상 문제되게 마련이다. 시학의 전통이 규범으로 확립한 한시에서 뿐만아니라, 시조의 현재적 모습을 거론함에 있어서도 이러한 전례는 여전히 유용한 미덕을 지닌다.
그렇다면 우리 시조의 참신함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겠는가? 그것은 우선 제재에서 찾아야 마땅하다. 김보안의 <인두>(현대시조 여름호)는 제재에 있어서 참신함을 지닌 타당한 사례이다.
代물린 불씨 안고
뜨겁게 타는 女心
사랑이 일구어 낸
그리움 타는 가슴
너 작은
몸짓 하나로
기다림을 익힌다.
일렁이는 불빛따라
시린 풍지 홀로 울고
깃 섶을 휘돌면서
도련(?) 펴다 지쳐 버린
앙가슴
터지는 애련
눈물 말려 깊은 밤.
이 작품에서 다루고자 하는 바는 인두라는 전통적 소재에 맞물린 기다림을 노래하고 있다는 점이다. 단순히 인두와 맞물려 시심을 노래했다 해서 이 작품의 참신함을 지적하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인두를 떠받들고 있는 시어의 연쇄를 주목해야만 인두가 지니는 시적 제재로서의 의의가 부각된다. 먼저 이 시인은 "대물린 불씨"라고 했다. 인두는 달구어야만 쓸 수 있으므로 대를 물려서 오래된 전통의 소산임을 강조하고, 그것과 항시 마주하는 한 사람의 주체로서 여인을 상정한다. 그럴 때에 그것은 단순한 대상일 수 없고 여인과 지속적인 관계를 맺어온 생명이다. 그래서 화자와 어울려 기다림을 대변하는 것으로 된다.
제2수에서는 다시 농밀한 기다림의 모습을 부여한다. 다소곳한 여인이 앉아 홀로 지키는 면모를 "시린 풍지 홀로 울고"라 했다. 문풍지라 하지 않고 풍지라 하여 함축된 시적 의미를 간결하게 요약했다. 구겨진 인생의 면모를 도련이라는 용어로써 간결하게 눙치는 시적 어휘 선택은 돋보인다.
고색창연한 시어에도 불구하고 인두라는 시적 상징과 제재를 관련지음으로써 남다른 참신함을 구현했다 하겠다. 제재의 선택과 이 제재의 선택에 따른 치밀한 시어의 구사는 시조의 장점을 선보인 좋은 사례이다. 이를테면 1930년대 백석 시인이 선택한 제재와 동일하되 백석과는 사뭇 다른 간결한 시상, 농축된 시어의 구사를 통해 정서적 긴장을 이끌어 낸다. 그것이 또한 시조의 현재적 가능성을 대변하는 것으로 보인다.
제재의 선택과 대응되는 주제의 새로움을 보여주는 작품도 있다. 예컨대 송선영의 <낙도행 Ⅰ>(현대문학 9월호)과 이일향의 <묵주처럼>(현대문학 9월호)이 곧 그것이다.
陰五月, 맵찬 아침, 완도항은 늦잠이다
붉은 동백 한 송이가 밟고 오는 내 그림자
이윽고
긴 경적소리
센 머리칼 얼붙누나.
<낙도행 Ⅰ>
이 밤 소쩍새소리
굽이 잦은 강물을 덮고
흘린 눈물을 꿰어
묵주처럼 걸었다가
한 목숨 다하는 그날
뉘 손에다 옮길까.
<묵주처럼>
인용한 작품 가운데 첫번째 것은 <낙도행 Ⅰ>인데, 서정적 묘사가 산뜻하다. 흔히 시조의 전통은 충일한 묘사의 담백성을 꼽고 있으나, 담백성에다 약간의 색채를 띠고 있다.
추운 아침의 게으른 경치를 연상시키는 첫 구절에 이어서 강한 색채의 연상은 가히 담담하다. 단일한 현상은 색채를 더하고, 이어서 "긴 경적소리"라고 해서 청각적 느낌을 한층 고조시킨다. 시간적 효과에다 청각적 묘사를 보태고, 다시 시각적 효과를 얻고 있다. 뚜렷한 감각의 율격적 전이를 통해서 한층 새로운 의미를 터득하는데, 낙도행의 날카로운 긴장을 환기한다.
구태의연하게 시조의 주제를 반복하지 않으면서도 현대시가 이룰 수 없는 시적 성취를 함축적이면서도 다면적으로 보여준다 하겠다. 시조는 이제 더 이상 진부한 것이 아니다.
<묵주처럼>의 주제 또한 단순하지 않다. 일상적으로 등장하는 소재에 의존하면서도 맨끝구절에서 단순한 소재를 차원을 달리하여 재구한다. 소쩍새 울음이라는 대상에서 눈물에 이어지는 묵주로 형상화하다가, 마침내 새로운 대상을 향해서 귀결되는 시적 전이와 발전이 새롭다 하겠다.
선정주의 <別 處容舞>(현대시조 여름호)라는 작품은 기법에 있어서 시조의 쇄신을 꾀한 작품이다. 이미 제목에 암시되어 있듯이 선정주의 작품은 <<삼국유사>> [처용랑 망해사조]에 대한 우의(寓意)이다.
화려한 佩物로는
愛憎이 달래지는가
-全身에 비린내 나는 東海에서 온 낯선 男子, 등에는 逆鱗도 있었다.
그 품에 안기면 온 삭신이 아려, 삭신 아릴수록 못잊을 新羅의 男子,
달밝은 밤 남몰래 만나 情火를 재우느니 원수라도 갚는듯.
그 밤의 달은 傍觀者였다
달은 언제나 그랬다
<別 處容舞 2>
처용가를 지어 부른 처용은 매우 흥미로운 존재이다. 역신이 범하고 있는 아내의 정사를 대범하게 보면서 이른바 <작무이퇴(作舞而退)>했다는 전설을 남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처용의 심정을 환히 들여다보듯 이 시인은 처용의 심정을 우의적으로 둘러친다. 처용에게 깊이 내려 있는 아픔의 근원을 더듬고 사실은 '역린'도 있었음을 잊지 않았다. 그러한 사정을 초장과 중장의 극적 대립을 통해서 한편으로는 애증의 근원적 제시를, 다른 한편으로는 애증의 실상을 아울러 제시한다. 초장은 애증의 상황적 제시이고, 중장은 그에 대한 잔사설을 길게 풀었다. 종장에서는 처용전설에서 핵심적으로 등장하는 달로써 초장과 중장의 시상을 간추렸다. 그래서 달을 방관자로 규정하고, 달은 언제나 그랬다고 했다.
처용의 쓰리고 아린 내면을 우의적으로 다루어서 겉으로 드러난 실상과 속으로 감추어진 처용의 고민을 드러내고, 그러한 겉과 속을 합쳐서 처용전설이 지니는 무심(無心)과 무욕(無慾)의 경지를 달로 재규정한 것이 선정주 작품의 묘미이다.
시조가 현재적 의의를 갖는 이유는 시조 형식의 진부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현재의 분위기에 맞게 변용시키는 슬기의 소산이라는 점 때문이다. 새로운 시조의 실상은 제재를 새롭게 선택하는 점, 주제를 쇄신하는 점, 시조의 기법을 혁신하는 점이라 할 수 있다. 시조가 갖는 의의를 항상 재점검하면서 대상을 새롭게 규정하는 방법과 관점이 우선적으로 확보되어야 한다. 시조의 혁신과 쇄신은 항상 제기되는 과제이다.
12.현대시조와 시정신
- 시작을 위한 한 검증 -
시조는 한국 서정시의 고향이자 우리 민족의 유일한 전통시입니다. 그러나 현대시조를 논할 때, 우리는 시조라는 장르의 전통이 우리 문학에 무엇을 해 주고 있으며 무엇을 해야하는가 하는 물음과 의문에 접하게 됩니다.
전통의 부정론자들은 흔히 전통이라는 말을 과거의 답습, 독창성이 없는 것, 이미 지나버린 것, 보수적, 회고적, 과거 지향적 운운하며 매도해 버리기 일쑤입니다. 그러나 전통이라는 개념은 인습과 구분되는 것으로써 현대에 되살려야 할 가치있는 것, 즉 새로운 창조의 기반이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현대의 문학이라고 하여 과거의 문학이 사용하였던 언어를 사용하지 않는 것이 아니며 표현력과 문학 정신(표현 내용)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렇게 볼 때 현대에 속한 개인의 독창력이란 실로 미미한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가장 전통을 강조한 T․S 엘리엇은 [전통은 그저 상속되는 것이 아니다. 전통을 갖기 원하거든 굉장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말하고 있으며, 전통을 살아가는 힘으로써 창조의 동력으로 삼기 위해서는 답습과 고수가 아닌 연구와 추구의 노력이 따라야 할 것입니다.
"얇은 紗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파르라니 깎은 머리 박사 고깔에 감추오고/ 두 볼에 흐르는 빛이 정작으로 고와서 서러워라"나, "이밤사 귀또리도 울어새는 삼경인데" 뿐만 아니라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하여서/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와 같이 시조의 음률은 시조가 아닌 조지훈 서정주의 현대시에서 더욱 인상적으로 나타나고 있음을 볼 때, 시조의 전통은 현대시에 아주 중요한 요소로 무의식중에 확산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토록 문학의 전통은 과거의 유산을 창조적으로 깊이 받아들여 뜻하지 않은 형태를 취하기도 한다고 말한 이상섭 교수는 또 T․S 엘리엇의 전통 의식이 <荒蕪地>과 같은 기발한 작품으로 나타날 줄은 아무도 예기치 못했던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현대시조는 한민족의 전통시로서의 몫을 다하며 조용히 그러면서도 다양하게 발전해 왔습니다.
시정신의 면에서 볼 때, 전래적인 主情主義와 신문학 이후의 주지주의, 그리고 主意的인 시조의 내용들로 구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주정주의 시조는 고시조뿐만 아니라 현대시조의 주류를 형성하고 있으며 국문학상 시가의 중심적인 서정 세계이기도 합니다.
그 중 감각 내용을 주로 한 시조는 감성이 빚어내는 감정 내용의 가장 기본적인 것입니다.
그리운 옛날 자취 물어도 알리 없고
벌건 뫼 검은 바위 파란 물 하얀 모래
맑고도 고운 그 모양 눈에 모여 어린다.
가람, <계곡> 중에서
이 시조는 주로 시각적인 단일 감각에 의한 표현이지만 청각, 취각, 미각, 촉각 등의 복
합적인 공감각적 감정 내용의 시조들을 볼 수 있으며 이러한 감정 내용은 신화적 감각
의 내용까지 확대되어져야 하리라 봅니다.
감각이 선택되고 종합되어 이루어지는 정서 내용은 주정적인 시조의 중심을 이루고 있
습니다.
내 고향 남쪽 바다 그 파란 물 눈에 보이네
꿈엔들 잊으리오 그 잔잔한 고향 바다
지금도 그 물새들 날으리 가고파라 가고파.
이은상 <가고파> 에서
정서란 주관적인 감정 내용으로서 비교적 오랫동안 지속되어 온 정신입니다.
김상옥의 섬세한 서정과 이근배의 역사의식을 바탕으로 한 민족정서들은 평가치를 가
진 것이 사실입니다. 현대시조의 개인적 정서, 민족적 정서, 자연의 서정은 국문학에 있
어서 한 특성을 이루고 있습니다만 시대적 감각과 정서의 참신성이 약점으로 지적될 수
도 있을 것입니다.
나아가 恒情的인 정서로 情操의 시조를 들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여울 바닥에는 잠 안 자는 조약돌을
날 새면 하나 건져 햇볕에 비쳐주리라
가다간 볼에도 대어 눈물 적셔 주리라.
박재삼 <내사랑은> 에서
동양인의 감정 생활의 한 전통을 이루어 오고 있는 것이 情操입니다. 정몽주의 <丹心歌>를 비롯한 시조 내용의 본류로서 사물을 가장 가깝게 그리고 가장 멀리까지 따라가는 정신입니다. 현대시조의 정서는 정조로서 좀더 가다듬어져야 하리라 봅니다.
현대 시조는 위에 든 바와 같은 감각 내용과 정서 내용 그리고 정조 내용이 한편의 시조 속에 유기적으로 조화를 이루며 主情的인 서정 세계를 열어가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또 하나의 시정신으로 주지적인 시조를 들 수 있습니다. 시조에 있어서 主知的이라고 할 때는 두 가지 측면에서 살펴집니다. 하나는 감정의 절제로서 감정을 통솔하여 정서적 질서화를 기하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비판 의식입니다. 감정의 절제는 시조가 요구하는 기본 원리며, 비판 의식은 현대 사회가 요구하는 기본적인 시인의 의식입니다.
현대시에 있어서는 방법론상 시각적인 이미지를 형상화하는 회화성을 들 수 있습니다만 시조는 본질적으로 율문 미학으로서 감정의 절제와 인식 상황으로 나타나 있으며 기지를 주로 한 시조, 지혜를 주로 한 시조, 예지를 주로 한 시조들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기지의 시조란 우리의 知性 내용 가운데 가장 기본적인 것으로서 감정 내용에 비하면 감각과 같은 것입니다. 주로 풍자적인 시조와 사설시조들에 많이 나타나고 있으며, T․S 엘리엇의《황무지》에서 많이 볼 수 있는 것도 기민한 기지의 움직임입니다.
지혜의 시조란 우리가 흔히 말하는 이해라든지 인식이라고 하는 것도 지혜의 특정적인 나타남의 하나입니다. 따라서 지혜의 시조란 이러한 유형의 시조를 말하며, 박재삼의 시조들이 이해를 주로 상징하고 있다면 서벌의 <어떤 經營> 등은 자아의 인식 상황을 표현한 것이며 현실적 상황 인식의 시조들은 윤금초 유재영의 시조들을 들 수 있을 것입니다.
일찍이 서양 시인으로서 동양적 지혜에 따라 성공한 시적 경향으로서 라이나 마리아 릴케의 이해 상징의 시와 폴발레리의 인식 상징의 시를 들 수 있습니다. 현대 시조에 있어 철저한 인식 상황의 표출과 의식의 첨예화가 요구된다 하겠습니다.
동양인의 知性 생활에 표준이 되어오는 것은 역시 예지라고 하겠습니다. 한국시가는 향가 이후 시간적으로 영원을, 공간적으로 무한을 투시하는 예지를 시의 지성적 내용으로 삼아왔고 시조도 예외일 수 없는 것입니다.
無盡山 無盡泉에
절로 고인 바위샘물
바릿대 가득 떠서
먼데 하늘을 담아 들고
돌아와 滿空에 서니
달마저를 얻었네.
정완영, <得月>
"절로"라는 자연의 질서 속에 동화하면서 滿空의 무심에서 物我合一의 예지로서 달과 한 항렬에 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주지적 시조의 한 방법론으로서 임영창의 와 같은 모더니티나 장순하의 <고무신>과 같은 시각적 이미지의 추구는 그 성공 여부를 떠나 현대 시조의 한 모색이라 할 것입니다. 주지적 시정신도 이제 현대시조의 한 자리를 굳건히 하고 있는 것입니다.
동양의 시론과 서양의 시론 사이에는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만 {書經}의 <詩言志>라는 정의가 자주 인용됩니다. 곧 主意의 시로서 시에 있어서 그 정신이 지향하는 마음의 성격을 말합니다.
차라리 絶望을 배워 바위 앞에 섰습니다.
무수한 주름살 위에 비가 오고 바람이 붑니다.
바위도 세월이 아픈가 또 하나 금이 갑니다.
이호우, <龜裂>
主意시조라고 할 때, 순수 의지만이 의지의 역할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긍정적일 때는 창조 의지가 되며 부정적일 때는 항거로 나타납니다. 그리고 이 양자의 요소가 같이 나타나기도 합니다. 이 忍苦의 의지를 보인 <바위>는 主意的인 시조의 한 보기가 된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어떠한 시조가 情이나 知나 意로만 이루어지는 예는 드물며 主情시조라도 지적 요소나 意的 요소를 帶同하고 있으며 主知 시조도 情緖와 의미를 배제하고 성립할 수 없듯이 主意的인 시조 또한 情的 知的 요소를 대동하게 됩니다.
진정한 의미의 현대시조, 좋은 작품이란 知情意의 齊合의 시조일 것입니다.
꽃이 피네. 한 잎 한 잎
한 하늘이 열리고 있네
마침내 남은 한 잎이
마지막 떨고 있는 고비
바람도 햇볕도 숨을 죽이네
나도 가만 눈을 감네.
이호우, <開花>
현대시조는 시인에 따라 나름대로의 특성을 갖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보듯 정서나 지혜나 의지의 어느 한쪽만을 고양시키지 않고 齊合의 詩心으로 시정신을 삼음으로써 훌륭히 성공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현대시조는 인생(인간)의 전부분에 걸친 헤아림과 깨달음으로써 감동을 확대해 가며 심화된 전통정신에 의해 새롭게 창조되어 가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현대시조는 그저 3장 6구 12음보의 형식 요건을 갖춤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투철한 현실의식과 시정신의 가열성에 의해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으리라고 봅니다.
진정한 의미의 현대 한국시를 쓰고자 하는 노력에 따라 현대시조는 발전할 수 있을 것이며 시대와 사조를 초월하는 한국시의 定型이 될 것입니다.
제6장 현대시조 창작의 실제-나의 시조, 이렇게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