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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국독립유공자협회 원문보기 글쓴이: 순국선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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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국 · 김원범 형제 의병장
- 무등산에서 일어나 호남을 호령한 형제의병장 -
박성수(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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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김원국 김원범의 의병일지 1
2. 의병전쟁과 독립전쟁 3
3. 김원국 의병장이 남긴 격문 5
4. 격문에 나타난 의병정신 6
5. 13도 창의군의 서울 탈환 작전 11
6. 義兵의 나라, 한국 12
7. 성패불수의 정신 14
8. 호남 의병장의 맥락 17
9. 맺 는 말 20
10. 부록 자료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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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김원국 김원범의 의병일지
형인 김원국金元國의 본명은 김창섭金昌燮이며 1873년 전남 광주에서 출생하였다. 동생 김원범金元範도 1886년 광주에서 출생하였다. 나이 차이가 13세나 되었으나 1906년에 광주 무등산에서 의병을 일으켜 함께 의병장이 되어 참전하였다. 두 형제가 의병을 일으켰을 때 이 나라는 멸망 직전의 상태에 있었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어 나라 안이 발칵 뒤집어지고 전국에 의병이 일어났던 것이다. 특히 호남에서는 최익현이 궐기하여 많은 유생들이 참여하였고 기왕에 을미의병을 일으켰던 기우만, 기삼연이 다시 일어났다. 이에 고광순, 심남일, 안규홍, 조경환, 전해산 등이 잇따라 의병을 일으키니 1909년에 이르러 호남이 한말의병의 중심지가 되었다. 김원국 형제는 처음 단독으로 의병을 하다가 뒤에는 전해산 등과 같이 대동창의단을 조직하여 영광 불갑산, 장성 동화, 담양 한재, 함평 원야 전투 등 여러 지역에서 적을 무찔렀으니 사람들은 3백 년 전의 임진의병이 다시 일어났다고 칭송하였다.
이리하여 두 형제는 후세에 이름난 의병장이 되었다. 일제의 통계에 의하면 1909년 호남의병이 전국에서 60%에 달하는 전투를 벌인 것으로 나타나 있다. 또 전남 광주는 기우만의 굴기와 김원국 형제의 무등산 봉기로 의병의 발상지이자 동시에 마지막 전쟁터로 기록되었다. 그러나 광주 무등산 자리에 지금까지 기념비가 섰다는 소리를 못 들었다. 두 형제의 의병전쟁을 자세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김원국(1873.4.7 - 1910. 5.16)
1905년 김원국은 광산군 송정리에서 왜군을 타살하고 피신하였으나, 의병을 일으키는데까지 이르지 못했다. 1906년 3월 김원국은 동생 김원범과 함께 무등산에서 300명의 의병을 규합하여 의병대장으로 추대되었고, 동생 김원국은 그 선봉장이 되었다.
1907년 9월에는 호남의병장의 거목인 기삼연의 의병부대에 합류하였고, 이어 12월에는 김준과 합진하여 40여명의 적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1908년 1월 1일 창평 무등촌, 같은 해 3월 7일에는 영광 토산, 25일에는 광산 어등산, 그리고 같은 해 11월에는 장성 남월산에서 각각 적 일본군과 교전하여 많은 적을 사살하였다.
1908년 9월 5일에는 의병장 조경환과 광주군 仙岩 시장에서 만나 동생 김원범이 도포장으로 활동하고 있음을 알고 동생을 따라 선봉장이 되어 활약하였다.
그러나 이듬해인 1909년 1월에 의병장 조경환이 전사하자 김원국은 잔여 의병을 수습하여 의병대장을 맡아 투쟁하였다. 김원국은 郭鎭一을 선봉장, 黃德信을 중군장, 金在淵을 후군장, 李敎學을 도포장, 趙贊成을 호군장으로 삼았고, 그밖에도 김용조 김인호 김인조 김자선 신제국 이음집 이원신 등이 의병으로 활동하였다. 이 가운데 김인조는 김원국의 조카였는데 어등산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김원국의 의병부대는 함평군 적량면, 여황면, 오산면을 근거지로 하여 광주, 나주, 능주, 동복, 창평, 담양, 장성, 영광 등지에서 활동하였다.
김원국 대장은 나주향교 유림들에게 격문을 보내어 의병을 일으킨 뜻을 알렸고, 일본인이 장악한 광주 세무서에 대해서는『호남의소』란 이름으로 세금을 거두지 말라고 명령하였다. 그리고 일본인에게 아부하는 친일파, 일진회원, 밀정 등을 처단한다고 경고하였다.
1909년 1월 10일 김원국은 장성 남면에서 부하 150명을 거느리고 일병과 교전하였으며, 동년 3월 18일에는 부하 80명과 함께 나주시장에서, 4월 2일에는 함평군 오산면에서 일본군 헌병부대와 교전하여 적에게 큰 피해를 입혔다. 그리고 5월 19일에는 불갑산에서 적과 교전하여 적을 괴롭혔으나 김원국도 부상을 입었다. 부상으로 선봉장 곽진일에게 지휘권을 넘기고 광주군 우산면 목촌에 은신하여 요양 중 1909년 6월 10일 밤 적이 기습하여 체포되었다. 7월 1일 광주 감옥으로 이송되었다가 다시 대구로 이송되어 이듬해 대구감옥에서 교수형으로 순국하였다.
1963년 대한민국 정부에서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2) 김원범(1886.1.9 - 1909.9.2)
1906년 3월 형 김원국을 대장으로 하고 자신이 선봉장이 되어 광주 무등산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1907년 8월 기삼연, 김준이 의병을 일으키자 김준 휘하에서 활동하였다. 장성 등지에서 300명의 의병을 이끌고 일본군과 맞서 싸워 적 40여명을 사살하였다.
1908년 전해산과 합세하여 대동창의단을 조직하여 전해산을 대장으로 추대하고 자신은 중군장이 되었다. 정원집이 전사한 뒤에는 선봉장이 되어 끝까지 전투를 계속하였다. 특히 일본군 장교 요시다(吉田)을 사살하는 전투에 참전하여 개가를 올렸으며, 동년 9월 전해산의 명령에 의하여 부하 20명을 거느리고 영광군 황량면에 살던 악명 높은 밀정 변영서를 총살하였다.
1908년 의병장 조경환의 휘하에서 도포장으로 형과 함께 전남 나주, 함평, 광주 어등산 일대에서 일본군과 교전하였다.
1909년 2월 마침내 광주 무등산 전투에서 적과 교전 중 체포되어 광주의 일본군 수비대에서 취조를 받다가 9월 2일 스스로 혀를 깨물어 순국하였다.
1968년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형과 같은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2. 의병전쟁과 독립전쟁
우리나라의 독립운동은 1895년의 을미의병전쟁으로 시작되었다. 10년 뒤 일제침략이 본격화되자 을사·병오의병(1905~1906), 그리고 정미의병(1907)으로 확대발전하여 김원국ㆍ김원범 의병장이 참전한 1908~09년에 절정에 달했다. 비록 일제의 무력(폭력)에 밀려 1910년의 경술망국을 하였으나 50년 독립운동사상 가장 빛나는 장면이 의병전쟁이었다. 독립운동은 1910년 이전과 이후로 양분되고 있지만 사실은 연속되어 1945년까지 계속되고 있다. 따라서 의병전쟁이 1910년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독립전쟁으로 이어졌던 것이다. 그 결과 1919년에 3ㆍ1운동이 일어나고,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어 8.15광복을 맞게 되는 것이다. 비록 의병전쟁의 정신이 위정척사요 수구사상이었다고 하나 의병전쟁에 아무런 흠이 되는 것이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우리 독립전쟁에 정신적 기둥을 세워 준 것이었다.
국어사전에 보면 운동을 단순히 “몸을 놀려 움직인다.” 아니면 “어떤 일의 주선을 위해 힘쓴다.” 정도로 풀이되고 있다. 만일 운동이 그런 뜻이라면 「피와 목숨을 건 항일투쟁」이었던 독립운동에 그런 단어를 쓸 수 있는가. 「전쟁」을 「운동」이라 폄하한 것은 바로 제국주의 침략자들의 말장난이었다. 이 사실을 아는 국어학자와 역사학자는 많지 않다. 의병이 이미 독립선언을 1907년에 했고 1919년과 1941년에는 임시정부가 수립되어 대일선전포고를 했으나 우리는 그것을 잊었다. 그러니 미국과 소련이 한반도를 둘로 갈라 버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1945년 11월 광복을 맞아 임정 요인을 맞는 날 임시정부 요인을 환영하는 서울 군중대회는 요란하였으나 환영받는 요인들의 마음은 그리 편안하지 않았다. 돌이켜 보면 1910년 치욕의 경술년을 전후하여 수많은 애국지사들이 슬픔과 분노를 안고 나라를 떠났다. 단순히 운동하러 간 것이 아니다. 어떤 일의 주선을 위해 힘쓰기 위해 떠난 망명이 아니었다. 그 때 그들은 자신을 큰 죄인으로 알고 亡國奴라 했다. 나라를 망친 놈이란 뜻이다. 집안을 망친 놈보다 더한 죄인이 나라를 망친 망국노였다. 그러나 그들이 나라를 떠나가면서 지어준 이별가가 있었으니 去國歌였다. 누가 작사하였는지도 모르고 작곡자 또한 누군지 모르는 이 노래 맨 끝 절에 보면 이별할 때는 빈주먹으로 떠나지만 장차 돌아 올 때는 대한민국 깃발을 들고 올 것이라 쓰고 있다. 그러나 나라를 떠난 사람들보다 김원국 형제와 같이 끝까지 나라에 남아 목숨을 바친 사람들이 더 훌륭하였다.
항일의병전쟁의 연도별 추이-------------------------------------------------------------
년도 전투회수 전투참가 의병 수
1907 323 44. 116
1908 1,452 69, 832
1909 898 25, 793
1910 147 1, 891
1911 33 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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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인터넷에서 독립전쟁을 검색하면 미국의 독립전쟁과 그리스의 독립전쟁만 있을뿐, 우리나라 독립전쟁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다. 왜 우리는 의병전쟁 20년과 독립전쟁 40년의 역사를 기억하지 못하는 것일까. 불과 몇 년도 하지도 못한 미국의 독립전쟁은 독립전쟁이라 하는데 우리 독립전쟁은 전쟁이라 하지 못하는가. 부끄러운 일이지만 여기서 우리는 우리들의 역사 열등감을 발견한다. 영국과 불란서의 100년 전쟁은 전쟁이고 우리의 독립전쟁은 전쟁이 아니란 말인가. 우리는 무려 50년 동안 독립전쟁을 했는데 왜 전쟁이라 말하지 못하는가.
우리 독립전쟁은 인도의 독립운동과 달랐다. 간디처럼 단식 투쟁만 한 독립운동이 아니었다. 그런데 왜 우리는 전쟁을 운동이라 하는가. 전쟁과 운동은 다르다. 전쟁에 선전포고를 하지 못하고 싸우는 독립전쟁이 있고 그렇지 못한 전쟁이 있다. 우리는 국권을 상실하여 1941년에 가서야 선전포고를 하였으나 당당하게 침략자와 싸워 이긴 것이다. 그러나 우리 역사교과서를 보라. 몽고와 고려의 40년 전쟁을 抗蒙鬪爭이라 부르고 있다. 투쟁과 전쟁은 다르다. 麗蒙戰爭을 왜 항몽투쟁이라 하는가. 임진왜란에서 싸운 군대는 모두 의병이었다. 그러니 당당한 韓日戰爭이었다.
일제는 한말 의병을 <폭도>라 하고 자기들이 침략자인데도 마치 의병이 침략자인 것처럼 폭도를 <토벌>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1910년의 한일병합을 합법적이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니까 아직까지도 한일전쟁은 끝나지 않고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국군이 없으면 의병이 국군이었다. 흔히 제국주의열강의 침략에 저항한 전쟁을 민족전쟁이라 하기 때문에 의병, 독립군, 광복군은 민족전쟁을 치룬 우리의 국군이었던 것이다. 20년 의병전쟁으로 우리는 500만의 목숨을 잃었다. 그런데도 의병을 운동이라 할 수 있는가. 국권을 잃었으나 의병이란 국군이 있어 국맥을 이어준 것이다.
3. 김원국 의병장의 격문
김원국金元國 (일명 金元局, 본명 김창섭金昌燮)과 동생 김원범金元範은 1906년 김원국(33세)이 의병장이 되어 출전하였고, 동생 김원범은 20세에 형과 같이 의병에 참전하였다. 김원국은 그 이전인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광산군 송정리에서 왜군을 타살하고 피신한 일이 있었다. 그런 그가 을사늑약이 체결되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혼자서 의병을 할 수 없는 일이어서 동지를 기다리고 있다가 1907년 12월에 의병장 김준金準이 궐기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부하 300명을 거느리고 광주의 일본군수비대를 공격하여 왜군 40여명을 사살하였다.
그 뒤 1908년 9월 5일에는 의병장 조경환曺京煥과 광주군 선암장에서 만나 의병을 일으키기로 합의하고 그 先鋒將이 되고 동생 김원범은 都砲將을 맡았다. 그러나 1909년 1월 10일 어등산 전투에서 의병장 조경환이 전사하고 동생 김원범도 체포되자 형인 김원국은 잔여 의병을 거느리고 다시 의병대장이 되어 원수를 갚기로 결심하였다.
김원국은 예하 부대장으로 황진일을 선봉장, 황덕신을 중군장, 감재연을 후군장, 이교학을 도포장, 조찬성을 호군장으로 임명하고 부대를 편성하였다. 김원국의 의병부대는 함평군 적량면, 여황면, 오산면 등지를 근거지로 삼고 광주, 나주, 능주, 동복, 광양, 장성, 영광 등지를 점거하여 적에게 큰 피해를 입혔다. 이때 김원국은 나주향교에 격문을 발송하여 다음과 같이 호소하였다. 이 격문은 김원국 형제의 의병정신을 너무나 선명하게 요약한 글이라 여기에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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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 문
오오! 비록 이 나라는 동방의 한 작은 나라에 불과하지만 예악과 문물이 찬란하여 중국에 비길만하여 소중화라 칭찬 받았으니 그것은 문명때문이었다. 지난날 임진왜란이 일어났었다는 사실은 삼척동자도 다 아는 역사이며 그때 받은 원한은 절대 잊을 수도 없고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바다건너 외딴 섬에 살고 있는 왜놈들은 짐승과 같은 종자들이라 비록 우리나라와 이웃하여 살고 있으면서도 몇 번이나 침략해 오니 역사란 결코 돌고 도는 것이다. 그래서 최근에는 감히 서로 통상하여 시장을 열자고 유인하더니 국모를 시해하고 임금을 협박하고 국권을 침탈하고 우리 재산과 세금을 마음대로 거두어 가니 그 변괴가 끝이 없는 것이다. 그 죄를 생각하면 천만번 죽여도 무거운 형벌이 아닐 것이다.
다행히 하늘이 우리나라를 구원하니 사방에서 의병이 일어났으며, 그 군율도 늠름하다. 이에 불민하지만 김원국 등이 분에 못 이겨 동지 장사들과 손을 잡고 하나가 되어 의병을 일으켰습니다. 우리는 오로지 창궐하는 왜놈들을 토벌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왜놈이 들어와서 우리 백성을 괴롭히고 도성을 점거하는 것을 직접 눈으로 보고 있습니다. 바라건 데 뜻있는 선비들께서는 한 마음이 되어 외치고 일어납시다. 그러시면 기어이 전쟁에 이기고 성공할 것으로 믿어 의심하지 않습니다. 그리하여 나라의 원한을 풀어 봅시다. 그리고 국토를 회복합시다. 살아서는 이 나라의 신하요 죽어서는 이 나라의 귀신이 되는 것이 아닙니까. 어찌 태연히 앉아서 저들에게 곤욕을 당하고만 있을 것입니까. 우리의 심정을 어찌 말로 다할 수 있습니까만은 여기에 몇 자 적어서 나주향교 유림들에게 삼가 통고하는 바입니다.
기유(1909) 2월 일 호남의소 김원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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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김원국 의병장의 격문을 통해 우리는 김원국 의병장이 왜 의병을 일으킨 것인가 그 진의와 정신을 알 수 있다. 김원국 의병장은 한결 같은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과 인류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일어났던 것이다. 그의 애국심과 인류애는 정의를 지키고 불의를 배척하자는 위정척사衛正斥邪 사상에서 우러났다. 모든 의병들이 김원국 의병장과 같은 정신을 가지고 일어났다. 한말 의병은 오로지 한 가지 마음과 한 가지 精神으로 왜적과 싸웠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이 남긴 글과 말은 나라사랑 하나만으로 뭉칠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 민족의 결점은 통일을 모르는 모래알과 같은 마음이라 했으나 의병의 마음은 모두가 하나였다. 큰 바위덩어리와 같았고 그것이 독립정신으로 이어진 것이니 김원국 의병장의 격문에서 그것을 읽을 수 있는 것이다.
4. 격문에 나타난 의병정신
김원국ㆍ김원범 의병장의 의병전쟁은 위의 격문에 잘 나타나 있다. 짧은 글이지만 의병정신의 모든 것이 담겨있어 이를 소상하게 분석하기로 한다.
1) 오오! 비록 이 나라는 동방의 한 작은 나라에 불과하다 하지만 禮樂과 文物이 찬란하여 가히 세계에서 가장 앞선 문명국이라 할 수 있다.
우리나라는 이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선진국이요 문명국이다. 그래서 소중화라 칭찬받았다. 오늘의 선진국은 물질문명의 선진국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정신문화로 평가하면 지난 100년 동안 우리는 날이 갈수록 정신적인 후진국이 되었다. 그것은 왜국의 개화사상을 받아들여 선진국의 물질문명과 서구문명의 독극물을 마셨기 때문이다. 일본을 통해서 마신 서구문명의 독극물은 약육강식을 정의로 알고 경제적ㆍ군사적으로 강한 나라는 얼마든지 약한 나라를 침략하고 접어 삼켜도 괜찮다고 하는 부도덕한 가르침이었다.
2) 그래서 우리나라를 小中華라 칭찬하였다.
소중화란 말을 트집 잡아 한말의병들은 사대주의 사상을 가진 유학자들이니 배울 것이 없다고 하였으나 큰 잘못이었다. 중화는 중국과 다르다, 즉 중화는 문명이란 뜻이지 중국 즉 청나라란 뜻이 아니었다. 김원국의 격문에 말하기를 우리나라는 禮樂과 文物이 찬란한 나라라 하였다. 정신문화가 찬란한 나라란 뜻이었다. 당시 중국이 중화가 아니라 한국이 중화요 문명국이라는 인식이 이미 오래된 사상이었다. 여진족이 지배하는 오랑캐의 나라 청나라는 이미 야만국이지 문명국이 아니었다. 왜국은 물론 청나라는 우리 문명국이 토벌해야 할 나라였다. 따라서 이 세상에서 문명국은 오로지 우리나라 밖에 없었다. 우리가 망하면 이 세상에 유일한 문명국이 사라지고 온 세상이 야만국이 되는 것이다. 의병은 이 나라를 위한 의병일 뿐만 아니라 세계 인류를 위한 의병이었던 것이다.
3) 지금 우리나라를 침략하고 있는 일본이란 나라는 지난날 우리나라를 침략한 왜놈들이란 사실을 삼척동자도 다 알고 있다. 아무리 300년이 지났다 해도 그 역사와 그 원한을 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임진왜란의 수난을 역사교과서를 통해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지만 당시의 사람들은 귀를 베어가고 코를 베어간 왜놈의 만행을 어찌 잊을 수 있었겠는가! 왜놈들은 남원과 진주에서 우리 선조들의 귀와 코를 잘라 소금에 절여 저들의 상전 풍신수길에게 바쳤다. 그 유적지가 지금도 일본 경도 풍신수길 신사 앞에 이총이라 하여 남아있다. 그러나 이기백의『한국사신론』을 읽어보면 임진왜란에 대해서는 단 두 쪽 반의 지면에다 간략하게 기술하고 있는데 귀를 잘라간 만행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침략자 풍신수길이 조선을 보기를 중국으로 가는 중간 다리로 생각했을 뿐 아니라 그 옛날 신공황후가 조선을 정벌하여 任羅日本府란 식민지를 둔 나라이기 때문에 침략해도 된다고 생각한 사실도 기술하지 않았으니, 임진왜란이 일어난 원인을 알 수 없고 한말 의병이 왜 일어나야 했는가를 알 수 없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조선을 침략하기 전에 미리 조선팔도를 8명의 왜장들에게 나누어 주었다는 사실도 기술하여야 하는데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그러니 우리 역사 교과서에 일제말기의 종군위안부와 강제징병한 사실에 대해 기록할 리 없는 것이다. 그러면서 일본을 향해 이런 만행을 교과서에 실으라고 요구할 자격은 없는 것이다.
4) 그래서 바다건너 외딴 섬에 살고 있는 왜놈들은 짐승과 같은 종자들인데 그런 놈들이 우리나라와 이웃하여 살고 있으면서 단 한번 침략해 온 것이 아니라 몇 번이나 침략해 왔는지 모른다. 역사란 돌고 도는 것이다.
임진왜란의 피해는 매우 커서 그 뒤 200년간 우리나라의 경제는 엉망이 되어 발전하지 못하였다. 그런데 마치 임진왜란 이후 우리 경제가 발전한 것처럼 기록하고 있으니 임진왜란 이후 우리나라 경제가 발전하여 근대화의 맹아가 싹튼 것처럼 우리 교과서는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왜구에 대해서도 이미 중종 7년에 체결된 임신약조(1512) 이후 더 이상 침략이 없었던 것처럼 기록하고 있다. 당시 강진에 살고 있던 다산 정약용에게 물어보라. 왜구가 얼마나 심했는지를 적나라하게 기술해 주고 있어 한 눈에 알 수 있다. 그러나 우리 교과서에는 전혀 그런 사실이 기록되어 있지 않는 것이다. 일본은 지금도 독도를 자기 나라 땅이요, 자기들은 침략한 일이 없다고 하면서 재침략을 노리고 있다. 이것이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란 사실을 우리는 역사교육을 통해 알아야 할 것이다.
5) 불행히 최근에는 감히 서로 통상하여 시장을 열자고 유인하더니 우리나라 국모를 시해하고 임금을 협박하여 국권을 침탈하더니 우리 재산과 세금을 마음대로 거두어 가니 그 변괴는 끝이 없다. 그 같은 왜의 범죄를 생각하면 천만번 죽여도 가볍지 않을 것이다.
1876년의 江華島條約이야 말로 단순한 開港이 아니라 일제침략에 대해 문을 여는 행위로서 병자호란 때 인조가 삼전도에 나아가 청 태종에게 항복한 사건 이상의 모독이었다. 왜 고려가 망하고 고려의 수도 송도가 개성이라 바뀌었는가 하면 고려의 수도가 이성계에게 문을 열어주었기 때문에 고려가 항복했다는 뜻이었다. 개항도 마찬가지다. 개항은 일제침략의 시작으로 임진왜란의 재발이요 우리나라의 항복을 의미하는 대사건이었다. 일제는 처음 서로 문을 열어 通商하자 하더니 전국에 개항장을 만들어 씨구려 일제상품을 팔아 조선의 경제를 흔들었고 이어 임금을 협박하여 국권을 강탈하였다. 그것도 부족하여 우리의 재산과 세금을 마음대로 거두어 갔다. 이처럼 김원국의 격문은 우리 근대사를 너무나 일목요연하게 잘 설명하고 있다. 의병이 왜 일어났는가를 이렇게 잘 설명한 글은 보지 못하였다. 만일 지금 일본이 독도를 자기네 땅이라 주장하는 것을 김원국 의병장에게 고한다면 “그 죄를 생각하면 천만번 죽여도 가볍지 않을 것이다.”고 대답하실 것이다.
6) 우리는 왜놈이 들어와서 우리 백성을 괴롭히고 도성을 점거하는 것을 직접 눈으로 보고 있습니다. 바라건대 뜻있는 선비들께서는 한 마음으로 외치고 일어나십시오. 그러면 기어이 이길 것으로 믿어 의심하지 않습니다. 그리하여 나라의 원한을 풀고 국토를 회복합시다.
1905년 일제는 우리 정부를 무력으로 협박하여 을사늑약에 도장을 찍게 하고 외교권은 물론 모든 입법ㆍ행정ㆍ사법권까지 강탈하여 백성을 괴롭히고 서울을 점령하였다. 이것을 직접 눈으로 보면서 가만히 서 있을 수 있는가. 모두가 한 마음이 되어 일어난다면 기어이 성공할 것으로 믿습니다. 모두가 한마음이 되어 일어선다면 반드시 이길 수 있다. 의병은 이기고 지는 것을 가리지 않는 것인데 꼭 이긴다고 말한 것이다. 의병이 이긴다면 어떻게 되는가. 나라의 원한을 풀고 국토를 회복하는 것이다. 전국의 의병이 각자 자기 지역을 점령하면 국토를 회복하는 것이다. 의병의 직접적인 목적이 빼앗긴 국토와 국권을 회복하는데 있다는 것을 격문은 명시하고 있다.
7) 우리는 모두 살아서는 이 나라의 신하요 죽어서도 이 나라의 귀신이 아닙니까. 어찌 태연히 앉아서 저들에게 곤욕을 당하고만 있을 것입니까.
전술한 바와 같이 우리 역사가들은 한말의병을 우리와 생각이 다른 사대주의사상을 가지고 있어 살아서는 중국의 신하요 죽어서는 중국의 귀신이 되고자 한 사람들이라 오해하였다. 우리는 지금 순수한 우리 문명이 무엇인지 모르고 살고 있다. 우리는 100년 전 모두 한복을 입고 밥을 먹고 숭늉을 마시고 살았다. 빵을 먹을 줄 몰랐고 커피를 마실 줄 몰랐다. 또한 차를 마실 줄도 몰랐다. 불교와 도교 그리고 기독교를 몰랐고, 죽어서 우리나라 귀신이 되어야지 중국이나 서양의 귀신이 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어느 쪽이 순수한 우리 한국인인가. 우리 것을 잊어버리고 우리 것이 무엇인지 모르고 살고 있으니 우리는 100년 사이에 한국인이 아닌 미국인이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광복의 의미가 무엇인가. 우리 문화, 우리 정신을 회복한다는 뜻이다.
형 김원국 의사는 불행히도 1910년 5월 19일 불갑산에서 적과 교전 중 큰 부상을 입어 부대를 부장인 곽진일에게 맡기고 몸을 감추었으나, 일진회원의 밀보로 적군에 피체되어 7월 1일 광주감옥을 거쳐 대구감옥으로 이송되어 사형선고를 받고 순국하였다.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103년 전 이야기다. 이 사실을 일제침략 문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金元國(金昌燮) 사형집행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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官報 4684호 융희4년 5월 21일(토) 內閣法制局官報課
內閣告示 제57호 內亂犯 이원길, 內亂犯 김창섭, 暴動ㆍ强盜ㆍ殺傷人犯 박봉석, 본월 16일 대구감옥에서 교수형의 집행을 완료한 것을 고시함.
융희4년 5월 20일 內閣總理大臣 이완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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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 김원국과 동생 김원범에 대해서는 동생이 형보다 앞서 全海山(전수용) 부대의 大東倡義團에서 중군장 또는 참모로 활동한 사실이『海山倡義錄』에 기록되어 있다.
대동의병대장 全基弘
선봉장 정원집
중군장 金元範
후군장 윤동수
호군장 박영근
척후장 이장택
참 모 金元國
두 형제의 이야기는 지역 주민들의 입을 통해 가까스로 오늘의 우리들에게 전해 내려오고 있고 문헌상으로는 앞에 제시한 격문으로 전해내려 왔다. 동생 김원범 의사에 대해서는 도통대장 박용식의 祭文이 남아있어 단지 都砲將 김원범, 總督將 박규봉, 1哨什長 이동언, 3초십장 원재용, 4초십장 서경수, 童蒙執事 김복동 등의 이름과 같이 전해지고 있을 뿐이다. 이 제문에 의하면 김원범 의사는 임진왜란 때의 錦山 七百義士의 위업을 이었다고 하면서 그 충절을 기리고 있다
김원국ㆍ김원범 형제의병장에 대한 기록은 일제의 헌병경찰 기록에 남아 있으나 모두 두 분을 폭도나 강도로 기록하면서 두 의사를 모독하고 있다. 폭력으로 한국을 침략한 일제가 폭도요 강도가 아닌가. 그런데 도리어 일제가 한국을 침략하지 않고 마치 한국이 한국을 침략한 것같이 왜곡한 기록이 일제의 문서들이기 때문에 그것을 자료라 하여 여기 인용하는 것은 마땅한 일이 아니다. 두 분의 순국이 있었기에 의병전쟁이 끝까지 빛난 것이며 그래서 독립운동이 시작되어 36년간의 모진 고초를 딛고도 다시 일어난 것이 8ㆍ15광복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나라 국사 책에는 의병에 관한 기록이 얼마나 들어있는가. 아주 미미하게 기록되어 있을 뿐이어서 한말 의병 없이는 독립운동이 없었다는 사실, 아니 광복이 없었다는 사실을 인식시키는데 미흡한 것이다. 그래서 의병전쟁이란 무엇인가를 알고 김원국 김원범 두 의사의 공로가 얼마나 큰 것인가를 알리기 위해 간략한 글을 쓰기로 한다.
5. 13도 창의군의 서울탈환작전
우리는 3.1운동 때 발표한 독립선언만 알지 이미 그 이전에 한말의병과 한국군이 독립선언을 한 사실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고 있다. 전술한 바와 같이 한말 의병전쟁은 1895년에 시작되었다. 그리고 1905년 을미의병이 다시 일어나 1907년에 한일전쟁으로 발전하였는데 이 사실을 정확히 모르고 있다. 1907년 일제가 고종황제를 몰아내고 한국군을 해산하자 서울의 한국군 시위대는 1907년 8월 1일의 남대문 전투 그리고 이듬해 봄 1만 명에 달하는 전국 의병(13도창의군)이 수도 서울 탈환작전을 전개하여 동대문까지 진격하였다. 이때 의병 총대장이 李麟榮이었고, 군사장이 旺山 許蔿였다.
13도 창의군 총사령관 李麟榮 군사장 許 蔿
호남 창의대장 문태서
관동 창의대장 민긍호
호서 창의대장 이강년
교남 창의대장 박정빈
진동 창의대장 권중희
관서 창의대장 방인관
관북 창의대장 정봉준
이 작전이 비록 성공하지는 못하였으나 한말 의병이 서울을 탈환하여 독립을 시도했다는 사실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다. 두 차례나 서울 탈환작전을 벌인 전투가 남대문 전투와 동대문 전투였는데 지금 남대문과 동대문 현장에 푯말 하나 없고, 교과서의 아무 곳에도 기록하지 않았다. 이런 나라가 어디 있는가. 중요한 사실은 13도창의군의 총대장 이인영과 군사장 왕산 허위가 극비리에 서울의 각국 영사관에 공한을 보내 선전포고를 통고하였다는 사실이다.
동포 여러분, 우리는 일치단결하여 목숨을 바쳐 우리나라의 독립을 회복할 것이다. 우리는 야만적인 일본군의 잔혹한 만행과 불법행위를 전 세계에 폭로할 것이다. 그들은 교활하고 잔인하며 인류의 인간성과 인류역사의 적이다. 우리는 최선을 다하여 모든 일본인과 그 주구들 그리고 야만적인 일본군을 몰아내는 데 힘을 모을 것이다. (Manifesto to all Coreans in all parts of the world)
이 선언문이 바로 독립선언문이 아니고 무엇인가. 우리는 3.1독립선언을 잘 알고 있으나 13도창의군의 독립성명을 모르고 있다. 1910년 韓國國民議會(聲明會)의 이름으로 발표된 성명문은 유인석 선생이 총대장이요 안중근의사가 중군장이었던 또 하나의 13道 倡義軍의 독립선언이었다. 안 의사는 東洋三國平和論을 제창하였으나 후술하는 바와 같이 모든 의병들이 주장하였던 동양평화사상이었다.
저 아름다운 3천리 강토는 우리의 시조 단군이 우리에게 물려준 것이며 우리 2천만 동포는 모두 단군의 후손이다. 차라리 머리를 잘라 죽을지언정 5천년 역사의 조국을 버릴 수 없다. 우리는 목숨을 끊을지언정 남의 노예가 될 수 없다. 아아! 오늘과 같은 처지에 이르렀는데도 가만히 있어야 하는가. 오늘의 일, 망국은 최후의 역사가 아닌가. 우리 모두가 총칼을 들고 피를 흘릴 때가 왔다.
이 선언문을 실은 교과서는 하나도 없다. 김원국ㆍ김원범 형제가 호남의병군을 이끌고 끝까지 투쟁하다가 전사한 의병전쟁이 바로 독립을 선언하기 위한 투쟁의 일환이었으나 왜 우리가 이 사실을 교육하지 않고 숨기고 있는지 모르겠다. 부끄러워서 감추는 것인가. 아니다. 교과서 집필자들의 역사관이 틀렸기 때문이다.
6. 의병의 나라, 한국
일찍이 順菴 安鼎福(1712-1791)은 그의 『동사강목』에서 의병을 한국의 가장 귀중한 가치요 유산이라고 주장하였다.
어느 나라이건 그 나라가 독립운동을 계속하고 있는 한 그 나라는 망한 것이 아니며 그 정통성을 잃은 것이 아니다.
우리나라 역사에서 의병은 한말에 처음 일어난 것이 아니다. 의병은 신라 백제가 망할 때 이미 일어나 신라 백제의 부흥운동을 벌였다. 고구려는 대다수의 국민이 당나라에 끌려가서 중국 사람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신라 백제 의병은 고려로 이어져 삼별초가 몽고 침략군을 상대로 끝까지 전쟁을 하다가 배를 타고 오키나와로 가서 그 후손들이 지금 살고 있다. 한말 의병을 직접 목격한 박은식은 누구보다도 한말의병을 잘 알고 이를 상세히 기록으로 남겼다. 매천 황현까지도 자신이 의병에 참가하지 못한 것을 개탄하는 유서를 남기고 자결하였다. 박은식은 먼저 의병을 민군이라 말하면서 민군이란 무엇인가 그 뜻을 설명하고 있다.
의병이란 民軍이다. 나라가 위급할 때 즉각 의義(의병정신)로서 분기하여 조정의 징발령을 기다리지 않고 종군하여 적개敵愾하는 사람이다.
나라가 위급할 때 의(의병정신)를 무기로 삼아 즉각 일어나 적과 싸우는 것이 의병인데 그런 정신은 언제부터 있었는가 하면 멀리 삼국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했다. 이것을 의병정신이라 하는데 누가 이것을 가르쳐준 것이 아니고 우리 민족 고유의 정신이니 이야말로 의병은 이 나라의 국수國粹라 하였던 것이다.
본래부터 충의忠義에 돈독한 우리 민족은 삼국시대부터 외적에 대항하여 싸워왔으며 왜구에 유린당한 임진왜란 때 의병의 탁월한 활동이 다시 드러났다. 임진왜란 때 유림들만 일어난 것이 아니라 鄕臣(지방의 양반)과 불승까지도 다 초야에서 분기하였다. 그들은 티끌만치도 나라의 부름을 받은 것이 아니라 오직 충의의 격려로써 서로 모여 결사 항전하였다. 앞사람이 쓰러지면 뒷사람이 일어나 적이 물러갈 때까지 싸워 마지않았다. 그러므로 의병은 우리나라의 국수國粹이다.
의병은 본시 조정으로부터 아무런 부름도 받지 않고 또 도움도 없는데도 오로지 애국심 하나로 일어나 결사 항전하는 것이 그 특징이었다. 앞에서 넘어지면 뒤 사람이 나아가 적과 싸워 끝내 적을 물리치거나 아니면 순국하는 정신을 의병 정신이라 하였던 것이다. 칼이 없으면 맨 주먹으로, 창이 없으면 막대로 싸우다 순국하는 정신이 의병정신이었는데 박은식은 이것을 국혼國魂이라고도 하였다.
충의의 피는 우리의 국민성에 이미 존재하는 것이며 그러기에 의병은 수십 년간 줄줄이 일어나 기의토적起義討賊했던 것이다. 비록 전술을 배운바 없고 무기도 없는 사람들이었지만 그들의 정신만은 결사순국이었다. 맨주먹으로 칼날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야 말로 역대로 나라가 국민의 충의를 배양하여 온 결과가 아니고 무엇인가.
그런데 그런 국혼은 고도의 유교문화에서 비롯된 것이니 문화가 없는 야만상태에서는 도저히 우러나올 수 없는 것이라 하였다. 즉 박은식은 우리나라 국민성이 매우 특이한데 그것은 오랜 역사와 고도의 유교문화에서 비롯된 것이라 하였다.
우리 대한은 아시아 동쪽의 오랜 나라이다. 4천3백년의 역사를 가진 나라이다. 그러니 여러 차례 외적의 침입을 받기도 하였으나 그 때마다 외적을 물리쳤으니 이처럼 강한 무사의 기풍은 동방의 본보기라 해야 할 것이다. 어찌 문을 숭상하고 예의를 사랑했다는 것만이 우리 민족의 자랑거리이겠는가.
의병정신이란 무엇인가. 의병정신은 우리나라 특유의 선비정신에서 우러나온 것이다. 선비라 할 때 조선시대의 문사文士를 연상하지만 선비란 본시 무사武士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조선시대의 문사정신은 본시 고려시대와 삼국시대의 무사정신에서 변한 것이다. 신라의 화랑정신은 무사정신이었고 그래서 신라의 세속오계에 임전무퇴가 들어있는 것은 그 때문이었다.
7. 성패불수의 정신
그러면 의병정신의 가장 중요한 핵심은 무엇인가. 한마디로 말해서 의병정신의 핵심은 성패불수成敗不須의 정신이었다. 성패불수란 이기고 지는 것을 문제 삼지 않을 뿐 아니라 지는 것을 영광으로 알고 싸움터로 나가는 정신이었다. 의병장 주용규朱庸奎는 의암 선생의 제자이며 을미년의 충주 전투에서 순국한 의병장이다. 그는 성패불수의 정신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의병이란 본시 권력을 다투는 것(王伯覇之計)도 아니요 군인으로서 본분을 다하려는 것(戎武之職而行基本分)도 아니다. 만일 의병이 권력을 다투거나 군인의 본분을 다하여야 한다면 成敗를 논하고 利鈍을 따져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의병이란 그런 것이 아니다. 이기고 지는 것을 따지지 않는다. 바로 이것이 兵家(군인)와 다른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의병이란 정정당당하게 나아가 죽는 것이요 요행히 살면 사는 것이다,
의병은 이기고 지는 것을 따지지 않는다. 무기를 들고 안 들고 하는 것에 상관하지 않는다. 오로지 正義인가 아닌가를 따져 忠義를 위해 싸우는 것이니 “죽게 되면 죽고 요행히 살면 사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의병정신이었다. 이 정신은 분명 독립군에 계승되고 광복군에 계승되었다. 그러나 오늘의 젊은이들에게는 이 말이 무지한 것으로 느껴질 것이다.
“나라는 멸할 수 있으나 역사는 멸할 수 없다. 국가는 단지 그 형체요 역사는 정신이다.” 박은식의 유명한 이 한 마디가 의병정신을 잘 설명해 주고 있는 것이다.
박은식에 이어 단재 신채호도 그의 『조선상고사』에서 백제 말년에 일어난 의병에 대해 상세히 기술하고 있다. 상세히 기술한다는 것은 그만큼 의병정신을 귀중하게 여겼기 때문이다. 결국 자기도 의병정신을 발휘하여 항일 독립운동을 하다가 여순 감옥에서 순국하게 되는 것이다. 김부식이『삼국사기』에서 백제 의병을 무시한 이유는 저자인 김부식이 이 책을 신라위주로 썼기 때문이다.
백제의 서울이 이미 적에게 함락되고 의자왕이 피집被執하매 대관 귀인들은 성읍을 들어 적국에 항복하였으나 백제의 충신 성충과 초야의 의사들은 망국의 화를 구하고자 각처에서 궐기하였다. 이같이 열렬한 다물 운동의 의사들은 신라 사가들이 이를 「잔적殘敵」이라 배척하여 그 기록을 삭제하여 그 성명을 매몰하였으니 얼마나 가석한 일이냐.
단재는 백제의병을 다물 운동(광복운동)이라 하면서 김부식의 역사서술을 강하게 비판하였던 것이다. 안정복, 박은식, 신채호는 의병과 그 정신을 중시하였다. 우리나라 역사는 의병의 역사로 점철되어 있다. 백제의병, 신라의병, 삼별초 의병, 임란의병, 병자의병 등의 정신이 한말 의병으로 이어져 나라가 광복되어 오늘의 대한민국이 있는 것이다. 의병이야 말로 우리 역사의 가장 중요한 정신사가 되어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소중한 정신사를 너무 소홀히 다루었다.
지금까지 학자들은 한말 의병전쟁을 개화운동보다 못한 수구세력의 저항운동으로 여겼다. 그래서 한국사 개설 책에는 여전히 의병항쟁(이기백), 의병운동(변태섭), 의병활동(한우근) 등으로 표기하고 있다. 얼마나 의병전쟁을 싫어하고 무시하고 있는가를 알 수 있다. 모름지기 역사가는 역사 속에 감추어진 의병정신을 찾아내는 데 전력을 다해야 한다. 그래야 역사가 교육의 자료가 되는 것이다.
한말에 의병만 있고 국군이 없었던가. 대한제국의 국군은 어디로 갔는가. 1897년 大韓帝國이 선포됨으로서 대한제국 國軍이 창설되었으나 1907년 8월 1일 일제에 의해 강제 해산당하고 말았다. 당시 대한제국의 군군은 다음과 같은 軍歌를불렀다.
너의 소임이 무겁도다. 무거우니 상쾌하도다./병사들아. 병사들아. 忠君愛國 잊지 마라.
수만 강병 앞 세워 탄환이 빗발치더라도/나가라 나아가 죽음 무릅쓰고 물러서지 마라.
살고자 하는 자 죽고 죽고자 하는 자 필생하니/병사들아. 병사들아. 충군애국 잊지 마라.
임금을 섬기고 나라를 사랑하자는 忠君愛國이 국군의 군인정신이었으나 일제의 방해로 제구실을 못했다. 국군은 나라가 소집한 군대이지만 의병은 나라가 소집하지 않아도 스스로 나온 군대였다. 한말의병도 황제의 소집장을 받지 않고 나온 군대였다. 의병은 나라가 망하여 국군이 제구실을 못했을 때 나온 민군이었다. 13도 창의군은 국군과 민군이 연합한 군대였다. 그래서 박은식은 의병은 국수國粹라 하였다. 나라의 기둥이란 뜻이다. 우리나라는 의병의 나라다. 의병이 없었다면 한국은 없었다. 나라를 사랑하는 의병정신이 강한 국민이 한국인이다. 그 뿌리는 머나 먼 옛날, 환웅이 이 땅에 나려 오셔서 배달나라를 세웠을 때부터 의병의 나라였다. 그때 환웅을 따라 내려온 3000명의 무리가 바로 최초의 의병이었던 것이다. 그들은 나라를 즉시 세우고 성을 쌓아 서울을 건설하였다. 우리나라는 의병이 세운 나라인 것이다.
우리나라의 의병은 외침이 있을 때마다 나라를 구했다. 중국의 漢武帝가 우리 조선을 침략했을 때나 당태종이 고구려를 침략했을 때나 그리고 고려 때 몽고군이 침략했을 때나 임진왜란 때 행주산성을 사수하여 왜적을 무찔러 국토를 되찾았을 때나 모두 의병이 일어나 나라를 지킨 결과였다.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에 일어난 한말의병은 바로 이러한 의병의 국맥을 이어 일어난 것이니 의병정신이 곧 민족정신이 되어 오늘에 이르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김원국 김원범 형제의 광주 무등산 의병도 민족정신이 아니었으면 일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한말 의병은 1895년에 일어나 1919년까지 아니 1945년까지 50년까지나 계속된 독립전쟁이었다. 3.1독립운동은 총칼 없이 일어난 徒手(맨손)革命이었으니 그 정신은 의병정신이었다. 의병전쟁은 비단 호남에서만 일어난 것이 아니라 3천리 금수강산 어디에서나 일어났고, 유학자들만 일어난 것이 아니라 온 국민이 다 일어나 싸웠다. 그 전쟁은 지금도 끝나지 않았으니 우리는 의병 100년 전쟁을 치루고 있는 것이다. 1945년에 우리 독립운동이 끝난 것이 아니다.
東洋三國平和論을 주장한 사람이 의병장 면암 최익현과 의암 유인석이었다. 그런데 중국은 동북공정을 하고, 일본은 독도 재점령을 시도하고 있다. 그래서 의병전쟁에 목숨을 바치신 선현들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정신 차리라고 소리 치고 있는 것이다. 자칫 잘못하면 남북통일은커녕 한반도는 중국과 일본이 차지하여 영구분단으로 갈지 모른다. 정말 정신을 차려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현실이 안타깝다. 우리는 안중근 의사를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그가 의병장이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많지 않다. 왜 안중근 의사 자신이 의병장이라 했는데도 이 사실을 감추려 드는가. 의병은 국군의 아버지요 어머니란 사실을 모르기 때문이다.
열 번 아니 백번을 불러도 한말 의병으로 나라를 위해 돌아가신 50만 아니 500만 민족의 원혼이 지하에서 울고 있을 것이다. 안중근 의사를 의병장이라 하지 않는 이유는 수구하여 망했다는 교육이 영향을 주었기 때문이다. 한말정국은 수구파와 개화파가 서로 싸웠다. 그러나 의병은 나라가 위주요 개화수구가 문제가 아니었다. 우리는 항상 동학혁명으로 30만 명이 전사하고 의병전쟁으로 50만 명이 희생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나 500만이 죽었다는 것은 잊어버리고 기억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옛날에 우리나라 인구는 2000만 명이었는데 일본군이 우리 의병의 종적을 하나 빠짐없이 조사한 결과 1500만 남짓밖에 남지 않았다고 하니 모두가 크게 놀랐다.
이 말은 황현 매천의 증언이다. 일제는 의병토벌을 빙자하여 무려 500만 명을 죽인 것이다. 세계역사상 이렇게 많은 학살을 자행한 예는 없다. 그러나 우리는 누가 어떻게 죽임을 당했는지를 모르고 있다. 화승총을 들고 적과 맞서 싸우던 용감한 의병들은 온데 간 데 없이 사라지고 그 영정마저 찾을 길이 없다. 의병장의 영정은 불과 몇 분밖에 남지 않았는데 다행히 김원국 의병장의 영정은 남았다. 그러나 이 사진은 적에게 체포되어 고문당하고 돌아가시기 직전의 안타까운 영정이다. 그러나 김원범 의사의 영정은 남기지 못했다. 혀를 깨물고 자결 순국하셨기 때문이다.
8. 호남 의병장의 맥락
호남의병의 효시는 전 참봉 기우만이었다. 다른 도에서는 모두 의병이 났다는데 호남만 의병이 일어나지 않은 것을 한탄하고 기우만이 전남 장성에서 궐기했던 것이다. 그러나 당시의 의병은 매천 황현이 말한 것처럼 “모두가 深衣에 大冠차림을 하고 서로 만나면 읍을 하였고 길을 떠날 때는 차례로 줄을 지어 걸었다. 그리고 그들에게 군량도 없고 무기와 군율도 없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모두 싸워서 이기지 못할 것이라 여겼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을 의병의 수치로 알아서는 안 된다. 수치가 아니라 한말 의병의 영광이었기 때문이다.
1) 奇宇萬
기우만의 광산회맹소가 호남 의병의 효시로 알려지고 있다. 광산은 전남 광주를 말한다. 기우만은 한말의 대가 노사 기정진에게 배웠는데 기정진은 경기도 양평의 이항로와 같이 한말 위정척사사상의 두 거두였다. 전남 장성에 가면 기정진을 모신 사당이 있다. 기정진의 손자가 호남의병을 처음으로 일으킨 송사 기우만이었다. 기우만은 할아버지 기정진이 죽자 『노사유집』을 발간하고 할아버지의 유지를 받들어 위정척사 사상을 호남에 심었다. 1881년 척양척왜를 부르짖는 萬人疏를 올려 일약 호남을 대표하는 유생이 되었고 1894년에 東學亂이 일어나자 이를 반대하였다. 그러나 이듬해 국모가 시해당하고 단발령이 내리자 호남창의대장으로 추대되어 궐기하였다.
수중에 촌철이 없어도 / 가슴속에 萬甲이 있다. / 강물 소리를 들으면 / 철벅거리며 바다건너 일본을 치러 간다 / 산에 올라가 울창한 숲속에 소나무를 보면 / 군사를 본 것과 같아 / 오랑캐를 쫓아내는 기상을 느낀다.
그러나 고종황제의 懷柔文을 받고 백립을 쓰고 입산하여 孤節을 지켰다.
2) 奇參衍
기우만처럼 할아버지 기정진에게 글을 배웠으나 다른 것은 병서를 읽어 병법에 밝아 의병장으로서 적격이었다는 사실이다. 기우만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으나 왕명으로 기우만이 의병을 해산하여 산으로 들어가자 이를 애석해 하면서 다음과 같은 시를 읊었다.
군사를 일으키지 못하고 이 몸이 먼저 죽게 되니 出師未捷身先死
해를 삼킨 작년 꿈도 역시 허사로구나. 呑日曾年夢亦虛
기삼연도 입산하여 몸을 피했으나 1902년 관군에 체포되었다가 풀려나 1907년에 다시 영광 수록산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이때 기삼연이 湖南倡義會盟所의 총대장이 되니 호남의병의 명맥을 이은 것이다. 예하에는 김용구, 김준 등이 있어 고창, 부안, 정읍 등지를 점거하였고, 그 세력이 광주에까지 뻗었다. 1908년 1월 담양 추월산성에서 적과 싸우다가 부상을 입고 순창 복흥산에서 체포되었다. 이어 전해산의 호남의병이 일어나는데 선봉장 정원집, 중군장 김원범이었다.
한말 의병의 주동자들은 전술을 모르고 오로지 책과 농사짓는 일밖에 모르는 사람들이었지만 그 뜻은 모두가 殉國하기로 결심하고 있었다. 그것도 가슴에 창칼이 꽂혀 들판에 백골로 묻히더라도 후회하지 않겠다는 비장한 각오를 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의 忠義心은 오로지 우리 역사에서 배양된 민족정신이었다.
을미의병은 명성황후 국모의 시해(1895년 10월), 그리고 단발령(동 11월)으로 시작된 군사에 대해 일자무식의 유생들이 벌인 전쟁이었다. 세상에 이런 전쟁은 어디에도 없었다. 이는 을미의병이라는 제1차 의병전쟁이었다. 강원도 춘천(이소응), 경기도 양평(안승우), 경상북도 안동(권세연), 선산 (허위), 경상남도 진주(노응규) 그밖에도 충청도 홍주 등지에서 일어났고, 호남에서는 기우만, 기삼연이 일어났다. 이것이 한말 의병의 서론이었다.
3) 崔益鉉
다음에 일어난 의병이 1904-5년의 을사 병오의병이었다. 일제가 러일전쟁을 도발하여 러시아함대와 싸우기 위해 독도를 몰래 훔친 뒤 서울남산에 대포를 설치하고 을사조약을 강제 체결하니 다시 의병이 일어난 것이다.
을미의병은 국수보복을 의로 삼았으나 병오의병은 국권회복을 명분으로 삼았다. 대한매일신보(광무 10년 5월 30일자)는 이렇게 보도하였으니, 을미의병이나 병오의병이나 그 주의주장은 같았다. 호남의 병오의병은 면암 최익현이 일으켰다. 최익현이 전북 泰仁으로 내려와서 유명한 武城書院에서 강론하여 격문을 발표하였는데 많은 유생들이 모여 강론에 감동했다. 최익현은 말하기를
옛날에 나라가 망한다는 것은 단지 宗廟社稷이 멸망할 뿐이었으나 오늘날의 망국은 민족이 다 망하는 것이다. 옛날에는 나라가 망한다는 것은 무력과 전쟁에 의해 망했으나 오늘날의 망국은 조약(을사조약)으로 망한다. 우리는 이웃나라가 있어도 스스로 조약을 맺지 못하고 타국인이 대신하게 되었으니 이것은 나라가 없는 것이요 우리에게 토지와 백성이 있어도 스스로 다스리지 못하고 외국인이 대신하니 이것은 나라가 없고 임금이 없는 것이고 3천만 백성이 남의 노예가 된 것이다. 왜적은 우리 민족을 송두리 바꾸는 법 즉 易人種之法을 쓰려 하고 있으니 우리는 천하지 대세를 알아서 무조건 어떻게 하면 사는 길이 있는가(或生之道)를 찾을 것이 아니라 왜 우리가 꼭 죽어야 하는가를 알아야 사는 길이 무엇인가를 알 것이다.(知其必死 則生之道內在其中)
최익현은 대마도에 유배되어 왜놈의 쌀을 먹으라 하니 먹지 않고 절식하다가 순국하였다. 그의 영구는 1906년 12월 30일 대마도에서 부산에 도착하였는데 최익현의 영구는 수만 명의 마중나간 남녀노소가 영구를 붙들고 통곡하는 바람에 길이 막혀 앞으로 나가지 못했다고 한다.
1907년 7월 일제는 정미7조약으로 광무황제를 퇴위시키고 8월 1일 한국군을 해산하였다. 마침내 의병전쟁이 전국에 확대되어 전국의병군이 서울탈환작전을 벌이게 되었다. 1908년 4월 한 의병이 통감부에 투서한 내용을 보면
1) 太皇復位 광무(고종)황제를 복위시켜라
2) 統監撤還 이등박문은 통감직에서 물러나라.
3) 罷日本人官吏 모든 일본관리는 총사퇴하라.
4) 激環外交權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반환하라.
즉, 한말의병들은 을사조약과 정미조약를 폐기하여 완전독립을 요구하였던 것이다.
이 같은 의병의 요구를 묵살하고 일제는 소위 三光政策을 강행하였으니 일제의 삼광이란 죽이고 殺光(沒殺), 불살라 버리고 燒光(全燒) 그리고 빼앗아버리는 奪光(掠奪)의 만행을 말하는 것이었다. 이야말로 의병전쟁에 대한 일제의 최후 발악이었다. 저들의 잔혹한 의병토벌은 여기 일일이 기록할 수 없다. 사상 유례가 없는 만행이1909년 9월 1일의 호남의병대토벌이라는 작전이었다. 일제의 무자비한 의병토벌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사진을 찍고 쓴 책이 맥켄지의 『한국의 비국』이었다. 비록 그것이 호남의병의 모습이 아니었으나 아일랜드의 한 낯선 외국인이 남긴 사진 한 장이 유일하게 남은 한말의병의 귀중한 자료였던 것이다. 아일랜드는 영국의 식민지였다. 지금도 아일랜드 사람들은 밤에 통행금지로 영국인의 출입을 막고 있다. 한일관계와 같이 영국과 애란은 2천년 원수지간으로 살아가고 있다.
9. 맺 는 말
전라남북도는 전국에서 의병이 가장 강력하게 벌어진 곳이다. 일제는 호남의 곡창지대를 점령해야 침략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었다. 그래서 1909년 9월 야만적인 의병대토벌작전을 벌였으니 이 때문에 이름난 의병장들이 거의 모두가 전사하거나 체포되었다. 전라남도에 있어서는 기삼연, 김용구가 전사하고 박도경, 金泰元(金準) 曺京煥 등 의병장이 뒤이어 전사하였다. 이석용도 힘이 다하여 은거하다가 1913년에 피체된다. 그러나 심남일, 강무경, 안규홍, 임창모 등 새로운 의병장이 나타났고, 조경환의 전사에 따라 새 의병장이 된 전해산은 서울의 시위대 봉기에 참가했던 鄭元執 參尉를 선봉장으로 삼아 나주 영산포를 중심으로 눈부신 활약을 보였다. 그러나 모든 의병장이 전사하고 피체되자 김원국과 김원범 의병장이 끝까지 투쟁하다가 전사하니 두 분의 죽음이 마지막 의병장의 최후를 장식한 것이다.
『매천야록』에 의하면 호남의병장의 한 사람인 이석용이 “충량한 일본의 신하가 되고 싶지 않는가.”라는 적의 물음에 대답하기를 “차라리 대한의 개나 닭이 될지언정 너희나라 신민은 되고 싶지 않다. 단지 내가 한스러운 것은 이등박문이 안중근의 손에 죽었으나 나는 데라우찌(寺內正毅) 왜총독과 을사오적 그리고 정미 칠적을 죽이지 못한 것이요. 동경과 대판을 불태워버리지 못한 것이 또한 나의 한이라고 하였으니. 이 말은 바로 김원국 김원범 형제의 한이요 당시 모든 국민의 원이었다.
거듭 말하지만 한말 의병전쟁의 뿌리는 민족의 시원에 있었던 것으로 20세기에 갑자기 나타난 것이 아니었다. 따라서 한말의병의 정신은 단순한 우리의 국혼을 들어낸 것이었다는 것이 김원국 의병장의 격문에 드러나 있다. 박은식은 의병은 국수國粹라 하였다. 나라의 기둥이란 뜻이다. 기둥이 없는 나라는 넘어진다. 우리나라는 의병의 나라다. 의병이 없었다면 한국은 이미 없다 하여 과언이 아닐 것이다.
부록 자료
1) 大邱(대구) 控訴(공소)읜 선고 (1910년(명치 43년) 3월 24일)
김원범이 일본헌병에게 살해된 건에 대하여 상소하였으나 김원범은 국가를 위하여 의병장이 되어 부하 천여 명을 거느리고 금품을 약탈한 죄가 있으므로 제1심 판결대로 폭동 강도죄로 처분함이 타당하다고 본다.
명치 43년 4월 23일 高等法院(고등법원) 刑事(형사)部(부) 裁判長(재판장) 判事(판사) 渡(도)邊(변) 暢(창)
2) 都(도)砲(포)將(장) 金元範(김원범) 等 祭文(제문)
維(유)歲(세)次(차) 己酉(기유)(1909) 月(월) 日(일) 道統(도통)大將(대장) 박鏞(용)植(식) 以(이)菲(비)薄(박)之(지)尊(존) 致祭(치제)于(우)都(도)砲(포)將(장)金(김)公(공)원범...
- 한국독립운동사 1(국사편찬위원회, 1968년 681~2쪽)
3) 김원국 광주군 당부면 북촌 당36세 본명 김창섭 관역 훈위 영전 없음
김원국은 조경환의 부하로서 그 뒤를 이어 목하 전해산의 일부대장으로 활동하면서 각 방면으로 금전, 곡류를 약탈하여 박민홍에게 보내고 한편 목포로부터 무기구임을 계획하고 있다고 한다. 김원국은 광주군 덕산면 면장에게 곡류를 매각하여 금화를 납부하라고 몇 차례나 시달하였다고 한다. 위에 대하여 목하 엄중 수사 중.
4) 적도 피해의 건 3월 29일부 장성 주재순사의 보고에 의하면
김원국이 인솔하는 적 약 백명이 지난 26일 저녁 장성군 남일면 안처일에 사는 이서현 집에 들어가 그가 보관하고 있던 벼 1백 여 가마를 약탈하고 도주하였다는 보고에 접하였다. 18일 오후 2시 수괴 김원국이 인솔하는 약 70명의 폭도가 총기를 휴대하고 나주군 금안면 광곡에 왔다는 정보를 입수하였다. 운운.
5) 의병장 김원국이 세무서에 보낸 명령문(호남의소김원국령광주세무서)
- 광비발제163호(융희 3년(1909) 3월 1일)
- 한국독립운동사 1(국사편찬위원회 1968) 683쪽
6) 1909년 己(기)酉(유) 2월 일 나주 향교 통문(국사편찬위원회 1965) 682-683쪽
- 나경비발제26호(융희 3년(1909) 3월 2일)
- 한국독립운동사 1(국사편찬위원회 1968) 682~3쪽
7) 전해산 행장
공의 휘는 기홍이요 자는 수용 호는 해산이다. 본관은 천안이다. 기묘년(1879) 10월 18일에 임실에서 태어났다. 1905년 적들이 오조약을 강재 체결하여 우리 정권을 빼앗았다. 3천리 강토와 5백년의 예의가 짐승의 나라가 되었도다. 면암 선생이 대마도에서 의로운 죽음을 맞이하자 나는 임실의 이석용을 만나 의병을 약속하였네. 내가 마지못해 의병대장을 맡으니 정원집이 선봉장이 되고 김원범이 중군장이 되었다.
을묘년(1915년) 계춘 하한 금성 오동수 근서
8) 제문(도포대장 김원범) 번역
기유 1909년 2월에 도통대장 박용식이 간소한 제물을 준비하여 도포장 김원범 이하 총독장 박규봉 일초십장 이동언 삼초십장 원재룡 사초십장 서경수 동몽집사 김복동 등 의사들의 영전에 제물을 올립니다. 아~ 슬프도다. 옛날 금산에서 중복 조헌 이하 7백 의병들이 같은 날 나라를 위해 함께 죽어 그 넋이 사라지지 않았듯이 김원국 김원범 이하 여러 장수의 죽음도 그 정기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무등산의 광채는 더욱 빛날 것이며 그 늠름한 절개는 천백세 영원히 남을 것이다. 죽음으로써 나라에 보답하였으니 임금님들이 제사를 지낼 것이며 빛나는 공신록부는 후손에게 전해질 것이니 아~ 아름답지 아니한가, 맹세하고 맹세하네. 어등산 싸움의 대세는 멈추지 않을 것이며 임진왜란을 일으킨 종자들, 바로 버러지 같은 저 흑치(왜놈)들아. 호시탐탐 또 다시 일어나 우리나라를 팔아먹으니 개 같은 적이 되었네. 그러나 우리는 이와 같은 도둑에게 문을 지켜라 하고서 그냥 지켜보고만 있었네.
나라는 장차 누구를 믿을 것인가. 믿을 것은 백성뿐이네. 백성에게는 당당한 애국심이 있기에 선인들은 백성을 통솔하여 임금의 신하가 되었다네. 일심 단결, 분발하여 죽기를 다짐하고 앞을 향해 전진했네. 적군은 많고 아군은 작기 때문에 군사들은 살지 못하고 죽어갔네. 장수가 죽자 군사도 따라 죽었으니 금산 싸움과 같은 상쾌한 죽음이었지 잘 못 싸운 죄가 아니야 운수가 비색한 것이니 어찌 할꼬, 이와 같은 장수가 있었으니 저와 같은 병졸이 있었다네. 백만의 강적이라 당신들의 죽음이 있었다. 하늘이 만일 우리나라를 도운다면 밝은 운수 다시 돌아와서 우리 강토 되찾아 튼튼한 기반을 다져 조선의 신하가 되고 조선의 귀신이 될 것이며 조선에서 태어났다가 조선에서 죽었으니 위대한 충절이 아닌가.
내님께서 충성을 다 했으니 이는 영광된 죽음일세. 어린자식들을 어찌 할 것인가. 씩씩한 선비들과 명성을 같이한 것을 이내 심정 미칠 것 같다. 이것은 사사스러움이 아니고 나라를 위한 싸움일세. 이 뒷날에도 적을 처치하고 싶지만 당신들이 죽었으니 누구와 더불어서 전공을 세울 것인가. 내가 바친 제물이 비록 소박하지만 내 눈에 눈물은 비 내리는 것 같소. 여러 영령들 혼매하지 않으니 내 정성 알아주시기 바라오.
국사편찬위원회 한국독립운동사 1. (1968년 681-682쪽)
폭도에 관한 편책 (나경비발 제42호 1909년 4월 29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