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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은 크리스마스입니다. 다들 평화 가득한 크리스마스가 되시길 진심으로 기원하겠습니다.
다들 애인 있으시죠? 아 저요?
그게 왜 궁금하시죠?
오늘 써보고자 하는 글은 크리스마스의 또 다른 상징 산타와, 그가 준다고 알려진 선물에 관한 글이 되겠습니다.
우리 모두는 이제, 선물을 나누어주던 산타라는 존재가 실은 우리의 부모님이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저의 경우 6살때 이미 알아버렸고요... ㅋㅋ). 암튼, 우리가 이번에 볼 산타는 그가 존재하고 아니고를 떠나서, 언제부터, 누구로부터 산타가 시작되었는지를 보고자 합니다. 그가 어떻게 시작되었고, 어떻게 기념되기 시작하였으며, 어떤 식으로 현재 이미지가 생산되었는지를 보고자 합니다.
또한, 산타가 주는, ‘선물’의 의미에 대해서도 한번 보고자 합니다. 선물의 역사적 의미를 반추하면서, 그림 형제의 동화 <난쟁이 요정들>을 보면서 그것이 본래 어떠한 의미를 가졌는지 보고자 합니다.
산타클로스와 관련하여.
산타클로스의 기원으로서 성 니콜라우스St.Nikolaus가 언급되곤 합니다. ‘승리’를 의미하는 Nike와, ‘사람들’을 의미하는 ho’laos가 합쳐져 “백성의 승리자”라는 의미의 이름을 가진 이 사람은, 애석히도 기록이 섞여버렸습니다. 크게 두 사람이 섞였다고 확인되는데, 첫 번째로 소개할 사람은 로마제국-현 터키-의 도시 Myra에서 활동했던 성 니콜라우스입니다.
산타의 기원 그 첫번째 용의자, Myra의 주교였던 성 니콜라우스입니다.
성 니콜라우스에 대한 종합적인 분석은 독일의 종교사학자 Gustav Anrich가 이미 한번 해본 바 있습니다. 그는 그리스어로 이루어진 전설을 분석하고는, 그와 관련한 전설이 전반적으로 전적인 신뢰를 하기에는 부족하다고 판단하였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이 사료들을 통해서, 우리가 먼저 볼 성 니콜라우스라는 주교가 4세기경에는 Myra 지방에서 존재하였고, 그 기록이 460~580년 사이에 기록되었다고 추정하였습니다. 그는 성 니콜라우스에 대한 한 가지 전설을 제시합니다.
“세 명의 장군 Nepotianos, Ursos 및 Herpylion은 콘스탄티누스의 명령으로 터키 프리지아 지방의 반란을 진압하러 왔습니다. 터키 안탈리아 지방으로부터 150km정도 떨어진 Myra 지방에 도착하였을 때, 그들은 무고하게 혐의를 쓰고 사형은 언도받게 됩니다. 그들이 니콜라우스 주교를 방문하였을 때, 주교는 무고하게 사형을 선고받은 사형수 셋을 발견하고는, 집행관이 사형을 집행하지 못하도록 검을 손에서 뜯어내게 하여, 그들의 목숨을 구해냅니다. 이후 로마로 간 세 장군들은 아첨꾼들의 음모로 인하여, 적과의 협상 혐의로 투옥되어 사형을 선고받습니다. 이 장군들은 Myra에서의 기억을 되새겨, 니콜라우스 주교에게 도움을 청하게 됩니다. 니콜라우스 주교는, 콘스탄티누스와 아첨꾼의 꿈에 등장하여, 세 장군이 처형되면 최악의 결과가 등장할 것이라고 압박하였습니다. 황제는 두려워하며 세 장군을 자유롭게 하라고 결정하였으며, 세 장군은 주님께 감사드리며 Myra 지방을 여행하였습니다.”
비록 그가 쓰던 Lycia어는 이제 소수의 기록으로만 남은 사어가 되어버렸지만, 그에 대한 그리스어 기록은 남아 그가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에 대한 가장 오래된 전기는 750~850년 중에 콘스탄티노플에서 기록된 <Vita per Michaelem>이라고 합니다.
이후 10C경 그의 전기를 다시 적을 일이 있었습니다. 문제가 있다면, 이 기록에서, Simeon Metaphrastes라는 수도승의 착각으로, Myra의 니콜라우스 주교의 기록에 564년에 사망한 것으로 알려진, Pinora의 주교 Nikolaus의 기록과 섞였다는 것입니다.
산타의 기원 그 두 번째 용의자, Pirona의 주교였던 니콜라우스입니다.
(이분을 그린 성화는 없어서, 불가피하게 성 니콜라우스의 성화를 올립니다.)
그리하여 현대를 사는 우리는 더 이상 Myra의 니콜라우스와, Pinora의 니콜라우스가 가진 행적을 구별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두 사람의 기록이 섞인 성 니콜라우스를 알 수밖에 없게 되었고, 이는 앞으로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중세 당시 성 니콜라우스는 인간을 사랑하고 기꺼이 도움을 주는 존재로서 민중들의 사랑을 듬뿍 받는 성인들 중 하나가 되었고, 그런고로 많은 성담들이 존재하였는데, ‘처녀전설’과 ‘학생전설’이 그 중 하나입니다.
‘처녀전설’의 경우 다음과 같습니다. 아주 가난해서 결혼 지참금을 가질 수 없는 딸 셋을 가진 남자가 있었습니다. 생활비를 벌기 위하여 딸들을 매춘시켜야 할 형편이었던 그의 사정을 알게 된 성 니콜라우스가, 밤마다 그의 집으로 금덩이가 든 자루를 하나씩 던져서, 딸들이 매춘하는 것을 막게 되었다고 하는 전설입니다.
‘학생전설’은 다음과 같습니다. 세 학생들이 여행을 가다가 여관에 묵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집 주인은 학생들이 돈을 좀 갖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는, 세 학생을 죽여 소금에 절여놓게 된 것입니다. 이를 알게 된 성 니콜라우스가 거지로 변장하여 집주인에게 접근하고는, 그의 죄를 물고, 기도로써 세 학생들을 구하게 되었다는 전설입니다.
이러한 이미지를 가진 성인이다보니, 이를 배경으로 성 니콜라우스와 관련한 풍습들이 북프랑스의 수도원학교에서 시작되었습니다. 12C 학생전설에서 이 풍습이 유래되었고, 14~15C 니콜라우스 성일에는 학생들 중에서 소년주교를 선발하는 행사가 있었다고 합니다. 처녀전설에서 유래한 풍습도 있는데, 성 니콜라우스 축일인 12월 6일, 혹은 그 전날 밤에, 세 소녀에게 금덩어리를 넣어준 것에서 유래한, 아동에게 견과와 사탕 등의 선물을 몰래 넣어놓는 풍습이 그것입니다. 이러한 풍습은 마르틴 루터의 1535년도 가계부에도, 그의 자녀에게 주는 것으로서 기록되어있었습니다.
"내가 아무리 프로테스탄트의 거두라고 해도, 카톨릭에서 시작한 건 맞거든!"
그러나 16C 중반 마르틴 루터로부터 시작된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운동이 시작되면서, 가톨릭 성인들을 없애려는 경향이 등장하게 됩니다. 성 니콜라우스도 예외는 아니었고, 마르틴 루터는 니콜라우스가 아동에게 선물을 주는 풍습을 없애기 위하여 크게 두 가지 조치를 취하게 됩니다. 하나는 12월 5~6일에 있었던 일자를 24일로 옮겨버렸고, 다른 하나는 니콜라우스 대신, 구유에 누운 아기예수와는 다른, 가공의 인물 아기예수Christkind를 만들어버립니다. 이 아기예수는 종교행사 퍼레이드에서 나왔는데, 마리아와 요셉이 갓 태어난 아기예수와 함께 행진하면 한 무리의 소녀들이 흰 옷을 입고 천사의 모습으로 동행하였을 때, 그 무리의 인솔자를 ‘아기예수’라고 한 것에서 유래하였다고 합니다.
아무튼 이 아기예수는 마르틴 루터의 1536년도 가계부에 적혀있으면서 그 시작이 확인되고, 이후 신성로마제국 안에서 프로테스탄티즘이 공인되면서 북부 프로테스탄트 지역에서 자리를 잡고, 카톨릭이 강세였던 남부 바이에른과 라인 지역으로 퍼져나가게 됩니다.
그러던 19C부터 독일 북부지역에서 아기예수 대신 산타클로스라는 이름이 퍼지게 됩니다. 이러다보니 1930년의 조사에서 크리스마스에 선물을 주는 주체로서 산타클로스와 아기예수를 부르는 빈도수에 대해 조사하였을 때, 프로테스탄트가 강세이던 북부, 서남부, 서남부는 산타클로스를, 카톨릭이 강세던 중부, 남부, 동부에서는 아기예수를 부르는 이야기가 나왔다고 합니다.
이 산타클로스라는 존재가 널리 전파되는데 기여한 사람은 아우구스트 하인리히 호프만 폰 팔러스레벤Heinrich Hoffmann von Fallersleben입니다. 독일 국가의 가사를 작사하기도 한 이 사람은, 1840년경 「내일 산타클로스가 온다Morgen kommtder Weihnachtsmann」라는 노래를 통하여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가사는 다음과 같습니다.
내일 산타클로스가 온다.
선물을 가지고.
북, 피리, 총,
깃발, 칼 그리고 더 많은 것을,
그래 모든 군대를 가지고 싶다.
산타클로스 할아버지, 우리에게 가져오세요.
내일도 가져오세요.
머스켓총 보병과 수류탄 보병,
준마, 당나귀, 양, 황소,
순전히 좋은 것들을 가져오세요.
??? : 호! 호! 호! 그런 거 문제없지!
산타클로스가 현재와 같은 빨간 옷에 수염더미 산타의 이미지를 갖추게 된 것은, 아무래도 광고가 이끌어낸 것이 큽니다. 애초 미국의 시인 Clement Moore의 시와, Thomas Nast의 풍자화에서 기인한 이미지였는데, 이것을 산타의 이미지로 확고하게 만든 것은 코카콜라사가 1931년 대대적으로 광고였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Thomas Nast의 풍자화. 아마 Nast 본인은 이렇게 자신의 작품이 유명해지리라고 생각하지 못했을 겁니다.
코카콜라 사의 1931년 광고. 이 광고 하나로 산타의 이미지가 재정립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겁니다.
선물과 관련하여.
우리는 지금까지 역사적 산타클로스와, 그것이 어떻게 변천되어왔는지를 보았습니다. 지금부터는, 왜 우리는 굳이 산타클로스라는 가면에 쓰고 번거롭게 다음 세대에게 선물을 주는 건지 그 역사적 분석을 하고자 합니다.
선물의 가장 본질적인 의미는 주는 자와 받는 자 사이의 상호성에 바탕을 둔 행위라는 것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이 상호성의 규범은 법적으로, 최소한 관습법이나 관례상으로 효력을 가집니다. 중세에도 이는 마찬가지였습니다. 대부나 대모는 아이가 세례를 받거나, 새해거나, 크리스마스나 부활절 때, 결혼식 때와 같은 시점에 아이에게 선물을 주고, 아이는 이런 대부나 대모를 가족 행사에 참석하게 하는 등의 반대급부를 하게 됩니다.
이를 라틴어로 do us des 원칙이라고 하는데, ‘네가 주도록 하기 위해 내가 준다’라는 뜻의 라틴어로써, “계약법상 우선되는 균형을 잡기 위한 가장 간결한 공식”이 그것입니다. 즉 선물을 주는 것은 급부와 반대급부를 전제로 한 쌍무계약인 것이고, do us des 원칙은 고대 북구로부터 당시 독일 사회에 이르기까지 있었던 선물 문화의 토대가 되었습니다.
비록 '완전 대등한 계약'은 없을지언정, 암요, 당연한 말이죠?
허나 생각해보면 부모가 자식에게 크리스마스 선물을 하는 것은 이 원칙에 부합하지 않습니다. 생각해보시죠. 과거 크리스마스 때 부모님이 당신에게 크리스마스 선물을 주고는 어떠한 대가를 요구하지는 않았잖습니까? 물론 지금이야 다른 선물에 대해서도 그러한 경향이 있지만, 그때도 크리스마스 선물에 한해서는 마찬가지였던 겁니다.
베버-켈리만Weber-Kellerman 교수는 이러한 현상에 대해서, 크리스마스 선물에 대해서는 do us des 원칙이 적용되지 않았다고 보았습니다. 우선 부모-자식 관계는 일방적인 관계이고, 산타클로스가 가공의 인물이면서 익명성을 갖고 있지요. 그런데 시민계급이 새로운 주도적 사회계급이 되면서, 적어도 아이들에게 선물하는데 있어서는 사실적인 방법대로-do us des를 적용하여-하려하지 않았다고 보았습니다. 그러니 신비스런 산타클로스나 아기예수같은 대리인을 내세우게 되었다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시민계급의 생활방식이 보편화되고, 소비의존도가 높아지면서, 시민계급의 풍습이 전 계급으로 퍼져나가게 되면서 do us des 원칙 대신 축제적인 행위로서 크리스마스 풍습이, 그 의미가 변화하게 되었다고 보았습니다.
분명 베버-켈리만 교수의 분석은 ‘어떻게 변화하였는가?’라는 면에서 일견 타당성을 가집니다. 시민계급의 풍습이, 그들이 사회의 중심으로 서게 되면서 그대로 문화가 바뀌어버렸다는 관점은 흥미로우면서도 타당하다고 보입니다. 다만, 왜 시민계급이 부모-자식 간의 관계에서만 대리인을 내새워서 선물을 주려고 했는지 납득할만한 설명을 보여주지 못했다는 한계를 가집니다.
이를 설명하기 위하여 우리는 독일 설화 하나를 끌어오고자 합니다. 그림 형제Brothers Grimm는 독일 각지의 설화를 수집하는데 일평생을 바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이 수집한 설화 중에는 <난쟁이 요정들Die Wichtelmänner>도 존재했습니다. 모르실 분들을 위하여 줄거리를 대충 살피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한 구두장이는 가난하여 남은 거라고는 한 켤레의 구두만을 만들 수 있는 가죽밖에 없었다. 그는 다음날 구두를 만들기 위해 가죽을 마름질해 놓고 잠이 들었다. 그런데 다음날 일어나 일을 하려고 보니, 누군가가 벌써 구두를 만들어 놓았다. 이 구두는 너무나 잘 만들어져서 비싼 값으로 팔 수 있었다. 그래서 구두장이는 두 켤레를 만들 수 있는 가죽을 살 수 있었다. 그는 다음날 구두를 만들기 위해 가죽을 마름질해 놓고 잠이 들었다. 구두장이가 일어나 보니 두 켤레의 구두가 만들어져 있었다. 이런 일이 계속 이어져 가난했던 구두장이가 부유하게 되었다. 크리스마스가 얼마 남지 않은 어느 날, 구두장이는 누가 밤마다 와서 구두를 만들어 놓고 가는지 알고 싶었다. 그래서 그는 이를 확인하기 위해 자지 않고 자기 부인과 함께 방구석에 숨어있었다. 자정이 되자 벌거벗은 난쟁이 요정 2명이 나타나, 구두장이조차 놀랄 정도의 솜씨로 구두를 만들어 놓고는 사라졌다. 그 다음날 구두장이의 부인이 이렇게 말했다.
“작은 난쟁이 요정들이 우리를 부자로 만들었어요. 우리가 고마움을 표시해야 해
요. 그들은 저렇게 돌아다니면서 아무것도 입고 있지 않으니 분명히 추울 겁니다. 이
건 어떨까요? 내가 그들에게 셔츠와 상의와 저고리와 바지를 만들어 주고 싶어요. 양
말 한 켤레씩도 떠주고 싶어요. 당신은 신발 한 켤레씩을 만들어 주세요”
구두장이가 마름질한 가죽 대신에 이 “선물Geschenke”을 놓아두었다. 자정 무렵에 난쟁이 요정들이 나타나, “곧바로 일을 시작하려 했다. 그런데 그들은 마름질된 가죽 대신에 예쁜 옷가지들을 발견하게 되자 어리둥절해 했다. 그런다음 그들은 그 선물을 받고 구두장이의 집을 떠나갔다. 그 이후로 난쟁이 요정들은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 : 얘들아, 우린 왜 선물받고 토낀거냐?
어떠신가요? 왜 요정들은 선물을 받고는 다시 돌아오지 않았을까요? 위에서 있던 do us des 원칙을 떠올려봅시다. 요정들은 구두장이에게 구두를 만들어주었고, 구두장이 부부는 이에 대한 급부로서 선물을 주었다고 보면 대충 이해가 될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이제 이 이야기 뒤에 담긴 중세 독일의 모습을 찾아봅시다.
동화에 나오는 구두장이와 난쟁이 요정들의 관계를 중세시대의 가정Haus으로 이해해 봅시다. 우리가 아는 가족Familie이 그쪽에서는 18C에 와서야 비로소 생긴 개념이라는 것을 귀띔해드립니다. 네. 이때의 가정은 지금의 가정보다 더 포괄적인 개념으로써, 담으로 둘러싸인 공간 안에서. 가장Hausheer의 지배와 보호 하에 돌아가는, 하나의 공동체였던 것입니다. 여기서 공동체란 단순히 생활공동체를 넘어서, 가장의 지배를 받는 고용인까지 그 모두가 가정의 구성원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족의 개념이 나오는 것 자체가 늦어질 수밖에 없었다고 하겠습니다.
이 개념에 따라 보자면, 구두장이의 집은 구두장이 네의 생활공간이자, 구두장이와 난쟁이 요정의 작업장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니 구두장이는 가장, 즉 고용주이며, 난쟁이 요정들은 고용인이 됩니다. 당연히 고용인은 고용주에게 일한 대가로 숙식을 제공받고, 약정이 되어있었다면 일정 임금까지 받게 됩니다. 그런데 이외의 선물을 고용인이 받게 된다면, 이시기 do us des 원칙에 의하여 고용주와 고용인 간의 쌍무계약이 완성됩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선물의 대가느냐? 바로 해고가 그 대가였습니다. 실제로도 11월 11일 성 마르틴 축일에 하인들이 일자리를 옮기곤 했는데, 그때 가장이 하인을 해고할 때 거위를 주었고, 이를 성 마르틴 거위Martinsgans라고 하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가족의 개념이 없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자식과 고용인의 지위는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독일 북부에서 유효했던, 한명의 자식에게만 전 재산을 상속하는 단독상속법Anerbenrecht이 전 독일로 퍼지면서 어떤 자식을 남기고 나머지를 고용인, 즉 하인으로 둘지가 중요해졌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때 자식에게 선물을 줌은 곧 분가해서 하인이 되라는 의미였으므로, 이러한 상황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하여, 그럼에도 당시 풍습에 따라 선물은 주고 싶어 했기 때문에 산타클로스와 같은 가상의 인물을 선물을 주는 주체로 하는 것은 중세의 시점에서 보면 당연하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결론
우리는 산타클로스를 통한 선물을 주는 풍습이 가진 역사성을 확인해보았습니다. 산타클로스는 성 니콜라우스라는, 4C의 인물과 6C의 인물이 혼재된 인물에게서부터 시작되었고, 그의 선한 이미지를 통한 성담이 선물을 주고받는 풍습을 만들어냈습니다. 이때 종교개혁으로 인하여 아기예수라는 새로운 가상의 선물을 주는 인물이 등장했고, 이 명사가 독일 전체로 퍼졌을 때쯤 다시 프로테스탄트를 믿는 지방 중심으로 산타클로스라는 이름이 돌면서 현재에 이르게 되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왜 산타클로스를 이용하여 선물을 주게 되었는가라는 질문에 있어서는, 중세 거래관계의 기본이던 do us des가, 자식과 하인의 지위가 크게 다르지 않았던 중세의 현실과 맞물려, 자칫 잘못하면 쌍무적 계약관계에 의하여 멀쩡한 자식을 버리게 될 수도 있었기 때문에 산타클로스와 같은 가상의 인물이 필요하게 되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쓰고자 하는 말이라면, 뭔가 써보고 싶어서 처음으로 이런 글을 써보는데, 여러분 보시기에 좋았으면 좋겠습니다. 무튼 크리스마스를 비롯한 남은 연휴 잘 보내시길 바랍니다.
참고문헌
크리스마스 선물문화와 동화 「난쟁이 요정들」. 김정철. 2008.3.10. 독일언어문학 제39집
“거룩하신 성 니콜라스, 내가 어려울 때 나를 버리지 마시고...”- 성 니콜라우스 풍습의 유래에 대하여. 니콜라우스 그로스. 2004.3.5
첫댓글 이 글이라면, 원래는 심심해서 관련 논문을 읽어보다가, 갑자기 뽐뿌가 와서 6시간 들여 써본 글이 되겠습니다.
다른 동기라면, 이 카페에서 저도 얻어가는게 참 많아서, 그동안 이 카페에 어떤 방식으로든 기여하고 싶었습니다. 누군가가 말했듯, 이곳은 1페니 대학이었고, 전 아직도 이곳에서 너무나도 많은 것들을 배워갑니다.
그렇게 배워가면서, 나도 그들과 같은 정보를 제공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비록 논문 몇 개 요약한 수준의 글이더라도, 이 커뮤니티에 기여하는 사람이 되고 싶어서 올려보았습니다.
이 글이 그리 수준높은 글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보시는 여러분께서 잠깐이라도 즐거우셨다면 좋겠습니다.
쓸만한 지적수준이 안되니 부끄럽군요.
코카콜라는 정말 대단한 기업이네요. 빨&흰/북극곰/산타클로스 등 코카콜라의 상징들을 보면 하나같이 유명한 것들 뿐...
좋은 글 감사합니다~!!
몰랐던 사실을 많이 알고 가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