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4대 문명은 지금으로부터 약 6000년 전에 발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가 가장 빠른 기원전 4000년경 그 다음이 기원전 3300년경의 인더스 문명이 발생했으며 마지막으로 황허 문명이 탄생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후에 여러 주장이 나오긴 했지만 이 학설이 대세였다.
그런데 기원전 3000년경에 만들어진 세계 최초의 언어인 수메르어의 해독에 힘입어, 메소포타미아 문명 이전에 이미 강 하류에 수메르
문명이 기원전 5300년경에 탄생한 것으로 밝혀졌다. 이로써 세계 최초의 문명 시기가 약 1.300년 가까이 앞당겨졌다.
그 무렵 만들어진 수메르의 채색토기와 농사법이 동쪽으로 전파되어 인도를 거쳐 중국으로 전해진 것으로 스웨덴 역사학자 안데르손은 보았다.
하지만 이는 방사선탄소연대측정법이 개발된 이후 오히려 동양의 토기가 서쪽으로 전파된 것으로 학설이 뒤집히고 있다.
게다가 동북아 요하지역에서 기원전 7000년경 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홍산 문명이 발견되자 중국뿐 아니라 셰계 역사학계는 놀라고 있다. 물론 오리엔트 지역에도 사해 인근의 예리고 성이나 터키 지역의 차탈휘이크 등 신석기 시대의 마을 흔적이 발견되었다. 하지만 홍산 문명은 시대적 연속성을 갖고 있는 대규모 집단주거 지역이라는 점에서 그 의미가 사뭇 다르다.
필자는 이러한 홍산 문명조차 그 이전에 탄생한 발해만 연안 문명의 연장선상에서 그 이후에 발생한 것으로 보고 있다. 곧 홍산 문명 이전에 발해연안 문명이 먼저 탄생했다는 이야기이다. 이러한 가설의 논리를 살펴보자.
* 초기 인류의 생활터전, 서해 갯벌
초기인류가 떠돌이 수렵채취 생활을 청산하고 한 곳에 몰려 살려면 일단 먹거리가 해결될 수 있는 장소이어야 했다. 그 최적의 장소가 갯벌이 있는 해안가이다. 왜냐하면 갯벌에 구멍 난 곳을 헤집으면 낙지나 조개 등 연체동물을 손쉽게 잡을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인체에 꼭 필요한 소금 구하기도 쉬웠다. 갯벌에는 함초 등 염생식물도 많아 이들로부터 귀한 염분을 얻을 수 있었다. 더구나 갯벌에서는 소금 생산이 가능했다. 염전을 한글로 풀면 바닷가의 소금밭이란 뜻이다. 말 그대로 갯벌이 소금밭이었다. 서해 갯벌 웅덩이나 바위틈에서 소금을 채취할 수 있었다.
더구나 강 하류에는 민물과 바다가 만나 어족이 풍부하고 비가 오면 상류의 기름진 흙들이 쓸려 내려와 쌓여 퇴적층을 이루어 농사짓기에
좋았다. 대부분의 고대 문명이 강 하류에서 발달한 이유이다.
인간만 강 하류를 좋아하는 게 아니다. 철새 도래지가 대부분 강 하류에 있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조간대 지역은 백여 종에 이르는 수백만
마리 새들의 생존을 돕는 서식지이다. 뿐만 아니라 바다거북이 산란하는 해변이자 아시아물개가 번식하는 장소이다. 또 경제성이 높은 어류의
산란장이자 수천 종에 이르는 무척추 동물의 보금자리이기도 하다.
특히 우리 서해 갯벌은 생명체들의 보고였다. 세계 5대 갯벌 가운데서 생물 다양성 측면에서 볼 때 우리 서해 갯벌이 단연 돋보인다.
예를 들어 새만금에는 어류가 약 1백55종, 저서생물이 1백41종, 규조류가 1㎠당 20만 개체가 서식하고 있었다. 덕분에 우리 조상들은 서해
갯벌 해산물로 먹거리의 상당량을 획득할 수 있었다.
더구나 갯벌 앞바다는 수심이 얕아 어족이 풍부했다. 초기 인류가 갯벌 채취 뿐 아니라 어로 생활을 하며 고기를 잡을 수 있었다. 초기
인류는 이렇게 갯벌 연체동물 채취와 연근해 어로 활동과 더불어 육지에서는 농사를 지으며 터를 잡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여기에 소금 획득도
가능하니 갯벌 근처에 자리 잡으면 일석사조인 셈이다. 우리의 구석기와 신석기 유적이 대부분 바닷가와 강가에 분포되어 있는 이유이다.
또한 이러한 갯벌 생활과 강가의 모래밭 근처에 장착생활을 하다 보니 우리 토기는 갯벌에 박아 놓고 쓰기 쉽도록 밑이 뾰족했다. 우리의
빗살무늬 토기의 밑바닥이 뾰족한 이유이다.
* 동양 제일의 어장, 발해만
서해안은 빙하기 이후에 만들어져 세계적으로 수심이 얕은 바다다. 평균 수심이 44미터에 불과하다. 특히 발해연안 발해만의 평균 수심은 22미터 남짓이다. 세계에서 가장 얕은 바다의 하나다. 바다가 경사가 완만한 대륙붕 위에 만들어져 조수 간만의 차가 심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조수 간만의 작용으로 아시아 유일의 대형 갯벌이 만들어진 것이다.
완만한 해변은 어족이 많을 뿐 아니라 거친 파도를 잠재워 마을과 어촌이 안전하게 들어서게 한다. 황하에서 쏟아져 내려오는 황토로 인해
황하 하류의 탁류보다는 요하 쪽의 물이 깨끗하고 갯벌도 좋았다. 그래서 요동반도 쪽에 제염소가 많았다.
게다가 어족이 풍부하다 보니 고기잡이가 발달하게 된다. 덕분에 고기잡이배가 많이 만들어져 일찍이 해양 활동이 왕성했다. 갯벌이다 보니
배 밑이 편평한 평저선이 만들어져 고기잡이에 쓰였다. 배 밑바닥이 뾰족하면 썰물 때 갯벌에 쓰러지기 때문이다. 우리 고대 선박이 세계에서
유일하게 평저선인 이유이다. 고대로부터 발해만은 양자강 하구와 더불어 동양 제일의 어장이었다.
* 중국 연안과 서해 갯벌의 차이점
넓은 갯벌이 형성되려면 조수간만의 차가 커야하고, 해안가의 경사가 낮아야 한다. 서해의 독특한 지형적 특성은 바로 이 두 조건을
만족시켜준다. 그런데 같은 서해지만 우리 갯벌과 중국 갯벌은 특성이 다르다. 갯벌은 퇴적물의 종류에 따라 펄갯벌, 모래갯벌, 펄과 모래의
혼합갯벌로 나뉜다. 다양한 생물이 살기 위해서는 다양한 종류의 갯벌이 혼재되어야 한다. 환경이 다양한 만큼 서식하는 생물종의 수도 많아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 갯벌은 모래갯벌, 혼합갯벌, 펄갯벌이 함께 발달한데 비해 중국 측 갯벌은 펄갯벌이 대다수다. 황하나 양자강과 같은 큰 강으로부터 다량의 펄이 연안으로 이동해 와서 형성됐기 때문이다. 그래서 육지로부터 유입되는 퇴적물의 양이 지나치게 많아 삼각주 형태의 갯벌이 많다. 이런 경우는 다양한 생물이 살기가 힘들다. 서해에 우리 측 갯벌이 중국 연안보다 발달한 이유이다.
그런데 우리 갯벌은 모래갯벌, 혼합갯벌, 펄갯벌이 함께 발달한데 비해 중국 측 갯벌은 펄갯벌이 대다수다. 황하나 양자강과 같은 큰 강으로부터 다량의 펄이 연안으로 이동해 와서 형성됐기 때문이다. 그래서 육지로부터 유입되는 퇴적물의 양이 지나치게 많아 삼각주 형태의 갯벌이 많다. 이런 경우는 다양한 생물이 살기가 힘들다. 서해에 우리 측 갯벌이 중국 연안보다 발달한 이유이다.
* 소금생산과 어로활동 그리고 농사로 고대문명 탄생하다
발해만 연안에서 소금이 생산되고 어로활동이 활발해지면서 사람들이 바닷가와 강 하류 하천가에 정착해서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이로써 고대문명이 가장 먼저 자리 잡게 된다. 이를 발해연안문명이라 한다.
그런데 신석기 시대에 바닷물이 조금씩 차오르기 시작해 육지가 바다로 바뀌어갔다. 사람들이 점점 강 상류 쪽으로 밀려 올라가야 했다.
특히 물고기가 많은 요하유역에 사람들이 많이 몰려 살면서 강 상류에도 고대문명이 발생했다. 그것이 소하서에서 시작된 홍산문명이다.
더구나 발해만은 얕은 바다라 예전에는 요동반도와 산동반도는 섬들로 연결되다시피 했다. 더구나 발해만에는 풍랑이 적어 작은 배들도 항해하는데 무리가 없었다. 이로써 요동반도와 산동반도를 포함한 발해만 일대가 사실상 모두 한 생활권이었다. 발해만 연안이 동아족의 근거지가 된 이유이다. 기원전 7000년 이전에 발해만 연안에서 발흥한 문명은 그 뒤 내륙으로 퍼져 소하서를 시작으로 내몽골 사해(査海)와 흥륭와에서 문명의 꽃을 피웠다.
더구나 발해만은 얕은 바다라 예전에는 요동반도와 산동반도는 섬들로 연결되다시피 했다. 더구나 발해만에는 풍랑이 적어 작은 배들도 항해하는데 무리가 없었다. 이로써 요동반도와 산동반도를 포함한 발해만 일대가 사실상 모두 한 생활권이었다. 발해만 연안이 동아족의 근거지가 된 이유이다. 기원전 7000년 이전에 발해만 연안에서 발흥한 문명은 그 뒤 내륙으로 퍼져 소하서를 시작으로 내몽골 사해(査海)와 흥륭와에서 문명의 꽃을 피웠다.
'발해연안 고대문화의 연구'로 박사학위를 취득한 선문대 대학원장 이형구 교수에 따르면 홍산문화나 하가점 하층문화에서 발원한 동이족의
문명은 그 본토에서는 고조선을 형성하는 원동력이 되었고 중원 지역으로 들어가서는 하나라를 정복하고 상(商)왕조를 이룩했다고 한다.
* 중국문명의 다기원론 시작되다
우리는 지금까지 동아시아 문명의 시발점이 황하문명이라고 알고 있었다. 그런데 1973년에 양자강 하류에서 하모도 문화라고 명명된 신석기
유적이 새롭게 발견된다. 이 하모도 문화는 기원전 4500-4000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황하문명의 앙소문화보다 최소 500년에서 1천 년이
앞선다. 중국 전체가 난리가 났다. 그래서 이를 ‘장강문명’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양자강의 문명이란 뜻이다.
그때부터 중국에서는 중화문명은 황하문명에서 출발했다는 단일기원론이 아니라 황하문명과 장강문명 두 곳에서 시작됐다는 다기원론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두 군데에서 문명이 시작됐다고 보기 시작한 것이다.
하모도문화권에서 발굴된 유적들을 보면 그때 이미 물을 가두어 농사를 지었다. 논둑을 만들어 물을 가두고 씨를 뿌렸던 것이다. 현재
우리가 하는 논농사와 크게 다를 바 없었다. 그런 유적이 대규모로 나왔다. 그것이 기원전 5천 년까지 올라가는 하모도문화다.
* 세계 최초의 홍산 문명이 발견되다
장강문명이 새롭게 발견되었을 때만 해도 중국 학계의 혼란은 그리 크지 않았다. 중국 사람들은 만리장성 밖은 다 야만인의 세계로 보았다.
그래서 오랑캐라 불렀다. 실제로 만주 일대에서 변변한 문화 유적이 발견된 적도 없었고, 새로운 유물이 발견되면 모두 황하문명 지역에서 전파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런데 1980년 초 만리장성 북쪽 요서 지방 일대에서 의외로 대규모 신석기 유적이 무더기로 발굴되기 시작했다. 이른바
‘요하문명’이었다. 세계 최초의 문명이 발견된 것이다. 현재까지 발견된 것은 기원전 7천 년까지 올라가는 소하서문화가 가장 이른 시기다. 이
일대에서 이보다 더 이른 시기의 유적과 유물이 나올 가능성도 있다.
그 뒤 발해연안 문명은 내륙으로 퍼져 기원전 4500년경에는 홍산문명이 무르익어 초기형태의 국가가 성립된 것으로 보인다. 고조선의 모태
국가이다.
첫댓글 우리민족 동이족이 세계를 아우르는
대 제국이였는데도 식민사관의 역사에서
뿌리조차 잃었는데 종북세력 역사가들은
빨갱이 물이 들어 나라를 망치려고
혈안이 된 이 나라를 누가 구원할것인가?
건강하고 행복한 주말 되세요.^~^
동이족(東夷族)이 연 세계 최초의 발해연안문명을 잘 탐독하였으며
기원전 4500년경에는 초기형태의 국가가 성립된 고조선의 모태 국가이다.
공부 잘하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건강하고 행복한 주말 되세요.^~^
잘 배우고 갑니다
건강하고 행복한 주말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