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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을 말하다, 〈신세기 에반게리온〉
2009101212
사학과 김대경
애니메이션은 '살아있는'을 뜻하는 라틴어 'Anima'에서 유래했다. 어원에서 보이듯 본래 시작은 서양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애니메이션 생산의 가장 큰 지분은 일본이 차지한다. 때문에 ‘재패니메이션’이라는 새로운 단어가 생길 정도로 애니메이션에서 일본이 가진 위상은 지대한 수준이다. 전후 절망에 빠진 일본인을 위로하기 위해 만들어진 〈철완 아톰〉으로부터 재패니메이션은 점차 덩치를 키워왔다. 그 흐름 속에서〈마징가Z〉, 〈마크로스〉, 〈건담〉등의 로봇물이 한 축을 이루게 되었다. 이후 ‘슈퍼로봇’과 ‘리얼로봇’이라 일컬어지는 양대 산맥이 각자의 인기를 구가하던 중, 〈신세기 에반게리온〉이라는 작품이 등장하였다.
에반게리온은 권선징악, 전쟁의 비극, 환경 파괴 등 단순한 주제 선정에서 머무르지 않았다. 그 안에는 인간의 정의와 철학, 사회과학과 기독교적 요소 등 하나로 정리할 수 없는 무수히 많은 주제가 담겨 있다. 감독은 26화의 짧은 분량 안에 많은 주제를 담기 위해 잘 사용되지 않던 연출법을 대거 차용하였다. 또한 인물에 큰 비중을 두어 최대한 많은 이야기를 풀어내기 위해 진력하였다. 때문에 본 작품에 대해 “너무 복잡하다”, “이해할 수 없는 애니메이션이다”와 같은 감상평이 쏟아지기도 했다. 중학교 1학년 때 게임으로 처음 접했던 에반게리온은 나에게 그저 새로운 로봇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선라이즈의 용자물, 엘드란물 등의 로봇을 좋아했었기에 별다른 인식 없이 내려 받았다. 그렇게 감상한 에반게리온은 나에게 충격을 선사했다. 에반게리온에 로봇은 없었다. ‘인간’만이 전부였다.
에반게리온의 등장인물은 모두 타인과의 교류에 결함을 갖고 있다. 주인공인 신지는 사도와의 전투로 인해 에바에 탑승하는 것을 주저하지만 타인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탑승한다. 신지는 타인이 생각하는 자신을 두려워했다. 그의 행동은 누구에게나 좋은 사람이길 원하는 이기적인 마음의 발로였다. 차차 작품이 진행되며 주변 인물들은 점차 신지의 태도에 염증을 느끼고, 사이가 틀어져 버리기도 한다. 신지의 아버지인 이카리 겐도는 아들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고 일만 돌보는 아버지이다. 때문에 아들로부터 미움을 받으며, 소통을 시도하지도 않는 모습을 보여 준다. 실질적인 신지의 보호자, 카츠라기 미사토는 ‘어른’의 이미지를 품고 등장한다. 그러나 그녀 역시 어두운 과거를 잊기 위해 언제나 밝은 모습으로 스스로를 포장한다. 신지가 소멸할 위기로부터 간신히 탈출하자마자 옛 남자친구와 잠자리를 갖는 배덕한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신지와 같은 에반게리온의 조종자인 아야나미 레이는 에바와 같은 인조인간이다. 그렇기에 감정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잘 알지 못하고, ‘인형’이라는 말을 듣는다. 사도와 싸우며 ‘사람’으로서의 자신을 자각하던 레이는, ‘눈물’을 경험함과 동시에 사망하지만 다음 레이가 그녀의 자리를 메운다. 또 다른 조종자인 소류 아스카 랑그레이는 독일에서 훈련받은 에이스이며, 대학까지 졸업한 수재이다. 그러나 항상 자기 멋대로 행동하고, 자신 뜻대로 되지 않으면 공격적인 언행을 보인다. 어른을 동경하지만 동시에 경멸하는 부조리함을 보여주기도 한다.
에반게리온의 표면은 ‘에바’와 ‘사도’가 생존을 위한 싸움을 해 나가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전투 역시 인간의 이야기를 풀어내는 일부분으로서 기능한다. 사도와의 전투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어휘인 A.T Field는 상대방의 공격을 차단하는 방어막이다. 또한 그 자체가 상대를 공격할 수 있는 수단이 되기도 한다. 이 강력한 방어막은 또 다른 A.T Field를 전개하여 서로 간섭하게 함으로써만이 무효화시킬 수 있다. 혹은 데우스 엑스 마키나로서 기능하는 ‘롱기누스의 창’을 이용하여 벽 자체를 관통할 수 있다. 마지막 사도로서 사람의 같은 모습을 한 나기사 카오루는 이 A.T Field를 ‘마음의 벽’이라 일컬었다. 즉, 마음의 벽을 허물기 위해서는 다른 마음의 벽을 충돌시키거나 거절할 수 없는 힘으로 그를 깨트리는 과정이 필요한 것이다.
극 초반, 아카기 리츠코는 쇼팬하우어의 우화에 기원을 둔 ‘고슴도치의 딜레마’ 이야기를 한다. 신지를 필두로 한 에반게리온의 등장인물들은 결국 A.T Field라는 바늘을 세운 고슴도치이다. 혼자 있는 것이 두렵고 외로워 타인에게 다가가지만 가시 때문에 서로 상처를 주고받는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마음으로부터 스스로를 형성하고 보호한다. 동시에 다른 이에게 상처를 주기도 한다. 인간관계에 서툰 에반게리온의 군상은 결국 우리 스스로의 모습을 투영하는 것이다. 때문에 서로 다가가고 상처를 입는다. 그러나 서로를 이해하기 위해 타인과의 간극을 좁혀 나가는 것이다.
그러나 에반게리온은 막연히 타인에 대한 이해만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마지막 극장판 〈엔드 오브 에반게리온〉은 흑막인 제레의 각본에 의해 전 인류가 동화되는 ‘인류보완계획’의 이야기이다. 각본대로 사람들의 A.T Field가 허물어지며 모두 하나로 융합되어 간다. 그러나 여기서 이카리 신지는 타인에 대한 완벽한 이해를 상징하는 ‘동화’를 거부한다. 완전한 동화는 결국 개개인의 정체성의 완전한 사멸을 뜻한다. 상처받기 싫어하던 수동적인 소년은 오히려 서로 상처를 주고받는 세계를 선택했다. 완전한 이해로 하나가 된 세상은 결국 남는 것이 없는 것과 같다는 이유에서였다. 사람은 타인과의 관계로 인해 때로는 긍정적 감정을, 때로는 부정적인 감정을 느낀다. 부정적인 감정을 느끼며 고통스러운 순간은 타인을 이해하지 못하는 상황에 대한 슬픔으로 채워진다. 그러나 ‘타인에 대한 이해’라는 명제는 그 사람의 출생부터 성장과정, 감정선 전부를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동화’인 것이다. 즉, 타인에 대한 이해는 다시 말해 타인의 소멸이라는 아이러니를 불러온다. 그로 인해 혼자 남게 된 인간은 다시금 외로움을 느끼는 역설적 상황에 빠진다. 신지는 이러한 상황을 견딜 수 없기에 서로간의 정체성을 유지하는 상태를 선택한 것이다.
1995년 이후는 그야말로 ‘에반게리온 신드롬’이었다. 제작사 가이낙스는 ‘열린 해석’이라는 자세를 견지했다. 때문에 〈신세기 에반게리온〉이라는 작품을 종교적으로 해석하는 시각부터 반 오타쿠 정서의 작품으로 해석하는 시각까지 천차만별의 의견들이 생겨났다. 여러 번 돌려 보며 나름의 사회학적 해석을 한 나 역시 그 중 하나이다. 쇼와와 헤이세이시대 간의 세대차이, 급속도의 사회발전에 따른 가치전도 현상, 개인의 정체성 상실과 소통의 부재. 그러나 에반게리온의 끝은 결국 아무것도 변한 것이 없었다. 결국 감독은 에반게리온을 통해 애니메이션을 보는 이 모두에게 인간관계의 사회철학적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중학교 1학년이라는 나이에 처음 접한 이 애니메이션은 이후 나의 관심을 〈슈퍼로봇대전〉등의 게임이나 프라모델 등 여러 분야에 쏟게 만들었다. 내 사유체계의 형성에 많은 영향을 끼친 에반게리온은 분명 나에게 ‘Anima’이리라. 나 역시 오타쿠였고, 아직까지 진행형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자신을 가두어 가는 오타쿠 뿐만 아니라 현대인들 모두에게 이 이야기를 하고 싶다. “서로 상처를 주고 받는 것을 두려워 하지 말라. 인간이란 그런 것이다. 서로를 완벽히 이해하려 하지 말라. 인간이란 그런 것이다.”
첫댓글 버블경제시대의 호황을 누리면서 일본사람들은 고도성장 이면에 예전과는 다르게 조직화될 수 없는 개인적 인권의 향상과 함께 전통사회적 질서가 무너진다는 두려움에 떨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이런 개인적 인권의 향상이 전통사회적 가치에 매몰되어서 과거로 회귀되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을 가지게 됩니다. 때마침 서양의 포스트모더니즘에서는 과학기술의 발달에 따른 비인간화 현상에 대한 문제제기가 이루어졌고요. 그 과정에서 신세기 에반겔리온이라는 애니메이션이 인기를 모으면서 우리나라에서도 상당한 인기를 거두었지요. 추억이 새로운 글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