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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양로원 갑천뉴스타트 원문보기 글쓴이: 엘리야
거룩한 소원(느 2:1-10) |
본문의 느헤미야는 바사 왕국의 고위직 관리였음에도 불구하고 호의호식에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그는 거룩한 소원을 품고 그것을 이루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하나님의 종이었습니다. 이에 그의 모습을 통해 몇 가지 교훈을 얻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그는 거룩한 소원을 가슴에 품은 사람이었습니다(2절). 거룩한 소원이란 무너진 예루살렘의 성벽을 재건하는 일이었습니다. 그가 그것으로 인해 얼마나 근심했던지 얼굴에 수색이 드러났습니다. ‘무너진 성벽’은 오늘날 무엇을 의미할까요? 그것은 교회의 부패와 타락된 모습을 의미합니다. 우리도 교회의 여러 가지 타락된 모습을 볼 때 단지 그것을 비판하거나 정죄하기보다는 느헤미야처럼 근심하고 마음 아파하며 그러한 타락된 모습을 갱신하고자 하는 거룩한 소원을 품어야 할 것입니다. 둘째, 그는 거룩한 소원을 입술로 선포했습니다(5절). 그는 세속 도시 수산궁의 여러 대신들 앞에서 자기의 영원한 삶의 목적이 하나님 나라의 사업을 수행하는 것임을 선포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도 이 부패한 세상을 살아가면서 언제 어디서나 우리가 살아가는 목적과 우리가 가진 거룩한 소원을 담대히 시인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성경은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부인하리라”(마 10:32,33)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셋째, 그는 하나님의 선한 손의 도우심으로 거룩한 소원을 이루었습니다(8절). 느헤미야는 제사장이 아니었지만, 방백으로서 귀한 사명을 감당했습니다. 그는 성벽을 재건하는 데 필요한 재목 등을 이방인들로부터 공급받음으로 기적적인 역사를 이루어냈습니다. 그는 그것을 하나님의 선한 손이 도우셨다고 증언하며 자신의 공로를 내세우지 않았습니다. 우리도 거룩한 소원을 품으면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선한 손의 역사로 우리를 도우십니다. 이와같이 우리가 항상 주 안에서 거룩한 소원을 품고 그 소원을 이루기 위해 최선을 다할 때 하나님의 도우시는 선한 손길이 함께 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
제목 : 앞날을 주님께 맡기고 위를 바라봅시다.
본문 : 렘29:11-14, 골3:11-4
설교 : 광주서남교회 안영로 목사
영국 옥스퍼드 대학에서 장수학을 연구하는 데이비드 박사는 세계에서 가장 많은 사람이 장수하는 마을인 에콰도르 발카밤바 마을 사람들의 장수비결과 생활습관을 2년 동안 연구한 뒤 발표 했습니다. 그 내용을 읽어 보았더니 8가지로 종합이 되어 있습니다.
(1)장수 비결은 은퇴한 후에 앞으로 살아갈 걱정을 하지 말고 지속적으로 일을 하라
(2)취미 생활을 찾아서 계속하라
(3)내가 늙어 가고 있다는 생각을 하지 말라
(4)술과 담배는 절대적으로 삼가라
(5)자녀들 문제로 지나친 걱정을 하지 말라
(6)하루에 2킬로미터 이상 걷고 고기는 삼가고 음식을 적게 먹도록 하라
(7)채식을 하고 자연식을 먹도록 하라
(8)앞날을 절대자에게 의지하고 살도록 하라 등입니다
성군 다윗왕을 보면 크고 작은 일을 할 때 마다
(1)앞길을 하나님께 맡기고 위를 바라 보면서 기도했습니다. 다시 말씀 드린다면 일을 시작하기 전에 다윗은 먼저 하나님의 결재를 받기 원했던 것입니다. 참으로 지혜로운 믿음의 왕 이였습니다.
(2)하나님의 뜻을 재확인 하기 위해서 다윗은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기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다윗은 위험에 처했을 때도 위를 바라보면서 기도 했습니다 응답 될 때까지 계속 기도했습니다. 확신이 생길때까지 기도했습니다. 성도여러분! 이 세상은 광야와 같습니다. 그 광야에서 사는 양과 같습니다. 이리떼가 많고 맹수가 많고 거칠어진 모습들만 보이는 세상입니다. 걱정거리가 많고 근심된 일이 많은 세상입니다. 그런고로 연약한 인간의 속성의 굴레를 벗어 버리고 온전하신 주님께 앞날을 맡기고 과감히 위를 바라보고 능력있고 권세있게 천성을 향하여 달려가야 할 줄로 믿습니다.
99년 일년동안에 우리 앞에 펼쳐질 모든 것을 주님께 맡기시기 바랍니다. 주님만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주님만 따라 가시기 바랍니다. 주님께 영광 돌리는 일만 하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인생의 목표가 분명해야만 행복하게 살수 있습니다. 우리의 목표는 구원받은 백성으로 저 천국에 가는 것입니다. 영원히 영생하는 것입니다. 이 길을 걸어 가려고 하면 주님께 앞날을 맡기고
(1)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해야 합니다.
(2)잊어야 할 것은 모두 잊어버리고 주님의 부탁하신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3)앞으로 남은 여생을 주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려고 하는데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4)주님만 따라 가기로 굳게 결심을 해야 합니다. 이런 믿음은 승리하는 믿음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인도하시다가 중간에 그만 두지 아니 하십니다. 끝까지 인도 하십니다. 함께 하십니다. 보호 하십니다. 축복 하십니다. 끝까지 책임져 주시는 하나님 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앞날을 주님께 맡기고 주님만 의지하는 믿음으로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 뿐만 아니라 어떤 어려운 일이 우리 앞에 있을지라도 낙심도 말고 절망도 말고 포기하지도 마시고 전능하신 하나님의 은혜와 섭리를 조용히 기다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부탁을 드립니다. 경상북도 안동에 사는 집사님은 예수 믿고 세례 받던날 큰 은혜를 받고 예수 믿기 전 모든 죄를 회개하고 새로운 변화를 받아 그의 이름을 김진실(김복례 본명)이라 고쳤다고 합니다. 그 뒤 집사 직분 받고 충성된 여종으로 헌신하였고 권사 직분 받고 기도로 헌신하면서 세상 떠나는 그날까지 구원받은 은혜 감사하여 찬송하면서 기쁨으로 사시면서 자녀들을 모두 구원시켜 믿음의 자녀로 기르셨고 마을 사람들에게 감사와 찬송의 할머니로, 권사님으로 존경받으셨으며 주님의 증인으로서의 사명을 다했다는 기록을 보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단 한 번 밖에 없는 인생을 소중하게 관리해 가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인은 누구든지 앞날을 주님께 맡기고 위를 바라보고 사는 소중한 삶이 필요합니다. 그 이유를 세 가지만 말씀드리겠습니다.
1. 귀한 것은 모두 위로부터 오기 때문입니다.(2절)
거듭난 성도의 삶을 제시해 주는 말씀이 골 3:2절에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구원의 축복을 받은 성도들은 날마다 성화 되어 갈 뿐만 아니라 천국의 백성 된 것을 확신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우리의 이름이 천국의 생명책에 기록된 것을 믿어야 합니다. 이런 믿음을 가진 성도는 위엣 것을 생각합니다. 위 엣 것은 참된 것이기 때문에 신령한 것이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이기 때문에 항상 생각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헐몬산의 이슬도 위에서 내려 왔습니다. 광야의 만나도 위에서 내려 왔습니다. 우리 주님도 하나님 우편에 계시다가 세상 죄를 담당 하시려고 위에서 내려 오셨습니다.
시편 121편1절-2절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니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 로다" 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인생의 근본적인 축복과 도우심은 모두 위로부터 오는 것을 확실하게 믿으시기 바랍니다.
찬송가 543장의 작시자 죤슨 오트만은 고백하기를 저 놓은 곳을 향하여 날마다 나아갑니 다. 내 뜻과 정성 모두어 날마다 기도함을 고백했습니다. 우리도 앞날을 모두 주님께 맡기고 저 놓은 곳을 향하여 날마다 나아가고 내 뜻과 정성을 모두어 날마다 기도하면서 힘차게 달려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 이런 믿음만 가지면 어떤 어려운 시련도 괴로움도 이겨 낼 수 있을 줄로 믿습니다. (아멘)
2. 영생의 길이 거기에만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는 길이라고 분명하게 말씀 하셨습니다.
거기는 하나님이 계시는 곳입니다. 주님이 계시는 곳입니다. 우리 주님은 길이 되시고 생명이 되시고 진리가 되시기 때문에 바라보고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어떤 가정에 어머니께서 믿음이 독실한 가운데 자녀들을 기르시면서 부탁하신 것이 있었는데 너희들은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 생기거든 자포자기 하지 말고 위를 바라보고 하나님을 의지하기 바란다는 말씀을 자주 하셨습니다. 아들들이 장성하여 군데 입대 하였습니다. 큰 아들이 훈련을 마치고 부대에서 근무하다가 큰 사고를 당하여 두 다리를 잃게 되었습니다. 인간적으로는 삶을 포기하고 싶었으나 어머니께서 들려주시던 말씀이 생각나면서 위를 쳐다보는 순간 큰 힘을 얻었습니다. 그는 병상에서 날마다 기도했습니다. 주님과 함께 험한 세상길을 걸어 가겠습니다. 주님만 의지 하겠습니다." 라고 서원 기도를 했다고 합니다. 그는 제대 후에 최선을 다하여 의과 대학을 마친 뒤 내과 의사로써 주님과 함께 날마다 환자를 진료하고 있다고 합니다. 우리도 우리 방법대로 내가 정한 길로 갈 것이 아니라 주님과 함께 인생길을 걸어 가면서 승리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 앞날을 주님께 맡기고 바라보고 살아야 경건해지기 때문입니다.
저 놓은 곳을 향하여 나아가지 아니하면 인간은 누구나 저속해 집니다. 세상사는 동안 향락에 빠지게 됩니다. 그리고 추하게 됩니다. 천박해집니다. 위엣것 은 영생을 위한 것이요 땅아랫 것은 우리를 지옥으로 끌고 갑니다. 성령 말씀은 우리보고 위엣 것을 바라 보라고 했습니다. 위엣 것을 생각하라고 했습니다. 그래야 현재의 삶에서도 영적인 세계에 속해서 살 수 있고 내가 일생을 마친 후에도 여전히 영원한 나라를 상속받아 영생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 나라에 대한 열망이 어느 정도인가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미국의 어떤 사람은 하버드 대학에 가는 것이 평생 소원이었는데 못 들어가고 죽게 되어 "내 시체를 하버드 대학에 기증하겠습니다."라고 했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하물며 우리가 천국에 대한 열망이 그 사람보다 못한다고 하면 어찌 하겠습니까? 세상사는 동안 위엣것 만 생각하는 하나님 나라에 속한 성도로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거기에만
(1)귀한 것이 모두 위에 있기 때문에
(2)영생의 길이 거기에 있기 때문에
(3)경건해지기 때문에 앞날을 주님께 맡기고 위를 바라봅시다
마음의 광풍 다스리기
마가복음5:1-20
어느 집사님이 사업을 하면서 사업상 술을 먹지 않을 수가 없어서 술을 드셨답니다. 그런데 아주 친한 친구 집사님도 마찬가지였답니다. 나이가 들자 건강이 쇠약해지고 믿음까지 약해졌답니다. 이 두 분이 술집에 앉아 주님께 불만을 늘어놓았답니다. 한 집사님이 “내가 비록 사업상 술을 마시지만 나처럼 주님 일에 충성한 사람 나와보라고 해!”라고 말하니까 옆에 있는 집사님이 “나도 마찬가지야! 난 개척교회를 다섯 개나 세운 사람이야, 그런데 주님께서 왜 나에게 건강을 주시지 않는거야. 장로도 안 시켜 주고” 그러다가 한 집사님이 먼저 술로 인한 병으로 세상을 떠났답니다. 그러자 정신이 들어 술을 끊어야겠다고 다짐하고 또 다짐을 하였답니다. 자기 스스로 다스릴 수 없으니까 먼저 가신 집사님과 늘 술을 먹던 술집 주인에게 술을 끊었다고 공포를 했답니다. 그런데 작심 삼일이라고, 며칠이 되지 않아 술집에 와서 술 두 잔을 시키더니 돌아가신 집사님과 늘 하던 방식대로 두 손으로 두 잔을 들고 “쨍” 부딪히며 “위하여”하며 마시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인이 “왜 두 잔을 그렇게 드십니까?”라고 물으니 “한 잔은 먼저 친구의 술잔을 내가 대신 마셔준 거라오”라고 말하더랍니다. 그러면서 “오늘만 마시고 난 술을 끊기로 했습니다.”라고 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며칠이 지나 또 왔더라는 것입니다. 술 한잔을 시켜서 술집 주인이 “건강도 안 좋으신데 이제 끊어야지요? 술끊기로 약속했지않습니까?” 라고 말하자 그 집사님이 “결심했습니다. 난 오늘부터 술 끊기로 했습니다.” 주인이 의아하여 “그럼 왜 또 술 한잔을 시켰습니까?”라고 말하자 “나는 술을 끊었는데 먼저 간 친구가 도무지 술 끊을 친구가 아니라 그 친구 거 마시는 거요.”라고 하더라는 것입니다. 도저히 그대로 놓아 두어서는 안되겠기에 부인 집사님이 목사님에게 자초지종을 말했답니다. 목사님은 집사님에게 권면하여 술을 끊기로 약속을 했답니다. 부인 집사님과 약속을 하고 술만 마시면 곧 바로 연락을 하기로 했답니다. 그런데 수요일인데 집사님에게 전화가 왔답니다. 집사님이 대낮부터 술을 드신 것입니다. 목사님이 기습 심방을 하였답니다. “술 드시지 않기로 목사와 약속했지 않습니까?” 집사님이 “깜빡 잊었습니다.” “무엇을 잊었다는 것입니까?” 그 때 집사님이 “술 마시기 전에 방문을 걸어 잠근다는 걸 깜빡 잊었다고요.”라고 말하더라는 것입니다. 그 때 목사님이 “집사님! 제발 술을 끊으세요. 신문에 못보셨나요? 술을 마시면 간암 발병률이 몇 배나 높다잖아요?” 그 때 “목사님! 밤마다 무서워서 잠을 통 이룰 수가 없습니다. 술을 마시지 않고 자면 밤이면 밤마다 침대 밑으로 귀신들이 우글우글 몰려들거든요.” 그 때 목사님이 “그렇다면 침대다리를 모두 잘라내고 주무시면 되겠네요.”라고 했답니다. 우리 인간의 마음은 강한 것 같지만 참 연약합니다. 무엇이든지 중독이 되면 아무리 강한 마음을 가진 사람도 제가 소개한 집사님처럼 자기 스스로 마음을 다스리지 못합니다. 술 뿐 아니라 담배, 마약, 놀음 중독, 일 중독, 돈 중독, 성 중독 등 무엇이든지 중독이 되면 그것들은 광풍이 되어 마음을 지배해 버리고 사람을 그것들의 노예로 만들어 버립니다. 건강한 마음을 삼켜버리는 이런 광풍을 어떻게 다스릴 수 있겠습니까?
1. 자신의 힘이 아니라 주님의 힘으로 다스려야 합니다.
보통 사람 같으면 마음에 일어나는 잔잔한 파도는 자신 스스로 다스릴 수 있습니다. 자식이 부모에게 야단을 맞아 마음이 일렁이는 것은 조금 시간이 지나면 가라앉습니다. 학기 말 시험 잘 못 보아 마음 상한 것 시간 지나면 정상적으로 가라앉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마음을 지배해 버리는 중독증은 자신 스스로 어찌할 수가 없습니다. 요즈음 우리 아이들을 보면 인터넷이 없으면 어쩔 줄을 모르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인터넷을 통해 창조적인 일을 하는 것보다 아무런 유익이 없는 소모적인 일을 합니다. 아이들에게 인터넷을 창조적으로 활용하라고 해도 역시 쓸데없는데 사용하고 하루라도 인터넷을 하지 않으면 어쩔 줄 모릅니다. 그래서 제가 저희 집 아이들의 잘못된 습관을 고쳐 주기 위해 지한 한 주간 저녁에 교회에 기도하러 오면서 줄을 제거해 놓았습니다. 한 주간 내내 교회에 나와 저녁기도를 하고 교회에서 자고 집에 들어가지 않으니까 인터넷을 할 수 없었습니다. 어제 저녁 인터넷을 하라고 했는데 정확히 시간을 지키는 것을 보았습니다. 자신의 힘으로 통제할 수 없는 것은 외부의 힘에 의해 통제되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온 거라사인 지방의 귀신들린 사람이 나옵니다. 이 경우는 극단적인 경우입니다. 그의 마음을 온통 귀신이 통제하고 있습니다. 귀신들림을 두 가지 형태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신체에 주는 영향이고 다른 하나는 정신에 주는 영향입니다. 티센(Thiessen)은 전자를 억압(oppression)이라고 하였고 후자를 사로잡힘(possession)이라고 하였습니다. 귀신들림은 하나 또는 그 이상의 악령이나 귀신이 인간의 몸 안에 거주하면서 그들의 희생자를 자기 마음대로 완전히 지배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말하는 것과 행동하는 것, 자기가 생각하는 것과 느끼는 것에 대한 자기 통제능력을 상실해 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소유권을 의미하기 보다는 지배권입니다. '침입'이며, 크고 작은 정도의 지배이지 결코 '소유'개념이 아닙니다. 귀신은 사람의 삶 가운데 어떠한 영역이든, 어떠한 행위이든, 성령의 지배를 받지 않는 바로 그곳을 지배하려고 합니다. 귀신이 들면 어떤 현상이 일어납니까? 정신적 광풍에 매몰되어 광인이 된 사람의 특징입니다. 크게 네가지 특징이 나타납니다.
첫째 정신 장애적 증상들과 유사한 것들이 나타납니다. 정신 이상이 있다고 해서 다 귀신 들린 것이 아닙니다. 정신 이상자들이나 귀신들인 사람들을 보면
(1)지각영역에서의 이상이 생깁니다. 자극을 받지 않았는데도 마치 자극을 받은 것 같은 반응을 일으키는 확각 증상이 나타납니다. 환청현상이 일어납니다. 정상인에게는 아무 소리가 나지 않는데, 어떤 소리가 들립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연예인 보아가 자기를 좋아한다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우리 나라 대통령이 되라 하셨다."라고 말합니다. 환시현상이 일어납니다. 정상인에게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데, 무언가가 보이는 증상입니다. "벽에 피가 묻어 있다. 귀신이 보인다"라고 말합니다. 환촉, 환취 등등의 환각 증상이 나타납니다.
(2)사고영역에서의 이상이 생깁니다. 망상현상입니다. 사실이 아닌데 사실로 믿는 것입니다. 감시망상에 사로잡힙니다. " 안기부에서 나를 감시하고 있다.“라고 말합니다. 관계망상에 사로잡힙니다. " 저 두 사람이 수덕거리는 것은 나에 대해 험담을 하는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신체망상에 사로잡힙니다. "간이 썩어 가고 있다."고 말합니다. 과대망상에 사로잡힙니다. "대통령이 나를 중용할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도청망상,(다른 사람 또는 인간이 아닌 존재가 자기를 조종한다는) 피조종 망상, (자기가 타인을 조종할 수 있다는) 조종망상, 텔레파시망상 등에 사로잡힙니다.
(3) 말하기 영역에서의 이상이 생깁니다. 상관성이 결여됩니다. 묻는 말에 엉뚱하게 대답합니다. 일관성 결여됩니다. 말을 하는데 앞뒤가 잘 맞지 않습니다.
(4) 행동영역에서의 이상이 생깁니다. 혼잣말을 합니다. 이유없이 어떤 행동을 반복합니다. 사람들의 영혼이 자기 머리로 들어온다며 못 들어오게 머리를 반복적으로 흔들어 댑니다.
이런 정신 병은 ①뇌의 이상, 신체적 이상에 의한 경우일 수도 있습니다. ②신체적 질병으로 인한 이온들의 불균형 또는 독성 물질의 과부하 등으로 발생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③심리적 원인에 의한 경우일 수도 잇습니다. ④극도의 생리적 박탈에 의한 경우일 수도 있습니다. ⑤약물남용에 의한 경우일 수도 있습니다.(히로뽕,대마초,각성제 등등)
그러나 귀신 들린 것은 영적인 원인일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두 번째는 죄의 행동이 통제할 수 없도록 나타납니다. 귀신은 더러운 귀신입니다. 인격과 행동, 사고와 언어를 귀신이 지배해 버리기 때문에 통제할 수 없는 죄악된 행동이 나타납니다. 자학자가 되게 해 버렸습니다.(5) “…돌로 제 몸을 상하고…”라고 말씀합니다. 사탄이 자학과 자살을 주도합니다. 다수의식(多數意識)의 종이 되게 해 버립니다(9). 자기 이름을 군대라고 합니다. '레기온'은 6,000명에 해당되는 규모의 그 당시 부대를 칭합니다. 자신의 고유명사인 이름을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다중 인격자가 됩니다. 난폭한 사람으로 전락시켜 버립니다(3). 제어할 수 없는 난폭성, 광폭성, 무법성, 무질서성, 파괴성이 나타납니다. 부끄러운줄을 모릅니다(15). 「오래 옷을 입지 아니하며」(눅 8:27)라고 하였습니다.
세 번째는 미신적이고 사이비 종교적 접촉을 합니다. 귀신이 그를 붙잡아 버립니다. 누가복음에는「귀신이 가끔 이 사람을 붙잡으므로…」(눅 8:29)라고 하였습니다. 상습적으로 노예 상태로 만들어 버립니다. 그래서 귀신이 좋아하는 무덤 사이에 거하게 해 버립니다(3). 죽음과 썩음의 장소입니다. 죽은 시체가 썩고 있는 곳입니다. 안락과 안식의 장소 집을 거절합니다. 가정과 사회로부터 고립을 자초합니다.
네 번째는 전능하신 하나님과 관계된 것들을 저항합니다.
6,7 절에 보십시오. 귀신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잘 알고 있습니다. 거라사인 사람들은 알지 못했습니다. 당시 종교 지도자들도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귀신은 알고 있었습니다. 영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알 뿐이지 믿고 구원받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이 극단적으로 광풍을 잠재우지 못하면 그 광풍에 의해 광인이 되어 버립니다.
이런 경우는 그의 의지로는 어쩔 수 없는 상황입니다. 그대로 가면 그의 인생을 더럽게 끊이 나 버릴 것입니다. 자신 뿐 아니라 아무도 그를 제어할 힘이 없었습니다. 그의 사랑하는 부모도, 힘있는 권력자도, 나이든 지혜자도 그의 인생을 변화시킬 수 없게 되었습니다. 동네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니까 쇠사슬로 그를 묶어 놓았지만 초인적인 힘으로 그것을 끊어 버렸습니다. 그대로 두면 그의 인생은 파멸되고 맙니다. 자신의 힘으로는 자신의 마음을 제어할 수 없는 절박한 상황입니다. 이 때 어떻게 마음의 광풍을 다스리고 성령께서 주시는 잔잔한 평화와 기쁨, 안식을 누릴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께 나와야 합니다. 주님께서 다스려 주어야 합니다. 6절을 보십시오. 그가 멀리 예수님을 보고 달려와 절을 합니다. 귀신들도 예수님을 알아봅니다. 예수님께 와서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나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원컨대 하나님 앞에 맹세하고 나를 괴롭게 마옵소서.” 왜 이런 말을 했겠습니까? 그 이유가 8절에 나옵니다. 한 번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이는 예수께서 이미 저에게 이르시기를 더러운 귀신아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셨음이라.” 예수님께 나아가면 예수님은 우리를 정확하게 아십니다. 진단해 주시고 귀신을 쫓아 내주십니다. 다른 것으로 귀신을 쫓아 낼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만이 자연의 광풍 뿐 아니라 영적 세계도 제어하시는 분이십니다. 영계도 다스리시는 분이십니다. 귀신도 다스리시는 분이십니다. 아무도 제어할 수 없어도 예수님은 “더러운 귀신아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7) 한 마디 하시면 귀신도 순종하게 되어 있습니다. 영계를 지배하시는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바울이 귀신들린 사람을 치유할 때 어떻게 합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에게서 나오라 하니 귀신이 즉시 나오니라 (행 16:18)"
예수 이름으로 예수 이름으로 악마는 쫓긴다.
2. 주님과 함께 하는 삶으로 대체해야 합니다.
사람이 자신의 마음을 지배하는 것들을 제거할 때는 제거함으로 가만이 놓아두면 안됩니다. 마음의 빈 공간은 다시 무엇인가가 차지해 버립니다. 마약 중독에 들린 사람을 고치기 위해 감옥에 격리 시킵니다. 자신 스스로 할 수 없으니까 격리시켜 마약을 일정기간 끊게 합니다. 그리고 다시 형기를 만료하면 출소시킵니다. 사회에 나가 정상적인 삶을 살 것으로 기대합니다. 그러나 대부분 실패를 하고 다시 마약을 합니다. 몇 년전 마약 중독으로 어려움을 당한 분을 상담하고 고쳐 주기 위해 애를 쓴 경험이 있습니다. 마약으로부터 멀어질려고 애를 쓰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예전의 친구들을 만나면서 다시 마약을 하게 되었고 아마 지금은 감옥에 다시 들어간 줄 알고 있습니다. 마음의 광풍을 다스리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합니까? 계속 격리된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구별된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거룩한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 한마디로 귀신이 나가니까 이 사람이 어덯게 되었습니까? 15절을 보십시오. 옷을 입고 정신이 온전하여 졌습니다. 이것을 보고 사람들이 두려워 합니다. 예수님에 대한 경외심을 가지게 됩니다. 그리고 이 동네 사람들이 예수님께 요구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17절을 보십시오. 자기 동네에서 떠나 달라는 것입니다. 손해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돼지 이천 마리가 하루 아침에 몰살했기 때문입니다. 한 마리에 10만원 씩 치면 2억입니다. 큰 돈입니다. 생명의 귀중성을 모르는 사람은 그것이 크게 보일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 주님은 온 천하보다 한 생명이 주님께 돌아 오는 것을 귀중하게 생각하십니다. 그런데 귀신들렸다가 치료받은 사람은 그 동네 사람과 다르게 반응합니다. 예수님이 떠나려고 하니까 그는 어떤 요구를 합니까? 18절을 보십시오. 함께 있기를 간구하였습니다. 바로 이것이 마음의 광풍을 지속적으로 다스릴 수 있는 방법입니다. 주님과 함께 사는 것입니다. 사탄과 함께 사는 것이 아닙니다. 귀신들과 함께 사는 것이 아닙니다. 술과 마약과 돈과 쾌락과 함께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과 함께 살 때 우리는 사단의 지배에서 벗어나 주님이 주시는 평강과 기쁨, 참 안식을 누리며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 생활이 바로 성령 충만한 생활입니다.
지각 영역에 있어서 이제는 주님과 함께 동행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식에 까지 새롭게 받은 사람들입니다.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 자니라 (골 3:10)” 환청, 환시, 환촉, 환취에 빠져 있을 사람들이 아닙니다. (주일학교 선생님의 예) 변화받았으면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식으로 새로워져야 합니다. 사탄이 주는 지식 체계로 사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모든 분야에 하나님이 주시는 지식 체계로 대체하는 것입니다.
사고영역에서 주님과 함께 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과 함께 살기 때문에 망상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아닙니다. 감시망상, 관계망상, 신체망상, 과대망상, 도청망상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을 바라보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약속 붙들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우리 하나님이 우리의 소원을 들어 주십니다. 어떤 절망과 어려움이 있다해도 낙심하지 않고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일어설 수 있는 것입니다. “저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의 소원을 이루시며 또 저희 부르짖음을 들으사 구원하시리로다 (시 145:19)”라고 했습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오늘 날도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기를 그들을 무서워 말라 두려워하지 말라 (신 1:29)
너희 앞서 행하시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애굽에서 너희를 위하여 너희 목전에서 모든 일을 행하신 것같이 이제도 너희를 위하여 싸우실 것이며 (신 1:30)
광야에서도 너희가 당하였거니와 사람이 자기 아들을 안음같이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의 행로 중에 너희를 안으사 이 곳까지 이르게 하셨느니라(신 1:31)“
말하기 영역에서 우리 주님과 함께 사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주님과 동행하는 사람답게 말하는 것입니다. 늘 부정적이고 비판적이고 소극적인 말이 아니라 늘 긍정적이고 적극적이고 낙관적인 말을 하는 것입니다. 나는 연약하지만 우리 하나님이 하신다는 사실을 입술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능력으로 일어서는 것입니다.
행동영역에서 하나님 아들 딸 답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말씀이 멈추라는 곳에서 멈추고 말씀이 가라는 곳으로 가는 것입니다. 요단강이 가로 막혀 있다할 지라도 법궤 메고 들어가라고 하면 들어가는 것입니다. 여리고 성이 아무리 견고하다해도 돌라면 도는 것입니다. 문둥병이 발했다 할지라도 물속으로 들어가라고 하면 들어가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거기에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역사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3. 예수님으로 인하여 변화된 자신의 삶을 증거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귀신들렸다가 놓임받은 사람이 예수님과 함께 있기를 원할 때 예수님은 그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하였습니까? 19절을 보십시오. “집으로 돌아가 주께서 네게 어떻게 큰 일을 행하사 너를 불쌍히 여기신 것을 네 친 속에게 고하라”고 했습니다. 그 말을 들은 그 사람은 어떻게 했습니까? 20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자기에게 어떻게 큰 일을 행하신 것을 데가볼리에 전파하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친족 뿐 아니라 데가볼리 사람들에게 증거하였다는 말입니다. 자기 자랑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어떻게 큰 일을 행했는가를 전하는 것입니다. 자기는 무능력하고 귀신의 포로였지만 주님께서 자신을 살리신 것을 전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어떻게 자신을 긍휼이 여기셨는가를 전하는 것입니다. 광풍에서 노임받아 다시 광풍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을 보면 다시 자기 자신으로 돌아가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자신이 아니라 주님을 전하는 삶으로 변화가 되면 주님께서 더 많은 것으로 부어 주실 텐데 조금 나아지면 다시 아 옛날이여 하면 사탄의 종노릇해 버립니다. 사울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변변치 못한 사람 왕으로 삼아 주었습니다. 처음에는 얼마나 부모에게 효도하고 얼마나 나라를 잘 다스렸습니까? 그런데 이제 살만큼 살고 오를 만큼 오르자 하나님의 긍휼과 하나님의 은혜를 증거하는 삶이 아니라 자신의 성을 쌓는 삶을 살려고 합니다. 다윗이 만만이라는 소리를 듣고 시기와 질투의 늪에 빠져 버립니다. 그러자 어떻게 됩니까? 악신이 그에게 들어가 그를 지배해 버립니다.
사업하여 돈을 잘 벌면 그것도 주님 때문이라고 말하여야 합니다. 의도적으로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중독에서 해방되면 의도적으로 우리는 주님의 능력으로 치유받았음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내 이제 예수 믿는 사람이 되어 예수님의 은혜로 담배를 피우지 않게 되었다고 친한 친구들에게 선포하는 것입니다.
지금은 북아프리카는 이슬람 문화의 지배를 받아 참 못 사는 나라이지만 초대 교회 때는 신앙의 위인들이 많이 나왔습니다. 터툴리안, 오리게네스, 키프리안, 아타나시우스, 어거스틴 같은 위대한 인물을 배출했습니다. 그 중 어거스틴은 우리 기독교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는 방탕한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16세의 어린 나이에 이미 여자를 맞아들여 15년을 같이 살았고 아들도 두었답니다. 다른 여자와 약혼하고 동거하는 여자를 내보내기 까지 하였다고 합니다. 자신의 성욕을 이기지 못하여 술집도 드나들었는데 그가 어머니의 30년의 기도로 변화가 되었습니다. 회심한 후 성경도 부지런히 읽고 기도하며 신앙생활을 하고 있던 어느 날, 길가에서 옛날에 드나들던 술집의 여인을 만나게 되었답니다. 이 여인은 어거스틴에게 “왜 요즘은 저희 집에 들르지 않나요”라고 유혹했답니다. 그러자 어거스틴은 “옛날의 어거스틴은 죽었고 나는 새 사람이 됐소”라고 대답했답니다. 사탄은 끊임없이 과거 우리의 약점을 붙들고 광풍의 포로로 잡으려고 합니다. 우리는 옛 사람이 이미 죽고 새 사람이 된 존재(고후 5:17)라는 사실을 선포해야 합니다.
왜요 사탄에게 틈을 주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사탄은 우는 사자처럼 두루 삼킬 자를 찾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엡 4:27)고 말하고 있습니다. 다시 귀신에게 대로를 만들어 주어서는 안됩니다. 로저 버포드는 귀신의 영향을 받거나 귀신에 들리는 경로에 크게 영향을 주는 요소들을 “귀신의 대로”라고 부릅니다. 크게 두가지를 통해 들어와 마음을 지배해 버린다는 것입니다. 첫째가 이방신 숭배입니다. 동양종교에 참여하거나 뉴에이지 통로 행사에 참여한다는지, 손금보기, 무당, 사탄 숭배, 사이비 종교의식, 점술 등에 참여하면 자기 삶에 들어오도록 사탄과 귀신을 의식적으로 초청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죄의 삶의 양식들 가지게 되면 사탄이 그것을 틈타 인간들을 지배해 버린다는 것입니다. 영적성장에 무관심하거나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 성령, 예배의식 등에 부정적인 반응을 나타날 때 사탄이 그 틈을 결코 놓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용서를 못하고 한 맺힘을 풀지 않고 복수심에 불타며 그것을 사탄이 노린다는 것입니다. 알콜이나 약물남용, 습관적인 노름이나 성적일탈 같은 중독적 패턴에 빠지면 사탄을 그 틈을 놓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적 지배를 받아들이기를 싫어하고 권력, 부, 지위, 명예 등에 지나치게 집착하면 그것을 이용한다는 것입니다. 사탄은 인간에게 조금만 빈틈을 노출하면 시험, 송사, 속임수, 애먹임, 육체적인 상해, 사로잡음 등의 방법을 통하여 인간들 속으로 침투하여 인간을 지배하려고 애을 쓴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전신갑주를 입고(엡6:10-19), 마귀에 대적하며(4:7), 근신하고 깨어서 믿음을 굳게 하여 저를 대적하여야(벧전 4:8-9) 만 합니다. 귀신의 대로를 차단시켜 버려야 합니다. 과거 어떤 죄를 지었던지 그 죄를 우리 주님께서 다 용서해 주었다는 것을 확신하며 이제는 과거를 묵상하지 않는 것입니다. 과거 어떤 실수와 실패가 있었다 해도 그것의 노예가 되지 않습니다. 그것이 걸림돌이 아니라 디딤돌로 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흔히 상처에 대해서 3가지 반응을 나타냅니다. 첫째는 상처를 받은 후에 자신은 쓸모없는 인간이라고 체념하거나 포기하는 경우입니다. 둘째는 상처의 책임을 모두 남에게 전가시키는 책임전가형입니다. 이런 사람은 상처나 시험을 자기 갱신의 기회로 삼지 못합니다. 셋째는 상처를 은혜로 치료하고 시련을 믿음으로 이겨 시험과 상처를 자기발전의 기회로 삼는 사람입니다.
개인적으로도 우리가 살다 보면 남에게 말하고 싶지 않고 자신도 기억하고 싶지 않은 고통스러운 기억들이 있습니다. 가족의 죽음, 성폭행, 실직 등 강한 스트레스와 충격으로 큰 상심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그의 큰 슬픔으로 해서 환상과 환청을 통해 자기에게 새로운 힘이 오기를 바라고 돌파구를 찾으면 광풍이 몰아칩니다. 하나님께 나와야 합니다.
그것은 과거의 쓰라린 실패일 수 있습니다. 이혼일 수도 있습니다. 사업의 실패일 수도 있습니다. 성폭행일 수도 있습니다. 알코올 중독일 수도 있습니다. 끔찍하고 충격적인 사건일 수도 있습니다. 가족의 죽음일 수도 있습니다. 커다란 실수 일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대단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숨긴다고 해결되는 것도 아니고 세월이 지난다고 해결되는 것도 아닙니다. 숨기려고 하면 할수록 강박증에 시달리고 자학하며 중독으로 회피해 보려하지만 그것은 일시적인 도피일 뿐입니다. 술을 진탕 먹고 잊으려고 한다고 잊을 수 있습니까? 눈을 뜨면 고통스러운 기억은 여전히 두려움으로 행복한 느낌을 덮어 버립니다. 공포감, 모멸감, 미움, 수치심은 여전히 내면 깊숙이 자리잡고 자신을 괴롭힙니다. 치유받지 못하면 신앙 생활을 해도 하나님과 진실한 관계를 가지지 못합니다. 형식적일 뿐입니다. 사람과도 친밀한 관계를 가지지 못합니다. 무책임하고 충동적이고 진실하게 말할 자리에서도 거짓을 말합니다. 과거의 모든 문제는 우리 하나님이 치유해 주었음을 믿고 주님의 은혜를 증거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의 상처를 치유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니라 (출 15:26)" "내가 너를 치료하여 네 상처를 낫게 하리라 (렘 30:17)" "보라 내가 이 성을 치료하며 고쳐 낫게 하고 평강과 성실함에 풍성함을 그들에게 나타낼 것이며 (렘 33:6)"라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치명적인 상처를 가진 인간일지라도 결코 포기하지 않으시고 인도해 주십니다.
광풍이 몰아 오고 있습니까?
자신의 힘이 아니라 주님의 힘으로 다스려야 합니다.
주님과 함께 하는 삶으로 대체해야 합니다.
예수님으로 인하여 변화된 자신의 삶을 증거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2007.3.25/열린교회/김필곤 목사
고난의 늪 헤쳐 나오기
마가복음5:25-34
이번 한 주간은 예수님이 우리 인류의 죄를 용서해 주시기 위해 십자가에 돌아 가신 날을 기념하는 고난 주간입니다.
예수님께서 로마 군병들의 책찍을 맞으시면서 십자가에 처절히 돌아가셨습니다. 골고다 언덕에서 험한 십자가를 지고 손과 발에 못이 박히셨습니다. 머리에는 가시 면류관을 쓰시고 옆구리는 창으로 찍히셨습니다. 반역자로 처형이 되었습니다.
지나가는 행인들은 머리를 흔들며 멸시와 조롱을 합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여 이스라엘을 해방시킬 것으로 생각하고 호산나를 외치며 요란을 떨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로마의 힘 앞에 무참하게 쓰러져 가자 "성전을 헐고 사흘만에 짓는다고 하던데 왜 그런 능력으로 죽어, 어디 하나님의 아들이시면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시지, 다 헛소리였거먼" 이런 식으로 조롱하는 것입니다. 대제사장들, 서기관들, 장로들은 예수님을 신성 모독죄로 처형합니다. "남은 잘 구원한더니 너나 구원해봐, 이스라엘 왕이라매 이스라엘 왕이면 내려와 봐, 그러면 믿어줄게"라고 조롱합니다. 로마 권력의 시녀인 로마 군병들은 예수님을 모질게 고문하며 그 고문을 즐깁니다. 옆에서 사형을 같이 집행당하는 한 강도 마져도 예수님을 욕하며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눅 23:39)"고 조롱합니다. 왜 예수님은 이런 수치와 고난, 고통을 당하셨겠습니까?
예수님 오시기 700년 전에 이사야를 통해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사 53:5)"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죄로 말미암아 고통과 지옥의 형벌을 당하고 죽을 수 밖에 없는 우리를 용서해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참된 평화를 주시기 위해서 십자가에 돌아가셨습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수치가 아니라 우리의 자랑이며 십자가는 부끄러움이 아니라 우리의 능력입니다. 성경은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1:18)" 라고 말씀합니다.
십자가는 우리의 죄의 문제를 해결해 주는 능력이 있습니다. 죽음에서 생명을 주는 능력입니다. 절망에서 소망을 주는 능력입니다. 십자가는 우리에게 참된 평화를 주시는 능력입니다. 십자가는 우리의 질병과 슬픔을 해결해 주시는 능력입니다. 누구든지 진정 십자가를 만나면 삶의 질이 변화됩니다. 우리의 질병과 슬픔을 대신 지시고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말씀합니다.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요 3:36)"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요 5:24)"
오늘날도 이 사실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믿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고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것을 믿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과학주의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을 증거를 보여 주어야만 믿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원숭이가 인간이 되었다는 증거가 어디 있습니까? 우주가 어느날 폭발에 의해 발생되었다는 빅뱅설의 증거가 어디 있습니까? 실험적으로 증명할 수 있습니까? 그런데 믿고 있습니다. 과학에서도 증명할 수 없으니까 이것을 "학설, 이론"이라는 말을 붙여 줍니다. "진화론, 빅뱅설" 그럴 듯하지만 증명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분명하게 실험으로 증명되는 것들이 있습니다. 이것들을 법칙이라고 합니다. "만유 인력의 법칙, 질량불변의 법칙, 부력의 법칙, 죽음의 법칙" 등과 같은 것입니다. 모든 물건은 중력의 법칙에 의해 떨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다 죽게 되어 있습니다. 신앙인도 이런 법칙을 다 믿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것을 구분하지 못하고 진화론이 마치 과학적인 것이고 창조론은 믿으면 무식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약 200만종의 생물이 어떻게 진화되었겠습니까? 진화되었다면 연결고리가 되는 화석들이 발견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시조새 하나가 발견되었다고 해서 파충류에서 조류로 진화되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그 중간 단계가 무수히 발견되어야 합니다. 그것은 진화의 증거가 아니라 창조의 증거로 어느 시대엔가 하나님이 창조했으나 멸종된 시조새가 있었을 따름입니다.
오히려 창조론이 훨씬 합리적이고 설득력이 있습니다. 세상이 얼마나 질서있고 아름답습니까? 위대한 지혜를 가지신 분이 창조했다는 증거입니다. 이 빌딩이 우연히 생겼다고 해 보십시오. 정신 나갔다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우주가 우연히 생겼다고 말하면 과학적입니까? 사람에게 설계도가 있습니다. DNA 구조입니다. 몰스 부호나 디지털 부호로 모든 것을 설계하지요. 인간이 발견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전에 아데닌(A),구아닌(G), 시토신(C) 및 티민(T)를 통해 A-T와 C-G가 어떻게 결합되느냐에 따라 인간의 꼬와 입과 눈이 달라집니다. 유신론으로 살 것인가 무신론으로 살 것인가 양자 택일의 문제이지 과학적이다 비과학적이다의 문제가 아닙니다. 기적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순신 장군이 거북선을 만들었다는 것을 어떻게 압니까? 사실 이순신 장군의 부하들이 만든 것입니다. 역사적 기록을 보고 아는 것입니다. 그것 지금 증명할 수 있는 것 아닙니다. 우리는 시간의 제한을 뛰어 넘어 4차원에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기적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성경의 기록을 보고 알게 되는 것입니다. 특별히 우리를 거듭나게 하여 영적 지혜를 주어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비밀을 알게 하였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합니다.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요 3:3)" 이 때 니고데모가 물어 봅니다. 어떻게 거듭날 수 있냐는 것입니다.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삽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삽나이까 (요 3:4)" 이 때 예수님은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요 3:5)"라고 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난자도 하나의 생명체입니다. 정자가 수정되지 않으면 그것으로 생은 끝마치고 죽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정자를 만나면 새로운 생명체로 새로운 세상을 사는 것입니다. 인간도 마찬가지입니다. 다 영혼이 있습니다. 말씀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못하면 그것으로 끝이 납니다. 그러나 말씀과 성령으로 거듭나면 새로운 세상에서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이제 십자가가 수치가 아닙니다. 십자가는 능력이요 우리의 영광입니다. 어떤 경우가 우리에게 닥쳐온다 하여도 십자가로 우리는 일어 설 수 있습니다. 어떤 고난의 늪에 빠져도 우리는 십자가로 헤쳐 나올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예수님을 통해 고난의 늪에서 헤쳐나온 한 여인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Ⅰ. 고난의 늪에 빠진 인생
12년 동안 혈루증 걸린 여인이 있었습니다. 아마 부유한 집에서 살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당시 병원에 찾아가는 것 자체가 경제력이 있어야 하는데 많은 의원을 찾아다녔다고 하니 부자였던 것 같습니다. 시집 갈 때는 푸른 꿈을 가지고 갔을 것입니다. 어쩌면 아들도 낳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혈루증에 걸렸습니다. 하혈하는 병입니다. 잘 살다가 갑자기 걸렸습니다. 당시 문둥병과 혈루증은 불치의 병으로 부정하다고 생각하여 가정에서도 마을에서도 쫓겨나게 되어 있었습니다.(레 15:25-28) 성전에 나가지도 못했습니다. 그런데도 12년 동안 할 수 있는 방법을 다 해본 것을 보면 아마 동네 사람들에게는 숨기고 병을 치료했을 것입니다. 발각되면 자식을 두고 떠나야 합니다. 사랑하는 남편을 두고 떠나야 합니다. 정들었던 집을 떠나야 합니다. 얼마나 고통스러웠겠습니까? 그래도 살기 위해 의사에게 희망을 걸고 수많은 의원을 찾아갔습니다. 결과는 무엇입니까? 26절을 보십시오. 찾아 간만큼 많은 괴로움을 받았습니다. 있는 재산 다 허비해 버렸습니다. 아무 효험도 없이 도리어 병만 깊어졌습니다. 점점 죽음의 순간이 다가 오고 있었습니다. 날마다 당하는 육체적인 고통과 정신적인 고통이 얼마나 심했겠습니까? 있는 것 다 잃었습니다. 사랑도, 재산도, 건강도, 집도, 가족도 다 잃어 버렸습니다. 깊은 늪에 빠져 버렸습니다. 어떻게 하면 이 깊은 늪에서 빠져 나올 수 있겠습니까?
Ⅱ. 깊은 늪에서 헤쳐 나오는 방법
1. 깊은 늪에서 헤쳐 나오려면 그 늪에서 건져 주실 분,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깊은 늪에 빠지면 자신의 힘으로 어떻게 할 수 없습니다. 혼자의 힘으로 빠져 나오려고 허우적 거리면 더욱 깊은 물에 빠지게 됩니다. 자신을 밖에서 건져내 줄 사람이 필요한 것입니다. 때때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신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한계 상황을 만나게 합니다. 인식의 한계를 만나게 합니다. 능력의 한계를 만나게 합니다. 질병 앞에 서게 합니다. 죽음 앞에 서게 합니다. 무서운 고통 앞에 서게 합니다. 이 때 교만하지 말고 이 세상의 모든 능력과 권세를 가지신 예수님 앞에 손들고 나와야 합니다. 이 여인의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예수님께 나왔습니다. 고난은 예수님의 소리를 듣으라는 확성기일 때가 많습니다. 손들고 나오라는 주님의 은총의 기회입니다. 질병으로 고난의 늪에 빠졌습니까? 경제적인 고난의 늪에 빠졌습니까? 죽음의 공포, 고칠 수 없는 슬픔으로 고난의 늪에 빠졌습니까? 이 여인처럼 스스로 해결하려고 하면 할수록 더욱 깊은 늪에 빠져들어 갑니다. 만약 이 여인이 이 병이 걸리지 않았으면 예수님을 만날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들었다 하여도 성한 몸이었다면 예수님을 만나러 갔겠습니까? 우리 삶에 절망적인 상황이 올 때 그것으로 쓰러지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하여 우리 인생에 근본적인 해답을 주시는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우리 주님 앞에 진정으로 나아가면 주님께서 우리를 늪에서 벗어나게 할 것입니다. 저는 때때로 깊은 늪에 빠진 성도님들의 문제를 가지고 간절히 주님 앞에 나아갑니다. 언젠가는 공장을 하는데 땅 값이 없어 고통받는 가정이 있어 마지막까지 고통받는 가정을 보았습니다. 고난의 늪에 빠져 있는 가정 해결해 달라고 산에 올라가서 하나님께 매달렸습니다. 전화해 보니 아무런 해결책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기도하는데 마음에 감동을 줍니다. 이상한 감동입니다. “너가 해결해 주라는 것입니다.” 제가 무슨 돈이 있습니까? “아니야, 네가 해결해 주어야 해.” “그 거금이 제게 어디 있습니까?” 친구에게 전화를 하니 그 친구가 돈을 입금해 주어 그 성도님이 잔금을 다 해결하고 부지를 사 공장을 짓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깊은 늪에 빠진 자식의 문제입니까? 남편, 아내, 교회, 이 민족의 문제입니까? 내 눈에 그것이 보이며 그것 외면하라는 이야기가 아니고 그 문제로 우리 주님께서 우리를 만나길 원하십니다.
과기처 장관을 지내었고 현재 대학 총장으로 있는 세계적 핵물리학자인 정근모 박사(장로)의 간증을 읽어보았습니다. 아버지가 교장 선생님이었는데 학교에서 한 학생이 유리를 닦다 추락하여 죽었습니다. 아버지는 그 죄책감 때문에 결국 뇌일혈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어머니도 돌아가셨습니다. 그러나 그는 좌절하지 않았습니다. 미국에 유학을 가 학위를 받고 1967년 뉴욕 공과 대학의 부교수로 임명되었고 서른 둘에 한국 과학원의 부원장으로 부임했습니다. 그런데 간염으로 건강이 극도로 악화되었답니다. 열 살 된 아들에게서 '만성 신장염' 증세 나타났습니다. 한번에 4시간이 소요되는 투석치료를 하였답니다. 인간이 어쩔 수 없는 질병의 늪에 빠져 버린 것입니다. 그는 과학자였습니다. 그러나 아들의 병을 났기 위해 교회에 찾아갔습니다. '구원'이니 '은혜'니 하는 말보다는 병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이 급했답니다. 아들은 학교 생활은 이미 포기한 상태였답니다. 이화 여대를 다닐 때부터 신앙생활을 해왔으나 지극히 형식적인 신앙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했던 아내가 “하나님을 전폭적으로 의지하는 참신자”가 되자고 말했답니다. 아들은 부부의 걱정에는 아랑곳없이 두 번이나 자살을 기도했답니다. 교회에서 4일간의 부흥회가 열렸답니다. 집회를 앞두고 준비 기도를 열심히 했답니다. "이번 부흥회에서는 성령체험을 하게 해주소서. 뜨겁게 회개하며 깨지는 역사가 일어나길 원합니다. 니고데모처럼 중생(born again)하는 크리스천이 되고 싶습니다." 목사님이 에베소 2장 1-8절 말씀을 봉독한 뒤 설교를 시작했습니다."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말씀을 듣는 중에 갑자기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리기 시작했습니다.
밤 예배시간이었습니다. 설교를 듣는 중에 다시 눈물샘이 터졌나왔습니다. 그때에 나는 너무나도 크고 분명한 음성을 들었습니다 "아들아, 너는 네 아들에 대해 감사해 본 적이 있느냐?" 그건 뚜렷한 주님의 음성이었습니다. 교만함과 불만에 가득찼던 생활을 회개했답니다. 죄악들을 고백할 때마다 눈에서는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답니다. 대성통곡을 하였답니다. 체면이나 지위도 아랑곳없이 엉엉 소리내어 울었습니다. 이미 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감정을 억제할 수가 없었습니다. 아내와 두 딸이 흐느끼기 시작했습니다. 아들도 고개를 떨구며 울었습니다. 아들은 생명을 연장받고 인생이 완전히 바뀌었답니다. 일의 우선 순위가 바뀌었답니다. 첫째가 하나님 일이라고 합니다. 아무리 세상일이 바쁘고 중요하더라도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야 하며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일이 앞장서서 살기로 했답니다.
어떤 늪에 빠져 있습니까? 우리 주님이 손을 내밀고 있습니다. 주님 손을 잡으십시오.
2. 깊은 늪에서 헤쳐 나오려면 예수님을 만나는 데 방해하는 장애물을 뛰어 넘어야 합니다.
1)먼저 뛰어 넘어야 할 장애물이 자신의 마음의 장애물입니다.
마음이 변해야 인생은 변하는 것입니다. 마음이 할 수 없다고 생각하면 모든 것은 할 수 없습니다. 마음이 다른 사람을 정죄하면 그 사람은 그 정죄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비스마르크와 친구가 사냥을 갔는데 친구가 늪에 빠졌답니다. 그 때 친구가 살려 달라고 아우성을 쳤답니다. 비스마르크는 일언 반구 하지 않고 갈려고 하니까 친구가 계속 살려 달라고 했답니다. 그 때 비스마르크는 그에게 총을 겨누었답니다. “늪에 빠져 고통당하면서 죽는 것보다 네 총을 맞아 죽는 것이 더 편하다”는 것이라고 말했답니다. 그러자 친구는 살려고 발버둥을 쳤답니다. 그 때 비스마르크는 그를 늪에서 꺼내 주며 “나의 총은 너의 생각을 겨냥한 거야”라고 말했답니다. 사람의 생각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이 여인이 모든 것 다 잃었고 12년 동안 그 많은 의원을 만났는데 아무 소용이 없었다고 자포자기 했다면 결코 예수님을 만나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 여인을 혈루증으로 모든 것을 잃은 것 같았지만 아직 들을 귀가 있었습니다. 아직 걸어 갈 수 있는 다리가 있었습니다. 아직 말할 수 있는 입이 있었습니다. 그것으로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생각을 바꾸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면 고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생각을 바꾸어야 합니다. “우리 집은 어쩔 수 없이 망한다. 우리 남편은 절망적이다. 우리 아들은 변할 수 없다. 우리 나라는 절망적인 나라다. 우리 교회는 부흥하지 못한다....“ 나는 못해도 우리 주님께서 나를 사용하면 믿는 자에게 능치 못할 일이 없다는 능력이 나타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예수님은 풍성한 결실을 맺는데 장애되는 마음 세가지를 소개합니다.(마13장) 1) 길가(4, 19)같은 마음입니다. 마음 문을 굳게 걸어 잠그고 복음을 받아 들이기를 거부한 자를 말합니다. 교만한 마음입니다. 반응이 없는 마음입니다.
2) 돌밭(5,20,21)같은 마음입니다. 말씀을 피상적으로 이해합니다. 속이 깨어지지 않습니다. 감정에 지배받는 신앙입니다. 충동적인 마음(Impulsive heart)입니다. 3) 가시 떨기(7,22)같은 마음입니다. 필요 없는 것들이 꽉차있는 마음입니다. 세상의 염려, 재리의 유혹, 일락으로 가득찬 마음입니다.
2)관습이라는 환경의 장애물을 극복해야 합니다.
당시 관습은 혈루증 앓는 여인이 돌아 다닐 수도 없고 사람을 만날 수도 없습니다. 어찌 보면 요즈음 말로 하면 매너에 맞지 않는 것입니다. 얼굴 들고 예수님께 나아갈 형편이 못됩니다. 그러나 관습보다 더 중요한 것은 생명입니다. 체면이 문제가 아닙니다. 죽고 사는 문제입니다. “불교 집안이기 때문에, 전통적인 유교 집안이기 때문에, 이정도의 사회적 지위를 가지고, 이정도의 인격자인데...” 이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그녀는 사회 통념상 여자로서 뿐 아니라 부정한 자로서 공중(公衆) 앞에 나설 수 없는(접촉 불가) 입장이었으나 그러한 사회, 종교적 장애를 극복하고 담대히 예수께 접근했던 것입니다(레 15:19-27).
3)사람이라는 경쟁자의 장애물을 극복해야 합니다.
예수님 주변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세상에는 수많은 경쟁자들이 있습니다. 아무다 다 질병에서 고침받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 보십시오. 물론 주님께서 하시려고 계획을 세우면 돌들로도 소리지르게 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그렇게 사역하시지 않습니다. 주님께 나아가는 열정이 필요합니다. 이 여인이 자신은 모든 것을 다 잃어 버리고 아무 것도 없다고 머뭇거렸다면 주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아직 걸어 갈 수 있는 다리가 있었습니다. 아직 말할 수 있는 입이 있었습니다. 아직도 들을 수 있는 귀가 있습니다. 나에게 주신 것을 가지고 열정을 내면 되는 것입니다. 바울의 열정, 모세의 열정, 다윗의 열정, 야곱의 열정, 요셉의 열정이 필요합니다. 불타오르는 열정이 필요합니다. 아무리 많은 사람이 방해한다고 해도 이 여인은 포기하지 않습니다. 27절을 보십시오. 끼어 들어가 옷에 손을 댑니다. 예수님을 만나는 길은 죽음을 각오한 길이었습니다.
무리 가운데 썩여 뒤로 가서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댄다는 것은 엄청난 모험을 한 것입니다. 당시 문둥병 환자와 혈루증 환자는 격리 수용되었고 성에서 쫓겨났습니다. 정상인에게 손을 댈 수가 없는 사람입니다. 돌맞아 죽을 각오를 하고 접근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고난의 늪에서 벗어납니다.
예수님을 통하여 인생의 비시와 에디가 나꾸어져 버립니다. 우리의 문제를 근원적으로 해결 받을 수 있는 예수님을 만나는 데는 장애물이 있습니다. 종류는 다르지만 예수님을 믿고 행복한 삶을 살려고 하는데 장애물이란 있는 것입니다. 그 장애물을 뛰어넘어야 합니다.
3. 깊은 늪에서 헤쳐 나오려면 믿음의 생명줄을 잡고 나와야 합니다.
대부분 어떤 일이 잘 못될 때는 방법이 잘못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서울을 가려고 하는데 경부선을 타고 부산쪽으로 나가면 안됩니다. 이 여인은 잃은 건강을 찾기 위하여 의원을 찾았습니다. 어쩌면 당연한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이 병은 의사가 낳을 수 있는 병이 아니었습니다. 당시 불치의 병이었습니다. 그것은 상식이고 임상 결과였습니다. 그런데 의사를 찾아가면 낳을 것이라는 잘못된 신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사람이 아니면 저 사람을 통해 낳을 수 있겠지? 이 약이 아니면 저 약으로 낳을 수 있겠지?” 그러다 보니 결과는 무엇입니까? 괴로움은 더욱더 심해지고 있던 돈 다 허비해 버렸습니다. 효험은 없고 병을 더 깊어졌습니다. 잘못된 방법의 결과입니다. 이 여인이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사용한 방법은 무엇입니까?
1)듣고 믿는 믿음을 가진 것입니다(27).
2)예수님을 만지기만 하여도 나을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진 것입니다(28). 절대적인 믿음을 가진 것입니다. 내가 그 옷에만 손을 대어도 낳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함일러라"(엘레겐)는 미완료 시제로서 그녀가 마음속으로 그 같은 사실을 되뇌이고 또 되뇌였음을 보여 주는 말입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34절 보십시오. 이 여인의 믿음입니다. 믿음이라는 새로운 방법으로 고난의 늪에서 빠져나오는 것입니다.
모든 장애물을 극복하고 예수님께 나가면 우리 예수님은 어떻게 대해 주십니까? 사람들은 혈루증 환자라고 불결하게 취급하고 짐으로 취급합니다. 가족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우리 예수님은 그녀를 딸이라고 합니다.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지배하시는 하나님의 딸이 된다는 것 얼마나 고귀한 일입니까? 세상 모든 것을 얻은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분의 딸이 되면 재산을 잃은 것, 건강을 잃은 것, 명예를 잃은 것, 직장을 잃은 것 무엇이 대수가 되겠습니까? 우리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인데 얼마나 필요한 때 필요한 것으로 주시겠습니까? 영원한 천국이 우리의 것입니다. 그녀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영혼의 구원을 받습니다. 질병에서 고침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 뿐입니까? 살롬, 인생의 평안을 선물로 받습니다. 영혼의 구원, 생활의 구원, 육체의 구원을 받게 된 것입니다. 네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에 잘되고 강건해지는 축복을 받게 된 것입니다. 이 여인의 삶은 완전히 치료되었습니다. ①예수의 소문을 듣고 믿음을 가졌습니다.(29) ②예수를 따랐습니다(27). ③믿음에 따라 행함으로 치료받았습니다.(27) ④예수의 발 앞에 엎드려 병 나은 것을 고백(33)했습니다. 예수님으로부터 ①네 믿음이 너를 구원했다(34)선포를 들었습니다. ②평안히 가라(34) "평화의 상태를 지니고 가라"고 말씀합니다.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평화의 은총을 선사하신 것입니다. ③병에서 완전히 해방되었다(34) ④건강해져라(34)라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얼마나 행복하겠습니까? 우리의 삶에 이런 환희가 있습니다. 죄인 취급받던 여인이 예수님으로부터 딸 취급을 받게 된 것입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히 9:27)" 우리 주님 앞에 설 때가 옵니다. 누가복음에 나타난 부자를 보십시오. 불꽃가운데 고통하고 있습니다. 천국을 잃으면 영원을 잃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사는 사람들은 비록 이 땅에서 고통의 늪에 갇히기도 하지만 주님 앞에 서는 날 우리의 눈물을 닦아 주실 것입니다.
성경은 "이는 보좌 가운데 계신 어린 양이 저희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저희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러라 (계 7:17)"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계 21:4)"라고 말씀합니다. 고난 주간입니다. 깊은 늪에 빠져 있습니까? 우리를 위해 대신 십자가에서 고난을 당하신 우리 주님이 우리가 고난의 늪 속에 빠져 죽어가기를 원치 않습니다. 어떤 늪에 빠져있습니까? 그 늪이 경제의 늪입니까? 교만의 늪입니까? 중독의 늪입니까? 섭섭의 늪입니까? 명예의 늪입니까? 속임의 늪입니까? 권력의 늪입니까? 악한 습관의 늪입니까? 게으름의 늪입니까? 핑계의 늪입니까? 회의의 늪입니까? 증오의 늪입니까? 질병의 늪입니까? 의심의 늪입니까? 고통의 늪입니까? 절망의 늪입니까? 이별의 늪입니까? 걱정의 늪입니까? 실패의 늪입니까? 질투의 늪입니까? 욕심의 늪입니까? 오늘 이 시간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 (막 5:34)"라는 말씀이 여러분과 저의 생에 있기를 바랍니다.
2007년 4월 1일/열린교회/김필곤 목사
죽음 정복하기
마가복음5:35-43
부활절이면 계란을 선물합니다. 어제 우리 교회에서도 권사님들이 오셔서 계란을 삶으셨습니다. 삶은 계란을 저에게 가져오셔서 두 개를 먹었더니 어제 저녁 계획에 없는 금식을 하였습니다. 왜 우리가 부활절에 계란을 선물합니까? 부활을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죽음을 정복한 것을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 주님께서 죽음을 정복하시고 부활하신 날을 기념하는 부활절입니다. 우리 성도님들은 오늘 돌아가셔도 영원한 천국에서 눈을 뜰 믿음이 있습니까? 오늘 날도 우리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요 11:25-26)”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3일만에 부활하신 사건을 역사적 사실로 믿음으로 우리는 영생의 복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믿습니까? 막연히 믿습니까? 억지로 믿는 채 하는 것입니까? 실재로 믿습니까?
현대인들은 기적을 믿지 않으려고 합니다. 이성의 범주에서 이해되는 것만을 인정합니다. 과학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과학적으로 증명되는 것만 믿겠다는 것입니다. 과학에는 법칙이 있습니다. 만유인력의 법칙, 부력의 법칙, 물량불변의 법칙, 죽음의 법칙과 같은 법칙이 있습니다. 이 법칙에 어긋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기록된 기적이나 예수님의 부활이란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제자들의 신앙 고백적 작품이라는 것입니다. 만약에 성경에 일어난 일이 역사적 사실이라면 지금도 사람이 부활하여 살아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금 일어나고 있지 않으니 성경에 기록된 부활 기사는 제자들에 의하여 신화적으로 꾸며졌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합리주의자들은 그리스도는 부활한 것이 아니라 일시 기절했을 뿐이며 장사를 한 후 정신이 되돌아와서 살아났다는 것입니다(기절설). 마리아가 어두운 새벽길에 잘 못 찾아서 빈 무덤을 보고 주님이 부활한 것으로 오해했다는 것입니다(빈무덤설). 제자들이 시체를 훔쳐 옮겨 놓고는 부활했다고 거짓을 퍼트렸다는 것입니다(도난설).
부활이 없었는데 돌아가신 후 죄송한 뉘우침에 부활을 말하신 것을 굳게 믿고 심히 피곤하여 머리 속에 그리다가 마침내 환상을 보고서 이것을 실제인양 퍼트렸다는 것입니다(환상설). 바벨론 신화, 동방신화에 나오는 부활설을 예수님께 적용했다는 것입니다(신화설). 그러나 과연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했다는 것이 사기이고 환상이고 꾸며낸 이야기이고 신화일까요? 기절하였다가 다시 일어났겠습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것은 성경의 진리이면서 역사적 사실입니다. 역사 속에 일어난 단회적 사건은 과학으로 입증되는 분야가 아닙니다. 믿음의 분야입니다. 이 우주가 어떻게 생겼는지 과학적으로 입증할 수 있겠습니까? 인간이 어떻게 최초에 생겼는지 과학적으로 입증할 수 있습니까? 부활은 논리를 초월하는 것입니다. 합리를 초월하는 것입니다. 개미들이 먹이를 나르고 있는데 인간이 한 마리를 집어가버렸습니다. 개미들에게는 그것은 휴거입니다. 우리는 시간을 초월하지 못하고 3차원의 세계에 갇혀 있기 때문에 과거를 갈 수 없습니다. 만약 인간이 과거를 갈 수 있다면 분명하게 과학적으로도 입증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역사는 단회적 사건으로 일어나 지나가는 것이기 때문에 과학의 대상이 될 수가 없습니다. 지금 공룡이 살고 있지 않다고 공룡의 존재를 부인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역사 속에 존재했다가 사라진 것입니다. 이순신 장군이 거북선을 만들었다는 사실을 사람들은 역사적 사실로 믿고 있습니다. 기록을 사실로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부활 사건도 역시 역사 속에 일어난 단회적 사건이기 때문에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고 기록을 진실로 받아들이느냐 받아들이지 않느냐의 문제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수많은 증거들이 있습니다.
빌라도도 빌라도 보고서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에 대하여 상세하게 기록하였습니다. 기절한 것이 아닙니다. 여인들이 무덤을 잘 못 찾아가서 빈무덤을 보고 착각했겠습니까? 예수님의 묘지는 공동묘지가 아니라 개인 묘지이기에 찾기에 쉬웠습니다. 여인들이 무덤의 위치를 미리 확인하여 두었습니다.(눅23:55). 해 돋을 때에 무덤으로 다시 베드로가 갔습니다(막16:2). 제자들이 시체들 도둑질하여 옮겨놓고 거짓으로 부활했다는 소문을 퍼뜨렸겠습니까? 그럴만한 이유가 없습니다. 잡히시던 현장에서 도망하고 주님을 부인하던 제자들입니다. 또 막달라 마리아가 주님 부활을 전했을 때, 믿지 않으려고 확인까지 하려던 제자들입니다. 제자들 1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순교하였는데 한결 같이 거짓을 지키기 위하여 목숨을 버렸다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이 부활 사건 이후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부활을 믿고 증거하다가 화형을 당하고 십자가에 달리고 짐승에게 찢겨 죽었습니다. 거짓을 위해 그렇게 죽었겠습니까? 예수님을 배신하고 도망갔던 베드로가 거짓을 위해 순교를 당했겠습니까? 예수님을 너무 그리다가 그만 비몽사몽간에 환상을 보고 헛소리 한 것입니까? 여러 사람이 일시에 환상을 보고 실제적 사건으로 오인했다고 생각하기에는 어려움이 많이 있습니다. 부활하신 후, 40일간 무려 11번 나타나셨고 갈릴리 지정된 산 위에서는 500여 형제에게 일시에 나타나셨습니다. 확실한 증거는 부활을 목격한 예수님의 가족의 변화입니다. 예수님의 가족과 친척은 예수님을 믿지 않았고(요7:5) 미쳤다고 했습니다.(막3:21) 그러나 그들은 부활을 목격하고 그들의 삶은 변하였습니다(행1:14)
옥스포드 대학의 역사학 교수였던 토마스 애놀드는 말하기를 "나는 여러 해 동안 과거의 역사를 연구하고, 그 사실을 조사하고, 이에 대하여 기록한 문헌과 유물을 고증하여 그 사실 여부를 조사하여 오는 중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는 표징, 곧 그리스도가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셨다는 사실보다 더 분명하고 완전히 이해할 수 있는 사실을 인류사에서 나는 보지 못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역사적 사실입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살지 못하였고, 우리의 전파하는 것도 헛것, 믿음도 헛것, 금생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가장 불쌍한 사람(고전15:16-19)"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인류 그 누구도 정복하지 못하는 죽음을 정복하고 부활하셨습니다. “사셨네, 사셨네, 예수 다시 사셨네.” 오늘은 죽음을 정복한 바로 주님의 부활을 기념하는 부활주일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죽음을 정복하였기 때문에 우리도 죽음을 정복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롬8:11)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이 사실을 믿습니까?
예수님이 죽음을 정복하셨는데 우리가 어떻게 죽음을 정복할 수 있겠습니까? 과학주의 신봉자들은 과학이 영생을 줄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머지않아 영생(永生)하는 새로운 인간 즉 늙지도 죽지도 않으며, 생물학적 한계를 뛰어 넘는 인간 시대가 온다는 것입니다. 포스트휴먼(posthuman) 시대라고 말합니다. 정신을 컴퓨터에서 공급받는 포스트 에고, 몸을 생체 공장에서 재생받는 포스트 바디, 생명공학을 통해 죽음을 극복하는 포스트 데스 시대가 온다는 것입니다. 미래학자 호세 코르데이로(Cordeiro) 박사는 “인간의 영생은 불가능한 게 아니다. 과학기술의 성과를 감안하면 시간 문제일 뿐이다." 라고 말합니다. 포스트 휴먼 시대에는 어떤 장기(臟器)도 복제를 통해 대체 가능해 질 뿐 아니라 뇌세포의 뉴런(신경세포)까지 교체할 수 있게 되며, 불로장생(不老長生)이 과학적으로 가능하다는 이야기입니다. 생명공학․정보기술․나노기술 등이 인간에게 영생을 준다는 것입니다. 과연 과학이 이렇게 인간에게 영생을 줄 수 있을까요? 어제 신문을 보지 않았습니까?
30년 뒷면 지구 생물종 20~30% 멸종될 위기가 온다는 것이 아닙니까? 신학자들이 모여 만든 것이 아닙니다. 6년간 세계 130개국의 과학자 2500여명이 참여해 작성한 기후변화정부간협의체(IPCC)에서 최종안으로 확정해 발표한 것입니다. 영생이 아니라 2020년 17억명 물부족 사태를 맞이한다는 것입니다. 계시록과 같은 미래모습이 나타나고 있다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한반도의 기온은 이번 세기 말까지 지난 세기 말 30년 평균 온도에 비해 4도가 상승할 것으로 예측하고 있습니다. 이에 따라 태백․소백산맥 산지를 제외한 서해안․동해안 중부까지 아열대 기후구가 북상하고, 집중호우와 극한 고온 현상의 빈도가 증가할 것으로 전망하고 있습니다. 과학에 의해 영생을 얻게 될 수 있겠습니까? 오늘 딸의 죽음 앞에 서있는 회당장 야이로에게 예수님 말씀합니다. 36절을 보십시오.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예수님께서 누누이 강조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 3:16)”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요 3:36)”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요 5:24)”
영생을 얻는 방법은 오직 믿음 밖에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다. 주님을 믿는 믿음이 죽음을 정복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청교도 신학자 Thomas Watson이 말하듯이, "이성이 걸어갈 수 없는 곳에서도 믿음은 헤엄쳐갈 수 있습니다."
믿음이 보이지 않는 세계를 가게 만듭니다. 어떤 믿음이 죽음을 정복하게 합니까?
1. 예수님께서 나의 한계를 채워주신다는 믿음을 가지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을 보십시오(22). 회당장 야이로의 딸이 죽음의 위기에 처했습니다. 이 문제를 예수님께서 해결해 주실 것이라는 믿음을 가졌습니다. 이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께 나아갔습니다. 그런데 이 믿음을 가지는데는 넘어가야 할 산이 있었습니다.
(1) 합리주의의 산입니다.
예수님께 나오는 자들이 아무나 나옵니까? 아닙니다. 대부분 어떤 문제로 나오게 됩니다. 인생의 공허나, 질병, 가난, 삶의 고뇌 갖가지 자신의 힘으로 해결하기 힘든 문제를 풀기 위해 예수님께 나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 나오기까지는 합리주의 산을 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가버나움의 한 회당장입니다. “집회의 우두머리”입니다. 건물을 관리하며, 예배 순서의 작성 및 질서 유지, 심지어 재판과 같은 사무 등을 관할하던 장로 출신의 지도자였습니다(눅 4:13 ; 8:41 ; 행 18:8,17). 당시 대중들로부터 상당한 존경을 받는 사람입니다. 바리새인이었을 것입니다. 합리적인 사람입니다. 병원을 찾아다니고 갖가지 방법으로 딸을 살리기 위해 노력했을 것입니다. 비합리가 아닙니다. 초합리입니다. 죽음 앞에 서있는 딸의 절박한 모습 앞에 합리적 틀에 갇혀 있을 수없습니다. 물 속에 빠져 죽어 가고 있는 숙녀가 있는데 예의와 체면과 합리를 생각하며 건지지 않고 조용히 나오라고 소근거릴 수 있겠습니까? 머리채라도 잡고 나와야 합니다. 그러니 자신의 딸의 문제를 가지고 젊은 예수님께 나아가 발아래 엎드리는 것입니다. 합리적으로 생각하면 있을 수 없는 행동입니다. 당시 관습과 합리를 초월하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회당장이라는 사회적 신분을 가졌지만 예수님께 복종하겠다는 최대의 존경을 표현한 것입니다. 예수를 최고의 지위로 높이는 절대 겸손의 모습입니다. 그 당시 예수는 일반적으로 한 새로운 랍비 정도에 불과한 사람으로 평가받고 있던 터였기 때문에 유대의 종교를 대표할 만한 종교 지도층 인사가 그 앞에 무릎 꿇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입니다.
(2) 경험주의의 산입니다.
이제까지의 경험에 의존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비경험이 아닙니다. 경험을 무시하는 것이 아닙니다. 초경험입니다. 이제까지는 사람들을 통해 살리려 했지만 한번도 경험하지 못하신 예수님께 문제를 가지고 나오는 것입니다. 예수님 만나면 자신의 딸을 살릴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예수님께 나간 것입니다. 아직 한번도 경험해 보지 못했지만 소문을 듣고 믿고 나간 것입니다. 그래서 회당장이 직접 바닷가에 많은 무리가 모인 곳으로 예수를 찾아갔습니다. 이제까지 자신의 경험을 초월한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없이는 이런 행동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발 앞에 엎드려 무엇을 합니까? 많이 간구하였습니다(23). 마치 자신이 죽을 위기에 처한 자처럼 필사적으로 거듭 반복해서 예수께 간절히 매어 달렸다는 것입니다. 믿음은 경험을 무시하는 비경험이 아닙니다. 경험을 초월하는 초경험입니다.
(3)과학주의의 산입니다.
과학은 인간에게 많은 편리를 제공했습니다. 참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과학이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과학주의는 과학을 신앙으로 삼게 만들어 버립니다. 증명되는 것만 믿겠다는 과학신앙에 사로잡히게 합니다. 믿음은 비과학이 아니라 과학을 초월하는 초과학입니다.
무엇을 그렇게 요구하였습니까?(23) 딸 위에 손을 얹으사 그로 구원해 달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과학적으로 맞는 것입니까? 회당장 야이로는 예수께서 그 손을 딸의 몸위에 얹으면 곧 회복될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안수만 하면 죽지 않고 살아날 것이라는 확신을 가졌습니다. 이것이 바로 과학을 뛰어넘는 믿음입니다.
2. 회의를 딛고 예수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회당장의 말을 듣고 예수님이 그와 같이 갔습니다. 그런데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에워쌌습니다.(24) 그리고 12년 혈루증 앓는 여인이 예수님의 옷자락에 손을 대어 치료되는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예수님께서 열두해 혈루증을 앓는 여인을 고쳐 주시느냐고 지체를 하였습니다. 그 때 회당장 집에서 사람들이 왔습니다. 무엇이라고 말합니까?(35) 그렇게 예수님께 요청하는 순간 죽지 않고 살아났다는 것입니까? 그저 요구하는 순간 죽지 않고 살아났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35절을 읽어보십시오. 당신의 딸이 죽었다는 것입니다. 혈루증에서 치료받은 여인과 아직 말씀하고 계실 때입니다. 질병에서 치료받은 현장에 찬물을 끼얻는 소식이었습니다.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나버렸습니다. 질병을 치료해 달라고 기도했는데 질병이 더 심각해지는 것입니다. 사업을 일으켜 달라고 기도했는데 더욱 사업은 망해가는 것입니다. 교회가 부흥되기를 위해 기도했는데 교회는 점점 더 기울어져가는 것입니다. 이러면 어떻게 합니까? 거부당했습니다. 주님을 신뢰하고 나왔는데 결국 소원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사람이 거부당하면 세가지 반응로 나타납니다.
(1) 감정적으로 대처하는 방법입니다.
내가 이렇게까지 와서 무릎 꿇고 빌었는데 어떻게 내 딸이 이렇게 죽습니까하며 원망하는 것입니다. 광야의 이스라엘 사람들이 늘 사용하던 방법입니다. 모세를 원망하고 죽이려고까지 하는 것입니다. 어디나 그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38절을 보십시오. 훤화하며 심히 통곡하였다고 했습니다. 40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이 그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고 하니까 비웃었습니다. 이 사람들이 회당장이 예수님께 딸을 살려달라고 간 사실을 알았을까요 몰랐을까요? 다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게 뭐냐는 것입니다. 헛소리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감정적으로 처리해 버립니다. 내 기도가 응답되지 않았다고 교회를 떠나버리고, 주님을 멀리해 버리는 것입니다.
(2) 이성적으로 대처하는 방법입니다.
35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이 지체한 동안 딸은 죽었고 회당장 집에서 사람이 왔습니다. 이 사람이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죽음으로 모든 것이 다 끝났으니 예수님을 더 이상 귀찮게 하거나 마음에 부담을 주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성적으로 대처하는 방법입니다. 메너를 갖추고 합리적 판단에 따라 대처합니다.
(3) 신앙적으로 대처하는 방법입니다.
죽음 앞에 모든 것이 끝났을 때 회당장에게 예수님은 무엇을 말씀합니까? 36절 한 번 큰 소리로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예수께서는 그들이 전한 말을 아예 무시하셨습니다. 생명의 주인이신 예수님 앞에서는 절망적 소식이 아무런 가치가 없었습니다. 인간의 이성적 사고는 아무런 근거를 갖지 못하였습니다. 회의와 절망에 사로잡힌 야이로에게 희망을 선포합니다.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두려워 말라”, “믿기만 하라” 이는 곧 죽음의 소식에 마음 흔들리지 말고 지금껏 나를 향해 지니고 있었던 그 믿음, 그것을 계속하여 지니라는 말씀입니다(롬 4:20, 21). 예수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라는 말씀입니다. 죽음과 삶을 주관하시는 예수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죽음을 정복하는 믿음입니다. 사나 죽으나 주의 것입니다.
예수 믿으면서 우리가 기도한대로 잘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접어서는 안됩니다. 어떤 결과가 나타나도 예수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은 나의 신념이 아닙니다. 우리 주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는 것입니다. 나는 못해도 우리 주님은 하신다는 것을 분명하게 믿는 것입니다. 내 앞길이 어떻게 전개된다고 해도 우리 주님께서 합력하여 선을 이루신다는 사실을 믿는 것입니다. 환란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나 그 어떤 것도 우리를 우리 주님의 사람으로 끊을 수 없다는 사실을 믿는 것입니다. 어떤 극한 상황이 주어진다 해도 예수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는 것이 참 믿음입니다. 예수님이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을 대리고 회당장 집에 들어갔습니다. 이미 끝이 나버렸습니다. 사람들은 훤화하며 울며 통곡합니다. 심히 통곡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어떻게 합니까? 41절을 보십시오.
아이의 손을 잡고 달리다굼하십니다. “소녀야 일어나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인간 생명의 주인의 권위를 가지시고 “내가 네게 말하노니” “소녀야 일어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소녀는 일어나 걸었습니다. 치유의 결과는 예수님께서 명령하신 즉시 일어났습니다. 다 끝나 버린 것같은 상황에서 역전이 일어났습니다. 12살 소녀의 동작은 가볍고 발랄했습니다. 사람들은 이 광을 보고 “크게 놀라”습니다.
3. 죽음을 정복하는 믿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죽음을 정복한 예수님을 믿는 우리는 이제 죽음을 정복하는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1)자신에 대하여 죽음에 대한 우리의 시각을 바꾸어야 합니다.
사람들은 소녀가 죽은 것을 보고 죽음이 끝이다고 절망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뭐라고 말합니까? 39절 보십시오. 잔다는 것입니다. 지금 죽음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아침이 되면 눈을 떠고 일어나는 잠과 같다는 말입니다. 죽음이란 끝이 아닙니다. 새로운 세계로 가는 문입니다. 죽음 이후의 삶이 있습니다. 영원한 천국이 있습니다. 그 나라를 바라보고 사는 것입니다.
(2)죽었다고 절망하는 사람들에게 소망을 주어야 합니다.
죽음이 끝이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무엇을 합니까?
38절을 보십시오. 울며 통곡하며 훤화합니다. 절망적입니다. 훤화하는 것은 심하게 떠들며 부르짖는 다는 말입니다. 사실 슬퍼서 우는 것도 아닙니다. 돈받고 우는 것입니다. 그저 우는 체하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그것으로 끝납니까? 비웃습니다. 마른 고목 나무에 어떻게 꽃이 피겠냐는 것입니다. 파지 않은 우물에서 어떻게 물이 나오겠냐는 것입니다. 마른 하늘에 어떻게 비가 오겠냐는 것입니다. 끝이 난 집안인데 어떻게 회복되겠냐는 것입니다. 도저히 고칠 수 없는 질병에 걸렸는데 어떻게 다시 살 수 있겠냐는 것입니다.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기업인데 어떻게 기업이 다시 돌아가겠냐는 것입니다. 어렵고 힘든 교회인데 어떻게 그 교회가 부흥하겠냐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비웃는 자들을 어떻게 합니까?(40) 내어보내 버립니다. 강제로 추방시켜 버립니다. 그리고 소녀를 살렸습니다. 그러자 그들이 어떻게 변하였습니까? 42절을 보십시오. 사람들이 놀라고 놀랐습니다. 크게 놀라고 놀랐습니다. 놀란 정도가 아닙니다. 황홀경에 빠져 정신을 차리지 못할 정도로 놀랐다는 것입니다. 죽음을 정복하는 우리의 믿음을 통해 이런 역사가 일어나야 하겠습니까?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조롱받는 삶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부활을 믿지 않는 사람들의 눈치를 보며 따라가는 삶을 살아서는 안됩니다. 죽는 문화를 닮아가서는 안됩니다. 부활을 선포하는 인생이 되어 사람들을 놀라게 하여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믿음을 통하여 그런 모습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야 그렇게 힘없던 아이가 그렇게 사회적으로 출세하다니? 초등학교 시절 꼴치만 하더니 야 그애가 어떻게 박사학위를 받았어? 야 그 집안 꼴이 아니더니 어떻게 그렇게 잘되었지? 야 그 공장 망한 줄 알았든데 어떻게 그렇게 잘되었지? 야 그아이 시집도 못가고 장가도 못갈줄 알았는데 어떻게 그런 좋은 가정 이루었지? 야 그 교회 사람들 힘없는 사람들인데 어떻게 이런 교회 이루었지?” 이런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3)우리의 믿음을 통하여 죽음의 자리에서 일으키는 주인공들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회당장의 믿음을 통하여 소녀를 일으켜 세웠습니다. 지금 그 소녀는 죽을 사람이 아닙니다. 80대 노인이 아닙니다. 한참 자라야 할 아이이고 이 세상에 할 일이 많은 젊은이입니다. 12살 소녀와 죽음이라는 말은 어울리지 않는 말입니다. 일어나야 합니다. 죽음을 이기고 일어서야 합니다. 병을 이기고 일어 서야합니다. 한계상황을 극복하고 일어서야 합니다. 어떤 고난이 온다고 할지라도 결코 포기해서는 안될 인생입니다. 우리 믿음의 사람들이 그렇게 살기를 예수님은 원하십니다. 우리의 믿음을 통해서 가정도 일어서고 교회도 일어서고, 직장도 일어서고 기업도 일어 서고 사업터도 일어서고, 자녀도 일어서고, 나라도 일어서야 합니다. 지금 잠잘 때가 아닙니다. 관속에 누워 있을 때가 아닙니다. 우리는 일어서야 합니다. 오늘 우리 예수님께서 죽음을 정복한 날을 기념하는 부활절입니다.
① 로뎀나무 아래 지쳐서 쓰러져 있는 엘리야에게 천사를 시켜서 떡과 물을 주시며 "일어나 먹으라" 고 하셨습니다.(왕상19:5절) 주님의 일을 하다가 영적 기갈과 곤비함으로 힘을 잃은 사람들이 생수의 떡을 먹고 일어서야 합니다.
② 세상을 향하여 말씀을 전하다 지쳐 있는 이사야에게 하나님은 "일어나 빛을 발하라" 고 말씀하십니다.(이사야 60:1절) 절망하지 말고 가정에 빛을 발하게 하십시오. 일어나 세상에 빛을 발하게 하십시오. 세상을 보며 절망하지 말고 빛을 주십시오
③ 예수님은 베데스다 연못가의 38년된 병자에게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고 하였습니다.(요한복음 5:8) 해도 해도 안된다고 절망하지 마십시오. 일어 나야 합니다. 때가 되면 이룹니다.
④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으로 기도하러 가다가 미문 앞에 앉아 구걸하는 앉은뱅이에게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고 하였습니다.(사도행전 3:6절)
예수를 10년 20년 믿었어도, 교회를 수십년 다녔어도 잡아 끌어야 끌려오고 업어다 놔야 하는 앉은뱅이와 같은 신앙에서 일어나십시오. 구걸하는 신앙에서 주는 신앙으로 일어 서십시오.
⑤ 예수님께서 잡히시던날 밤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제자들과 같이 기도하려고 했으나 제자들은 모두 잠이 들고 홀로 피와 같은 땀을 흘리시며 기도하시고 마지막 군병들이 잡으려고 올 때 제자들을 깨우시며 "일어나라 함께 가자" 라고 하셨습니다.(마태복음 26:46절) 잠자는 신앙에서 일어나십시오
에베소 5:14절에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자 가운데서 일어나라" 고 하셨습니다.
사망의 잠에서 깨어나야 합니다. 나태와 게으름의 병에서 깨어 일어나야 합니다. 부활을 믿는 우리는 어떤 절망적인 상황에 놓여 있다고 해도 믿음으로 일어서야 합니다. 일어나야 합니다. 앉은뱅이와 같은 신앙, 중풍병자와도 같은 신앙, 소경과도 같은 신앙에서 일어나십시오.
열린교회/김필곤 목사/2007.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