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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류시인(女流詩人) 피춘자(疲春雌)-33
그는 부르고는 말하지 않았다. 그의 부르는 목소리가 이제는 좀 더 선명하게 느껴졌다. 온몸과 마음이 경기하듯 저리고 떨렸다. 춘자는 그런 놀라움을 다시 느끼며 그의 얼굴을 보았다. 알렉스는 차마 말을 하지 못했다. 하지 않은 것이 더 좋겠다고 생각했다.
“당신 참 이쁘고 아름답고 순정하고 지적이고 깜찍하고 귀엽고 매력적이고 섹시하고 이 세상에서 제일 사랑스러운 여자이다.”
“에개~ 겨우 그거예요? 또 있잖아요. 다 말해줘요. 어서요?”
예상치 못한 재촉에 이제는 알렉스가 어리둥절했다.
“어~ 다 말했는데...”
“이잉~ 얼른 말해줘요~”
“그래. 알았다. 알았어.”
그러나 얼른 떠오르지가 않았다. 난감했다. 그를 쳐다보며 기다리는 춘자의 눈길을 피할 수가 없었다.
“이 세상에서 제일 안고 싶은 여자가 당신 피춘자이다. 됐지?”
“우하하하. 맞아요. 맞아! 춘자는 당신 알렉스에게 그런 여자예요. 그런데도...”
“춘자야! 너무 큰 소리야! 슬로우 다운, 프리즈~ 오케이(Please. okay)?”
깜짝 놀란 알렉스가 손바닥을 올려 아래로 내리며 영어로 말하였다. 그의 얼굴이 빨개졌다.
“자. 이제 시집 ‘가슴속에 흐르는 강물 같은 사랑’ 이야기 좀 하고 ‘운명’에 대한 대처방안도 좀 생각하며 이야기하자~ 좋지?”
춘자는 알렉스와 헤어져 택시를 탔다. 알렉스가 택시를 타기까지 함께 했지만 집에 돌아가는 것은 혼자였다. 며칠 비워둔 집은 냉기가 느껴졌다. 아이들이 와서 청소며 쉬어 갔는지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었다. 이렇게 빈 집인데 알렉스라도 와 있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와 섹스에 대한 마음은 크게 발생하지 않았다. 하기 전 마음과 하고 난 후 마음이 가장 다른 것이 섹스이다. 춘자는 그것을 안다. 그러나 스리랑카에서도 며칠같이 생활했는데 지금도 그때같이 함께 살면 될 것이라고 생각하니 당장이라도 전화하여 그를 부르고 싶었다. 그러나 그도 생각이 깊은 사람이었고 춘자 스스로도 함부로 막 처신해선 안될 것임을 알고 있었다. 춘자는 대충 먼지를 훔치고 옷을 벗어 그대로 거실에 두고 샤워실로 가서 미지근한 물로 샤워를 했다. 그리고 가운을 걸치고 커피를 준비했다. 그때 휴대폰 벨이 울렸다. 권진혁이었다. 망설여졌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의 말을 들어보고 싶기도 하였다. 알렉스는 권진혁과 천삼분과의 통화나 만남을 자제하라고 하였지만, 춘자는 그렇게 재고 겨누고 계산하는 것을 할 줄 몰랐다. 남을 의심하는 성격도 아니었다. 그냥 주어진 상황을 그대로 받고 본능적으로 행동하는 아직은 순수성이 느껴지는 여성이었다.
"여보세요."
"피춘자 시인?"
"예 맞는데요. 권진혁 사장님."
반갑지 않은 사람이었다. 문제의 핵심 인물이었다. 그러기에 받지 않을 수 없음을 춘자는 알고 있었다. 춘자는 알렉스가 알려 준대로 녹음 버튼을 눌렀다.
"저를 좀 만나야 할 것 같아서 먼저 전화를 드렸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의 말을 들을수록 가슴이 두근거리고 떨렸다. 아마도 음성마저 떨려서 나오는 것을 권진혁도 눈치채었을 것이다.
"저는 더 이상 만날 필요가 없는데요. 왜 그런 짓을 하시고 계세요?"
"뭐라고 막말을 하십니까? 왜 그런 짓을 먼저 하셨습니까? 정말 만날 필요가 없을까요? 정지훈이 스스로 잘못을 깨닫고 한 행동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습니까?"
그는 지금까지 폴라이트하게 제대로 말하고 있었다. 그러나 목소리에는 협박성이 가득하였다. 피춘자 시인은 언제나 누구에게나 다소곳하고 순종적이고 연약하고 바보같이 순진한 것은 아니었다. 사리판단이 명확하고 옳고 그름을 사회의 보편타당한 상식선에서 판단할 수 있는 명석함과 예리함도 본능적으로 가지고 있었고 그 본능에 지성과 야성의 생활적 교육이 첨가 발전되어 내재하고 있었다. 다만 그것을 자기 스스로를 위하여 꺼내 사용할 줄 몰랐고 적기 적소를 계산하며 살아오지 않았기 때문에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던 것이다. 지금 그 일부분이 의도하지 않은 상태에서 보호 본능을 위하여 돌출하였다.
"그렇지 않는데요. 권진혁 사장님이 어떤 목적으로 어떤 의도로 저에게 이런 일을 저지르고 있는지 저는 이해하지 못해요. 그러나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우리 모두 이런 일로 삶의 일부분을 낭비하기에는 너무 늦었잖아요. 열심히 사랑하며 살아도 부족하잖아요. 그런데 왜 이러세요. 왜?"
춘자는 말을 하면서 스스로의 감정에 취하고 있었다. 권진혁은 피춘자 시인의 말을 듣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산전수전을 다 겪은 중년 사업가이잖은가. 설사 그 말에 동화되었다 하여도 곧 자기 페이스로 돌아올 수 있는 노련함을 가지고 있었다.
"이 사태는 당신이 원인이 된 것이요. 쉽게 해결할 수도 발생하지 않을 수도 있었지만 당신의 무시와 오만과 불손이 일으킨 것임을 당신은 왜 모르시오. 당신은 나 권진혁을 우습게 보았지만 지금부터 그 왜곡된 생각이 얼마나 잘못되었는지 알려 주겠소. 그리고 알렉스 리 와는 어떤 관계이요?"
"어머. 오만과 불손이라니요? 무시라니요? 저는 누구에게도 그렇게 한 적이 없어요. 제가 그럴 이유가 없어요. 뭘 오해하시고 계시는군요. 권 사장님. 다시 잘 생각해 보세요. 제가 누구에게 무엇을 어떻게 했다고 이렇게 힘들게 괴롭히는 거예요? 그리고 알렉스 리는 저를 좋아해서 도와주었고 도와주려고 하는 사람이에요."
춘자는 그를 이해할 입장도 관계도 없지만, 더구나 지금 하는 말에는 뭔가 오해나 트집 같은 것이라 생각 들었다. 알렉스에 관한 이야기는 혹 또 다른 오해를 살까 해서 알려주었다.
"그래요? 당신과 정지훈과의 깊은 관계에 대하여 생각해 보시고 또, 천삼분 사장에게 당신이 처신한 것들을 반성해 보시오. 그래서 용서를 빌고 대가를 치르겠다면 나에게 전화하시오. 내가 그 건들에 대한 물적 증거들을 충분히 가지고 있다는 것을 명심하시고..."
그는 잠시 말을 중단했다. 그러나 피춘자는 그의 그러한 제스처를 어떻게 알겠는가.
"내가 이 모든 문제를 가장 완벽하게 지울 수 있는 사람이요. 나를 만나겠다면 곧 전화하시오. 전화가 없으면 가지고 있는 증거들을 다시 배포하겠소. 5일 주겠소. 토요일과 일요일은 강원도 양양에 있을 것이고 월요일 돌아옵니다. 월요일까지 기다리겠소. 나도 그렇게 나쁜 사람은 아닙니다. 명심하시오."
그가 전화를 끊었다. 춘자는 온몸에서 진이 다 빠진 것 같고 다리에 힘이 빠져 주저앉고 싶었다. 춘자는 식탁 의자에 앉았다.
그때 다시 벨이 울렸다. 기진맥진한 상태에서 전화받기를 포기하려다 혹시 알렉스일까 해서 옆에 둔 휴대폰을 들었다. 천삼분이었다.
"피춘자 시인? 요즘 어떻게 지내?"
"안녕하세요? 그냥 그렇게 지내요."
말에 스스로 생각해도 힘이 없었다. 이러면 안 되는데 생각은 하고 있지만 나오는 목소리는 힘이 없었다.
"왜 그래? 힘이 하나도 없어 보여. 요즘 일로 힘들겠지만 그래도 힘내야지. 권 사장 혹시 전화했었어요?"
"예. 좀 전에 전화 왔었어요."
"그래요. 그 사람 그렇게 나쁜 사람 아니고 피춘자 시인을 굉장히 아끼던데... 내가 질투 날 정도야. 이렇게 힘들 때 만나 도움 좀 받아요. 피춘자 시인을 괴롭히면 내가 혼내줄 테니까. 우리 시간 내서 한번 만나. 얼굴 못 본 지 꽤 되었잖아."
같은 나이인데도 불구하고 말로 피춘자 시인을 가지고 놀았다. 그녀는 지금 피춘자 시인이 처한 입장과 상황을 알면서 말하는 것 같기도 하였고 어떤 부분은 모르고 있는 것 같기도 하여 피춘자 시인은 헷갈렸다. 그러나 그녀에게 특별한 악감정은 없는 피춘자 시인이었다.
"예. 그래요. 언제 만나서 식사나 같이해요."
"와우. 역시 멋진 피춘자 시인이란 말이여. 이 천삼분을 감동 멕이네 하하하. 좋아요. 내 시간 잡아서 다시 연락하리다. 오케바리?"
전화를 탁자 위에 올려놓고 천삼분에 대해서 생각했다. 그녀에게 미안한 점도 있었다. 공연 이후로 몇 번 만났지만 그녀 자신도 그녀의 만남을 건성으로 가졌었다. 그때 이후로 여향 다문화 지적장애인 복지관 관장을 다른 마땅한 사람에게 물려주고 그 과정의 정리며 시 낭송회며 그 틈틈이 동생 같은 정지훈을 만나 보내느라 그녀를 등한시 한 것이다. 다시 만나면 미안한 점을 사과하고 식사 대접을 잘 하리라 생각하니 한결 마음이 좋아졌다.
천삼분은 피춘자 시인과의 통화가 끝나자 곧 권진혁에게 잔화했다. 그는 기다렸다는 듯 두 번 벨이 울리자 받았다.
"권 사장님. 접니다."
"오. 천 사장. 웬일이요?"
"이번 주 언제 시간이 나요? 저녁식사나 같이 하려고요."
이건 천삼분의 착각이었다. 피춘자를 만난 이후로 권진혁에게는 다른 중년 여성들의 만남이 시들해졌다.
"글쎄요. 바쁘기는 한데..."
그의 대답이 나오기 전에 천삼분이 서둘러 말했다.
"이 천삼분이야 권 사장님 관심속에 있지 않겠지만 피춘자 시인하고 라면 거절은 하지 못할걸요."
천삼분의 예지력이 통했다.
"오. 그래요? 속 보이는 것 같지만 피춘자 시인이 같이 한다면 시간을 만들어야지요. 이번 달은 양양에 있어야 해서 안되고... 아. 내가 서울에 도착하자 바로 전화드리는 것이 좋겠습니다. 어때요?"
"으허허허. 그저 이쁜 여자라면. 좋아요. 그럼 저도 피춘자 시인과의 날짜를 잡아 다시 전화할게요. 요즘 드라마 촬영으로 바쁘다는군요. 저녁식사를 하는 것으로 하지요."
"예. 좋습니다. 천 사장이 마음에 들려 합니다. 이제는 탤런트까지... 으흐흐흐. 그런데 꼭 피춘자 시인이 나와야 합니다. 그러면 저도 더 이상 정지훈 건에 대해서는 없는 걸로 하겠습니다."
천삼분은 더 이상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이를 악물고 나오려는 말을 참았다. 그의 능글스럽고 의미심장한 웃음소리에 소름이 끼쳤다.
"그럼, 권 사장님께서는 이연 교수님과 문제 발생치 않게 잘 하시우. 곧 다시 하든가 오시면 바로 전화주시유."
이미 알고 있었지만 생각보다 더 피춘자 시인을 탐하고 있음을 다시 확인한 천삼분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피춘자가 드라마에 출연까지 함으로써 권진혁에게는 더욱 높은 가치로 메겨지고 있었다. 정지훈과의 관계를 그만이 알고 있었다. 입을 막아야 할 사람이었다.
한편 글로벌 문예출판사 대표인 조미애 사장은 시집의 판매 추이를 짐작하여 시집을 더 찍기로 결심하고 그 동의를 위하여 피춘자 시인에게 몇 번 전화했으나 연결되지 않았다. 이메일을 보냈어도 회신이 없었다. 마침내 그녀는 나준석에게만 알리고 2판 인쇄 준비를 하였다. 피춘자 시인의 시집 초판 3천 권중 2천 권은 이미 판매 완료되었다. 독자들의 호응도 와 드라마의 영향이 지대할 것으로 예상하여 주문받은 분과 합쳐 1만 5천 권을 다시 찍기로 하였다. 나준석은 조수연에게 씨나리오의 초반부를 국내 장면으로 만들어 줄 것을 요청하며 캐나다의 배경 등도 모두 국내로 수정해 달라고 했다. 촬영은 이제 수월해졌다. 피춘자 시인이 연기해야 할 부분을 제외하고는 거의 완료되었다. 알렉스의 이름도 도현수로 이름을 바꿨다. 촬영은 일사불란하게 잘 되어가고 있었다. 새봄과 함께 피춘자 시인의 주변도 활기롭고 피춘자 시인도 하는 일들에 열심을 다 했다.
피춘자는 태어나서 처음 해 보는 드라마 연기라서 너무 조심스러웠다. 연기 수업을 받은 적도 없었지만 그녀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역할이라며 주변에서 격려하고 힘이 되어주어서 늘 흥분된 마음으로 부닥치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자식들과 사위가 힘이 되어 주었고 뒷받침이 되어 주었다. '운명'은 3부작으로 목. 금요일과 토요일에 끝나는 것으로 되어 있었고 세 사람 모두 알렉스에 대하여는 잊고 있을 정도였다.
"수연아. 이 건은, 피춘자 시인에게 알려야 할 것 같은데 어쩌냐?"
나준석이 프린트 아웃한 뉴스 페이퍼를 탁자 위에 올려놓고 근심스러운 얼굴로 수연을 보았다.
첫댓글 여류시인 피춘자 좋은소설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함께 해주신 서길순 님, 감사합니다.
늘 건강하시고 즐거운 날들 되십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