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하가 어때서 61회
여행은 즐거웠어요. 여행을 다녀 오고 난 뒤 철수는 내게서 조금 어른스러워 졌
어요. 뭐랄까? 나를 예전보다 믿기 시작했다는 거죠. 정희와 있을 때, 배선배와
있을 때, 그리고 승헌이가 다시 휴가를 받아 나왔을 때 철수의 모습과 행동은 여
유가 있어 보였습니다.
"여기서 폭포 있는 곳 까지 갔다가 거기서 조금 놀다 해지기 전에 내려 오자.
그리고 예약 해 놓은 콘도로 가는거야 좋지?"
"그럽시다."
그러긴 뭘 그래 치. 철수는 산을 잘 못타더군요.
"누나 뭐해요. 빨리 못 걸어요?"
"가방이 무거워."
"그게 가방이냐 핸드백이지."
"그래도 무거워."
"이리 줘요."
철수는 진짜 산을 못탔어요.
"또 쉬는거야?"
"철수야, 그냥 여기서 놀자."
"폭포까지는 가 봐야지."
"여기 계곡도 좋다."
"사람이 너무 많잖아. 좀 더 위로 가면 사람이 적을거야."
"그럼 나 좀 업고 가라."
"나 체력 비축된 거 별로 없어요."
"여긴 학교 아니잖아. 저기도 누가 여잘 업고 간다. 저 업힌 여잔 참 좋겠
다."
"이렇게 부려 먹다 버릇되면 다른 남자 못 만난다?"
"쓰, 또 그런 말 한다. 기간 정해 놓지 말랬지?"
철수는 날 십여미터 업고선 올라 갔어요.
"안되겠다. 그냥 여기서 놀자."
산을 잘 탔으면 날 업고 계속 갔어야죠. 겨우 십여미터 가더니 숨을 헐떡이면
서 날 욕하더군요.
"에이쒸, 누나 몇 키로 나가? 더럽게 무겁네."
"뭐야?"
"여기 계곡도 괜찮네. 여기서 조금 놀다가 갑시다."
그렇게 오래 놀지는 못했어요. 다른 짓 했거든요. 맑은 계곡 물의 유혹은 참기
힘들더군요. 수영복 가져가지도 못했고 옷 갈아 입을 만한 곳도 없었어요. 커다
란 바위에 앉아 발을 물에 담궈 놓고 있었지요.. 철수도 등산화를 벗더니 맨 발
을 물에 담궜구요. 찹고 맑은 물은 더욱 더 날 유혹하더군요.
"여기서 헤엄치고 놀까?"
"누나 수영복 가져 왔어요?"
"아니. 나중에 옷 갈아 입을 생각하고 그냥 물에 들어가 볼래?"
"맘대로 해요."
"넌?"
"난 안들어 갈거야.
계곡 물 간지럽힌 발은 시린 듯 시원코
녹음 진 이 산의 그림자와 하늘구름 스치는 땃땃한 바위 우에 앉아
덥지도 차겁지도 않은 여기 여름은 참으로 좋구나."
"시 쓰니?"
"시조 지은거다 바보야. 예전 양반들은 이렇게 더위를 피했을거 아냐. 난 양반
이라 함부로 물에 들어 가지 않을 거라는 얘기지요."
"너 지금 나보고 바보라 했지?"
"풍덩!"
물 튀기는 소리 참 좋다.
"우쒸! 들어가려면 혼자 들어가지."
철수를 떠 밀어 넣고 나도 입고 있는 옷차림 그대로 물에 들어 가 보았지요. 살
떨림. 짜릿했어요.
"들어 갈때는 좋았지?"
"춥다. 어디 옷 갈아 입을 때 좀 찾아 봐."
"허! 사방에 사람들이다. 어디서 갈아 입을래? 누나 옷 금방 마르겠네."
"그래서?"
"여기 누워 옷 말리면서 낮잠이나 잡시다."
주위 사람들이 뭐라 그랬을까요? 다큰 년,놈 이건 철수나 쓰는 말인데, 둘이 와
서 옷 입은 채로 물에 들어 가 놀다 바위 우에 나란히, 전 등을 돌려 다소곳이
누웠지만 철수는 큰 대자로 눕더군요. 하여간 잠시 잠이 들었어요. 조금 더 시간
이 지나면 아주 좋은 추억이 되겠더라구요. 지금은 조금 부끄럽기도 하지만요.
결국 목적한 폭포 있는 데까진 반도 못 올라 가보고 내려 왔어요.
"발 안 아파요?"
"아퍼."
"샌달이 좀 불안해 보인다."
"나 발톱 나간 거 같애."
"업어 줘요?"
"싫어."
"왜?"
"더 이상 쪽팔리기 싫어."
"치. 근데 콘도가 어디야?"
"아까 버스 내리는 곳에서 봤잖아."
"그거에요?"
"응."
피곤했던지 콘도에 들어가자 마자 옷 갈아 입고 잤어요. 이 번엔 방이 두개라
손 잡고 잘 수는 없었지요. 철수는 온돌 방에서 자고 난 침대 방에서 잤어요.
"한 잔 만 해요?"
"그러지 뭐."
자다가 일어 나 술 한 잔 마셨어요. 아마 새벽 한 시쯤에 일어 났죠. 밤 새도
록 재미없는 훌라만 쳤던거 같애요. 둘이서 말이죠.
"이제 그만 하자."
"그래. 누나가 몇 번 받을 거 있지?"
"나 12번."
"나는 14번이니까. 누나가 내게 두 번만 해 주면 되겠네."
"무슨 남자가 그래?"
"왜?"
"아니다. 눈 감어."
"다른 감정 안 들게 조심스럽게 해."
"다른 감정이라니?"
"덮치지 않게 하란 말이지."
"덮쳐 봐. 서울 가서 당장 아버님게 이르고 식 올리자."
"말 자알 한다. 빨리 해."
뭐 했을까요?
"안 들린다."
"서방님."
"꼭 눈감고 들어 야 되나?"
"그래야 느낌이 들지. 서방니임."
"오냐."
"서방님."
"어? 두번 인데..."
"너도 한 번 해."
"꼭 해야 돼?"
"응."
"아씨 마님."
"기분이다 뽀뽀한 번 해 주께."
"덮칠 수도 있는데?"
"그러고 싶니?"
참 유치하게 놀았지만 재밌었어요.
둘이 있을 땐 참 좋았는데... 다음날 늦게 일어 났지만 고생 고생 하며 노고
단 구경도 하고 계획대로 남원 가 기차 타고 서울로 왔어요.
이제 당분간은 철수가 삐치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잠시 잊었던 사람이 돌
아 왔습니다.
연하가 어때서 62회
창 속에서 사라지는 밤 빛 작은 조명들, 기차 소리는 적막을 깨고 달렸고 난 어
딘지 알 수 없는 어둔 바깥의 풍경을 상상하며 철수의 어깨를 기대고 서울로 돌
아 왔습니다. 그 기억 당분간은 잊혀지기 힘들 것 같네요. 해 트는 서울역 부근
식당에서 마주보며 먹은 설렁탕의 맛도 잊을 수가 없을 것 같아요. 졸린 눈을 하
고 나를 보던 철수의 미소가 습기 찬 아침을 담백하게 해 주었고 그 모습은 여전
히 내 곁에 머물고 있습니다.
지금은 내 곁에 없지만 철수는 승헌이 때문에 이 번주도 삼 일을 율전에서 보내
고 갔어요. 내가 자기를 마음에 품고 있다는 걸 어느 정도 깨달은 모양입니다.
"누나가 생각해도 얘보단 누나가 낫지?"
"응. 당연히."
철수가 승헌이 애인 사진을 들고 와 묻더군요. 승헌이는 불만 스런 표정이었어
요.
"야, 본인에게 그렇게 물어 보면 열에 아홉은 다 자기가 낫다고 그러지."
"나의 은정씨는 열에 아홉이 아니야. 하나야. 오니 원."
"후후, 고맙다 철수야."
"그래도 누나 공주병 증세는 고쳐야 돼. 하여튼 승헌이 니 연인보다 내 연인이
훨씬 더 예쁘다는 건 알아 둬라. 그렇죠 누나?"
"그럼."
철수가 서울로 돌아 간 지 이틀이 지났습니다. 내일 오전엔 다시 철수를 만나겠
군요. 금요일 밤 내 방침대에 누워 풋풋한 웃음을 맺어 봅니다.
잠 들 준비를 마치고 눈을 감았는데 헨드폰이 울렸습니다. 철순가?
"여보세요?"
"안녕. 나 누구게?"
"엉? 승주씨?"
"그래 나 승주. 지금 공항이야. 수속 다 밟고 비행기 탈 준비 하고 있어."
"귀국하는거야?"
"응. 내일 오후 두시 이후에는 한국 땅을 밟고 있을거야."
"그래? 야, 잘됐다."
"하하, 반겨 주는구나. 너 어디니 지금?"
"여기 율전."
"서울 안갔니?"
"내일 아침에 가야지."
"부탁하나 하자."
"뭐?"
"내일 나 좀 마중 나와 주라."
"응?"
"6개월 어학 연수 갔다 오는건데 부모님 나오시라 하기가 그렇잖아. 그렇다고
외국 나갔다 귀국하는 건데 아무도 마중나와 있지 않으면 서운할테고..."
"나 보고 싶었다고 얘기해 그냥."
"그래, 많이 보고 싶었다."
"외국물을 먹긴 먹었나 봐. 영어 실력은 늘었니?"
"뭐 가벼운 대화는..."
"내일 두 시쯤 도착하니?"
"응."
승주는 반가운 사람이지요. 내가 좋아했던 사람이니까요. 오랜만에 그를 본다
는 생각이 철수를 잠시 치워버리더군요.
토요일 아침 일찍 집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외모에 신경을 좀 썼어요. 엄마 차
를 빌렸습니다. 병원까지 가서 말이죠. 철수에게 연락 한다는 걸 생각지 못했어
요. 약속 시간 거의 다 되어 오늘 바쁘다는 연락을 했습니다.
"나갈 준비 다했는데..."
"미안해. 오늘 갑자기 급한 일이 생겼어. 다음에 만나자."
"할 수 없지 뭐. 근데 무슨 급한 일이야?"
"안 가르쳐 줄래."
철수에게 승주 만난 다는 얘기를 할 수가 없죠. 아니다, 해서는 안되죠. 녀석
이 승주 때문에 자기 만날 약속 취소한 걸 안다면 분명 삐칠 겁니다. 미안해. 승
주가 반 년만에 귀국하는데 모른 척 할 수가 없잖니.
승주는 환한 웃음을 띠고 귀국 했습니다. 예전과 좀 달라 보였습니다. 멋있어
졌다고나 할까요? 낯선 땅에서 혼자 육개월을 보냈으니 성격 하나 쯤은 달라졌
을 수 있습니다. 여유가 있어 보였습니다.
"흠, 여전히 예쁘네."
"응? 넌 조금 샤프해 진 것 같다?"
"거긴 모두가 운동 하나 씩은 취미생활로 하고 있더라. 나도 어쩔 수 없
이..."
"좋아 보인다."
"예전 나보고 살 좀 쪄야겠다고 했잖아. 운동한 덕에 체중이 좀 늘었어."
"얼굴은 오히려 더 갸름해 졌어."
"이 팔 안 보이니?"
후후, 얘도 귀여운 구석이 있었군요. 팔 근육을 자랑삼아 보여 줍니다.
"집까지 태워줄게."
"차 가지고 왔니?"
"응."
"흠, 집에 바로 들어가기 싫은데..."
"너네 동네서 차 한잔 하지 뭐."
승주는 육개월 만에 날 보았는데 예전보다 오히려 더 자연스럽습니다. 군대 갔
다 와서도 날 대하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는데 오늘 그의 모습은 호감을 많이 주
는군요.
잠시간 나눈다는 차 한잔의 시간이 두 시간을 쉽게 넘겨 버리더군요. 이런 저
런 이야기들을 나누다가 그의 입에서 철수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철수와 진짜 연인사이 하기로 한거야?"
"흐음. 응."
"하하. 둘이 잘 어울려 보이긴 해도 니가 연하에게 감정을 가질 줄은..."
"미안 해."
"나에게 미안해 할 거 없어."
"그렇지만... 예전 학교에서 내게 꽃 다발을 안겼을 때, 나와 친구할 생각으로
찾아 왔던 건 아닐 거 아냐. 친구였으면 헤어지지도 않았을테지만."
"흠, 그래도 그때 일 때문에 이렇게 네가 날 마중나와 주었잖아. 그럼 됐지
뭐."
"어른스러워 졌다?"
"그렇게 보이니?"
"응."
"참, 대학원 생활은 할 만 해?"
"그런대로. 너 가을에 복학 할거지?"
"응. 하하, 내 대학 생활의 마지막 학기네. 하하."
"철수랑 같이 졸업하겠다."
"이런 말 해서 미안한데 그 애와 진짜 사귀는 거니? 그냥 예전 친하게 보였던
남자들 처럼 그런거니?"
"나 그런 말 듣기 거북해. 남들에겐 어떻게 보였는지 몰라도 당시 내가 마음에
두었던 남자는 너 하나였고 지금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철수 걔 하나야."
"흠. 진짜 사귀나 보구나."
"그럼 가짜로 사귀니?"
"흠, 기대하긴 힘들겠군."
"뭘?"
"아니야."
"기대하지마. 걔하고 결혼 할 마음까지 생겼으니까."
편하더군요. 승주에게 선을 그어버리니까 그가 친구로서 마냥 편하더군요. 예
전 내가 그에게 괜한 부담을 주었구나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들어 가 봐."
"그래, 마중나와 줘 고맙다."
"당분간 바쁘겠다?"
"응."
"편할 때 연락 해."
"그럴게. 철수에게도 안부 전해 줘라."
"하하, 그건 잘 모르겠다."
"응?"
"잘 들어 가."
승주와 헤어졌을 때 해는 하늘 가를 빨갛게 물들이고 있더군요. 철수 얘를 만나
서 저녁이나 먹을까?
"저기 저 은정인데요..."
"누구? 나이 많은 처자?"
"네."
"우리 철수 자는데?"
"저녁은요?"
"나 말인가 철수 말인가?"
철수 아버님은 꼭 제가 전화하면 장난을 치시는 것 같아요. 내 꼴이 좀 우습지
만 싫지는 않습니다. 철수 아버님은 무뚝뚝하시고 근엄하신 것 같지만 또
한 재미도 있으세요. 어렵게 느껴지던 느낌들은 가신지 오래 되었지요. 이러다
가 아버님과도 정드는 건 아닌지 모르겠네요.
"아버님은 드셨어요?"
"아버님? 내가 왜 자네 아버님인가?"
"네?"
"그 듣기 싫은 말은 아니구만. 철수 깨워 줘?"
"아니에요. 그냥 저에게서 전화 왔었다고만 전해 주세요."
"예쁘게 생겼나?"
"네?"
"자네 예쁘게 생겼냐고?"
"에... 솔직히 말씀드려도 될까요?"
"응, 그래."
"매일 듣는 편이에요."
"예쁘다는 소리 말인가?"
"푸 네. 죄송합니다."
웃음이 나오는 걸 참지 못했어요. 우리 아빠보다 나이가 많으신 걸로 아는데 최
근들어 많이 친한 척 하시네요.
"말해놓고 웃는 걸 보니 그렇게 예쁘진 않나 보네."
"예쁜데요."
"자네 아버님 연세가 어떻게 되시나?"
"오십 둘입니다."
우리 아빠 나이는 왜 물어보지?
다음 날 철수가 우리 집에 찾아 왔었어요. 하품 하며...
"아침부터 왠 일이야?"
"이거 우리 아버지가 갖다 주래요."
"뭐야?"
"보약인가 보죠. 우리 아버지가 누나 좋게 봤나 봐. 누나 아버님 드리래."
"어? 허허."
"나 갑니다."
"야, 오늘 뭐 할거야?"
"개강이 한 주 밖에 안 남았잖아요. 오늘은 쉬어야지."
"어제도 쉬었잖아."
"내일 부턴 학교 내려 가 있을거야. 내일 봐요."
"또 삐쳤니?"
"뭘?"
"어제 내가 약속 취소했다고 삐친거야?"
"내가 무슨 어린애냐?"
"어린 애잖아."
"씨이..."
"오늘 야외로 드라이버나 갈래?"
"안 가. 승주형 오지 않았어요?"
"응?"
"돌아 올 때쯤 되었는데..."
물끄러미 철수를 쳐다 보았습니다.
"왔지?"
"몰라. 아버님께 이거 감사하다고 전해 드려."
"그러지 뭐. 왔지?"
"왜 그래 너?"
"그냥 물어 보는거야. 괜히 신경쓰고 있어. 나 갑니다."
"잘가. 나중에 연락 해."
연하가 어때서 63회
"요즘 공부는 열심히 하고 있냐?"
솔직히 네,라고 대답하고 힘들다. 그래도 마냥 논 것은 아니다.
"그런대로 하고 있습니다."
"이제 대학 생활 마지막 학기다. 앞으로 뭘 할지는 생각하고 있느냐?"
"네. 대학원 진학해서 석사학위를 받고 연구원으로 취직할 생각입니다."
"너무 일찍 직장 생활 시키기는 싫지만. 하긴 군대를 안갔으니까 사회 경험이
남들 보다 늦은 편이구나."
"네."
"그 은정이라는 애는 너보다 두살 많다고 했지?"
우리 아버지시지만 기억력 진짜 나쁘시네. 수십 번은 물어 보신 것 같다.
"네."
"걔가 니 애인이냐?"
"에?"
울 아버지 기억력은 별로신데 눈치는 빠르십니다 그려.
"애인도 아닌데 그렇게 자주 연락하고 만나고 하진 않을 거 아니냐. 이 번에 반
쯤 마시고 넣어 논 양주도 걔랑 마셨지?"
"보셨습니까?"
"이 번엔 개 중에 그래도 좀 싼거더라?"
"헤헤."
"걔 나이가 내년엔 몇 살이냐?"
"제 나이 모르십니까?"
"26살이라... 언제 한 번 집에 데려 와라."
"왜요?"
"쓰으, 녀석이 아버지가 말하는데 왜요라니?"
"진짜 데리고 와요?"
"그래. 예쁘냐?"
"네, 헤헤."
"너 요즘 사귀는 여자 있지?"
아버지 시선을 피하며 천정 보고 히죽거렸다.
"눈치 채셨습니까?"
"하필이면 연상이냐?"
"아버지 닮아서 그런가 봅니다."
"인석아, 난 니 엄마하고 동갑이다."
"아버지가 생일이 늦잖아요."
"하여간 잘 생각해서 사귀어라."
"제 나이 이제 23살인데요. 이런 말씀 듣기에는 아직 이른 것 같습니다."
"넌 이를지 몰라도 걔는 아니잖아."
아버지도 누나와 비슷한 말씀을 하신다. 옛 분들은 여자 나이 25살 넘어가면 시
집가야 된다고 생각하시나 보다.
짐 싸고 학교 내려 가기 전날 저녁 아버지와 잠시 대화의 시간을 가졌다.
아버지도 싫어하시는 것 같지 않고 누나에게 가지는 감정도 여유가 있어 기분
이 좋다.
개강 준비로 조금 바빴다. 취직 문제로 신경 쓸 일이 없었지만 정보 공학과는
울 학교가 제일 낫다고 우겨 다른 학교 대학원 갈 생각도 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신경 쓰야 할 일이 많았다. 자격증 하나 따 볼 생각이다. 우리 과 특성상 자격증
이 큰 비중을 차지 하는 것은 아니지만 없는 것보단 낫다. 자격증 따면 누나에
게 자랑할 수도 있다.
수강 신청 마치고 계속 도서관을 나갔다. 누나는 개강 하려니 오히려 편한가 보
다. 수,목, 금요일 서울서 등교를 했다.
화요일 오후는 몰랐는데 수요일 오후는 기분이 좀 나빴다.
목요일 점심 때 누나를 찾아 갔다. 연구실로 찾아 가 과감히 노크를 하고선 누
나를 불러 냈다. 연구실 문 안으로 고개를 들이 밀어 배군에게 험한 눈 길로 째
려 보고선 누나를 불러 냈다.
"요즘 무슨 일 있어요?"
"아,아니. 왜?"
"배군이 또 찝적거려요?"
"아니. 어제는 내가 태워 달랬어."
"그 사람은 믿음이 가지 않아요. 누나? 조심성 같은 건 없냐?"
"내가 왜 그 사람에게 조심을 해? 그 사람 우리과 선배야."
또 속 좁다 할까봐 더 이상 말은 하지 않았지만 기분 나쁜 놈 차 얻어 타며 그
것도 조수석에 앉아 호호 거리던 누나가 좀 못마땅했다. 기분 살 나빠지네. 근
데 내 내려 오고 난 다음 왜 서울서 등,하교를 하는거야.
주말에 집에 가지 않았다. 벌써 군 복무를 마치고 학교로 찾아 오는 놈들도 있
었고 방학 동안 보지 못했던 친구들도 대거 학교로 몰려 왔었다. 술도 한 잔 해
야했고 녹 슬지 않게 당구 실력도 다듬어야 했다.
"야 새꺄 음주 당구 치지마."
"끄덕 없어. 너도 마셨잖아."
물론 나도 마셨지만 난 적당히, 넌 왕창이잖아. 동엽이 새끼 저거 분명 대마초
피는 것 같다.
"야이, 아무리 음주 당구라고 빨간 공을 치냐?"
"그랬냐?"
"너 새꺄?"
"뭐?"
"히로했는데 왜 안 박냐?"
여러 친구들과 어울리니까 좋았다. 수업도 별로 없는 이학기, 누나 없었으면
이 놈들과 마냥 망가질 것도 같았다.
학기가 시작 되었다. 가슴이 뛴다. 4학년 2학기. 취직을 생각하는 선배들과는
마지막 학교 생활이 시작되었다.
월요일 아침 기분이 별로 좋지 못했다. 토요일 일요일 신나게 친구들과 어울렸
지만 월요일 오전 홀로 등교하다 기분이 나빠졌다. 이틀 동안 누나에게서 삐삐
가 한 번도 오지 않았다. 오늘도 연락이 없다.
"누나."
"어서 와."
"약 장사 잘되요?"
"개강 하려니까 그런대로... 오늘은 왠 일로?"
"누나 요즘 얼굴이 펴이네요?"
"흠."
"짜장면 하나 만 시켜 줘요."
"여기서 먹게?"
"네."
"안돼."
"왜요?"
"낮에 누구 올거야."
"누구?"
"흠."
배시시 웃는게 남자 생겼나 보다.
"선 봤던 남자와 사귀는 거야?"
"으응."
누나가 고개를 끄덕 거렸다.
"잘하면 식 올리겠네."
"내년 쯤에는 아마."
"진짜?"
"내가 식 올리게 되면 부케는 은정이더러 받으라 할게."
"참, 은정이 누나와는 자주 연락해요?"
"간혹, 가까운 곳에 있지만 코 앞이 천리길인가 보다. 자주 안 만나지네."
"친구끼리 좀 잘 지내요."
"그렇게 해야지."
"참, 승주씨 왔나 보던데?"
"에?"
"하하, 말하지 말랬는데..."
"은정이 누나가 그랬어요?"
"응, 니가 자주 삐치니까 승주 얘기는 가급적 하지 말랬는데. 내가 요즘 좀 정
신이 없다."
승주가 왔다. 내가 그렇게 자주 삐쳤나? 씨이, 저번 주는 그럼 승주 만나기 위
해 서울 갔었던 건가? 왜 숨기지? 그것도 내가 이해 못할까봐.
"누나 오늘도 서울 가는거야?"
"응, 집에 일이 생겼어."
"무슨 일인데?"
"너에겐 말하기가 좀 그렇다."
"남자 만나러 가냐?"
"그런 쪽으로 밖엔 생각 못하니?"
이해 할수 없다. 승주는 애매할 때 외국을 나갔었다. 그가 다시 접근해 온다면
누나는 분명 흔들릴 것이다. 누나가 그를 사랑하고 있을 때 난 그냥 타인이었
다. 그가 없을 때 누나와 연인이 되었다. 내가 승주를 질투하는 것이 이상한가?
내 속이 점점 좁아지고 있다.
개강을 한 주 앞두고 이제 다시 철수와 자주 만날 것이라 생각해 기분이 좋았어
요. 철수 아버님이 주신 보약은 아빠께 전해 드렸고 껄껄 웃으시는 아빠를 보고
철수가 더 좋게 생각 되었지요.
승주는 귀국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일들이 많았나 보네요. 귀국 한 뒤로 딱 한
번 연락을 하고선 소식이 없었습니다. 내 마음이 이미 그를 떠났다지만 그래도
한 때 좋아한 사람인데 내게 너무 무심한 것 같아 좋은 기분은 아니었어요.
한약 분쟁이 또 터졌어요. 학기 시작하려니 매년 꼭 불거져 나오는군요. 에고,
철수 집안은 부녀께서 한의사고 우리 집안은 부녀가 약사네요. 철수가 아무 말
하지 않으니 저 또한 뭐라 말 할수가 없습니다.
아빠가 좀 바빴어요. 그 문제로 아빠가 약국 비울 일이 자주 생겼지요. 우리 아
빠가 약사 협회 감투 하나를 썼거든요. 저, 엄연한 약사입니다. 약사 자격증 있
는 몸입니다. 아빠 약국엔 약사가 여럿 고용되어 있지만 좀 못 미더우셨나 봅니
다. 저보고 바쁘지 않으면 약국 일 좀 도우라 하시더군요.
목,금 아빠 약국에서 약 팔았습니다. 오후부터요. 초보라고 많이 무시하대요.
처방전 던져 주면 약 찾아 주는 것만 했던 거 같아요. 주말, 휴일도 약국에서 힘
들게 일했습니다. 무보수로... 다음 주도 며칠은 아빠 약국을 나와야 될 것 같아
요.
"넌 별 문제 없니?"
"이런 변두리 작은 약국이야 뭐."
"철수 만나 봤니?"
"응."
"걔네 아버님은 별 말씀 없어시대?"
"몰라."
"이게 또 삐치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푸후후, 너 애를 하나 데리고 사는거 같애."
"그러게 말이야. 내일 한 번 찾아 갈게."
"서울이니?"
"응."
"나 잘하면 내년에 식 올릴 수도 있겠다."
"응?"
"나 만난다는 사람 있다고 했잖아. 저번 주말에 그 사람 집에 갔었어."
"치, 맘에 든대?"
"호호, 좋게 본 것 같던데?"
"니가 좋아야지."
"그런데로 괜찮아."
"내일 가서 얘기하자. 잘 자."
약대 생들 또 들고 일어 났다. 심심하면 들고 일어 난다. 학교 등교 길에 약대
생들 줄지어 뭐라 외치는 걸 들었다. 그리고 또 서명을 받는 일을 하고 있다. 후
후, 예전 누나에게 처음 밥 얻어 먹을 때가 생각난다. 저들 속에 누나도 끼어 있
었는데... 그때부터 누나와 친해지기 시작했다. 저들이 지금 어떤 심정인지 몰라
도 내겐 그 모습 속에 좋은 추억 하나가 있다. 배시시 웃었다. 약사, 한의사가
서로 싸우던 말던 나랑 별 상관 있겠냐. 엉? 상관 있잖아.
집에 전화를 해 보았더니 아버지는 별 문제가 없어시다는데 수희가 문제가 있단
다. 수희 잘못 하면 내년에 선배들과 같은 학년이 될 지도 모른다고 한다. 일학
년이야 별 문제가 없다지만 선배들 유급 당하면 어쩔 수 없이 같은 학년에 선
배, 후배로 나뉠 것이다. 피해가 있을 것 같다. 우리처럼 군대 때문에 동학년에
선,후배 나뉘는 것이 아니라 한 학년 정원이 늘어 나는 결과가 온다. 가벼운 문
제가 아니다 이건. 수희는 머리에 이상한 것을 두르고 티비 앞에서 연신 부르르
떨고 있댄다.
"어머니, 걔가 이상한 짓은 안해요?"
"모르겠다. 직접 와서 봐."
"아버지는요?"
"아버지야 단골들이 워낙 많고 예전부터 그 문제에 대해선 관조적이셨잖니."
"저 공대가기 잘했죠?"
"공부 못한게 자랑이냐?"
내가 한의대 갈 정도는 못됐지만 공부 못한 건 아닌데...
누나가 요즘 내게 소홀하다. 집 안일이 겹쳐 누나에게 상한 감정들이 쌓여간
다. 차라리 한 번 삐치고 나면 풀어지는 데 그러지 못하니까 더 기분이 나쁘다.
속이 좁아 지는 내 자신까지 싫기 시작한다.
"뭐 바쁜 일 있어요?"
"조금."
"승주형 언제 왔어요?"
"응?"
"승주형 왔다며?"
"나 승주 한번 밖에 안 만났다?"
"왜 묻지도 않은 말에 답하고 그래요?"
"내가 그랬니? 니가 승주 때문에 삐친 일이 한 두번이니?"
"자꾸 삐친다 그러지 마요."
"화난 거 같다?"
"내가 아직도 어려 보여요?"
"응."
"이...씨."
저 여자 태도는 날 헛갈리게 하고 있다. 내가 그녀의 연인인 것처럼 생각들게
할 때보다 날 여전히 동생으로만 생각하는 것 같아 보일때가 훨씬 더 많다. 그럴
거면 차라리 사귀자는 말을 하지나 말지. 그랬으면 내가 자주 삐치지 않았을텐
데... 내가 근데 자주 삐치나?
구월달도 둘째 주로 접어 들었다.
화요일이었다. 나는 분명 보았다.
연하가 어때서 64회
저녁 무렵이었다. 누나는 꽃을 안고 있었고 옆에는 남자가 있었다. 나는 누
나를 만나러 약대로 가다 그 모습을 보고는 숨어 버렸다. 왜 숨었을까? 예전과
는 다른데... 지금은 내가 누나의 연인인데 나는 그냥 숨어 버렸다. 예전처럼 어
설프게 자판기 뒤에 숨은 것이 아니라 밥맛 없는 배군의 차 뒤에 꼭꼭 숨었다.
누나는 뭐가 좋을까? 밝은 모습이다. 나쁘게 말하면 히죽거리며 웃고 있었다.
아무래도 누나는 승주를 잊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승주도 역시. 그 둘은 여전
히 잘 어울리는 모습이다. 내가 누나 곁에 있는 모습 보다 더.
승주가 찾아 왔었다. 화요일 저녁 무렵에, 아니 그 전일거다. 내가 그 둘을 본
게 저녁 무렵이었을 뿐이다. 승주가 연구실은 어떻게 알았을까? 승주가 온 뒤로
그 둘은 자주 만났나 보다. 그렇다면 진짜 내가 생각한대로 누나가 서울서 등,하
교를 했던 이유가 승주 때문에? 심한 배신감을 느꼈다.
"나 기분 나쁠 만 하지?"
"너 의처증 있냐?"
"그게 뭐냐?"
"니가 거기서 왜 숨냐? 병신이냐?"
"나 지금 심각하게 물어 보는 거다."
"이 새끼 진짜 결혼하면 의처증 생길 놈이네. 친구면 만날 수 있지."
"시립대 다니는 새끼가 여기까지 왜 내려 오냐. 그리고 누나가 유일하게 마음
을 주었던 남자가 그 새끼야. 내가 잘 삐치긴 해도 의처증 가질 놈은 아니다. 그
냥 불안해서 그래."
"하여튼 잡생각 많은 놈은 다르다니까. 승헌이도 그러더니..."
"승헌이는 왜?"
"그 새끼도 군대가기 전에 얼마나 말 많았는줄 아냐? 내가 너무 걔를 구속하는
게 아닐까? 우리가 무슨 사이라고 2년 넘게 못 볼텐데 그녀에게 기다리라 강요
할 수 있나? 자연스럽게 친구로 생각하면 편하지 않을까? 하여간 공대 새끼
들..."
"넌 공대생 아니냐?"
"나는 사귀는 여자가 없잖아. 난 사귀는 여자가 생기면 그냥 맘 편한히 내 마
음 이끌리는대로 하겠다."
"그렇게 쉬운게 아니다. 내가 왜 이런 놈에게 조언을 받으러 왔을까?"
"상대도 네 맘같다고 좀 생각을 해라."
"나는 아무래도 그냥 동생인가봐. 누나가 날 대하는 태도가 그래."
"니가 누나라고 그러고 너 하는 짓을 보면 그렇게 하도록 만들어. 강하게 밀어
부쳐 임마."
"처음에 그랬어. 강하게 밀어 부치면 뭘 강하게 밀어 부쳐."
"편히 생각해 임마. 같이 학교 다닌다고 너 보면 그 여자를 진짜 선배, 누나처
럼 대해."
"그랬냐? 나도 그렇게 생각 될 때가 있지만 잘 안되네."
"하긴 너에겐 버거운 상대다."
"그렇지? 그냥 맘 좋고 무던하게 생긴 후배나 사귈걸. 그건 그렇고 방 좀 치워
놓고 살아라 새꺄. 나 갈래."
"이거 치운건데?"
"돼지 마굿간도 아니고... 야, 신동엽?"
"왜?"
"대마초 피지 마? 나 간다."
답답해서 친구 방에 가 조언을 좀 받았다. 기분이 묘하다. 더런 쪽으로...
내 방에 돌아 오다 누나 방에 불이 꺼져 있는 것을 보았다. 벌써 자는가 했는
데...
"딩동!"
한 댓번 눌렀는데도 아무 반응이 없었다.
"으으으..."
내 방에 돌아 와 외출했던 복장 그대로 침대에 누워 희한한 상상을 하고 있는
데 삐삐가 울렸다. 누나다. 전화하러 나가기 싫었다. 계속 희한한 생각이나 하련
다.
승주가 작년 가을부터 누나에게 적극적이었다. 누나의 첫사랑. 여자는 첫사랑에
게 약하다. 수많은 영화에서 보아 왔다. 첫사랑을 잊지 못하는 여자에게 아픔을
겪는 두번째, 세번 째 남자들을... 사라져 버리면 모르겠는데 그 첫사랑이 다시
나타나면, 십중 팔구 두번째, 세번 째 남자는 물러나야 하는 것을 보아왔다.
내가 누나를 사랑하는 모습이 영화 같았다. 물러나야 하는가? 마음이 아프다.
왠 떡이냐 싶었다. 그 잘난 여자가 내 애인이라는 사실이 그랬다.
누나를 못 본다면 살기 싫어질 것도 같다.
지난 겨울 첫 눈 올때가 생각난다. 누나와 그렇게 좋은 약속을 했고 기대를 했
었는데, 첫 눈 오는 날 난 혼자였다. 옥상에서 쓸쓸히 첫 눈을 가지고 나 혼자
놀았다.
"으으으..."
내가 왜 삐삐를 차고 있는겨. 삐삐를 툭 던졌다. 밧데리가 터져 나가 방바닥에
쳐 박히는 누나가 사 준 삐삐. 나도 쫌만 더 값이 떨어지면 핸드폰 산다 씨.
나는 왜 삐치는가. 속이 좁다. 그래서 슬프다. 승주 새끼는 속이 좁지 않았다.
내가 봤을 때 그는 누나 앞에서 여유로와 보였고 별 희한한 짓을 할 정도로 용기
도 있었다. 그는 이제 곧 사회인이다. 버젓한 직장을 구하면 여전히 학생일 나보
다는 누나와 누나의 사람들에게 더 좋은 느낌을 줄 것이다.
철 없는 나, 그냥 동생만 할 걸.
누나는 외로웠던 것 같다. 옆에서 귀여운 척 하는 나를 자기의 마음을 잘 헤아
리지 못하고 연인으로 받아 들인 것 같다.
더 빠지기 전에 헤쳐 나와야 한다. 난 지금도 많이 빠져 있다. 계속 연인인척
하다가 차이면 누나를 쳐다 보는 것조차 포기해야 될 지도 모른다. 친한 후배고
동생이라면 누나가 딴 남자를 사귀어도 누나가 결혼을 하여도 어쩌다 한 번씩 만
날 수 있다. 존경하는 울 아버지도 누나는 곧 결혼을 해야 할 나이라고 인식했
다. 후, 승주에게 떠 넘기고 난 그냥 동생할까?
내가 잘못 된 것인가?
배군에게 삐치고 친구인 승헌이에게 삐치는 내가 잘못 된 것인가? 잘못됐으면
어쩔겨. 어줍잖은 연인이라는 이름이 날 그렇게 만들었다. 예전에 난 그 정도로
삐치는 인물은 아니었다.
난 경험이 없었고 누나는 버거운 상대였다.
불쌍한 삐삐. 예전에도 저런 적이 있었던 같다. 저건 내가 누나에게 단지 동생
일 때 받았던 선물이다. 밧데리를 끼워 주고 바지에다 넣었다.
"으으으..."
이런 씨, 왜 자꾸 치는거야. 다시 던져 버렸다.
아침에 일어 나니 어제 생각했던 것들이 피식 웃음 짓게 만들었다. 내가 왜 그
런 생각을 하는겨. 나는 누나와 연인 사이다. 조금 더 지켜 보자.
"여보세요?"
"너 어제 왜 전화 안했어?"
"내 방에 전화가 없잖아."
"부탁하나 해도 되니?"
"뭘?"
"너 며칠 간만 등,하교 서울서 하면 안되니?"
"왜요?"
"아, 아!"
"주위가 시끄럽다?"
"여기 전철 안이야."
"누나 전철 안에서 보호해 달라고?"
"응."
"나를 뭘로 보는거야."
"그것 때문이겠니? 요즘 바쁘다 보니 너 만나는 시간이 적으니까 그러는거야."
"나도 바빠 씨."
"흠, 너 이번 학기에 편하다고 했잖아."
"그래도 바빠."
"어휴, 저런 걸 애인이라고..."
"하기 싫으면 물러."
"뭐?"
"왜 자꾸 서울 가는거야?"
"그럴 일이 있어. 참, 너네 아버님 별 말씀 안 하셔?"
"뭘?"
"아니다. 며칠 만 서울서 안 다닐래?"
"힘들것 같아요. 어제는 뭐 타고 올라 갔어?"
"어제? 헤헤, 배선배 차 타고 올라 갔어."
살 열받네. 아니 많이 열받았다. 어제 승주 왔었다는 얘기는 끝까지 하지 않고
날 뭘로 보는지 갈때 올때 심심하다고 같이 다니자고? 날 배려하는 게 하나도 보
이지 않는다.
"어제 밤엔 왜 삐삐친거야?"
"너 연락 닿을 방법이 그것 뿐이잖아."
"한 번 쳐서 연락이 없으면 자는 줄 알아야지."
"왜 그래 너?"
"으이씨, 동전 진짜 많이 떨어지네. 끊습니다?"
나 이틀 동안 서울서 등,하교 했다. 기분은 나쁜데 누나 부탁을 거절할 수 있
는 배짱이 없었다.
"들어 줄거면서 꼭 처음엔 튕기고 보는 이유가 뭐야?"
이게 날 이런 식으로 생각한다 말이지?
목요일 날 수희가 아주 기분 나쁜 투로 집에 들어 와 머리에 뭘 또 두르고선 전
화기를 들고 내 방으로 오더라. 정신 산만한게 별게 다 심기를 건드린다.
"넌 또 뭐하는 짓이냐?"
"이 것은 전쟁이다."
"무슨 말이야?"
"앞으로 은정이 하고 놀지마."
이게 무슨 권리로 누나와 놀지말라는 거야. 아니 참, 얘 친구 중에도 은정이가
있지.
"내가 언제 은정이와 놀았다고 그래?"
"오늘 걔랑 싸웠어."
"뭐 때문에?"
"이게 친구 앞에서 약사를 옹호 해?"
"한약 분쟁 그것 때문에 싸웠니?"
"응. 뭐어? 배운건데 당연히 써 먹어야지?"
그럼 배운건데 당연히 써 먹어야지. 수희는 아주 오랫동안 내 방에 앉아 전화기
만 뚜러지게 쳐다 보았다.
"너 뭐하니?"
"이게 전화를 안하네?"
"무슨 말이냐?"
"강하게 나오네. 오빠 내가 먼저 전화 할까?"
"뭘?"
"은정이하고 싸웠단 말이야. 걔가 전화해서 사과를 해야 내가 그 사과를 받아드
릴텐데..."
"니가 먼저 해 그럼."
"싫어."
"그러면서 전화는 왜 기다리냐?"
"친구잖아 그래도."
"후, 참."
"이게 진짜 삐쳤나?"
"줘 봐. 내가 전화 해 줄게."
나 별로 속 좁은 놈 아닌 것 같다. 내가 은정이에게 전화를 걸어 둘 사이를 대
충 화해 시켰다. 에구, 집단 이기주의 속에 개인의 친한 감정이 괜히 상하는게
아닌가 싶어 씁쓸하다. 은정이와 여러말을 나누었다. 나보고 잘 지내냐고 물었
다. 후후, 얘는 내게 있어 좋은 감정의 소녀다.
"대충 화해한 거니?"
"네."
"가급적 그 문제로 수희와 네가 싸우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 너네 둘은 약대
생과 한의대생으로 나뉘기 이전부터 친구였잖아. 둘 사이에선 그 문제에 대해 조
금 관대했으면 좋겠다."
"그럴게요."
"넌 잘 지내고 있지?"
"네."
"언제 한 번 영화를 보던지 식사를 같이 하던지 하자?"
"후후, 오빠가 사주는거에요?"
"내가 잘 얻어 먹고 다니지만 동생들에게까지 얻어 먹겠냐?"
"다음에 꼭 사주세요."
"그래. 좋은 꿈 꾸고 내일부터는 이 철 없어 보이는 수희랑 다시 잘 지내는거
다?"
"후후, 알았어요."
그래 난 이렇게 멋있는 놈이 될 수도 있다. 어른스러워 보이는 행동을 하면서
말이다.
누나는 토요일, 일요일 또 소식이 끊어졌다. 어딜 돌아 다니는거야. 집에 전화
를 해도 핸드폰에 전화를 해도 받지 않는다. 내 의심은 커져 갈 뿐이다.
누나에 대해서 계속 생각하게 되는 건, 아무래도 요즘 들어 서운한 게 많이 쌓
여 가기 때문일거다. 그리고 의심이 늘어 간다. 진짜 내가 의처증이 있는 그런
이상한 놈인가? 싫다. 그래선 안된다. 나는 누나에게 관대해 질 필요가 있다. 그
럴려면 어짜피 깨질 이 연인 사이라는 관계, 청산해야 할 필요가 있다. 난 누나
와 연인이었을 때나 선,후배 관계였을 때나 별로 달라진 것 없이 친했다. 연인
사이가 되어 괜히 나만 속이 좁아진 것 같다. 맘 편안히 선,후배 관계로 돌아가
고 싶다. 그러면 좀 더 좋은 느낌으로 누나에게 남을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럴
까? 누나는 날 그렇게 만들려고 작정을 하는지 날 연인으로 대하지 않고 소홀해
갔다. 승주 얘기는 끝까지 하지 않으면서...
계속 기분이 나빴던 난 추석이 지나고, 우리 아버지가 나이 많은 여자하고 사귄
다면 날 놀리고 뭔가 알 수 없는 기대를 하시는 것 같아 다짐을 굳혔다.
중간 고사가 끝이 나고 누나 방을 찾아 가 내가 생각했던 걸 말했다.
"이제 안 바빠요?"
"이젠 좀."
"승주형하곤 잘 되어 가요?"
"무슨 말이야?"
"그냥."
"너 제발 부탁이니까 승주 의식하지마? 배 선배나 다른 사람에게 삐치는 것은
참을 수 있는데 승주 의식해서 이상한 말이나 태도 보이지마?"
"누나가 더 의식하는 것 같은데?"
"너 때문에 그래."
"후우."
"왜 한숨은 쉬는거야?"
"나 다시 그냥 동생하면 안될까?"
"응?"
"나 누나가 승주형 만났던 거 봤어. 요즘 자주 만났지? 곰곰히 생각해 봤는
데..."
"야!"
"좀 들어 봐요. 누나에겐 나같이 철없는 나이 어린 놈보다 승주형 같은 사람이
더 어울려 보여."
"혹시나 했는데... 너 그러지 마. 너 승주 때문에 삐치면 오래 가고 불안해."
"내가 지금 삐쳐서 장난같이 하는 말로 들려요? 왜 날 자꾸 어린 애 취급 해?
그러니까 이러잖아."
"그래 그건 내가 고칠게. 그러니까 너도 고쳐."
"그냥, 예전처럼 선,후배 사이 합시다. 누나는 누나대로 좋아하는 사람 찾고,
나는 나대로 좋아하는 사람 찾는거야. 그래도 선,후배 사이니까 어색한 사이는
안될거 아냐."
누나가 겁나게 날 째려 보았다.
"그런 얘기 하지 말랬지?"
"그 말투가 싫었어. 예전에는 몰랐는데 동생이 아니고 애인이라 생각하니 듣기
가 싫었어. 그리고 계속 내가 생각하는 속이 좁아져."
"나도 반성하는 게 있어. 천천히 고쳐가면 돼. 너 나중에 또 빌거지? 나도 너
그런 태도는 힘들다? 이 번엔 내가 삐칠지도 몰라?"
"맘 편안히 승주형 만나요. 누나가 좋아했던 사람이잖아."
"야, 박철수! 나 진짜 화낸다?"
"지금 그 말투? 아니다. 내 표정이 지금 삐친 표정같이 보여요? 아니잖아."
"허! 나중에 다시 얘기 해."
"나중에? 그럼 뭐가 달라지는데? 나 오래 생각하고 얘기하는 거야."
"어째 승주 얘길 한 동안 안한다 했다. 정 못 믿겠으면 같이 승주 만나. 승주
앞에서 우리 둘이 사귄다고 얘기 해 줄게."
"유치하게 그 무슨 짓이냐."
"너 지금 유치하게 굴고 있어."
"누나, 나 방 뺄까? 당분간이지만 충분히 집에서 등,하교 할 만한데 괜히 방 잡
고 있는 것 같애. 졸업 할 때까지만 집에서 등,하교 하고 싶어. 그리고 누나 학
교 떠나면 보기 힘들텐데 지금부터 준비해야지. 이제 일년 정도 밖에 안 남았
네."
"함부로 말하면 나중에 후회한다 너?"
"삐쳐서 하는 말 아니라니까."
"지금 절교 선언하는거야?"
"절교라니, 헤어지기 싫어서 다시 동생하고 싶은건데."
"그게 가능하니? 너 지금 이러는 건 헤어지자는 소리야."
"헤어질 일이 뭐 있다고. 예전으로 돌아가기 위해 당분간만 떨어져 살자는 소리
지. 어짜피 학교에서 보잖아.."
"말이 이상하잖아. 너 왜 그래?"
"참 많이 듣는다. 너 왜 그래. 이런 소리 듣는게 싫어. 그 말은 내가 싫게 변
해 간다는 말이잖아요. 그 소리 너무 많이 들었어. 앞으로 그 소리 안 듣도록 노
력할게."
"야!"
"나 내 방 갑니다."
"그래 가."
"화났어요?"
"너 같으면 아무렇지도 않겠니?"
째려 보지 마라. 갑자기 기분 나빠 지려고 한다.
"울어요? 누나 그거 고쳐요. 분에 못이겨 눈물 흘리는 거."
졸라 두들겨 맞았다. 화가 나서 그런지 몰라도 제 분풀이로 누나가 날 때렸다.
야이, 넌 안 아프겠다고 생각할지 몰라도 맞는 나는 아프다 씨. 기분 풀어지면
예전으로 돌아가는 거야. 나 멋있는 놈 되고 시퍼요. 누나의 행복을 빌어 줄 수
있는 멋있는 놈. 푸하하, 가슴이 아프다.
"나중에 니가 한 말이 후회스럽다 생각되거든 바로 와. 아니면 늦을거야. 나도
지금 많이 삐쳤거든."
에이 모르겄다 씨. 내 방으로 그냥 와 버렸다.
연하가 어때서 65회
후회 되었다. 방에 돌아 오자 마자 내가 왜 그런 말을 했을까 후회되었다.
왜 나는 속이 좁은 놈인가.
내가 싫다. 다른 사람에게도 이럴까 두려움도 들었다.
누나에게 맞은 데가 아프다. 왜 때린거야. 누나가 눈물 흘리는 모습이 내 마음
을 아프게 하고 있다. 돌아 가서 잘못했다고 빌까? 그러기 싫다. 난 속 좁은 놈
이 되기 싫다. 나는 왜 누나를 믿지 못하고 불안한 존재로 생각했을까. 그건 아
마도 내가 불안했고 나를 믿지 못했기 때문이다. 어쩌다 미래를 생각해 보면 난
너무도 평범하고 무료한 존재일 수 밖에 없다.
아침 일찍 누나를 찾아 갔다.
전에도 이런 적이 있다. 한 번 삐쳤다가 바로 잘못했다고 빌었던 거. 내가 잘못
한 것이 무엇인가?
"학교 안 가요?"
누나는 잠옷은 아니지만 가벼운 옷차림으로 침대에 앉아 나를 물끄러미 쳐다 보
았다. 그리고 미소를 지었다.
"너 또 빌러 왔지?"
"뭘요?"
"이 번에는 받아 주지만 다음엔 그러지마?"
왜 또 내 기분이 살 나빠지냐.
"내가 그처럼 이랬다 저랬다 했어요?"
"가끔씩."
"누나하고 사귀면 점점 더 어린애처럼 되겠다. 학교 안가요?"
"어제 했던 말 없었던 걸로 하는거지?"
"아니요. 시간을 갖고 난 내 모습을 찾을래요."
"으응?"
"연인사이 하기 싫다."
나 누나 방에서 쫓겨 났다.
"그 맘 바뀌기 전에는 나 찾지 마. 빠른게 좋을거야. 내 마음 완전히 돌아서기
전에..."
왜 나만 바뀌어야 돼? 내가 한 두번 당하냐. 누나는 날 쉽게 버리지 못할 것이
다. 잠시만 시간을 갖고 좀 더 여유를 찾으면 나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진 누나
가 삐치지 않는 철수를 만나게 될 것이다.
졸업을 하고 대학원을 가게 되면 좀 나아지겠지. 이제 누나가 누구를 만나 건
나를 어떤 식으로 대하던 난 삐치지 않을 것이다. 난 이제 사소한 것에 삐치지
않을거다. 그래야 자연스럽게 누나를 대할 수 있고 좋은 모습 보여줄 수 있다.
누나에게 연락이 없다. 기다려지기도 했으나 난 여유롭게 대처해야 했다.
"일찍 와 있었네요?"
일주일 째 누나를 보지 않고 난 잘 견디어 냈다. 떠났다는 마음이 들지 않으니
그리고 좁은 속이 아니라 보고 싶기는 해도 딴 생각은 스미지 않았다.
"나 어려 보이니?"
"아뇨."
그렇지. 휴일을 맞아 은정이와 데이트를 했다. 내가 생각하기로 난 은정이에게
좋은 모습으로 들어가고 있는 것 같다. 어른스럽고 여유가 있는 모습으로 말이
다.
"넌 남자 친구 없어?"
"아직은. 제 또래 남자들은 어려 보여서 친구 이상으로 안 보여요."
"내 친구 소개 시켜 줄까?"
이 얼마나 여유로운 모습인가. 얘는 별로 여유로와 보이지 않는다.
"오빠는 여자친구 있어요?"
"나? 없지."
학교 생활은 단조로왔다. 그냥 내 느낌 상으로 무료했다. 대학원 갈 준비를 했
고 나름대로 기사 자격증 따려고 공부도 했다. 좀 재미가 없다. 허전해서 그런
가 보다.
아침에 학교 가서 밤이면 자취방으로 돌아 왔다. 누나 방을 지나치면서 불이 켜
져 있으면 미소 지었고 불이 꺼져 있으면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 바로 근처에 살
고 있는 누나가 많이 그립다.
다시 한 주가 지났다.
가을이 다 가고 있다. 자취방 길 가의 강냉이들이 올해도 변함없이 탐스럽게 영
글고 있다. 후후, 언제 한 번 누나와 또 서리를 해야 겠군. 작년 이 맘 때 누나
와 저 것들을 서리할 때가 생각난다. 참 좋았던 기억이다.
난 누나를 사랑하지만 그 느낌을 아직 잘 모른다. 그냥 좋은 것일까? 뭔가 변하
는 것이 있다는 데. 느낌으로 주체할 수 없는 뭔가가 있다는 데, 나는 누나와 사
귀면서 그런 것들 보다는 싫게 변하는 나를 보았다. 나는 그냥 누나를 좋아한 것
일까? 후후, 맏이로 커 오면서 느낄 수 없었던 많은 것들을 누나 때문에 즐길
수 있었던 것 같다. 나도 정서가 비슷한 사람에게 기대고 싶었나 보다. 응석도
부려보고 투정도 해 가면서 맏이가 가질 수 없었던 그 무언가를 느끼며 누나를
좋아했었나 보다. 그걸 서툰 사랑의 감정이라 생각했으니 삐쳤겠지. 이제 자연스
럽게 예전의 나로 돌아 가자.
누나에게 연인 하기 싫다는 말을 뱉은 지 20여일 만에 누나 방을 찾아 갔다. 바
로 이웃에 살면서도 제법 긴 시간 왕래도 아무런 소식도 주고 받지 않은 채 잘
도 보낸 것 같다.
어! 어랏! 이런...
누나가 방을 빼 버렸다. 언제 빼 버린겨. 심한 배신감이 들었다. 내게 한 마디
말도 없이 방을 빼버려? 아참, 내게 굳이 말할 필요는 없지.
쫓아 갔다. 전력 질주로 학교로 뛰어 갔다. 급회전!
"누나!"
"철수 왔구나."
정희 누나 약국을 찾아 갔었다. 그녀에겐 누나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기
에...
"모르겠는데?"
"에? 은정이 누나 안 만났어요?"
"몇 번 보긴 했는데 아무말 없었어."
"그래요?"
"은정이에게 무슨 일 있니?"
"방을 뺐대."
"응? 왜?"
"모르지."
"너네 둘은 여전히 잘 지내고 있는거야?"
"잘 지내는 것처럼 보였어요?"
"응. 혹시 싸우고 삐쳤니?"
"아니. 은정이 누나가 내 얘기 안해요?"
"별 다른 얘기 없었어. 야, 나 좋은 일 있다?"
"별로 안했어...?"
"나 좋은 일 있다니까?"
좋은 일? 있으면 있는거지...
"뭔대요?"
"나 아줌마 된다?"
"아줌마 되는게 좋냐? 아가씨가 더 좋은거야."
"씨이... 나 결혼 해."
"언제?"
"내년 2월달에."
"아직 한 참 남았잖아."
"이게 진짜. 야, 축하해 줘야지."
"누구랑 하는데?"
"그 남자."
"이 남자도 저 남자도 아니고 그 남자? 그 남자가 누군데?"
"선 보고 사귀기 시작한 남자."
"그래요? 좋겠수."
"흠. 그래."
"왜 결혼하기로 한거야?"
"잘 모르겠어. 하지만 괜찮을 것 같았어."
"그런 맘 가지고 결혼을 결심한 거야?"
"뭐 다른 게 필요해?"
"많이 필요하지."
"부족한 것은 살면서 메꾸지 뭐."
"내년이면 아줌마야? 약국은?"
"계속 할 거야. 그 사람도 수원 쪽에 있을 테니까."
"포스트 아가씨라 불러야겠네."
"뭐야?"
"그건 별로 중요한 게 아니고 은정이 누나 어디로 이사 간 줄 몰라요?"
"이사 간 줄도 몰랐는데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씨, 내 결혼한다는 것보다 은
정이가 방 뺀게 더 중요해?"
"그걸 말이라고 해요? 누나가 딴 남자에게 시집가는 게 나한테 뭔 의미가 되
냐."
"치이."
"은정이 누나에게 전화 한 번 해 봐요."
"싫다."
"누나도 속이 참 좁네요."
누나! 어디로 간겨. 왜 방을 뺀겨.
약대 연구실로 찾아 갔다.
아주 망설여졌지만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연구실 문을 노크했다.
"저기요."
"어! 철수군."
"누나는 어디 갔어요?"
"잠시 나갔는데. 곧 올거야."
여유를 갖기로 했지만 배군은 여전히 꼴 보기 싫다. 누나와 많은 시간 같은 공
간에서 지내는 사람.
연구실이 보이는 자판기 앞에 앉아 커피를 마셨다. 이 자판기 커피 누나가 참
많이 뽑아주었던 것이다. 커피 맛이 좋다. 여운과 기억 때문에.
뭐야 이거. 누나가 오는 모습이 보여 자리에서 일어 서 반갑게 웃었는데 누나
가 날 본척도 않고 내 앞을 지나쳐 갔다.
"누나!"
불렀는데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은정이 누나! 홍은정씨."
에이쒸, 연구실로 들어 가 버리면 이야기 하기 어려울 것 같아 뒤쫓아 가 붙잡
았다.
"왜 잡는거야?"
"불렀는데 왜 대답을 안해요?"
"내가 왜 대답을 해야 되는데?"
"방 뺐어요?"
"무슨 상관이야?"
"왜 그래요?"
"내게 무슨 볼 일 없지? 나 들어가야 돼."
이거, 누나도 삐칠 줄 아네. 상당히 심각하네 이거. 이런 모습은 분명 누군가
가 누군가에게 차일 때 상황하고 비슷하다.
"잠깐 얘기 좀 해요."
"싫어."
"아 진짜 속 좁네."
"뭐야?"
"방 왜 뺀거야? 어디로 이사 갔어?"
"너 서울서 학교 다닐거라며? 나 때문에? 그래서 뺐어."
"에? 나 계속 여기 있을 건데."
"있어라."
흠, 저 표정 저 말투 왜 마음에 들지 않는걸까. 당연히 나에게 화내는 것인데
마음에 들리 없지. 하지만 위협적이지 못했다. 나는 누나의 표정을 보고 큰 어색
함을 느끼지 못했다. 저 태도는 익숙하다. 내가 잘못했다는 말을 해 주길 바라
는... 그리고 날 어린 애 취급 하는 것이란 걸...
"잘 지냈어요? 커피 한 잔 뽑아 드려요?"
"됐어."
"한 잔 마셔요."
종이 컵을 누나에게 건넸다. 누나가 그 걸 받았다.
"정희 누나 시집 간다고 그러대?"
"그래."
"누나 나이가 벌써 그렇게 됐나?"
"적령기지."
"승주형은 잘 있어요?"
"야!"
"배군도 그런데로 괜찮을 것 같다."
"무슨 말이야?"
"괜찮으면 결혼하는 건가봐."
"뭐야?"
"어디로 이사 갔어요?"
"집에서 다닐거다."
"가능해?"
"나 차 뽑았어."
"허허! 돈이 많긴 많나 봐."
"그런 식으로 얘기할래?"
"올해는 나 혼자 서리해야 겠네. 들어 가 봐요."
"엉?"
"나 갈래. 뭔가 씁슬하다."
"너 빌러 온거 아냐?"
"뭘? 내 왜 비는데?"
누나가 갑자기 울먹거리더니 날 때렸다. 쪽팔려 죽는 줄 알았다. 왜 껄핏하면
우는거야. 그리고 왜 때리는거야.
우쒸, 도대체 남자 알기를 뭘로 아는거야.
날 원망스럽게 쳐다 보는 누나를 흘낏 흘낏 뒤돌아 보며 약대를 나왔다. 좀 더
시간이 필요한가? 근데 내가 뭔 짓을 하고 있는 거야.
약대 앞에 임시 넘버를 달고 있는 흰색 아반떼를 보았다. 안을 살펴 보았다.
이 찬가?
"저 비켜 주시겠어요?"
뒤를 돌아 보니 멀쩡한 아가씨가 열쇠를 들고 날 수상한 눈초리로 쳐다 보고 있
었다.
"이 차가 댁의 차요?"
"그런대요."
"잘 타고 다녀요."
아닌가 보다. 약대 건물 주위를 다 돌아 다녀 보았다. 새 차는 보이지 않았다.
하여간 은정이 누나 저거 집에서 귀한 자식인가 보다. 대학원 생이 중형차를 타
고 다녀? 공주병은 여전하군.
자취방 건물 앞에 주차 되어져 있는 은색 소나타 승용차 안에서 누나의 헨드백
을 발견 했다. 새차다.
왜 여기다 주차 시켜 놓은겨.
"잘 사시오. 홍은정씨. 철수가? 철수가 누군지 알지?"
너무 깨끗해서 손가락에 흙묻혀서 본네트 위에다 저렇게 써 주었다.
연하가 어때서 66회
세상 모든 장남들이 세상 작은 일에 따지지 말고 대범하게 살아야 한다고 강요
받는다. 의미심장한 말이다.
정희 누나가 결혼 한댄다. 참 오랫동안 사귀었던 그 철규란 놈은 그냥 잊혀지
게 생겼다. 그런겨?
나도 이제 곧 대학을 졸업한다. 언제까지나 어린 애처럼 굴 수 없다. 난 좀 더
현실적이 되어야 하고 철이 들어야 한다.
내가 은정이 누나에게 했던 일들이 참 우습다. 연인이라 생각하며 사소한 것에
삐치고 아무것도 아닌 일로 연인 사이를 관둬야겠다고 생각했으며 내 마음대로
상황 판단을 하고 그 결과 난 지금 누나를 그리워 하며 혼자 청승을 떨고 있다.
나 왜 이런겨? 생각이 많은거야, 아니면 철이 없어 그런거야. 누나가 참 황당하
겠다. 하지만 난 변명을 해 본다. 정희 누나, 그럴 것 같지 않던 정희 누나가 결
혼을 한다. 단지 괜찮을 것 같다는 그 이유로. 은정이 누나도 곧 그럴 것이다.
난 괜찮을 것 같지가 않다. 그 이유로 누나에게 버림 받기가 싫었다고 변명해 본
다.
밤 깊은 시간에 자취방 건물 밖을 나왔다. 누나가 살던 방은 깜깜하다. 저 방
의 불이 다시 켜 질 때는 아마 다른 사람이 이사 와 있겠지. 십중 팔구 남자다.
으, 싫다.
주위를 살폈다. 바스락 소리가 날까 주의를 기울이고 도둑 고양이처럼 강냉이
밭에 숨어 들었다.
누나 생각 때문에 웃었다. 하하, 그 여자 참, 망을 보라 했다고 진짜 망을 서
주었던 내 기억 속 그 여자가 참 좋다. 오늘은 왜 나 혼자인가? 나 때문이지비.
세 개만 서리를 했다. 아주 탐스럽게 익은 걸로 더 할 수 있었지만 세개만 꺾었
다. 포획물을 보고 씩 웃었고 누군가가 그립다.
나 태어나 이런 짓은 처음 해 봤다. 서리한 강냉이를 허리에 차고 공중 전화 박
스를 찾아 갔었다.
간도 커지.
새벽에 누나에게 전화를 걸었다. 오늘은 강냉이 때문에 누나 목소리가 듣고 싶
었다. 참 쉽게 했던 전화였는데 지금은 어렵다. 왜 어려운 거지? 그냥 예전처럼
동생으로 돌아 가면 따지려 들지 않고 사소한 것에 삐치지 않으며 누나가 자연스
러울 줄 알았는데, 전화 한 번 하는데도 많은 용기가 필요했다.
받으면 끊었다. 여보세요, 그 목소리를 다 듣기도 전에 끊었다. 난 누나의 목소
리를 들을 용기도 생기지 않을 만큼 누나가 어렵게 느껴졌다. 왜 그런거지? 아,
늦은 밤이구나.
한 번 더 해 보았다. 이 번엔 여보세요, 그 말은 다 들을 생각이었다.
"여보세요?"
하하.
"이 봐 학생, 그 옥수수?"
"네?"
"그 옥수수를 왜..."
"네?"
잠도 없나? 옥수수 밭 주인인 것 같진 않은데 야밤에 전화 박스를 지나가던 어
떤 사람이 내 허리 춤에 찬 옥수수를 보고 말을 걸었다. 수화기를 들고 있다는
것을 잊은 채 그 사람에게 변명을 해야 했다.
"그 남이 심어 논 옥수수를 그리 서리해 가면 되나. 다 큰 사람이 남 생각을 그
렇게 못하나?"
"전 오늘 처음 한 건데요."
거짓말 한 번 했다.
"그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까 땅 놀리지 않고 텃 밭 일구어 심어 놓으면 대학생
이라는 것들이 반도 넘게 서리해 가 버리니... 쯔쯧."
"주인이세요?"
"이 동네 사람이야."
"죄송합니다."
"대학생이라는 것들이, 여기 학생 맞지?"
"죄송합니다. 얼떨결에..."
눈치를 보다 바로 도망을 쳤다.
"이 봐 학생 전화 카드?"
전화 카드가 문제냐, 주인에게 일러 주면 작년 것 까지 다 물어 줄 판인데. 나
말고도 서리하는 놈들이 제법 많은 가 보다. 왜 그 남이 심어 놓은 걸 몰래 서
리 해 가냐. 그게 도둑질하고 뭐가 다르냐. 각성하자 좀.
그 뒤로는 전화도 못했다. 누나는 같은 학교 안인데도 정말 만나지지가 않았
다. 이렇게 되면 안돼는데..
몇 일이 또 흘렀다. 도서관에서 집으로 돌아 오는 길이 재밌지가 않다. 세상을
재미로 사는 건 아니지만 재밌게 사는 것도 보람된 일인데. 하루 나름대로 열심
히 공부했다는 보람은 있지만 재미가 없다.
11월달도 두자리 날짜가 되었다. 11월 11일 월요일. 한 주일의 시작이 1 포카
다. 푸하하.
내 생각과는 다르게 누나에게 차인 듯한 느낌이 든다. 누나에게 연락이 없다.
나도 찾아가기 힘들다. 시간이 흐를 수록 더 어려워 질텐데... 이게 아니었는
데...
아뿔싸, 곧 누나 생일이다. 하하, 기회다. 누나를 찾아 갈 수 있는 기회.
용기를 내어 약대를 찾아 갔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노크를 했다.
열자 마자 누나와 눈이 마주쳤다. 느낌이 비참했다. 누나의 표정에서 받은 내
모습이 버림 받은 누군가가 무언가를 구걸하는 것 같다. 누나는 나 때문이 아니
라 주위 사람들 때문에 나오는 것 같다.
"왜 왔어?"
"그 있잖아요. 이 번주에 누나 생일 있잖아요."
"그래서?"
"뭐 받고 싶어요?"
"니가 그걸 왜 물어보는데?"
누나의 말이 날카롭다 못해 에인다 에여.
"그냥 누나 편하게 대할려고 그랬지 이렇게 어색한 사이가 될 줄은 몰랐어요."
"너 참 네 중심적이다? 나도 이제 너 싫어."
"안되는데..."
"왜 왔어?"
"뭐 받고 싶냐니까요?"
"너한테 뭘 받아?"
"그게..."
"그 날은 좀 바쁠거야. 승주 만나기로 했거든, 선물은 주면 받을게."
이거 좀 이상하네. 어째 승주 얘기에 기분이 더 나쁘냐. 승주 만나기로 했다는
말에 내가 저 한 쪽 구석으로 치워 진 느낌이다.
"뭐 받고 싶은지만 말해요."
"그럼 꽃이나 사 와. 금방 시들어 버릴 꽃으로..."
서럽다 씨. 갈테면 가라지.
나 혼자 있으면서 많은 고민을 했다. 뭘 선물할까? 어떻게 하면 누나 곁에서 예
전처럼 자연스러울 수가 있을까? 그 놈 생각이 났다. 승주 새끼. 이렇게 된게
다 승주 그 새끼 때문이지만 배울 건 배워야 된다. 승주 그 새끼가 그 선물을 하
고 난 다음 누나와 다시 가까워 졌었다. 그 놈보다는 많아야 한다.
진짜 그러긴 싫었는데 누나 생일 날 장미 267송이를 샀다. 들기도 버겁다. 안그
래도 얼마 되지 않는 용돈 다 날아 갔다.
꽃을 들고 학교 들어 가기가 졸라 쪽팔렸다. 예전 승주는 그 꽃을 들고 무릎까
지 꿇었는데 이 정도 쪽팔림 쯤이야. 그래도 힐끗 힐끗 쳐다 보는 학생들의 시선
이 못마땅했다.
난 승주 보다 확실히 못한가 보다. 약대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게 망설여 졌다.
약대 건물 앞에서 누나 차를 보았다. 저거 맞을거다.
"전데요."
"허, 니가 어쩐 일이니?"
결국 난 약대 앞 공중 전화기 앞에 섰다. 도저히 내가 삐치는데 일조한 배군이
같이 있는 곳에서 누나에게 꽃을 선물할 자신이 없었다. 내 예전처럼 연인사이라
면 자신감이 생길 수도 있겠지만 지금은 아니다.
"잠깐 나와요. 약대 앞이에요."
"내가 왜 나가는데?"
"선물 받아 가요."
"니가 가져 와."
"싫어요. 씨..."
"안 삐친다며? 씨, 소리 하지마."
"9312 쏘나타 누나 차 맞아요?"
"그래."
"그 위에 올려 놓을테니까 가져 가세요. 다른 사람이 가져 가도 전 모릅니다."
"야!"
"왜 그리 쌀쌀 맞은거야? 하여튼 생일 축하 해요."
이대로 영영 잘못 돼 버리는 건가? 누나 목소리가 많이 차가웠다. 오늘 선물을
해서 누나가 조금이라도 웃는 모습을 보여 준다면 헤헤, 웃으며 예전 같이 친한
모습 보여 주려고 했는데...
집에 들어 왔다. 승주 그 놈하고 잘 놀아라. 누나 자네가 아무리 쌀쌀 맞게 굴
고 날 모른 척 하려해도 같은 학교에 있으니 나를 종종 볼 것이다. 자연스럽지
는 못해도 난 모른 척 하지는 않을 것이다. 나 아직 차이지 않았다. 절대 모른
척 하지 않을 것이다. 예전 누나가 했던 말이 생각난다. 자기는 헤어질 생각이
없었지만 상대가 어색해 했다고? 지가 그렇게 만들거만... 일단 난 누나 생일을
모른 척 넘기지 않았다. 가져 가던 말던 난 분명 생일을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내 생일 때 두고 보겠어. 내 생일 때까지 언제 기다리냐.
침대에 엎드려 누워 배게에 머리를 묻었다. 곧 기사 시험이 있지만 그 딴건 아
주 사소한 것으로 여겨 졌다. 사소한 것과 중요한 것은 상황에 따라 달라지나 보
다. 지난 여름 방학 때 지리산 놀러 가서 같은 방을 쓴 사이였는데 불과 두달여
많에 이처럼 낯설게 될 줄이야. 아무 이유도 없이 말이다. 고쳐 생각해 보니까
지금도 이런데 누나가 시집 갈 때쯤 진짜 내 생각엔 아무 이유도 되지 못하는 것
으로 난 차이는 신세가 될 수도 있겠구나하는 생각이 든다.. 그 땐 내가 많은 것
들을 기대하고 있겠지? 지금보다 훨씬 더 빠져 있을테지. 헤어나지 못할 만큼 사
랑하고 있다고 믿고 있을 테지. 그 땐 아마도 살기 싫을 만큼 견디기 힘들어 할
것이다. 지금은 차였다는 생각도 하지 않고 누나가 영영 떠났다고 생각하지도 않
는데 시간이 흐를 수록 세상이 무료해지고 있다.
매도 일찍 맞는게 낫다고 오히려 잘 된 일인가? 뭘 잘돼 씨. 호랑이 인형만 조
패다가 할 일이 없어 밖으로 나갔다.
저녁을 먹고 답답해서 정희 누나 약국을 찾아 갔었다.
"어? 은정이 생일인데 여길 왜 와."
"나 차였나봐요."
"엉? 왜?"
"그냥."
"뭐야? 은정인 별 말 없던데."
"솔직히 말할게요. 나 누나에게 차인지 오래 됐어."
"엉?"
고개를 묻고 약국 안에 앉아 멍하니 창을 바라 보고 아무말 없이 있었다. 정희
누나는 오늘도 약속이 있나 보다. 일찍 문 닫을 테니까 8시 안에 집에 가랜다.
섧어라 씨.
창 밖에 은색 승용차가 섰다. 그리고 꽃을 든 여자가 내렸다. 어떤 놈인지 몰라
도 저 여자에게 꽃 사준 놈 참 무식한 놈이다. 한 이백송이는 되어 보인다. 여자
가 좀 예뻐 보이긴 한다. 옷차림이 참 화사하고 귓밑 머리까지 오는 단발 머리
도 섹시해 보인다.
뭐야?
"누나?"
"왜?"
"저거 은정이 누나죠?"
"그러네."
"머리는 왜 깎았냐?"
"어, 그래 머리를 깎았네."
"나 때문인가?"
"무슨 말이야?"
"나 좀 카운터 밑에 숨을게."
"왜에?"
"나 차였다니까. 누나 마주치면 안된다 말이야."
"니가 왜 차여?"
"나 여기 있다 하지 마요."
"헤어졌어?"
"아직은 아니지만 그런 셈이지요."
"뭐야 너?"
"아무 말도 하지 마요?"
후다닥 카운터 밑으로 가 숨었다. 저거 오늘 승주 만난다더니 여긴 왜 온겨.
다행이 누나는 약재실 안으로 들어 오지 않고 카운터 앞 의자에 앉았다. 정희
누나가 물끄러미 날 쳐다 보더니 진짜 모른 척 해? 라고 묻는 표정을 짓는다. 주
먹을 불끈 쥐어 보여 주었다.
"생일 축하 해."
"그래."
"왠 꽃을 그렇게나 많이?"
"이거? 철수가 준거야."
내 머리 위 카운터에 꽃이 놓여졌다. 저거 여기다 버리고 가는 거 아녀? 그랬
단 봐라.
"허허, 하나 물어 볼게."
"물어 봐."
"철수 말로는 차였다던데."
"엉? 걔가 왜 차여?"
"안 찼니?"
"차? 치. 걔 때문에 속상해 죽겠어 진짜."
"왜? 무슨 일 있어?"
"후후, 걔 아마 지금 후회하고 있을거야."
"무슨 일인데?"
"당분간 모른 척 해."
"뭘?"
"버릇 고쳐놔야지."
"무슨 버릇?"
"걔가 날 찼잖아."
"엉?"
"안 좋은 일이 있었긴 해. 철수는 자기가 싫게 변한다고 생각했나 봐. 내 잘못
도 있긴 있어. 철수 걔 미리 생각해. 어줍잖게 듣고 배운 게 있나 봐. 사람 사귀
면 그런 거 있잖아."
"뭐?"
"괜히 간섭하고 따지고 삐치고 하는 거. 연인 사이라는 이유만으로 소유하러 드
는 거 말이지. 그래서 깨지는 커플들 많잖아. 자기가 그렇게 한다고 생각하나
봐. 애야 애. 바보거나."
"후후. 철수 답다."
"처음엔 당황했었어. 얘가 뭔가 애정이 식었거나 이대로 헤어지는 건 아닌가 해
서. 매달리고 싶었다? 승주에게도 그렇게 까진 생각들지 않았는데... 후후, 웃음
이 다 나오네. 철수 걔 지금 많이 힘들거다."
"그건 또 무슨 말이야?"
"내가 다신 안 만날 것처럼 하고 있거든."
"그러다 진짜 헤어지는 거 아냐?"
"아니야. 오늘 이 꽃 봐. 세어 보니까 267송이더라. 후후, 예전 승주가 주었던
것보다 두 송이가 많아. 두 송이 많은 이유를 알지. 그리고 며칠 전 밤에 철수
가 전화 한 적 있는데 옥수수 서리한 모양이더라. 지금 나 보고 싶어 죽을거다.
걔 마음 변한 거 없어. 나도 변한 거 없구."
뭐여? 아직도 날 어린애 취급하고 날 가지고 놀고 있단 말이여? 근데 기분은 좋
다.
"승주씨는 잘 있어?"
어? 정희 누나가 내 마음은 어떻게 알고 그걸 다 물어 보냐.
"흠, 간혹 연락은 하지만 자기도 바쁜가 봐. 나 승주한테 야단 맞았다?"
"왜?"
"내가 잘 어울리는 여자 한 명 소개시켜 줄까,라고 말했었거든."
"너도 참. 앞으로 철수는 어떡할거야?"
"내 버려 둬. 내가 그리 호락호락한 상대는 아니라는 걸 보여 줘야지. 걔 마음
을 알았으니까 지 풀에 꺾일 때까지 기다려 볼 참이야. 뭐, 언젠가 싹싹 빌러 올
거야. 종종 그랬던 것 처럼. 그때 못 이기는 척 받아 주지 뭐. 그러면 당분간은
삐치거나 이상한 짓 안하겠지. 사귀는 게 뭐 장난 인 줄 아나. 참, 꽃 이쁘지?
너 이렇게 많은 장미 받아 봤니?"
"쳇! 나 결혼 할 때 니가 부케 받을래?"
"내가? 나 그때도 학생인데?"
"그렇게 유치하게 놀 봐에야 차라리 식 올려라."
"그럴까? 쿠쿠, 재밌잖아. 철수랑 살면 참 재밌을 것 같아. 아옹다옹 하면 무료
하진 않거든. 세상은 재밌게 살아야 돼."
"그래 그런 가치관을 가진 사람도 있어야지. 철수야?"
이씨, 이런 씨, 왜 내 이름을 부르는겨.
"엉? 철수라니?"
"오늘 네 생일인데 놀아 줄 사람이 있어야 되잖아. 나 오늘 그 사람 만나야 되
거든. 철수야아?"
"헤헤, 누나 안녕. 아직도 어린 애 취급이여?"
카운터에서 나와 고운 웃음으로 모습을 드러 냈지만 바로 표정을 바꿨다. 그것
때문에 연인 사이를 포기했건만 아직도 어린애 취급을 하는 것 같아 기분이 나빴
다.
"어?"
"연기였단 말이지?"
"니가 왜 여기있어?"
"내가 그렇게 만만하게 보였단 말이지. 지풀에 꺾여? 나도 나 좋아하는 사람 있
어, 왜 이래?"
"야아! 김정희!"
정희 누나는 왜 부르냐. 오늘 기회 봐서 빌자. 내 기분이 많이 좋아졌고 누나
가 다시 자연스러워진 느낌이다. 바로 경어 대신 늘 하던 투의 말이 나왔다.
연하가 어때서 67회
정희 누나가 유치해서 못 봐주겠다며 누나와 날 내 쫓았다. 누나와 조금 어색했
지만 아까 전화했을 때 만큼은 아니다.
"머리 왜 짤랐어요?"
"내 맘이다."
"여자는 마음의 변화가 생기면 머릴 짜른다면서요?"
"나는 그냥 짤랐어. 너 때문 아니야."
"누나 나 보고 싶었지?"
내가 떫은 감자냐? 누나의 눈꼬리가 마녀처럼 올라 갔다.
"에휴, 너란 애는 정말..."
"헤헤, 나 누나에게 안 차일려고 그랬던 거야. 내 본심을 몰라주냐. 이렇게 될
줄은 몰라쏘."
누나에게 헤헤,웃고 애교를 좀 떨면 분위기가 바뀌던데 이 번엔 아니다. 누나
표정은 여전히 차가웠다.
"이 것 좀 들어. 한 송이라도 상하지 않게 똑바로 들어?"
혹시 그냥 가져 가 버려라 할까봐 실실 웃으며 누나의 팔을 잡았다.
"얘기 좀 해요."
그랬더니 누나가 꽃을 떡 내게 맡기곤 명령했다.
"나 따라 와."
"어디 가는데?"
"너네 방."
"내 방?"
"얘기 하자며?"
연상라고 명령조의 말들이 많다. 그것 때문에도 난 어린애 취급 받는다고 생각
을 했었다. 그러나 이 번엔 저런 투의 말이 너무 좋다. 다시 친근해진 느낌이
다.
"열쇠 줘."
"내 방인데..."
"주라면 줘."
난 꽃을 들고 누나를 따라 내 방으로 들어 왔다. 이런 상황에서 적반하장이라
는 말을 써도 될까? 누나는 내 방을 둘러 보고선 쯔쯧,거렸다.
"왜요?"
"바뀐 거 하나도 없네?"
"그럼. 뭐 바뀔거나 있나?"
"그런데 왜 바꿀려고 했어?"
"뭘?"
"우리 사이 말이야."
"승주 형이 왔잖아요. 그리고 나 자주 삐치는거 싫지 않았어요?"
"그래서?"
"보통 내가 알기로 첫사랑 나타나고 옆에 있는 사람이 싫어지면 십중 팔구 깨지
더라."
"그래서?"
"뭐가 그래서야. 태연해지자. 누나가 애인이면 어떻게 태연할 수 있겠어요. 그
래서 후배, 동생으로 돌아 가고 싶었지."
"그래서 좋던?"
"누나가 이렇게 나올 줄 몰랐지."
"헛! 일곱살 꼬마도 네 생각대론 안될거다.. 후우.... 커피나 한 잔 끓여 봐."
"이 꽃은?"
"책 상위에 놔두면 되잖아."
"아아..."
"보면 볼 수록 바보같니?"
씨.
누나와 오랜 시간 얘기를 했다. 누나는 갈 생각을 않고 나를 타이르 듯 자기 생
각을 말했고 나는 누나 말에 동의를 했다.
"차라리 헤어지자."
"에? 왜 헤어져?"
"너 이러면 나 지친다?"
"그래 지치게 되어 있다니까."
"나하고 진짜 헤어지고 싶어?"
"싫지. 난 누나하고 살고 싶다니까."
"그런데 왜 안좋은 쪽으로만 생각 해?"
"불안하니까."
"지금까지 내 말 어떻게 들었어?"
"잘."
"지금 장난하니?"
"아니."
"다시 말해?"
"진짜 변하지 않을까?"
"변해도 그건 나중이야."
"그래도 변할 수 있다는 말이잖아."
"안 변한다 했잖아."
"변하면?"
"야! 진짜 차이고 싶어?"
"아니. 그 내 마음 알았다고 협박조로 말하지 마요."
"현재가 싫지 않은데 왜 어둔 미래를 생각 해?"
"철없는 행복은 어이없는 미래를 가져오곤 하지."
"말이나 못하면..."
"누나 집에 안 가?"
"여기서 자고 갈거야."
"엉?"
저 얘기가 나오기 까지 무슨 말을 했는지도 밝혀야 겠지. 누나에게 찻 잔을 건
네고 나는 책상 의자에 앉았고 누나는 침대에 앉았다. 그때부터 누나는 내게 자
기 마음을 털어 놓기 시작했었다. 나도 내 생각들을 얘기했고 분위기는 예전으
로 돌아 갔었다.
누나는 찻 잔을 받고 한 참 동안은 아무말 없이 내 방과 나를 번갈아 쳐다 보았
었다. 벽에는 예전 대학로에서 그렸던 누나의 초상화가 걸려 있고 조 패긴 했어
도 침대 위에는 누나가 준 인형들이 그대로 있었다. 그게 뭐 어쨌다는 거지?
"너 마음 변한 거 없지?"
"뭘요?"
"나 좋아하는 마음."
"응."
"그건 참 자연스럽게 대답하네?"
"좋아하니까. 헤헤, 나 누나 사랑한다니까요."
"허! 고맙다."
고맙다는 말은 내가 싫지 않다는 말, 하긴 어색한 사이가 된 건 순전히 내 탓이
지.
"누나는 변한 거 같애."
"내가 뭘 변해?"
"승주 오자 마자 서울서 학교 다녔고 내게 소홀했잖아요."
"내 그럴 줄 알았어. 혹시나 했는데..."
"내 속이 아무리 좁아도 승주형 만난다는 것까진 이해할 수 있었어. 근데 왜 내
게 비밀로 했냐 말이야."
"니가 그렇게 만들었어."
"그렇다니까. 내가 그것 때문에 의처증 증세가 있지나 않나 고민했어요. 그게
싫었어. 내 자신이 말이야."
"참 멀리까지 생각한다. 서울서 등,하교한 건 아빠 약국 때문이었지 승주 때문
이 아니었어."
"변명하지 마요."
"야이, 속 좁은 놈아."
"그래 나 속 좁은 놈 맞다니까요."
"쩝, 바로 동의해 버리네. 너네 한의사 집안이지."
"응."
"학기 초에 무슨 문제 없었니?"
"울 아버지는 모르겠는데 내 동생은 약대생하고 막 싸우더라."
"우리 아빠는 너네 아버님처럼 태연하시지 않았거든."
"무슨 말이야?"
"그 문제 때문에 약국 비울 일이 많았단 말이야. 나 약사 자격증 딴 거 알지?"
"응."
"나 울 아빠 약국에 임시 고용됐었다 됐니?"
"승주와는 상관없었던거야?"
"거기서 승주가 왜 나와."
누나를 물끄러미 쳐다 보았다. 누나는 말똥히 날 쳐다 보고 있었다. 그런 상황
에선 뭔가 찌릿한 게 있다. 살며시 다가가 키스하면 백발백중이다. 영화에서 분
명히 그랬다. 근데 왜 내 입가는 이렇게 히죽되는 걸까. 에쒸, 분위기 망쳤다.
"하여튼 누나와 헤어지기 싫었는데 누나가 과민반응 보였어."
"니가 과민 반응 보였던 거라곤 생각 못하니?"
"매번 누나만 옳잖아. 내가 옳은 건 없어?"
"후, 니가 왜 그런 생각들을 하는 지 모르겠어. 너 삐친다고 내가 많이 화내
던?"
"그건 아니지만 쌓이잖아."
"나 밋밋한 거 싫어하는 거 알지? 티격태격 하는 게 오히려 나아. 연인 사인데
질투하고 따지는 게 하나도 없다 생각해 봐. 그게 연인 사이니?"
"난 너무 자주 삐쳤잖아."
"자주 아니야. 그리고 그건 쉽게 고칠 수 있어. 넌 날 아직 못 믿고 불안해 하
고 있어. 그러지 않으면 그냥 고쳐지는 거야."
"누나가 그렇게 만든것도 있어요."
"고친다고 했잖아."
"어떻게?"
"잘 몰라. 하지만 사랑하는 사이라면 분명 자기도 모르게 고쳐질 거야."
"하긴 조금씩 달라지긴 하더라."
"내 마음 지금도 여전해."
"뭘?"
"나 너 사랑한다 말이야."
응? 저 여자가 저렇게 사랑 고백한 적은 없는데... 내가 무슨 매력이 있다고 저
럴까?
"그 홀로 자라 내가 친동생처럼 느껴져서 그런 거 아냐? 착각하는 걸수도 있
어."
"내가 어린 애니?"
"진짜 날 사랑해요?"
"난 너 없는 미래를 생각하지 못해. 지금은 그래. 근데 넌 아닌거 같애."
"내 마음을 어떻게 알아요?"
"나하고 헤어지려고 했잖아."
"헤어지려고 했던 게 아니라 차이지 않으려고 후배로 돌아가려 했지."
"그게 그거지. 나 대학원 졸업하면 결혼 할거야. 후배로 돌아가면 헤어지는 거
지."
"보수적이네. 후배는 말이지 남자, 여자가 없는거야. 결혼해도 충분히 만날 수
있어."
"칫, 난 내 옆에 사랑하는 사람 있음 딴 사람 안 보여."
"웃기지 마요. 예전 승수 좋아한다면서 여러 남자 만나고 다녔잖아."
"야!"
할 말 없으면 소리부터 지르고 있어.
"누나."
"왜?"
"나하고 결혼할 생각까지 하고 있어요?"
"응."
"참 철없는 여자네. 내가 뭐라고 결혼을 생각해요. 나 학생이고 대학원 나와도
그냥 평범한 회사원이야."
"그게 뭐 어때서?"
"철든 여자라면 말이지, 지금의 내게 결혼할 마음은 생기지 않을거야. 나 봐
요, 내가 무슨 사회 생활에 잘 적응할 사람처럼 보여요? 너무 철없고 어려보이잖
아."
"너 나 속상해 하라고 그렇게 말하는거지?"
"아주 나중이면 모르겠는데 우린 지금 결혼 얘기 하고 할 입장이 아니야. 아니
다 누나는 모르겠는데 난 아직 아니야. 나중에 내가 철이 들고 현실에 대해 뭔
가 깨달은 게 있을 때 그때도 누나가 내 곁에 있으면 그땐 생각해 보지요."
"철 드는게 뭔대? 남을 생각한다면서 사람보단 그 뒷 배경을 따지고 마음보다
편안 삶이 더 가치있어 사랑은 뒷 전으로 밀쳐 버리는 거? 사람을 이용하고 정
에 얽메이기 보다는 합리적이라는 핑계로 내게 덕이 되는 지 따지고 그러는 거?
가졌던 꿈 하나씩 버려가며 일이 있는 현실에 지쳐 가는 거? 돈? 그걸 제일 가
치 기준으로 섬기는 삶? 자기 기준에 맞지 않는다고 철 없다고 몰아 세우는 거?
그게 철 드는 거라면 난 사양하겠어. 나도 철 없긴 마찬가지야. 하지만 난 철들
고 싶다는 생각이 많지 않아."
"철 들어야 돼. 사회 생활은 학생때와는 달리 쉽지 않을거야."
"서글플 것 같아. 너 재밌게 살고 싶지? 네 미래를 누구에게 의지한다는 생각
않지? 부모님? 조금 의지 할 수 있어. 철 들었다는 다른 사람들은 안 그런가? 그
렇지만 우리가 부모님에게 끌려 가며 사는 건 아니잖아. 그러면 되지 않아?"
"지금은 이래도 누나도 시집 갈 때 쯤 되면 막 따질 걸. 정희 누나 봐요. 결국
은 선 봐서 괜찮을 것 같다는 이유로 시집 간대잖아. 괜찮다는 게 뭐겠어."
"난 정희가 아니야."
"에이, 누나 부모님에게 내가 무슨 ... 나 같아도 반대하겠다. 우쒸, 왜 그러
는 거야?"
"니가 어때서? 음..."
뭘 말할려고 그렇게 뜸을 들이며 생각하냐.
"누나 무남독녀야. 나 같은 놈에게 주긴 분명 아까울거야."
"내가 데리고 살면 되지."
"내가 물건이냐? 인생에서 부모님을 제외시킬 순 없어요."
"그건 그래. 난 우리 부모님에게 친 아들처럼 여겨질 수 있는 사람 만났으면 좋
겠어."
"하하, 내가 그건 할 수 있지."
"치. 그래 너 사람에게 모질고 나쁜 짓 할 놈은 아니더라. 정이 있어."
"그럼, 나 정 빼면 시체지. 하지만 나는 우리 부모님 모시고 살 건디."
"재밌겠다."
"뭐야? 이거 진짜 철없는 아가씨네."
"그래 나도 너만큼 철이 없어. 그러니까 너 철없다고 자책하지마."
"그런가?"
"그럼. 너 잘난 놈이야. 날 어렵게 생각할 필요 없어. 내가 왜 널 차니?"
"응. 생각해 보니 나 못난 놈 아니다."
"그렇지? 그러니까 제발 어줍잖게 멀리 보지 말고 현재 우리가 사랑하면 미래
도 사랑하고 있을거라 생각해."
"그래도 누나 시집갈 때 쯤엔 차일 거 같아."
"야!"
"변할거야."
"안 변해."
"아니야 변할거야. 그러면 내가 너무 비참해져."
"너 도대체 뭐니? 설사 그렇다고 해도 지금 이러는 거 이상하다고 생각 안해?"
"이상해."
"현재에 충실 해. 헤어진다해도 그건 그 때 일이야. 지금은 그냥 좋은거야. 알
았어?"
"헤어지는 데 지금 어떻게 그냥 좋냐."
"왜 헤어져? 말꼬리 잡고 늘어 질래?"
"안 헤어질까?"
"지금 좋은 데 왜 헤어지니? 안 헤어지도록 노력해야지."
"그 어쩔 수 없이 헤어지는 남,녀가 한 둘이니?"
"우린 어쩔 수 없는게 존재하지 않아."
"많다니까. 누나가 연상이고 승주형도 있고..."
"야! 승주 얘기는 하지 마."
"알았어요. 그리고 첫사랑은 이루어지지 않는거야."
"첫사랑? 너 정희가 첫사랑이잖아."
"응."
"나 승주가 첫사랑이고..."
"그렇지."
"근데 뭐?"
"첫사랑이 옆에 있으면 또 이루어지지 않지."
"이게 진짜. 너 자꾸 안되는 쪽으로만 생각할래?"
"누나하고 살면 참 행복할 것 같거든?"
"응. 그렇지 그지?"
"근데 참 철없이 살거 같애."
"그게 뭐 어때서?"
"철들면 깨져."
"야!"
"누나 분명 변할거야."
"너어?"
"왜?"
"차라리 헤어지자."
이렇게 된 거다.
누나는 진짜 집에 갈 생각을 안 했다. 결국 내 방에서 자기로 했다. 난 어디서
자라고
씨.
"이거 저 번에 서리하고 남은 건데 같이 노나 먹어요."
"몇 개나 했었니?"
"세 개."
"겨우?"
"나 혼자였으니까."
"나 없으니까 당장 표나지?"
"응."
"전화 받고 얼마나 웃었는 줄 아니? 그 시간에 전화할 사람 너 밖에 더 있니?
그리고 수화기 들고 다른 사람하고 얘기까지 해? 치. 몰래 끊으면 모를 줄 알았
어?"
"아, 그때 내가 수화기 든 채로 얘기 했다 참."
"좋아하는 마음은 그대론데 왜 바꿀려고 해."
"에이 쒸."
"이게 더 커잖아."
"똑바로 잘랐어야지."
"누나께 더 크다니까."
"지나가는 사람에게 물어 볼래?"
"알 수 세어 봐."
"니가 많으면 어떡할래?"
"모자라는 만큼 떼어 줄게."
진짜 저게 25살 아가씨인지 의심이 갔다. 강냉이 삶아서 반으로 나눠서 알 세
어 가며 누가 많은 지 결국 따져 봤다.
"봐, 누나께 다섯 알이나 더 많이 박혔잖아."
"이상하네. 내가 봤을 땐 네께 더 커 보이던데."
"남의 떡이 커 보이는거야."
"남의 떡? 니가 남의 떡이 되면 참 아깝겠다."
"내가 떡이냐?"
"앞으론 그러지 마."
"그건 모르지."
"이게 진짜."
새벽이 깊었다. 나 누나하고 잤다. 이상한 쪽으로 상상하지 마요. 여행가서도
술 먹고 같은 방 썼지만 아무일 없었는데... 남자들, 그게 불가능하다고 생각하
는 건 왜 일까? 우린 철이 없어 그냥 잤어요. 본능이 강하면 이성을 누른다지만
누나는 날 어린아이처럼 만드는 재능이 있어서요. 충분히 그냥 잘 수 있어요. 안
되나? 누나는 침대에서 잤고 난 방바닥에서 잤지요.
그래 자다가 벌떡 일어나 조심스럽게 가슴 한 번 찔러 보긴 했다. 나는 다른
건 몰라도 누나 가슴은 꼭 한 번 만져 보고 싶다. 누나 가슴은 참 예쁘다. 어릴
적 엄마 젓가슴 같은 느낌이 누나에게 있다. 나는 누나를 사랑한다.
계속.
이거 끝나면 바로 고스트 연재 들어 갑니다. 제가 요즘 작가 학원 다닌다고 그런
대로 책도 보고 하거든요. 지레 겁 먹은 거 맞습니다. 예전 같으면 이러지 않을
거에요. 저처럼 이렇게 글 쓰는 사람 없더군요. 물론 제가 기존 작가와 비교하
는 건 무리가 있지만 제 글은 너무 가벼워 보이더라구요.
제 친구는 그게 글이니 그러면서 제 마음을 좀 아프게도 했어요. 그래서 빨리
끝내고 싶었습니다. 잘 안되네요.
연하가 어때서 68회
내 잘못이다. 괜히 투정 부린 것 같다. 누나하고 다시 친해졌지만 내 곁에 누나
가 살지 않는다.
쩝, 티비는 나 주고 가지... 밤이 되면 심심하다. 어디 차 한잔 얻어 먹으며 시
간 때울 때가 없다.
동엽이 집은 가기 싫다.
내 대학 생활 마지막 시험이 다가 온다. 졸업 작품과 논문은 이미 심사를 마친
상태다. 기말 고사? 듣는 학점도 얼마 되지 않는데 전혀 신경 쓰이지 않는다.
저녁 무렵에 약대로 찾아 가 보았다. 저 배군 새끼 여전히 껍죽되네. 둘이 같
이 나오길래 험한 인상으로 다가가 배군을 째려 보고는 누나 손을 잡아 채어 왔
다.
"저 가볼게요. 내일 봐요."
"그래 잘 들어 가. 철수군도..."
빠큐다 새꺄.
"왠일이야?"
"그렇게 물으면 안돼지."
"그럼?"
"다시 친해졌으니까 반가워, 이래야지."
"칫, 똑같애. 변한 거 없어."
"응?"
"배선배에게 좀 친한 모습 보여 봐."
누나와 차 앞으로 갔다. 자동차와 누나를 번갈아 쳐다 보았다. 하하, 참 철없
는 아가씨다. 하긴 누나는 무남독녀 귀한 딸이지.
"내가 기사 해 줄게."
"후후. 밤에 나 없으니까 심심하지?"
"별로. 나도 곧 대학원생이야."
"심심하지?"
"응, 누나 다시 와 살면 안돼나?"
"그러길래 말은 함부로 하는 게 아냐. 너 방 뺀다는 말은 비수였어."
"그래? 그렇다고 바로 방을 빼버리나?"
"아빠가 집에서 다니래. 거절하기 싫었어."
"차는?"
"새 차 같지?"
"새 차 아냐?"
"새 차야."
"이게 놀리나 지금."
"누나보고 이게?"
"오늘 내가 운전해 가면 안될까?"
"목요일인데 서울 가게?"
"내일 수업 없어요. 그리고 이 번주 일요일 기사 시험도 봐야 하거든. 일찍 올
라 가려구요."
"기사 시험 본다고 기사 해보고 싶은거야?"
얘 이거 바보 아냐? 한심 스럽단 시선으로 누나를 아래 위로 쳐다 보았다.
"불안한데..."
"내가 면허증 언제 딴 줄 알잖아. 나 베스트 드라이버야."
불안하다더니 잘 자네. 우리 집 앞에 와서 둘 다 내렸다. 누나는 운전석으로 나
는 집으로.
"조심해서 가요."
"알았어. 시험 잘 봐."
"엿 사줘야지."
"연락해."
"참, 우리 아버지가 누나 한 번 데려 오라던데..."
"엉? 너네 집에?"
"네."
"왜?"
"모르지."
"오늘 갈까?"
"오늘은 안돼지. 말씀 먼저 드려 놔야지."
"일요일날 갈까? 너 시험 언제 끝나?"
"오전 중으로 끝나요."
"그럼 일요일에 가자."
"괜찮아요?"
"안 괜찮을게 뭐 있어."
"어색하지 않을까?"
"후후, 너네 아버님 전화상으로 이미 친숙 해."
"그래도..."
시간은 잘 갔다. 아버지께 누나를 일요일에 한 번 데려와도 될까,라고 말씀드렸
다.
"근데 아버지."
"왜?"
"왜 데려 오라고 하시는거에요?"
"혹시나 해서."
"혹시라니요?"
"나 그리 꽉 막힌 사람 아니다. 남,녀 교제에 대해서 신세대적인 사고를 가지
고 있지."
"그런데요?"
"걔가 연상이지?"
"네."
"걔가 우리집에 전화하기 시작한지가 2년이 훨씬 넘었어."
"그래서요?"
"걔 말고 너 찾는 여자 없었어."
"에이, 설마요."
"없었어 임마."
"정희 누나도 몇 번 했는데요."
"따지지마 임마. 하여튼 예사롭지가 않아."
"뭐가요?"
"걔가 우리집 며느리가 될 것 같은 예감."
"예? 저 아직 대학 졸업도 안했습니다."
"녀석아, 너 때문에 이러는 거 아니야. 걔 이제 26살이야. 뺏기기 싫을 정도면
잡아야지."
허허, 내가 왜 미리 생각하고 멀리 미래의 일에 대해 잡생각이 많은지 이제 알
았다. 아버지 닮아서다.
"설마, 누나 왔을 때 그런 얘기를..."
"나도 눈치 없이 이런 저런 말 막 할 사람 아니다. 그냥 어떤지만 볼거야. 니
가 고급 술 가져가도 별 말 안한 건..."
"제 용돈에서 제하셨잖아요."
"쓰으? 아버지 말하는데 끼어 들기는... 이 번 일요일에?"
"네."
일요일 날 시험 보고 누나 데리고 들어 갔는데... 세상에나 이럴 수가...
일요일 날 시험 보고 누나가 날 데리러 왔었다.
"자 엿!"
어디서 샀는지 막대 엿 하나를 던져 주었다. 시험 다 본 사람 엿 주는 심보는
도대체 뭘까? 누나는 회검정 바지 정장에 하얀 셔츠를 입고 머리를 자연스럽게
검정으로 물들이고 화장도 옅게 한 상태였다. 손에는 선물 꾸러미까지 들고 있
다.
"손에 든 것은 뭐에요?"
"이거? 곧 겨울이잖니. 아버님, 어머님 목도리하고 다과야."
"에?"
"잘 보여야지. 내 옷차림 어때? 이 차림이 어른들에게 가장 좋은 인상을 주는
복장이래."
허허, 완전 여우다.
"아버님에겐 말씀 드리고 나오는 거에요?"
"그럼."
"아무말 안하시던가요?"
"잘 다녀 오라고 하던데?"
"철수 집 간다고 한 거에요?"
"응."
"우리 아버지가 뭐 때문에 오라고 한 줄 모르죠?"
"대충 알아. 나 괜찮은지 보시려는 거 아냐."
이 여자가 진짜 날 결혼 상대로 생각하는 거 아냐? 잠시 동엽이와 승헌이가 생
각이 났다. 바보 같은 놈들... 그 놈들하고 난 동년배다. 사고 차이도 별로 없
다. 아직 이러기엔 한참 이른데... 에이 모르겠다.
누나에게 한 번 놀랬다. 집에 가서 더 놀랬다. 둘이서 아니 셋이서 짰나 싶었
다. 우리 아버지 어머니 모두 한 복으로 갈아 입고 계셨다. 명절이나 되어야 입
는 거창한 한 복. 거기다 안 방이 깨끗하게 치워져 있었고 다과상까지 차려 놓
고 기다리고 있었다. 수희는 보이지 않는다. 아무래도 쫓아 낸거 같다. 내 친구
들 왔을 때하고는 달라도 너무 다르다.
누나는 쑥스러워 했다. 처음이니까 할 수 없지. 우리 집이 가까워 질 수록 많
이 떨기 시작하더니 우리 부모님을 보고는 한 동안 어쩔 줄 몰라 했다. 우리 부
모님, 문 앞에서 누나를 맞았다. 당황스러울 수 밖에...
안 방에 들어 가서 누나는 정식으로 인사를 올렸다. 하마터면 절까지 할 뻔 했
다.
"거기 않게나."
"네."
허허, 거의 꺼내 놓지 않는 방석. 어머니는 아버지를 보고 고개를 끄덕 거렸
다. 나는 말없이 다과상 앞에 앉아 과자만 집어 먹었다. 별 할 말 없었다. 어머
니도 별 말씀 않으셨다. 아버지하고 은정이만 주로 얘기했다.
"우리 철수가 좋아하는 누나라고 해서..."
"네."
"우리 철수하고 사귀는 거 맞나?"
"네?"
"아무리 연상이지만 내가 보기에 친구 사이는 아닌 거 같은데..."
"네에."
"둘이 사귀는 거지?"
"네."
"음. 참하게 생겼구만. 안 웃어도 되겠어."
"네?"
"누가 예쁘냐고 물으면 웃지말고 네, 그래."
누나가 히죽 웃는다. 우리 아버지도 참.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인자하신 모습이네요."
"하하. 철수가 나만큼만 생겼어도 참... 그래 아버님이 약사시고 어머니는 의사
시라고?"
"네."
"아버지가 어디 나오셨나?"
"학교 말씀인가요? 경희대 나오셨습니다."
"그래? 우리 마누라도 거기 나왔는데..."
"당신은 거기 안 나와쑤?"
"그러네. 하하, 여기서 동문을 만날 줄이야. 연세가?"
아직 안 만났는데...
"곧 쉰 둘 되시는데요."
"그래? 그럼 내 마누라 후배네."
"당신 후배도 되겠네요."
"그러네. 우리 마누라는 나하고 대학 때 처음 만났는데 나 만난 이후로 그냥 놀
았어."
아, 우리 아버지 저런 말을 해 하시나. 우리 엄마 무안하게 우스시더이다.
"나이 많은 사람하고 얘기하려니까 답답하지?"
"아니에요. 아직 말 버릇이 다듬어지지 않아서요... 솔직히 말씀드려도 될까
요?"
"그래. 자네 요즘 애들 같지 않게 예의가 바른 것 같네."
외할아버지 영향인가? 아버지 속으시면 안되옵니다.
"재밌으시네요."
"허허. 내가 좀 유머 감각이 있지."
얼마 지나지 않아 울 아버지하고 누나는 제법 친해진 모습으로 변했다. 아버지
가 껄껄 대시고 누나도 호호 웃었다.
"그럼요. 철수가 아버님만큼만 되도 바로 시집가죠."
"우리 마누라는 복 받았다니까."
저래도 되나?
누나는 그리 오래 있지는 않았다. 내가 내 쫓았다. 무슨 얘기까지 나올까 두려
웠다.
우리 아버지 누나가 마음에 드셨나 보다. 누나 갈 때 아주 비싼 보약 꾸러미
두 개를 누나에게 떡 안겼다.
"이건."
"아버지, 어머니 드리게."
"아버지, 그거 내일 배달해야..."
우리 어머니가 내 허리를 쿡 찔렀다.
"내일 다시 만들면 돼. 그거 아버님 나이에 맞는 보약이니까 괜찮을거야."
약사, 의사 부모님들이 보약 받아 좋아하실까? 왜 그러냐고 따지실텐데... 이해
가 안가네. 누나 부모님이 몇 번 보지도 못한 날 대단케 생각지 않을텐데. 우리
아버지가 하시는 행동은 분명 오버하는 것이다. 그러나, 누나는 마냥 좋아하고
있다.
"안녕히 계세요."
"그래, 다음에는 저녁 한 번 살테니까 놀러 와."
"네. 기대하겠습니다."
누나가 돌아 가고 아버지가 날 불렀다.
"괜찮죠?"
"너 생각보다 능력있네? 약사라고 했지?"
"자격증은 땄지만 원생인데요."
"약국 차려주면 너 먹여 살릴 수도 있겠다."
"제가 못 미더우십니까?"
"연상만 아니면..."
"네?"
"좀 아깝다."
이상하네.
후후, 철수와 제법 긴 시간 삐친 척 하느라 마음 고생이 좀 있었지만 다시 친
해 질 줄 믿고 있었어요. 녀석이 날 좋아한다는 건 표정이나 행동에 바로 나타나
거든요.
철수 아버님이 부르셔서 철수 집에 갔다 왔어요. 부모님께도 말씀드렸는데 아버
지는 좀 민감하게 반응하시더군요.
"그 집안 왜 그러냐?"
"철수랑 저 많이 친해요."
"그렇다고 널 왜 불러. 갈거냐?"
"네."
"잘 생각해서 행동해라. 가더라도 쉽게 보이지 마."
"쉽게 보이다니요?"
"쩝, 그 집안 착각하고 그러는 거 아냐?"
"흠, 아빠. 철수 좋은 애에요."
"친구로서는 그렇겠지. 어휴..."
아직은 긴가민가 하셔서 이렇지만 나중에 혹시 아빠를 설득해야 된다면 조금 힘
이 들겠구나 싶어요.
엄마는 의외로 절 응원해 주시더라구요.
"네 아빠가 나와 결혼할 때 맘 고생이 심했어. 참 미안했었지. 흠... 나는 내
딸이 결혼하는 데 있어 많이 따지지 않을거다."
"엄마 너무 앞서 가지 마."
"대충 부모들 심리는 비슷한거야. 왜 불렀겠니?"
"걔는 아직 어린앤데?"
"걔 인상이 참 좋아보이더라. 나는 네가 부려 먹을 수 있는 사람 만났으면 좋겠
어. 괜히 똑똑한 사람 만나서 기 펴지 못하고 사는 건 원치 않아."
"치..."
"아주 매정한 사람이거나 아주 건방져 보이는 사람은 난 반대야. 그리고 모르
지 또 따질런지. 하지만 철수란 애는 그런데로 괜찮았어."
"엄마 왜 그렇게 앞서 가?"
"응? 그냥 이제 내 딸이 결혼할 때가 멀지 않았다 생각이 드니까.."
"아직 멀었어."
"흠, 나와 네 아빠는 학교 다닐 때 만났어. 나 졸업하기 전에 식 올린 거 알잖
아. 너네 아빠도 마찬가지였어. 후후. 외할아버지가 지금은 네 아빠를 좋아하시
지만 그땐 참 못마땅해 하셨다."
"알고 있어요."
엄마가 내가 입고 갈 옷을 정해 주셨고, 다과도 손수 만들어 주셨어요. 그리고
백화점에서 고급 목도리도 사 오셨더군요. 포장까지 해서 말입니다. 후후, 나도
모르겠습니다.
보약 들고 들어 갔더니 아빠가 이런 거 왜 받아 오냐고 그러더군요. 저 번에는
잘 드셨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