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이 좋으면 다 좋다.’ 라는 말을 저는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과정도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죠.
그러나 이번 일을 겪고나서 끝이 좋지 않으면 과정에 대해서도 좋았던 기억보다 원망과 후회가 남을 수 있다는 걸 배웠습니다.
모두들 놀랐고 여러 분에게 걱정을 끼쳤지만 상처는 아물어 갈 것이고, 어쩌면 이 상처가 아물 때쯤이면 다시금 그 산이 그리워 질 지도 모르겠습니다.
6월 19일 첫째 날...
두 세달 간을 산에 가지 못하고 몸만 불린 채 한두 번 북한산 연습으로 마감한 산행 준비가 마음을 무겁게 한다.
일행은 모두 23명, 가이드 2명, 삼척대학교 산악회5명, 대구 K2 산악회 8명, 개인 2명, 그리고 우리 6명이다. 산에서 만난 사람들답게 끝까지 한마디 잡음없이 서로에 대한 배려와 예의를 잊지않고 함께 지냈었다, 여자는 7명 이다.
도야마 공항, 소도시 공항답게 조용하고 한적하다.
버스를 타고 마지막 날 묶게 될 히라유의 호텔로 장소를 이동한다. 지나가는 풍경은 집의 형태와 산의 나무가 조금 다를 뿐 우리네 풍경과 크게 다를 바 없다. 일본은 도농 간 소득 격차가 거의 없고 따라서 교육 수준도 차이가 없다는 회장님 말씀이 오히려 감동적이다.
예비용 건전지도 두고 가라는 가이드의 말에 모두 긴장한다. 최소한의 물품만 챙기고서 나머지 짐을 남겨 놓은 채 오늘의 산행이 시작되는 가미고지로 향한다.
가미고지부터 두 시간 정도 평탄한 길을 산책하듯이 걷는다. 고어텍스 신발을 신고 우의를 입고 줄줄이 서서 행진을 하는 모습은 마치 아이들 병정놀이 같다.
빽빽이 나무들이 들어선 숲길이 아름답다. 그런데 이 풍경은 어딘가 낯이 익다, 유화 그림 속에서 많이 보던 풍경이다. 쭉쭉 뻗은 나무와 줄기를 휘감은 이끼들, 나뭇잎 사이로 언뜻언뜻 보이는 하늘과 비집고 들어오는 햇살... 필경 우리의 숲은 아니려니 했더니 아마도 이 숲을 그린 것 같다.
도쿠사와 롯지에 도착한다. 우리네 숙소가 콘도와 민박촌이라면 이곳의 롯지는 한적한 숲 속에 가만히 들어 앉아있는 한 채의 전원주택 같은 느낌을 준다. 머리에 수건을 두른 젊은 이가 우리를 반겨준다. 나중에 해나에게 얘기했다. “일본 만화에서 본 그대로야, 정말로 남자가 머리에 수건을 쓰고 있어.” “정말?”
6월 30일 둘째날...
눈을 뜨기도 전에 빗소리가 먼저 들린다. 허리 께 있는 창 너머로 고요하고 우아한 숲이 아침 인사를 건넨다. 지붕 때문에 손이 닿을 순 없지만 키를 마주하고 서로 마주보는 숲은 참으로 몽환적이다. 이런 곳에서 살고싶다는 열망은 얼마나 오랜 동안의 나의 소망이었는지...
한참 잊고 지내던 간절했던 어린 날의 열정을 다시 만난다.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아이들과 꼭 함께 와보고 싶은 숲이다.
산장에서 싸준 도시락을 챙겨 넣고 일곱시에 길을 떠난다. 어제와 비슷한 숲길을 3시간 이상 더 걷는다. 백담사 가는 길을 전날과 오늘 다섯 시간 이상 걷는다고 생각하면 되겠다. 감동적인 것은 걸어가는 내내 한 대의 차도 만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산장에서 공급받는 물량도 만만치 않을텐데 아마도 밤을 이용하는 것이리라 짐작할 뿐이다.
걸어온 길은 그 긴 시간에도 불구하고 고도 300m 정도를 높였을 뿐이다.
이제부터 1200m는 약 60도 각도(숫자에 약한 내게는 그 정도로 보였는데...)의 설산을 올라쳐야 한다. 고개를 옆으로 돌리면 그곳은 천길 낭떠러지, 더구나 눈길이다. 고소공포증이 있는 회장님이 염려스럽지만 각자 묵묵히 걸어가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이 없다.
표지판을 찾지못해 가끔 헤매기도 하면서 지그재그로 설계를 차근차근 밟아간다. 드디어 야리가다케 산장에 도착, 오전과 오후의 긴장감이 그렇게 차이나는 하루를 마감한다.
7월 1일 셋째날...
점심 먹을 때까지는 완만하다는 가이드의 말에 안심하며 출발한다. 그러나 발걸음마다 부숴져 내리는 자갈길과 너덜바위 길을 무난하다고 표현하는 산악인의 엄청난 센스라니!
점심 이후로는 3000m 고지에 있는 뾰족 바위산 다섯 개를 오르락내리락 다섯 시간 이상 행군한다. 의상봉과 족두리봉을 일곱 시간 정도 오르락내리락 한다고 보면 되겠다. 특히 낙석의 위험이 있어 더욱 긴장하게 만드는 코스였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냥 선배님은 손의 감각을 살리기 위해 반장갑을 끼신 관계로 손가락 끝을 많이 다치셨다.
드디어 호다카다케 산장에 도착한다. 바위 위에 올려져 있어 신비하고 환상적이고 때론 가까워졌다 다시 멀어지는 신기루 현상까지 연출했던 곳이다. (고도가 높은 곳에서는 산소가 부족해 물체가 실제 거리보다 가깝게 보인다고 한다.)
고산증으로 이틀째 제대로 잠들지 못한 이밤에 내가 생각한 글의 제목은 ‘그 산이 그리워 눈물납니다’ 였다. 제대로 된 등산을 처음 하는 것 같은 뿌듯함과 하루에도 몇 번씩 변화하는 자연과 극도로 끌어올리는 긴장감에 취했었는지, 온몸으로 느끼는 희열을 만끽했었다.
7월 2일 넷째날...
“두 시간 반 코스인데 글리세이딩하면 한 시간 반만에도 끝나겠어” 아침부터 가이드와 산악인들의 대화가 수선스럽다. 위험한 길은 없다는 가이드의 말을 믿고 무작정 문을 나선다. 느닷없이 눈의 계곡이 시작된다. 설계를 올라올 때 느꼈던 막연한 불안감이 현실이 된다, 내려가는 길만은 눈길이지 않기를 바랬는데... 일부는 눈길로 시작하고 일부는 바위로 시작한다. 비가 오고 우의를 입고 있는 상태라 바위를 지나가는 게 여간 어렵지 않다. 계곡 끝에 산장이 보인다. 가이드는 이미 눈 위로 올라서 있고 가이드 발자국을 한 발자국씩 따라가던 우리는 어미를 잃은 고아마냥 힘들기만 하다. 어차피 눈길을 통과할 수밖에 없다.
내려선 후 자세를 바로 잡다 몸이 중심을 잃고 미끄러진다. 순식간의 일이다. 스틱으로 눈길을 찍어본다. 소용이 없다. 우의가 눈을 가려온다. 우의를 벗어 던진다. 눈을 들어 본 하늘이 참으로 처연하다. 몸이 바위에 튕겨져 오히려 빠른 속도로 미끄러지는 것 같다. 이대로 계속 간다면 산장 근처 완만지대에서 멈출 수 있을까, 계곡으로 떨어질까, 아니면 산장 지붕 위로 떨어지게 될까. 머릿속 계산에 답이 없다. 두 팔로 얼굴을 감싼다, 머리를 보호하기 위해서다. 다시 바위에 튕겨지던 몸이 어느 사이 두 세 바퀴 구르다 멈춘다. ‘이제 끝난 건가?’ 일어나서 관절들을 돌려본다. 목과 손목과 다리. 특별한 골절이 있는 것 같진 않다. 고개를 들어보니 급히 내려오는 가이드가 보인다. 먼저 내려 와 있던 삼척 대학교 산악인 들도 오고있다. 손을 한 번 흔들어 주고 나서 물을 꺼내 마신다. 손놀림도 자연스럽고 특별한 피맛도 느껴지지 않는다. 크게 다친 곳은 없는 것 같다. 가이드는 내 얼굴을 살펴보고 연신 두 번이나 힘껏 나를 가슴에 안는다. 그도 놀랐겠지.
가이드의 등 뒤로 급히 내려오는 다른 한 사람이 보인다. 그냥 선배님이시다. 너무 놀라고 또한 화가 난다. 눈길에 익숙치 않으신 분이 저리 급하게 내려오시다 미끄러지시면 어쩌려고.
나로 인해 긴장했던 마음이 풀어지면서 그냥 선배님도 미끄러지신다. 소름이 돋는다. 눈으로 선배님을 좇는다. 다행히 안으로 굽은 바위 쪽으로 미끄러지신다. 그러나 손으로 몸을 보호하시려다 손가락이 찢어지고 구르는 반동으로 다리를 바위에 세게 부딪히신다.
삼척대학교 산악회원들의 도움으로 무사히 눈길을 마감한다.
상처를 안고도 그 후 다섯 시간 이상을 걸어와야 했다. 올라갈 때의 아름다웠던 숲은 더이상 눈에 들어오지 않고 긴장을 놓치면 안 된다는 처연한 각오만이 우리를 지탱해 주었다. 말이 없는 행군... 마지막 축제 자리였어야 할 저녁 식사는 모두의 침묵속에 조용히 끝이 났다.
수요일 아침 출근길 차 안에서 갑자기 눈물이 흘렀습니다, 작은 흐느낌도 새어나오더군요.
살아 돌아온 안도감 때문인지 저로 인해 위험하셨던 선배님에 대한 죄송함 때문인지 이유는 알 수 없습니다.
아직도 가시지 않은 통증 때문인지 아직은 그 산이 그립지는 않지만 그러나 아마도 곧 그리워 지겠지요. 그리고 사랑의 열병을 앓는 소녀마냥 다시 떠나고 싶어질 지도...
이것이 새로 시작되는 사랑이라면, 마음에 거리낌이나 두려움 없이 번거로움 없이 받아들이고 싶군요. 온 몸으로 부딪혀 오길 바란다면 그또한 따라주지 못할 이유가 없지요. 그렇게 신세대식 사랑법으로 키워가고 싶군요, 이 사랑은...
“사랑하면 도전하라”
첫댓글 가상이가 그래도 먼저 잘썼네. 나는 어떡할까하고 자판만 정리를 하다가 사진을 받아서 올릴려고 작업중. 가상아, 이젠 좀 제대로 앉을 만하냐? 그날의 참상을 좀 찍어놨어야 하는데, 차마 보여줄 수가 없기에 내 머리 속에만 심었다. 그래도 이런 농담을 할 여유가 생긴 걸 보니 이젠 살았나? 에~휴. 몸 잘 추스려라.
정말 고생 많았다.동지들을 사지에 몰아넣고 난 아티틀란 호수,안티구아 등 편안하고 아늑한 관광 명소를 다녀와 굉장히 미안하다.해서 북알프스 팀의 글이 올라오기 전에는 과테말라의 과 자도 못 꺼내겠다 싶었다.뼈아픈 체험 때문일까.글이 깊어졌다.그래서 더 반갑다.
아주 재미(?) 있게 잘 읽었다.
성치 않은 몸으로 산행기까지 쓰느라 애썼다. 그리고 살아 돌아왔으니 무엇보다 감사한 일. 함께 다녀온 두 선배들 말마따나 안전한 산행의 소중함을 알았으니 성과가 전혀 없는 것도 아닌 듯^^...그런데 특히나 가상이 니는 이번 기회에 안전산행의 귀함을 더욱 더 깨단하지 않았을까?....아줌만 해나, 하람이의 '어머니'이자, 그 아이들의 또 하나의 '우주'일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