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조의 편에서 반대파와 맞서자
만인 앞에서 거센 모욕까지 감내
모친께 지극정성으로 孝 실천
정승임에도 한평생 검소한 삶 귀감

정창손(鄭昌孫·1402~1487)은 집현전 학사의 한 사람으로, 훈민정음 창제를 반대했다. 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효중(孝仲), 호는 동산(東山), 시호는 충정(忠貞)이다. 동래정씨(東萊鄭氏) 중추원사, 사후 의정부 영의정에 추증된 정흠지(鄭欽之)와 어머니 전주최씨의 아들로 태어났다. 전주최씨는 형조전서를 지낸 최병례(崔丙禮)의 딸이다. 정지(鄭持)의 딸 청풍군부인과 결혼했다. 형은 의정부 좌참찬을 지낸 정갑손(鄭甲孫)이다. 동래정씨는 조선시대 정승을 가장 많이 배출한 명문가문의 하나다.
그는 관료생활 중에도 서실을 열고 문인들을 가르쳐 문하에 서거정 등이 배출됐다. 박학강기(博學强記)하고 문장과 글씨에 능했다. 키가 크고 풍채가 준수하며 수염이 길어 배에까지 내려왔다고 한다. 1423년 생원시에 입격해 생원이 됐다.
계유정난과 세조 등극에 협력했고, 사위인 김질이 사육신과 함께 세조 제거에 가담한 것을 설득해 고변(告變)하게 했다. 김질은 독립운동가 백범 김구 선생의 종21대조가 된다. 정창손이 세조의 편에 가담한 것이 역사적으로는 큰 비난의 대상이 됐다. 특히 남효온과 김시습 등이 심하게 비난했으며, 노상에서 정창손의 행차를 만나면 만인들이 보는 앞에서 모욕을 줘도 감내해야만 했다.
정창손은 익대공신 2등에 녹훈됐고 1468년에는 남이의 옥사를 다스린 공로로 좌익공신이 됐으며, 1471년에는 성종의 즉위를 지지한 공로로 좌리공신 2등에 책록됐다. 관직은 영의정에 이르렀으며 세조에서 성종에 이르는 3대 조정에서 15년간 영의정을 역임했고, 사후 청백리에 녹훈됐다. 광해군과 인조 때의 청백리 이원익의 외가 선조이기도 하다.
정창손은 어머니가 90세의 고령이었다. 자신도 환갑을 바라보는 나이였지만 직접 어머니의 시중을 들며 지극정성으로 봉양해 세인이 감탄했다. 불철주야 아침저녁으로 어머니에게 문안하는 일을 폐하지 않았다. 조정에 알현(謁見)하러 가는 여가에도 반드시 관대(冠帶)를 갖추고 모친을 곁에서 모시며 시중을 들었다. 기쁜 얼굴로 즐겁게 해 드려 어머니가 활짝 한번 웃은 뒤에라야 물러나 와 사람들이 효성을 칭찬했다. 세조 역시 직접 찾아보거나 사람을 보내 어머니 최씨의 안부를 묻기도 했다.
세조의 각별한 신임을 얻었던 그는 1458년 어머니의 상을 당해 사직을 하자 세조는 1일간 조회를 정지하고 부의(賻儀)로 미두(米豆) 50석, 종이 100권과 관곽(棺槨)을 내렸다. 부인(夫人)들의 상사(喪事)로 인해 조회를 정지한 것은 특별한 사례로 화제가 됐다.
1486년은 그가 85세 되던 해인데 병석에 눕자 성종은 특별히 내의원 의관과 약물을 내려보내 진료하게 했다. 정승의 반열에 있었음에도 사치하지 않고 검소하게 생활해 명망이 높았다. 세종·문종·단종·세조·예종·성종 6명의 군주를 받들며 활동하다가 1487년 1월 27일 자택 정침에서 노환으로 사망했다. 성종은 백관의 귀감이 되는 청빈재상을 잃었다 하며 3일간 조회를 파하고, 후한 장례비를 내려 부의했다. 사후 그는 불천지위(不遷之位)의 은전(恩典)을 받았고 청백리에 녹선됐다. 바로 경기도 광주군 방이동(현 서울 송파구 방이동)에 매장됐다가 얼마 뒤 양평군 양서면 부용리로 이장했다.
세조의 편에 선 것은 명분에는 어긋날지라도 나라의 장래를 위해 불가피한 선택임을 평생의 멍에로 감내하면서도 재상까지 오른 청백리로서의 처신은 만세의 귀감이 된다.
<출처 : 국방일보 박희 선문대 교수·문학박사(한국한문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