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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의 의미1
내가 겪은 3․1 운동
오늘 여러분과 같이 삼일절을 지키게 돼서 감사합니다. 성경 읽고 말씀 드리기 전에 제가 지내 봤던 삼일절 얘기나 조금 하겠습니다. 실제 살아 있는 증인이니까. 여기 아마 그런 분 많지 않을 것 같습니다.
저는 삼일절을 평양에서 지냈습니다. 아까 소개하시던 분이 말씀하였지만, 제가 본래 난 데는 평안북도 서북 구석, 다시 더 갈 수 없는 아주 구석진 데 바닷가에 있는 조그만 동리입니다. 아주 외진 데지만, 그래서 또 좋은 점도 있었어요. 저는 그걸 아주 고맙게 생각합니다만, 나라가 망할 대로 망해도 망하는 줄도 몰랐으니까. 뭐 소식을 몰랐다는 것이 아니라, 지금 같으면 우리 나라의 정치를 어떻게 하느냐 하는 것이 시시콜콜히 알려져 아마 마음에 걱정을 아니 하는 사람이 없을 겁니다. 그런데 다행히 구석진 데 났어요.
더구나 평안도는 본래부터 상놈이라 그랬어. 사람으로 알지 않았습니다. 아마 고려 때까지는 안 그랬지요. 이조 때 들어와서 그런 줄 아는데, 원인을 알 수 없지요. 공부를 많이 한 선비라는 사람들도 다 당연한 걸로 알고 있었어요. 제가 난 곳은 더구나 바닷가, 농사도 하는 농어촌이니까 더 멸시를 받지요. 그러니 평안도에 뭐 양반이라는 사람이 있을 리가 있어요? 양반이 있다 해도 서울에 있다가 유배 생활을 하든지 그러기나 해서 와서 산 사람이지. 황해도까지도 그렇습니다만, 평안도가 더 그래요. 서북이라고 한꺼번에 넣어서, 서북 사람이라면 벼슬을 당초 주지 않았고, 과거도 아예 주지 않게끔 돼 있어요. 정주 같은 데는 더러 난 사람이 있지요. 그렇지만 다른 고을 치고는 아마 별로 출세한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 외진 데서 자라났는데 거기 어울리지 않게 어려서부터 교회에 갔어요. 그러고 평양 올라가 공부하게 됐어요. 나는 기독교에서 자라났기 때문에 우리 민족이라는 생각과 종교, 믿음이라는 것이 꽉 들어 있어요. 그런데 거기는 관립 학교인 만큼 대개 학생들이 그런 걸 몰라. 기독교가 뭔지 모르고, 남쪽에서 온 학생이 많고 하니까 십 분 나와 쉴 때마다 만나면 대개 말의 결론이란 게 “이젠 뭐 일본의 힘이 이렇게까지 왔으니까 확고 부동이고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없지. 독립은 아마 어렵겠고, 그저 우리도 공부나 해서 학문길로나 나가면 나가지.” 3․1 운동 일어나기 직전까지 그랬어요. 기독교 신앙과 민족주의 사상에서 자라난 나로서는 사람같이 보이지 않아요. 그럴 수가 어디 있나?
어려서부터 우리 동네에서도 싸움할 줄 모르는 애라고 이름이 났습니다. 감히 싸움할 줄 몰라요. 그러니 싸움은 못했지만 마음에 대단히 언짢게 생각을 하고 그랬는데, 하루는 가니까 상급생이라고 하는 사람이 “야, 들어가지 마! 들어가지 마”, 나와서 쉬다가 종을 땡땡 치면 들어가야 하는데 들어가지 말자 그래요. 왜 그런고 하니 우리 나라의 임금 마지막에서 둘째, 고종이 죽었다는 걸 그래도 어디서 듣고, 나는 그런 것 있으려니 감히 꿈도 못 꾸었는데, 들어가지 말자 해서 나도 안 들어갔어요. 그런데 그때는 교장이 일본 사람이라도 굉장히 정치적으로 됐어. 능란한 사람들이야. “그래? 그러면 그렇게 하자” 하더니 자기도 의자 내다 놓고 교원들 다 나오라 해서 “우리 이 시간 동안은 고종 임금 죽었으니 근신합시다.” 그러니까 꼼짝 못하고 수그러졌지.
그런 일이 있습니다만, 그러고 며칠 있다가 3․1 운동이 일어난 것 아니오? 그때까지도 내 생각에 “저 사람들 민족이 뭔지 모르는 것 같다” 그랬는데, 그래도 역시 이 나라 종자니까 다르긴 다르던가 보다 그 말입니다.
평양의 그날
그런데 나는 어떻게 돼서 3․1 운동에 참여했나 하면, 내 집안 숙(叔)이 되는 분이 그 시절에 땅 팔아 가지고 맏아들은 서울 배재학교에 보내고, 둘째아들은 일본에 유학시켰습니다. 굉장히 열린 분이에요. 그 둘째아들이 일본에서 졸업을 하고 평양 와서 취직을 하는데, 평양에 숭덕학교가 있었어. 요샛말로 하면 고등학교지요. 숭덕학교에 취직을 했는데, 평양 지리를 모르니까 나를 불렀어. 나에게 좀 묻고 그러느라고 한두 번 갔어요. 하루는 갔더니, 이러이러해서 세계가 이렇게 되었기 때문에 파리에서 강화 회의 모이고 민족 자결주의 나왔으니까, 우리도 이 기회에 독립해야 한다는 겁니다. 그래 그 운동에 황해도, 평안도의 청년은 내가 맡았는데, 내가 도무지 할 줄을 몰라 하니까, “네가 네 학교는 잘 알 테니 그걸 맡아서 심부름을 좀 해 달라” 그래요. 그러마 했지요. 그래서 평양에서 된 일은 내 있던 하숙에서 했으니까 내가 잘 압니다.
내가 삼학년인데 위로 한 학년 더 있지요. 사년제니까. 그래 아래 학년 사람들 모으고 해서 우리 하숙방에 모였는데, 그니가 와서 대표되는 학생들을 놓고 설명을 해. “우리 민족도 독립하겠다는 의사가 있다는 걸 표시해야 남들이, 세계 강화 회의에 모인 사람들이 동조를 해줘도 해주지 표시가 없으면 되겠나? 그래서 하는 거니까 그렇게 알고 하라” 해서 다 그 소리를 듣고 헤어져 갔어요. 그날 밤으로 숭덕학교 지하실에 가서 인쇄가 된 선언서를 한아름 안고 와서 나눠 가지고 밤새도록 찍었어요. 관립 고등학교 있는 애들 태극기가 어떻게 생겼는지도 잘 몰라요. 나는 그래도 시골이지만 우리 집에서 그걸 알고 자랐으니까 내 손으로 나무에다가 태극기를 새겨 밤새도록 찍어 가지고 이튿날 정한 시간에 나갔어요. 다른 학교에서도 그 사람들이 돌아가서 그렇게 했을 것입니다.
나는 그때 평양관 앞에 경찰서 있는 부근인데 거길 맡았어요. 경찰서니까 조금 싫은 생각도 나지만 내가 하기로 됐으니 안 갈 수도 없지. 그래 선언서를 안고 가서 기다리고 섰다가 열두시 치는 종소리가 들리자 그걸 돌리기 시작했어요. 그럴 때에는 벌써 일본 관청에서 알았어. 한시면 숭덕학교에서 고종 추도식을 지내고 거기서 어른들도 쏟아져 나오는데, 그러거든 학생들이 그 시간에 선언서를 뿌리라고 돼 있어. 그래 나는 맡은 대로 뿌리고 했는데, 그때 벌써 군인들이 총에다 칼을 꽂아 가지고 드문드문 가다가, 몇 발씩 가다가 하나씩 서고 그랬어요. 그리 멀지 않게 그랬는데, 아마 자기네 명령이 내려왔나 봐요. “절대 폭력 쓰지 마라. 뭐라 하지 마라” 그런 모양이야.
우리가 태극기를 가지고 가서 일부러 얼굴에 대고 흔들어도 죽은 사람처럼 딱 가만히 있어요. 그렇게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오. 그래서 낮에는 실컷 돌았어. 우리 마음껏 여기저기 헤치고 돌고 그랬는데 저녁 때가 되니까 뭐라는고 하니 “야, 우리 저녁에 그냥 있겠나? 우리 행진하자” 그래서, “좋다”, 숭덕학교에 악대도 있으니까 그걸 앞세우고 평양 서문, 평양 분은 잘 알겠지만 서문골에서부터 넘어오기로 했어요. 조금 높은 데 대열을 정돈해 가지고 노래 부르면서 내려왔어요. 그런데 턱 보니까 저기서, 낮에는 그렇게 가만히 서 있던 사람들인데 총에다 칼을 박아 가지고 사열 종대로 와요. 얼마나 되는지 숫자는 모르겠어요. 그래 우리와 마주치게 됐는데 뒤에서 “야, 피하면 안 된다, 도망 가면 안 된다” 그래. 그러니 곧장 다가갈 수밖에. 다가가니까 웬걸, 오더니만 바로 차 던져요. 차 던지니까 옆에 있는 도랑에 굴러 떨어졌지요. 그래도 따라와서까지 칼을 꽂든지 때리지는 않아요. 그날 저녁까진 그러진 않았어요. 그래서 우리는 헤어져 왔지요.
그런데 그 이튿날부터는 아주 태도가 달라지는 거예요. 단속을 하기 시작해요. 이튿날 아침 일어나니까, 삼월 초이튿날인데 그날 저녁에 평양에 눈이 왔어. 그리 많지는 않지만 하얗게 눈이 왔는데, 그래도 구석구석 사람들이 만세 부른다고 또 모였어요. 모였는데 기막힌 건 말을 탄 군인이, 그건 우리 집 창문을 통해서 봐도 그대로 뵈는데 계속해서 따라가면서 말이 사람을 덮쳐도 그대로 가요. 그러고부터는 요샛말로 하면 계엄령이 선포된 거요. 꼼짝할 수가 없어요.
그때는 적어도 평양 시내에서는 폭력을 쓰지 않았습니다. 그 이튿날 보니까 저 근린 동네에서 들어와요. 교회에서도 들어오고, 천도교에서도 들어오고, 태극기 받아 나가면 매맞으면서, 태극기 빼앗으면 그 다음 사람이 쥐고 들어오면서 며칠을 계속했습니다. 그런데 그후에 지방으로 차차 흩어지면서 어떤 데서는 폭력이 좀 있었지요. 우리 나라 사람이 순사를 같이 때렸다든지 해서 ‘강서 사건’이나 ‘수원 사건’ 같은 것 몇 군데 났지만, 처음에는 그렇게 하지 않았어요. 정확한 숫자를 기억은 못합니다만 후에 잡혀 들어갔던 사람이 아마 수만 명이고 죽은 사람도 상당히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도 대체로는 지금 여기서 학생들에게 하는 것처럼 그렇지는 않았습니다. 그렇게 지독하게, 악독하게는 안했어. 마지막에 가서는 좀 심해졌지만. 그리고 그때는 도망 가다가 길 옆 어느 집엘 쑥 들어가면 어서 들어오라고, 이름이 뭔지 묻지도 않고 그저 오라고 해서 먹을 것 있으면 먹을 것 주고 숨도록 했어. 지금 사람 같으면 누가 문을 열어요? 너 무엇에 속하는 사람이냐, 어떤 사람이냐 하지 누가 그러겠어요? 그런 것이 그전에 알지 못했던 것이고 지금도 맛 못 보는 거예요. 그런 것이 놀라운 건데요.
다른 데 가서도 그랬을 것이에요. 그런 것이 방방곡곡으로 저 산골까지 번져갔는데, 그게 무슨 힘으로 그랬겠느냐? 하나는 장날, 우리 나라에선 닷새에 한 번씩 장을 보잖아요, 장날에 학생들이나 젊은이들이 선언서 들고 가서 뿌리고 만세 부르면 다 “만세”라 하고, 그런 것이 있었지요. 그 다음에 또 하나 깊이가 있게 한 것은 대개 교회를 통해서 했다는 겁니다. 교회가 없었더라면 아마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 얘기 다 하려면 끝이 없으니까 할 수 없지만, 일이 어떻게 돼서 그만큼 성사가 됐나 하는 건 내가 증인 노릇을 할 수 있습니다.
나는 우리 나라에서 여섯 살 때부터 믿었고 일본으로 스물 세 살 때 갔습니다만, 스물 세 해가 될 때까지 미국이 그렇게 건설되어 사는 걸 얘기하는 목사 하나도 본 적이 없어요. 전쟁은 죄악이라는 말을 하는 목사도 하나도 못 봤어요! 일본 가서 처음으로 우치무라한테 메이플라워호 얘기를 들을 때 얼마나 감격을 했던지. 그것만이 아닙니다. 다른 것도 많이 있지만 당초에 그런 정신 교육이란 것이 없어요. 그저 양반 돼서 지배해 먹고, 벼슬해서 될수록 긁어 가지고 잘 산다는 것만 생각했지. 이조가 한 오백 년 내려오는 동안에, 개중에는 세종대왕 같은 분도 없는 건 아니지만, 그렇게 탄압했고 그 밑에서 해먹는 선비라는 것도 도무지 다 타락이 됐으니까 어디 정신이 있을 수 있어요?
미국이 처음엔 유럽 전쟁에 가담을 아니해요. 우리는 구대륙에서의 부패한 그따위 압박하는 정치는 상관하지 말자, 그래서 먼로 정책이 나왔지요. 그런데 세계대전이 사년 동안이나 가니까 차차 심해져. 아무 관계 없는 미국 상선이나 연락선도 침몰을 하니까 그 다음엔 가만있을 수 없어서 가담했지. 그래서 윌슨이 대통령에 당선됐고. 그이는 점잖은 분이에요. 주의도 이상주의야. 그래 참다못해 나섰는데, 미국 군이 새로 가담을 하니 이젠 달라졌지. 영국이나 이편이 이기게 되었고, 그래서 강화 회의를 하게 됐는데, 윌슨이 공로가 그만큼 있으니까 교서를, 열 네 개 조건이라는 걸 발표했어요. 앞으로 우리 정치 외교는 이렇게 하자, 그 중에 제일 우리에게 관계된 것이 작고 크고 할 것 없이 한 민족, 제 민족의 일은 제가 처리하도록 하자는 민족 자결주의예요. 그게 우리에게는 복음처럼 들릴 수밖에 없지요.
동경에 있는 학생들은 그래도 학생인 만큼 그런 걸 얻어들었으니까, 춘원 이광수니 누구누구니 하는 사람들이 모여 일본에서 이제 시작이 됐어요. 또 하나는 상해 임시 정부에서 사람을 남강 이승훈 선생한테 보냈어요. 국내에서도 일어나서 국민이 성의를 표시해야 한다는 말을 했어요. 그렇게 돼서 일어난 겁니다.
남강 선생한테는 1918년 크리스마스 경에 사람이 와서 그렇게 말씀을 했고, 서울에는 동경에서 송계백이라는 사람이 모자 속에 감춰 가지고 연락선에 무사히 통과가 돼 와서, 아마 그때 중앙학교 교장이지요, 현상윤 선생한테 드렸어. “동경에서는 이렇게 했는데 여기 국내에서도 하셔야 될 겁니다” 그래서, 현상윤 씨가 자기 친구 최남선, 최린 씨를 차례로 만나 의논을 했어요. 최린 씨는 천도교에 속했으니까 손병희한테 가서 승락을 얻었어요. 그러고는 우리 나라에 누구누구 이름 있다는 분들을 민족 대표로 내세워 일대 거사를 하자고 의견을 모아서 윤치호 씨 같은 이들을 찾아다니면서 그 얘기를 하니까, 하겠다는 사람이 별로 없어서 성립이 안 됐어요. 그때 최남선이 이건 이렇게 해 가지고는 안 된다, 평안도 가서 남강 이승훈 선생을 모셔오지 않고는―최남선은 그전에 남강 선생을 알았으니까―일이 성사가 안 된다 했다는 겁니다.
이승훈이 죽을 자리 찾았다
그래서 오산학교 일회 졸업생으로 있던 김도태 씨를 보내서 선생님께 그 말을 했다는 거예요. 그런데 지금 말했듯이 선생님께는 그전에 벌써 보고가 왔어요. 임시 정부에서 보냈던 사람은 정주 사람 정우혁이라는 분이에요. 크리스마스 무렵 저녁 때가 어슬어슬 됐는데 선우혁 씨가 선생님 댁에 와서 “아저씨 계십니까?” 하니까, 본 지 여러 해 지났는데도 벌써 말소리로 알아듣고, “거 아무개 아니냐?” “예, 그렇습니다.” “어서 들어오너라. 어떻게 왔냐?” “예, 들어가면 차차 말씀을 하지요” “아, 거기서 예까지 왔을 때는 무슨 일이 있어서 온 게 아니냐? 어서 말해라.” 그래 들어가서 그 얘기를 했어요. 그때 유명한 말이, 듣고 나더니 선생님 뭐라는고 하니 “이승훈이 이제 죽을 자리 찾았다!”
“나는 다른 사람 모양으로 아랫목에 흥흥 앓다가 우는 자손에 치어서 갈 줄 알았더니, 이제 내 죽을 자리 찾았다.” 그러면 그이가 뭘 생각하고 있었는지를 알 수 있지 않아요?
그래 그 얘기를 하려면 위로 거슬러 올라가요. 나라 일이 차차 어려워지기 전에 선생님이 처음엔 장사를 했어요. 그러다 실패도 하고 그랬지요. 그래도 나라 일은 어려워 가니까 신문을 보고 있는데, 이제 일본이 압박을 해서 우리 나라 임금 자리를 내놓게 한다고 해요. 그렇지 않아도 사업에 실패해서 마음이 울적한데 그 얘길 들으니까 이거 가만있을 수가 없다, 평양에 나가서라도 알아봐야 된다, 그래 평양에 나가서 알아봐요.
그때 마침 도산 선생이 미국 가서 있다가 나라가 어려워진다는 얘기를 듣고 와서 평양 모란봉 밑에서 강연을 하게 돼요. 그 유명한 모란봉 밑 쾌재정 강연이라 하는 건데, 선생님도 남들이 간다니 거기 가서 들었어요. 도산 선생은 남강 선생보다 훨씬 나이가 아래예요. 후배가 됩니다. 그때만 해도 청년이죠. 젊은 청년이 나와서 얘기를 하는데 말이 다 옳아. 요지를 말한다면 “왜 우리가 이렇게 됐습니까? 이게 다 몰라서 이렇게 된 거요. 이제라도 우리 나라가 바로 서려면 그저 다른 거 없습니다. 가르쳐야 됩니다.” 남강 선생은 거기 확신이 있었어요.
그전엔 남강 선생도 다른 사람 모양으로 옛날 벼슬 해보고 싶어서 참봉을 샀어요. 그때는 벼슬 내놓고 팔아먹던 때예요. 지금도 뒤로 하면, 뭐 돈으로 안 되는 것 있어요? 야당에 있다가도 돈으로 하면 내일 여당에 가기도 하고 별별 사람이 다 있잖아요? 그게 옛날부터 오는 잘못된 풍습 때문이지요. 요새 남강 선생 전기를 쓰려고 자세히 보는데, 그렇게 돼서 탕건 쓰고 양반 행세를 하고 그랬는데, 그 자리에서 도산 선생 얘길 들은 거예요. 그래 말 다 한 다음에 나가서 악수를 청하고 “나 오늘 당신 말씀 듣고 참 많이 알았소. 나도 그 말씀대로 할 거요” 하고 약속을 해서 동지가 된 거요. 자기보다 후배지만. 그러고 머리 깎기로 작정하고, 술 담배 그만뒀어요. 동리 사람들이 “어째 저 양반 요새 사업이 안 되더니 정신에 이상이 생겼나 봐”(웃음), 미쳤다고 할 만큼 아주 달라졌어요. 오더니 말을 하다가는 울고, 아침 일찍 새벽같이 나가서 자기 집 쓸고 동네 쓸고, 하는 일이 모두 달라졌어. 그래서 1907년에 오산학교 세우고, 도산 선생은 대성학교 세우고 그랬던 거요.
한일 합병이 1910년에 됐는데, 그 다음해에 일본 사람들이 오산학교 하는 것 보고, 또 그때 벌써 세상에 이름이 두드려져서 아니까 선생님을 잡아다 넣었어. 저런 정신 있는 사람을 둬 가지고는 안 된다 해서 ‘105인 사건’이라는 터무니없는 사건으로. 요새도 잘 모르겠지만 무슨 공산당이 그렇게 많이 됐겠어요? 애들 웬만한 건 그저 모두 공산주의, 공산주의, 내게 미운 거는 다 거기 미루지만, 그때도 정치는 마찬가지란 말이야. 미루어서 사람을 죽이고 그러던 땐데 조선 사람, 한국 민족이라고 하는 데서 민족 정신을 아예 뿌리째 뽑아 버려야 한다, 그러려면 주요 인물들을 다 없애야 된다, 그래 순전히 없는 사실을 만든 게 105인 사건이오. 우리 나라 임금이 이등박문하고 기차를 타고 지나갈 건데 피스톨을 준비했다가 모살하려 했다고. 이건 일본 사람들이 당시에 제국주의를 하면서 그런 걸 잘했던 러시아한테 배워 온 거요. 러시아 녀석들이 폴란드를 먹을 때 어떻게 먹었나? 그걸 배워 가지고 일으킨 것이 105인 사건이에요.
남강 선생이 그때 다 지내보고 그래. 요새 학생들에게 그걸 알려 주면 좋겠어. 알려 줘도 저 하기에 달렸지만. 나오셔서 뭐라는고 하니, 목사들도 많이 잡혀갔는데 “목사들 치고 거짓말 안하는 사람이 없다.” 그때도 물 먹이고 때리고 손가락에 대챙이질도 하고, 안한 것 없어. 지독한 것 많이 했어요. 그러니까 목사님들도 웬만한 사람은 다 “네네, 했습니다, 했습니다.” 이제 검사한테 가서 부인하면 그만이지, 이런 생각으로 못 견뎌 그랬는데, 절대 그렇게 해선 안 된다는 거예요. ‘경찰에선 아무리 그랬다 하더라도 검사한테 내가 말하면 들어 주겠지.’ 검사가 그보다 더한 것들인데? 지금 다 보시잖아요.
105인 사건으로 들어갔던 청년이 하나 있어. 신성학교 사학년으로 열 아홉 살인가 그랬던 사람인데, 그 사람이 마지막까지 견뎠는데, 죽었다 살아나길 예순 번 했다고 그러잖아요. '민족의 수난'이란 그 책 나온 지가 오래 돼서 모르겠소마는, 못 견뎌서 그랬지요. 견디게 하나요? 그렇지만 그런 걸 보면 남강이란 이가 어떤 분인지 짐작을 할 수 있어. 그걸 버티고, 거짓말하지 않았어. “목사님 치고 거짓말 안한 사람 없다”, 다른 사람한테 그러는데 두목으로 보는 이한테 가볍게 했겠어요? 그랬어도 종내 안 넘어갔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지금은 세상이 다르니까, 좀 믿는 바도 있고 하니까 부인을 해 놓고 검사한테 가서 재판할 때 아니라고 하면 된다 하지만, 그것이 다 그 속인데 되겠어요? 참작할 말입니다만, 그래서 남강 선생이 105인 사건을 겪고 나왔지요. 나오고 소감이 그거요. “감옥이라는 데는 참 이상한 곳인데, 거기 한번 들어가면 말이야, 약해지는 사람은 저릅대처럼―삼을 다 벗기고 난 걸 저릅이라 하는데, 맥이 없이 잘 부러져―썩어 버리는데, 어떤 사람은 감옥에 가면 갈수록 더 강철같이 돼 나오거든.” 자기가 지내보시고 한 말이오. 그렇게 했던 겁니다.
이젠 다시 올라가서, 상해에서 소식이 와서 국내에서도 의견을 발표해야 된다니까 남강 선생이 서울 올라가 만나서 의논해 가지고 맡은 것이 뭐냐 하면 그거요. 천도교에서 시작은 해야 한다고 하고 돈은 냈지만, 그것만 가지고는 성립이 안 되니까 아무래도 기독교가 일어나야 된다, 우리 천도교도 일어나지만 기독교가 앞장서 일어나야 된다, 남강 선생이 그걸 할 수 있다 승낙을 하고 온 거예요.
와서는 그 다음엔 선생님 앉을 새가 없이 그저 왔다갔다…… 참 옛날인 줄 아시오. 요새는 아무리 친구라 해도, 친구에게만 말했다 그래도 어디로 새 나가는지 새 나가는데, 그때는 민족이 지금보다 지식적으로는 떨어졌지만, 그래도 믿음이 있어서 안 나간 건 참 놀라운 일이에요. 그걸 왔다갔다하면서 하던 때는 선생님 주머니에 목사님 도장이 열 개, 스무 개 들어 있었다는 거예요. 그렇게 “민족 대표 돼 주시오, 해주시오” 설득을 해서. 그건 참 어려운 일입니다. 그렇게 해서 성립이 된 것이 3․1 운동입니다.
기독교가 이렇게 일어서는 바람에 다른 데서도 응하고 해서 일이 되었다, 그래서 그 운동이 운동으로 성립이 되는 데는 남강 선생의 힘이 굉장히 컸다는 겁니다. 그 힘이 어디서 나왔느냐면 이 성경책에서 나왔단 말이야. 다른 데 공부 아무것도 없어. 아까도 여기 오기 전에 퀘이커 집에서 한 말입니다만, 낳은 지 일곱 달 만에 어머니가 세상 떠났으니까 선생님은 어려서 젖도 제대로 못 얻어먹었어요. 그 다음엔 서당에 가서 이 년 동안 있다가 아버지 돌아가고 할머니 돌아가셨기 때문에 고아로 된 거지. 고아로 되니까 할 수 없이 동네에 있는 공장에 가서 일을 했어요. 그것도 특별히 생각 있는 이가 있어서 그랬지만 유기 만드는 공장에서 일하면서 자라나신 분인데, 공부한 것이 있다면 감옥에 가서 성경 본 거요. 3․1 운동 때 들어가서 삼 년 징역 살았지요, 그전에 남한무관학교 사건 때도 들어갔댔지, 세 번 네 번 들어가고 그랬어요. 감옥에 가서 하신 것이 성경 봤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선생님의 지식이 있다면 성경에서 나온 건데, 다른 사람 모양으로 전문 역사를 배웠다든지 지리를 배웠다든지 그런 것도 아니에요. 그런 점에 있어서는 강철 같으신 분이라, 목사들을 동원하는 일이 쉬운 일이 아니에요. 앉을 새가 없이 왔다갔다해서 그 일을 성사시켰어요. 그래서 그가 아니면 안 되는데, 아까 얘기대로 이 아무개 이제 죽을 자리 찾았다, 첫번부터 그거예요. 생각하기를 일본이 우릴 놔 줄 리 없지, 우리가 만일 독립 운동한다면 우릴 다 죽일 거다, 그렇지만 내가 해야지, 그러니까 죽을 자리 찾았다는 그 말입니다.
감옥에 있을 때 무슨 소리가 들어갔는고 하니, “이제 일본이 우리를 내란죄로 몬다더라.” 요새는 제일 무서운 게 뭐요? 나 법 잘 모르지만, 내란죄로 몰면 그건 으레 죽여 버리는 거요. 그럴 줄 알았기 때문에, 감옥 안에 그 소리가 들어가니까 젊은 사람들이 모두 다 겁이 나 어떡하지요, 어떡하지요 그러니까, 선생님의 유명한 말씀이 있어요. “여보게들, 여기 들어올 때 딴 목숨을 하나 더 가지고 들어왔나? 본래 처음부터 죽을 각오하는 거지 뭐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그러나?” 그런 말로 격려를 했다는 거예요.
그래도 그때는 일본 정부가 우리 정부보다 낫다고 그랬어요. 보통 내란법을 써서 다 죽일 것 같은데 안 그래요. 만세가 사방에서 일어나는데, 일본 국회에서 통지가 오기를 “내란법 쓰지 마라”, 무슨 집회법이라든지 이런 걸로 하지 내란법 쓰지 말라고 했어요. 그건 왜 그랬을까? 내란법을 써서 다 죽여 버린다면 운동이 더 격렬하게 일어날 것만은 뻔한 겁니다. 세계 어디 내놓고도 얼굴을 들 수 없는 줄 알기 때문에 그러질 않았다는 거예요. 거기다 비긴다면 우리 지금 이 사람들은 무슨 생각 하는지 몰라요. 될수록 지독한 형, 지독한 연수(年數)를 많이 주려고 하고. 어째서 그럴까? 그들이 어리석어서 우리 젊은이를 사람으로 알지 못하는 건가? 우리 젊은이들이 참 놀라워서 그걸 이기는 건가? 그 차이가 하여간 있습니다.
본래 일본이 우리를 먹을 때에는, 처음에는 동양 평화라는 말이 아마 사실이었는지도 몰라요. 여러 집이 있으면 동네에 있는 집이 똑같이 옳게 해야지 옆집에서 잘못하면 자기네도 그 해(害) 있거든요. 그러니까 우리 나라가 사람질을 제대로 하지 못했어. 중국이 먹어 치우려 하고 러시아도 그랬습니다. 끈질기게 끈질기게, 일본보다도 더 심히. 얼마나 심하면 한 나라 임금이라는 분이 한 나라 대사관에 가서 일 년 이상을 거기 있도록. 부끄러운 일이지만 그런 일이 있었으니까. 그게 왜 그렇게 됐냐 하면, 대원군하고 대원군 며느리하고 둘이 서로 권력 다툼에 그러지 않았어요? 세상일을 알 수가 없어요. 나라의 말년에는 타락이 돼서 옳은 것이 하나도 없어. 돈으로 사고 팔고 이러지. 그러니까 대원군도 이건 이놈의 안동 김씨네처럼 세력 가진 놈들 때문에 그런다 생각해서, 어떻게 하든지 며느리를 들인다면 이번에는 일가가 없는, 그런 장난이 일어나지 못할 데를 고르자, 그래 고르고 골라서 아버지도 일찍 죽었고 뭐도 없고 뭐도 없는 걸 고른 게 민비라는 건데, 이 민비가 어쩌면 남자보다 더한 여자란 말이야. 그래서 시아버지하고 권력 다툼에 우리 나라가 망해 버리는 거요. 그렇게 내분이 있고 나라가 되겠어요? 지금도 그런 걸 다 알 것 같은데, 그런 거 참작 아니하는 것 같아요. 그 얘기가 길어져서 안 됐습니다.
‘나도 사람이오’ 하는 운동
그래, 남강 선생님이 나서지 않았더라면 아마 성공적으로 되기가 어려웠을 거다, 그건 3․1 운동을 기념할 때는 반드시 여러분이 아셔야 할 것입니다. 학문도 없고, 공부도 못해 보고, 무슨 양반도 아니고 세력도 없는데, 뭘로 그러면 그렇게 됐냐? 성경 본 것이 밑천이다 그 말이에요. 성경 보기 전에는 어땠나? 젊은이의 말이라도 옳은 말을 한다면 그대로 실행해야지 하고 그날 당장으로 실행에 옮겼어요. 그래 도산의 친구가 됐고, 도산이 그때 ‘신민회’라는 비밀 결사를 조직해요. 이놈의 민족이 살아나려면 어떻게든 사람들을 새롭게 해야 한다 해서 신민회라는 걸 조직했는데, 선생님도 거기 가담을 했어요. 다 미리미리 한 것이 있어서 3․1 운동이 돼 나온 겁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이 시대에 문명한 나라, 미국이라는 나라, 소련이라는 나라, 다 뭔고 하니 힘의 숭배예요. 그 힘은 사람의 이 힘, 이걸 더 강하게 해서 무기를 드는 거요. 그 힘이지 결코 정신적인 힘이 아닙니다. 그런데 남강 선생이 가진 힘은 그게 아니거든요. 누구보고 큰소리 하지 않는 분이에요. 나도 옆에서 들어서 알아요. 한번은 정주에 있는데 학생들이 요샛말로 하면 데모를 했어요. 정주읍이 이십 리가 넘는데 선생님이 거길 달음질을 해서 가요. 따라 들어가니까 경찰에서 나와서 “선생님, 어떡하려고 학생들을 이렇게 데리고 들어옵니까?” 하니, “여보게, 내가 그럴 거 같은가?” 그래요. 그건 거짓말 아니에요. “내가 그래 배일 운동이나 할 줄 아나?” 그랬다는 거예요.
선생님도 그렇지만 나 자신도 그렇습니다. 내가 일본인이 될 리가 없지. 없지만, ‘일본 놈’이라든지 ‘왜놈’이라는 말 입 밖에 내본 일 없습니다. 난 본래가 마음이 약하니까 그랬는지 모르지만, 그때 선생님이 “여보게 내가 학생들 데리고 배일 운동이나 할 사람인 줄 아나?” 그러면 얼마나 속에 의젓한, 당당한 것이 있어서 하셨는지 짐작할 수 있잖아요? 지금은 그런 것을 다 찾아보기 어렵게 됐습니다.
3․1 운동을 기념하면 우리가 어떤 의미에서 할거냐? 그것이 우리 나라에서 처음으로 하는 운동인데, “나도 사람이오” 하는 마음 없이 일어날 수가 없는데, 그 생각을 누가 일으키게 했나? 그건 다른 사람도 있지만 남강 이승훈 선생 아니고는 할 수가 없다, 왜? 그이는 잘하면 그 공로를 내가 가지겠다든지, 내가 잘 났느니, 그게 아무것도 없는 이에요. 말로 칭찬하기 위해 그런 게 아니라 그런 야심이 없어요. 지금 정치하는 사람은 벌써 누가 대통령이 될 자격이 있냐, 내 편은 어떤 사람이고 네 편은 누구냐 그런 걸 따지지만, 남강 선생은 3․1 운동 일으키는 때 그런 것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혼자서 자기 생각대로 하신 것이지. 그저 운동 그 자체, “이제 세계 대세가 이렇게 와서 민족이 누구든지 제 노릇 해야 된다고 하니까 우리도 독립할 수 있지 않아?” 그렇기 때문에 한 거지요.
그랬기 때문에 재판정에 서서 물을 때에도 다른 사람과 대답이 달랐습니다. 왜 이 운동을 했나 하니까, “난 하느님이 하라고 해서 했습니다.” 어떻게 보면 너무 종교 냄새가 난다 그럴지 모르지만, 그 선생님에게 있어서는 그게 사실입니다. 말로만 그런 것 아닙니다. 손병희로 말하자면 놀라운 말이 있어요. “날 어찌 잡아?” 그러려거든 클레망소도 오라 그러고, 누구누구도 그때 세계대전 하던 유명한 인물을 다 부르면서 그 사람들 다 오면 날 잡아다 놓고 할지 모르지만 난 이제 안한다고 했어요. 그것도 버틴다면 버틴 것이지만, 그건 한 재주로 하는 말이고, 정신에서 나온 말 아니에요. 정신에서 하는 말은 “하느님이 하셨다”, 또 그것만이 아니라 민족 대표 서른 세 분 도장 찍는 날, 마지막으로 일이 결정되는 저녁에 한 말이 놀라운 말 아니에요?
선생님이 어디 나갔다가 밤늦게 들어왔는데 아직도 서로 옥신각신하고 있어. 뭘 이러고 있나 그러니까, “아, 지금 선생님 이름을 먼저 쓰나, 천도교의 손병희 이름을 먼저 쓰나, 우리는 선생님 이름을 먼저 쓰자 그러지만, 저 사람들은 손병희 이름을 먼저 쓰자고 그래 그럽니다.” 그러니까 “야, 순서가 무슨 순서야? 죽는 순서란 말야.(웃음) 어서 손병희를 먼저 써!” 그래서 문제없이 쫙 됐다는 거 아니오. 그래 가서 보시오. 선생님 이름은 중가운데 박혀 있지, 첫머리에 안 있습니다. 그런 걸 생각을 안하는 분이니까.
우리 나라 역사 있은 이래 처음으로 “우리도 사람이오” 그러는 운동인데, 그저 남의 종살이라도 하다가 돈이라도 모아서 벼슬이나 한다든지, 지방에 가서 돈 긁어모아서 청기와집 짓고 잘살다 간다든지 그밖에 생각을 못하던 그런 시대에 “이젠 우리도 사람 노릇 해야 된다”고 했어요. 그러니까 3․1 운동에 사람들이 다 일어나서 일했는데, 이때까지 자기네를 사람으로 대접해 준 이가 없는데, 이분이야말로 자기네를 사람으로 대접했어. 나도 그때 들었어. “여러분이 다 나라의 주인이니까 누굴 믿지 말고 다 일어서서 만세를 불러야 됩니다. 그렇게 하면 독립이 됩니다.” 그런 말 사천 년 역사에 처음으로 들어 본 소리거든요. 단군이 계실 땐 모르겠습니다만 적어도 국가라고 이름을 걸고 한 이후에 언제 그런 말을, 더구나 평안도 놈들이 들어봐요? 그렇게 사람으로 대접받으니까 사람 노릇을 했지.
그런 건데 요새는 그보다도 훨씬 떨어졌습니다. 학문이라는 것, 잡지도 많이 나고 신문도 나고 가지가지 많지만, 실지로 다른 사람을 정말 사람으로 대접한다, 내가 뭐 각별히 높을 것도 아니고, 내가 욕심이 있어서 하는 것도 아니다, 정말 그런 정치가, 그런 사람이 몇만 있다고 해도 문제가 이렇지는 않을 겁니다. 그러니까 3․1 운동이 그런 의미에서 첫 번째가 되는 운동이고, 앞으로도 그 정신 계속해 가지 않고는 일이 어려울 거예요.
내 차례에 와서 사람 노릇 못하면
그럼 이제는 성경을 왜 이걸 봤나, 그걸 몇 마디로 설명을 하고 가야겠습니다.
「히브리서」라는 걸 여러분이 많이 보시겠지요. 난 「히브리서」가 성경 중에 독특한 글이라고 그럽니다. 이건 다른 데와 좀 달라요. 5장 7절부터 9절까지 보세요. 여기 “예수님도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라는 그 말이 놀라워요. 다른 데 없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뭘 배웠다는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니까 저절로 나면서부터 보통 사람이 아니겠지, 우리 모양으로 공부를 했다든지 그러질 않을 걸로 생각하는데, 그 점이 우리가 예수님을 좋게 대접하는 것 같으면서도 잘못하는 게 아닌가? 다른 데 이 말이 별로 없어요. 그래서 이 「히브리서」가 독특해. 그것만이 아니라 멜기세덱 얘기도 그렇고. 11장에 가서는 신앙 강조하는 시간이 되어서 좋은데 39절에 와서,
“이 사람들이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니, 이는 하느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함이라.”
그게 무슨 말입니까? 비유를 한다면 역사라는 건 릴레이 경주와 같다, 그 말입니다. 릴레이 경주라는 것 있지 않아요? 한 사람씩 제가끔 나가 뛰면 일등을 한 사람이 상을 받아도 혼자 받지만, 릴레이라는 건 첫 사람이 뛰고 돌아와도 반드시 바통을 그 다음 사람에게 넘겨 줘야 뛴 효력이 있고, 그 다음 사람이 뛰어도 이걸 받아 가지고 뛰어야지 받지 못했으면 아무리 앞서가야 소용이 없어요. 그거 중요한 거예요. 역사라는 것도 릴레이 경주 모양으로 첫 사람, 둘째 사람, 셋째 사람, 넷째 사람 있지만 그것이 하나다, 옛날에 고구려 시대, 고려 시대 무슨 시대 있지만 그것이 다 하나의 일이라는 겁니다.
개인이 가서 죽을 힘을 다하는 것은 제가 상을 탈 테니까 그러지만, 개인의 상이라는 게 없어요. 참 의미에서 개인이라는 건 있을 수가 없어요. 다른 사람 다 없이 천지간에 너 혼자만 살아 보라 그러면 살 것 같습니까? 나는 내가 제일 중심이고 다른 사람들은 남이지 그러지만, 그 사람이 없이는 살지 못하잖아요? 저 사람 없이 나는 못 산다는 생각을 별로 하는 사람이 없어요. 성경에서 가르치는 것이 있다면 그거예요. 그러니까 예수님에게 계명 중에 어떤 것이 제일 중요한 겁니까 할 때, “네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성품을 다해 하나님을 섬기고, 그 다음 것도 그와 같으니 이웃 사랑을 내 몸과 같이 하라”고 했어요. “이웃 사랑을 내 몸과 같이”라는 말을 예수님이 했다는 걸 알긴 아는데, 실지로 행한 사람이 몇 사람이나 있을까? 그걸 받아 가지고 베드로와 바울이 “머리는 예수요, 우리는 다 몸이다”라고 말해요. 머리는 제일 높고 몸은 낮다는 것이 아니고, “우린 다 하나다” 하는 걸 말하는 겁니다. 하나님 공경하라는 건 누구든지 알 수 있는 것 같은데, 아무리 하느님 공경하고 밤을 밝혀 가면서 기도한다 해도, 이웃 사람을 내 몸과 같이 사랑 못하면 하나님께 기도했던 것 헛일이라 그 말입니다.
「히브리서」가 이것을 강조하는데, 그럼 무슨 뜻에서 그러나? 이전에 훌륭한 신앙의 투사들이 많이 있었는데, 이 사람들이 약속을 다 받진 못하고 갔다는 거예요. 아브라함이 뛰고 엘리야가 뛰고 다 뛰었다 하더라도 오늘날 우리가 없다면 소용없다, 역사가 저 위에 무슨 시작이 있었다 해도 오다가 이놈의 나라가 망해 버렸다면 그전에 있던 단군이고 뭐고 다 소용이 없어지지 않아요? 마지막까지 그래도 이 민족이라는 게 살아 있어야 의미가 있지. 그런 말을 한 거요. 네가 나오기는 마지막에 나왔지만 더 좋은 걸 줘. 윗분들이 참 믿었으면 으레 받아야 옳은 건데 살아 있는 동안에 받지 못했어. 앞사람 셋까지 뛰고 마지막에 이제 내가 남았는데, 내가 못 뛰면 전에 있던 세 사람, 역사에서 얘기하면 삼천인지 삼만인지 삼억인지 그전에 대대로 있던 그 역사가 의미가 없어져요, 내가 내 차례 와서 사람 노릇 못하면!
만일 대통령이라는 사람한테 ‘자, 역사를 내가 지금 맡았지, 그러니까 내가 정치를 잘못하면 삼국이고 고구려고 뭐고 그전부터 내려온 역사를 망치는 놈이 되는 것 아니냐?’, 그런 생각이 있다면 오늘날 학생 문제 때문에 그렇게까지는 안할 거예요.
그렇더라도 대통령에게 미뤄서는 못써요. 믿는 믿음은 미루지 않아요. 대통령은 자기 직업으로 들어왔지 나라 일로 들어왔나? 지금은 옛날과 다릅니다. 임금이라면 옛날엔 나라 위한다고 그랬지만, 요새는 나라 위하는 것 아닙니다. 저 먹고사는 것만 아니라 돈 모으고 죽은 다음에도 자자손손이 다 잘살 수 있도록 하려는 거지. 그러게 난 몇십 년 전에 어느 학교에 가서 그런 얘기를 했어. 너희가 학교 와서 공부하지만 자본주의라는 이 시대―공산주의도 마찬가지예요―에는 너를 정말 사람 되라고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자기네가 하는 자본주의, 공산주의 체제에서 써먹을 사람 만드느라고 가르치는 거다, 공장에서 무슨 원료를 넣고 기계를 돌려 가지고 나오는 것이 규격에 맞으면 쓰고 안 맞는 건 내버리는 모양으로, 졸업증이란 다른 게 아니고 네가 규격품에 드나 못 드나 그걸 말하는 거다 했어요. 그렇게 말해 봤더니 선생이 노해서 “왜 여기가 공장이란 말입니까?” 그래. “아, 여보시오, 내가 오고 싶어서 왔소? 당신네가 와서 말해 달라니까 한 거지.(웃음) 그렇게 싫거든 말하지 맙시다. 그러면 학생들한테 물어 보겠소. 나 말할라오, 하지 말라오?” 하니까 “말하시오!” 그래서 내가 끝까지 말하고 왔어요.
그런 것이 벌써 수십 년 전의 일입니다만, 나란다고 사람 노릇을 제대로 실행하는 것도 못 됩니다. 하지만 남강 선생님이야말로 거의 완전할 만큼, 돌아가시는 날까지 참 일찍 돌아가시는 것이 아깝다 할 만큼 그것을 하셨어요. 그분이 그렇게 다른 사람을 사람으로 대접하니까, 자기는 자연히 사람이 되잖아요. 지금은 도저히 그 3․1 운동을 재현할 수가 없습니다. 물론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요. 미국이라는 나라가 흐지부지하고 똑똑하질 않아 그런 까닭도 있고, 여기 지금 정치한다는 사람 그렇기도 하고. 정치하는 사람은 또 핑계 대려면 댈 수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언제 배웠어요?” 남강 선생은 언제 배웠던가? 자기 마음속에 있으면 배워지고 없으면 안 되는 거지.
옛날에 있던 사람들이 다 훌륭한 일을 했지만 이걸 한 꿰미로 꿰었어야 구슬이 되겠는데, 그러지 못했어요. 꿰는 것을 누가 해요? 내가 해야 돼요. 그전에 용사가 아무리 많다 하더라도 마지막 사람이 이걸 쥐고 들어가지 않으면 그 공로가 없어진단 말이에요. 그러니 세상에 이런 힘드는 일이 어디 있어요? 하지만 그런 명예가 어디 있어요? 사실은 거기 명예가 따로 있는 것도 아니고 힘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닙니다. 너나 내가 한 사람이야. 작게 보니까 서로 딴 거지. 성경에서 가르치는 것이 있다면 그런 거예요..
왜 내가 오늘 제목을 붙이기를 ‘고난의 의미’라 그랬느냐? 역사가 알고 보면 고난이란 말입니다. 계속해서 고난이지 어느 때면 좋은 때 있었어요? 지금은 더 괴롭습니다. 난 일제 시대에도 이렇게까지 속이 안타깝고 그렇진 않았습니다. 학생들이 하는 데 대해서 어디 그렇게 할 수가 있어요? 그런데 그것을 밉게만 볼 게 아니라, 남강 선생처럼 그것을 자기 일로 알고 “내가 고쳐 줘야지. 고치다 내가 죽을지 몰라. 하지만 나 죽더라도 좋아.” 그렇게 하는 것밖에 일이 없지. 옳은 걸 위해서 죽는다면 그보다 효력이 더 있는 것이 있겠어요?
역사가 참 산 것으로 되려면 그전 사람에게 있던 것을 지금 이 순간에 내가 맡는다 하는 것이 중요해요. 다른 사람이 있을까 없을까 걱정할 것 없어요. 내가 산 사람으로서 바통을 쥐고 엎어져도 뒷사람이 또 그걸 할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니 걱정하지 말고, 내가 엎어지고 죽으면서라도 그걸 마지막까지 하고 가겠나 못 가겠나가 문제입니다. 그것을 이 역사에서는 3․1 운동에서 처음으로 본 거예요. 그전에 수천 년을 내려왔다 해도 우리 민족이 사람 노릇을 해본 일이 없는데, 남강 선생은 “나라 위해 큰 재목은 못 되어도 죽어도 좋다. 그것이 내 일이다”라면서 했어요. 3․1 정신이라면 그런 것을, 더구나 믿는 사람은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사람은 뜻에 사는 것
그래서 고난이라는 말을 넣었습니다. 내 쓴 역사책을 보신 분들은 알겠지만 그걸 쓸 때도 본래 그런 겁니다. 처음에 역사 조금 가르치다 보니까 가르칠 수가 없어. 역사가 거짓말투성이야. 어느 나라도 다 자기네 민족 잘났다는 거고 전쟁을 하면 다 이겼다는 거야. 졌다는 놈은 하나도 없어. 그래 역사를 가르친다면서 나도 거짓말을 해야겠으니,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고 과학도 배웠는데 아닌 사실을 말할 수가 없잖아? 그러니 고민이 돼. 고민이 되다가 그 다음에 풀린 것이 뭔고 하니, 예수께서는 불과 서른 세 살에 하던 일을 그만두고 돌아가고 말았지만 죽기를 옳게 죽은 것이다, 생명을 다해서 한 고로 그게 후에 사람이 구원을 얻는 길이 되지 않았나? 하나의 민족도 그럴 것 아닌가?
우리 나라가 왜 이 고생인지, 학생이 공부하려다가 공부도 못하고 목숨도 없어지고 징역살이하고 하는데, 투쟁하는 것 물론 용하지만, 그저 감정적으로 보고 화가 나 견디지 못해서 그럴 뿐 아니라 그 속에 내 믿는 것이 있어야 하지 않겠소? 젊었을 때는 감정이 강하니까 어느 정도 감정적으로 해 갈 수 있지만 그건 우선 나갈 때 그렇고, 끝까지 버틴다는 것에는 무슨 의미가 있을까?
사람은 보람에, 의미에 사는 겁니다. 내가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 역사'라는 걸 썼다가 왜 '뜻으로 본 한국 역사'라고 고쳤느냐 하면, 그땐 내가 신앙 고백하느라고 ‘성경의 입장에서 본’ 이라고 했지만, 믿지 않는 사람도 많이 보니까 그들이 알기 쉽게 하느라고, 또 하나님, 성경, 그렇게만 하면 범위가 좁아지는 것 같아서 그랬어요. 뜻이라는 건 하나님 없이는 없습니다. 이것이 다냐 매우냐, 이 집이 좋으냐 나쁘냐 하는 건 기독교를 믿지 않아도 다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뜻이라는 건, 밥 먹는데 비싼 걸 먹었다고 더 뜻이 있는 게 아닙니다. 그러니까 뜻에 뜻에 모든 뜻이 어디서 나왔겠냐? 사람의 육신에서 나올 수는 없지 않아요?
당초에 누가 종교라는 얘기, 하나님이라는 얘기를 했을까? 누가 했다고 그러겠어요? 맨 처음에 한 사람이 없잖아요? 예수님 나왔지만, 수만 년이라든지 실컷 역사가 있다가 예수님 나오셨는데, 여기 뭐라고 그랬지요? “하느님의 아들이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웠다”고 했어. 고난을 겪지 않고는 몰라요. 하나님의 아들이란다고 저절로 되는 것같이 하는 게 영광스러운 것 같지만, 그러면 우리에게선 너무 멀어요. 하지만 그이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배도 고파 봤고 슬픈 일도 있었고 눈물도 흘려 봤고, 그래서 우리 사정을 아주 잘 아시는 분이다, 자기가 알면서 그것을 당하신 것이다, 고생 안하셨더라면 예수가 못 되셨는지도 모른다는 거예요.
이 세상 사람들은 대통령부터 청소부에 이르기까지 고생을 피하자는 주의지요. 어떻게 하면 내가 이 노릇을 면해 볼까? 이놈의 간난을 면해 볼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내가 유명해질까? 이 집이 아니고 좋은 집에 이를 수가 있을까? 이 나라가 아니고 좀 좋은 데 가서 살아 볼 수 있을까? 참사람은 그렇지 않아! 피하려 하지 않고 “이걸 내가 어떻게 하면 의미가 있게 당하지? 보람을 느낄 수가 있지?” 한단 말이에요. 내가 이 말을 어디서부터 하기 시작했냐면 조그마한 책을 보면서 그랬습니다.
저 유럽에 가면 오스트리아 있지 않아요? 오스트리아 사람으로서 이름도 잘 생각이 안 나는데 그 사람 전쟁 후에 유명해진 심리학자예요. 공산당의 감옥소에 잡혀 들어가 있었어. 들어가 있다 보니까 어떤 사람은 턱턱 넘어져 죽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아주 약해 보이는데 잘 견뎌 가고 그랬어. 심리학자니까 그걸 갖고 생각을 했어. 연구를 한 결과 마지막에 깨친 것이 뭔고 하니, 사람이 무슨 보람이 있다고 느낄 때에는 있던 병도 낫고 잘 견뎌 갈 수가 있지만, 보람을 못 느끼는 사람은 오래 못 간다는 거야. 그래서 자기의 학설을 ‘로고테라피’(logotherapy)라 그랬어. 로고스란 「요한복음」 맨 처음에 나오는 ‘말씀’이에요. “로고스가 하나님과 같이 계셨다, 로고스가 곧 하나님이었다, 이 로고스가 처음에 있어서 만물이 그로 지음을 받은 것이다, 그것이 사람에게 있어서는 생명이다, 생명이 사람에게 있어서는 빛이더라.” 「요한복음」 잘 읽어 보세요.
「요한복음」 주제가 뭡니까? 새사람이 되는 것이에요. 이건 뭐 (몸을 가리키며) 썩어질 사람이라는 거야. 요새 직업적으로 참 세상이 우습게 됐습니다. 박사가 그렇게 돈을 모은다는 게 있을 수 없고, 나라를 위해서 노력을 했던 사람보다도 운동 선수가 되면 억대로 돈을 벌잖아요. 심지어는 바둑을 일생의 전문으로 하는 것도 봐요. 여기 바둑 두는 이가 있으면 좀 섭섭할는지 모르지만, 나는 아무리 재주가 있어도 바둑에다 일생을 박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걸 하는 동안에 무슨 정신이 생기는 게 있으면 모르지만, 적어도 일생을 바둑판만 들여다보다가(웃음), 그럴 수가 어디 있어요? 그보다는 뭣이 있어야 하지 않아? 그것이 인생의 목적이 될 수는 없어요.
사람은 아무래도 보람에 산다 그랬어. 그것이 성경의 주제 아니오? 그러니까 이 사람대로 둬 가지고는 안 된다는 거예요. 니고데모가 예수 소문을 듣고 그래도 내깐에는 안다고 가서, 남들이 보면 흉이나 안 볼까 무서워 밤중에 찾아가서 “선생님, 하나님께서 보내신 줄 압니다. 선생님께서 하시는 일이 하나님이 안 보내시고 될 수 있겠습니까?” 어지간히 아는 모양으로 얘기를 하니까 예수님 단번에 여길 때렸어. “사람이 새로 나지 않으면 하늘 나라 보지 못한다! 너 뭘 알고 그러느냐?”
새로 나다니, 내가 나이도 많은데 어머니 뱃속에 들어갔다 나오랍니까? 예수님이 그걸 몰라서 그 말씀 했겠어요? 그러니까 “네가 이스라엘의 선생이라 하면서 그것도 모른단 말이야? 영으로 나란 말이야.” 그래서 바람을 예로 들어 “바람 부는데 네가 보지 못하잖아? 어디서 오는지 어디로 가는지 그걸 모르지만 소리 듣지 않아? 있는 거 분명하지 않아? 정신이라는 것 그런 거다.” 그런 모양으로 사람이 다시 난다면 영적으로 난다는 말인데, 그 세계는 무슨 세계냐 하면 의미의 세계예요. 여기서는 무슨 미인도 없고 추인도 없어요. 오래 산 것도 없고 일찍 죽은 것도 없습니다. 무슨 의미가 있게 살았냐, 의미가 뭐냐가 중요하지. 사람은 나면서부터 생각을 자꾸 해요. 언제부터 그랬는지 모르지만 생각을 하고 또 생각을 하니까, 가다가 무슨 뚜렷하지 않았던 것이 번쩍해요. 그것을 눈엔 볼 수 없지만 영이라는 세계가 그렇지 않아요? 이 인류는 이미 영의 세계에 올라가기 시작한 겁니다.
변화해서 자유로 날 때가 온다
중가운데 너무 말이 길어져서 죄송합니다마는, 내 버릇이 본래 이래요. 할 수 없어요. 어떤 분한테는 마음에 동요가 올는지 몰라요. 하지만 나 남한테 그렇게 악한 말 하지 않습니다. 어떤 분은 누가 진화론을 얘기하면 “이놈, 어디 이따위가 있나?” 그럴는지 몰라요. 그러질 마시고 학교에 가서 배운 아드님한테 “진화론이 뭐냐?” 좀 말을 하라고 그러시오. 알아보지도 않고 “사람이 그러면 원숭이 새끼란 말이야? 원숭이 손자란 말이야?” 그런 무식한 소리 하지 말고. 진화론은 절대 사람이 원숭이 손자라는 말이 아닙니다. 사람 하나가 억만 년 전부터 난 것이 자꾸만 새로워지고 새로워져서 이 지경까지 온 거다, 앞으로는 더구나 어느 때보다도 달라진다, 그걸 학문적으로 말하면 그런 거예요. 거기서는 과학으로 하는 거니까 “어떻게 달라져 왔나”만을 말하지, “왜 이런 변천이 있었나” 그런 말은 하지 못해요. 그건 성경에서만 하는 거예요.
마음속에 하나님의 세계, 그런 생각이 열리려면 진화론을 얘기하는 것이 우리 마음을 방해하기 위해 하는 것이 아니라는 걸 알 거예요. 서양 사람들은 과학을 연구하는 점에서는 참 앞섰어요. 그것을 너무 무시했기 때문에 우리가 뒤떨어진 점이 있으니까, 그것을 인정 안한다는 사람과는 말하려고 하지도 마세요.
이제 제일 알기 쉬운 것이 누에고치입니다. 누에란 놈이 클 때는 자꾸만 먹잖아요. 먹을 만큼 먹은 다음에는 안 먹습니다. 안 먹고는 그 동안 먹은 걸 똥으로 다 싸요. 마지막에 똥이 하나 딱 남습니다. 여기다 갖다 대고 이렇게 비추면 아주 멀겋게, 황금빛같이 비칩니다. 똥이 다 나가고 마지막 하나 남아 있는데, 그것은 살아 있어서 고치를 만들어야 하거든. 이때껏 먹었던 그것을 끄집어내서 고치라는 걸 만들고 자기는 그 안에 들어가서 갇혀 있습니다. 갇히면 나올 데가 없지요. 그렇게 해서 어느 시간이 되면 이것이 변화해. 이때까지는 벌레벌레 기어가던 누에라는 거였는데, 그 속에서 날개 돋은 나비라는 게 나오지 않아요? 왜 곤충 중에 그런 것이 있느냐? 사람들 너희도 여기서 살 때는 살지만 어느 시기에 가면 변화해서 자유로 날 수 있는 그런 것이 될 수 있어야 하지 않느냐, 그걸 생각해 보라고 그런 것 아닐까?
무엇을 보든지 그것의 의미는 뭔가를 반드시 따져야 돼. 그런 것이 철학이요 좀더 올라가면 종교요.
지금 벗어버릴 큰 허울이 있어요. ‘국가’라는 거예요. 지금 저 사람들이 왜 저렇게 할까? 우리 상식으로 생각을 해도 어린 학생들이 그랬는데, 그것도 다른 게 아니라 보고 견딜 수 없어 그랬는데 원, 아무리 그렇기로서니 그렇게 악독하게 할까? 묻다가 대답 안하면 그만두지, 전기 고문을 한다든지 얼마나 때렸으면 맞아 죽었겠어요?
그러는 게 뭘까? 사람인 다음에는, 그래도 얼굴을 들고 나서면 사람이니까 진리의 가능성이 있는데, 그걸 길러 볼 생각을 하지 않아요. 그러는 데 제일 방해되는 것이 국가라는 것이야. 이날까지 ‘나라’라고 그랬습니다만. 이것만은 정말 자세히 들으세요. 내 지금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한테 말하는데, 사람이 처음에 났을 때에는 다 자연에 있는 물건을 먹었지요. 나무 뿌리라든지 나무 열매라든지, 어떤 때는 새알도 내서 먹었고 바다에 가서 조개 캐다 먹고, 다 그렇게 했을 것 아니오? 그렇게 살던 건데 차차 정도가 올라와서 오늘 이 살림까지 되지 않았어요? 그렇게 왔는데 그럴 때에 사람으로서 누가 가르쳤을까? 그건 신화라는 걸로 전해 있어요. 옛날에는 ‘옛말’이라 그랬지요. 요새 학문적으로 말하면 신화라 그러는데, 어느 나라의 시작도 신화로 됐지. 어떤 사람은 단군 신화가 뭐 호랑이하고 곰하고 인간 배움을 했다고, 그래서 실지 역사가 아니라지만 그건 하나만 알지 둘을 모르는 거예요.
하여간 그렇게 왔는데 처음엔 국가란 것이 없었어요. 그런데 사람이 혼자서는 못 살아. 무리무리 지어요. 짐승들도 한 무리로 있으면 좋아하잖아요? 흩어져 있다가 다시 모이게 되면 어떻게 되는고 하니 서로 비벼대요. 사람끼리도 흩어졌다가 만나면 서로 끌어안고 그러는데, 그것이 조금 발달하면 댄스가 돼요(웃음). 그래서 옛날 종교 치고 댄스 없는 종교 어디 있어요? 무당은 반드시 춤 잘 춥니다. 후대에 무당은 못쓰게 되어서 그렇지 본래는 안 그래요. 본래는 사람들이 만나 서로 “하나다, 하나 됐다” 이렇게 좋아하고 그러는 데서 무당이라는 게 나온 거요.
그런데 동식물도 그렇고 사람 중에 각별히 잘난 것이 있지 않아요? 그런 사람, 성인이라는 사람이 나와요. 보는 것도 그렇고 듣는 것도 그렇고, 더구나 마음씨를 쓰는 것이 자기만을 위하는 것 아니고, 그런 이들이. 이 사람이 볼 때는 불쌍해. 그러기 때문에 “자, 씨를 심을 때는 막 하지 말고 요렇게 씨를 떨어뜨리고 요렇게 착착 누르면 잘된단 말이야”, 비가 많이 올 때는 “걱정만 하지 말고, 저기 나가 돌을 쳐서 빠져 나가게 해야지”, 가물 때에는 “저기 골짜기에 가서 물을 이렇게 흘려 넣으면 된다”, 또 산에서 맹수가 올 때는 “다 한데 모여 합심해서 짐승을 쫓아야 한다”, 이런 걸 가르쳐 준 것이 성인이에요.
그러니까 사람들이 고마워. “저 양반 참 하나님이 보냈군!” 그렇게 해서 그 가르침을 받아 온 사람들이 한데 무리를 짓고 살아가게 됐어요. 그걸 나라라고 그래. 그러던 건데 그 다음에 기억 잘하고 눈치 빠른 놈이 보니까 ‘야, 대접받고 좋은데 나도 한번 그래 볼까?’ 싶어요. 그게 소위 정치가라는 거예요. 그것들이 나와 수단을 써서 대접을 받아요. 어디서 과일 산다 하면 이거 잡숴 봐, 제일 좋은 것을 골라다 드리지, 굽실굽실 하고. 그렇게 제가 꾀를 써서 힘을 가지게 된 것이 정치가라는 겁니다. 그 사람들이 만든 걸 국가라고 해요. 나라가 아니고 국가라 그래. 그건 훨씬 후대에 왔지만 국가가 된 이래로 발전은 많이 했습니다.
국가라는 건 자기네끼리 몇이 모여서 내가 임금 되면 너는 뭘 하고, 이래 가지고 된 거예요. 소위 정당이 다 그럴 것 아니에요? 그것을 이 세상에서 정치라 그러잖아요. 그건 개인이 당해 낼 수 없어요. 세상에서 조직적인 악이에요. 제도적인 악으로 전락을 한 겁니다. 유명한 정치학자들이 지금의 정치를 뭐라 하는지 아세요? 영어들 잘하니까 ‘파워 폴리틱스’(power politics), 힘의 정치라고 해요. 영국, 미국 할 것 없어요. 소련만이 아니에요? 똑같아요. 자본주의, 공산주의, 그까짓 것 문제도 안 돼요. 다른 사람 시키고 내가 긁어먹기, 두목 되는 놈이 일은 안하고 긁어먹기는 마찬가진데. 하나는 자본주의, 하나는 공산주의, 그런 무슨 조직체를 만들어 놓고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이것이 명령이다!” 그러는 거예요. 지금 그것이 인륜으로는 견딜 수가 없어. “내가 왜 그런단 말이야?” 뭔지 모르게, 나도 사람인데 하는 마음, 그게 민주주의의 시작입니다. 아까 말했던 3․1 운동에 나선 학생들 다 그렇지 않아요?
그때 지금처럼 이랬어요? 그 점에선 훨씬 떨어졌는데 무엇 때문에 그런가? 이 국가주의가 점점 강해졌어. 그러니까 이제는 국가의 정치한다는 사람이 부하 만들고 군대 만들고, 요렇게 하고 있으면 다른 놈이 아무리 반대해도 안 된단 말이야. 그러니까 이(利)에 강해야 된다는 것이고, 또 그런 사람들끼리 모여서 하는 거예요.
난 처음에 우리 나라 헌법 만들 때는 비교적 좋았다고 생각해요. 우리말로 헌법이란 걸 만들어 보지 못했으니까, 그래도 누구누구 제일 가는 학자들을 모아서 이 나라의 것도 참작하고 저 나라의 것도 참작하고 만들어서 비교적 괜찮았어요. 이제라도 이 소리 저 소리 할 것 없이 맨 처음에 했던 그 헌법으로 돌아가자, 그런다면 대체로 괜찮을 겁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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