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교의 땅 경주-진목정 천주교
성지
(언양죽림굴 천주교신자들 천주교박해때 숨어 신앙신활하던
굴)
경주 산내면 참나무징이에는 천주교 순교자 묘소가 있고, 그 부근에는
교우들이 숨어살던 호랑이 굴이 있다.
경주는 신라 때, 불교의 공인을 위한 이차돈의 순교(528년)가 있었고, 조선 말기에는
천도교의 발상지로서 창시자 수운 최제우의 순교(1863년)가 있었다. 그런가 하면 천주교의 순교지이기도 하다.
신라에 불교가
처음 들어오자 기존의 세력을 거머쥔 귀족층은 새로운 사상, 종교의 수용을 거부했다. 왕은 새로운 종교인 불교를 받아들여 새 기풍을 진작시키고자
했지만 그들의 반대에 부딪혔다. 그 때 불교를 공인하는데 자기 한 몸을 희생하려고 자청하여 나선 젊은이가 있었으니, 바로 이차돈이었다.
19세기 조선 왕조를 휘청거리게 한 농민혁명으로 확대된, 동학의 창시자 수운 최제우 선사는 경주 현곡 사람이었다. 그 분은
인내천(人乃天) 사상을 내세우고 포교하다가, 대구 감영에서 참수를 당하였으니, 그의 무덤은 용담정 부근 현곡면 가정리에 있다.
2대
교주 해월 최시형 선사도 천도교를 포교하다가 순교를 당했으니 경주 황오동 사람이었다.
경주에서의 천주교 순교자는 불교나
천도교와는 겉모양이 다르다. 1866년 병인년 박해 때 피신해 온 신자들이 경주에 와서 숨어살다가 붙잡혀 순교한 것이다.
김해 사람
허 야고보는 병인 박해 때 고향의 논밭 가옥을 다 버리고 식구들을 데리고 언양의 가날 산골로 피신했다. 그 곳에서 같은 교우 김 루가와 이
베드로를 만났다. 김 루가는 경주의 양반 가문으로 할아버지는 언양 현감을 지내기도 했는데 충청도 공주에 가서 살 때 김 루가가 태어나고, 그 후
루가는 천주교에 입교했다. 교인이 된 뒤 박해를 피해 상주에 살다가 또다시 울산 대재에 숨어살았다. 여기서 서울 태생으로 박해를 피해 내려와
벌을 치면서 살던 이 베드로와 만나게 된 것인데, 이 두 사람과 허 야고보가 언양 산골에서 우연히 같이 만난 것이다. 같은 교우인 그들은 함께
신앙 생활을 하기로 작정하고 좀 더 안전하고 살만한 곳을 찾던 중, 경주 산내에 있는 단석산 줄기인 소티골에서 천연 동굴을 발견하고 식구들을
데리고 와서 은둔 생활을 시작한 것이다.
좋은 곳이야 아니지만, 뜻 맞는 이들이 모였으니 생활은 활기에 찼다. 남자들은 나무를 베어
깎고 다듬어 나무 그릇을 만들고, 아낙네는 그것을 산내 의곡장이나 건천장에 이고 가 팔아서 일용품과 양식으로 바꾸어 오곤 했다. 허 야고보의 딸
루시아와 아이들은 아랫마을에 가서 품팔이를 하여 먹을거리를 얻어와 끼니를 해결했다. 이것은 살아가는 방편이었고, 오직 천주이신 하느님을 공경하고
이웃을 내 몸 같이 여기는 일을 실천하는 기도 생활을 중심으로 삼았다.
그러나 산중의 굴 속이라고 안전한 것은 아니었다. 계속되는
천주교도 박해의 손길은 이 보금자리에도 미쳤다. 그들은 포졸들에게 붙잡히는 몸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그들은 조금도 겁내거나 마음의 동요도 없이
오히려 당당하게, 머리에서 가슴으로,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 성호를 그으며
“오늘에야 세상일을 마쳤구나.”
하면서 오랏줄을
받았다.
지아비와 아버지가 묶여 가는 모습에,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것보다 더한 막막함이 밀어닥쳐 슬피우는 식구들에게
“천주를 공경할 것이며, 천국에서 다시 만나자.”
고 당부하면서 경주 진영으로 끌려갔다.
경주 감옥에서 두 달
동안 하느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배반하도록 강요받으며 모진 고문을 당했다. 그러나 한 마음으로 순교하기를 바랄 뿐더러 오히려 전교 비용에 보탤
짚신을 삼기도 하며, 서로 위해 주면서 묵상과 기도 생활을 하니 경주부윤도 어쩔 수가 없었다.
끝내 병마절도사가 관할하는 울산
병영으로 이들을 보냈다. 널빤지에 목만 들어내도록 만든 형구(刑具)인 칼을 채워 80리 길을 걷게 하니, 예수가 십자가를 울러메고 골고다 언덕을
오른 것과 다름이 없었다. 울산에서도 견디기 어려운 고문과 문초를 받았지만, 이들의 믿음에는 털끝만치도 흔들림이 없었다.
드디어
1869년 7월 28일 울산 장대벌에서 망나니의 휘번덕거리는 칼에 목이 떨어졌다.
죽기 전 마지막 예우인 술 한 잔을 들이키고는
“부활될 몸이니 자른 목만큼은 제 몸뚱이에 붙여 묻어 다오.”
했단다. 이 때 허 야고보의 나이 47살이었다. 죽음을 앞에
두고 두렵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으리오마는 이들은 오히려 즐겁고 기쁜 표정이었으니 구경꾼들은 ‘희한한 천주학쟁이’들의 마지막 순간에 넋을 잃고
멍하니 바라볼 뿐이었다.
한편 허 야고보의 아내는 첩첩 산중에 어린 아이들을 남겨두고, 경주 감옥에 옥바라지를 나섰다가 울산까지도
따라갔다.
장대벌에서 목베어 죽이는 참수형이 끝나고 관리들이며 구경꾼들이 뿔뿔이 헤어진 후, 숨어서 기다리고 있던 부인은 가까운 둑
아래에다 구덩이를 파고, 머리는 치마폭에다 싸고, 몸뚱이는 한 사람씩 업어다가 옮기고는 모래흙을 덮었다.
그 후 1886년 신앙의
자유가 허락된 이듬해, 순교한 지 19년만에 이들의 유해를 거두어 산내면 내일리 참나무징이, 남은 식구들이 동굴에서 나와 살던 마을 뒷산에
이장하였다.
그 후에 다시 그 유해는 대구 복자성당으로 재이장 하였고, 이 자리에는 헛묘만 만들어 두었다. 흔히 진목정(眞木亭)
성지라고 하는데, 참나무를 한문으로 적다 보니 진목(眞木), ‘징이’라는 우리말의 어미(語尾)를 정(亭)으로 적은 것이다.
경주시
산내면 내일2리 소티마을 뒷산에 숨어살던 동굴이 있고, 산등성이 너머 약 200m쯤 떨어진 양지 쪽에 순교자 세분이 묻혔던 묘가 있다.
산내 의곡에서 쇠동골로 가는 포장된 도로의 동쪽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