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어 / 최승호
밤의 식료품 가게 케케묵은 먼지 속에 죽어서 하루 더 손때 묻고 터무니없이 하루 더 기다리는 북어들, 북어들의 일 개 분대가 나란히 꼬챙이에 꿰어져 있었다 나는 죽음이 꿰뚫은 대가리를 말한 셈이다 한 쾌의 혀가 자갈처럼 죄다 딱딱했다 나는 말의 변비증을 앓는 사람들과 무덤 속의 벙어리를 말한 셈이다 말라붙고 짜부라진 눈, 북어들의 빳빳한 지느러미 막대기 같은 생각 빛나지 않는 막대기 같은 사람들이 가슴에 싱싱한 지느러미를 달고 헤엄쳐 갈 데 없는 사람들이 불쌍하다고 생각하는 순간, 느닷없이 북어들이 커다랗게 입을 벌리고 거봐, 너도 북어지 너도 북어지 너도 북어지 귀가 먹먹하도록 부르짖고 있었다
고비와 고비 / 최승호
고비에서는 고비를 넘어야 한다 뼈를 넘고 돌을 넘고 모래를 넘고 고개 드는 두려움을 넘어야 한다
고비에서는 고요를 넘어야 한다 땅의 고요 하늘의 고요 지평선의 고요를 넘고 텅 빈 말대가리가 내뿜는 고요를 넘어야 한다
고비에는 해골이 많다 그것은 방황하던 업덩어리들의 잔해
고비에서는 없는 길을 넘어야 하고 있는 길을 의심해야 한다 사막에서 펼치는 지도란 때로 모래가 흐르는 텅 빈 종이에 불과하다
길을 잃었다는 것 그것은 지금 고비 한복판에 들어와 있다는 것이다
입적 / 최승호
꽃이 없으면 어떻게 하나님이 피어날 수 있으며 새가 없으면 어떻게 하나님이 노래할 수 있을까 나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데 하나님은 나를 믿고 나무들을 믿고 물고기들을 믿는다 그렇지만 이 사막에서 하나님은 그저 입적해 있을 뿐이다 거친 모래 태양에 그을은 돌들 십자가도 없다 교회도 없다 구원도 없다 예수는 아마 이런 곳에서 홀로 영혼의 고비들을 넘겼으리라
텔레비전 / 최승호
* 제 3회 미당문학상 수상작
詩語 가게에서 / 최승호
저녁 범종소리 / 최승호
바람 자는 숲속 길을 걷다가 문득 범종소리를 들었다. 살아갈수록 멀어지는 진심이 내 안에도 진흙 속의 푸른 하늘처럼 펼쳐져 있음을 일깨우는 저 범종 소리에, 이미 대나무며 상수리나무들은 다 깨달아 별스런 일도 없는데, 오직 나 하나만 우둔한 먹통으로 남아 있는 것은 아닌지. 정말 나 하나만 천하의 먹통이라면, 저 범종소리는 다름아닌 무쇠공 같은 나를 깨기 위해 저렇게 거듭거듭 울고 있는 것이리라.
멍게 / 최승호
멍청하게 만든다
멍게는 참 조용하다.
허물덩어리인 나를 흉보지 않고
바다에서 온 지우개 같은 멍게 멍게는 나를 멍청하게 만든다. 무슨 말을 해야할지 생각을 지워버린다 멍!
멍.
******************************************** 최승호 시인
1954년 강원도 춘천에서 출생 오늘의 작가상, 김수영문학상, 이산문학상, 대산문학상 미당문학상 수상
시집 『대설주의보』『고슴도치의 마을』『진흙소를 타고』 『세속도시의 즐거움』『회저의 밤』『반딧불 보호구역』 『눈사람』『여백』『그로테스크』『모래인간』등 산문집 『황금털 사자』『달마의 침묵』『물렁물렁한 책』등 그림책 『누가 웃었니?』『이상한 집』
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 포효하는 적막의 초대…최승호 시집 ‘고비’ 출간
'나는 적막이 포효하는 소리를 들었다. 적막은 사자처럼 포효했고
그 포효에 나는 놀랐다. 나의 말들은 저 적막에게 먹힐 것이다.
모든 의미들은 적막의 이빨에 씹힐 것이며 소리들은 적막의 목구멍
으로 흘러들 것이다. 적막은 죽지 않았다. 죽기는커녕 적막은 펄펄
살아 있다. 나의 말들, 적막에 예민하게 반응한 것은 나의 말들이었다.
말들은 위협을 느꼈고 어디로 도망치고 싶었으나 갈 곳이 없었다.
'(시 '포효' 일부)
최승호 시인(53)이 지난해 몽골 고비사막 한가운데서 만난 건
적막이었다.
"눈이 있지만 볼 대상이 없고 귀가 있으나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아
마침내 자신의 귀울음 소리만 남는"그런 사막에서 그는 70여편의
시를 건져올렸다. 이번에 나온 그의 12번째 시집 '고비'(현대문학)가
그것이다.
올해 등단 30주년을 맞은 그는 첫 시집 '대설주의보' 이후 '고슴도치의 마을' '세속도시의 즐거움' '회저의 밤' '그로테스크' '아무 것도 아니
면서 모든 것인 나' 등의 시집을 2~3년마다 또박또박 내면서 우리 곁을
지켜왔다. "모든 것을 처음 보고 처음 말하는 듯한 사람인 시인"으로서
존재와 무, 언어와 사물의 관계를 질문해왔던 그의 시들은 근년에 이르
러 선(禪)의 경지를 탐구하면서 시어를 통해 말할 수 없는 것들을 가리
키는데 몰두해왔다.
새 시집 '고비'에서는 사막이란 특별한 환경이 주는 시적 영감으로 인해 우주, 바람, 모래, 그리고 모든 것의 시작이자 끝인 고요와 한통속이 된
듯한 존재의 느낌이 실감나게 그려진다. 초원을 모래로 바꾸는 강렬한
햇빛, 가도가도 끝이 없는 둥근 지평선, 모래 속에 굴러다니는 짐승들의
하얀 뼈, 그 속의 한 점이면서 눈에 보이지 않는 고운 모래를 들숨으로
몸안에 운반하는 나…. 이처럼 모든 것을 무(無)로 만드는 사막에서의
소멸을 그는 빨래에 비유한다.
'사막의 빨래란 물이 필요 없다. 모래들로 씻고 바람과 햇볕으로 말리면 된다. 가령 낙타들의 시체가 널려 있다고 하자. 사막은 그 더러움을
내버려두지 않는다. 뼈만 남을 때까지 뼈 아닌 모든 것을 제거해버리는
것이다. 뼈 외에는 모든 것이 때다. 털가죽도 때, 오장육부도 때, 힘줄도
지방질도 혈관도 때에 지나지 않는다. 사막의 빨래는 거품도 일으키지
않으면서 밤낮으로 계속된다. 거듭 씻고 말리다보면 나중에는 뼈가
백색이다.'
(시 '빨래' 일부)
그런 사막 속에서 그는 시만을 붙들고 있었다. 사막이 주는 적막과 공포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들을 뚜렷이 보여주었고 그것이 언어
와 대상의 1 대 1 대응을 거부하는 시어의 존재를 더욱 부각시켜
시인의 촉수를 건드렸기 때문이다. 그에 따르면 사막은 우리를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 침묵하도록' 초대한다.
'별똥별이 떨어진다/그것은 적막을 가르며 적막 속으로 떨어진다 /우리는 이름 붙일 수 없는 것에 이름을 붙인다/의미 없는 것에
의미를 붙이고/의미 있는 것에서 의미를 지워버린다/사막의 초대
는 그렇다/이름 붙일 수 없는 것들을 보고/이빨이 남아 있을 때
허무를 물어뜯어 보라는 것이다.'
(시 '별똥별' 일부)
"가기 전에 사막의 문체는 어떤 것일까 생각했는데 사막의 삶은 리듬과 반복이란 걸 알았습니다." 이번 시집은 "언어를 물감처럼
사용"했던 이전 시들에 비해 "언어를 음표처럼 사용"함으로써
말의 음악성이 도드라지는 게 특징이다.
그가 고비사막에 간 건 지난해 7월 KBS에서 방영된 다큐멘터리 '고비가 아름다운 이유'를 촬영하기 위해서였다. 열흘간 2000㎞의
고비사막을 횡단했다. 매우 특이하고 충격적인 경험이었지만
6개월간 70편이 넘는 시가 계속 쏟아져나올 줄은 자신도 몰랐다.
그곳에서 심장박동과도 같은 시의 리듬을 체득한 그에게 올해는 3권의 시집을 더 내는 풍성한 해가 될 듯하다. 그를 유명한 동요
시인으로 만든 '말놀이 동시집' 3권, 역시 동시집인 '펭귄',
그리고 몇 년 간 준비해온 13번째 시집 '뿔쥐'이다. |
출처: 詩의 향기 / 무명시인을 찾아서 원문보기 글쓴이: 동산
첫댓글 체험을 통해 나오는 시는 살아 움직이는 느낌이 좋습니다. 대사를 앞두고 건강하기 바랍니다.
詩語 가계에서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따님의 결혼을 진심으로 축하를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