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에 빠져 살던 대학생 시절 에밀 쿠스트리차의 작품들을 무척 좋아했습니다. 낯선 질감의 화면안에서 정신없이 전개되는 비현실적인 이야기들, 허를 찌르는 따뜻함과 유쾌함이 정말 매력적이었죠. 잘빠진 상업용 웰메이드 영화에서 맛보기 힘든 특유의 가공되지 않은 감각을 좋아했고, 영화를 한편 보고나면 2시간동안 낯선 축제를 즐기다온 기분이 들곤 했습니다.
특히 제가 좋아했던 작품은 말도안되는 인물들이 말도 안되는 조화를 이뤄내는 마법같은 영화 '검은 고양이 흰 고양이'였습니다. 그리고 사진의 '키다리와 딱정벌레'는 부조화의 조화를 보여주는 영화속의 대표적인 커플입니다. 결혼식날 도망치던 난쟁이 신부 '딱정벌레'와 장례식에 가던 꺽다리 총각'키다리' 는 우연히 길에서 만나 첫눈에 사랑에 빠지게 되죠, 너무나 달라서 어울리지 않지만 그래서 정말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는 두 사람.
캬캬캬, 너네 둘 정말 안어울려!!!
멤피스에도 그런 두 사람이 있습니다. 외모도 살아온 삶도, 플레이 방식도 너무나 다르지만 그래서 더욱 아름다운 조화를 만들어내는 콤비죠.
유복한 환경에서 자라나 훤칠한 외모에 세련된 플레이를 하는 센터 마크 가솔과
어려운 환경에서 자라나 없어보이는 외모에 전투적인 플레이를 하는 파워포워드 쟈크 랜돌프.
재정적 유동성을 위해 게이를 내보내면서도 랜돌프는 지켜야했을 만큼 이 콤비는 올드스쿨 농구를 추구하는 멤피스의 강력함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리그의 손꼽히는 프론트코트 콤비로 성장한 지금이야 이상적인 조화를 이루는 파트너로 서로 대체할 수 없는 존재가 되었지만, 2009년 결성 당시에는 우려의 목소리가 더 많았습니다. 순조롭게 성장중이던 2년차 모범생 가솔의 파트너로 영입한 악동 지보의 과거가 너무 화려했기(?) 때문이었죠.
랜돌프는 아버지 없이 어머니, 세 동생과 함께 경찰들이 흑인 아이들을 이유없이 린치하는 동네에서 가난하게 살았습니다. 늘 같은 청바지를 입고 다녀서 아이들의 놀림을 받던 어린 랜돌프는 어느날 월마트에서 청바지를 훔치다 걸렸고, 소년원에서 30일을 보내게 되죠. 이것이 시작이었습니다. 훔친 총기와 관련되어서 다시 소년원에 갔고 미성년 음주로 체포되기도 했습니다.
" 14살, 15살, 16살...매우 중요한 시기죠. 전 아버지 같은 사람이 없었어요. '자크야 이런건 하지 마라','집에 있어라','성적표는 어디있니' 제게 아버지가 있어서 이런 말들을 해줬다면... -자크 랜돌프
불행히도 제대로 어른이 되지 못한 랜돌프는 리그에 와서도 "Jail Blazers의 멤버로 활약했고, 이기적인 플레이어라는, 정신적 미성숙으로 팀분위기를 망치는 선수라는 꼬리표를 달고 다녀야 했습니다. 20-10을 찍어내는 엘리트 빅맨이었지만 그의 팀은 패배하는 일이 많아졌고, 그 원흉으로 지목되며 쫓겨나다시피 팀을 옮겨다녀야 했습니다. 2009년, 부상으로 커리어가 거의 끝나가던 퀸튼 리차드슨과 트레이드 되어 멤피스로 올때도 마찬가지였죠.
하지만 거짓말처럼 멤피스와 그리즐리스는 엉망진창으로 살아온 28살의 랜돌프를 따뜻하게 맞아주었습니다. 그의 과거를 들먹이며 의심어린 눈초리를 보내기 보다 도시의, 팀의 일원으로 받아주었죠. 정이 많고 사람좋았던 랜돌프는 그동안 자신을 이용하는 환경속에서 잘못된 행동들을 해왔지만, 마침내 자신을 진실되게 맞아주는 곳에 오게 되었고 다른 사람이 되어갔습니다.
“이곳은 언더독 도시입니다. 당신의 과거가 어땠는지, 어떤 말썽을 일으켜왔는지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앞으로 무엇을 할것인지를 알기 원하죠. 당신이 멤피스에 와서 이곳을 소중히 여긴다면 멤피스는 당신을 따뜻하게 안아줄것입니다. - 크리스 왈라스(멤피스 GM)
그리고 랜돌프도 멤피스를 제2의 고향으로, 그리즐리스를 자신의 팀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지역의 어려운 청소년들과 싱글맘들을 돕기 위해 봉사해 왔고, 이러 노력을 인정받아 1월에는 Kia Community Assist Award를 수상하기도 했습니다. 트레이드 루머가 한창일때는 트레이드 되더라도 여름에는 멤피스로 돌아와 농구캠프를 열고 싶다고 말하기도 했죠. 토니 로튼처럼 어린 루키들에게 진심어린 충고를 해주기도 합니다.
“내려가본적이 있기 때문에 어린 선수들에게 해줄말이 있죠. 전 넉다운 되었다가 일어나 봤기 때문에 역경을 다룰줄 알아요. 높은 곳에도 낮은 곳에도 있어보았기에 더 강해질수 있었고요.” - 자크 랜돌프
악명만을 가지고 멤피스에 왔던 28살 랜돌프는 31살이 된 지금, 자신이 받지 못한 사랑을 주려는 책임감 있는 아버지로, 지역사회의 성숙한 시민으로, 어린 선수들을 격려해주는 팀의 맏형으로 변하였습니다.
" 전 항상 책임감을 느끼며 플레이합니다. 제 잘못된 지난 모든 삶을 사람들에게 다시 증명해야 하죠. 그것이 제가 지금 하고 있는 일입니다." - 자크 랜돌프
랜돌프의 인성적 변화는 가솔과 랜돌프가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는데 가장 중요한 요소였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걱정이 되었던 것은 랜돌프의 이기적인 농구였죠. 그리고 랜돌프는 그것마저 이겨냈습니다.
" 쟈크가 어떻게 플레이 해왔는지 알고 있어요. 굉장히 열심히 플레이 하는 것을 항상 높이 평가해왔습니다. 비록 사람들은 그를 블랙홀이라고 부르지만, 전 케빈 맥헤일같은 블랙홀은 없었다고 생각해요. 맥헤일도 동료들과 어떻게 농구하는지를 배웠고 비로소 멋진 패스를 하게 된거죠." - 라이오넬 홀린스
3명이 붙어도 슛, 4명이 붙어야 패스라는 마인드로 유명했던 블랙홀 맥헤일보다는 한수 아래지만 랜돌프도 내키면 패스, 내키지 않으면 곧 죽어도 슛이라는 마인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랜돌프나 맥헤일이나 패싱 스킬이나 센스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다만 농구를 바라보는 시각의 차이였죠. 자신의 득점을 위한 플레이가 아니라 팀의 승리를 위한 플레이를 이해해야 했습니다.
사실 블랙홀 시절에도 랜돌프는 꾸준히 어시스트 2개이상을 기록해주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랜돌프의 경기를 보면서 '생각보다 블랙홀이 아닌데?' 라는 혼란을 겪기도 했죠. 더블팀을 당할때 외곽으로 빼주는 킥아웃 능력이 나쁘지 않았거든요. 다만 블랙홀 시절 랜돌프는 팀이 필요로할때가 아니라 자신이 내킬때 그런 패싱력을 발휘했을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닙니다. 비록 어시스트 갯수는 그대로이지만, 랜돌프의 플레이에는 이기적인 욕망대신 팀을 위한 헌신이 묻어나고 있습니다.
" 매일저녁 나의 게임을 하며 무언가를 만들어내기 위해 노력합니다. 팀이 필요로하는 것은 무엇이든 줄것입니다. 리바운드, 수비 어떤것이던지요." - 자크 랜돌프
인간으로서 농구선수로서 스스로를 변화시킨 랜돌프 덕분에 도저히 어울릴것 같지 않았던 멤피스의 빅맨 콤비가 탄생할 수 있었습니다. 단순히 보아도 하이포스트에서 패스를 즐기는 다재다능한 센터와 로우포스트에서 열정적으로 비벼주며 득점과 리바운드를 책임지는 파워포워드의 조합은 강력해 보입니다. 하지만 이 콤비의 진정한 강력함은 유니크함에 있습니다.
현재 리그에는 페이스업과 픽앤팝을 즐기고 기동력과 높이로 수비하는 운동능력 좋은 빅맨들이 트렌드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물론 덩치큰 전통 빅맨들이 없는것은 아니지만 대부분은 자신의 커다란 몸을 제대로 이용하지 못하고 플레이합니다. 특히 공격쪽으로는 말이죠. 이런 상황에서 커다란 덩치를 공수에서 효율적으로 이용할 줄 알고, 세련된 기술과 부드러운 터치의 좋은 손을 가진 두 빅맨의 조합은 매우 강력할 수 밖에 없습니다.
지보는 현 리그에서 매우 유니크한 빅맨이고, 가솔은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스마트한 선수죠. 이들은 정말 멋진 조합이에요. - 그렉 포포비치
그들은 리그에서 가장 피지컬한 플레이를 하고, 서로 역할을 바꾸어가면서 플레이를 시작합니다. 그리고 정말 다이다믹한 플레이들을 만들어 내죠. - 에릭 스포엘스트라
가솔과 랜돌프는 그들의 화려한 운동능력이 아니라, 세밀한 기술과 센스로 하이라이트를 만들어 내는 빅맨 콤비이고, 그들의 하이로우 게임은 팬들의 눈을 즐겁게 해주는 멤피스의 가장 강력한 무기입니다.
어제 8연승으로 2월을 마무리한 댈러스와의 경기를 2시간 반동안 보면서, 마치 에밀 쿠스투리차의 영화를 보는듯한 유쾌함을 느꼈습니다. 분명 말도 안되는 엉망진창 플레이들에 턴오버 잔치였는데, 답답하기보다는 이상하게 웃음이 나는 경기였습니다. 그 중심에는 어울리지 않는 모습으로 조화를 이뤄내는 두 빅맨 콤비의 활약이 있었죠.
블락을 당해 우스워진 자세로도 끝까지 공격 리바운드를 잡고자 비벼대는 랜돌프,
전혀 멋있지 않은 자세로(점프를 거의 하지 않아서 ) 중요한 순간마다 미들슛을 꽂아넣는 가솔.
마치 영화속의 허술한 캐릭터들 같았던 두 선수는 그러나 말도 안되는 조화를 이루며 나란히 20-10의 활약으로 팀의 승리를 이끌었습니다. 이제 내일 마이애미 원정을 시작으로 3월 멤피스의 험난한 일정이 시작됩니다. 정규 시즌 후에는 진정한 시험대인 플옵이 기다리고 있죠. 왠지 3월 한달동안 멤피스가 엉망진창 깨질것 같습니다. 아직 다져지지 못한 팀으로 강팀들과 연달아 원정경기를 가져야 하는데, 3할 야튜율로 무엇을 할수 있을지 걱정이 됩니다. 4번시드를 덴버에게 내줄 수도 있겠죠.
하지만 또 왠지 멤피스의 이번 시즌은 해피엔딩일것 같습니다. 2시간 내내 정신없이 망가지던 쿠스트리차의 영화가 늘 해피엔드로 끝나는 것처럼. 멤피스가 자랑하는 정말 어울리지 않는 이 빅맨 콤비가 결국엔 행복한 결말을 선물해줄것 같은 느낌이 들거든요.
첫댓글와 언더독님의 글솜씨는 마음을 따뜻하게 해주고 유쾌하게 만들어주는 무언가 힘이 있습니다. 그리고 덕분에 몰랐던 랭돌이의 모습들을 더 알게되었네요. 마크와 자크 두 크자 돌림(?)콤비가 대중들에게 알려지는 이미지는 크지 않지만 그 어떤 콤비보다도 강력한 힘을 가졌다고 믿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멤피스 미래의 키라고 할 수 있죠. 더 욕심은 에드데이비스가 랭돌이의 스킬과 농구본능을 배워서 랭돌이의 거대계약이 끝날시점에는 에드가 랭돌이의 후계자가 되고 랭돌이는 팀의 프랜차이즈로 저렴하게 멤피스보이로 남았으면 하는것이죠. 물론 그 과정 중에 깜짝놀랄만한 업적도 기대하고 있구요^^
마크 자크 정말 이름도 운명처럼 연결되어있는것 같습니다. ㅋㅋ 에드 데이비스가 가솔의 새로운 파트너가 될 수 있을까요? 랭돌이가 다른 팀으로 가는건 이제 상상하기 힘든일이 되었지만, 다음 오프시즌에 왠지...ㅜㅜ 어쩌면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이번시즌 지보가 후회없는 활약을 해줬으면 좋겠네요.
당연히 우승이죠^^ 그런데 또 파이널도 나쁘지 않고, 컨파정도도 역사상 최고의 성적이죠. 참 그동안 해논게 없으니, 앞으로 새로 할 수 있는 것들도 많이 남았네요. 다만 토니도, 랜돌프도 다음시즌을 기약할 수 없는 상황인데 지금 핵심 멤버로 후회없는 경기들을 해줬으면 좋겠습니다. 그건 꼭 보고 싶네요.
첫댓글 와 언더독님의 글솜씨는 마음을 따뜻하게 해주고 유쾌하게 만들어주는 무언가 힘이 있습니다.
그리고 덕분에 몰랐던 랭돌이의 모습들을 더 알게되었네요. 마크와 자크 두 크자 돌림(?)콤비가 대중들에게 알려지는 이미지는 크지 않지만 그 어떤 콤비보다도 강력한 힘을 가졌다고 믿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멤피스 미래의 키라고 할 수 있죠. 더 욕심은 에드데이비스가 랭돌이의 스킬과 농구본능을 배워서 랭돌이의 거대계약이 끝날시점에는 에드가 랭돌이의 후계자가 되고 랭돌이는 팀의 프랜차이즈로 저렴하게 멤피스보이로 남았으면 하는것이죠. 물론 그 과정 중에 깜짝놀랄만한 업적도 기대하고 있구요^^
마크 자크 정말 이름도 운명처럼 연결되어있는것 같습니다. ㅋㅋ 에드 데이비스가 가솔의 새로운 파트너가 될 수 있을까요? 랭돌이가 다른 팀으로 가는건 이제 상상하기 힘든일이 되었지만, 다음 오프시즌에 왠지...ㅜㅜ 어쩌면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이번시즌 지보가 후회없는 활약을 해줬으면 좋겠네요.
좋은글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좋게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랜돌프와 가솔이 꼭 해피 엔딩으로 마무리 해 줬으면 좋겠네요. 그런데... 해피 엔딩의 기준이 뭘까요. 우승? 파이널진출? 서부컨파 진출? 뭐가 되었든 그리즐리스 역사상 최고의 시즌이 되길 바래봅니다. 항상 좋은 글 감사드립니다 언더독님.
당연히 우승이죠^^ 그런데 또 파이널도 나쁘지 않고, 컨파정도도 역사상 최고의 성적이죠. 참 그동안 해논게 없으니, 앞으로 새로 할 수 있는 것들도 많이 남았네요.
다만 토니도, 랜돌프도 다음시즌을 기약할 수 없는 상황인데 지금 핵심 멤버로 후회없는 경기들을 해줬으면 좋겠습니다. 그건 꼭 보고 싶네요.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