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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현인(賢人)의 길
사바는 흙탕이나 죽림(竹林)엔 청풍 일어
잔 잡고 달에 물어 현인(賢人)이 취할 길을
산 속의 은일(隱逸)보다야 화광동진(和光同塵) 낫겠지
* 칠현산(七賢山 516m); 경기 안성. 한남정맥(漢南正脈)의 시발점이자, 수도권에서 가까운 산으로 좋은 삼림(森林)과 희귀 동식물은 생활에 찌든 도시민에게 더없는 활력소를 제공한다. 산죽이 많고 달빛을 감상하기 좋아, 죽림칠현의 기품을 지녔다. 느닷없이 이백의 명시 파주문월(把酒問月)이 떠오른다.
* 현인; 원뜻은 어진 사람이나, 탁주(濁酒)를 일컫기도 한다. 청주(淸酒-젓내기, 호랑이술, 용수 등으로 부름)를 성인(聖人)이라 함에 대(對).
* 속세에서 벗어나는 길은 세상과 인연을 끊고 산중에 숨어야만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다른 사람들과 같이 부대끼며 살아가는 속에 있다(채근담).
* 화광동진(和光同塵); 자기의 지덕(智德)과 재기(才氣)를 감추고, 세속을 따름(노자 도덕경).
* 《시산》 제51호 2006년 여름호 5수.
* 졸저『한국산악시조대전』부제 산음가 山詠 1-568(416면). 2018. 6. 25 도서출판 수서원.
12. 도술 부린 비석
산맥을 갈라놓은 주승(主僧)의 도술 앞에
지팡이 잃은 소경 해우소를 더듬대고
피 토해 쓰러진 석비 해탈한 듯 일어나
* 칠장산(七長山 492m); 경기 안성. 칠현산 북쪽 2km 지점에 위치하며, 한남금북정맥(漢南錦北正脈)의 출발점이다. 산세는 칠현산과 비슷해, 보통 포괄개념으로 다룬다. 상설(詳說)하면, 이 산 북쪽능선은 관해봉(觀海峰 458m), 도덕산을 거쳐 문수산으로 이어지는 한남정맥이다, 동으로는 375봉을 지나 보현봉으로 이어지는 한남금북정맥, 남쪽은 칠현산, 덕성산을 지나 성거산으로 이어지는 금북정맥(金北正脈)이 되는 3정맥의 중요 분기점이다. 초입 칠장사에는 반쯤 깨진 유명한 혜초국사비가 오늘도 국운상승을 기원하듯 숙연하고, 노송 숲에는 산새소리가 요란하다. 속세에 눈먼 나는 어디로 가는 걸까?
* 맹인실장(盲人失杖); 소경이 지팡이를 잃음, 즉 ‘의지할 곳’을 잃음의 비유.
* 졸저『한국산악시조대전』제 416면.
13. 잔 위 맴돈 치누크
억새꽃 서걱대는 숙살(肅殺) 띈 정수리
갈매빛 등성이에 강쇠바람 불어오니
힘 잃은 왕잠자리만 소주잔 위 맴돌고
* 표때봉(867.8m); 강원 횡성 평창. 답사(踏査) 산행 차 갔는데, 산정(안흥 306, 1989재설 삼각점)은 80평 내외의 헬리포트로 잔디와 억새가 무성하다. 마침 초록빛 왕잠자리를 닮은 거대한 미군 ‘치누크’ (CH-47) 헬리콥터 한 대가 굉음을 울리며 상공을 날고 있고, 하필 그때 잠자리 한 마리가 정상주(頂上酒)를 마시고 있는 우리 주위를 맴돈다. 무엇이 푯대 구실을 하는지 알 수 없다.
* 왕잠자리; 여름철부터 초가을까지 못 개울가 논 등에 자주 나타나며 비행술이 의젓하다. 어릴 때 무슨 뜻인지 모르지만 “철기! 철기!” 외치며 잡으려 했으나, 잘 잡히지 않는다.
* 강쇠바람; 초가을에 부는 동풍의 우리말.
* 현철(賢哲)의 계절 가을! 속인(俗人)은 봄을 좋아하고, 선인(仙人)은 가을을 좋아한다. 푸르던 생의 푯대마저 바래지고, 이제는 쓴 소주잔만 기울이는 처량한 신세다. 힘 잃은 가을 잠자리만, 방가위지(方可謂之) 잔 위를 맴돌며 술벗이 돼주니..
* 졸저『한국산악시조대전』제 429면.
14. 추계별곡(秋溪別曲)
-진동계곡에서 소요유(逍遙遊)
청정한 유리계곡 흩어지는 낙엽들
색동 빛 돌개바람에 몸 가누지 못하다
선객(仙客)의 바람개빈양 원무(圓舞) 추는 나비 떼
* 점봉산 아침가리 진동계곡; 강원도 인제군 기린면 진동리에 있는 유리알처럼 투명한 청정계곡이다. 마침 회오리바람에 낙엽들이 빙글빙글 돌며 나비 떼처럼 하늘로 날아오른다. 나도 덩달아 나비가 돼, 아니 장주(莊周)가 되어 호접몽(胡蝶夢)을 꾼다.
* 바람개비는 어린이용 장남감으로 팔랑개비, 도르라미라 한다.
* 졸저『한국산악시조대전』제 367면.
15. 미사일로 세운 음경(陰莖)
열두 폭 병풍가려 치마 끈 끌러버린
심산(深山)의 요부(妖婦)라나 여궁폭포 앞에서
우꾼히 세운 저 음경 대포동의 미사일
* 주흘산(主屹山 주봉 1,075m); 경북 문경의 진산이자, 소백산맥의 주봉으로 서쪽과 남서쪽을 제외하면 깎아지른 암벽이다. 문경읍에서 보면 철옹성(鐵甕城)이 둘러쳐진 범접할 수 없는 당당한 기상이다. 산수병풍을 펼친 듯 사계절 다 좋지만, 가을이 더 아름답다. 주흘관(조령 제1관) 동쪽 노말 루트 곡충골에 높이 10여m의 여궁폭포와 푸른 이끼는 여성의 음부를 빼 닮아, 지나가는 남정네를 모두 우꾼하게 만든다. 산꾼이 벌떡 세운 음경이 얼마나 크기에 주흘산 영봉(1,106m)만 할까?
* 대포동(大浦洞) 미사일; 북한의 중·장거리 탄도미사일. 사정거리 1,500~2,500km, 탄두무게 500kg이며 액체 및 고체 연료를 사용하는 미사일이다. 대포동 1호는 노동1호를 개량한 2단계 중·장거리 로켓으로 알려져 있다. 1단계 로켓은 노동 1호를, 2단계 로켓은 스커드 B 미사일을 개조한 것으로 추측된다. 대포동 2호는 2006년 7월 5일 시험 발사 되었는데, 발사한지 약 40초 만에 공중 폭발했다.(다음백과)
* 문경(聞慶); 문희경서(聞喜慶瑞)의 준말이다. 문희(聞喜)는 고려시대 문경의 옛 이름이다. 기쁜 소식을 듣게 된다는 뜻이며, 경서(慶瑞)는 경사스럽고 상서로운 일의 조짐을 말한다. 문경은 한반도의 정기가 다 모이는 곳으로, 장래가 촉망되는 지역이다.(2019. 5. 25 추석 추가)
* 졸저『한국산악시조대전』제 381면.
16. 한계세이(寒溪洗耳)
가랑잎 살 구르는 쓸쓸한 산중 고성
소쩍새 밤 지새운 찬 개울에 귀 씻을 적
마지막 잎새에 스친 한 줄기의 실바람
* 설악산 한계고성(寒溪故城) 릿지; 설악산 한계리(물한골) 옥녀탕에서 안산(鞍山)에 이르는 험준한 능선에 쌓은 산성으로 현존 약 2km에 달한다(강원도 지방기념물 제17호). 신라 경순왕 때부터 축조하기 시작했다는 고성인데, 현재 학술조사 목적이외에는 출입이 금지된다.
* 세이; 더러운 말을 들은 귀를 씻고 깨끗이 함. 옛날, 요(堯)가 천자(天子)의 위(位)를 허 유(許由)에게 물려주겠다고 말하자, 허 유가, 은자(隱者)인 자기는 자기본분에 따르고 싶다고 거절한 후, 더러운 말을 들었다고 해서 귀를 씻었다는 고사에서 온 말.
* 조락(凋落)의 철 가을이 오면 ‘존재에 대한 철학적 사유(思惟)’를 한번 쯤 해보게 된다. 자기의 관점에서 본다면 이 광대한 우주도 자기만큼 귀하지 않으나, 우주 전체에서 본다면 자기라는 존재는 티끌에도 미치지 못한다.
* 《山書》 제15호 2004년 설악산 특집 ‘설악8제’ 산악시조.
* 졸저『한국산악시조대전』제 277면.
* 시조 중장 앞 구 두견새는 오류라, ‘소쩍새’로 바꿈.(2019. 9. 23 추분)
17. 낙과(落果)
암릉은 옹골차고 홍송(紅松)도 늠름한데
유곡에 널브러진 개다래 도사리들
떠름한 뒷맛일망정 감똑보다 못하랴
* 중원산(中元山 799.8m); 경기 양평. 푸른 용이 기어오른 계곡(龍溪-용계)이 수려하고, 아기자기한 암릉과 아름드리 홍송이 어우러진 산이다. IMF환란이 극심했던 1998년 9월 20일 이 산을 처음 오를 때만 해도 엄연한 직장인 이었는데, 그해 연말 조기퇴직을 종용(慫慂)해오기에, 만 51살로(원래 정년은 58살)타의(他意)에 의해 직장을 그만두고 말았다. 그 후 경제가 더 어려울 적 40대에 직장에서 내몰리는 경우를 보고, 나 같은 낙과(도사리)보다 더 못한 사람도 있구나 싶어, 2002년 2월 20일 제2차등산 시 그 회억(回憶)을 한번 읊어본다.
* 개다래; 다래나무과에 속하며 깊은 산속이나 계곡 인근에 자생한다. ‘목천료’(木天蓼)라 부르며 입 줄기, 열매 모두 약용한다. 열매는 완전히 익지 않으면, 떫고 쓰서 그냥 먹기 몹시 역겹다. 염증을 삭이고 통증을 억제해 통풍치료에 효험이 있다. 고양이병을 치료하며, 고양이과 동물의 성적 흥분작용을 일으키는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 감똑; 꽃과 함께 떨어진 어린 감, ‘감또개’의 준말.(재미나는 우리말 도사리 장승욱 126면)
* 졸저『한국산악시조대전』제 383면
18. 흑마(黑馬)의 반추(反芻)
서북릉 내달리다 우뚝 선 흑마여
잘려진 목 하나를 빈 안장에 매단 채
회한(悔恨)은 여물이 아닌데 되새김질 왜 하니
* 안산(鞍山 1,430.4m); 강원 인제. 기암이 즐비한 바위산으로, 만병초, 주목, 눈측백나무 등 희귀식물이 많다. 검은 말처럼 내달리는 설악산 서북능선에 매단 말안장이다!
* 귀거래혜(歸去來兮)-중략-오이왕지불간(悟已往之不諫)지래자지가추(知來者知可追)-이하 략; 지난 일은 고칠 수 없음을 깨달아, 장래에는 쫓아서 틀리지 않을 것을 알았노라!-도연명의 ‘귀거래사’에서. 지난 일은 되돌릴 수 없는 법! 후에 되씹어봤자 아무 소용없다.
* IMF 환란시절이라, 반 강제로 직장에서 목이 잘렸다.
* 《山書》 제15호 설악산 특집 ‘설악8제’ 산악시조.
* 졸저『한국산악시조대전』제 309면.
19. 범고래 사냥
등살을 밀어보련 미끈한 촉감일래
뿜어낸 물기둥이 솔새로 비말(飛沫)하는
하늘의 그물에 걸린 흰줄박이 범고래
*거망산(擧網山 標石 1,184m); 경남 함양. 정상부는 범고래의 머리를 닮았고, 억새, 솔새 등이 좋다.
*천망회회(天網恢恢) 소이불루(疎而不漏); 하늘의 그물은 고가 넓어서 걸릴 것 같이 보이지 않지마는, 빠뜨리는 일이 없다는 뜻에서, ‘선은 반드시 흥하고, 악은 반드시 망함’을 이르는 말(노자). 줄여 천망불루라 한다.
* 해동문학 창간10년 기념 시선집 5수. 2006년.
* 졸저 『한국산악시조대전』 부제 산음가 山詠 제1-24번(60면). 2018. 6. 25 도서출판 수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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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gd auf Killerwale
Ich habe versucht, mein Rückenfett zu drücken, und es fühlte sich glatt an.
Die sprudelnde Wassersäule sprüht wie eine Seekiefer.
Weißstreifen-Killerwal, gefangen in einem Netz am Himme
* 2024. 3. 8 독어 번역기.
20. 취향기(醉香記)
사스레 노인들과 수담(手談)은 끝없는데
얼치기 훈수하는 청맹과니 가문비나무
유곡(幽谷)의 참당귀향이 숨은 외곬 귀띔해
* 소계방산(小桂芳山 1,490m); 강원 홍천. 오지의 산으로 주산(主山)인 계방산(1,577m) 북동쪽 도상 약4km 지점에 있다. 버스가 하루 2회 밖에 다니지 않아 접근이 쉽지 않은데다, 등산로가 잘 나있지 않아 애를 먹었다. 오르막이 매우 가파르고, 정점(頂点)은 기대만큼 썩 좋지 않다. 만삼(蔓蔘), 곰취, 야생오미자 등 약용식물이 더러 있고, 하산 능선에 할배 사스레나무 7그루 무리가 근엄(謹嚴)하다. 큰 가문비나무가 몇 그루 있는데, 유감스럽게도 토종이 아닌 독일가문비나무로, 외래종이 왜 여기까지 침투했는지 의문스럽다. 조용하고 깊은 계곡이 유일한 길로, 맑은 참당귀향이 안내자 구실을 한다.
* 군자는 바둑 구경은 하되, 훈수는 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어느 사람의 인생길도 지켜는 보되, 이래라 저래라 간섭은 하지 않는다!
* 청맹과니는 ‘눈뜬봉사’ 또는 ‘당달봉사’와 비슷한 말이다.
* 길이 끝나는 데서부터 ‘등산’은 시작되고, 일상적인 언어가 끝나는 데서부터 ‘시(詩)’는 시작된다!
* 당귀(當歸); 승검초의 뿌리로, 보혈(補血), 활혈(活血)에 쓰임. ‘마땅히 돌아감’의 뜻이다.
* 해동문학 창간10년 기념 시선집 5수. 2006년.
* 졸저 『한국산악시조대전』 부제 산음가 山詠 1-360(284면). 2018. 6. 25 도서출판 수서원.
21. 거목(巨木)은 위험
한울 님 비듬 터신 달갑잖은 진눈깨비
맞으면 이 생길까 거목 아래 피했더니
쇠심줄 하 질긴 세월이 나의 등을 미노매
* 민주지산(岷周之山 1,242m); 경북 김천, 충북 영동, 전북 무주. 삼도의 분기점(1414년 설정)인 호쾌한 삼도봉(三道峰 1,181m)이 웅거(雄據)해 있고, 마애삼두불(磨崖三頭佛)의 미소를 머금은 석기봉(1,200m)을 거느리고 있다. 옥빛 물한계곡을 끼고 있으며, 삼남(三南)을 굽어보는 능선이 장대하고, 수림도 울창하다. 대동여지도와 동국여지승람에는 백운산(白雲山)으로 되어 있다. 마침 원치 않은 진눈깨비(하느님의 비듬, 지기미)가 퍼붓고 뇌성이 쳐 좀 무섭다.
* 거목이야 우뚝해서 보기는 좋겠지만, 반면에 벼락 맞을 확률도 그만큼 높다.
* 대수지하무미초(大樹之下無美草); 큰 나무 밑에는 항상 그늘이 지므로, 아름다운 풀이 나지 않는다는 뜻으로, ‘현로(賢路)가 막히면, 인재가 나오지 않음’을 비유한 말.
* 벼락 칠 때 떡갈나무를 조심해야 한다. 벼락을 주무기로 삼은 제우스 신의 신목(神木)으로 모과나무 못지않게 벼락을 잘 끌어드린다. “들판에 홀로 선 높은 나무를 조심하라!”는 농부의 격언을 새겨들을 필요가 있다. 바위보다 나무가 더 위험하다.
* 진눈깨비는 산객이 제일 싫어한다. 정취도 없을 뿐더러, 슬그머니 옷과 신발을 다 젖게 만드니까..
* 세월이 내 등을 밀지 않았더라면, 이처럼 못난이가 되지 않을 터인데?
* 해동문학 창간10년 기념 시선집 5수. 2006년.
* 졸저 『한국산악시조대전』 부제 산음가 山詠 1-211(188면). 2018. 6. 25 도서출판 수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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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iant trees are dangerous
Hanul, the unpleasant sleet that has left you with dandruff
I was afraid that if I got hit, I would get teeth, so I ducked under the big tree.
The years of iron tendons are crushing my back
*2024. 2. 7 영어 번역기.
22. 보석 훔치기
군청색 허리띠에 범 무늬 갑옷미늘
명검은 윙윙 우나 지키는 용(龍) 잠들었네
친구야 투구에 박힌 호안석(虎眼石)을 빼올래
* 황석산(黃石山 표석 1,190m); 경남 함양. 암릉길 정상부는 용으로 도사린 황석산성을 끼고 두 봉우리가 뿔처럼 갈라져 솟아있다. 북봉에 거북바위가 있으며, 동쪽 산내골 등산길로 이어진다. 갑옷으로 무장한 장수의 황금투구를 닮은 강기(剛氣)있는 바위산이다.
* 졸저『한국산악시조대전』제 451면.
* 백두대간 줄기에서 뻗어 내린 네 개의 산 (기백, 금원, 거망, 황석) 가운데 가장 끝자락에 흡사 칼을 세운 듯 솟구친 봉우리의 산이다. 함양 땅 ‘안의’ 사람들의 지조와 절개를 상징하는 중요한 유적이다. 정유재란 당시 왜군에게 마지막까지 항거하던 이들이 성이 무너지자 죽음을 당하고, 부녀자들은 천길 절벽에서 몸을 날려, 지금껏 북쪽 바위 벼랑은 핏빛으로 물들었다.(위키백과 인용. 2019. 9. 30 주석 추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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