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휴가에서 돌아왔더니 밀린 일들이 많더군요.
이 연재도 저에게는 밀린 일이 되어버렸습니다.
많지 않은 독자들이지만 그래도 기다리는 분이 계실 것 같아 연재를 이어갑니다.
테무진to the칸(12) 레저렉팅 테무진
1
(전편에 이어)손님맞이 잔치이니만큼 당연히 잔치의 주인공은 손님인 쿠일다르와 주르체데이, 그리고 뭉릭이다. 그러나 잔치중 터진 사고에 손님들은 낄 틈이 없었다.
몽골부족의 일파인 주르킨 씨족이 문제였다. 이들은 테무진을 칸으로 추대한 타이추, 사차 베키가 속한 씨족이었다. 테무진 무리의 혁신에 대해선 지난 두 편에 충분히 설명을 해 놓았다. 주르킨 씨족 입장에선, 기껏 쿠릴타이를 열어 칸으로 추대해놨더니 어디서 굴러들어온 줄도 모르겠는 잡것들(보르추가 대표적이다.), 천한 노예들(대표적으로 젤메)로 오르도를 구성해놓았으니 복창이 터질 만도 하다. 그래서 자신들의 쿠리엔을 따로 만들어 살았다.
그렇다고 할 말도 없다.
비합리적인 문화일지라도 오랫동한 행해진 전통이면 일종의 원칙이 된다. 그러니 노예출신 젤메와 다른 부족 출신 보르추를 2, 3인자로 앉힌 걸 보고 "얼씨구, 대장이랑 사이가 가까운 순서대로 권력이 커지네?"하며 원칙을 걸고 넘어질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렇게 따지면 테무진의 친동생 카사르, 카쥰, 테무게와 배다른 동생 벨구테이가 더 많은 실권을 쥐는 게 자연스럽다. 하지만 테무진의 '능력제 인사' 원칙은 동생들에게도 예외없이 적용되었다.
이 시기 벨구테이는 조직의 시라가말(거세마)을 관리했다. 거세마는 곧 군용마(軍用馬). 아무나 맡을 수 있는 자리가 아니다. 하지만 젤메와 보르추보다는 낮은 직급이었다. 하지만 친동생인 카사르보다는 중요한 직책이었다.
테무진은 친동생 중 온화한 성격의 셋째 카쥰을 가장 사랑했다. 테무진은 아들 중에서는 셋째 우구데이를 가장 사랑하게 되는데, 우구데이도 선량하고 부드러운 타입이었다. 확실히 테무진은 이런 성향의 사람들을 좋아했다. 하지만 카쥰의 장점은 성격이 전부였다. 테무진은 카쥰에게 그 어떤 직책과 임무도 맡긴 적이 없다. 개인적인 친밀함과 공적인 책임을 철저히 구분한 것이다.
이런 철저함은 현대국가의 관료제에서도 찾아보기 힘들다. 하물며 대통령의 형님이 공공연히 '상왕전하' 소리를 듣는 대한민국에서는… 테무진의 뛰어남은 새로운 원칙을 제시하는 데에 있다기보다는, 그 원칙을 끝까지 지킨다는 데 있다. 그래서 몽골사를 연구하는 사람들은 평생 동안 문맹이었던 테무진을 '세련된 야만인'으로 부른다.
한편 테무진은 테무진대로, 사사건건 전통과 혈통을 내새우며 기득권을 행사하려고 하는 귀족들을 조직의 암세포로 느꼈을 것이다. 테무진 일가가 속한 키야트-보르지긴 씨족과, 칸을 배출한 왕가(王家)인 주르킨 씨족 사이엔 서로에 대한 경멸과 불신이 팽배해 있었다.
테무진이 잘 나갈 때야, 귀족들도 팔자려니 하고 참아야 했을 게다. 하지만 이 녀석, 지맘대로 막나가다가 그래 어떻게 되었나. 폼만 실컷 잡다가 자무카하고 붙어서 탈탈 털리지 않았나 말이다. 그렇다고 자무카한테 달려가서 몽골부족을 통치할 명분을 헌납하고 대접 받고 살자니, 자무카는 순혈귀족 치노스족을 가마솥에 삶아 세상에서 지워버린 인간이 아닌가. 테무진한테 귀순하면서 미운털도 한 번 박혔고…
확실히 자무카는 무서운 인간이었다. 카리스마와 돌발적인 폭력성으로 무장한 이런 '전통적인' 영웅은 그가 무슨 생각을 품고 있는지 알 수 없다는 사실에서 복종심을 불러일으키는 경향이 있다.
반면 테무진은 12세기의 초원이라는 폭력적인 세계의 군주답지 않게 합리적이고 공정하려고 노력했고, 그래서 '예측 가능한' 행동을 했다. 놀랍도록 세련된 소양이지만, 귀족들 눈에는 이게 만만한 걸로 보였다. 전투의 패배로 헐룬과 테무진의 위상이 떨어지자마자 주르킨 사람들은 노골적으로 '양반행세'를 하기 시작했다.
2
잔칫날. 벨구테이는 잔치를 주관하고 있었다. 잔치도 챙기랴, 거세마도 관리하랴 이래저래 바쁜 날이었다. 초원 사람들에게 잔치는 놀이이기도 하지만 의식이기도 하다. 요즘의 우리들도 식사보다는 술자리의 절차가 더 복잡하다. 윗사람의 건배사라든지, 잔돌리기라든지, 몸을 돌려 잔을 가리듯이 하여 술을 마신다든지… 사실 정도와 경향에 차이가 있을 뿐, 모든 술자리는 놀이와 제의 사이에 있다.
잔치에서 누가 먼저 술을 받는가는 매우 중요한 문제였다. 당연한 말이지만 먼저 술을 받을 수록 중요한 사람이다. 이날 잔치에서 술 따르는 직책을 맡은 '시키우르'라는 남자는 헐룬의 술잔을 가장 먼저 채웠다. 뭐, 당연하다. 헐룬은 무리를 이끄는 칸의 어머니이자, 전투시 중앙 본대의 사령관이었다. 이 모습을 본 주르킨족 어르신들은 심사가 뒤틀렸다. '칸'이나 '베키', '세첸'이 아니라 고작 '바하두르(용사)'였던 예수게이의 미망인이 자신들을 앞지르고 먼저 술잔을 받다니…
헐룬을 표현한 그림
하지만 할 말은 없다. 그러던 차에 시키우르가 사소한 실수를 저질렀다.
테무진을 칸으로 추대한 주르킨 귀족 중 하나인 사차 베키. 그의 아버지 '소르카토 주르키'에게는 세 명의 부인이 있었다. 첫째 사차 베키의 친어머니인 '코리진', 둘째부인인 '코오르친', 그리고 마지막 부인인 에베게이.
시키우르는 부인들의 순서를 헷갈리고 말았다. 그는 웃사람인 코르진과 코오르친이 아니라 에베게이의 술잔을 먼저 채웠다. 그냥 넘어가도 될 일이었다. 하지만 화를 풀 핑계를 잡은 소르카토 주르키의 첫째와 둘째 부인은,
"어찌하여 서열이 높은 우리를 먼저 따르지 않고 아우 먼저 따르느냐?"
라고 소리치며 시키우르를 디립다 팼다.
남의 집 부인 서열을 어떻게 한 눈에 알아본단 말인가? 또 이게 그렇게 중요한 일이었다면 그저 한 마디 하면 되는 일이다. 술을 뭐 공간이동하듯이 광속으로 따르는 것도 아니고, 실수를 하기 전에 "아, 옆에 앉아계신 형님들 먼저 따라드려야지."하면 되는 것이다. 꼬투리 잡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는 얘기다.
초원 여자들은 드세다. 남자들도 여자의 권리를 무척 인정하는 편이다. 납치되어 약탈혼을 당하던 전쟁의 전리품이 되어 강제결혼을 당하던, 일단 부부가 되면 집안에서 상당한 권리를 행사한다. 그러니 칸의 부인이나 며느리가 나이가 들면, 웬만한 전사들은 그 앞에서 꼼짝도 못한다.
그리고 나이든 여자가 때려도 맞으면 아프다. 불쌍한 시키우르가 뭘 어쩌겠는가? 시키우르는 울었다.
"엉엉~ 예수게이님께서 돌아가셨다고 제가 이렇게 맞아도 되는 겁니까?"
테무진의 반응은?
"안 되지 씨바, 내가 있는데!"
그리하여 키야트-보르지긴과 주르킨, 두 집안 사이의 분위기가 급 썰렁해졌다.
"할머님들, 이거 너무한 거 아닙니까?"
"아니 테무진 칸, 저늠섀키가 잘못해서 잘못한 놈을 손봐준 건데 뭐가 어째서 그러오?"
"말로 해도 될 걸 꼭 그리 해야겠소? 지체 높으신 분들이라 존중해 드렸는데, 내 부하에게 손찌검을 할 권리가 있는 건 아니오."
"어이구 얘들아 이리 좀 와바라아… 우리가 이런 꼴을 다 당한다아아…"
"이거뜨리! 우리 주르킨 사람들이 지금껏 꾹 참고 자무카 대신 테무진의 보르지긴을 따라줬는데 이젠 만만해 보이나 보지? 테무진이 누구 덕분에 칸이야? 우리가 추대해준 거잖아!"
"이런 미친 것들을 봤나. 조상 잘 만났다고 아주 눈에 뵈는 게 없구만?"
그런 와중에 사건이 추가로 터졌다.
시라가말떼를 지키던 벨구테이. 그런데 저어-기 보니, 웬 주르킨 녀석 하나가 와서 말의 고삐끈을 쓱 풀어가는 게 아닌가? 초원에 공장이 있는 것도 아니고, 당연히 수제 DIY 고삐끈이다. 값으로 치면 얼마 나가지 않았을 지 몰라도, 이런 물건 하나하나에 얼마나 정성이 들어가는 지 모른다. 게다가 군용마를 다루는 물건이니 공도 더 많이 들었을 터.
예나 지금이나, 기득권에 속한 사람들 중 뇌세포 활동이 둔한 이들은 내 것과 남의 것을 혼동하는 경향이 있다. "마음에 들기 때문에 갖는다." 피해자 입장에서야 날강도짓이지만, 귀족에게는 나름의 습관이 있다. 초원의 귀족도 다른 문화권의 귀족들처럼 잡다한 일을 하지 않았다. 이 잡다한 일에 고삐끈 만드는 것도 포함되었을 것임은 쉽게 상상할 수 있다.
초원에서는 장인을 천하게 쳤다. 노예출신인 젤메와 수부테이 형제의 집안은 대장장이 집안이었다. 무기의 재료인 철 생산력이 군사력과 직결되는 초원에서, 철을 다루는 사람의 처지가 그 정도였다. 그러니 주르킨 귀족들은 고삐끈 정도는 당연히 누군가가 만들어서 바치는 거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혹은 도둑질이 아니라 '징발'이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징발이나 도둑질이나 그거나 그거지만.
하지만 그 주르킨 사내의 행동은, 평등을 지향하는 테무진 조직의 패러다임과 맞지 않았다. 벨구테이는 당연히 곱게 넘어가지 않았다.
"거기 잠깐 스톱. 지금 뭐하는 거?"
"응? 아… 고삐끈이 예쁘고 튼튼해 보이길래."
"얼씨구, 예쁘고 튼튼하면 니꺼냐? 당장 내려놓지 못해?"
"거 씨바, 고작 끈 한 줄 가지고 별 지랄이네."
"뭐 새꺄? 그렇게 별 거 아닌 거면 니가 뚝딱 만들어 쓰지? 내가 진짜 지랄하는 거 함 보여주까?"
테무진의 친동생 카사르도 힘세고 성격 거칠기로 유명했는데, 벨구테이도 만만치 않았다. 그때 한 주르킨 사내가 벨구테이 앞을 막아섰으니… 그의 이름은 '부리'였다.
3
부리는 초원 최고의 씨름꾼으로, 평생 동안 무패를 자랑하는 인물이었다. 부리는 당연히 도둑질한 자기네 씨족 남자 편을 들었다. 말싸움을 하다가 짜증이 난 벨구테이는 웃옷을 풀어 어깨를 드러내보였다.
"좋은 갑빠 놔두고 뭐하러 말싸움을 하나?"
동서고금을 통틀어 씨름이나 스모, 레슬링 등 유술계 격기(잡고 비틀고 던지고 누르고 꺾고 넘어뜨리는 싸움법)를 할 때는 신체를 노출시키는 전통이 있다. 또 벨구테이는 말싸움이 길어지면 씨름 대결을 신청해 논쟁을 끝내는 습관이 있었다. 승자의 뜻대로 하자는 거다. 벨구테이의 성격을 알 수 있다.
몽골의 씨름꾼들
한 마디로 한 판 붙자고 웃짱을 깐 벨구테이, 초원의 챔피언에게 도전을 한 것이다. 이 자신감을 보면 벨구테이의 실력도 만만치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 미친 새끼가, 어디서 이딴 게 감히."
부리는 벨구테이의 도전에 응하기는커녕, 칼을 뽑아 벨구테이의 어깨를 찍어버렸다! 본래 씨름이든 뭐든, 경기란 동등한 사내끼리 하는 것. 부리는 벨구테이가 자신에게 도전할 자격이 안 된다고 생각했다. 벨구테이가 실력상 자기에게 도전할 깜냥이 안 된다고 여겼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칼질을 하는 건 너무 심각한 행동이었다.
부리는 보르지긴 혈족의 전사가 감히 주르킨족 전사에게 대등하게 살을 맞대고 하는 스포츠를 도전할 자격이 안 된다고 믿었던 모양이다. 자기 나름대로는 모욕감을 느끼지 않았다면, 칼까지 뽑아들 이유가 없다. 어쨌든 칼에 맞았으니 피가 나는 건 당연한 일. 벨구테이가 부리의 칼에 피를 흘리고 있는 걸 목격한 테무진이 한걸음에 뛰어왔다.
"벨구테이! 괜찮냐! 씨바 이 피 좀 봐!"
"아 형님, 전 괜찮습니다. 그냥 살짝 긁힌 것뿐이에요. 보세요."
"긁히긴… 피가 철철 나는구만! 내 동생 건드린 새끼가 누구야!"
동생의 부상에 뚜껑이 열린 테무진은 노발대발했다.
"오늘 주르킨 새끼들이랑 결판을 내야겠다. 다덜 모여봐! 야! 참지 마!"
"형! 별 일 아니라니까! 오늘처럼 좋은 날 이렇게 별 거 아닌 일로 잔치를 망쳐서야 되겠어?"
이 대목에서 벨구테이는 테무진보다 냉정한 판단력을 보인다. 테무진 무리는 13쿠리엔 전투의 패배로 살이 떨어져나가고 뼈대만 남은 상태였다. 여기서 분열되었다간 다시는 일어나지 못할 상황이었다. 기분 나빠도 일단 참지 않으면 안 된다.
더욱이, 잔치의 주빈은 승자 자무카를 버리고 와준 귀한 동료들이다. 잔치가 이렇게 개판이 되는 동안 손님인 쿠일다르와 주르체데이가 얼마나 민망하고 불편했겠는가? 아마 어찌할 바를 몰랐을 것이다. 그러나 테무진은 기어이 폭발하고 말았다.
불행 중 다행으로, 초원에는 무기를 휴대한 채로 잔칫상에 앉지 않는 관습이 있었다. '주사'가 폭력사태로 치닫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룰이었다. 술기운도 올랐겠다, 열이 받았으니 싸움은 해야겠고, 그런데 무기는 없고… 그래서 역사에 보기 드문 코미디가 연출된다. 키야트-보르지긴 일가와 주르킨 일가는 잽싸게 꺾은 나뭇가지와 국을 젓는 국자를 들고 패싸움을 벌였다(잔치는 보통 강가에서 하고 강가엔 나무가 자란다.).
이런 걸 보면 관습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만취한 채로 흐느적거리며 나무토막을 휘둘렀으니, 이래서는 사망자는 커녕 중상자도 나오기 힘들다. 기껏해야 찰과상과 타박상 정도였을 것이다. 하지만 싸우던 당사자들은 비장했을 테니, 생각할수록 가관이다.
이 우스꽝스러운 '전투'에서 키야트-보르지긴 씨족은 혁혁한 전과를 올렸다. 코리진과 코오르친 부인을 사로잡은 것이다. 술자리가 얼마나 추해질 수 있는 보여주는 진상의 모범사례다(정말 전쟁을 할 심산이었으면 무기를 챙겨들었을 것이다. 잔치에 지참하지 않을 뿐이지, 무기를 몇 킬로미터 밖에 짱박아 두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사차 베키님! 저 천한 것들이 베키님의 어머님과 작은어머님을 사로잡았습니다!"
"뭬야? 두 분이 포로가 되었다고?"
(다시 말하지만 나뭇가지를 불끈 쥐고 한 대화다.)
"그렇습니다. 큰일입니다. 술 취한 놈들이 두 분께 못된 짓이라도 하면…"
"씨바, 그러면 안 되지."
그리하여 두 그룹의 사내들은 종전협상(?)에 들어갔다. 다행히 술들이 좀 깼는지 협상은 테무진 측이 두 귀부인을 돌려주고 화해하는 것으로 끝났다.
"자자, 별 일 아니랍니다. 뭐 남자들끼리 싸우다가 피 좀 볼 수 있지 뭐… 시키우르도 뭐 사람인데, 실수할 수도 있고 실수하면 몇 대 맞을 수도 있는 거 아니겠수? 이왕 벌린 판인데 잔치나 계속합시다!"
이렇게 해서 와해 직전의 무리는 가까스로 살아났다. 특히 가장 화가 났지만(나중에 분노를 풀 기회가 생긴다.) 의연하게 행동한 벨구테이가 칭찬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테무진과 그의 형제, 심복들은 이 분노를 참는데 대단한 인내력이 필요했을 것이다.
4
몽골 역사를 디비다 보면 '옹깅 칭상'이라는 이름이 등장한다. 뭔 이름이 이리도 동글동글한가 싶은데, 이거 원래는 한자다. 한자를 모르던 자신들 입에 맞게 발음한 것을 서역 지식인들이 자기네 알파벳으로 표기해 남은 명칭이다.
옹깅 칭상의 '칭상'은 재상, 즉 국무총리급 관리를 뜻하는 승상(丞相)이다. 글타. 졸라 높은 관직인 것이다. 울나라에서는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으로 불렀듯이 금나라에서도 걍 승상이라고 한게 아니라, 나름의 명칭을 붙였다. 왕경 승상(王京丞相)이 옹깅 칭상의 공식 관직명이다.
테무진 시절에 초원 사람들이 옹깅 칭상이라고 부른 인물의 본명은 요즘의 중국식으로 부르면 완웬 샹, 우리 식으로는 완안양(完顔襄)이다. 완안은 금나라 황실의 성이다(뜻풀이를 해보면 자뻑스럽게도 '완벽한 얼굴'이라는 뜻이다.). 금나라 태조의 이름이 '완안 아골타(完顔 阿骨打)'다. 초원 사람들은 아골타의 이름을 따서 금나라 황제들을 죄다 '아구다'라고 부르기도 했다.
범가죽 위에 편하게 앉아계신 완안 아골타
금나라 황제를 '알탄 칸'이라고 부르기도 했는데, 황금 칸이란 뜻이다. 여진족(만주족)은 예로부터 황금을 숭배하고 금색을 길하게 쳤으니 틀린 말은 아니다(여기서 문득 신라와 김씨(金氏) 얘기를 하고 싶지만 얘기가 너무 길어지므로 걍 넘어가자.). 나라 이름도 번쩍번쩍, 금(金)나라 아닌가.
당시 금나라는 세계 최강대국이라고 해도 될 만한 나라였다. 그 나라 황실의 일족이자 3인자인 왕경 승상(한자문화권의 전통적인 관료편제는 재상을 3명 둔다. 조선도 좌-우-영의정이 있었던 것처럼. 왕경승상은 좌승상이었다. 중앙이 첫째고, 좌가 둘째, 우가 셋째인 것이 원칙이다. 즉 좌의정은 황제와 중앙 재상의 뒤를 이어 국가의 3인자다.). 전 세계 남자사람을 통틀어도 20위권 안에는 거뜬히 드는 권력자다. 당시의 스웨덴 같은 나라는 자기 일 년치 연봉만큼도 생각하지 않았을 인간이다. 물론 스웨덴의 존재를 알았다면 말이다.
황제를 대행해 북방 초원의 안보를 관리하던 왕경 승상은 최근에 새로운 고민에 빠졌다. 이래저래 설명하면 독자 열분덜이나 본 기자나 피곤하다. 이 대목은 대화로 넘기자. 참고로 이 때의 금나라 황제는 장종(章宗), 본명은 완안경(完顔璟)이었다.
"영명하시고 위대하시며 후덕하시고 기타등등하신 황제폐하, 북방에 문제가 좀… 생겼습니다."
"국경 쪽인가? 만리장성은 문제 없는 걸로 알고 있는데."
"그보다 좀 더 북쪽에요. 풀밭 있는데."
"아, 거기 거지들이 말 타고 댕기는 동네? 거긴 원래 니가 관리하던 데 아냐?"
"네 그게… 관리가 좀 안 되네요."
"쯧쯧… 그런 승냥이떼들은 신경좀 써서 제때제때 밟아줄 것이지."
"뭐 일단 죄송함다… 상황을 말씀드리면 이렇습니다. 원래 우리 금 제국이 동쪽에 타타르 놈들을 지원했잖아요. 옛날에 패악질을 부리던 몽골놈들도 관리하랴, 다른 부족들도 밟아주랴… 네 글자로 표현하면 이이제이라고… 아시죠?"
"몽골 그넘들이 짐의 선조님들을 좀 괴롭혔지. 그런데 몽골 것들은 이제 타타르 애들 등쌀에 기를 못 펴고 있지 않아? 왜 그 한중간에 있는 커레이트란 놈들도 타타르 애들 땜에 함부로 못하고 있는 걸로 아는데."
"그랬읍죠. 그랬는데… 그 타타르 놈들이 오냐오냐해주니까 간뎅이가 부었습니다. 글쎄 배를 좀 채워주니까 개가 주인을 뭅니다. 이놈들이 얼마 전부터 우리 국경을 침범해 약탈을 하고 있는 게 아닙니까?"
"이런 잡것들을 봤나, 하여간 북쪽에서 말이나 타고 댕기는 것들은 사람취급을 해 주면 안 돼."
"저기 근데요 폐하, 우리 황실도 원래는 북쪽에서 말 타고…"
"씨꺼. 그래서 어떻게 할 거야?"
"역시 이이제이죠 뭐. 오랜 시간 취득한 정보에 의하면 커레이트의 수장인 '토그릴'이란 친구가…"
"짐이 그런 오랑캐놈 이름까지 알아야 하나?"
"네네, 하여간 그 친구가 타타르하고 사적인 원한이 있는데다가 그 동네에선 세력이 만만치가 않습니다. 해서 이번엔 그 친구를 지원해서 타타르 놈들을 좀 잡아볼까 하구요. 웬만하면 지들끼리 싸우게 하면 좋은데, 우리가 타타르 놈들을 너무 살찌웠어요. 우리 군사가 출동할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뭐 폐하도 아시다시피, 노천에서 말타 고 댕기는 것들은 조금만 관리를 안 해주면 금새 강력한 칸이 나타나고 세력을 불려서 중국을 침략하지 않습니까. 사실 따지고 보면 우리 선조님들도 그렇게 해서 중국에 왕조를…"
"씨꺼. 그래서 계획이 뭐야?"
"네! 사안이 사안인 만큼 이번에는 제가 직접 군사를 몰고 출동해야겠습니다. 일단 전장이 초원인 만큼 기병 위주로 군대를 편성해야 할 것 같고요. 필요한 전쟁 물자랑… 구체적인 것은 여기 제 비서들, 흠흠 아니 제가 밤새워 작성한 보고서를 보시고 결재를 해주시면 되고요…"
"음, 오케. 이봐 내시! 옥새 가져와!"
4.5
장종과 왕경승상의 상황판단은 정확했다. 중국과 한반도에 있던 정주문명 왕조의 입장에선 '오랑캐' 관리가 안보의 최우선 과제였다. 물자를 지원 받던 기마민족들이 어느 순간 벌떼처럼 일어나 강력한 세력이 되는 건 동아시아 역사의 흔한 패턴이다.
청나라의 태조 누르하치도 여진족(만주족)을 먹여살리기 위해 오랫동안 비굴함을 연기해야 했다. 그는 조선 변방의 지방관과 장수들에게 내츄럴 본 병신으로 통했다.
"나으리, 우리 가난한 오랑캐놈들 좀 살려주십시오. 쌀까지는 바라지도 않고 보리라도 좀 남으면… 아 저번에 국경에서 강도사건이 발생했다구요? 그거 우리가 한 거 아닌뎁쇼? 아니 우리가 뭘 믿고 무슨 깡으로 감히 조선 사람들을 해친답니까? 전 힘도 없지만 용기도 없는 놈이에요. 정말이에요, 믿어주세요… 저 근데 먹을 건 언제 주시는… 먼저 영명하시고 위대하신 조선의 주상전하가 있는 곳을 향해 절을 하라굽쇼? 어이쿠 삼백 배라도 하겠슴돠~"
"햐, 이놈 갖고 노는 재미가 쏠쏠하네. 그리고 여진족 놈들 말야 아무리 오랑캐라도 그렇지, 대체 얼마나 상태가 안 좋으면 이런 놈이 칸 자리를 해먹는 거야?"
누르하치의 초상
명나라 관리들 앞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물자를 비축하고 백성의 머릿수를 유지한 누르하치. 그러다 임진왜란이 발발해 변경에서 여진족을 억제하던 조선과 명나라의 군사력에 공백이 발생하자 그 틈을 타 부족을 규합하고 북방을 휩쓸었다. 그 결과 명나라는 멸망했고, 조선은 인조의 삼배구고두라는 희대의 치욕을 당했다(이때의 여진족 군주는 누르하치의 아들인 청나라 태종이다.).
어쨌든 테무진 시절의 여진족은 북중국의 주인이었다. 당연히 중화문명의 논리로 초원을 관리했다. 이렇게 외래민족 왕조의 조정이 중국문명의 대변자가 되는 것 또한 동아시아 역사의 흔한 패턴이다.
5
왕경 승상이 이끌고 온 수만 명의 대부대는 초원 전체를 긴장시키기에 충분했다. 이때 테무진은 30대 초반에서 중반 사이에 있었다. 34살이었을 가능성이 가장 높다. 20대에 자무카에게 패배한 후, 테무진은 아직 완전히 재기하지 못하고 있었다.
왕경 승상은 테무진의 존재를 몰랐다. 사실 대제국의 수뇌부인 그의 입장에서는 한 줌 거리 부하들을 이끌고 다니는 초원의 칸을 알아야 할 이유도, 필요도 없었다. 하지만 이제 곧 알게 된다.
"어이쿠~ 아구다께서 보내신 귀한 분이 이런 누추한 곳에까지 행차하시다니… 자 여기 아이라크(마유주)라도 한 잔 하시면서 말씀을…"
"윽… 뭐냐, 이 비리고 끈적한 정체불명의 액체는? 흠흠, 뭐 자네도 아다시피 이건 자네와 커레이트족에 하늘이 준 기회네. 이번 기회에 타타르 놈들을 꾹 밟아주고 어깨에 제대로 힘 주고 살아보게."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을 다할 것을 굳게 다짐합니다. 저 근데, 소개할 친구가 하나 있습니다."
"응? 누군데?"
"테무진이라는 친구가 있어요. 이 친구가 운이 안 좋아서 재능만큼 잘 나가질 못하고 있는데, 그래도 아주 또릿또릿한 사냅니다. 저하고는 관계가 아주 좋지요. 이 녀석을 전투에 끼워주는 게 어떻겠습니까? 머릿수 느는데 나쁠 게 뭐가 있겠습니까? 도움이 됐으면 됐지 짐이 되진 않을 겁니다."
금나라의 이이제이와 함게 토그릴의 소(小) 이이제이도 작동하기 시작한다. 13쿠리엔 전투 패배의 늪에서 아직 빠져나오지 못한 테무진. 그를 도와주어야 자무카를 견제할 수 있다. 두 사람의 세력은 비등할수록 좋다.
"아 뭐… 테무진이라고? 데려다 쓰던 말던 자네 맘대로 해. 어쨌든 우리는 군대를 둘로 나눠서 타타르를 공격할 거니까. 내가 지휘하는 금나라 군대가 본대다. 너희는 속도가 빠른 기병들이니까 기동타격을 맡는다. 총사령관은 당연히 나고… 테무진이라는 친구는 니가 쌈싸먹든 뭘 하든 맘대로 해."
테무진에게는 놓칠 수 없는 기회였다. 호랑이 새끼를 키운다는 말이 있다. 이 전쟁으로 테무진은 물질적인 기회뿐 아니라 세상이 돌아가는 방식을 보는 '소프트웨어'까지 장착하게 된다. 어떻게 그렇게 되는지, 일이 흘러가는 모양새를 살펴보자.
테무진 혼자라면 결코 타타르와 대적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금군이 있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일단 숫자가 많다. 그리고 무장이 훌륭하다. 쇠가 귀한 초원과는 차원이 다른 무장을 하고 있었을 터. 사실 상식적으로 보면 무장은 복잡하고 무거울 수록 좋다. 하지만 기동력에 문제가 생긴다.
지리적 특성상 금나라 군대도 100% 기병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왕경 승상은 초원의 사정에 밝은 데다가 기마민족의 후손이었다. 그가
모시던 황제인
물론 한족으로 이루어진 보병이 있었을 수도 있다. 이 경우 징집된 농민들이 틀림없는 보병은 그야말로 화살받이다. 적과 맞부딪혀 기병이 기동타격할 조건을 세팅해주는 몸빵 부대다. 어쨌든 여러가지 이유로, 금나라 군대는 초원에서는 움직임에 제한이 있는 '무거운' 부대였다.
이 약점을 토그릴과 테무진이 해결하면 된다. 금군이 한 쪽에서 타타르 군대를 압박할 동안 토그릴과 테무진의 기병이 측면과 배후를 쳐서 포위섬멸하는 것이다(몽골초원 전사들의 무장과 전쟁방식은 나중에 자세히 다루도록 하겠다.).
6
테무진에게는 전쟁의 명분이 있었다. 타타르족은 금나라의 위세를 등에 업고 몽골족을 숱하게 괴롭혀왔다. 덕분에 금나라는 저렴한 비용으로 몽골을 관리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타타르족은 아버지 예수게이를 독살한 원수가 아닌가. 타타르는 몽골족이 분열되기 전, 온 부족의 칸이었던 암바가이 칸을 비겁한 방법으로 사로잡아 금나라에 넘긴 적도 있지 않은가. 그 때문에 암바가이 칸은 목마에 못 박혀 죽지 않았나 말이다.
그래서 테무진은 '전쟁선언문'을 고심해 만들 필요가 없었다.
"옛날부터 타타르 놈들은 우리의 할아버지, 아버지들을 시해한 자들이다. 원수의 백성들이다. 마침 금나라 군대가 타타르 놈들을 몰아붙이고 있으니 이제 이 기회에 우리가 협공하자!"
하지만 그렇게 따지면 금나라도 원수이긴 마찬가지다. 테무진은 금나라와의 원한은 쏙 빼놓고 전쟁을 선포했다. 테무진은 자신의 울루스를 소집했다. 자무카-테무진 연합군이 메르키트를 물리쳤을 때처럼, 정해진 장소와 시간에 각 집단의 군사들이 집합하는 것이 초원의 전통이었다. 그런데…
주르킨 씨족의 전사들이 집합하지 않았다.
"이보게 테무진, 이 친구들 왜 안 오는 건가?"
"아니 그걸 제가 어떻게 알겠습니까…"
왕경 승상의 군대와 타타르는 본격적인 회전은 하지 않고 있었다. '무겁고 느린' 금군은 '올자 강'줄기를 따라 타타르를 압박하면서 계속해서 상류로 몰아가는 중이었다. 올자 강은 오논 강과 케를렌 강 사이에 있는 강이다. 이 강의 상류는 테무진과 커레이트의 '홈그라운드'였다. 정교한 전술적 이동이었다.
타타르는 이 사실을 까마득히 몰랐다. 하긴 <몽골비사>를 보면 금군과 타타르군이 한창 싸우고 있는데 테무진과 토그릴이 난데없이 금군 편을 들어 즉석에서 연합군이 결성되었다는 식으로 되어있다. 말도 안 되는 일인데, 이렇게 기록된 이유는 테무진 수뇌부가 정보를 통제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소문이 빠른 초원에서 타타르를 잡기 위해 왕경승상과 테무진, 토그릴은 은밀히 소통하면서 전략을 수립했던 것이다.
그런데 금군과 타타르가 계속 이동중인 이때 주르킨 전사들이 코빼기도 비추지 않고 있으니…
이것들이 왜 안 오지?
"더 이상 지체할 틈이 없네. 어서 옹깅칭상의 금나라 군대와 합류해야 하네. 그 양반한테 밉보이면 이번 일은 끝이야. 게다가 올자 강 최상류엔 산이 있질 않나. 타타르 놈들이 산 속에 들어가버리면 골치가 아파져."
"칸 아버지(테무진은 아버지의 안다인 토그릴을 이렇게 불렀다.), 그래도 조금만 더 기다리면 안 되겠습니까? 머릿수 하나가 아쉬운 판인데, 주르킨 놈들이 싸가지는 없어도 싸움터에서는 용맹하기로 소문난 인간들 아닙니까"
이 말은 사실이었다. 주르킨 남자들은 A급 전사로 통했다. 테무진과 토그릴은 주르킨 부대를 무려 6일이나 기다렸다. 그래도 주르킨은 오지 않았다.
"테무진, 이젠 더 이상 기다릴 수가 없네. 어서 옹깅 칭상과 합류해야 하네!"
테무진은 전쟁에서 한 번 졌으므로, 그의 지휘를 받는 일을 거부한다는 거였다. 테무진은 끓어오르는 분노를 또 한 번 억누를 수밖에 없었다.
"이 천지구분 못하는 귀족새끼들… 어쩔 수 없지요. 이대로 금군과 합류합시다."
"잠깐, 그 전에 군대 편성 좀 바꾸고."
"네? 편성을 바꿔요? 그게 무슨 말입니까?"
테무진은 토그릴에게 (전 기사인 '13익 전투'편에 설명했던) 십진법으로 군대를 편성하는 법을 배웠다. 그 시기가 정확히 언제인지는 불분명하다. 하지만 여러 정황을 살펴봤을 때, <금(金)-커레이트-테무진 연합군 vs 타타르> 전투였을 가능성이 가장 높다.
당연한 말이지만 제국군인 금나라 군대는 현대군과 마찬가지로 엄격한 편제를 갖고 있었다. 금군의 전략에 맞춰서 함께 전투를 하려면, 일시적이나마 십진법으로 군대를 재편해야 했으리라. 왕경승상의 전략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려면 '쿠리엔'으로는 안 된다.
십진법 체계는 테무진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머리로만 아는 것과 직접 경험해보는 것은 다르다. 물론 당장은 전투가 무엇보다 중요했다.
왕경 승상과 합류한 토그릴-테무진 연합군은 타타르족의 야영지로 신속하게 이동한다. 타타르는 독립적인 국가 단위에 근접한 막강한 부족이었다. 한때 초원에 제국을 건설하기도 했던 타타르족은 종족으로 따져도 거대한 집단이었다. 예를 들어 커레이트는 인종적으로 따지면 몽골계(몽골'부족'과 헷갈리지 말자. 인종 풀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위구르계, 투르크(돌궐)계 등이 섞인 혼성부족이었다. 나이만은 위구르 혈통이 좀 더 많았다고 보면 된다. 타타르는? 그냥 타타르족이었다. 독립종족인 것이다.
따라서 이때의 타타르는 '부족연합국가' 수준이었다. 테무진과는 까마득한 격차다. 하지만 금나라는 제국이다. 타타르는 제국군의 세련된 전술에 당해내지 못했다. 타타르도 금군의 이동과 목표를 몰랐을 리 없고, 따라서 최선을 다해 전쟁준비를 마쳤을 것이다. 하지만…
왕경 승상의 군대가 한 쪽으로 밀고 들어가면서 테무진-토그릴 연합군이 다른 쪽을 치자 타타르는 꼼짝없이 포위되고 말았다. 알렉산더 대왕 식으로 말하면 '망치와 모루'였다. 금군이 모루, 테무진-토그릴 군이 망치인 셈. 퇴로가 막히고 섬멸이 시작되자, 쿠리엔들이 뒤섞여 사방팔방으로 말을 달리며 싸우는 전술에 익숙한 타타르 전사들은 수숫대처럼 거꾸러졌다.
정주문명의 군대는 적당한 장소에서 회전(會戰)을 벌여도, 병사들의 고향땅은 거기 그대로 있다. 그러나 땅의 경계가 없는 초원의 유목민들은 살림살이와 가축 등 '울루스' 전체가 군대를 뒤따라다니는 경우가 많다. 특히 자신들의 야영지에서 '방어전'을 하던 타타르는 자연히 군대와 울루스가 뒤섞여 있었다. 그런데 군대가 포위섬멸 되다 보니 울루스도 역시 포위당하게 되고, 따라서 타타르족은 심각한 약탈에 노출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사력을 다해 포위를 빠져나간 타타르 수뇌부와 전사들은 기어이 올자 강 상류의 산에 요새를 구축하는 데 성공했다. 테무진-토그릴 연합기동타격부대는 타타르가 숨 돌릴 시간을 주지 않고 요새를 넘었다.
왕경 승상의 군대야, 초원의 세력균형을 위한 타타르 토벌이 목적이었지만 토그릴과 테무진의 입장은 달랐다. 유목민 전사들에게 약탈은 중요한 사업이었다. 특히 테무진에겐 더욱 그랬다. 테무진의 작고 가난한 조직은 약탈품을 빨리 만나기 위해, 그리고 금나라와 커레이트에게 확실히 눈도장을 받기 위해 앞장서서 적진으로 침투했을 것이다.
그러면서 타타르의 칸 '메구진 세울투'가 사살되었다. 승전에 방점을 찍는 일이었다. 누가 죽였는지는 확실치 않으나, 테무진과 그의 전사들이 큰 역할을 했다는 점은 확실하다. 테무진이 다른 사람도 아닌 메구진 세울투의 개인 소장품을 약탈한 걸 보면 말이다.
그러나 요새는 괜히 만드는 게 아니다. 적이 요새를 넘을 동안, 오히려 아군은 요새를 비우고 빠져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요새에 약탈품을 남겨놓는 건 상식이다. 적이 약탈을 시작하면 추격속도가 느려지기 때문이다. 타타르 전사들, 머리 잘 썼다. 타타르족은 비참한 패배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남았다. 살아남은 왕족과 전사들은 설욕을 다짐하며 안전한 곳으로 달아났다. 힘들게 울루스를 재건한 타타르족은 훗날 다시 한 번 테무진과 맞붙게 된다.
7
테무진을 위시한 가난한 몽골 전사들은 타타르의 물자에 깜짝 놀랐다. 대표적인 것이 메구진 세울투의 은제 요람과 진주를 꿰어 만든 담요였다. 세상에 요람을 모두 순은으로 만들다니! "쇠로 된 등자 하나만 있어도" 부자 행세를 하던 몽골 전사들의 기분이 어땠겠는가? 게다가 죽거나 사로잡한 타타르 사람들은 화려한 장신구를 달고 있었다. 그 중 상당수가 금붙이였다.
초원 사람들은 부족마다 혈통의 차이가 있을 뿐, 문화적으로는 차이가 거의 없었다. 그래도 타타르족의 문화는 다른 초원 사람들과는, 비록 약간이지만 다른 면이 있었다. 타타르족은 코걸이를 하는 습관이 있었다. 이 코걸이를 금으로 많이 만들었던 것이다.
테무진은 이번에도 부모 잃은 고아를 발견했다. 이 타타르 소년은 황금 장신구와 최고급 의복을 걸치고 있었다. 테무진은 야영지에 복귀했을 때 소년을 어머니 헐룬에게 맡겼다. 헐룬도 아이의 행색을 보고 깜짝 놀랐을 정도였다.
"이 애… 정말 있는 집 자식이로구나."
헐룬은 아이에게 '시기 코토코'라는 이름을 지어주고는 양자로 삼아 키웠다. 중요한 이름이다. 꼭 기억하자.
언제나 한 집단이 굴러가는 방식은 경제에 의해 결정된다. 우리는 역사를 배우면서 <몰락한 왕조의 마지막 군주>들의 값싼 품성과 부족한 능력에 대해 많이 보고 듣는다. 그러나 사실 속내를 들여다보면, 한 국가의 몰락은 경제 시스템의 붕괴와 맥을 같이한다.
초원 칸들의 존재이유는 백성들에게 물자를 안정적으로 공급하는 데 있다. 기실 전쟁도 그래서 필요한 것이다. 테무진은 자신을 따라준 사람들에게 비로소 제대로 된 보상을 할 수 있게 되었다.
테무진은 평등한 분배를 지향했다. 당시의 초원에서는 그야말로 대혁신이었다. 원래는 계급이 높을수록 먼저 약탈품을 차지할 권리를 누렸다. 테무진은 위험을 무릅쓰고 희생을 각오하는 '핏값'을 누구에게나 동등하게 적용했는데, 이는 집단 구성원 즉 '사람의 가치'를 기본적으로 똑같이 대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평등한 분배를 위해서는 먼저 약탈의 룰부터 달라져야 한다. 본래 약탈이란, 내 손에 집힌 물건(이나 가축, 혹은 여자)을 내가 갖는 게 자연스럽다. 그런데 테무진은 방식을 완전히 바꿨다. 내가 약탈품을 집어도 그건 내 게 아니다. 그건 아직 내가 속한 집단의 것, 즉 공공의 재산이다. 전사들이 취득한 것들을 모두 모아서 일정한 값어치로 환산한 후, 구성원 각자에게 재분배하는 것이 테무진의 방식이었다. 물론 지위(출신계급이 아니라 직책)가 높거나 더 많은 위험을 무릅쓰거나, 눈에 띄는 전공을 올린 사람은 더 많은 몫을 받는다. 하지만 물자가 모두에게 골고루 돌아가는 게 기본 원칙이다.
그러나 당최 분배할 게 있어야 평민층과 하층민들이 혁신의 가치를 알 거 아닌가. 이제는 분배할 게 생겼다. 테무진은 자신의 무리에 물자를 끌어옴으로써 인정받았을 뿐만 아니라, 특유의 분배정책으로 대다수 부하 및 백성들을 감동시켰다.
어느 사회건 귀족은 소수다. 테무진의 정책은 초원의 '대중'들을 자극했다. 그는 점점 귀족층을 거치지 않고 대중과 직접적으로 관계를 맺아나간다. 정치적으로도 부활하기 시작한 것이다. 테무진, 드디어 재기에 성공했다.
8
압도적인 승리로 전투가 끝나자 왕경 승상이 크게 만족한 것은 당연한 일. 적의 칸까지 죽였으니 그야말로 완벽했다. 왕경 승상은 당분간 커레이트를 지원하기로 했다. 그러기 위해서 토그릴의 지위를 특사 자격으로 황제를 대신해 공식적으로 인증해주었다.
"자네는 앞으로 우리 금 제국의 제후(諸侯)일세. 황제폐하의 신하다, 이 말이야. 황제 밑에 왕이 있으니 자네도 왕이 되어야겠군. 임금 왕(王) 자를 내려주겠네. 자넨 이제부터 '왕 칸'이야."
"헉… 이렇게 감사할 데가! 그런데 승상님, '칸'이 이미 왕이란 뜻인데 호칭이 '왕 왕'이 되는 건 좀…"
"더블로 왕 하면 좋은 거지 뭐. 왜, 싫어?"
"싫을 리가요. 감사히 받겠습니다."
"자자, 그럼 황제폐하가 있는 곳을 향해 감사와 충성을 담아 절부터 하라구."
초원 사람들이 왕을 '옹'이라고 발음하면서, 토그릴은 '옹 칸'이라는 이름으로 역사에 남게 된다.
"그건 그렇고, 그 테무진이란 친구 아주 쓸 만하더군."
"그러잖아도 그 친구가 승상님께 꼭 드릴 말씀이 있답니다."
가난한 북방 유목민들에게, 한자로 표현된 언어는 문명과 표준의 상징이었다. 테무진은 정말로 한자식 명칭을 얻고 싶었다. '직함'에 대한 인간의 순진한 욕망도 있었겠지만, 정치적인 이유가 더 컸다. 중국에서 수여받은 한자식 명칭은 그 사람이 어느 정도 국제적인 인증을 받았다는 증명서다. 그래서 테무진은 왕경 승상을 조른다.
"어, 수고했네. 그래 젊은 친구가 하고 싶은 말이 뭔가?"
"저, 웬만하면 저도 한자 직함 하나 내려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왕경승상은 듣도보도 못한 젊은이에게 메이드 인 차이나 도장을 찍어줄 필요성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
"이봐, 우리는 천부장(천 명의 병사를 지휘하는 장교)부터 한자이름 내리는 거 너도 잘 알잖아? 게다가 한자이름은 본인이 함부로 쓰는 게 아니라 황제폐하의 허가가 나야 하는 거라구."
"그래도 뭐 아무거나 직함 하나라두… 아까 토그릴 님한테는 잘만 주시더만요…"
"에휴… 그래 너도 수고 많이 한 거 잘 알아. 보니까 열심히 싸우드만. 내가 너 이쁘게 봤어. 에이 선심쓴다, 승상 직권으로 직함 하나 줄께. 너 '자우트 코리' 해라."
'자우트'는 숫자 백(百) '코리'는 대장이라는 뜻. 즉 자우트 코리는 백부장이었다. 그런데 이거, 한자가 아니라 초원 말이다. 금나라 조정은 '천부장'도 안 되는 미천한 지위를 한자식으로 불러줄 마음이 없었던 것이다.
"아니 승상님, 제가 이끄는 전사의 머릿수가 백이 훨씬 넘는데 어떻게 제가 자우트 코리를 합니까. 이래 뵈도 이 동네에서는 칸이라구요! 뭐 제후로 인정해달라는 건 아닙니다. 그냥 선심 쓰시는 김에 천부장으로 훅! 올려주시면 안 됩니까?"
왕경 승상은 귀찮았던지, 대화를 끝내기 위한 제안을 한다.
"알았어 알았어, 일단 자우트 코리 하고 있어. 내가 북경에 가서 황제폐하게 함 말씀드려 볼게. 그려그려, 잘 말씀드린다니깐. 황제폐하 허가가 나면 알려줄 테니까, 그때부터 천부장 하면 되잖아? 응? 어때?"
"네네. 그럼 꼭 좀 부탁합니다."
그러나 테무진이 메이드 인 차이나 천부장이 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왕경 승상이 왜 그런 하찮은 일에 신경을 쓰겠는가? 국경을 넘기도 전에 잊어버려도 이상하지 않았다.
한편 우리의 테무진은 자우트 코리 직함을 상당히 자랑스러워했다. 천부장만은 못해도 없는 것보다는 낫잖은가? 그는 심지어 자신의 적들에게 이렇게 일갈한 적도 있다.
"네 이놈들! 나 자우트 코리야!"
이름뿐이긴 하지만 어쨌든 '칭기스칸'이라는 거한 호칭을 받아본 사람이 저런 말을 정말로 한 거다.
하지만 테무진이 헤벌레하고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9
초원의 북방 구석에서 살아남기 위해 애를 써온 테무진은 왕경승상의 금나라 군대와 함께한 작전에서 중요한 것들을 학습했다. 시야라는 게 있다. 테무진은 좀처럼 넓은 시야로 정세를 관찰할 기회가 없었다. 그는 이제 이전까지는 선명히 인식하지 못했던 것들을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테무진은, 한 번 경험한 것을 잊지 않는 인간이었다.
첫째, 중국의 부(富). 중국과 느슨하게 관계했을 뿐인 타타르가 얼마나 부유한 지 알게 되었다. 물론 중국의 입장에서는 타타르도 거지였으니, 대체 중국은 얼마나 풍요롭다는 말인가. 유목민들에게 중국과의 관계는 물자공급에 매우 중요했다.
둘째, 테무진은 중국이 초원에 어떤 방식으로 개입하는 지 깨달았다. 그는 잠시나마 중국 조정의 시야에서 초원 정세를 바라볼 수 있었다. 이이제이의 실체를 확연히 알게 된 것이다.
셋째, 자연히 옹 칸도 얼마든지 소(小)이이제이 전략을 펼칠 수 있음을 알게 된다. 그러나 테무진과 옹 칸이 결별하려면 아직 오랜 시간이 남았다.
네 번째로 테무진은 금나라 군대가 개활지에서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직접 눈으로 확인했다. 테무진만 본 게 아니다. 그의 부하들 – 젤메, 보르추, 수부테이 등등 – 도 함께였다. 이들은 훗날 금나라 군대와 맞서 싸우게 된다. 이들은 초원 바깥의 군대는 움직이는 속도가 매우 느리다는 사실을 확인한다.
위에서 말한 십진법 체계도 뻬놓을 수 없다.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의 군대도 동아시아 기마민족의 전통에 따라 십진법으로 편성되어 있었다. 테무진은 발상의 천재가 아니었다. 그는 새로운 것을 발명하는 사람이 아니라, 기존의 것을 고도로 발전시키는 인물이었다. 쿠리엔과 오르도는 그 형태적 특성상 군사행동을 할 때도 불편하지만, 집단의 내부구조를 혁신할 때에도 장애물이 된다. 테무진은 군사용 시스템을 거꾸로 사회에 적용, 전통적인 쿠리엔을 해체할 계획을 품게 된다.
마지막으로 전술. 테무진은 포위섬멸작전이 얼마나 큰 효과를 발휘하는지 알게 되었다. 아무리 숫자가 많고 연합군이었어도 그렇지, 그 강력한 타타르를 그렇게 쉽게 털어버리다니…
물론 초원의 전쟁도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기본적으로 먼저 포위하는 편이 이기는 게 상식이다. 하지만 초원 부족간에 벌어지는 전투의 포위는 느슨했다. 왜일까? 유목민은 바보가 아니다. 그런데도 언제나 포위는 느슨했고, 따라서 아무리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어도 적의 상당수가 생존자가 되어 반격을 하거나, 후일을 도모했다. 이런 식으로 복수에 재복수가 이어지고 원한은 누적되었다.
이유는 약탈에 있다. 역사가들은 그때까지 몽골초원의 전사들이 "이기면 약탈에 정신이 팔려서"라고 간단히 표현하지만, 사실 그렇게 간단치는 않은 문제다. 다른 문화권의 기준에서는, 초원 사람들은 정말이지 절박할 정도로 가난했다. 약탈은 승전의 보너스가 아니라 전쟁의 목적이었다.
전쟁에 참가한 전사들이 이미 목적을 이루고 나면 그때부턴 통합된 행동을 하기가 힘들다. 게다가 지휘관이자 장교라고 할 만한 귀족들이 '먼저 약탈할 권리'에 의해 전투를 멈춘다. 또 쿠리엔과 쿠리엔이 모인 연합부대일 경우 약탈이 가능한 시점에서부터는 각자의 이익을 위해 행동하게 된다. 즉 약탈경쟁이 벌어진다. 자연히 적의 수뇌부와 백성 태반은 도망갈 시간을 버는 것이다.
그런데 전쟁 총사령관이었던 왕경 승상과 금군의 목적은 약탈이 아니라 '토벌' 즉 살상이었다. 이 태도가 전쟁의 양상을 어떻게 바꿔놓는지, 테무진은 여실히 느낄 수밖에 없었다. 타타르 토벌전의 경험은 테무진의 인생과 몽골제국의 역사에 중요한 자산이 된다.
그런데 좋은 일만 있었던 건 아니다.
outro
야영지로 돌아가는 길에 후방에 남겨놓은 50여 명의 작은 부대와 합류한 테무진. 그런데 분위기가 심상찮다. 심상찮다기보다는, 뭐가 좀 없어 보인다.
"뭐냐 이 썰렁함은… 가축들은 다 어딨냐? 아니 그보다, 대체 너희들 왜 다 발가벗고 있는 거야? 난 이런 독특한 환영인사는 사양하고 싶은데…"
"그게… 주르킨 놈들이 쳐들어와서 가축을 다 쓸어갔습니다. 우리가 반항하니까… 그놈들이 우리 사람들을 열 명이나 죽였어요. 그래놓고 옷까지 다 벗겨간 겁니다. 으흐흐흑."
테무진은 이번에는 나뭇가지와 국자를 휘두를 생각이 없었다. 전투를 마친 그의 부하들은 칼과 활로 무장하고 있었다.
(계속...)
|
첫댓글 분량이 장난 아닌데 재밌어요.^^
7년의밤.남한산성.82년생 김지영도 영화로 나온다네요.
제가 재밌게 본 소설인데 김작가님 도
시나리오 한번 쓰시지요 ..
엄지척요..다음편도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