샌디에이고 생활
며칠 전 아침에 현관 앞에 나갔다가 장닭 만한, 시커먼 새 두 마리가 옆집 지붕 용마루 위에 앉아 있었는 걸 보고 물어 보니 까마귀가 그렇게 크단다. 이곳은 대추도 씨는 아주 작은데 엄청나게 큰 것이 자두 만한다 . 그 크기에 깜짝 놀랐다. 그런데 처음 살던 곳-샌디에이고 야구장이 가까운 곳-에서는 벌새를 흔하게 볼 수 있었는데 이곳에 와서는 벌새를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이곳은 꽃이 적어서 그런가 하고 생각했었는데, 오늘 점심 때쯤 울타리 밖 나뭇가지에 벌새 한 마리가 앉아 있는 것을 보고 반가움에 한참 동안 가까이 가서 보았는데도 날아가지를 않았다. 바람에 가지가 많이 흔들리면 날개짓을 하며 균형을 잡곤 했는데 어딘가 초췌憔悴해 보였고 꽃을 찾아 다니며 그 빠른 날개짓을 조금도 쉬지 않던 동적인 모습이 아니었다. 급강하 급상승 등 너무나 민첩하게 방향을 바꾸며 날아 시선이 따라가기도 힘들 정도였는데 그렇게 오래 머물러 있는 걸 보니 나이가 들었든지 건강에 이상이 있는 것 같았다. 아니면 넓은 지역에 꽃이 적으니 다른 곳에 비해 운동량이 많기 때문에 피곤해서 좀 오래 쉬는지도 모르겠다. 한참 기다리다가 방에 들어가 창밖을 보니 여전히 앉아 있었다. 시간이 좀 지나 생각이 나 다시 보니 그 자리에 없어 밖으로 나가 나무 밑을 살펴보니 떨어져 죽은 것은 아니었다. 인상에 남은 '벌새'를 제목으로 시조로 써서 카페에 올렸다.
그 작은 몸에 윤기 잃은 깃
바람 피해 한참 동안 나뭇가지에서 쉬는 벌새야
꽃 찾아 부지런히 날던 옛 추억에 잠겼니
샌디에이고의 벌새 한 마리가 에버그린님과 유익한 대화를 나누게 한다.
"춤사위의 요란함, 부산함 속에 살아가는우리 인생과 무어 다르리요. ... 수필도 많이 쓰시구요. 수필은 장면 하나를 가져오시면서 그 주제에 맞는 책의 내용이나 생활 속의 일화를 같이 엮어가면서 주제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되는 글입니다. 주제 찾기가 힘들고 평범한 틀을 벗어나기가 쉽지 않은 것..."
"회장님, 방문 감사! 그리고 격려의 글도 감사! 해리 포터 영화를 두 편 봤는데 한국에서는 별 재미를 느끼지 못해 보다 말다 했는데 여기서 같이 보니 재미있더군요. 마술의 힘으로 현실의 영역을 넓히니 소재가 무궁무진하더군요. 수필도 그렇게 일상에서 벗어나 소재를 넓힌다면 새로운 수필을 쓸 수 있을 텐데 요는 상상력이 문제입니다. "
"수필은 상상력보단 현실을 보는 감각과 책을 통한 지적능력을 필요로 하지요. 기대하겠습니다. 저도 시간 나면 아이들 만화를 잘 보는데 잔인한 어른들의 흥행물보다는 인간적이고 삶을 벗어나지 않아서 좋은 것 같아요. 솔직히 동화라고는해도 어른이 다시 배워야 하는 내용들이 아닌가 싶기도 해요. ..."
"현실 감각을 기르고 책을 많이 읽어 지적 능력을 길러야 좋은 수필도 나온다면 갈 길이 멀군요. 게다가 동화처럼 쉽게 쓰는 글이 더 어려운 것 같습니다. 노력할 따름입니다."
주고받은 댓글을 다시 읽으면서 이곳 생활을 조감鳥瞰한다. 내가 먼 이역까지 왔지만 집사람이 무릎과 허리가 안 좋아 명승지名勝地 관광은 극히 제한적이고 주로 집에서 지내다가 주일마다 교회에 출석하는 것이 특별한 외출이다. 그리고 초·중학생인 손자 둘이 등·하교할 때 가끔 운전하거나 설거지 같은 간단한 가사를 돕고 지내니 엄밀히 말하면 해외 여행이 아니라 몇 달 거주지를 이전한 것에 지나지 않다. 그렇지만 이번 기회에 멀리 했던 독서를 하며 나 자신을 돌아본다면 관광보다 더 큰 가치가 있다고, 또 한국의 파란 가을 하늘을 매일 선물하는 이곳 샌디에이고에 산다는 자체가 관광이 아니겠냐며 억지를 쓰며 스스로 위로한다. 그리고 좋은 글도 한두 편 쓰는 데서 외국 생활의 의미를 찾자는 생각도 한다.
교회는 세 번째 갔는데 딸이 성가대 지휘를 맡아서 하니 여느 예배와는 많이 달랐다. 샌디에이고에 도착한 다음날이 주일이어서 피곤하기도 하고 미국에서는 교회 출석을 안 하고 세 달 보내고 싶은 마음도 있어서 염 서방 나이를 물은 다음 그 나이에 맞추어 45세 이상 남성은 교회 안 나가는 거로 하자고 제의했더니 낭이 안 된단다. 그래서 결국 집을 떠나 지구를 반 바퀴 돌아 하루 밤 자고 염 서방만만 빼고 다 예배를 드리러 갔다. 유리창이 많은 하얀 건물에 들어가 밝은 분위기 속에서 예배를 드리는데 성가대 찬양 시간에 자막에 뜬 가사를 읽으면서 들으니 '낭'의 신앙심이 배어 있음이 느껴지며 눈물이 났는데 양이 많았는지 눈 안에 가득 차는 느낌이 들었다. 눈가로 흐를 것 같아서 두어 번 손수건을 꺼내야 했다. 설교 말씀도 한층 새롭게 다가왔다. 멀리서 찾아와 드리는 특별한 예배인 만큼 신앙의 만년 초년생인 내가 교회 이름 그대로 '새 소망'을 가지기를 기대하며 예배를 보았다. 교회가 골프장 클럽하우스-클럽 회관-을 빌려 예배를 보기 때문에 주위 조경도 잘 되어 있고 예배 장소가 넓직하고 천정은 높은데 강단 쪽은 3면 벽이 다 유리창이어서 시야가 확 틔였다. 예배드리며 가끔 창밖을 내다보면 드문드문 키 큰 나무들이 파란 하늘을 이고 서 있는데 주택은 멀리 보여 답답하지가 않았다. 지금은 골프장은 운영하지 않고 결혼식장으로 빌려 준다는데 건물에서 가까운 '그린green' 위에는 퍼트putt하는 사람은 없고 야외 결혼식 하객들이 앉을 하얀 나무 의자가 가지런히 놓여 있다. 나에게는 미국 생활의 일상을 떠나 일주일에 한 번씩 성지 순례를 한다는 느낌이 든다. 생활은 한국과 비슷한데 고국을 멀리 떠나 가장 먼 교회에 출석하고 있는 셈이니 우리 부부에게는 하늘과 더 까까워진 것 같은 최고의 관광지이다.
독서도 좀 하고 있는데 한 권은 영어, 한 권은 우리말이다. 지금 읽고 있는 책은 민성, 민준이가 한국 올 때 가져왔던 책인데 한국에서 조금 읽다가 내가 미국으로 가져온 것이다. E.B.WHITE가 짓고 GARTH WILLIAMS가 삽화를 그린 'Charlotte's Web'이라는 동화책인데 이제 반은 읽었다. 두 번째 미국 왔을 때는 서점에서 초콜릿 빛의 양장본으로 나온 '찰리와 초콜릿 공장'을 사서 완독한 적이 있는데 이번에는 '샬롯의 거미줄'을 먼저 읽은 다음에 '해리 포터' 1권을 읽고 가는 게 목표이다. 처음 읽은 영어 동화가 개구리 이야기인 'Ping'이었는데 해리 포터까지 읽으면 네 번째 원서 독서이다. 그리고 제목에 끌려 산 책 마르셸 푸르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권은 한국에서 읽었고 2권을 가져왔는데 407쪽 중180쪽까지 읽었다. 영어 동화책은 사전을 찾으며 읽어야 하니 거북이 걸음이다. 언제나 그렇듯이 뜻을 모르는 단어들이 많다. 낯은 익은데 이름이 생각나지 않는 것들도 있다. 결국은 초면이든 구면이든 다 사전을 찾아 풀이를 거듭 읽어 봐야 한다. 그래도 엉성한 그물로나마 줄거리는 파악이 되니 다행이다. 스마트 폰으로 찾으니 발음도 들어 볼 수 있어 아주 편리하다. 푸르스트의 책은 문장의 밀도가 높고 사건 전개 위주의 소설이 아니라 세밀한 심리 묘사 위주여서 재미도 없고 지루해서 빨리 읽지 못하면서도 멍한 상태에서 이해하지 못하고 지나치는 부분도 있지만 곳에 따라 묘사가 세밀하고 동감하는 부분도 있어 가끔 흥미를 느낀다. 독서를 하며 내용도 내용이지만 나 자신의 마음속 깊은 곳을 여행해야 한다고 본다. 'Ping'을 읽다가 참된 여행은 마음이 한 지점에서 다른 지점-본향, 진정한 나-으로 이동하는 것이라는 내용을 보고 깊이 감동한 적이 있는데 미국에 머무는 동안 그런 의미의 독서를 하고 싶다.
어디서나 마음이 소통되니 요즘 세상은 거리의 의미가 반으로 줄어들었다. 한국을 떠나 있지만, 통신이 발달하였으니 '이슬이' 카페에서는 멀어짐이 없지 않은가. 여기서도 서로 댓글을 주고 받으며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음이 고마울 뿐이다.
첫댓글 하하하~ 나날이 필력이 뛰어나십시아. 제 이야기도 있어어 도 재미있네요
회장님, 추석 연휴 잘 지내셨죠. 이곳에서는 교회 나이 드신 분들이 송편을 내 이국에서 진한 추석 맛을 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