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17일 금
세상에 가치 없는 것이 있을까요? 저마다 이유가 있고, 근거가 있고, 각자의 쓰임새가 있으니 마땅히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아무것도 없어 보이는 사막이 과연 가치가 없는 것일까요?
사하라 사막의 황사가 대서양 건너 아마존 열대우림에 인과 같은 영양분을 공급하여 지구 생태계 유지에 큰 역할을 한다고 합니다.
‘사막이 아름다운 이유는 어딘가에 우물을 숨기고 있기 때문입니다.’라는 말도 있죠.
가볼 일도 없는 심해가 과연 가치가 없는 것일까요?
지구상 대기가 뜨거워지면 바다는 그 열의 상당 부분을 흡수합니다. 심해는 표면보다 온도가 훨씬 낮아, 지구가 과열되지 않게 거대 냉각 방석과 같은 역할을 합니다.
세상에 절대적으로 쓸모없는 것은 없습니다. 쓸모없다고 생각하기 전, 쓸모가 정말 없을까? 하는 궁금증으로 깊이 있게 바라보고, 시야를 넓히고, 때로는 시야를 바꿔볼 필요도 있습니다.
존재 이유가 뭘까요?
쓸모 있고 없고의 기준은 뭘까요?
인간의 편의를 위해 존재하면 쓸모 있고, 불편하거나 도움 안 되면 쓸모없는 건가요?
무엇을 위해서 존재하기보다는 그저 존재하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있습니다. 존재하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은 이미 존재 자체로 충분히 가치 있고 아름답습니다.
사막이 그렇고, 심해가 그렇고, 내가 그렇고 네가 그렇고, 우리가 그렇습니다.
<INTERMEZZO>
이탈리아어로 ‘중간’, ‘사이’를 의미하는 말로 보통 음악 분야에서 한 번씩 들어볼 법한 단어입니다.
음악에서의 의미는 오페라 막간에 연주되던 짧은 극이나 음악을 뜻했습니다.
영화계에서는 Intermission이라는 단어도 있죠. 옛날 상영시간이 긴 영화에서 관객들의 휴식을 위해 Intermission 시간을 가졌습니다. 대개 이때를 기준으로 영화 속에서 분위기를 전환하거나 뒷부분을 예고하기 위한 짧은 영상이나 음악을 깔아주는데, 이것을 인터메조라고 부르기도 한답니다.
제가 본 영화 중 ‘사운드오브뮤직’ 영화에 중간 쉬는 타임이 존재했습니다.
석 달 지났습니다.
미국 샌프란시스코, 아나콜테스, 캐나다 밴쿠버, 한국 울산, 중국 타이창, 장자강, 장인, 대만 카오슝을 지나 싱가포르, 말레이시아를 거쳐 인도양까지 왔습니다.
적도 넘어 지구 남반구로 들어섰습니다. 해수 온도 34도, 기관실 온도 45도입니다. 중동에 비하면 시원한 편입니다. 다행히 에어컨 냉각라인 문제없이 버텨주고 있어 불편한 것 없습니다.
그러나 해수 온도는 조금 높아서 그런지 여기저기서 해수 파이프에 구멍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구멍이 생긴다고 해서 감지 알람이 오는 등 원격으로 알 방법이 없기에 순찰 시간을 더 많이 쪼개서 돌아다니며 상태 확인합니다.
해수 파이프가 터지는 날은 기관실 워터페스티벌입니다.
여기저기 물이 흐르고, 쏟아지고, 뿜어내며 누구 한 명이 가서 구멍 난 파이프를 온몸으로 막습니다. 다른 사람이 고무판과 파이프 클립으로 임시 조치 함께합니다.
보통 그 누구 한 명이 제가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처음엔 두려웠지만, 이제는 한숨 한번 쉬고 냉탕 들어가듯 다가갑니다.
현재 인도양 지나고 있습니다. 곧 마다가스카르, 남아프리카 희망봉 지나 대서양에 들어섭니다.
아프리카 대륙 서부를 따라 올라가 8월 11일경 유럽 스페인 입항합니다.
이후 네덜란드 로테르담에서 마지막 화물 내려준 뒤 벨기에, 독일, 프랑스 등 유럽 일정 마치면 대서양 건너 미국 동부나 남미로 가거나, 다시 인도양, 태평양 건너 아시아로 돌아갈 것으로 보입니다.
<7월>
정확히 중간지점입니다. 반환점 돌며 지난 3개월의 시간을 돌아봅니다.
중간중간 외출 제외하면 주중, 주말, 밤낮 구분 없이 꾸준히 달려왔습니다. 쉴 틈 없이 다음 3개월을 바로 맞이합니다.
300도가 넘는 선박 엔진 배기가스 온도, 기름 찌꺼기를 태우기 위해 950도가량까지 온도 올리는 소각기, 쿵쾅쿵쾅 엔진과 발전기 피스톤 왕복운동으로 기관실 내부는 늘 시끄럽고, 덥고, 습하고, 흔들립니다. 정신을 조금만 놓아도 큰 사고로 이어질 수 있어 항상 주의해야 합니다.
최근 이기사님과 연료 탱크 안에 들어가 청소하다가 그만, 증기 파이프에 피부가 닿아 놀란 적이 있습니다. 다행히 흐르는 물에 곧바로 조치하여 아무런 흔적 남지 않았습니다.
선박은 대부분 철로 이루어져 있는데, 저는 상대도 안 되는 이 배와 계속 다투려고 합니다.
여기 가서 박고, 저기 가서 박고. 꼭 헬멧을 잠시 벗을 때만 박으니까, 철판들과 그리 사이가 좋지 않습니다.
그래도 철판이 세니까 제가 한 수 접습니다.
이번 유럽에서 항만국 검사, PSC(Port State Control) 검사가 예정되어 있습니다. 유럽 검사가 힘들다는 이야기가 많습니다. 지난 말레이시아 출항 이후부터 기기 정비, 수리, 청소, 페인팅 등 검사 준비에 모두 신경 곤두세우고 있습니다. 아무런 문제 없이 검사 통과하면 좋겠습니다.
유난히 7월은 많은 일들이 있었고, 시간도 느리게 흘러가는 듯합니다. 아직 시간이 남았지만, 여러분들의 7월은 안녕하십니까?
<보물>
철암은 자연의 소중함을 느끼게 해 줍니다.
바다는 삶의 소중함을 느끼게 해 줍니다.
어릴 때 고향 형, 누나들과 대화하다 보면, “얼른 철암 떠나고 싶다.” “얼른 도시 가서 살고 싶다”라는 말을 종종 들었습니다.
“나는 철암이 좋은데 왜 형, 누나들은 떠나고 싶어 할까?” 늘 의문이었습니다.
시간이 흘러 본인은 당시 대화하던 형, 누나들 나이보다 많아지고, 시간이 조금 더 지나 어느덧 고등학생이 되어 부산으로 떠났습니다.
떠나보니 그립고, 잃어보니 아쉬웠습니다.
싫다고 떠난 사람들도 그리워하는 마당에, 잠시 본인 꿈 찾는다고 떠난 사람들은 오죽할까요.
놀이터에서 야구하고, 자전거 타고, 야영하고, 산 오르고, 걷고, 책 여행 가며 어린 시절 철암에서 건강하게 자랐습니다. 나를 멋지게 만들어 주었던 나의 고향.
자연을 잘 누리며 살아온 나는 고향이 늘 사무치게 그립습니다.
새로운 삶을 시작한 나의 바다. 바다는 드넓고 끝이 안 보이며, 바다에서의 자연은 한정적입니다. 나무가 안 보입니다. 그러니 산도 찾아보기 힘듭니다. 동물들도 보기 힘듭니다. 오직 파란색 하늘과 바다.
보기 힘든 것이 많으니 그동안 봐왔던 것이 소중해집니다.
귀함과 소중함을 느껴보니, 앞으로 다가올 많은 일들을 귀하고 소중하게 맞이할 마음을 갈고닦습니다.
자연은 사람의 생각을 바꿔주는 힘이 있습니다.
자연은 사람의 행동을 바꿔주는 힘이 있습니다.
자연은 사람의 체력을 키워주는 힘이 있습니다.
대자연 중에서 바다는 사람의 삶을 바꿔줍니다.
때로는 송두리째 바꿔버리기도 하지만요.
어떻게 바뀔지는 시간이 지나야 알 수 있습니다. 지금은 모릅니다.
어떻게 바뀌든 결국 나 자신이 건강하게 성장한다고 믿으며 자연에 내 몸 맡깁니다.
자연은 사람을 바꾸는 힘이 있습니다.
2021년 3월 2일. 해양계에 입문하고 바다인의 삶을 시작한 지 어느덧 1,964일을 보내고 있습니다. 약 2,000일이라는 시간은 앳된 마음과 허물 벗고, 현실적으로 삶을 탈바꿈하여 살아오기에 충분한 시간이었습니다.
첫 탈피까지 2,000일 걸렸습니다. 아직 작은 애벌레지만, 또다시 탈피하고, 또다시 탈피하여 언젠가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나비가 되고 싶습니다.
앞으로 500일, 1,000일, 2,000일은 멋지게 날아가는 순간을 상상하며 또 하루하루 열심히 "살아내 보고 싶습니다."
최근 들었던 말 중 가장 인상 깊은 말이 있습니다.
“버티는 것이 아닌 살아내는 것.”
또 한 달을 살아냅니다.
또 한 달을 살아갑니다.
노을 지는 인도양 해수면 위에 윤슬이 반짝반짝 빛납니다.
석 달 차 밤하늘의 달빛이 더욱 찬란합니다.
이로써 어느덧 바다 에피소드 ‘10’을 맞이합니다.
-2026년 일기 한글 페이지 64쪽 하고도 육만 칠백칠십 글자째.
2025.06 EP.1 집에 갈래요 아니 버텨 볼래요
2025.07 EP.2 꿈이 있는 거북이
2025.08 EP.3 바다는 모든 것을 받아
2025.09 EP.4 살면 살아져
2025.10 EP.5 하늘과 바다와 별 그리고 배
2025.11 EP.6 아름다우니까 정말 유익한 것이지
2026.04 EP.7 다시 또다시
2026.05 EP.8 당신은 무엇을 위해 오늘을 살아갑니까?
2026.06 EP.9 먼지 한 톨, 먼지 두 톨, 먼지 세 톨
말레이시아 망고, 무척 달고 맛있습니다. 왼편에 보이는 망고들 우리 돈 2, 3만 원이면 다 살 수 있을 겁니다.
첫댓글 태희야 건강하게 다시 만나자.
고맙습니다😭
꿈과 열정으로 땀과 웃음으로
아자아자!
반가운 태희~^^
바다와. 더위와 맞서 싸우며 더욱더 단단해져서 만나자~~
마음이 든든해집니다^^
한 달 동안 이 글을 기다려왔다면 믿어주시겠습니까 ㅎㅎ
지난 EP.9 캡쳐해두고 첫 항해 때 힘들때마다 읽었습니다. 덕분에 큰 힘이 되었습니다. 감사하고 늘 응원합니다!
필승. 영광입니다. 오늘도 우리나라 바다를 지켜주셔서 고맙습니다.
멀리서 응원합니다!
아니 미승아 여기서 다 만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