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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해병대를 사랑하는 사람들~[해.사.사] 원문보기 글쓴이: 김성임(AN468)
1979년 10.26일 박대통령 시해 현장에는 해병대 출신들이 유독 많았다.
박선호(중앙정보부 의전과장,예비역 해병대령으로 3연대장으로 근무,사형) 이기주(중앙정보부 궁정동 안가 경비과장,예비역 해병하사출신으로 3연대 3대대근무,사형) 김태원(중앙정보부 궁정동 안가 경비원,해병출신,사형) 정인형(대통령경호실 경호처장,박선호와 절친한 해병대 동기,현장에서 사살당함) 안재송(대통령경호실 경호부처장,박선호가 아끼던 해병대후배,현장에서 사살당함) 박상범(대통령경호실 수행계장,해병대 장교출신,10.26당시 수발의 총상을 입고도 기적적으로 유일하게 살아난 경호원,후에 김영삼 정부시절 대통령경호실장을 역임하게된다.)
운명의 그날 그들은 서로에 총을 겨누며 죽고 죽이게된다.
군사법정에선 예비역 해병 대령.. . 정보부 의전과장 박선호의 최후진술
박선호: 제가 지금 여기에서 최후진술을 하게 된것을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제가 정보부에서 근무하면서 존경하는 김부장님을 모셨다는 것을 첫째 영광으로 생각하고, 제가 아직까지 원망이나 비관해본 적이 없습니다. 이것은 저의 솔직한 심정입니다. 지금 저희가 거기서 근무하면서 부장님께서 구국을 위해 민주를 위해 수시로 청와대에 들락날락하시면서 간혹 저희에게 주시는 그 정보를 들어보면, 숨통이 막히는 절박한 상황을 저에게 수시로 전달해 주시고, 저로 하여금 일깨워 주시고, 국가의 앞날을 버러지의 눈이 아니고 새의 눈으로 볼 수 있게 똑바른 눈이 되도록 길러주신데 대해서 제가 항상 영광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날 당일에 있었던 상황은 1심에서도 말씀드렸습니다만, 긴박한 상황에서 아마 어느 누구도 100명중 90명은 반드시 그 행동을 그대로 취하리라 믿습니다. 지금 또 그와 같은 상황에 처해도 저는 그 길밖에 취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지금 제가 그 진행과정에서도, 어제 잠깐 말씀드렸습니다만 제가 궁정동 일대 모든 건물을 관리하고 있으며, 제 밑에 많은 부하들이 있습니다. 완전히 사살을 목적으로 했다면 여러가지 방법이 있고, 저는 구두로 지시만 했으면 됐습니다. 그러나 부장님의 뜻이 그것이 아니고 이것이 과연 누구를 사살하고 누구를 어떻게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고, 제가 생각하기에도 흔히 각하 정도는 납치하면 될 일이 되지 않을까 항상 속으로 염려했습니다만 웃분이 하는 일을 제가 알 바도 아니고 하달하신 명령만 충실하기 위해서 했고, 전우를 살리려고 들어갔다가 오히려 희생시킨데 대해서 이 자리를 빌려서 다시 한번 애통한 마음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박선호가 말하는 살리려 했다는 전우란 청와대 경호처장이던 정인형,안재송이다. 사건 당일 김재규가 박정희와 차지철에게 권총을 쏘는 소리가 들리자 경호처장 정인형과 경호부처장 안재송은 박선호와 눈길을 마주치며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안재송은 속사권총 국가대표선수 출신으로 경계되는 인물이었다. 두 경호간부는 권총을 빼려고 양복 안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순간 박선호가 재빨리 권총을 뽑아들고 '꼼짝 말라'고 외쳤다. 이어 그는 『움직이면 쏜다』고 위협했다. 두 사람에게 총을 겨눈채 박선호는 『같이 살자』고 설득했다. 정인형은 너무 당황해서 모든 것을 포기하는 기색이었다. 몇초가 지나는 사이 정인형과 안재송은 서로 얼굴을 마주 쳐다보더니 이럴 수가 있나 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가 역시 안재송이 속사권총의 행동을 취하려 했다. 순간 박선호의 총이 안재송과 정인형을 향해 차례로 불을 뿜었다. 박선호는 재판정에서 제손으로 절친했던 해병대 동기생과 후배를 쏘아 죽인데 대해 여러번 자책했다. 박선호는 계속되는 최후진술에서 중앙정보부 부하인 경비원들에 대해서도 선처해 줄것을 부탁했다.
박선호: 이렇게 될 바에는 차라리 제가 그 장소를 피했어도 될 것을 살려보겠다는 마음으로 그랬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여기에 지금 제 부하였던 이기주 유성옥 김태원, 이들은 아무 뜻도 모르고 나왔고, 제가 지시한 대로 한쪽으로 몰아라, 왜냐하면 제가 총소리가 났을 때 일단 저희가 먼저 행동하지 않으면 부장님이 희생당하기 때문에 그런 상황을 염려해서 한 군데로 몰라고 지시했고, 이 사람들은 내용도 모르고 따라 했다가 이 법정에 서게 됐다는 데 대해서 가슴 아픕니다. 아무튼 이 부하들에 대해서만은 관대하게 처리해주실 것을 말씀드립니다.
[당시상황] 박선호,정인형,안재송
.....대기실에 있던 박선호는 총성이 울리자 먼저 총을 뽑았다. 그는 후배인 안재송 경호부처장에게 총을 겨누고, 동기인 정인형 경호처장에게는 “같이 살자”고 소리쳤다. 운명을 가르는 15초. ...그 시간, 경호원 대기실. 이 방은 만찬장과 마루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는 곳으로서, 만찬장에서 부르는 심수봉의 노래 '그때 그 사람'을 들을 수 있었던 거리이다. 이 경호원 대기실에는 김재규의 부하인 중정 의전과장 박선호와, 차지철의 부하인 경호실 경호처장 정인형, 경호부처장 안재송, 이렇게 셋이서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김재규의 부하 한 사람과 차지철의 부하 두 사람이 같이 앉아있었던 것인데, 김재규의 부하이자 이날 밤 암살작전의 지휘자인 박선호와, 차지철의 부하인 경호실 경호처장 정인형은 해병 간부후보 동기생으로서 막역한 친구 사이였고,안재송은 아끼는 해병간부 후배였다.이 둘도 없는 친구 사이에, 죽이고 죽어야 할 운명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으니, 만찬장에서 울린 첫 번째 총성이 그 운명의 신호였다. 대기실에 있던 박선호는 총성이 울리자 먼저 총을 뽑았다. 그는 후배인 안재송 경호부처장에게 총을 겨누고, 동기인 정인형 경호처장에게는 “같이 살자”고 소리쳤다. 운명을 가르는 15초였다....
10.26당시 박상범 경호실 수행계장
문세광이 박정희대통령을 피격하던 당시 몸을 던져 박대통령을 보호했던 보디가드 박상범 전 김영삼 대통령 경호실장(62)에게 붙은 별명이다. 그는 8ㆍ15 육영수 여사 저격 현장이 공개되면서 새삼 주목받고 있다. 박 전 실장은 경호실장, 국가보훈처장을 역임한뒤 지금은 민주평통 장학회 이사장을 맡고 있다. 박정희 대통령때부터 5명의 대통령을 근접 경호했던 당시의 비밀을 모두 간직한채 언론에 일절 나타나지 않고 있다. 그는 전화통화에서 "언론에서 수없이 인터뷰 요청이 들어왔지만 한번도 응한적이 없다"고 말한다. 실제로 그는 역대 대통령의 비화를 들으려는 언론사들의 접촉 시도가 부담스러워 해외로 피한 적도 있다. 하지만 박 전 실장의 성품을 잘아는 인사들은 역시 '그답다'고 평한다. 박 전 실장은 성남 중고, 고려대 법대를 나와 해병대에 입대해 베트남전에 청룡부대로 참가하기도했고 예비역 해병대 대위로 전역한뒤 공채로 청와대 경호원이 됐다. 태권도 합기도 유도등 무예를 합치면 두자리 숫자는 된다. 그는 1974년 문세광의 총성이 울리자 바로 단상으로 올라가 대통령을 가렸다. 이 사건을 계기로 가장 용감하고 충직한 경호원으로 인정받았다. 그는 차지철 경호실장 휘하 경호원으로 1979년 10ㆍ26 궁정동 만찬장에 있었다 . 김재규 중앙정보부장 경호팀은 박대통령을 시해하고 이어 차지철 실장과 경호원들을 향해 총을 쐈다. 그를 비롯한 박대통령 경호팀원들은 확인사살까지 당했다. 하지만 박 전 실장은 죽지 않았다. 후일 알아보니 그를 친형처럼 따르던 후배들이 일부러 그의 허벅지와 옆구리만 스치게 총을 쐈던 것이다. 그는 1983년 버마 아웅산사태 때도 전두환 대통령의 경호과장으로 폭파 현장을 간발의 차이로 비켜났다. 그의 구사일생 얘기는 또있다. 전두환 대통령이 한국 대통령으로 인정받는 첫 데뷔 자리가 됐던 미국 방문을 앞두고 경호실 차원에서 사전 현장조사를 갔다가 차량이 전복되는 의문의 교통사고를 당했으나 여기서도 사신(死神)은 그를 비켜갔다. 그는 김영삼대통령 시절엔 민간인 출신으로서 첫 경호실장의 중책을 맡았다. 그는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의 중재로 남북 정상회담이 예정된 가운데 김대통령의 안위에 대해 밤잠을 설쳐가며 고민했다. 북한 군부내 강경파가 갑자기 김대통령을 공격하거나 붙잡을 가능성에 대해 헬기공수등 다양한 방법을 생각하다 잠이 들었다. 김일성 주석이 하얀 옷을 입고 관에 누운채 실려 나오는 꿈을 꿨다. 박 전 실장은 그 다음날 정종욱 외교안보수석, 윤여준 안기부특보, 정세현 통일비서관과 점심을 같이하면서 김주석 문제로 정상회담이 안될 수도 있다고 언급했다. 당시 아무도 그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았다. 하지만 그로부터 일주일만에 김주석은 사망했다. 그는 민주평통 사무총장 시절이나 보훈처 장관시절 항상 겸손함과 온화함, 여유를 잃지 않았다. 그는 당시 10여명의 기자들이 덤비면 이길 수 있느냐는 질문에 "여러분은 공간이 좁기 때문에 집중공격이 어렵다"며 "여러분들이 덤벼도 급소만 가격하면 금새 KO될것"이라고 자신했다. 그는 이순신 장군을 존경하는 인물로 꼽는다. 박 전 실장은 불사신의 기억들을 묻는 질문에 "무슨 기사냐, 소주나 한잔 하자"며 돌아섰다.
(인터뷰 내용중의 일부..) ―문세광 사건당시 유명한 사진이 朴실장께서 朴대통령 연단 앞에서 총을 뽑아서 겨누고 있는 장면이었습니다. 테러리스트가 앞에서 총을 쏘면 맞을 수밖에 없는 상황인데, 두려움은 없었습니까. 『쏘면 맞을 수밖에 없죠. 평상시에 그런 훈련들을 많이 합니다. 사람은 생존본능이라는게 있지 않습니까. 「땅」 하고(총쏘는 흉내를 내며) 총소리가 나면 엎드리게 돼 있죠. 그건 겁이 많아서가 아니라 본능적으로 그렇게 하게 돼 있어요. 그 당시 단상에 앉아 있던 요인들이 전부 몸을 밑으로 숙였다고 그 이후에 이러쿵저러쿵 말들이 있었는데,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그건 본능이에요. 다만 경호원들은 평상시에 그런 훈련을 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우리들끼리는 「총알받이」라는 얘기를 많이 합니다. 경호원은 기본적으로 공격이 아니고 방어거든요. 그리고 1차 공격을 받은 다음에야 액션이 취해진다는 거죠. 그러니까 「땅」 하고 발사가 되면 그때는 자기가 보호해야될 被경호원을 위해서 자기 몸으로 아주 크게 타깃을 만들어 주는 그런 훈련을 하죠』
박선호,이기주,유성옥
이기주와 류성옥 비원 엄현에게 "리볼버가 어디 있느냐"고 물었다. "내가 근무용으로 차고 있는 게 하나 있어요." "주세요." "근무용이라니까요." "과장님이 달라고 하셔요.". 엄현은 허리에서 권총을 풀어서 건네주었다. 이기주는 박선호와 같은 해병대 출신(하사)으로서 태권도가 3단, 유도가 초단이었다. 다른 경비원들과 함께 매주 수요일에 공기권총으로 사격훈련을 하고 있었다. 근무할 때도 허리에 찬 권총에는 항상 실탄을 장전하고 있었다. 박선호 과장은 '지시만 떨어지면 아무데나 쏴도 좋다'는 지침을 주어놓고있었다.해병대 출신끼리의 독특한 인간관계 덕분에 이기주는 박선호의 특별한 배려를 받고 있었다. 박선호는 이기주로부터 5연발 38구경 리볼버와 권총집을 받아가지고는 탄알집을 열고 다섯 발이 든 것을 확인했다. 권총을 다시 집에 넣고 혁대에 끼운 뒤에 허리에 찼다. 이기주와 함께 1층으로 내려오면서 박선호는 "M15로 무장하고 와. 양복 상의 안에 넣고"라고 했다. 이때 박선호의 눈에 뜨인 사람이 자신의 승용차 운전사 유성옥이었다.
박선호,이기주는 같이 대기실 입구에 있는 총기함으로 갔다. 경비원이 꺼내주는 기관단총 M15 한 정과 15발이 든 탄창 한 개를 이기주가 받았다. M15는 M16 소총의 개머리판을 잘라내고 쇠손잡이를 붙여 기관단총처럼 변형시킨 것이었다. 경비원 관리책임자 이기주는 M15를 양복 저고리 안에 넣고 바깥으로 나갔다. 박선호는 신관을 나서서 건물의 모서리를 돌아 길을 건너가다가 따라오는 이기주에게 불쑥 "유성옥이 총 쏠 줄 아는가"라고 했다. "유성옥은 육군중사출신입니다." 총을 잘 쏠 줄 아는 지는 모르지만 육군중사출신이니 최소한 쏠 줄은 알지 않겠느냐란 뜻으로 한 말이었다. "권총에 장전하고 오라고 해." 유성옥은 그날 오후 동대문시장에 가서 반찬거리를 6만원어치 사다가 주방에 가져다 준 뒤에 대기실에서 바둑을 두고 있었다. 이기주는 대기실 문앞에 서서 안에 있는 경비원들한테 "과장님이 유성옥이 권총을 휴대하고 나오라고 하신다"라고 소리쳤다. 유성옥이 황급하게 일어나 엄현을 향해서 리볼버가 어디 있느냐고 했다. "내가 차고 있던 것은 과장님께서 가져갔고 저 방에 있는 유석술이 차고 있을 거요.". 누군가가 유석술이 한테서 권총을 받아서 유성옥한테 가져다 주었다. 유성옥은 권총을 받아 허리에 차면서 뛰어나갔다. 이기주,유성옥 두 사람은 캄캄한 가을 밤공기를 가르면서 박 과장을 따라나섰다. "그 총 숨겨." 박 과장이 이기주에게 한 말이었다. 그는 M15를 외투 안에 가리느라고 애를 먹었다.세사람은 본관 정문을 통과하여 구관으로 들어갔다가 다시 쪽문을 지나 그때 만찬이 무르익고 있던 나동의 뒷마당 으슥한 곳으로 향했다. 이때의 심정을 박선호는 군검찰의 신문에서 이렇게 말했다. '당시 본인은 이기주 유성옥 두 명을 제미니 차에 태워 곧장 나동으로 올수도 있었지만 초조하고 불안한 나머지 본관으로 해서 몇번 멈추다가 구관을 지나 나동으로 들어섰습니다'. 유신정권의 핵심 인물 네명이 식사중인 나동 건물의 캄캄한 뒷마당 구석쪽으로 걸어가면서 박선호가 말했다. "부장님 지시이다. 오늘 일이 잘 되면 한 몫 볼 것이다. 저 방안에서 부장님이 쏘는 총소리가 나면 너희들은 주방앞에 있다가 경호원들을 몰아붙여." "경호원이 총을 쏘면 어떻게 하나요." 이기주가 겁먹은듯 물었다. "그때는 쏴버려." 말은 그렇게 했지만 가슴이 두근거리기는 박선호도 마찬가지였다. 박과장은 유성옥에게 "제미니를 주방 쪽에 옮겨놓아"라고 했다. "주방 앞에 차를 대놓고 그 안에서 기다려. 경호원이 뭐라고 하면 과장이 시켰다고 해. 주방앞에 서있는 경호원들은 주방으로 몰아넣는다.반항하면 사살해.". 박선호는 나동 정문초소로 가더니 경비를 서고 있던 서영준에게 이기주와 교대하라고 지시했다. 서영준은 '교대한 지 20분도 지나지 않았 는데 무슨 교대인가'하고 이상하게 생각했으나 말없이 시키는 대로 하는 수밖에 없었다. 박선호는 나동에 들어가 상황을 살피고 나오다가 정문에 서 있는 이기주를 보니 윗옷 안에서 M15의 개머리판이 삐죽이 나와 있고 움직이면 소리가 났다. 권총으로 바꿔가지고 오라고 지시했다. 이기주는 박 과장이 권총으로 바꾸어 차고 오라고 했을 때 '이 길로 도망가버릴까하고 생각하다가 마음을 고쳐먹었다'고 한다. 그는 법정에서 진술하기를 "한번 해병이면 영원한 해병이다. 과장이 나를 신임했는데 거절할 수가 있는가. 과장이 유사시에는 생명을 걸고 충성하라고 했는데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라고 했다. 그는 항소심에서 "과장님이 왜 하필 나에게 이런 일을 시켰는지 원망도 했으나 저를 신임했기 때문에 그와같이 시켰을 것이라고 자위도 했습니다"라고 말했다. 조금 전에 박선호와 박흥주 두 사람이 김재규로부터 거사에 대한 지시를 갑자기 받았을 때 느꼈던 똑 같은 충격과 당황을 이번엔 이기주와 유성옥이 느끼고 있었다. 이기주는 법정에서 "과장의 지시면 누구나 그 자리에서부터 뜁니다"라고 했다. 변호사가 "불응한다거나 승낙한다거나 선택적으로 판단할 여유가 없다는 것인가요"라고 물었다. "무조건 지시에 따랐습니다. 상관의 지시이니까 무조건 따르고 여기서 죽는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유성옥은 그때 나이가 서른 여섯이었다. 경기도 고양이 고향인 그는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생모는 두살때 죽고 계모밑에서 살았다. 중학교 2학년을 중퇴한 다음에는 근처 미군공병대에서 나오는 쓰레기를 주워 팔아 생계비를 보탰다. 그의 아버지는 산에서 나무를 하여 서울에 가져다가 파는 등짐장수였다. 유성옥은 어릴 때는 고아처럼 자랐다. 그에게 군대는 피난처이자 기회의 땅이기도 했다.
10.26당시 궁정동 연회장.
연회장 오른쪽 구석에 차지철 경호실장이 쓰러져있다.
별관주방에서 사살된 대통령 경호원 김용섭과 대통령 운전기사 김용태.
[사망]
[사형및징역]
[생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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