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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태복음 20장 20-28절. 섬기는 삶을 살라
사람들은 다스림을 받는 것보다는 다스리는 삶을 살기를 원합니다. 자식들을 그렇게 대학교뿐 아니라 대학원에 외국 유학까지 보내는 이유는 다른 사람을 다스리는 머리가 되는 삶을 살게 하고 싶어서입니다. 한마디로 자신의 자녀들이 세상에서 떵떵거리는 삶을 살기 원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학원도 보내고, 과외도 시키고, 자식을 위해서라면 물불 안가리고 열심히 돈을 벌어서 꼭 성공시키려고 합니다. 비록 자신들은 다스리지 못하고 다스림을 받는 삶을 살지만 자식들 만큼은 다스리는 삶을 살게 하고픈 것이 부모들의 공통적인 마음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쉽지는 않습니다.
우리 나라 정치인들 가운데 보면 자기의 자녀가 그만큼 실력이 안되는데도 자신의 세상 권세를 가지고 압력을 넣어서 좋은 대학을 보내 사회에서 무엇이가 한 몫을 하게 하는 경우가 꽤 많습니다. 사실 그것은 지금 드러난 사람들보다 드러나지 않은 사람들이 훨씬 많습니다. 그것이 나중에는 발견되어서 큰 어려움을 겪거나 감옥에 들어가기도 하지만 어쨌든 간에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성공해서 다른 사람들 위에 군림하는 자녀들을 보는 것이 소원입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예수님의 제자들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나를 따라 오너라”하고 말씀하실 때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재산과 직업, 그리고 심지어는 가족들까지도 다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나라가 오면 무조건 자기들은 일순위 내지는 이순위에 해당하는 권력을 받게 될 것을 기대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모두 마음 속에만 간직했지 입밖에 내지는 않았었습니다. 그러다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히실 때가 거의 되었을 때에 제자들은 자기들 스스로 비교하면서 열 두명 가운데 예수님의 나라에서는 과연 누가 제일 큰 사람이 될것인가를 놓고 논쟁을 벌였습니다. 참으로 모난 제자들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어쩌면 이것은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높아지려고 하고 대접받으려고 하는 모습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날 세배대의 아들들인 요한과 야고보가 자기 어머니를 동반하고 예수님께 와서 자기들을 예수님과 제일 가까운 자리에 앉게 해달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20-21절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그 때에 세베대의 아들의 어머니가 그 아들들을 데리고 예수께 와서 절하며 무엇을 구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무엇을 원하느냐 이르되 나의 이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
요한과 야고보는 선주의 아들인 것같습니다. 그런데 그 어머니가 유통을 담당했는지 알수 없지만 예수님께서 잡히시던 날에 예루살렘에서 힘있는 사람들과 많은 안면을 쌓았기 때문에 요한이 아무런 제재도 받지 않고 재판정에 들어간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런 배경을 가져서 그런지는 몰라도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던 야고보와 요한 형제는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임하실 것을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기도를 들어보면 “나라가 임하옵시며”하는 것은 하나님이 기름부으신 그리스도로서의 예수님이 다스리시는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임할 것을 가르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열 두 제자들 가운데서 자신들이 가장 귀한 직분을 받아 쓰임받기를 원했고 또 그럴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자기들의 어머니까지 동원시켰습니다. 아마도 그 전에 물밑 작업으로 그들의 어머니도 예수님을 따라 다니면서 봉사를 했을 수도 있습니다. 자식들을 위해서 말입니다.
그녀는 자기의 아들들이 예수님이 다스리시는 나라에서 예수님의 신하로서 국무총리 내지는 비서실장 정도의 막강한 권세를 받아서 살기를 원했습니다. 아마도 그 당시 아들을 가진 모든 부모들의 바램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에게 두 형제와 그들의 어머니가 함께 나와서 간구를 한 것입니다. “나의 이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
그들이 요구하는 것을 들으신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지금 자신들이 구하는 것도 또 구해야할 것도 잘 모르고 있다고 설명하셨습니다. 우리 22절을 읽어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그들이 말하되 할 수 있나이다” 참 특이한 것은 예수님께서 그렇게 계속해서 낮아지고 섬기는 삶을 살라고 말씀하시는 데도 제자들은 계속해서 크고 높임을 받는 자가 되기를 갈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치심이 땅바닥에 떨어지고 있는 것처럼 아무 소용이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런 제자들에게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하고 말씀하십니다. 뭘 구해야 하는지 조차 잘 모른 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 속에는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는 고난의 잔이 예비되어 있다는 것을 설명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아버지께 “아버지여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하고 기도하셨습니다. 이 잔이 고난과 수치와 십자가의 죽음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두 형제에게 고난과 십자가의 죽음이라는 잔을 마실 수 있느냐고 물으신 것입니다. 이 두 형제는 자신있게 대답합니다. “할수 있나이다” 마실수 있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베드로가 죽기까지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장담했을 때와 별반 다르지 않은 대답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막연할 때는 뭐든지 할수 있다고 큰 소리칩니다.
올림픽에 나가는 선수들을 보면 다 자신있어 하며 큰소리칩니다. 자기 나라에서 최고의 성적을 거두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실력이 200개가 넘는 그 나라의 최고의 실력자들만이 겨루는 경기라는 것을 생각해보면 그렇게 가볍게 대답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있다고 큰 소리 칩니다. 큰소리를 치는 사람들의 대부분이 문제를 객관적으로보는 능력이 떨어집니다. 예수님은 요한과 야고보 형제 역시 막연한 고난에 대하여 자기들도 그 고난의 잔을 마실 수 있다고 큰소리치는 것임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것을 지적하거나 바꾸려도 하지는 않으십니다. 왜냐하면 성령이 임하시는 날에는 그런 믿음을 갖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그 대답을 부인하지 않으시고 그들의 마음을 있는대로 받아들이셨습니다. 23절입니다. “이르시되 너희가 과연 내 잔을 마시려니와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내가 주는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누구를 위하여 예비하셨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 너희는 과연 내가 마시는 잔을 마시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는 두 가지 의미가 다 내포되어 있습니다. 하나는 성찬식에서 나누어주시는 예수님의 피를 상징한 포도주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예수님과 하나됨 다시 말해 연합을 상징하는 포도주를 마시게 될 것을 말씀하셨고, 또 하나는 순교의 잔을 마시게 될 것을 미리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야고보가 사도들 중에서 가장 먼저 예수님이 마시셨던 고난의 잔을 마신 순교자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럴지라도 예수님의 좌우편에 앉을 사람들을 세우시는 것은 예수님 자신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예비하신 사람이 앉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쓰시는 분에 의해서 쓰임을 받는 사람들의 자리가 정해지는 것이지 쓰임받는 사람이 자기가 원하는 자리에 앉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그 자격은 오직 하나님 아버지 밖에는 없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어느 자리에 앉느냐가 아니라 주님께서 맡기신 사명을 어떻게 겸손한 마음으로 순종하느냐에 달려있습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여러분들에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함으로써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에게 맡기신 사명의 짐을 잘 지고 담당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것을 말씀하시자 그렇지 않아도 요한과 야고보와 똑같이 예수님의 좌우편 자리를 탐내고 있던 나머지 제자들이 분을 내기 시작하였습니다. 24절입니다. “열 제자가 듣고 그 두 형제에 대하여 분히 여기거늘” 그것을 보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힘써야할 참된 삶이 무엇인지를 말씀하십니다. 우리 25-27절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르시되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아야 하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예수님은 이방인 집권자와 그 밑의 고관들에 대하여 설명하시고 계십니다. 이방인 집권자들은 자기가 원하는 사람에게 높고 낮은 지위를 줍니다. 그런데 그 집권자에 따라 세움을 받는 사람들이 악한 사람들이 세워지기도 하고 그래도 백성들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세워지기도 합니다. 집권자가 악하면 악한 관리들이 많이 세워지고, 집권자가 백성들을 사랑하면 그나마 백성들을 위하는 사람들이 많이 세워지기도 합니다. 집권자는 자기 임의로 자기 마음에 맞는 사람들을 세우기도 하고 폐하기도 합니다.
이 때문에 그 나라의 관리들은 집권자인 왕의 눈치를 살핍니다. 왕의 눈밖에 나면 아무것도 아니거나 감옥에 갇혀 있거나 죽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라의 관리들 가운데 특히 고관들은 왕의 이름으로 왕과 백성들을 위해 일할 수도 있지만 사리사욕을 채울 수도 있습니다. 왕의 권세를 악한 사람은 악하게 사용하고 선한 사람은 선하게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런 그들의 대부분이 권세는 다스리며 통치하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권세를 받은 사람들은 모두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 나라의 권세자들은 억업하고 억눌러 자기들의 뜻에 따르게 하는 통치가 아니라 섬기는 삶이 정치의 이념이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누가 크냐고 다투는 제자들에게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러분은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특히나 목사나 장로나 권사나 집사는 교회의 연약한 성도들을 섬기도록 해야 합니다. 이것은 세상 정치로서는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반드시 반대 세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에 속한 교회는 가능합니다. 왕중 왕이신 예수님이 바로 겸손히 섬기시는 주님이기 때문입니다.
한 집에서도 연약한 가족이 있다면 제일 힘을 쏟아서 섬기듯이 교회 역시도 연약한 성도와 새신자들을 위해 힘을 쏟아서 섬겨야 합니다, 왜 이렇게 해야합니까? 그 이유는 새신자들과 연약한 성도들 역시 교회의 한 가족이며 한 지체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스스로의 힘으로는 섬길 수 없습니다.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그들을 도울 수 있는 사람은 어느 정도 성장해 있고 성숙한 성도라야 가능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섬김의 마음을 가지고 다른 성도들을 섬겨야 합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크고자 하는 자는 섬기는 자가 되고,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종이 되어야 하리라” 그러면서 28절의 말씀을 하십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예수님이 이 세상에 그리스도로써 오신 이유는 섬김을 받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섬기는 것이 목적입니다. 그뿐 아니라 예수님은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들의 대속물로 주려고 오셨습니다.
오전에도 잠깐 들으셨듯이 대속물은 구약시대의 죄값으로 대신해서 죽이는 소와 염소와 양과 비둘기를 일컫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침례 요한이 예수님을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세상 죄를 지고 골고다로 향해 가셔서 온 인류의 죄값을 치루신 하나님의 어린 양입니다. 그로인해 예수님 이전 사람들 가운데 예수님이 오실 것을 믿고 기다린 모든 사람들, 그리고 예수님 이후에 예수님을 믿은 모든 사람들이 다 죄사함을 얻고 구원받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섬김의 극은 대신 죽는 희생에 있습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은 이조차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고린도전서 13장 3절을 보면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면서 사랑없는 희생은 아무 의미가 없고 진정한 희생은 사랑이 있어야 유익한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섬김은 사랑의 마음의 표현이 되어야 합니다. 물론 섬기다보면 사랑이 되는 경우도 있기는 하지만 예수님이 여러분 안에 임하시면서 주신 것은 사랑으로 섬기는 마음을 주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누군가를 섬길 때와 섬김으로 인해 대신 희생을 겪을 때조차 기쁨으로 그 일을 감당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이 주신 기쁨안에서 갖는 섬기는 삶입니다.
어쩌면 여러분들도 예수님을 믿으면 큰 사람이 되고, 세계적인 사람이 되고, 뛰어난 사람이 되어 세상 사람들로부터 섬김을 받고자 하는 마음으로 예수님을 믿기 시작했을 수도 있고 지금도 그 마음이 없어지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들 앞에서 여러분들을 가르치시고 인도하시는 예수님은 희생적인 사랑으로 섬기는 자로 이 세상에 오셨고 여러분들을 만나주셨습니다. 이제는 여러분들이 예수님의 이 사랑의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이 세상을 섬기길 원하십니다.
설사 이 땅에서 아무것도 얻어지는 것이 없는 것같고 헛된 수고와 희생처럼 보여도 하나님 아버지가 여러분들을 보고 계시며 예수님이 여러분 안에서 자신의 뜻을 보이시고 성령님께서 여러분들을 인도하시고 계시는 한은 그것은 헛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큰 가치가 있으며, 그것이 얼마나 하나님께서 크게 여기시는 지를 예수 그리스도의 보좌 앞에 서는 날 알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진심으로 자신을 믿고 자신이 인도하시는 자신의 길을 따르는 여러분들을 외면하시는 법이 없으십니다. 오히려 칭찬과 영광의 면류관을 여러분들에게 씌워주실 것입니다. 이 축복이 여러분들에게 있음을 믿고 섬김의 자리에서 묵묵히 섬기시는 저와 여러분 모두가 될 수 있기를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