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그빌의 후속편인 '만덜레이'는 주인공 그레이스가 도그빌에서의 악몽을 뒤로하고 아버지와 함께 미국 남부의 오지마을 만덜레이에 도착하게 되고, 노예제도가 폐지된지 70년이 넘는 세월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노예제도의 굴레 속에 살고 있는 흑인들의 놀라운 생활을 직면하면서 나름대로의 정의감으로 뜨거워진 마음으로, 흑인 노예들의 압제자 역할을 하고 있는, 운명하기 직전의 노 마님을 만나게 되는 것에서부터 이야기는 시작된다.
그녀는 그 마을에 있는 노예들에게 자유을 알려주고 그 자유의 몸으로 자유롭고 행복하게 개인 삶의 길을 열어주고자, 은근히 그녀에게 도움의 손길을 바라는듯한 만덜레이 사람들과 함께 지내기로 작정한다.
그러나 그 흑인 노예들에게 필요한 것은 자유가 아니라 정작 생명 유지에 필요한 물과 배를 불릴 수 있는 빵이었다. 그리고 자신들의 생활을 안정되게 유지해 줄, 통제와 규제의 틀이었다.
노예제도가 폐지된지 그토록 오래되었지만 여전히 그들을 노예로 부리던 백인 노 마님에겐 그 사회를 이끌어 가는 나름대로의 원칙이 적힌 노트가 있었다.
자유을 얻었어야 했을 그들을 여전히 노예로 삼고 있는 사회를 쥐고 있는 노 마님이 그들을 다루던 원칙을 적어놓은 노트는 놀랍게도 그 노마님도 그분의 가족들도 아니라 다름 아닌 그녀의 충성스런 흑인 노예에 의하여 쓰여졌었던 것이었다.
사랑없고 잔인하기까지 보이는 노예에 대한 처우에 대한 원칙을, 동료들을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고 그들을 그 누구보다 사랑하던 충성스런 흑인 동료가 그 노트를 작성했다는 사실은 정말 아이러닉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 아이러닉한 사실 안에 이 영화의 답이 들어 있었다.
그 노트에는 만덜레이에 살고 있는 노예들에게 각 등급이 매겨져 있었다. 그곳의 노예들은 그 등급에 맞는 대우를 받으며 살고 있었고 그 등급에 매겨진 계급의 틀 속의 패턴속에서 또 적응하고 살고 있었다.
최하위 등급인 7등급은 자존심과 의리가 없어 자신의 모습과 행동을, 만나는 상대에 따라서 언제든지 쉽게 바꿀 수 있는, 카멜레욘과 같은 얼굴을 가진 자들에게 매겨진 등급이었다. 그들은 이해할 수 없는 가혹한 대접을 받으며 억울하게 살고 있었으나, 사실 그것은 필요악의 의미로 만들어진 나름 살면서 터득한 지혜로 만든 것이었다. 자유를 주면 사회에 악한 변수를 만들 수 있는 위험한 인물들에게 불필요한 가해를 계속 주면서 이 사회에서 기를 펴지 못하도록 만들고 있는 울타리같은 것이었다.
그 노트에는 최 상위 등급인 1등급은 존재하지 않았다. 내가 기대하던 충직한 늙은 노예도 2등급이었던 것이다. 어쩌면 1등급은 마지막 등급인 카멜레욘같은 사람들이 충성스런 2등급 사람들을 제치고 1등급으로 보여질 수 있기에 비워진 것은 아닐까? 그 비어진 자리는 실제 주인역할을 맡은 이의 자리이지 않았을까? 노 마님은, 주인과 하나라고까지 착각되게 생각되게 만드는 카멜레욘같은 이를 조심하라는 충고를 아주 역설적으로 그레이스에게 해 주고 있는 것은 아니었을까? 말이 노예를 다루기 위한 규칙이라지만 실상은 모두 함께 공존하기 위한 사회였다.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계급의 틀을 노예제도란 거친 칸막이를 쳐놓고 있었지만, 그 마을 사람들은 그 거친 칸막이의 실상을 다 알고 있었다. 몰랐던 사람은 오로지 어줍잖은 선한 개념을 가지고 들어선 그레이스와 자유를 주면 그 자유로 그 사회에 무리를 만들 수 있는 하위계층의 사람들뿐이었다.
영화 중후반부를 보면서 나는 이 영화가 무엇을 말하고 하려는지 눈치채기 시작하게 되었다. 만덜레이 사람들은 죽어가는 노 마님을 대신 할 어떤 백인의 자리가 필요했을 뿐이었다.
그들에겐 갈증과 배고품을 어느 선까지 해결 시켜주고 자유를 누리기엔 자신들이 가진 것이 턱없이 모자라는 상태를 커버해 줄 울타리가 필요했다.
억압과 통제 속에서 도리어 편안한 안정감을 느끼게 되어버린, 백년 넘는 노예생활의 세월은 몸은 자유인이 되어도 정신적으로는 여전히 어딘가에 매이려는 정신적 노예상태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 그들의 현실이었다.
그러한 이유로 만덜레이 사람들은 노 마님을 대신하여 자신의 마을의 질서를 형식적으로나마 지켜 줄 이기심으로 그레이스를 원했던 것이고,
그레이스는 그녀대로 자신이 확신하는 선한 사상으로 그들에게 자유와 평등의 기쁨을 자신이 만들어 주고 싶은 욕망을 실현시켜줄 만덜레이 사람들이 필요했던 것이다. 너무 잔인한 말 같지만 그 말이 지나치지 않음을 증명하는 것이 극적인 상황에서 적나라하게 나타났다.
바로 자신이 이루어 놓은 결실을 어그러뜨리고 자신을 한동안 착각하게 만들었던 흑인 노예에 대한 분노의 표시로, 그 흑인을 벽에 매달아 놓고는 다름아닌 그레이스 자신이 채찍을 들었던 것이다. 노예의 주인이 죄를 지은 노예에게 처벌하듯 흑인의 몸에 혹독하리만큼 채찍질을 해대는 모습이다. 선한 일이든 악한 일이든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자유의 몸이된 흑인을 두고 저주는 할 수 있어도 노예처럼 매어 놓고 때릴 수는 때에 말이다.
원래 최하위 등급으로 매겨진 그를 부당하게 매어두고 때리는 일을 지켜보았던 예전의 노 마님은 자신이 직접 그 채찍을 들지는 않았었다. 정작 그 사회의 규율을 적용하던 노 마님은 그 사회를 안정되게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각 단계를 정하고 징계하고, 실지로는 자신을 1등급으로 하는 사회의 등급속 같은 구성원으로 자신을 포함시켰지만, 그레이스는 선한 의도, 선한 방법으로 다가갔었지만, 그 흑인 노예들에게 자유인을 만들 수도 노예로 만들 수도 있는 실권을 가진 그 사회속 등급 자체에 자신을 포함시키지 않은 모습과는 크게 비교가 되는 모습이었다.
과연 입장다른 사람에게 평가되는 선과 악은 실제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이고 선과 악이란 상대적인 평가에 의해 결정나는 문제가 아닌 오직 신의 관점에서만이 명확해질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필요악이란 하나님께는 어떻게 보일까?
그레이스의 선한 동기는 과연 이기적인 것이었을까? 그녀가 이기적이라면 선을 행하고자 하는 평범한 사람의 선은 어떻게 이해해야만 하나?
그녀의 선한 동기가 결실에 따라 평가가 달라진다면, 성공하면 공신이 되고 실패하면 역적이 되는, 답없는 공방은 계속 될 것이다. 본디 사람이 사람을 지배하는 것이 유익하지 않는 것이 진리이기에 이렇게 말도 많고 탈도 많은 것일?
난 마지막으로 이런 결론을 얻었다.
선을 행하되 자신이 온전히 죽어지지 않는 그레이스의 모습이 바로 사람이 할 수 있는 善의 한계이며, 자신을 온전히 바쳐 자신을 희생제물로 내어 놓으신 예수님의 사랑법을 따르지 않고서는 우리는 절대 온전한 善을 이룰 수 없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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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나의 하느님 사랑이야기 원문보기 글쓴이: 언제나그자리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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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기작이 만들어지고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도그빌, 만덜레이, 그리고 *** 모두 한 주인공의 내용으로 말이죠. 도그빌은 산소운반님께서 권해주셔서 알게 된 영화였습니다. 곱씹을수록 맛이 나는 아주 멋진 영화입니다. 감사드려요..^^
영화를 통해서 많은 것을 얻었군요 저도 그 영화 한번 보고 싶군요,,,
예. 아주 멋진 영화지요. 인간의 심리를 예리하게 파헤쳐서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게 만드는 영화입니다. 꼭 한 번 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저도 꼭 볼께요. ^^
맞아요 착한 증인 분들도 생계 문제 하고 친족 관계 문제 전과 문제만 해결되면 그래도 자유롭게 비상할수 있으리라 생각 됩니다
저는 이런 생각이 드는군요. 그 안정과 질서를 위한 노예성은 모든 인간이 지닌 공통적인 성향이 아닌가 합니다. 종교에 마음을 의탁한 모든 사람들에게도 해당되지요. 그러면서도 자유를 추구하고 투쟁하는것도 인간입니다. 선을 행하는것도 인간의 한 성향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는 진정한 선을 위한 선이 아닌 인성으로서의 선, 즉 자기만족이 전제되어 있지요. 하지만 그러면서도 그 한계를 인정하고 끊임없이 한계에 의문을 제기하고 자신을 채찍질하며 진정한 희생을 하시는 분들도 많습니다. 그것 또한 인간의 성향입니다. 인간이란 무엇이든 불가능하게 만드는 동시에 가능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한계가 있으면서 한계를 벗어날 수도 있
게 만들어져 있습니다. 하느님입니다. 하느님께서 그렇게 인간을 만드셨습니다. 태초 이래로 지금까지 계급이 존재하지 않았던 적은 없습니다. 그것이 설사 제도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현대사회에서도 계급은 존재하고 있습니다. 돈과 권력, 지식, 외모등으로 계급이 존재합니다. 실질적으로 자유를 구속하고 인권을 무시한 부당한 계급체계는 분명 잘못된것이지만 계급의 형성은 선악의 문제 이전의 자연섭리, 즉 하느님이 부여한 인간사회의 또 하나의 성향이라고 생각합니다. 낮은 등급의 피해의식과 높은 등급의 과시의식은 잘못되었으나 그 높고낮음으로가 아니라 사회의 다양성으로 인한 각각 다른 영역처럼 수평적인 계급으로 생각해 볼 수
도 있겠지요. 또 그 계급은 성향의 개념을 넘어 추구되기도 합니다. 로마시대때의 투표권의 제한을 두었고, 각 계급에는 그 계급에 맞는 책임과 의무가 주어졌죠. 오늘날도 자연적으로 계급이 형성되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책임과 역활이 다르므로 모두가 똑같이 평등하게 살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밑에 있는 사람들은 필사적으로 오르려하고 비교적 위에 있는 소수는 필요이상의 힘을 동원해 그 자리를 지키려 합니다. 그들에겐 낮은 자들의 눈과 귀와 밥줄을 무기로 그들을 지배합니다. 개념을 더 넓히면 종교도 같은 논리로 적용이 됩니다. 하느님의 허락받지 않고 명의도용하면서 말이죠. 그 삶에 만족하는게 좋으냐, 평생을 힘겹더라도 자
유로와 지느냐는 논란의 여지가 있는 문제이죠. 지배논리인 순응이란것의 원천이 종교에 있습니다. 안주하고 안정을 찾는 인간의 성향은 성향이지마는 그것이 절대 옳다,그르다 할 수 없는 문제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계급사회와 종교사회가 양립함으로써. 그러나 그 양립은 참으로 좋은 도구가 됩니다. 인간이 하느님에게 다가가기 위한 좋은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지상낙원이 되면 이러한 모순이 사라질거라고들 합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모순은 사람 안에서 밖으로 현실화되었습니다. 사탄의 업적으로 치부하기엔 너무도 명백히 분석이 됩니다. 낙원이란 이러한 인간의 본질을 파악해 갑으로써 그를 바탕으로 한계의 인정과 그
한계의 극복이라는 과정중에 형성될거라고 생각합니다. 모든 계급이 그 계급을 인정하고 만족하며 수용하고 또한 모두가 인정하는 방법으로 극복하는 과정. 그 자체가 사람이 가야할 길과 다르지 않으며, 그것이 하느님에게로 가능 방법이며 그 모든것이 하느님께서 만들어 놓으신거라고 생각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 의해서 만들어질 지상낙원의 계획을 세워놓으신거죠. 다시 오실 그 분을 일꾼으로 해서요. 이 모든것이 하느님의 뜻입니다. ^^
암튼 다떠나서 정말 보고 싶어지는 영화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