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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위대한 구원과 한국 감리교회의 과거·현재·미래
박종천 감신대 교수
kmc.or.kr/tong/gkme/jepark.html
1. 들어가는 말
'주의 크신 구원'의 사역에 동참해 온 한국 감리교회는 새 천 년대와 선교 2세기를 감격 속에서 맞이하고 있다. 주후 1천 년대 기독교의 지중해 시대와 주후 2천 년대 기독교의 대서양 시대를 넘어 주후 3천 년대 기독교의 태평양 시대가 열리고 있다. 18세기에 싹이 터서 19세기에 꽃을 피웠던 웨슬리의 부흥운동과 영국 감리교회, 19세기에 초석을 놓고 20세기에 전성기를 이루었던 미국 감리교회를 뒤이어, 20세기에 괄목한 만한 성장을 한 한국 감리교회는 21세기 세계 선교의 선두에 설 차례가 된 것이다.
이 때는 실로 삼위일체 하나님의 영원한 선택이 인간의 시간과 역사 속에서 실현되는 카이로스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 때는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신 것이다."(롬 8:29) 하나님은 전혀 우리의 공로 없이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용납하실 뿐만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성령을 통하여 역사를 변혁하는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의 사역에 동참하게 하신다. 웨슬리의 회심과 소명으로 '웨슬리 이전과 이후의 영국'의 역사가 구분되었다고 어느 영국의 역사가가 평했듯이, 오늘 한국 감리교회의 임원들로 부르심 받은 여러분들로 인하여 한국과 세계의 역사가 획기적으로 변화되었다고 후일의 사가들이 평할 수 있게 되기를 기원한다.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의 빛에서 한국 감리교회의 과거를 돌아보고, 현재를 평가하며, 미래를 준비하기 위하여 다음 세 가지 요지로 말씀드리고자 한다.
첫째, 존 웨슬리의 위대한 구원의 신학과 전통의 요체를 설명하고, 한국 감리교회의 역사적 유산과 전통을 평가한다.
둘째, 한국 감리교회가 현재 당면하고 있는 신학적, 선교적 위기를 진단하고 이 시대의 위대한 구원 사역의 소명을 밝힌다.
셋째, '위대한 감리교회'를 위한 감리교회 임원들의 비전과 전략이 어떠해야 할 것인가를 구체적으로 제시한다.
Ⅰ. 존 웨슬리와 한국 감리교회의 전통
1. "해 아래 모든 나라에서 하나님께서 기독교의 시작부터 해 오셨던 것과 똑같은 방식을 지키시리라는 것을 마땅히 믿을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저희가 가장 큰 자로부터 가장 작은 자까지 나를 알라 하지 아니하시고(왜냐하면 이것은 하나님께는 어리석음에 해당되는 세상의 지혜이기에) 도리어 가장 작은 자로부터 가장 큰 자까지(from the least to the greatest) 나를 알라'(히 8:11) 할 것이니 그것은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 말미암기 때문입니다.'(롬 2:29)"
이 말씀은 1783년 웨슬리가 80세가 되던 해에 출간한 설교 "복음의 전면적 확산"(The General Spread of the Gospel)에서 한 것이다. 이 설교는 삼십 대 중반의 젊은 시절에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회심하고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의 사역에 부르심을 받아 50여 성상을 죽도록 충성했던 전도자가 지난 세월을 회고하면서 시작한다. 웨슬리는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신성 클럽을 통해 작은 누룩과 같이 구원의 진리가 퍼져나가 영국과 아일랜드, 그리고 뉴욕과 미국의 여러 지역에까지 이르게 된 것을 모든 씨보다 작은 겨자씨 한 알이 자란 후에 큰 나무가 되고 공중의 새들이 깃들게 된 것에 비유한다.(마 13:31∼32) 일찍이 종교개혁자 루터는 종교의 부흥이 한 세대 이상을 지속하지 못한다고 했으나, 웨슬리는 하나님께서 감리교 운동을 50여 년 간 지속해 오셨을 뿐 아니라 앞으로도 영광스러운 사역을 그치게 하지 않으실 것이라고 확신하면서 자신의 부흥 운동은 단지 '훨씬 더 위대한 사역의 시작 - 말일의 영광의 새벽일뿐이다'고 주장한다.
이어서 웨슬리는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의 사역이 유럽 전역과 더 나아가서 소아시아, 그리고 끝내는 아시아, 아프리카, 아메리카의 외진 곳까지 도달하게 될 것을 예상하면서 말세지말에 이스라엘을 회복하시려는 하나님의 구원 경륜에 대한 예언자 예레미야의 예언을 빌어 말한다:"그들이 다시는 각기 이웃과 형제를 가리켜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를 알라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가장 작은 자로부터 가장 큰 자까지'(from the least to the greatest) 다 나를 앎이니라."(렘 31:34)
2.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의 역사는 가장 위대한 자로부터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가장 비천한 자로부터 시작한다는 사실은 한국 감리교회의 역사와 전통에서도 잘 입증된다. 초기 미감리교 선교사들인 아펜젤러와 스크랜턴 모자(母子)가 가난하고 병들고 천대받았던 민중 계층을 위해 교육, 의료, 전도라는 하나님의 선교 사업을 벌여나간 것은 잘 알려져 있다. 1886년에 아펜젤러가 세운 배재 학당과 스크랜턴 부인이 세운 이화 학당은 반상과 남녀의 차별을 철폐하고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만인의 평등함을 실천하는 신교육의 모태가 되었으며, 스크랜턴이 1886년에 설립한 정동병원(시병원)과 애오개(아현)의 시약소를 위시하여 상동 약국과 남대문 병원은 병들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의료 봉사와 전도 사업의 중심지였으며, 1887년 정동에 세워진 최초의 감리교회인 벧엘 예배당을 위시하여 상동 교회, 제물포 교회 등은 복음 전파와 함께 강력한 조직 교회를 키워 나가는 발단이 되었다.
특기할 만한 것은 올해로 꼭 백 년 전이 되는 1901년에 한국교회 최초의 한국인 목사 둘(김창식, 김기범)이 탄생한 것이다. 이들 중에 김창식 목사는 선교사의 고용원으로 들어갔던 민중 계층 출신으로 전도사 시절 평양 지역에서 선교 활동을 하던 중에 평안도 관찰사에 의해 투옥당하고 모진 구타와 핍박을 순교자의 믿음으로 이겨냄으로써 '한국의 바울'이라고 불렸다. 선교사의 요리사, 사환, 유모, 수위 등 막일꾼들 외에도 어학교사, 번역인 등에서도 복음을 받아들이고 교회 지도자로 부름 받은 이들도 있었다. 최병헌 목사가 그 대표적인 인물이다. 초기 한국 감리교회의 성장에 있어서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선교사들과 한국인 목회자들을 도와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수고를 아끼지 않았던 평신도 사역자들이다. 특히 성경 보따리를 지고 삼천리를 누비며 전도한 권서들과 지역의 바닥에서 불철주야 전도에 몰입했던 전도부인들이야말로 가장 작은 자들로부터 시작되는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 사역의 산 증인들이었다.
이렇게 하여 성장한 한국 감리교회는 일제하에서 이 민족이 국권을 잃고 신음할 때 겨레의 십자가를 지고 신앙부흥운동과 민족독립 및 사회계몽운동에 전력할 수 있었다. 이것은 존 웨슬리가 역설하고 실천했던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 사역의 한국 감리교회적 실현이라 하겠다.
3. 웨슬리의 위대한 구원 신학의 요체>
"물음 3. 감리교도라 불리는 설교자들을 일으켜 세우심에 있어서 하나님의 합당한 경륜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답. 어떤 새로운 종파를 세우려는 것이 아니라, 민족과 특히 교회를 개혁하고 성서적 성결을 온 땅에 전파하기 위함입니다."(1744년 연회록)
웨슬리는 1738년 6월 11일 옥스퍼드 대학교의 성 마리아 교회에서 "믿음에 의한 구원"(본문 엡 2:8)이라는 설교를 하면서 공식적으로는 처음으로 '위대한 구원'(great salvation)이라는 표현을 썼다. 이 때 위대한 구원의 의미는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에 의해 값없이 주시는 구원의 은혜를 가리키는 것이었다. 주지하는 대로 웨슬리는 이 설교를 하기 약 보름 전쯤인 1738년 5월 24일 저녁에 저 유명한 올더스게이트의 회심 체험을 했던 것이다. 그 때 웨슬리는 루터의 로마서 강해 서문을 낭독하는 것을 들으면서 오직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믿음을 통해서 하나님이 죄인을 용납하심에 대한 확증을 얻고 가슴이 이상하게 뜨거워졌다고 고백했다.
따라서 웨슬리에게 위대한 구원을 가져오는 믿음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와 부활의 능력을 믿는 신앙이었다. 이 구원을 얻게 하는 믿음은 인간의 성실성을 통해 윤리적 행위로 구원을 얻으려는 업적주의나 율법주의와 달리 전적으로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를 믿는다는 데 특징이 있다. 이 구원을 얻게 하는 믿음은 성경과 교리에 대한 지적인 이해나 승인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하나님께 대한 순전하고 과감한 신뢰이다. 이 구원을 얻게 하는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성자나 예언자로 존경하고 따르는 수준을 뛰어 넘어 십자가의 대속의 필연성과 부활의 능력에 대한 확고한 신앙을 가리킨다.
'은혜에 의한 믿음을 통한 구원'(salvation by grace through faith)이라는 종교개혁의 신앙의 기치를 들고 감리교 부흥운동이 출범하자 마자 부딪힌 문제가 루터교 모라비안 계열의 율법무용론자들의 정적주의(quietism)였다. 웨슬리는 칭의, 곧 그리스도의 은혜에 의하여 하나님께서 죄인을 용납하시는 것은 위대한 구원의 기초(foundation)라고 보았다.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은 회개라는 대문을 통과하여 칭의라는 현관을 거쳐 성화라는 방 안으로 들어가는 데서 완성된다. 위대한 구원을 가져오는 믿음은 행함이 없는 죽은 믿음이 아니라,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faith working by love)(갈 5:6)이다.
우리가 의롭다 여김을 받는 것과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다는 것에 대한 확증은 온 세상과 인류를 갱신하시려는 하나님 자신의 위대한 구원의 경륜을 위해 주어지는 것이다. 칭의를 이룬 다음부터 시작하는 성화의 과정에서 우리가 생각하고, 말하고, 행하는 모든 것은 위대한 구원을 이루시는 성령의 인도를 받게 된다. 웨슬리가 말하는 새로운 창조로서의 위대한 구원은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의 회복으로서의 칭의만이 아니라, 그 회복된 관계를 세계 속에서 구체적으로 살아가는 것으로서의 성화에 대한 해석에서 나타나는 비전이다. 칭의에서 주어진 하나님의 용납하심은 성화, 곧 만물을 완전하게 하는 것으로서의 소명과 부르심을 포함할 만큼 흘러넘친다.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한 우리는 하나님의 완전한 사랑을 수용하는 것만이 아니라, 세계 안에 그것을 반사하라는 부르심을 받는다. 하지만 하나님의 사랑을 반사하고 나누는 것은 그것에 참여하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이것이 왜 웨슬리가 "당신의 믿음은 사랑의 에너지에 의해 가득 차 있는가?"라고 묻는 이유이다. 전적인 성화 곧 완전을 지향하는 그리스도인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롬 5:5) 됨을 고백하는 사람이다.
"우리들이 거듭나서 흠이 없게 하시고/주의 크신 구원받아 온전하게 하소서 영광에서 영광으로 천국까지 이르러/크신 사랑 감격하여 경배하게 하소서"(찰스 웨슬리).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을 위한 웨슬리의 영적 투쟁은 그의 말년에 이르러 감리교 운동의 안팎에서 '제한적 구속'(particular redemption)을 주장하는 칼빈주의자들 및 예정론 자들과의 대결에서 절정에 도달했다. 하나님의 주권적 예정의 법령에 의해 제한된 구속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자들에 반대하여, 웨슬리는 '보편적 구속' (universal redemption)으로서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이야말로 진정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고 역설헀다:"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웨슬리는 보편적 구속의 은총을 '만인을 위한, 만인 안에 값없이 주시는 은혜'(free grace for and in all)라고 불렀다. 웨슬리의 보편적 구속론은 혹자들이 곡해하는 의미의 '만인구원론'이 아니다.
다시 말해서 구원을 얻게 하는 믿음없이 누구나 세상의 종말에 이르러 구원을 얻게 된다는 고대 교부 오리겐이나 현대 신학자 바르트의 주장은 웨슬리나 감리교회의 신학적 입장이 아니다. 오히려 웨슬리의 보편적 구속론은 강한 선교적 동기를 가지고 있으며,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으로서 새로운 창조를 소망하는 믿음을 온 땅에 전파하기 위한 것이었다.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은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회심으로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는 사회적 성화와 온 우주를 갱신하는 새로운 창조를 포괄한다. 영혼의 구원에 있어서 선행적 은혜, 칭의, 그리고 성화가 필수적이지만, 이러한 구원의 질서는 하나님의 형상을 갱신함으로 전 창조를 새롭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 안에 포함된다. 개인의 구원과 사회적 성화를, 또는 하나님의 형상의 갱신과 우주의 새로운 창조를 양자택일적으로 만드는 것이야말로 위대한 구원의 비전을 포기하는 것이다.
웨슬리 이해에 있어서 흔히 주장되어지듯이, 웨슬리가 아메리카 인디언들을 위한 선교에 실패한 후에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와 부활의 능력에 대한 믿음을 얻게 되어 회심한 것이라는 것 때문에 웨슬리의 조지아 선교를 실패로 규정하는 것은 단견이다. 말년의 웨슬리는 감리교 운동이 확산됨에 따라 또다시 세계선교에 대한 강렬한 열망과 비전을 품게 되었다. 웨슬리가 본 서구교회의 선교의 실패 원인은 그리스도인다운 삶의 열매가 없다는 데 있었다. 토착민들에 대한 온갖 횡포와 살상을 자행하는 '마귀 기독교인'(Devil Christian)들 때문에 선교의 문이 막힌다고 본 것이다. 그렇다면 선교의 성공은 오직 성서적 성결을 회복한 '천사-기독교인'(Angel-Christian)들에 의해서만 가능하다고 웨슬리는 주장했다. 사실 이러한 주장은 웨슬리가 감리교 운동을 시작한 이후로 평생을 두고 일관성 있게 펼쳐온 것이었다. 그것은 감리교운동이 또 하나의 종파를 만들기 위한 것이 아니라, 민족과 특히 교회를 개혁하고 성서적 성결을 온 땅에 전파하기 위한 것이라는 '위대한' 감리교회의 이념이었다. 노구를 이끌고 여전히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에 대한 비전과 열정에 사로잡힌 채 웨슬리가 새로운 창조와 보편적 구속에 대한 소망을 설파한 말씀은 다음과 같다.
"모든 편견없는 사람들은 그들의 눈으로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지면을 새롭게 하시고 있습니다.(시 104:30) 그리고 우리는 소망의 확고부동한 이유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시작하신 사역을 주 예수의 날까지 지속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모든 약속을 성취하실 때까지, 그리고 죄와 불행, 연약함과 죽음을 종식시키고 '보편적인 성결과 행복'(universal holiness and happiness)을 다시 이룰 때까지, 그리하여 지상의 모든 거민들이 다음과 같이 하나님을 함께 찬양하도록 할 때까지 하나님의 영의 복된 사역을 중단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할렐루야! 전능하신 주 하나님이 다스리시네! 복과 영광과 지혜와 영화와 권능과 능력이 우리 하나님께 영영토록 함께 있을지어다!'" (1783년 4월 22일 더블린)
Ⅱ. 한국 감리교회의 위기와 소명
1. 신학적 위기
오늘 한국 감리교회가 당면한 위기는 단순히 목회와 선교에 있어서의 위기만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이 모든 것과 교회적 존재와 삶의 바탕이 되는 신학의 위기에서 초래된 것이다. 감리교 신학의 정체성의 위기에 대한 진단과 처방, 그것이야말로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의 빛에서 한국 감리교회의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를 성찰하기 위한 출발점일 수 있다. 물론 한국 감리교회의 신학적 위기는 한국교회와 더 나아가 세계교회의 신학적 위기와 무관하지 않다. 주지하는 대로 현대 기독교의 신학은 복음주의를 표방하는 보수 신학과 에큐메니즘을 추구하는 진보 신학간의 상극적 대결에 의해 양분되어 있다.
한국 감리교회의 훌륭한 신학적 전통 중의 하나는 복음주의를 표방하면서도 근본주의에 떨어지지 않고 진보 신학과 에큐메니컬 연대를 추구해 왔다는 점이다. 혹자는 이것을 '복음적 자유주의'라고 명명하나, 그것은 가당치 않은 것이며 도리어 존 웨슬리 신학의 유산에 근거한 통전적 신학에 기인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1991년과 1992년 사이에 벌어졌던 일로, 일부 진보 신학자들(종교다원주의 신학을 주장한 변선환 학장과 포스트모던 신학을 주장한 홍정수 교수)의 출교까지 초래한 감리교단의 신학 논쟁과 교회 재판의 과정은 감리교 신학의 정체성 문제를 더 첨예화했으나 아직 까지도 이렇다 할 신학적 정립과 방향 제시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도리어 감리교 신학에 대한 건설적인 토론과 대화마저도 기피의 대상이 되어 신학의 공백 상태와 신학 부재의 상황에 이르게 되었다. 이는 다시 교단의 신학 교육의 위기로 이어지면서 차세대 교단의 지도자 양성과 지도력 형성에 커다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한국 감리교 신학은 존 웨슬리의 위대한 구원의 신학에 입각하여 한 편으로 복음주의 신학을 배타적 근본주의로 전락시키거나 다른 편으로는 진보적 에큐메니컬 신학을 과도한 자유주의 신학으로 오도하는 양극단을 넘어 복음주의적이고 에큐메니컬한 신학의 방향으로 정립되어야 할 것이다.
한국 감리교회는 이미 1930년에 교리적 선언 제정시에 근본주의 5원칙(성신 잉태, 십자가 속죄와 부활, 승천과 최후의 심판)을 삽입하라는 주장이 있었으나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유동식 교수는 이것을 "곧 자유주의 신학노선을 천명한 결의였다"라고 평하고 있다. 믈론 유교수가 이해하는 자유주의 신학이란 "복음의 진리를 시대와 문화의 변천에 따라 항상 새롭게 재조명하여 새롭게 파악함으로써 복음선교에 봉사하는 신학"을 가리킨다는 점에서 1990년대에 등장한 과도한 자유주의 노선과는 다르다. 그러나 여전히 남은 문제는 과연 한국 감리교회의 신학을 자유주의적이라 하겠는가라는 것이다. 근본주의와 극단적으로 대결하는 자유주의 신학이라는 말보다는 진보 신학 또는 에큐메니컬 신학이라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할 것이다.
1990년대 이후 한국 감리교 신학은 교단 내의 일부 근본주의 세력의 도전으로 복음주의 개신교 신학이 빠지기 쉬운 신학적 오류인 구원론의 협소화를 극복하지 못하고 있다. 감리교회의 위대한 구원의 신학은 구원을 영혼의 구원으로 축소시키는 개신교 복음주의 신학의 한계를 극복하고 진정한 에큐메니컬 신학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위대한 구원의 신학은 구원을 칭의와 회심에 국한시키지 않고 성화와 완전의 관점에서 개인과 사회 그리고 우주의 새로운 창조로 보게 한다.
또한 감리교회의 위대한 구원의 신학은 진보적 에큐메니컬 신학 노선에서 출현한 종교다원주의 신학과 포스트모던 신학이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와 부활의 능력을 믿는 복음적 신앙의 초점을 잃고 과도한 자유주의에 빠져 구원론의 기초를 유실하게 하지 않았는가를 비판적으로 재검토해야 할 것이다. 한국감리교회가 지향할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의 신학은 복음주의와 진보주의, 자유주의와 근본주의 사이의 엉거주춤한 신학적 중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 시대 한국 감리교회 신학으로 하여금 진정한 기독교 신학, 진정한 감리교 신학, 그리고 진정한 한국적 신학이 되게 하는 신학을 말하는 것이다.
2. 목회의 위기
현재 한국 감리교회는 4천 7백 교회, 150만 성도, 7천 교역자를 자랑하는 대 교단으로 성장해 있다. 이러한 교회의 급성장은 하나님의 은총과 교역자들과 성도들의 복음에 대한 뜨거운 헌신에 기인한 것이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괄목할 만한 성장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에 이르러 교회 성장이 둔화되고 교회의 공신력은 날로 추락하고 있다. 그렇다면 한국 감리교회의 목회적 위기는 어디에서 기인하는 것일까?
무엇보다도 먼저 그리스도인의 신앙과 생활의 불일치를 들 수 있다. 부흥회를 위시하여 교회의 각종 집회를 통하거나, 대학생과 청소년을 위한 기타 다양한 선교 단체를 통하여 지속적으로 복음적 회심과 구원의 신앙의 확산을 위한 캠페인을 벌여왔음에도 불구하고 교회 성장이 둔화되고 사회적 공신력이 추락하는 것은 현대의 세속화하고 다원화된 세계 속에서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삶의 열매를 맺도록 하는 데 기성의 목회가 실패했기 때문이다. 성도의 신앙생활이 단순히 교회 생활로 오인되어 실제로 시민사회 속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소금과 빛의 역할과는 동떨어져 있다.
세속 사회에서 생활 신앙인의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을 상실한 결과 교회생활에만 충실하면 기복 신앙과 현실도피도 눈감아주는 목회의 관행이 '마귀적 기독교인'을 양산하고 말았다. 이렇게 된 데는 근본적으로 교역자의 교회의 본질에 대한 몰이해 때문이라는 점에서 목회적 위기는 교역자들의 '교직주의'(clericalism)에도 원인이 있다. 그동안 대부분의 교역자들은 외형적 교회 성장 위주에 치중한 목회를 한 결과 교역자의 가장 기본적인 상식과 정직성이 무너지고 거짓과 위선이 신앙의 이름으로 포장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교역자를 제사장으로, 교회를 성전으로, 새벽기도회를 새벽 제단으로, 헌금을 제물로 신성화하고, 목사의 축복권과 저주권의 강화, 강단의 성역화, 직분의 계층화를 통해 비성서적이고 반개신교적인 교권주의로 전락하고 말았다.
중세기 천년을 통해 로마 가톨릭 교회가 교황 중심의 계층 체제로 경직되어 교회의 본질을 상실했을 때, 종교개혁자들을 통해 말씀이 바르게 선포되고 성례전이 바르게 거행되는 성도들의 교제의 공동체로서 교회의 본질을 회복하고 만인사제직을 통한 바른 목회를 정립했던 것을 상기해야 한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 개신교회와 한국 감리교회는 또다시 교직주의와 교권주의에 빠지어 교회 안팎에서 개혁해야 할 대상으로 지탄받은 지 이미 오래 되었다. 교역자들은 섬김과 헌신을 위한 성직과 감독직을 근본적으로 잘못 이해하고 파벌과 지역,
그리고 학연과 금권을 동원한 교단 정치를 통해 도덕적 부패와 영적 혼미를 초래하는 죄악을 저질러 왔다. 나아가 민족을 갱신하고 온 땅에 성서적 성결을 전파해야 할 교회가 교회 재정의 대부분을 자체 유지에 투입하는 데 급급할 뿐 아니라, 일부 교회가 교역자 개인의 '기독교 왕국화'를 추진하듯이 시행하는 교회의 후임자 결정 과정이 시민 사회의 지탄을 받기에 이르렀다. 오늘 한국 감리교회의 목회적 위기 상황은 18세기 영국 성공회의 위기를 방불하게 한다. 웨슬리의 감리교운동이 이루었던 교회 갱신의 모습을 깊이 연구하여, 한국 감리교회가 교회의 본질을 회복하고 '천사적 기독교인'을 양육하는 근본적인 목회 패러다임의 전환을 시도해야 할 때다.
3. 선교의 위기
선교란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으로서 인간, 사회, 우주의 새로운 창조에 교회가 부르심받고 동참하는 것을 말한다. 하지만 생명의 총체적 위협이 전 지구적으로 확산되고 심화된 오늘의 생명파괴의 현실에서 한국 감리교회의 선교는 맘몬과 죽음의 세력을 거부하고 하나님과 생명의 길을 선택하는 데 선명하지 못해 왔다. 도리어 한국 감리교회는 한국의 수난의 역사 속에서 민족, 민중의 고난과 함께 한 소중한 선교 유산을 지녔으면서도, 오늘에 와서 영적인 것을 추구하기보다는 탐욕에 포로가 되어 하나님의 역사적 부름에 바르게 응답하지 못하고 있고, 교회의 확장을 최고의 목표로 삼아 외양적 영광을 추구하며 동시에 영적, 도덕적 교만마저 보이고 있다.
특별히 전 세계적으로 대규모 살상 무기로 가장 중무장했을 뿐 아니라 동서문명과 다종교 전통이 충돌하고 있는 한반도와 동북아시아에 위치하면서도 폭력 극복과 평화(shalom)의 실현을 위해 한국 감리교회가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에 대한 종말론적 소망을 바르게 선포하고 겸허하게 이웃과 나누지 못하고 있다. 그것은 한국 감리교회가 지구상에 거하는 모든 생명을 하나님의 한 집안으로 받아들이고 생명의 수여자이신 하나님의 영의 인도하심을 따라, 생명을 파괴하는 폭력을 극복하기 위해 날로 성숙해져 가는 한국의 시민사회의 삶의 세계 속으로 자신을 낮추어 진입하는 데 실패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개교회와 지역사회 차원만의 문제가 아니라 감리교단과 한국 사회 차원의 문제라는 점에서 한국 감리교회의 조직과 제도상의 문제와 직결된다.
1974년 제 12회 감리교 총회에서 총리원측과 갱신측의 분열 이후 1978년에 이르러 양측이 다시 합동하는 과정에서 다원화 감독제와 더불어 개체교회 중심화가 도입되었다. 그것은 다원화 감독제 이전의 중앙집권적 단일 감독제 하의 총리원과 교단이 파벌과 이권관계에 따라 심하게 남용되고 부패하였기에 취해진 고육지책일 뿐이었다. 다원화 감독제로 인해 1978년 이후 한국 감리교회는 감리교회의 본래적 고유성인 '연관적 체계'(connectionalism)를 완전히 상실하는 데 이르게 되었다. 한국 감리교회가 개체교회화함으로써 개체교회의 성장에는 크게 기여했을 지는 모르나, 연회나 교단 본부와 개체교회와의 긴밀한 연관성을 통해 교단적으로 서로 협력하는 선교의 활성화는 그 맥이 끊어지고 말았다.
도리어 학연으로 인한 교단내의 정치 갈등, 신학생과 교회의 수급 문제, 목회자 최저 생계비와 지도력 개발 문제, 개교회의 부정직한 부담금 납부 문제, 여성 목회자 차별 및 여성과 청년의 교단 정책 결정 과정에서의 배제 문제, 대형 교회가 야기한 사회적 물의 등과 같은 고질적 문제로 인하여 한국 감리교회는 교회 안팎에서 공신력을 상실하고 손가락질을 받기에 이르렀다. 116년의 영광스러운 역사적 유산을 이어받고 있으면서도 한국 감리교회는 아직도 '신앙'과 '제도' 사이를 구체적으로 이어주는 연관적 체계성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 연관적 체계성이 무력화된 상태에서 교단 본부의 기구의 불필요한 비대화는 목회와 선교의 현장에 투입된 이들을 섬기기보다는 그들로부터 관료적으로 분리된 채로 인적, 물적, 정보적, 지식적 자원을 전 교단적으로 공유하기 위한 본부 운영의 효율성을 극대화하지 못하고 있다.
Ⅲ. 위대한 감리교회를 위한 비전과 전략
1. 신학교육의 혁신
감리교회의 백년지대계를 좌우하는 것은 신학교육이라 할 수 있다. 한국 감리교회의 신학교육은 존 웨슬리의 유산을 이어받아 신학도의 영성과 품격의 형성을 최우선으로 하는 경건훈련, 성서와 기독교 및 동서고금의 고전을 위시하여 최근의 학문에 대한 비판적 연구, 그리고 목회와 선교에 필요한 교회와 실천 분야의 이해와 실습을 골고루 갖추어야 한다. 오늘날 신학대학교의 교육은 전문 교역자 양성을 위한 지도력 개발과 비판적 학문훈련을 중심으로 하는 방향과 이에 맞서서 하나님께 대한 경건한 신앙과 거룩한 신앙인격의 형성을 위주로 하는 방향이 긴장하고 갈등하고 있다.
이러한 긴장과 갈등은 교회와 신학교육기관 사이의 불편하고 비생산적인 관계로 이어진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는 신학대학교에서 학문연마만이 아니라 신학도의 신앙적 품격형성을 신학교육의 중심과제로 삼고 이를 전 교육과정에 반영할 때 극복될 수 있을 것이다. 신학도들의 신앙적 품격형성은 대학에 종사하는 모든 교수들과 실습 교육에 참여하는 목회자 및 현장 지도자들의 몫이다. 특별히 영성 형성의 과정에서 신학대학교의 교수들은 '무엇을'(what) 가르치는가만이 아니라 '어떻게'(how) 가르치는가도 중요하다. 신학대학교의 교수는 자신을 학자만이 아니라 신학도들의 신앙인격에 영향을 미치는 기독교 목회자로도 보아야 한다. 이것은 교수가 교회의 전통, 회중의 삶, 목회의 사역을 가르칠 때 취해야 할 기본 자세가 되어야 한다.
현재 감리교단 산하의 신학교육기관들은 거의 대부분 학생의 등록금에 의해 운영되고 있으며, 이로 인해 해마다 등록금 인상문제로 학내 분규가 일어나고 있다. 감리교단이 재단임에도 불구하고 감신대를 위시하여 협성대, 목원대는 모두 일반 사립대학교가 안고 있는 교직원 노조와 학교당국과의 문제로 인해 어려움을 안고 있다. 이 모든 것은 1968년 2이후 한국 감리교회가 미국 감리교회로부터 행정적, 재정적 자립을 위해 독립하여 신학교 원조가 중단되면서 야기된 것이다. 이에 따라 신학교육기관들은 교역자 수급과 상관없이 신입생을 선발하거나 과를 신설하고 심지어는 종합대학교로의 변신을 시도했다. 이제 한국 감리교회도 성장했고 감리회 본부와 연회본부도 교회 부담금으로 운영된다면 마땅히 신학대학교도 교단의 지원에 의해 운영될 때가 되었다. 이렇게 될 때 명실상부하게 교단 신학교육기관이 되어서 바람직한 전인적, 통전적 신학교육에 일로매진할 수 있을 것이다.
이미 감리교단의 심각한 문제가 되어 있는 교역자들의 학연으로 인한 파벌 형성과 교단 내 각종 정치적 대립과 분란은 세 신학대학교의 대학원 과정을 점차로 통합해 나감으로 근본적인 해결책을 강구해야 한다. 세 신학대학교는 한국 감리교회의 미래를 위해 각자의 기득권을 과감하게 포기할 것을 서약하고, 대학원 운영과 교육과정을 일정 기간의 연구와 준비기간을 거쳐 교류하고 종당에는 통합함에 있어서,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의 신학을 새롭게 출범하는 '감리교 신학대학원'(가칭)의 교육이념으로 삼을 것을 제안한다. 이렇게 통합된 감리교 신학대학원은 대학원생 전원을 교단 장학생으로 우대하고, 교단본부의 교역자 수급의 계획에 발맞추어 개체교회, 지방회, 연회라는 연계 조직을 통해 신학생을 추천하고 후원하며 나아가 교역자로서 훈련하고 안수받을 수 있는 임지와 환경을 제공하는 데 협력하도록 한다. 나아가 통합 감리교 신학대학원에는 한국 감리교 신학을 수립하고 발전시키며, 실천 목회와 다양한 선교 분야의 연구를 통해 교단의 미래를 준비할 수 있도록 하는 전문 신학연구기관들이 재정적으로 교단의 지원을 받고 제도적으로 교단과 교회와 연관을 맺어 활성화되어야 한다. 더 나아가 통합 감리교 신학대학원은 통일 시대와 세계 선교 시대에 부응하여 새로운 선교지의 신학교의 설립과 운영, 그리고 신학교육의 방안을 주도면밀하게 준비하는 데 중심이 되어야 할 것이다.
2. 교역 패러다임의 전환
교회의 본질은 하나님과 회중 전체 사이의 만남이 예배, 교육, 친교, 선교를 통해 이루어지는 사건에서 드러난다. 웨슬리는 성공회의 교직주의의 경직성을 버리고 회중이 하나님과 감격적인 만남을 이룸에 있어서 공동 예배, 성례전, 성경연구, 기도, 금식, 심방 등과 같은 '은혜의 제도적 수단'(the instituted means of grace)만이 아니라 속회, 신도반, 애찬식, 철야 기도 등과 같은 '은혜의 가변적 수단'(the prudential means of grace)을 중시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웨슬리가 전통적 제도 교회의 목회 방식을 교직주의로부터 탈피하여 하나님과 회중간의 감격적인 만남이 이루어지도록 섬기는 것으로 변경했다는 점이다. 그리하여 웨슬리는 은혜의 제도적 수단만이 아니라 시대에 따라 변할 수 있으며 감리교회에게 고유한 은혜의 가변적 수단도 동원할 수도 있었던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에 전 회중이 참여할 수 있도록 섬기는 역할이 한국 감리교회의 교역 패러다임이어야 한다.
주일에 드리는 공동 예배는 전 회중이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을 찬양하고 감사하는 시간이다. 공동 예배는 성인들만이 아니라 회중의 전 연령층이 참여하는 공동의 하늘나라 축제가 되어야 한다. 공동 예배시의 말씀의 선포는 전 회중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의 사역에 동참하도록 초청하고 결단하게 하는 행위이어야 한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회중은 세계 속으로 들어가 하나님의 선교의 담당자들이 되게 한다. 성례전의 거행은 회중 각자가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함으로 거듭나고 성화되며, 세상에서 섬기는 삶을 살도록 고무하고 격려하는 예전이 되도록 한다.
현재 한국 감리교회의 취약점 중의 하나는 성인들은 설교에만 의존하고 어린이, 청소년층은 교육만 시킨다는 점이다. 성인들을 위한 교회학교 교육은 주일만이 아니라 수요기도회시에도 성인들의 신앙 훈련과 제자화를 위해 이루어져야 한다. 성인 교회교육은 주로 성경공부에 치중해 왔으나, 앞으로는 웨슬리의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의 신학에 입각한 감리교 교리와 전통에 대한 공부와 병행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의 사역이 어떻게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 안에서 그리고 그를 위하여 선행적 은혜, 회개, 칭의, 성화,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완전과 온 우주의 새로운 창조의 전 과정과 일치하게 되는지를 체계적으로 교육하는 일은 목회의 성격 자체를 교육적이 되게 할 것이다. 이러한 성인들을 위한 감리교인 훈련과 교육은 교회력을 따라 장기적으로 진행될 수도 있고, 각종 수련회나 특별집회를 통해서도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예배와 교육을 통해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에 동참하는 회중으로 부름받고 훈련받은 이들은 교제와 선교를 통해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소명을 이루게 된다. 기존의 속회 운영은 날로 다원화하고 복잡화하는 정보화 사회에서 이미 형식화되어 거의 소생 불가능해졌다. 이러한 현실에서 앞으로 필요한 것은 세속 속에서 살아가는 성인 남녀들이 지역사회는 물론이고 지구 전역과 인터넷으로 연결된 각종 동호회나 시민운동 단체에 참여하는 것에 착안하여, 교회가 지역과 시민사회의 삶에 '토착화'(뿌리를 내리는 작업)함으로써 회중 각자로 하여금 자발적으로 새로운 형태의 '은총의 가변적 수단'으로서의 소공동체들을 형성하도록 하는 일이다.
처음부터 교역자는 이러한 자발적 소공동체를 교회 구조에 편입시키고 통제하려고 할 것이 아니라, 기존 교회의 내부 조직과는 달리 보다 느슨한 형태로 운영되도로 유도하고 교인들로 하여금 섬김의 지도력을 발휘하게 훈련함으로써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의 선교를 회중의 삶 한 가운데서 수행할 수 있도록 하면 좋을 것이다. 웨슬리의 속회가 '교회안의 작은 교회'(ecclesiolae in ecclesia)였다면 한국 감리교회의 새로운 자발적 소공동체는 교회밖의 작은 교회로서 지역과 시민 사회와 소통하고 섬기는 '通교회'(inter-chuch)가 되어야 한다.
3. 교단의 개혁
최고정책결정자인 감독들과 감리사들이 선출될 때마다 한국 감리교회는 교단의 개혁과 교회의 갱신을 내세웠다. 그것은 그만큼 최고정책결정자의 비전이 교단의 명운을 좌우할 만큼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전만 가지고는 개혁을 할 수 없으며 그것을 뒷받침하는 구체적인 전략과 조직 그리고 조직원들의 훈련과 실천이 있어야 한다. 웨슬리 전통은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에 대한 비전과 그것을 실현해 내는 치밀한 조직과 전략을 함께 가지고 있다.
그러면 먼저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의 비전은 오늘의 한국 감리교회에 의해 어떠한 모습으로 제시되어야 하는가? 그것은 개교회의 차원을 넘어서 지방회와 연회 그리고 총회의 차원에서 전 감리교도들이 공유할 수 있는 이 시대의 예언자적 상상력과 사도적 실천이어야 한다. 그것은 주변의 4대 열강들의 틈바구니에서 여전히 분단된 채 남아있는 한반도에 화해와 평화를 위해 일하는 교단으로 거듭나는 것이다. 남북한과 주변 4대 강국이 치열한 군비 경쟁에 돌입하지 않고 도리어 평화와 정의의 실현을 위해 한반도와 주변국들의 시민들이 연대할 수 있도록 한국 감리교회는 에큐메니컬 네트워크를 활성화하고 적극적인 참여자가 되어야 한다. 화해와 평화를 위해 일하는 교회로 거듭남으로써 한국 감리교회는 한반도만이 아니라 세계화의 현상을 통해 만나게 되는 다양한 종교, 문화, 인종의 배경을 가진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의 복음을 전하고 그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새로운 삶의 방식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은 오늘의 세계화된 사회에서 다양한 종교집단과 이익단체들이 근본주의적으로 자신의 주장과 이익을 추구할 경우 폭력과 전쟁 그리고 공동의 파멸이 전 지구적으로 가능하기 때문에 더 절실한 선교적 요청이다. 한국 감리교회는 오늘의 시민사회의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과정에 개방적인 자세와 섬기는 자의 모습으로 참여함으로써, 기독교가 반시민사회적이고 반민주적이고 배타주의적이며 근본주의적이라는 낡은 이미지를 쇄신해야 할 것이다.
화해와 평화를 위해 일하는 교회로 거듭나기 위해서 필요한 교단 개혁의 전략은 교단 본부의 조직에서부터 적용되어야 한다. 교단 본부는 물론이고 각 연회 본부와 교단의 각종 선교회와 나아가 지방회를 책임지는 임원들과 간사들은 전 감리교회와 감리교 회중 위에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섬김의 자세로 임하여 신뢰의 분위기를 조성해야 한다. 그리하여 교단의 최고정책결정자인 감독회장과 감독들의 비전이 실무선에서 전략적으로 구체화될 수 있도록 교단의 각종 조직을 구축하고 모든 정보와 지식을 공유해야 한다. 교단의 모든 정책 결정의 과정과 관련된 정보와 지식 그리고 각종 '노 하우'(know how)가 교단의 물샐틈 없는 공유 시스템으로 흘러들 수 있도록 교단의 각 기구들 사이는 물론이고 연회와 연회간에 지방회와 지방회간에 '인트라 네트'(intra-net)의 구축이 시급하다.
그렇지 못할 때, 제아무리 최고 지도자의 개혁 비전이 출중하다 할 지라도 교단 조직의 구성원들은 감독 임기 초반에만 제스처를 취할 뿐 시간이 지남에 따라 다시 관료적 관행으로 되돌아가기 마련이다. 한국 감리교회 본부의 인트라 네트의 구축을 통해 정보와 지식이 공유되면, 그것에 멈추지 말고 교단의 지도자들은 조직의 구성원들을 지속적으로 훈련하고 교육시킴으로써 생산적이고 창의적인 임원과 간사로 성장하게 해야 한다. 또한 인센티브 제도를 도입하여 교단의 발전과 개혁에 기여한 구성원들의 업적을 치하하고 포상함으로써 교단이라는 집단을 위해 일하는 것이 개인의 성취로 인지되게 해야 한다. 감리교 인트라 네트 구축은 한국 감리교회가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의 비전을 온 세계에 실현하기 위해 필수적인 전략적 연관적 체계를 창조적으로 회복하는 데 첫 발걸음이 될 것이다.
나가는 말
위대한 감리교회의 건설은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의 비전을 가지고 오늘의 한국 감리교회를 개혁하기 위해 모든 감리교도가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고 새 출발할 때 가능하다. 그것은 존 웨슬리 목사의 말씀처럼 '가장 위대한 자로부터 가장 작은 자에게 '이르는 세상의 방식으로서가 아니라 '가장 작은 자로부터 가장 위대한 자에게' 이르는 하나님의 방식을 따를 때 성공할 수 있다. 기독교대한감리회의 최고 지도자들이 가장 작은 자로 자신들을 하나님 앞에 낮추고 섬기는 자의 모습으로 바로 설 때에 이 시대 교회와 세계에서 영적 권위와 지도력을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오, 주여! 주의 크신 구원을 한국 감리교회와 여기 모인 우리를 통하여 이루시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