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서를 맞는 야곱 (32: 1-32)
요약
에서를 맞이하는 야곱의 갈등에서 성도의 죽음에 대한 비유를 발견하게 된다. 가는 길에 천군이 나타났던 것처럼 하나님께서 임종 시에도 평안함으로 함께 하신다. 두려운 야곱이 언약의 말씀을 묵상했듯 도우심의 약속을 굳게 믿고 안심해야 한다. 야곱이 기도했듯 그 날이 가까울수록 기도해야 한다. 야곱이 형의 감정을 풀기 위해 철저히 준비한 것처럼 악한 죄악을 회개하며 영적으로 잘 준비 되어야 한다. 그리고 가족과 재산을 먼저 건너보내고 형이 반김을 기다리며 씨름했듯 천국을 사모하며 갈망하는 소망으로 충망해야 한다.
강해
본문은 라반과 화친한 야곱이 가나안으로 귀향하는 장면입니다. 그러나 그 앞에는 험난한 문제가 놓여있었습니다. 그 문제는 20년간 복수심을 불태우며 칼을 갈던 형을 맞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이런 문제가 없습니까? 임시로 피하긴 피해도 결국은 만나야 할 대상 그런 것 말입니다. 우리 인생의 죽음 문제가 바로 그것입니다. 히9:27에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랬습니다.
몇 해 전 시골에 갔더니 동네 사람들이 저에게 몰려와서 말하기를 “걱정이 있습니다. 앞으로 죽을 것이 걱정이 됩니다.” 참 솔직한 어른들이셨습니다. 그래서 예수 믿으시라고 전도한 적이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세상에 나온 날부터 이 죽음은 수시로 우리를 위협하고 위협하여 피하고 피해도 결국은 피할 수 없이 만나야 할 대상입니다.
그러나 우리 성도의 죽음에 대해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1. 하나님께서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입니다.
1-2절 “야곱이 그 길을 진행하더니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를 만난지라 야곱이 그들을 볼 때에 이르기를 이는 하나님의 군대라 하고 그 땅 이름을 마하나임이라 하였더라”
야곱이 가나안 땅 고향을 향해 진행했던 것처럼 누구나 천국 가기 전 만나야 하는 것이 죽음입니다. 그러나 혼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천군이 함께 한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야곱이가 그들을 만난 땅을 마하나임이라 했는데 마하나임은 ‘두 떼, 두 진영’이라는 의미입니다. 한 진영도 아니고 두 진영의 많은 천군들이 야곱의 전후좌우에서 완벽하게 보호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냥 천사도 아니고 천군입니다. 이 천군의 보호는 보호대로 의미가 있지만 또한 우리에게 어떤 귀한 체험으로 다가온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어떤 체험일까요? 두 진영이므로 2인데 2는 증거의 수입니다. 우리 마음에 들어서는 강력한 어떤 확신입니다. 딤후1:7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이라 한 것처럼 그것은 강함과 담대함과 용기와 평안과 소망입니다. 이 은혜가 함께 하시면 죽음이 도무지 두렵지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두려움도 다 이기는 그런 붙드심입니다. 하나님의 붙드심이 우리에게 안심과 평안과 용기로 체험되어집니다. 이런 귀한 은사가 성도에게 주어집니다.
그래서 사43:2-3에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함께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치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행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대저 나는 여호와 네 하나님이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요 네 구원자임이라” 하셨습니다. 히2:14-16에도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 이는 실로 천사들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라” 하셨습니다. 이런 붙들어 주시는 특별 은총이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2. 하나님 언약의 말씀을 기억할 때 이길 수 있습니다.
9절 “야곱이 또 가로되 나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 나의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전에 내게 명하시기를 네 고향, 네 족속에게로 돌아가라 내가 네게 은혜를 베풀리라 하셨나이다”
7절에 “야곱이 심히 두렵고 답답하여” 라고 했습니다. 두렵고 답답할 수밖에 더 있습니까? 당시 족장시대에 군사가 400이면 대단한 군사력입니다. 그런데 400이라는 수는 죽음과 고통과 연단의 40수에 만수 10을 곱한 것이니 아무도 항거할 수 없는 수입니다. 더구나 에서는 칼을 믿고 생활하는 유능한 칼잡이요, 야곱 역시 자기의 죄를 알기에 두렵고 답답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처럼 인생에게 죽음처럼 두려운 존재는 없습니다. 다가오는 죽음을 피하거나 항거할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이 때 육체가 갖는 느낌은 하나님께서 버리신 듯 늙어지고 병들고 썩어져 내동댕이쳐지는 것 같음을 아무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심히 두렵고 답답한 야곱은 심히 두려워 몸을 가누지 못하고 덜덜 떨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합니다. 하나님! 전에 하나님께서 은혜 가운데 고향에 돌아가게 하시고 자손으로 바다의 모레알갱이와 같게 하신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이처럼 우리가 죽음 앞에서 붙잡을 것은 하나님의 말씀 외에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무엇이라 말씀하셨습니까? 요14:1-3에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하셨습니다. 이 도우신다는 복음의 말씀을 굳게 믿고 의심을 물리치고 조금도 흔들리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3. 그런데 말씀과 아울러 야곱은 기도했습니다.
11절 “내가 주께 간구하오니 내 형의 손에서, 에서의 손에서 나를 건져내시옵소서 내가 그를 두려워하옴은 그가 와서 나와 내 처자들을 칠까 겁냄이니이다”
신학에서 개인의 임종을 개인의 말세라고 합니다. 우주의 말세나 개인의 말세나 여러 부분 공통점이 있습니다. 함께 힘써야 할 것은 기도입니다. 벧전4:7에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곰이 겨울잠을 자려고 열심히 영양을 몸에 비축하듯이 기도로서 많이 준비한 사람은 인생의 앞날이 평탄합니다.
4. 신앙으로 죽음을 맞을 준비를 할 때 죽음을 이깁니다.
20절 “이는 야곱의 생각에 내가 내 앞에 보내는 예물로 형의 감정을 푼 후에 대면하면 형이 혹시 나를 받으리라 함이었더라”
야곱이 형의 감정을 풀기 위해서 580마리나 되는 큰 예물을 보내는 장면입니다. 에서의 감정이 풀리면 야곱은 삽니다. 이처럼 죽음이란 쉽게 맞이할 수도 있고 어렵게 맞이할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 죽음을 쉽게 맞이하고 싶나요? 그렇다면 야곱이 에서를 맞을 준비를 한 것처럼 우리도 준비해야 합니다. 신학자들은 죽음이란 하나님께서 인간의 성화를 위해서 주신 것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죽음 앞에서 인간의 유한을 자각하고 영생의 하나님을 찾게 됩니다. 나아가 자신의 영적인 상태를 돌아보고 하나님 앞에 부족함이 없는 사람으로 준비하게 됩니다.
우리는 형의 감정을 상하지 않고 누그러뜨리기 위해 예물을 준비하고 형을 하나님처럼 높이고 자기를 낮춘 겸손한 야곱처럼 나를 십자가에 철저히 못 박고 성령으로 변화되어 하나님을 사랑하고 높이며 겸손한 성화된 심령으로 준비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능력이 많으셔도 고난 중에 두시는 수가 있어요. 아직 흰 세마포로 단장하지 못하면 성문 밖에서 준비시키듯 영적으로 준비시키는 과정입니다. 그 고난 속에서 세상 미련 버리고 주님만 사랑하고 의지하는 심령이 되게 하십니다. 그래서 임종 전의 고난도 저주가 아니라 알고 보면 복이 됩니다. 평소에 신앙을 철저히 준비한 사람은 결코 죽음의 공포에 종노릇하지 않게 됩니다.
5. 은혜 충만히 받으면 죽음까지도 도리어 사모하게 됩니다.
24절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다가”
야곱은 모든 가족과 소유를 다 강 건너로 보내놓고 에서의 반응을 살피고 있습니다. 만약 안 되겠으면 도망가려고 합니다. 그래서 혼자 강 건너에 남아 형의 용서와 반겨맞아 줄 것을 학수 기다리는데 어떤 사람이 나타나 날이 새도록 야곱을 붙잡고 씨름을 합니다. 날이 새려 하자 이 사람이 가려고 하지만 야곱이 놓아주지 않자 결국 천사는 야곱의 환도뼈를 쳐서 위골시키고 야곱에게 이스라엘이라는 새 이름으로 축복하고 맙니다. 이스라엘이란 하나님과 씨름하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씨름이 있어야 합니다. 이 씨름은 천국을 사모하는 소망의 씨름입니다. 야곱이 보물과 같이 소중한 가족과 소유를 다 보내놓고 씨름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네 보물이 있는 곳에 네 마음도 있다 하셨듯 우리의 마음을 천국으로 옮겨놓고 하는 씨름이 있어야 합니다. 어서 속히 내 사명마치고 우리 사랑의 하나님 곁에 가서 살고 싶다는 마음의 씨름입니다. 주님이 나를 반겨만 맞아주신다면 언제든지 아버지 곁에 가고 싶다는 간곡한 갈망입니다. 성도라면 이 소망이 있어야 정상적인 것입니다.
바울도 이 씨름을 했습니다.
빌1:23-24에 “내가 그 두 사이에 끼였으니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이것이 더욱 좋으나 그러나 내가 육신에 거하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 했습니다.
천국을 소망하며 어서 속히 육신을 벗고 저 천국에 가서 살고 싶어서 견딜 수 없는 행복한 갈등입니다. 마음은 이미 저 천국에 가 있습니다. 은혜를 풍성히 받을 때 오는 소망의 은혜입니다. 더 이상 피하여 도망 다니는 삶이 아니라 죽음 너머 천국을 나의 간절한 소망 삼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은혜 받아 승리하는 믿음 소망 사랑 만점의 이스라엘이 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너를 붙들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듯 일생 장수하다가 평안히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복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께서 죽음을 이기셨기에 우리들도 예수 안에서 죽음과 그 공포를 이길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심과 그 말씀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열심히 기도하며 거룩함의 세마포로 준비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그 날이 고난과 슬픔의 날이 아니라 기다리고 기다리던 기쁨과 행복의 날이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