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병원엘 간다. 몸속의 핏줄 어느 곳이 조금씩 막혀가며 순환기능이 노쇠해 간다는 것이다. 그동안 알약 네댓 개를 처방받아 아침저녁 복용했다. 고명한 의사선생님이 수고해 준 덕분인지 아니면 내가 스스로 운동을 한 덕분인지 여하튼 호전되어 하루 두 알씩만 복용하고 있다. 얼마나 다행인가.
그러고 보면 순환한다는 것은 원활하게 돌아가는 우주의 법칙과 닮았다. 막힘없이 잘 돌아가면 아프지도 않고 알약 처방도 필요 없다. 하기야 지구라는 자전공전自轉公轉 2중회전체二重回轉體속에서 사는 것이 우리의 삶이어서 생로병사를 가볍게 여길 수 없다.
우리의 삶 자체가 빙글빙글 돌아가도록 숙명 지어진 것은 아닐까. 돌고 도는 돈을 가장 애지중지하는 것도 그 때문이요, 끝없는 윤회의 굴레 속에서 살다가 늙어서 저 세상으로 가는 것도 ‘돌아가셨다’고 표현하는걸 봐도 그렇다. 하여간 인간은 도는 것을 매우 중요하고 심각하게 생각한다.
얼마 전 고향집에서였다. 오랜만에 어머니를 뵈러갔는데 맏아들이 왔다고 닭곰탕을 끓여 주셨다. 이제는 휠대로 휜 허리에다 청력까지 온전치 못한 어른이 손수 끓여주신 닭곰탕이니 어찌 그 맛이 예사로울 수가 있으리.
어머니는 마당가 손바닥만 한 텃밭을 가꾸시며 닭 몇 마리를 동무삼아 길렀다. 그 중 한 마리를 희생시킨 걸 내가 모를 리 없다. 모이를 주고 닭장 문을 여닫던 고마운 손길인데 제 목을 비틀 줄 녀석은 예측이나 했을까. 장독대 옆에 걸어 뒀던 조그만 무쇠 솥에 온갖 약재를 안친 다음 ‘어머니 표’ 정성까지 넣고 이윽토록 지켜 앉아 끓이셨으니….
이튿날 아침 나는 포식을 했다. 아무리 천하의 팔진미八珍味라 한들 그 맛에 비할 수는 없으리라. 보이지 않지만 무엇보다 크나 큰 것이 어머니 사랑이요 무한한 정성이란 것을 절감하는 순간이었다. 연방 닭다리를 뜯는 나를 흐뭇한 표정으로 지켜보다가 사발이 바닥을 드러낼라치면 국자로 얼른 진국을 담아 주시곤 했다.
이럴 때 마당가에는 수탉 한 마리가 한 발은 들고 한 발로 서서 아침 내 어정댄다. 방안에서 제 동료 살점을 입에 넣고 우물거리는 모습을 깨금발 자세로 염탐하고 있었다. 그때 어찌나 미안하던지.
그러나 문제는 파리란 놈들이다. 예의염치 없고 눈치코치도 없이 귀찮은 존재들이 아무데나 극성스럽게 달려들고 이것저것 찝쩍댄다. 어머니가 끓여주는 구수한 닭곰탕 냄새에 회가 동한 것인지 마구 덤벼든다. 인자한 어머니도 참다못해 파리채를 들었다. 영공을 넘어 온 적기를 정조준 하듯이 “탁!” 하는 소리와 함께 보기 좋게 명중되어 나뒹굴었다. 그걸 파리채로 떠다가 열린 창문 너머 던져 버린다.
그 순간이었다. 마당에서 어정대던 수탉이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오는 것을 부리를 채 벌리지도 않고 날름 받아 넘겨 버렸다. 긴 다리에 쏜살같이 달려가는 솜씨가 그야말로 전광석화다.
“히야!”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신속 정확한 멋진 자세라니! 세계최고 텍사스 야구팀 외야수 추신수 선수도 그 같은 묘기를 보여주지는 못하리라. 나도 파리채를 잡고 신중히 겨냥해서 날려 보았다. 하지만 파리는 콧방귀를 뀌며 날아가고 말았다. 어쨌거나 파리란 놈을 수탉이 받아먹었다. 또 닭고기를 내가 먹었다. 먹고 먹히는 먹이 사슬에서 나란 존재는?
결국 산다는 것은 도는 것, 바람개비처럼 빙글빙글 도는 것. 끝없이 회전하는 것이 삶이 아닐까. 먹고 먹히며 먹이 사슬도 돌고 돈도 돌고 업보도 인연도 돌아간다. 어차피 도는 인생, 내가 좀 재미없는 수필을 썼다 해도 “저 놈 돌았다”고 해도 이상할 것도 없다는 생각마저 든다.
세상이 눈 빠지게 돌아가니 윤회의 바퀴는 어디까지 굴러가는 것일까. 그 업의 고리에서 해탈을 찾는 길은 어디쯤에 있는 것일까. 요즘 세상 돌아가는 꼴이 하도 어지러워서 가끔 그런 생각을 골똘히 해 볼 때가 많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