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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화장실에 있는데 추측컨대 안수 집사님과 장로님들이 이제 화장실에 오셨다가 이제 대화하신 것 같아요. 그러니까 이제 어버이날이었잖아요. 자녀들한테 용돈을 많이 받았냐는 거예요. 대부분의 말씀이 돈을 안 뺏어가면 다행이라고 그리고 음식을 먹으러 가긴 갔대요. 갔는데 돈은 본인들이 다 내시고 어쨌든 그래서 보이 나를 잘 숨기고 맞다 이렇게 이야기하시더라고요.
옆 사람과 인사하겠습니다. ‘그래도 내가 너의 어머니다 아버지다’ 이렇게 인사하겠습니다. 시작
그래도 내가 하세요. 한 번 더
그래도 내가 너의 엄마다. 시작
내가 그래도 내가 너의 엄마다 아빠다.
고린도 교회는 사도 바울이 개척한 교회예요. 당연히 이 교회에 대한 자부심이 바울에게는 있었습니다. 그래서 다른 성경에 보면 디도에게도 고린도 교회를 자랑하고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이 고린도 교회를 자랑했어요. 그러다가 바울과 이 고린도 교회 사이에 큰 오해 이제 문제가 생겨났습니다.
고린도 교회 안에서 바울을 비난하고 교회에서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들이 생겼고 우리 말로 하면 속썩이는 사람들이 교회에 생겨났어요. 대표적인 문제가 우상의 재물을 먹는 문제, 또 성적인 문제, 파벌과 분당의 문제 그리고 부활 논쟁 방언 등 여러 가지 시끄러운 문제로 인해서 고린도 교회가 좀 혼란스러웠어요.
이런 고린도 교회를 안정시키기 위해서 바울은 편지도 쓰고 방문하기도 했습니다. 근데 편지를 썼을 때 바울이 좀 강하게 편지를 썼어요. 얼마나 강하게 썼는지 이렇게 나온 서신도 있고 나오지 않는 서신도 있는데 아마 나오지 않는 서신에 그 강함이 이미 포함되었을 가능성이 되게 많아요. 감사하게도 이 고린도 교회는 바울의 권면과 책망을 받아들였어요.
여러분 우리가 누군가의 권면과 책망을 받아들이는 일은 참으로 어려워요. 그래서 어쩌면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자랑했을지도 몰라요. 문제가 있는데 그 문제를 지적하는 것을 그래도 고린도 교회는 감사하게 다 받아들였습니다.
9절 말씀을 표준 새번역으로 한번 좀 보겠습니다. 우리 같이 읽습니다. 시작
지금은 기뻐합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아픔을 당했기 때문이 아니라 아픔을 당함으로써 회개에 이르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뜻에 맞게 아파하였으니 결국 여러분은 우리로 말미암아 손해를 본 것이 없습니다. 이제 구절을 표준새번역으로 보면 이렇게 번역이 돼요. 고린도 교회 안에는 교회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최악의 모습도 있었어요. 그러니까 교회에 있으면 안 되는 절대로 있으면 안 되는 모습도 고린도 교회 안에 있었어요. 그러나 이 고린도 교회는 사도바울의 강력한 권면을 받아들였고 그래서 회개라는 멋진 결론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올바른 신앙인 여러분과 저의 믿음이 온전하다면 우리가 신앙의 과정에는 얼마든지 문제가 생길 수 있어요. 목사도 목회를 하다 보면 문제 있는 문제를 만들 수도 있고 문제의 주인공이 되기도 하고, 성도들도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얼마든지 고린도 교회에 나와 있는 이런 문제의 주인공이 될 수도 있다는 거예요. 그런데 만약에 여러분과 저가 정말 구원받은 사람이라면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이라면 성령의 사람이라면 결론적으로는 회개한다는 거예요.
고린도 교회가 문제가 많았지만 사도 바울의 권면을 받아들이고 회개를 했다는 것은 이들이 다 하나님의 교회고 하나님의 백성이고 하나님의 자녀였다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가 뭔가를 조심해야 될 거예요. 결론이 회계가 아닌 결정에 대해서 경계하고 조심해야 돼요. 목회자도 문제가 있을 수 있고 성도도 문제가 있을 수 있어요.
그런데 여러분과 제가 정말 하나님의 사람이라면 우리의 결론은 회개해야 한다는 거예요. 저도 실수할 수 있고 여러분도 실수하고 잘못할 수 있어요. 그러나 우리가 진짜 하나님의 사람이라면 결론은 회개여야 한다는 거예요. 그래서 아마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칭찬하고 자랑했을 수도 있어요. 평상시에 잘못은 있었지만 그들의 삶으로 봐서 결론은 회개로 맺을 만큼 그래도 그들이 하나님의 구원을 받은 사람들 또 교회였기 때문입니다.
지난주 저는 조금 힘이 들었습니다. 내용을 상세하게 설명하지는 않을 텐데 좀 일시적인 건데 제가 지금까지 경험한 어떤 것 중에 거의 최고치였어요. 생각으로 할 수 있는 최악의 결말을 생각했던 그런 순간이 있었어요. 제가 잠깐 이렇게 누워 있는데 하나님이 갑작스럽게 금식에 대한 마음을 주셨어요. 마음에 금식해라 그러니까 음성이 들린 게 아니라 그냥 하나님이 제 마음에 금식하라고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처럼 들렸어요. 그리고 제가 바로 예 알겠습니다. 제가 금식하겠습니다 하고 금식을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얼마나 행복했냐 하면 내가 내 삶의 순간적인 위기 앞에 금식이라는 결정을 할 수 있는 것이 너무 감사하더라고요. 우리가 얼마든지 더 나쁜 생각을 하고 더 많은 나쁜 결론을 맺을 수도 있잖아요. 근데 제가 금식이라는 결정을 했다는 이것이 저에게 큰 위로가 됐습니다.
목회자든 성도든 우리가 목회하다가 또 세상을 살다가 어려움을 당할 수 있잖아요. 내가 그 문제의 주인공이기도 하고 또 내가 누군가로부터 어려움을 당하기도 해요. 그렇지만 우리의 결론은 회개이고 우리의 결론은 돌이키여야 한다는 거예요. 결론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어야 합니다.
고린도 교회가 희망적인 것은 바울과의 갈등 자신들 안에 있는 많은 문제들을 회개로 결론을 지었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받아들임으로 결론을 지었어요.
여러분 좋은 교회가 어떤 교회인지 아세요?
싸움이 없는 교회 교회는 싸움이 없을 수 없어요. 여러분 우리가 있는데 안 싸우겠어요?
옆 사람과 인사하겠습니다. 내가 있는데 안 싸우겠습니까? 시작
내가 있는데 맞잖아요. 내가 있는데 안 싸우겠냐고요. 나 같은 성격의 사람이 목장 교회에 있는데 우리가 안 싸우겠냐고요. 그래서 교회는 항상 문제 있을 수 있어요. 그렇지만 좋은 교회는 어떤 교회냐 결론이 좋은 교회예요. 좀 문제는 있을 수 있어도 결론이 좋으면 좋은 교회인 거죠.
성도도 마찬가지예요. 성도도 좀 과정이 나쁠 수는 있어요. 그러나 결론이 좋으면 그 사람이 좋은 성도인 거죠.
고린도 교회가 위대한 것은 회개라는 좋은 결론을 내릴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문제가 있는 교회지만 고린도 교회는 좋은 교회였어요. 바울의 책망으로 고린도 교회가 좀 충격을 받은 것 같아요. 바울의 자랑이라 그랬잖아요. 그런데 바울이 편지로 또 방문해서 엄청나게 세상적인 말로 막 지적을 하고 경고를 하고 했던 것 같아요. 이것 때문에 이 사람들이 큰 충격을 받은 거죠. 내가 누군가에게 지적을 받는 일도 쉬운 건 아니에요. 충격인 거죠.
왜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의 삶, 자기의 생각이 바르다고 생각해 근데 누가 등장해서 틀렸다고 말하면 이게 충격인 거예요. 대부분 지금 여러분이 말하고 생각하는 건 여러분이 20년 동안 30년 동안 쌓아온 거예요. 어느 날 목회자가 어느 날 내 주변의 사람들이 잘못됐다고 말하면 당연히 그게 충격이 왜 30년의 삶이 송두리째 무너지는 거잖아요. 내가 주장해 왔던 내 생각이 무너지는 거잖아요. 그래서 누군가의 책망을 받아들이는 일이 엄청나게 어렵습니다. 그래서 근심하게 됐다는 거예요. 1
초반절에 보면 좀 독특한 표현이 있어요.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 표준새번역으로 보면 하나님의 뜻에 맞게 아파하는 것은이라고 번역이 됐습니다. 그러니까 고린도 교회가 회개라는 좋은 결말을 맺을 수 있었던 것은 이 바울의 책망과 경고에 근심을 했는데 다행히도 하나님의 뜻에 맞게 근심을 한 거예요. 그래서 회개라는 좋은 결말을 맞을 수 있었고 구원에 이르게 됐다고 고백합니다. 사망에 이르지 않았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런 문제로 인해서 내가 사망에 이르지 않았고 교회가 사망에 이르지 않았고 반대로 회개의 구원의 자리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근심을 하되 하나님 뜻 안에서 하나님 뜻대로 근심을 해야 돼요. 그래야 해피 엔딩을 맞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과 세상 근심은 많은 차이가 있어요. 세상 근심은 사망에 이르게 하고 하나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경험하게 한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회개의 자리에 이르게 하고, 하나님 뜻대로 하지 않는 근심은 우리를 사망의 자리로 이끈다는 거예요. 그럼 우리가 내 삶의 문제로 인해서 고민하고 근심하고 걱정하되 하나님 뜻 안에서 하나님 뜻대로 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면 하나님 뜻대로 하는 근심은 어떤 걸까요?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 말씀에 자신을 비추어 보면서 몸부림 치는 것을 의미해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려고 애쓰고 노력하는 것을 의미해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기 위해서 몸부림 치는 것을 의미해요. 이런 노력은 이런 근심은 우리를 결국 회개의 자리에 이끈다는 거예요.
하나님이 없는 하나님의 말씀이 없는 근심은 우리를 사망으로 이끌지만 하나님의 말씀이 있는 하나님이 있는 근심은 우리를 회개의 자리로 이끕니다. 세상 근심 그러니까 하나님 없는 근심이죠. 말씀 없는 근심이에요. 이 근심은 영적인 절망에 여러분과 저를 이르게 하고 그리고 사망의 자리에 이르게 합니다. 우리의 영혼과 삶을 더 최악으로 만들어요.
여러분 대표적인 근심이 어떤 게 있을까요?
여러분과 제가 맞이하는 겪고 있는 삶의 힘듦이에요. 삶이 힘든 거죠. 우리 삶이 힘들지 않은 공간이 어디 있던가요?
결혼하면 막 좋을 것 같았는데 결혼하고 나니까 힘든 것이 한두 가지 아니 아 아이를 키우고 낳고 키우는 것도 힘들고 남편과 아내가 되는 것도 힘들고 부모가 되는 것도 힘들고 돈을 벌어서 가족을 먹이는 것도 힘들고 직장생활하는 것도 힘들고, 그러니까 삶의 힘듦이 정말 다양한 모습으로 우리의 인생 가운데 있어요. 그래서 우리가 괴롭힘을 당하며 살아갑니다. 우리가 한 번쯤 생각해 볼 게 있는데 이 삶의 힘듦 뒤 반드시 이 앞에 절망할 필요는 없다는 거예요. 왜냐하면 이런 고통들은 우리를 목마르게 하고 이 목마름은 영적인 촉매제가 되게 해요.
삶이 힘들지 않으면 사람들이 하나님을 생각할 시간을 안 가져요. 삶이 어렵지 않으면 말씀에 자기의 삶을 비추려는 노력을 하지 않아요. 삶이 힘들지 않으면 교회에 나올 생각도 하지 않아요. 그때로 삶의 힘듦은 대개 영적인 좋은 촉매제 역할을 해요.
여러분 목사가 어렵지 않으면 기도를 제대로 할까요?
목회가 어려워야 기도를 하죠. 물론 목회가 어려워도 기도하지 않는 분들도 있어요. 근데 어떻든 목회가 어려워서 기도할 수 있다는 건 엄청난 복인 거죠. 안 어렵고 목회할 수 있는 최고이지만 저는 그건 없더라고요. 목회가 어렵지 않은 분은 없는 것 같아요. 그냥 그렇게 보일 뿐이지 대부로 목회로 인해서 힘든 시간들을 목회자들이 경험해요. 그런데 그 힘듦이 영적인 목마름을 만들고 그 영적인 목마름이 하나님을 만나게 하고 그 만남을 통해서 목회자가 변하고 새 임을 얻게 되고 강건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삶의 힘듦은 반드시 나쁜 것만은 아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이 삶의 힘듦을 만나면 어떻게 할까요?
당연히 해결하려고 하죠. 이걸 어떻게 해결할까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영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고 어떤 사람들은 인간적인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해요. 그러니까 삶의 힘듦을 만났을 때 우리가 해야 할 일들은 방향을 잘 잡아야 되는 거예요. 삶이 어려워요. 가정이 어려워요. 교회가 어려워요.
우리가 할 것은 내가 지금 제대로 된 방향으로 가고 있는 나를 반드시 점검해야 된다는 거예요. 삶이 힘든데 방향까지 잘못되면 최악이 되는 거예요. 삶이 어려워요. 근데 그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이 잘못되면 더 최악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사도 바울이 권면하기를 그래서 하나님 없는 근심을 하지 말라는 거죠.
하나님 없는 근심은 결국 우리를 사망에 이르게 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있는 근심을 하고 그 하나님 있는 근심은 우리를 회개의 자리에 이끌리니까 하나님이 있는 근심을 하라고 권면하는 것입니다.
운전 중 사고의 위험에서 핸들을 잘못 틀고 방향을 잘못 틀어서 낭떠러지로 떨어진 사람이 있어요. 반면에 이 핸들링을 잘해서 자동차가 멈춰지기도 하고 아무런 사고 없이 스톱하기도 해요. 이 모든 일들이 운전자가 방향을 어떻게 잡느냐가 결정된 거죠.
그러니까 위기의 순간은 방향이 훨씬 더 중요해요. 평상시의 방향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을 수 있어요. 근데 위기에 내가 어떤 방향으로 가고 있느냐는 훨씬 더 중요한 거죠.
이 고린도 교회가 큰 어려움을 당했어요. 이 어려움을 당한 고린도 교회는 하나님 없이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 하나님과 함께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던 거예요. 그래서 결국 회개라는 멋진 결말의 결론에 이를 수 있었던 것입니다.
바울은 잘못된 신앙의 방향에 서 있는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권면을 합니다. 운전대를 잘못 잡고 있는 여러분과 저에게 권면을 합니다. 하나님 뜻에 맞는 근심을 하라. 삶이 어려운데 하나님의 제발 뜻에 맞는 근심을 하라는 거예요. 잘못된 방향으로 믿음의 운전대를 틀지 말라는 거예요. 그러면 더 어려움을 당하게 된다는 거예요.
고린도 교회는 위기 중에도 운전대를 방향을 잘 잡았어요. 그래서 회개라는 멋진 결론에 이르게 되고 다시 교회로서의 제 기능을 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맞는 근심을 하는 것은 어떤 걸까요?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뜻에 맞는 근심일까요?
이걸 정말 정말 편하게 쉽게 이야기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라는 거예요. 그럴 때 말씀이 그 성도의 방향이 되는 거죠. 여러분 말씀이 가르치는 길은 잘못될 수가 없어요. 말씀은 곧 하나님이잖아요. 말씀은 곧 그리스도잖아요. 말씀은 곧 능력이잖아요. 그래서 말씀이 가르치는 방향이 잘못될 수가 없어요. 그래서 우리가 삶이 어려울 때 말씀의 안내를 받는 것이 최고인 거예요.
왜요?
말씀은 잘못된 길을 가르치지 않기 때문이죠. 우리의 욕망은 얼마든지 나를 잘못된 길로 이끌어가지만 내가 늘 읽고 묵상하는 이 생명의 말씀은 결코 나를 잘못된 방향으로 이끌어갈 수 없다는 말씀이 곧 하나님이고 말씀이 곧 능력이기 때문인 거예요.
하나님이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셨는데 이 말씀이 창조하지 못할 새롭게 만들지 못할 공간과 사람이 어디에 있겠어요?
전혀 없어요. 없어요. 그래서 위기의 때 말씀의 안내를 반드시 받아야 됩니다. 말씀이 가르치는 것이 잘못될 가능성이 없습니다. 시간차 때문에 잘못되었다고 잠깐은 오해할 수 있지만 좀 시간이 지나고 나면 말씀의 길이 최고고 최선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삶의 어려움을 당했을 때 말씀이 가르치는 길이 방향이 어디인지를 잘 살펴야 됩니다. 그럴 때 그 말씀이 여러분의 방향이 되고 말씀이 여러분의 능력이 되고 말씀이 여러분의 답이 되는 것을 경험해요.
그러니까 삶이 어려운데 말씀을 가까이하지 않아요. 이 사람은 지금 잘못된 방향으로 핸들을 틀고 있는 거예요. 말씀은 어려운데 삶이 어려운데 말씀이 들리지 않아 이 사람은 회개 없는 자리로 갈 확률이 훨씬 더 높아요.
말씀의 끝에 회개가 있고 말씀의 끝에 구원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말씀 앞에 서야 합니다. 만약에 지금 여러분의 삶이 어려운데 사람의 소리가 크게 들려요. 그러면 아직 해결점이 멀었다는 의미예요. 지금 내 삶이 어려워 우리 가정이 어려워요. 내 인생이 어려워요. 우리 교회가 어려워요. 그런데 여전히 그 공동체에 사람의 목소리가 크게 들려요. 그러면 아직 그 공동체나 그 개인은 그 가정은 해결점으로부터 엄청나게 먼 거리에 있다는 의미인 거예요.
말씀이 크게 들리고 말씀이 위대하게 들리고 말씀이 전부로 들리는 자리에 있을 때 있을 때 해결점이 가까이 있다는 의미인 거예요. 만약에 오늘은 여러분이 이 말씀을 들으면서 이 말씀이 크게 들리고 정부처럼 들리면 이제 여러분의 삶의 힘듦에 해결점이 아주 가까이 와 있는 거예요. 내 말씀을 듣는 중에도 하나님의 음성 말씀은 전혀 들리지 않고 사람의 소리만 계속 들린다면 여러분의 삶을 힘들게 하는 그 문제의 해결점은 지금 여러분의 삶과는 아주 먼 거리에 있는 거죠.
그래서 사도 바울은 하나님 없는 근심을 하지 말라는 거예요. 하나님이 있는 하나님이 함께하는 근심을 하라고 권면을 합니다.
또한 삶의 힘듦 이 삶의 힘듦은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날 때 해결될 수 있어요. 삶이 힘든 사람들은 대부분 사람을 만나서 해결하려고 그래요. 근데 우리가 만나야 될 사람이 만나야 하는 건 사람이 아닌 거죠.
마찬가지인 거죠. 사람의 소리를 듣고 문제를 해결하니까 우리가 내 인생이든 교회든 좋은 결말의 자리에 갈 수 없어요. 그처럼 사람을 만나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니까 동일하게 좋은 결말을 갈 수 있어요.
여러분 인생이 좋은 결말을 내릴 힘이 있을까요? 아니 자기의 삶도 주체하지 못한 사람이 어떻게 좋은 결말을 내려 못 내려요. 그래서 우리는 좋은 사람을 만나서 내 인생에 좋은 결론을 내려고 노력을 해요.
내가 이 사람 옆에 있으면 내 인생에 좋은 결론이 날 수 있을 거야.
이렇게 돈 많은 이 사람을 옆에 붙어 있으면 내 인생도 이 사람과 같아질 수 있을까?
거기에 희망을 걸고 문제가 있을 때 사람을 찾아요. 그런데 이런 사람과의 만남을 통해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것은 하나님 뜻대로 하는 근심이 아닙니다.
하나님 뜻대로 삶의 힘듦을 해결하려면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나야 돼요. 그러니까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지 않으면 삶의 힘듦을 통해서 우리가 회개의 자리에 구원의 자리에 이르지 못한다는 거예요.
예수님과 관련 없이 여러분 우리가 회개의 자리에 있을 수 있을까요?
못 가요. 예수님과 관련 없이 우리가 구원의 자리에 갈 수 있을까요?
못 가요.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교제해야 우리는 이미 만난 사람이잖아요. 만난 것과 교제하는 것 또 다른 거예요.
여러분 우리가 남녀가 한 번 만났다고 그 사람이 잘 교제하는 게 아니잖아요. 매일 만나야 교제하는 거죠. 그래서 교단을 위한 단계에 들어가는 것처럼 예수님도 마찬가지예요. 예수님을 한 번 만난다고 내 인생의 문제가 다 해결되는 게 늘 인격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 안에 우리가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없이 삶의 힘듦은 극복되지 않습니다. 십자가 없는 삶의 힘듦은 온전해질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는 삶의 힘듦에서 벗어날 능력을 얻을 수 없어요. 우리에게 필요한 건 예수님의 말씀이고 예수님의 능력이고 예수님 그 자체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힘들 때 우리가 만나야 할 것은 사람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인 거죠. 어떤 예수님 말씀하신 그리스도 인도하시는 그리스도, 책망하시는 그리스도, 함께하는 그리스도를 우리가 만나야 삶의 힘듦에서 벗어날 수 있는 거예요.
많은 성도들이 삶의 힘듦의 순간을 만났을 때 사람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해요. 그런데 알다시피 사람은 자기의 문제도 해결하지 못하는데 우리가 누가 남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겠어요?
당연히 해결이 안 돼요. 그래서 사람을 만나서는 회개라는 좋은 결말도 내릴 수 없고, 구원이라는 좋은 결말도 내릴 수 없어요. 우리가 정말 회개라는 좋은 인생의 결말을 맞으려면 구원이라는 좋은 결말을 맞으려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야 되는데 말씀으로 만나고 나를 책망하신 그리스도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인도하신 그리스도를 만날 때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말씀을 가까이하면 좋을까요? 괴로울까요?
일단 괴롭습니다. 그 괴로움 후에 좀이 와요. 말씀을 만날 때 처음부터 좋지 않아요. 괴로움이 와요. 괴로움 후에 좋음이 옵니다.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괴로워요. 예수님 만남이 없을 땐 그분의 요구를 하나도 받아들이지 않아도 내 마음에 아무런 자책이 없었어요.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예수님과 날마다 교재 안에 있으면 그분의 음성을 듣지 않는 것,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것이 괴로움이 돼서 내 삶에 다가오게 됩니다.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바울의 권면을 들었을 때 되게 힘들었어요. 근데 감사하게도 고린도 교회는 하나님 없는 근심을 하지 않고 하나님이 있는 근심을 했어요. 그래서 회개와 구원의 자리에 이르게 됐던 것입니다.
문제는 세상 근심 그러니까 하나님 없는 근심, 세상의 방식으로 삶의 문제 어려움을 해결하려고 하는 것은 결국 우리에게 사망을 선물하고 절망을 선물한다는 거예요. 여러분이 기대하던 그런 것들을 하나님 없는 근심이 줄 수 없다는 거예요. 어려움 앞에 교회가 무너지는 것은 세상 방법으로 근심했기 때문이죠. 어려움 앞에 성도의 삶이 무너지는 것도 세상 방식으로 근심했기 때문인 거예요. 하나님의 방식으로 근심해야 회개하게 되고 우리가 다시 살아나게 돼요.
교회가 어려울 때 하나님의 방식으로 근심해야 돼요. 삶이 어려울 때도 하나님의 방식으로 근심해야 돼요. 그럴 때 하나님이 그 교회와 성도들에게 회개와 구원이라는 멋진 영적인 선물들을 허락해 주시는 것입니다. 힘듦 앞에서 성도가 무너지는 것, 절망에 이르게 되는 것은 세상 근심을 했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어버이 주일입니다. 도대체 부모는 어떤 사람이어야 할까요?
제가 생각하는 부모는 가르치는 사람이 아니라 보여주는 사람이에요. 우리는 생각하기를 부모는 가르치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실제로 부모는 가르치는 사람이 아니라 보여주는 사람이에요. 그러니까 시련과 어려움 앞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을 통해 회개와 구원의 자리에 이르는 것을 자녀에게 보여주는 것이 부모가 해야 될 일이라는 거예요.
여러분의 가정에 어려움이 있을 때 여러분은 하나님의 방법으로 그 어려움을 해결하고 있습니까?
만약에 여러분이 세상의 방법 세상 근심으로 그 문제를 해결하고 있다면 누가 보고 있을까요?
자녀들이 보고 있어요. 그 자녀들은 삶의 힘듦이 오면 세상 방식으로 해결하려고 할 거예요. 좋은 부모란 보여주는 부모인 거죠. 그러니까 하나님의 방법으로 근심해서 회개의 자리에 이르고 구원의 자리에 이르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부모예요.
여러분 평생 말을 해도 바뀌지 않던 자녀가 한두 번 부모의 삶을 보는 것으로 송두리째 변화될 수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 집에 있는 아이들 여러분의 집에 있는 아이들 자녀들은 보여주는 부모를 기다리고 있을지 몰라요. 아빠, 아빠가 보여주면 내가 바뀔 것 같아 엄마 엄마가 보여주면 내가 바뀔 것 같아라고 지금 기다리고 있을지 몰라요. 언제 보여줄지 모르는 어머니 아버지를 향해서 기다리고 있는 거죠. 엄마 아버지가 세상 방식이 아닌 하나님의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해내고, 그리고 회개의 자립에 이르고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하는 것을 두 눈으로 볼 때까지 자녀들이 기다리고 있을지도 몰라요.
만약에 여러분이 보여주면 자녀들은 그들이 만나는 근심을 크게 두려워하지 않을 거예요.
왜요?
아빠가 이겼잖아요. 엄마가 이겨냈잖아요. 두려워하지 않는 거죠. 우리 집에는 이김의 증거가 있잖아요. 이김의 증인이 있잖아요. 말씀으로 세상을 이긴 부모가 우리 집에 있으니까 자녀들이 당연히 두려워하지 않죠.
말씀으로 삶의 어려움을 이겨낸 부모가 있으니까,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날마다 만나 삶의 힘듦을 해결한 부모가 있으니까 자녀가 힘듦 앞에서 두려워하지 않는가 아버지가 같은 길을 가면, 어머니가 같은 길을 가면 해결되는 걸 아니까 저는 이게 부모라고 생각합니다.
사람은 근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근심이 없다면 사람도 아닙니다. 그러나 성도는 그 근심, 삶의 힘듦이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 뜻 안에서 근심하고 삶의 힘듦을 해결해야 됩니다. 그래야 우리의 방향이 잡히고 방향이 잡히면 영향력이 생기고, 영향력이 생기면 변화가 일어나고, 우리는 그 끝에서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리고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경험하게 됩니다.
여러분의 근심의 끝에 회개가 있기를 축복합니다.
할렐루야 여러분의 근심의 끝에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이 있기를 축복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방법을 따라서 근심하시면 됩니다. 세상 근심은 여러분과 저를 절망케 하고 사망의 자리에 이끌 거예요. 아무쪼록 우리 교회의 근심의 끝에 회개가 있기를, 하나님의 구원의 강력한 역사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Messenger’s Note:
“In his heart, a man plans his course, but the LORD determines his steps.” (Proverbs 16:9)
“Nevertheless, not my will but yours, be done.” (Luke 22:42)
“And when the angel stretched out his hand toward Jerusalem to destroy it, the LORD relented from the calamity and said to the angel who was working destruction among the people, ”It is enough; now stay your hand.“ And the angel of the LORD was by the threshing floor of Araunah the Jebusite.
And David built there an altar to the LORD and offered burnt offerings and peace offerings. So the LORD responded to the plea for the land, and the plague was averted from Israel.” (2 Samuel 24:16,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