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샘편지 6신]안의와 손홍록 선비를 아시는지요?
존경하는 콜렉터 선배님께
오늘은 일년 중 밤이 가장 길다는 24절기 중 22번째 동지冬至입니다. 지인이 꼭두새벽에 ‘오늘을 정점으로 해가 따뜻한 날을 향하여 키를 돌리고 엄배덤배하다 보면 봄을 알리는 입춘이 코앞’이라며 ‘추운 겨울이 봄날을 초대했다’고 써보냈더군요. 과연 그런가요? 눈이 녹으면 봄이 오는 소리가 들리겠지요. 이웃 친구 부인이 어제 쑤어 보낸 팥죽을 아침에 아버지와 함께 먹었습니다. 하늘은 잔뜩 흐려 금방이라도 눈이 쏟아질 듯합니다. 왼종일 사목사목 눈이 내리면 좋겠습니다. 저는 신앙인은 아니지만, 이런 날은 누군가를 그리며 기도하고 싶습니다. 왜 그런지 나홀로 울고도 싶습니다. 너무 감상적인가요? 하하.
지난 주말, 아버지와 함께 정읍의 아는 형님집을 방문했습니다. 지난 6월 아담하게 새 집을 완공했다길래 보러 간 것입니다. 건평 30평 단층으로 아주 심플하게 지었더군요. 보기에 심히 좋았습니다. 형수가 담근 된장과 고추장은 명인의 솜씨입니다. 가는 길에 칠보쯤인가 도로변에 ‘손홍록의 묘’이라는 안내판이 있더군요. 익히 알고 있는 이름이라 반가웠습니다. “아버지, 저 분이 아니었다면 어쩌면 임진왜란 이전의 조선전기 역사를 알 수 없었을 거예요. 사대사고四大史庫(춘추관, 충주, 성주, 전주사고를 일컬음) 중 모두 불타고 유일하게 남은 전주사고全州史庫에 있던 실록을 내장산 동굴로 옮긴 의로운 분이거든요” “그래? 훌륭한 선비였구나” “그렇지요. 또 한 분이 안의라는 분인데, 가면서 그 얘기를 들려드릴 게요”
오늘의 편지 주제는 그날 아버지께 들려드린 ‘조선왕조실록의 수난사’입니다. 전주 경기전慶基殿의 지금도 남아 있는 이층사고를 보신 적이 있나요? 그곳에는 『실록』과 『고려사』 『고려사절요』 등이 귀중한 사서史書들이 보관돼 있었습니다. 물밀 듯이 올라오는 왜구들에게 약탈되거나 소실되면 큰일나겠다는 생각으로, 태인泰仁에 사는 선비 안의安義(64세)와 손홍록孫弘祿(56세)가 발 벗고 나서, 광대와 종들을 시켜 서적 800여책을 수레에 실거나 등에 지고 머리에 이어, 60여km 떨어진 내장산의 깊은 동굴에 숨겨놓았다고 합니다. 그들은 이후 1년여 동안 숙직까지 해가며 마지막 남은 실록을 지켜낸 의인義人들입니다. 또한 호남지역의 고경명高敬命 등 의병들에게 쌀과 곡식들을 줄기차게 대기도 했답니다. 안의가 남긴 『난중일기초』에 그런 기록이 빼꼼히 담겨 있다고 합니다. 그분들은 대체 얼마나 훌륭한 업적을 남긴 것인가요? 이런 분들이 바로 '문화 애국자'입니다. 일제시대 간송 전형필 선생이, 프랑스도서관에서 사서로 일하며 '조선왕실 의궤'와 '직지심체요절' 하권을 찾아내 세계에 알리고, 고려조 금속활자가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보다 78년이나 앞선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본으로 공인받게 한 박병선 박사같은 분들을 저는 문화애국자라고 부릅니다. 이분들의 눈물겨운 노력이 없었다면, 우리는 조선전기 방대한 왕실기록의 퍼즐을 영원히 풀 수 없었겠지요. 퇴색해 방치돼 있는 남천사藍川祀라는 사우祠宇에서 그분들을 배향하고 그 뜻을 기리고 있지만, 아주 관심있는 분들이 아니면 대개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겠지요. 언제나 그렇듯, 역사는 이런 이름없는 의병과 의인들이 지켜내 왔습니다. 안중근-윤봉길-이봉창義士, 백범, 신채호, 김창숙 등 수많은 항일 독립애국투사들이 그랬듯 말입니다. 이 땅의 민주화를 위하여 목숨을 바친 수많은 열사烈士들의 이름만이라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의인들의 분투奮鬪로 살아남은 이 실록은 이후 우여곡절을 많이 겪습니다. 아산, 강화도, 묘향산으로 이안移安을 하였으며, 전쟁이 끝난 후 3년에 걸친 국가사업으로 4질을 더 인쇄하여 5대사고(춘추관, 태백산, 오대산, 정족산, 적상산)에 보관해 왔습니다. 참, 여기에서 알고 넘어갈 것은 정종실록까지는 목판인쇄였으나, 이후 실록은 모두 금속활자본입니다. 그중 1질이 ‘이괄의난’때 소실되었구요. 오대산사고 실록은 일제강점기때 도쿄대 도서관에 반출됐는데, 1923년 관동대지진때 대부분 소실되고 남은 77책만 되돌려 받았다는구요. 적상산본 실록 1질은 한국전쟁때 김일성의 특명으로 비밀작전 끝에 북한으로 반출되어, 앞서 말씀드린 대로 1983년 『리조실록』이란 이름으로 100% 국역되어 출판되었습니다. 1질(정족산본, 원 전주사고본)은 서울대 규장각에, 또 1질(태백산본)은 국가기록원에 소중히 보관돼 있는 우리나라 국보 제151호.
지난 2014년 미국의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방한, 정상회담에 앞서 경복궁을 찾았다고 합니다. 그 자리에서 문화재청 관계자가 『조선왕조실록』에 대해 간략한 설명을 해주니까 “어떻게 그런 방대한 기록이 남아 있을 수 있냐? 믿을 수 없다”“서울은 정말 대단히 긴 역사를 가졌다”며 깜짝 놀랐다는 가십gossip을 신문에서 읽은 적이 있습니다. 세계 최강국이라해도 미국은 사실 1776년 영국으로부터 독립해 300년도 채 안된 미천한 역사의 국가이니, 놀란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겠지요.
실록을 얼마나 소중하게 관리했는지도 아셔야 합니다. 깊은 산속으로 옮긴 뒤에는 관리가 쉽지 않았겠지요. 하여 사고와 가까운 사찰에 위탁관리를 시켰답니다. 왕릉王陵을 관리하는 원찰願刹을 두는 식이지요. 세종대왕의 영릉英陵의 원찰이 여주의 신륵사神勒寺이듯이 말입니다. 대신 절에 땅을 내려주는 등 혜택을 많이 주지요. 군대처럼 날마다 불침번까지 세웠다는군요. 3년마다 봄가을로 전임 사관을 파련, 실록 상태를 살폈구요. 실록을 보관하는 사각史閣 앞에서 용안龍顏을 뵌 듯 국궁사배鞠躬四拜(네 번의 절)를 했으니, 경건함 그 자체였겠지요. 또한 그들은 포쇄관曝曬官 역할도 맡았는데, 포쇄란 나무상자에 보관된 실록을 꺼내 바람이 잘 통하는 그늘에서 사나흘 말리는 것을 말합니다. 종이게 습기가 차면 좀이나 곰팡이가 스니까 3년마다 한번씩 바람과 햇볕에 말리는 것이지요. 사고가 2층으로 되어 2층에 보관하는 것도 땅에서 올라오는 습기를 피하기 위한 것이겠지요.
『조선경국전』에 <후대 임금은 선대 임금의 실록을 볼 수 없다>는 규정을 명문화한 조선왕조실록. 그들은 누구와 무엇을 위하여 이처럼 갖은 정성으로 실록을 만들고 보관해 왔을까요? 우리는 그 의미를 제대로 정확히 알고, 그 찬란한 기록정신을 계승·발전해 나가야 하지 않을까요? 제가 명명한 <기록의 나라, 대한민국>의 국민이라면 말입니다.
그 결과, 유네스코에 등재된 16건의 ‘세계기록유산’ 한 건, 한 건 살펴 보십시오. 아시아태평양지역에서 단연 으뜸입니다. 중국 13건, 일본 7건, 베트남 5건입니다. 세계적으로는 독일이 23건으로 1위, 영국 22건, 폴란드 17건, 그 다음 우리나라가 네덜란드와 공동 4위입니다. 정말 자랑스럽지 않는가요? 제가 수 년 전 여자고등학생 영재반 200여명을 앞에 두고, 이 주제로 90여분 특강을 했는데, 실제로 학생들이 어깨를 으쓱거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문과대를 진학하고 한문을 배워야겠다기도 하고, 너무 모르고 있었다며 고맙다는 치사까지 받았습니다. 방송인도 아닌데 사인을 해달라며 줄을 선 우리 학생들을 보고 ‘아, 이런 주제로 우리 청소년들에게 특강을 해 민족적 자부심을 키워줘야 할텐데’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선배님,
지루하지는 않으셨지요? 다음에는 제가 실록을 왜‘컨텐츠(이야기)의 보물창고’라고 했는지, 그 얘기를 들려드리겠습니다. 내내 건안하시기 바랍니다.
12월 21일 동지에
임실 우거에서 후배 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