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의 상아탑에서도 정부의 스크린쿼터 축소 방침에 분노하고 나섰다. 영화 연구자와 교육자로서 대학과 평단, 영화제를 통해 영화 문화를 일구어온 영화학자, 평론가 5인이 최근 스크린쿼터 문제에 대한 토론의 장을 요청했다.
대담 참석자
민병록 (동국대 연극영상학부 교수, 전주국제영화제 집행위원장) 신강호 (대진대 연극영화학부 교수, 한국영화학회 회장) 심영섭 (영화평론가, 부산외국어대 영상문화학과 겸임교수, 한국영상응용연구소 대표) 이용관 (중앙대 영화학과 교수, 부산국제영화제 부집행위원장) 지명혁 (국민대 연극영화과 교수)
한국영화학회, 한국영화교육학회, 영상기술학회, 영화역사학회, 영화평론가협회, 젊은영화비평집단 등 대한민국 영화학계와 평론계는 지난 1월 26일 정부의 스크린쿼터 축소 방침에 일제히 반대 입장을 표명했다. 그들 또한 릴레이 철야 농성에 참가했고, 깃발을 들고 옥외 집회에 나갔으며, 영화평론가협회 양윤모 회장과 국민대 지명혁 교수는 릴레이 1인 시위에도 참가했다. 또한 그들이 가르치는 전국 23개 대학 영화, 영상 전공 학생들은 지난 16일 학생 대책위를 발족해 서울 대학로에서 연일 대국민 홍보 활동을 벌이는 중이다.
허나 말과 글로 한국영화계의 가장 첨예한 논쟁에서 의견을 개진할 기회를 많이 갖지 못한 영화학자와 평론가들은 FILM2.0에 토론의 장을 요청하고 나섰다. 터놓고 말하자면 영화학자 중의 한 명인 상명대 영상학부 조희문 교수가 스크린쿼터 축소 찬성 입장을 여러 방송과 지면에서 밝힌 것에 따른 영향도 없지 않았다. 스크린쿼터에 대한 어떤 입장을 밝히든 그것은 조희문 교수 개인의 자유이나 한국영화교육학회 회장 직함을 걸고(사실을 확인해본 결과, 조희문 교수는 한국영화교육학회 회장도 아니었으며 조희문 교수 입장은 한국영화교육회의 입장과도 배치된다) “장가간 아들이 번쩍거리는 외제차를 타고 시골에 있는 아버지를 찾아가서는 ‘아직 사업이 제대로 되지 않아서 그러는데 손자들 다 클 때까지 돌봐주고 생활비도 계속 보내달라’고 한다"는 비유로 축소 찬성 여론을 이끄는 것에 대응할 필요성을 느꼈기 때문이다. 물론 궁극적으로는 경쟁력, 국익, 집단이기주의 등 스크린쿼터 여론 재판을 이끌고 있는 키워드의 부적절성과 오해의 내막을 짚어보고, 한국영화계의 문화 다양성을 위한 과제가 무엇인지를 살펴보는 자리가 필요하다는 생각이었다.
이미 알려졌다시피 지난 1월 26일 한덕수 부총리 겸 재경경제부 장관이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협상이 국익에 부합되므로 오는 7월 1일부터 현행 146일인 스크린쿼터를 73일로 축소하겠다고 발표했다. 이어 27일 정동채 문화관광부 장관이 4천억 원 한국영화발전기금을 신설하겠다는 선심성 발표로 스크린쿼터 축소 논쟁에 뜨거운 불을 붙였다. 영화계는 즉각 스크린쿼터 사수 투쟁을 선포하고, 그동안 스크린쿼터를 유지하겠다는 입장을 공식적으로 밝혀온 노무현 대통령과의 면담을 요청했으나, 노무현 대통령은 2월 16일 대외경제위원회회의에서 한미 FTA 체결의 필요성을 역설하며 “국내 이해단체의 저항 때문에 못 가는 일이 절대 없도록 하자”며 “어린 아이는 보호하되 어른이 되면 다 독립하는 것이 아닌가, 한국영화가 어느 수준인지 스스로 판단해볼 때가 됐다”는 말로 한국영화계를 어린 아이라고 떼쓰는 어른에 비유했다. 2월 18일 농민과 함께 ‘스크린쿼터 사수, 한미 FTA 저지 쌀과 영화 촛불문화제’까지 열었던 영화계를 집단이기주의의 늪으로 빠뜨린 것이다. 정부는 3월 중 현재 의무상영일수 146일로 돼 있는 영화진흥법 시행령을 개정해 73일 축소를 법제화하겠다는 입장이고, 영화계는 현 의무상영일수를 시행령이 아닌 모법에 넣는 영화진흥법 개정안을 법제화하겠다며 팽팽히 입장을 맞세우고 있다. 스크린쿼터 논란이 국회로 가기 전, 영화학자들의 목소리를 들어보는 자리를 마련했다.
FILM2.0 연구자이자 교육자로서 이번 스크린쿼터 논란에 대해 기본적인 입장을 밝혀달라. 또한 최근 논란이 놓치고 있는 점이 있다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도 말해달라.
민병록 최근 스크린쿼터 논란을 지켜보면서 가장 안타까운 것은 축소를 반대하는 목소리가 국민들에게 잘 전해지지 않는 것 같다는 점이다. 스크린쿼터가 무엇이고, 왜 중요하며, 한미 FTA 협상 전에 정부가 일방적으로 축소하게 된 과정이 어떤 문제가 있으며, 향후 축소가 가져올 파장 등이 어떨지에 대해 보다 더 많은 토론의 자리가 마련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대규모 집회나 1인 시위 등으로 여론을 환기시키는 것도 중요하지만, 여전히 스크린쿼터를 영화인들의 ‘밥그릇 지키기’나 집단이기주의로 보는 국민들에겐 보다 정확한 정보와 유익한 시사점을 던져주는 게 급선무라는 생각이다.
지명혁 국민들의 가장 큰 오해는 한국영화계가 개방을 거부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영화인들이 우물 안의 개구리처럼 스크린쿼터라는 보호막을 부여잡고 세계화, 개방화라는 대세를 거스른다고 오해하는 것인데 사실 한국영화시장은 어느 산업보다 개방을 일찍 했다. 정부가 자동차나 전자제품을 높은 관세와 수입 규제로 막고 있을 때부터 한국영화시장은 할리우드영화를 비롯한 외국영화에 개방돼 왔으며 스크린쿼터가 문제시되고 있는 지금도 전 세계의 영화들이 한국시장에 들어오는 데 아무런 장벽이 없다. 다만 스크린쿼터는 자국영화의 문화적 다양성을 보호하기 위해 고려된 제도인데 이는 이미 다자간 국제협상에서 문화적 예외로 인정되고 있다. 그런데 한미 FTA를 앞두고 영화를 일반공산품과 같은 견지에서 자유무역의 대상으로 보는 것이 세계화에 부합한다고 여론을 부추기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본다.
이용관 정부의 갑작스런 발표가 음모론을 떠올리게 했다. 한국이 칠레와의 FTA를 맺는 데는 3년이 소요됐고, 싱가포르와의 협상에 앞서서는 약 1년 동안 산,관,학 공동연구회에서 연구절차를 거쳤다. 그런데 국민 참여를 통해 이룩한 권력을 국민에게 돌려줬다고 자칭하는 참여정부가 단 20분 만에 무산된 공청회 외에는 어떠한 국민적 합의 없이 FTA 협상을 빌미로 스크린쿼터를 내주고 영화계를 집단이기주의로 몰아가고 있다. 미국과 FTA를 체결한 나라는 15개국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그것도 호주, 캐나다, 이스라엘, 싱가포르를 제외하면 모두 중동, 중남미의 가난한 나라다. 미국과의 FTA를 맺으려던 스위스는 연구절차를 거친 뒤 안 하기로 했다. 정부와 수구언론은 한미 FTA를 맺지 않으면 마치 우리나라가 경제적으로 고립되거나 세계화에 뒤쳐지는 것처럼 얘기하는데, 그럼 스위스는 바보란 말인가? 참여정부 출범이래 조중동 등 수구언론과 노무현 대통령은 늘 반목해왔었지만 이번처럼 입을 맞춰 한 목소리를 낸 건 스크린쿼터 축소가 유일하다. 정말 정권 퇴진운동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다.
심영섭 주변에서 접하게 되는 가장 흔하고 절망적인 반응은 ‘스크린쿼터 이제 끝난 문제 아니야?’라는 패배주의적인 생각이다. 실제로 스크린쿼터가 규정한 의무상영일수가 실질적으로 지켜진 시점은 5년 정도밖에 안 됐고, 한국영화가 잘 되고 있는 것도 그 정도 남짓한데 스크린쿼터가 매우 오랫동안 한국영화를 보호해왔으며 이제는 있을 만큼 있었으니까 축소하거나 폐지해도 된다는 논리가 답답하다. 이런 오해를 깨기 위한 영화인들의 노력은 이슈화되지 않고, 국민을 위해 일하는 사람이 국민을 집단이기주의자로 매도하는 것이 이슈화된다는 점이 안타깝다.
신강호 정부의 일방적인 축소 발표로 인해 ‘이젠 물 건너간 문제’라는 여론이 팽배한 것 같다. 정부가 한미 FTA 협상도 하기 전에 스크린쿼터 축소를 발표한 점은 과정상 무리가 있다 해도 어차피 국익을 위해서는 포기했어야 할 일이라는 패배적인 시각이 중요한 논점들을 가리고 있다는 생각이다.
한국영화는 경쟁력 있는가?
FILM2.0 스크린쿼터 축소 찬성론자의 가장 주요한 논리가 한국영화가 이젠 경쟁력을 갖췄다는 것이다. 현 단계 한국영화의 경쟁력을 어느 정도로 보나?
심영섭 많은 국민들이 전 국민이 잘 사는 길이라면 전체 국민 중 소수에 해당하는 영화인들이 이제는 스크린쿼터를 양보할 때 아닌가, 아직도 보호해달라고 떼쓰는 것 아닌가, 이런 식의 오해를 하면서 ‘영화만 잘 만들면 지금처럼 한국영화 많이 봐줄텐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건 영화산업의 핵심이 유통에 있다는 점을 간과하는 순진한 생각이다. 상영이라는 형식으로 소비되는 영화는 작품 그 자체에서 경쟁력이 생기는 것이 아니다. 배급과 상영 단계에서 경쟁력을 갖추지 못하면 몇 주, 며칠 만에 시장에서 사라지는 게 현실이다.
민병록 한국영화 시장점유율이 최근 5년간 50% 전후로 높고, 지난해에는 60%까지 올라갔으며 이 때문에 이제 한국영화는 경쟁력이 있다는 생각이 축소 찬성의 주요 근거인데 사실 시장점유율 상승과는 무관하게 수익률이 떨어지고 있다는 현실은 은폐되고 있다. 2001년 한국영화 시장점유율이 50.1%였을 때, 수익률은 29.3%였지만, 2002년 시장점유율이 48.3%, 2003년 53.5%였을 때 수익률은 각 -9.7%, -8.8%를 기록했다. 외형적인 성장세와는 달리 수익률 침체가 몇 년째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반면 극장은 2001년 14.9%, 2002년 18.1%, 2003년 18%의 수익률?? 올리며 안정적인 흑자를 기록하고 있다. 최근 서울시극장협회가 배급사와 극장의 수익 배분율인 부율을 현행 6:4에서 한국영화와 같은 수준인 5:5로 하향 평준화시키겠다는 주장을 하고 있어 반발을 낳고 있다. 만약 스크린쿼터 축소로 인해 수익률 침체를 걷고 있는 한국영화의 제작편수가 점차 줄어들고 흥행마저 안 되면 부율 조정 등을 통한 극장들의 압력은 더 세질 것이고 그러면 막대한 물량을 가지고 있는 할리우드영화에 시장을 내주는 것은 시간문제가 될 것이다.
신강호 그나마 성공하는 영화들은 극히 일부다. 평균을 내보면 한국영화 한 편 당 보통 6억 원 정도의 손해를 보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한국영화 잘 되고 있고, 영화인들이 사회 기득권자라는 시선은 잘못된 것이다.
지명혁 한국은 전 세계 10대 영화산업 국가 중 유일하게 할리우드 자본이 멀티플렉스에 들어오지 않은 나라다. 일부 멀티플렉스에 외국 자본이 들어와 있기는 하지만 할리우드의 복합상영관 체인이 본격적으로 진출하고 여기에 할리우드영화가 채워진다면 독과점 체제는 매우 용이해진다.
이용관 시장점유율 60%가 한국영화가 자립적으로 성장했다는 근거가 될 수 없다. 자본과 시스템이 안정되지 않는 상태에서 몇몇 흥행작이 키워낸 시장점유율은 불안하기 짝이 없다. 지난해 <말아톤>과 <웰컴 투 동막골>이 없었다면 시장점유율 60%가 이뤄졌을까? 영화사적으로 보면 국가적인 위기 시기마다 흥행작은 계속 나왔다. 그 어렵던 전후엔 <자유부인>(1956), 유신 초반엔 <성춘향>(1961), 유신이 정점에 이르렀을 땐 <별들의 고향>(1974)이 나와 흥행을 했다. 지금처럼 멀티플렉스가 아니라 단관 개봉이었고, 집계가 정확하지 않았을 때니 지금으로 보면 <왕의 남자> 못지 않은 흥행작들이 꽤 있었던 셈이다. 이렇게 흥행작은 시대마다 꾸준히 나왔지만 시스템이 받쳐주지 않았기 때문에 한국영화는 재생산 구조를 갖지 못하고 계속 불안한 산업구조 위에서 때로는 정권의 검열과 탄압을 받으며, 때로는 정권의 시녀가 되며 여기까지 왔다. 이걸 재생산 구조로 바꾸고 있는 것이 현 시점이다. 아직도 영화로 먹고사는 게 힘든 영화인이 태반이다. 지금의 고성장은 저임금 구조에서 가능했던 결과다. 이런 불안한 구조 위의 외형적 성장을 대단한 경쟁력처럼 과대평가해서는 안 된다.
민병록 인도는 자국영화 시장점유율이 98%가 넘는 정말 엄청난 나라다. 그렇다고 해서 인도영화가 세계에서 경쟁력이 있다고 할 수 있나? 1993년에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을 체결한 멕시코는 스크린쿼터를 단계적으로 축소하는 대신 정부보조금을 받기로 했다. 그런데 1990년 80여 편에 이르던 제작편수는 1998년 10편으로 급격히 감소했다. 스크린쿼터가 축소됐을 때 그것이 여지없이 영화산업과 문화의 파탄으로 이어졌다는 것을 세계 각국의 사례가 증명하고 있다.
FILM2.0 멕시코영화는 스크린쿼터 유지론자가 앞세우는 대표적인 사례다. 하지만 멕시코영화의 제작편수가 급감한 것은 멕시코의 경제사정 악화가 주된 원인이지 스크린쿼터 축소와는 무관하다는 반론도 만만치 않다. 또한 한국영화의 경우, 멕시코영화와는 달리 국제영화제에서 인정받을 정도로 수준이 높고 요즘 한국 관객들은 점차 자막을 읽기 싫어하는 등 자국영화 친화적인 소비행태가 뚜렷하다고 보는 입장이 있는데 이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심영섭 그게 10년도 안 된 얘기다. <서편제>(1993)가 신토불이 신드롬을 일으키며 1백만 관객을 돌파했던 시점이 고작 12년 전이다. <서편제>의 흥행에도 불구하고 1993년 한국영화 시장점유율이 15%대였다. 이 수치 하나만 봐도 당시 한국 관객들의 외화 선호 경향이 얼마나 뚜렷했는지 알 수 있다. 지금 자막을 읽기 싫어하는 세대가 한국영화 주 관객층으로 부상하면서 스크린쿼터가 축소, 폐지되더라도 한국영화는 걱정 없다고 말하는 것이 얼마나 순진한 생각인지 한미 FTA를 통해 얘기해보자. 한미 FTA가 체결되면 영화 및 시청각 분야, 농수산업의 몰락뿐 아니라 미국의 교육, 의료, 법률 서비스가 물밀듯이 들어오게 된다. 교육 서비스가 들어오면 우리 자녀들이 한국에서 미국식 교육을 받고 미국 대학의 국내 분교에 다닐 수 있게 되는데 그러면 그 세대는 영어로 듣고 얘기하는 데 불편함을 느끼지 못할 것이다. 한국영화 경쟁력 문제는 정말 장기적으로 봐야 한다. 요즘 한국영화가 한국 관객 입맛에 맞는다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라고 과신해서는 안 된다.
FILM2.0 그래서 조희문 교수가 “손자들 다 클 때까지 돌봐주고 생활비도 계속 보내달라고 한다”는 비유를 하지 않았나?
이용관 조희문 교수와 노무현 대통령의 발언으로 현 단계 한국영화를 어른으로 볼 것이냐, 아이로 볼 것이냐로 혼란을 빚고 있는데 한국영화는 아직 어른이 아니다. 어른이라면 재생산과 자립이 가능해야 하는데 어른으로 보기에는 여전히 자생력이 부족한 유치 산업에 불과하다. 아이가 아버지보다 키가 크거나 몸무게가 더 나간다고 해서 다 컸다고 할 수는 없지 않는가? 자동차 산업은 오랫동안 정경유착을 통해 특혜를 받아왔고 높은 관세와 수입 규제로 충분히 자립할 시간을 주었으며, 이제는 한미 FTA를 통해 대미 수출의 길을 열어주겠다고 하는 등 여전히 보호와 지원을 아끼지 않으면서 영화는 이토록 일방적으로 무시하는 게 과연 국가가 나서 할 일인가 싶다.
영화는 왜 문화인가?
FILM2.0 자동차 산업의 규모와 고용 효과가 영화보다 월등히 높으니까 그러지 않나?
민병록 뉴질랜드의 경우는 정책의 1위가 자연보호다. 경제는 3위 정도다. 우리는 너무 경제, 경제하는데 경제 우선정책이 결국은 사회의 양극화를 부추기고 문화와 정신의 황폐화를 가져오는 거다. 전 세계에서 자국영화를 연간 10편 이상 만드는 나라가 별로 없다. 그만큼 자국의 영화를 가진다는 게 어려운 일인데 이제까지 어렵게 이뤄온 것을 자동차 몇 대, 휴대전화 몇 대 더 파는 것이 훨씬 중요한 것처럼 여론을 이끄는 게 불만스럽다.
이용관 정부가 향후 부가가치가 어떤 산업에서 생길 것인지, 문화적 가치가 얼마나 중요한지 모르거나, 알면서도 정치적인 이유로 당장 성과가 있는 것처럼 보이기 위해 국민을 호도하는 부분이다.
신강호 문화적 가치라는 것이 대단히 작품성이 있는 영화에만 해당되는 얘기는 아니다. <영화가 시대를 말한다>라는 책도 있지만 영화는 어떤 식으로든 동시대 사회, 시대상을 담고 있다. 상업 영화 오락 영화 등등으로 흥행작을 폄하하는 시선이 있지만 <투사부일체> <가문의 위기>도 학원문제, 계층문제 등 동시대성을 담고 있다. 일부 관객들은 스크린쿼터가 쓰레기 같은 영화 키워주는 데 일조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앞서 언급한 <자유부인>이나 <서울의 지붕 밑>(1961), 심지어 일본영화 표절했다는 <맨발의 청춘>(1964) 같은 통속 영화를 학생들에게 보여주면 굉장한 반응들을 접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자유부인> 보여주면 말씨 자체가 북한 말씨랑 비슷하다고 학생들이 공통적인 반응을 보인다. <서울의 지붕 밑>을 보면 당시 서울의 한옥마을을 다 볼 수 있다. 시대상과 당대 문화를 담고 있는 영화는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가치가 크다는 걸 교육 현장에서 뼈저리게 느낀다. 그런 면에서 자국영화는 꾸준히 만들어져야 한다. 역시 그런 면에서 스크린쿼터는 지켜져야 한다.
심영섭 독일에 유학 갔다가 10년 만에 한국에 온 선배가 사람들이 ‘한국영화’라는 표현을 쓰는 걸 보고 깜짝 놀라더라. 10년 전만 해도 우리는 자기 나라에서 제작된 영화를 폄하해 방화(邦畵)나 국산영화라고 했다. 하지만 이젠 다 한국영화라고 떳떳하게 부른다. 한국영화, 우리 영화라는 말을 쓰면서 이제 공동체 의식을 갖기 시작했다는 거다. 이런 식으로 한국영화가 한국인들에게 밀착해서 인정을 받기까지, 우리 문화의 일부로서 자존심을 갖기까지 그렇게 힘들었던 거다.
이용관 왜 중국과 프랑스는 문화라고 주장하며 안 뺏기려고 협상하는데 왜 한국 정부만 경제논리를 앞세우며 영화를 희생양으로 삼으려는 건지 이해가 안 된다. 전 세계에서 스크린쿼터를 폐지해서 잘 된 나라가 없다는 건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계속 경제 논리를 동원해서 90%가 넘는 할리우드의 전 세계 시장점유율을 더욱 높이려고 하고 있다. 한국 스크린쿼터의 싹을 밟겠다는 것은 중국시장으로 가는 교두보를 마련하겠다는 계산이 섰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게 잘 나가던 한국도 이렇게 포기하지 않았느냐, 그렇게 얘기하게 되는 거다. 실제로 내가 중국 관료들을 만나보니까 한국은 양보하면 안 된다고 말하더라. 바로 중국으로 와서 일본, 인도까지 죽죽 미국이 밀고 갈 거란 얘기다.
심영섭 우리가 스크린쿼터를 내줄 경우 미국은 다른 나라와 협상 시 우리나라를 그 본보기로 이용할 것이란 점은 분명하다.
신강호 얼마 전 통계를 보니 KBS 드라마 수출이 급상승했더라. 중동, 아프리카, 중남미까지 한국 드라마, 가요, 영화가 나가는데 여기에 스크린쿼터 축소라는 제동을 걸면 다같이 무너지는 게 뻔하다. 그런 측면에서도 스크린쿼터가 유지돼야 하는데 이를 포기하는 건 국익을 위해서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FILM2.0 문화예술계라고 해서 스크린쿼터에 다 찬성하는 건 아닌 것 같다. 얼마 전 신중현, 조영남 씨의 발언?【? 보듯 그동안 영화만 특혜를 받아왔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여럿이더라. 특히 문화관광부의 4천억 지원금이 장르 간 위화감을 부추기고 있다는 생각이다.
이용관 다같이 방법을 논의해보자는 건데 왜 영화에만 스크린쿼터가 있냐고 그들은 반문하고 있다.
미술, 음악, 출판, 영화마다 매체 특성이 다르다. 그런데 왜 상영이란 형식으로 소비되는 영화 특성에 맞게 고안한 스크린쿼터를 문제시하는가? 우리는 스크린쿼터가 신성불가침이라고 하는 게 아니라 축소를 하더라도 가장 적합한 대안을 논리를 찾자는 거다. 정부가 일방적으로 나오니까 거기에 맞서기 위해 146일 사수가 나온 거 아닌가? 그런데 왜 신중현 씨 같은 분이 그런 말 하냐는 거지.
지명혁 미국 팝 음악이 세계 음반시장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35% 정도다. 할리우드영화의 전 세계 시장점유율 90%에 비해서는 현저히 낮다. 뿐만 아니라 대중음악이 디스크쿼터라는 보호 장치 없이도 자생력을 가졌다는 건 사실과 다르다. 현재 한국 대중음악은 지상파 라디오 음악 프로그램에서 60% 이상 틀어져야 한다는 방송쿼터의 보호를 받고 있다.
심영섭 중요한 것은 쿼터제 유무가 아니다. 프랑스도 스크린쿼터제라는 명칭만 없을 뿐이지 그에 상응하는 자국문화 보호장치를 갖추고 있다. 프랑스는 모든 개봉영화 수익의 11%와 함께 방송과 비디오 매출의 일정부분을 환수해 프랑스영화 제작에 재투자하도록 한다. 자국의 문화를 지키고 있는 나라들은 다들 미국의 문화 패권주의에 대응해 스크린쿼터에 상응하는 좋은 제도들을 가지고 있다. 그러니까 유독 우리나라 영화인들만 다른 나라에 비해 특혜를 보고 있다는 시선은 정말 어불성설이다.
신강호 최근 4천억 지원설 때문에 묘한 분위기가 형성되고 있다. 어디에 순차적으로 어떻게 지원될 것이란 얘기도 없이 그냥 나온 액수인데 영화계가 큰 수혜를 입는 것처럼 오해되는 것이다. 그 돈이 장기적인 시스템을 구축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냐, 라고 묻는다면 아니라고 본다.
지명혁 사실 정부가 지금까지 콘텐츠진흥원 등 국내 애니메이션에 지원한 금액이 1조 원 가량 된다. 4천억 원과는 비교가 안 되는 수준이다. 그런데 국내에서 만들어지는 연간 장편 애니메이션 수가 10편이 안 된다. <마리 이야기>가 앙시애니메이션 페스티벌에서 수상하기도 하는 등 이제 조금씩 가시적인 성과를 내고 있지만 시장에서는 여전히 어려운 상황이다. 이것은 지원금 규모와 무관하게 하나의 매체가 성장하는 데 있어서는 충분한 시간과 지원, 상시적인 보호책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그런 점에서 볼 때 그 4천억 원은 절대 스크린쿼터의 대안이 될 수 없다.
이용관 아주 중요한 지적이다. 4천억 원이라고 하면 뭔가 대단한 지원을 하고 엄청난 대비책을 세운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얼마 되지 않는 돈이다. 중요한 것은 시스템인데 그게 없는 채로 받아먹으라는 거다. 기계는 없는데 느닷없이 기름을 주면서 잘 쓰라고 말하는 꼴이다.
민병록 댐을 열기 전에 둑을 공사해야 하는데 지금 둑을 공사 중인데 댐을 열겠다는 거다.
궁극의 목표, 최선의 대안은 무엇인가?
FILM2.0 2004년 이창동 전 문화관광부 장관이 “스크린쿼터 축소 조정과 변화에 대해 검토할 시점”이라며 스크린쿼터 일수를 한국영화 시장점유율에 따라 탄력적으로 운영하는 연동제를 제안하기도 했었다. 또한 일각에서는 스크린쿼터로는 국가 간 문화 종다양성은 보호될 수 있어도, 양극화로 치닫고 있는 한국영화의 문화 종다양성은 보호될 수 없다며 마이너리티쿼터를 제안하기도 한다. 이에 대한 생각은 어떤가?
이용관 그때 이창동 장관이 좋은 제안을 했다. 그런데 현행 유지하겠다고 공표한 정부가 왜 연동제를 택하지 않고 이렇게 일방적인 절반 축소를 감행했는지 의문이 들뿐이다. 일단 10일 줄여보고 1년 정도 경과 후 논의해서 되돌릴 수도 있고 하는 연동제를 안 하는 게 이해 안 된다. 타산지석이라고 1970년대부터 미국과 유럽이 이것 때문에 싸우고 있다. 지난해 유네스코에서 문화다양성 협약을 맺었던 이유가 역사적인 것인데 미국과 이스라엘만 반대하고 전 세계 148개국이 찬성한 문화협약을 왜 한국 정부만 무시하나?
지명혁 절반으로 축소하는 것은 자국영화의 문화적 정체성을 포기하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임계점이 무너지면 이를 회생시킬 수 없다. 대화와 타협을 참여정부 슬로건으로 내세웠던 사람이 게릴라식으로 진행했다는 데 분노한다. 그런 점에서 난 연동제에 찬성하지 않으며, 스크린쿼터는 현행대로 유지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민병록 스크린쿼터가 국내 영화의 다양성에 얼마나 기여했는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는 줄 알지만 비주류 영화, 독립영화, 예술영화도 산업이 안정적으로 유지돼야 발전할 수 있다. 일례로 전주국제영화제의 경우에 2004년 한국영화 출품 신청 편수가 218편이었다. 하지만 올해는 523편이나 출품됐다. 거의 두 배나 늘었다. 바로 단편영화, 독립영화 등의 출품작이 크게 늘었기 때문이다. 만약 스크린쿼터가 축소된다면 비주류 영화는 더욱 어려운 상황에 놓일 것이며 스크린쿼터가 모든 문화적 다양성을 보장하는 완결 무결한 제도는 아니더라도 비주류 영화를 포함한 한국영화 문화의 다양성에 어느 정도 기여했다고 본다.
이용관 한국영화산업과 함께 국내 국제영화제도 서로 주고받으며 성장했다. 아직까지는 시장에서 미미한 결과를 내고 있지만 아시아영화에 대한 관심을 이 정도로 끌어낸 것도 국제영화제가 문화 다양성에 기여한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영화제뿐만 아니라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선생으로서 한마디 하자면 학교에서 가르치는 게 영화 기술만은 아니다. 설사 기술자를 양성하더라도 학생들이 전망을 가질 수 있도록 가르쳐야 하는데 정부의 스크린쿼터 축소 방침은 학생들에게 할리우드 가서 영화 만들어라, 그런 말밖에 못 하는 선생을 만들고 있다. 우리나라 교육이 이래야 하는 건가? 참으로 암담하다.
심영섭 심리학과 영화를 같이 하는 입장에서 한국영화가 이렇게 발전하지 않았다면 내가 영화를 했을까 하는 의문이 있다. 하지만 결국 영화와 심리학을 결합해서 영화 치료라는 것을 하고 있고 그것이 굉장한 파워가 있다는 걸 확신하고 있다. 지금은 학문 간의 공존이 필요한 시점이다. 한국영화가 그런 시대와 기회를 열고 있다. 한국영화의 향방에 따라 미래 세대에서 무엇을 남길 것이냐 하는 문제가 달려 있다.
민병록 학계 차원에서 공청회를 추진하고 성명서 발표 등도 준비해야 한다. 영화학계뿐만 아니라 지식인층의 공론을 끌어내야 할 것 같다. 이제 시간이 많지 않다. 어서 힘과 지혜를 모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