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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머리말
칼 포퍼의 '문화적 틀'의 대립
-칼 포퍼는, 각 문화는 그것 없이는 독자적 문화로서 자기를 유지할 수 없는 구조적 틀을 본래부터 갖고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 틀은 사고, 감정, 행동에 대한 몇 가지 중요한 범주로 구성된 내적 구조체이며 그것이 그 문화의 성원들이 사물을 생각하는 방식, 느끼는 방식, 행동하는 방식을 미리 결정한다고 했다. 또한 그렇기 때문에 당연히
이 문화적 틀이 제시하는 범주적 결정선에서 벗어나는 것은 그 문화 공동체에 속한 사람들에게는 매우 곤란한 아니 차라리 불가능한 일이며, 만약 감히 그런 사람이 있다면 즉각 그 문화에서 소외당하고 이방인 취급을 당하며 심한 경우에는 반역자로 간주돼 처단당하기도 한다고 했다.
문화적 틀 사이에 토머스 쿤Thomas S. Kuhn이 말한 ‘불가공약성不可共約性'이 필연적으로 성립하는 이상, 좁은 세계 공간 안에 수없이 많은 다른 문화가 공존한다는 사실이 인간 존재를 얼마만큼 심각한 위기로 이끌어갈 것인가는
상상조차 할 수 없을 정도이다.
제1장 종교
1. 이슬람교는 사막의 종교가 아니라 상업도시의 종교다
사막인沙人'이라 함은, 구체적으로는 한 장소
에 정주하지 않고 아득한 사막을 끊임없이 이동하면서 유목 생활을 하는 이른바 베두인 Bedouin족을 가리키는 것인데, 이슬람을 일으킨 예언자 무함마드(마호메트라고도 하지만 무함마드가 정확한 발음이다)는 붓다가 불교의 시조, 예수가 기독교의 시조인 것과 같은 의미에서 이슬람교의 시조이지만, 이 사람은 결코 지금 말한 것과 같은 '사막인'이 아니었다. 그는 상인이었다. 메카와 메디나(정확하게 발음하면 맛카
Makka)와 마디나Madinah)라는 당시 아라비아 제일의 국제 상업 도시에서 활약한 상인이며, 다방면에서 상업적 재능을 발휘한 사람이었다. 같은 아라비아인이라 하더라도 사막 유목민과 도시 상인은 사고방식, 생활 감정, 생활 원리가 전혀 다르다. 예언자 무함마드는 사막인이기는커녕 사막인이 가장 소중히 여긴사막인의 가치 체계에 정면으로 충돌하고 대항하며 그것과 격렬하게 투쟁해 이슬람이라는 종교를 구축한 사람이다.
예언자 무함마드는 전형적인 유목 부족인 베두인에
대해 참으로 뿌리 깊은 불신을 품고 있었다. "아무리
람을 수용하고 형식적으로 교도가 됐더라도 그들을 쉽게믿어서는 안 된다"며 그는 자기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늘 경고했다. '여차하면 언제라도 태도를 바꿔 우리를 배반할 인간'이라는 것이다. "너희(이슬람교도) 주변에 있는 베두인들 가운데에는 겉으로만 신자처럼 보이는 자들이 많다"
고 코란은 분명하게 말한다(9장 102절/401절), 또한 "사막의유목민은 다른 아랍 민족보다 무신앙과 위선이 훨씬 심하고, 게다가 신께서 사도(무함마드에게 계시로 내리신 율법을 이해하는 게 더디다"라는 구절도 있다(9장 98절/97절).
성전 『코란』이 상인의 언어, 상업용 표현으로 가득 차 있다는 사실도 매우 시사적이다. 인간이 이 세상에서 행하는 선하거나 악한 행위들을 '(돈)벌이'라고 생각한 것 등이 그 전형적인 예이다.
"---자기가 '벌어들인 것'이 화근이 돼 인간이 파멸될 수 있다는 사실을 모두가 알게 하라.---"(6:69:70)
"참으로 신은 (하늘의) 낙원이라는 대금을 치르고, 신자들에게서 그들의 몸과 재산을 모두 사들이셨다. 이것이야말로 율법(토라)과 복음과 코란에 분명하게 기록된 신의 계약, 신보다 더 계약을 충실히 이행하는 자가 어디에 있으리. 그렇다면 너희들, 그러한 분을 상대로 이 거래를 맺은 것을 감사하게 생각하라. 참으로 더할 나위 없는 복이
아닌가?(9:111)
"누군가 신에게 멋지게 돈을 빌려줄 자는 없는가? 나중에 그것을 몇 배로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신은 그 손을 오드리는 것도 펴는 것도 마음대로 하신다."
(2:246/245)
"하나하나의 혼이 각기 제가 (현세에서) 벌어들인 만큼 착실히 지불을 받으며, 부당하게 받는 일 따위 전혀 없는 그 날.(3:24/25)
"(이 세상에서 신앙을 등진 사람들은) 신께서 모처럼 이끌어주신 것을 날려버리고, 그 대금으로 미망을 사들인 사람들. 하지만 그들도 이 장사에서는 손해를 보았다. 예측이 완전히 빗나가 돈벌이를 놓쳤다.(2:15)
2. 이슬람문화의 복합적 국제적 성격
밝고 지성적인 고전 그리스의 정신적 유산은 물론이고, 거기에 헬레니즘 특유의 어둡고 그윽한 문화의 저류를 이뤘던 그노시스 주의, 헤르메스 주의, 신플라톤주의 등 비교적秘敎的esoteric인 조류가 한꺼번에 흘러들어와 이슬람 문화의 지중해적 성격이라고 부를 만한 것이 형성된다.
또한 이슬람 문화는 이란에서는 옛날부터 있었던 조로아스터교의 '빛과 어둠의 이원론', 인도에서는 저 태고부터 내려온 오랜 전통과 복잡한 구조를 지닌 바라문 문화,그리고 인도 서북부와 중앙아시아에서는 대승불교와 만난다. 더구나 아라비아반도에서 처음 탄생한 순간부터 이슬람은 기독교, 유대교와 밀접한(우호적인 혹은 적대적인)관계가 있었다.
3. 이슬람문화를 대표하는 아립인과 이란인의 대조적 문화
그 세계관, 인생관을 비롯해 존재 감각, 사유 형식 등 아랍과 이란 사람은 정반대 성격을 보이는 경우가 많다. 아랍을 대표하는 수니파(소위 정통파) 이슬람과 이란을 대표하는 시아파 이슬람은 그 둘이 같은 이슬람이라는 것이 의심스러울 만큼 근본적으로 다르다.
4. 하나의 공동체 의식-코란과 하디스 중심
이슬람 문화는 이렇게 복잡하고 다양한 요소를 포함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전 세계의 이슬람교도는 자신들이 하나의 공동체라는 자각을 갖고 있다. 그리고 사실,객관적으로 이슬람은 하나이다. 얼핏 보면 잡다한 요소의 집합체처럼 보이는 이슬람 문화를 하나의 유기적 문화 구조체로 만들어주는 무엇인가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슬
람 문화를 궁극적으로 하나의 문화로 만드는 통일 요소야말로 종교로서 혹은 신앙으로서의 이슬람이며, 그 밑바탕에서 모든 것을 통일하고 있는 단 한 권의 책이 바로 코란』이다.
성전 『코란』, 예언자 무함마드가 신의 계시를 받아 신의 말을 기록해 성립됐다는 한 권의 책이다. 무릇 이슬람적인 것 모두가 이 한곳에 집약되고 모든 것이 이 한 점에서 출발하는, 말 그대로 이슬람의 원점이다.
이것과 더불어 예언자 무함마드의 언행록인 하다스가 있는데 사실상 제2의 성전이다.
5. 성과 속의 일치
존재 전체를 몽땅 그대로 종교적 세계로 보았다. 만약 그래도 여전히 성과 속을 구분해서 말하고 싶다면, 이슬람이 보는 세계는 '성스러운 것'이 일체에 스며든, 혹은 스며들어야만 하는 세
계로 묘사할 도리밖에 없겠다.
6.영원불변하는 순정의 종교, 아브라함의 종교
이렇게 이제까지 지상에 나타난 예언자는 '영원의 종교를 대표하는 자로서 모두 같은 자격을 갖고 있다고 말한다. 또한 「코란』에 따르면, '영원의 종교'가 한 점의 불순물도 섞이지 않은 순수한 일신교로 실현된 것은 아브라함 시대라고 한다. 신이 세계를 창조한 이래 인류에게 나타난 모든 예언자 가운데 아브라함이야말로 순수한 일신교도
로서 유대교도도 아니고 기독교도도 아닌, 절대적 일신교의 정신 그 자체를 체현한 자였다.
그 뒤 모세는 유대교로서, 다음에 예수는 기독교로서 '영원의 종교'를 두 가지 다른 역사적 형태로 실현시켰지만, 이슬람의 입장에서 본다면 안타깝게도 이 두 가지 종교는 저 '영원의 종교'를 원래의 순정한 형태대로 보존하지 못했다. 그것을 무함마드가 나타나서 원래의 본원적인 모습으로 되돌리려 했다는 것이다. 그것이 무함마드가 구상했던 이슬람의 존재 방식이므로,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이슬람은 결코 새로운 종교가 아니었다. 신흥 종교가 아니라 오히려 옛 종교, 영원한 옛 종교였다. 유대교와 기독교가 왜곡한 것을 전부 원래대로 되돌려 '아브라함의 종교'를 근원적이고 형이상적인 이념에 가장 가까운 순정한
형태로, 참으로 아브라함적인 모습으로 다시 세우려는 것이었다.
"너희들이슬람교도들)이 외는 말, “우리들은 유일하고 절대적인 신(알라)을 믿습니다. 우리에게 계시된 것을 믿고, 아브라함과 이스마엘과 야곱과 이스라엘 열두 지파에게 계시된 것을 믿으며, 모세와 예수에게 준 것, 또한 모든 예언자들에게 신이 내려주신 것을 믿습니다. 예언자들 사이에 차별을 두지 않습니다. 우리는 신(알라)에게 귀의합니다."(코란 2:130/136)
"진정 아브라함은 유대교도도 아니며 기독교도도 아니었다. 그야말로 절대적 일신교를 믿은 사람, 순정한 신앙으로 산 사람이었다. 우상을 숭배한 부류가 아니었다.(3:60/67)
“너희들도 유대교도가 되어라. 기독교도가 되어라. 그러면 바른 길로 갈 것이리라"라고(유대교도나 기독교도가) 너희들(이슬람교도)에게 말한다. 대답해주어라. “우리들은 아브라함의 교의敎義를 택할 것이다. 그야말로 절대적 일신교를 믿은 사람이었다. 우상을 숭배한 부류가 아니었다.”
(2:129/135)
7. 신의 속성
ㅇ 인격신
코란에 그려진 신의 이름은 아시다시피 알라이다
원래 일반적으로 신을 의미하는 ilah라는 말에 정관사 이용 덧붙인 alilah라는 말인데, 발음상 줄어들어 allah가 된 것이다. 영어의 the god에 해당된다. 그러나 실제로 그 의미하는 바는 엄청나게 복잡하고 심원해질 수 있는 말이다.
이슬람의 신 알라는 무엇보다도 우선 살아 있는 인격신으로 자신을 드러낸다. '아브라함의 신, 이삭의 신, 야곱의 신'은 실상 인간이 그것과 나. 너의 인격적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신이지 철학자의 신은 아니다. 형이상적 절대자가 아닌 것이다. 고대 인도의 범梵(브라만, 존재의 비인격적이
며 순수한 형이상적 근원으로서 절대적으로 실재하는 것) 같은 것과는 전혀 다른, 오히려 기독교나 유대교의 신과 같은 인격신이다. 이 살아 있는 인격신은 앞서 말한 대로 인간의 입장에
서 보면 무한히 먼 초월적 신이지만, 신의 입장에서 보면 또한 인간에게 무한히 가까운 신, '사람 각자의 목에 있는 혈관보다 더 가까운(『코란』 50장 15절/16절), 내재신內在神이기도 하다. 초월과 내재, 이러한 모순되는 성격을 갖고 인간과 관계하는 신이다. 또 그러한 모순되는 성격을 지닌 신이기 때문에 인간은 신앙을 통해서만 그와 인격적 관계에 들어갈 수 있다.
ㅇ 절대적 권력의 신- 신은 주인, 인간은 노예
기독교와는 다르게 이슬람에서는 신과 인간의
'친밀함은 부자 관계의 살가운 친밀함과 다르다고 생각한다. 이슬람에서는 누구도 신을 향해 "하늘에 계신 아버지"라고 하지 않는다. 신은 아버지가 아니며 또한 어떠한 의미에서도, 설령 비유에서라도 인간은 신의 아들이 될 수없다. 인격적 관계라 하더라도 신은 어디까지나 주rabb,주인, 절대적 권력을 지닌 지배자이다. 그리고 인간은 그의 노예abd이다. 신과 인간의 인격관계는 어디까지나 주인과 노예의 관계인 것이다
이슬람islam이라는 말부터 아라비아어의 어원을 따져보면 '자기를 내맡김, 넘겨줌, 일체를 상대에게 맡기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슬람은 종교적으로 '절대 귀의' 이외의 다른 것이 될 수 없다. 그러므로 보통 이슬람 신자, 이슬람교도라는 의미로 쓰이는 '무슬림muslim'도 그 본래의 의미는 '절대 귀의자', 제 모든 것을 신에게 내맡긴 사람을 의미한다. 자기 자신의 의지나 의욕을 남김없이 버리고 모든 것을 신의 뜻에 맡겨 신이 어떻게 취급하는 감히 제 호오好를 묻지 않는, 무조건적으로 신에게 귀의하고 의 존하는 태도를 언제 어디서나 견지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ㅇ 삼위일체의 부정
"마리아의 아들 메시아는 단지 사도에 불과하다. 그 이전에도 사도는 몇 명이나 세상에 나타났었다. 또한 그의 어머니도 평범한, 매우 정직한 여자에 지나지 않았다. 어머니와 아들 모두 밥을 먹는 사람이었다.
(5:79/75)
‘밥을 먹는 사람' 혹은 '밥을 먹고, 시장을 걷는 사람'이라는 말은 그 무렵 흔히 사용했던 표현으로, 초자연적인 것을 전혀 갖지 않은 사람, 신이나 천사의 요소가 없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말할 것도 없이 이러한 예수관 때문에 이슬람과 기독교는 첨예하게 대립했다. 이슬람의 철저한 절대 일신교적 성격은 이러한 형태로도 나타난다.
ㅇ 신의 전능성과 인간의 무능성
-시간적/공간적 불연속적 세계(사물의 비인과성), 비인과론적 세계, 신의 절대적 개입, 인간의 절대적 무능성
"진정 알라야말로 너희들의 주이다. 하늘과 땅을 엿새 만에 만드시고 권좌에 올라, 낮을 밤으로 덮으시고 밤은 낮을 쉼 없이 좋게 하신다. 태양과 달과 별들도 그분이 말씀하신 대로다.
아, 참으로 창조하는 일과 만유를 지배하는 일이 알라의 것이 아니고 무엇이랴. 찬양하라, 만유의 주 알라께."(7:52/54)
신은 세계를 한번 창조하고 그 뒤는 일이 돌아가는 대로 내맡기는 것이 아니라 그 이후로도 줄곧, 지
금도 여전히 모든 존재를 엄격히 관리하고 지배하는 주재자이다. 존재하는 모든 것의 절대적 관리자로서 신은 세계 역사의 흐름에 시시각각 개입한다. 더 심하게 말하자면, 신이 세계에 개입해 벌어지는 것이 바로 역사이다.
지금 이 순간의 상태를 바로 이전 순간과 비교해보면 그 사이에는 절대적인 단절이 존재한다.
지금 이 순간을 바로 다음 순간과 비교해도 그 사이에는 어떠한 내적 연관도 없다. 이전과 이후가 단절돼 있는 것이다.철학적으로는 이러한 방식을 '비연속적 존재관'이라 부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존재의 근원적 비연속성이며, 물론 시간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라 공간적으로도 세계는 서로 내적으로 이어지지 않은 뿔뿔이 흩어진 단위, 즉 원자들이 모여 있는 거대한 집합으로 표현할 수 있다. 이것이 보통 이슬람의 아토미즘, 원자론적 존재론이라 부르는 것인데, 이렇게 세계에 존재하는 일체의 사물이 시간적, 공간적으로 따로따로 존재하며 더구나 그들 개별적 사물 하나하나가 그 자체로 다수의 나눌 수 없는 미립자, 즉 원자의 조합으로 성립돼 있다. 그들 9미립자는 절대로 서로 융합되지 않는다. 미립자 상호 간에도, 그들 미립자가 모여 생겨난 사물 사이에서도 어떠한 내적 연결도 없다. 다만 우연히 늘어선 채로 존재할 뿐이다.
그렇다면 결국 우리의 경험적 세계는 인과율이 성립되지 않는 세계라는 말이 된다. 이 세계에는 인과관계로 내적으로 연결된 것은 단 하나도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그렇기 때문에 신의 전능함이 절대적인 형태로 성립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본래 인과율이라는 것은 원인이 있고 결과가 있다. 원인이 되는 어떤 종류의 창조적 힘이 있어서 자기에게 내재하는 그 힘이 작동해 결과에 해당되는 것을 제 안에서 만들어내는 것이므로, 인과율을 인정하면 그만큼 신의 창조 능력이 줄게 된다. 신에게 의지하지 않고도 사물이 각각 제 나름으로 작동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물에게 제 자신의 힘이 있고 그것이 독립해서 작동한다면, 신은 무조건
전능한 것이 아니며 세계는 신의 절대 자유 공간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토미즘에서는 일체의 사물 그 자체는 완전히 무력한 것으로 본다. 제 자신의 존재에 관해서조차 완전히 무력한 사물이 있고서야 신의 의지가 자유자재로 작동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지금 여기에서는 일반적 이론으로 '사물'이라든가 '것'이라는 말을 썼지만, 그 범위를 '인간'으로 한정할 경우는 매우 커진다. 행동에 대해서도 존재에 대해서도 인간은 완전히 무력하다. 제 힘으로는 무엇 하나 할 수 없다.
인간이 그렇게 절대적으로 무력한 존재여야 비로소 절대적으로 유력한 신에게 진정한 의미에서 무조건적으로 '노예'일 수 있다. 이것이 아토미즘의 전형적인 인간관이다.
순수하게 종교적으로는 타력 신앙의 극한적 상태라고 생각하면 그만이지만, 그래서는 인간의 자유의지가 완전히 부정된다. 이것은 중대한 윤리적 문제이다. 인간의 윤리성뿐만 아니라 신의 윤리성마저 위험해질 수 있다. 왜냐하면 만약 인간이 완전히 무력하고 자유의지가 없는 존재라면, 그런 인간이 악을 행하고 죄를 범하는 것도 그의 책임이 아니며 모든 것은 신의 책임으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스스로는 전혀 악을 행할 능력이 없는 인간을 강제적으로 악을 행하게 하고 더구나 벌까지 내리는 것은 아무래도 너무 심한 처사다. 신의 윤리의 근본 원리인 정의가 성립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과연 이 문제는 초기 이슬람 신학에서 일대 논쟁을 불러일으키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