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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의 등장을 계기로 프랑스의 혁명전쟁은 소극적 방어에서 적극적 침략으로 궤도를 선회한다.
자신감을 찾은 총재정부는 이참에 영국의 인도 무역로를 차단하기로 마음먹었다.
비록 대서양 항로가 개척된 이래로 많이 위축되기는 했어도 여전히 지중해 무역은 중요했다.
총재정부가 노린 곳은 지중해 무역의 거점인 이집트였다.
1798년 프랑스 정부는 나폴레옹을 사령관으로 삼아 이집트 원정군을 파견했다.
그러나 이미 프랑스의 모든 행동은 유럽 전체에 ‘경보’를 발하는 상황이었다.
당시 동부 지중해 진출을 최대의 목표로 삼고 있던 러시아를 비롯해
오스만 제국, 포르투갈, 시칠리아 등이 일제히 영국 측에 가담해 대프랑스 동맹을 맺었다
(종교적으로 프로테스탄티즘, 가톨릭, 동방정교, 이슬람교 국가 들이 섞여 있었다는 것은
그 무렵이면 종교가 국제 관계에서 전혀 고려 대상이 되지 않았음을 말해준다).
그러나 총재정부로서 더 중요한 사실은 나폴레옹의 마음이 콩밭에 가 있었다는 점이다.
1년이 넘도록 이집트에서 영국군과 악전고투를 벌인 프랑스군의 나폴레옹은 1799년 10월 군대를 이집트에 남겨둔 채
단신으로 귀국했다.
이집트 원정은 초기에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1798년 8월 나폴레옹은 나일 강 전투에서 참패를 당하고 점차 영국에 밀리기 시작했다.
전황이 불리해지자 단신 귀국을 결정한 것이니 ‘영웅’ 나폴레옹의 모습은 아니다.
나일 강 전투에서 영국 측 지휘관은 바로 호레이쇼 넬슨이었는데,
7년 뒤 트라팔가르 해전에서 나폴레옹은 또다시 넬슨에게 패해 실각하고 만다.
그를 환영한 것은 그의 명성을 이용해 총재정부를 타도하려는 세력과 그들이 모아둔 군대였다.
군대를 거느리고 파리에 온 나폴레옹은 11월 9일 자코뱅파의 준동을 방지한다는 구실로 총재정부의 지도자들을 감금했다.
그 이튿날 그는 정부의 해체를 공식적으로 선언하고 헌법을 개정한 뒤 스스로 통령이 되어 통령정부를 새로 열었다.
1799년 11월 9일은 공화력으로 안개의 달, 즉 브뤼메르 18일이었기에 이 사건을 브뤼메르 쿠데타라고 부른다.
프랑스 혁명은 이미 테르미도르의 반동으로 사실상 끝난 것이었지만,
그나마 혁명의 흔적이라도 유지하던 총재정부마저 무너짐으로써 혁명은 완전히 물거품이 되었다.
무엇보다 애초에 혁명 세력이 목표로 했고 또 한동안 실현한 공화제가 끝장났기 때문이다.
흔히 프랑스 혁명의 의의를 인권의 신장이라든가 자유ㆍ평등ㆍ박애의 정신을 유럽에 확산시켰다는 등으로 말하지만,
그건 후대의 역사가들이 살을 덧붙여 말하는 것일 뿐이고 실은 그보다 단순했다.
혁명의 목표는, 국내적으로는 공화제를 이룩하는 것이었고, 국제적으로는 한동안 뒤처진 프랑스를
유럽 국제사회의 핵심으로 다시 복원하려는 것이었다.
후자는 나폴레옹이 한때나마 실현하지만 공화제는 나폴레옹이 무너뜨렸으므로,
프랑스 혁명은 나폴레옹의 등장으로 물거품이 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결국 프랑스 혁명은 죽을 쒀서 나폴레옹에게 준 격이 되어 버렸다.
▲ 이집트 원정의 성과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에는 군대만이 아니라 많은 학자도 수행했다.
왼쪽은 그들이 발견한 로제타석이고, 오른쪽은 이집트 유적을 조사하는 프랑스 학자들이다. 고대 이집트 문자의 해독에 결정적인 열쇠가 된 로제타석은 프랑스로 운송되었다가 나폴레옹 전쟁 때 영국으로 넘겨져 현재 대영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학자들의 연구 성과로 이후 유럽에는 이집트학이 크게 발달했으며, 이는 19세기의 오리엔탈리즘(서양의 동양 연구)으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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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원정은 프랑스 공화국의 승리로 일단락되었습니다.
이번 전쟁으로 나폴레옹이 얻은 것은 인기뿐만이 아니었습니다.
나폴레옹과 그의 부대는 이탈리아에서 엄청난 약탈 행위를 자행했습니다.
부관들의 약탈도 묵인한 나폴레옹은
그 노력의 결실로 이탈리아의 수많은 예술품과 재물을 얻게 되었고
이렇게 얻은 재물의 일부를 고위층에 뇌물로 보내며
자신의 입지를 강화하는 데 사용했습니다.
나폴레옹의 인기가 높아질수록 총재들은 그를 경계했습니다.
총재정부는 나폴레옹에게 영국 공격을 지시했으나
나폴레옹이 이를 무모한 작전이라며 거부하자 둘의 갈등은 더 커져갔습니다.
프랑스 다섯 명의 총재
총재들과 나폴레옹의 관계가 나빠지자
이를 중재하려 했던 외교관 탈레랑이 나폴레옹과 총재정부에 이집트 원정을 제안합니다.
샤를 모리스 드 탈레랑 페리 고르 (1754 - 1838)
당시 영국은 인도에 식민지를 가지고 있었는데
이집트를 정복하여 영국의 무역로를 압박하자는 것이 명분이었습니다.
총재정부는 나폴레옹이 프랑스를 떠난다는 사실에 이 계획을 수락합니다.
당시 이탈리아 원정의 성공으로 자신감이 하늘을 찔렀던 나폴레옹은
이번 전쟁이 또 한 번의 영광을 가져다줄 거라 확신하며 이를 받아들였습니다.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군에는
이탈리아 원정에서 활약을 펼친 부관들이 다수 포함되었습니다.
그중 루이 알렉상드르 베르티에는
이탈리아 전쟁에서 나폴레옹의 참모가 되어 뛰어난 활약을 펼쳤습니다.
베르티에는 직접 부대를 맡아 지휘하진 않았지만
후방에서 참모직을 수행하며 이후 나폴레옹 전쟁의 일등공신이 되었습니다.
루이 알렉상드르 베르티에 (1753 - 1815)
이번 원정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영국의 해군이었습니다.
그중에서도 호레이쇼 넬슨 제독이 이끄는 영국 함대는
당대 유럽 최강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었습니다.
호레이쇼 넬슨 (1758 - 1805)
나폴레옹은 영국이 아일랜드에서 일어난 대규모 반란 때문에
자신들에게 신경을 쓰지 못할 것으로 예상했습니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영국의 첩보원들은 프랑스의 움직임을 지켜보고 있었고
첩보를 입수한 영국의 수상 윌리엄 피트는 넬슨의 함대를 지중해로 파견합니다.
3만 8천 명의 육군을 태운 300척의 프랑스 수송선이 툴롱에서 출발했고
13척의 전열함이 이를 호위하고 있었습니다.
윌리엄 피트 (1759 - 1806)
사전에 프랑스 군의 출항 날짜를 입수한 넬슨이 함대를 이동시켰습니다.
하지만 프랑스는 기상악화로 인해 예정된 날짜보다 이틀이 지난 뒤에 출발하게 되었고
의도치 않게 넬슨을 따돌리는데 성공합니다.
몰타를 점령한 프랑스는 보급기지를 구축한 뒤 다시 이집트로 출발합니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알아차린 넬슨은
프랑스 함대가 알렉산드리아 해변에 상륙할 것이라 예상하고
전속력으로 이동하여 그곳에 미리 대기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정작 프랑스 함대는 크레타 섬을 경유한 뒤 알렉산드리아로 향했습니다.
한참을 기다려도 프랑스 함대가 보이지 않자 넬슨은 함대를 북진시켜 수색작전을 펼쳤는데
넬슨이 떠나고 얼마 뒤에 프랑스 함대가 알렉산드리아 해변에 도착했습니다.
모든 상황이 프랑스 쪽으로 유리하게 돌아갔고
이것은 마치 하늘이 나폴레옹을 돕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습니다.
이렇게 수많은 우연히 거쳐 상륙에 성공한 프랑스 군은
알렉산드리아에서 13킬로미터 떨어진 마라부 해변에 상륙했습니다.
나폴레옹은 전군이 상륙하기를 기다리지 않고
정예부대 5천 명으로 알렉산드리아를 기습공격합니다.
프랑스 선봉대가 도시 외곽을 점령하는데 성공했습니다.
이어서 클레베르의 부대가 도시의 나머지 입구를 장악합니다.
오전 8시부터 시작된 격렬한 전투는 정오가 되어서야 끝이 났고
마침내 알렉산드리아가 프랑스 군에 의해 함락됩니다.
부대를 정비한 나폴레옹은 클레베르에게 수비를 맡긴 뒤
주력부대를 이끌고 카이로로 진군합니다.
장 바티스트 클레베르 (1753 - 1800)
카이로로 진군하던 프랑스 군은
이집트의 기후와 보급 부족으로 인해 많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나폴레옹이 이러한 문제점을 예상하지 못하고 미리 준비를 못 했던 건지는 알 수 없지만
프랑스의 부족했던 전쟁 준비는 이집트 원정 내내 프랑스 군의 발목을 붙잡게 됩니다.
1798년 7월 21일. 카이로 인근에서 프랑스 군과 이집트 군대가 마주쳤습니다.
이집트 군대를 이끄는 지휘관은 무라드와 이브라힘 장군이었습니다.
무라드 베이 (1750 - 1801)
적군을 발견한 나폴레옹이 2만 5천 명의 보병을 직사각형의 방진으로 포진시킨 뒤
병사들의 앞으로 나아가 일장 연설을 시작했습니다.
양군의 병력 수는 비슷했지만 기술력과 훈련도는 프랑스군이 월등히 앞서고 있었습니다.
프랑스 군이 이집트의 우측으로 이동하려 하자
무라드 장군이 맘루크 기병대를 출격시켰습니다.
맘루크 기병
사전에 나폴레옹에게 지시를 받은 드제와 레니에는
다가오는 기병을 무시한 채 이집트 본진을 공격했습니다.
루이 샤를 앙투안 드제 (1768 - 1800)
이집트 기병대는 보병 방진으로 포진한 프랑스의 본 대로 돌격했습니다.
이를 기다리고 있던 프랑스 보병들은
적의 기병들이 바로 앞까지 다가오길 기다렸다가 일제히 사격을 개시했습니다.
이집트 기병은 이 사격에 속절없이 쓰러졌습니다.
그러나 용맹한 맘루크 기병들은 이에 굴하지 않고 계속해서 돌격을 이어갔지만
기병만으로 이뤄진 단독 돌격은 프랑스에 큰 위협이 되지 않았고
보병 방진을 뚫지 못한 채 방진 사이를 헤매던 맘루크 기병들은
프랑스 보병들의 사냥감에 불과했습니다.
결국 사기가 떨어진 이집트 기병대가 퇴각하게 되는데
후퇴를 하는 도중 전투 중이었던 아군인 이집트의 보병대 사이로 난입했기 때문에
부대의 진형이 무너졌고 이 기회를 포착한 프랑스 2개 사단의 공격에
이집트 군은 한순간에 무너져 버립니다.
이때 퇴로가 막힌 수많은 이집트 병사들이 물에 빠져 익사했다고 합니다.
훗날 피라미드 전투라고 불린 이 싸움에서 나폴레옹은
이집트 군을 완파하며 카이로를 함락시킵니다.
한편 나폴레옹이 이집트를 활보하는 사이
넬슨은 유령처럼 사라진 프랑스 함대를 수색하며 지중해를 떠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프랑스 함대가 이미 상륙했다는 정보를 뒤늦게 입수한 넬슨은
급히 이집트 해안으로 이동합니다.
1798년 8월 1일. 아부키르만에 정박해 있던 프랑스 함대의 시야에
넬슨이 이끄는 영국 해군이 포착되었습니다.
전열함과 대포의 숫자 모두 프랑스 해군이 앞서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프랑스 해군은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하는데
해안포대의 지원사격을 받으며 싸울 수 있었음에도
굳이 앞으로 나가 넬슨과 맞서 싸운 것입니다
두 함대가 대치한 시각은 새벽 2시. 짙은 어둠이 아부키르 만을 뒤덮고 있었습니다.
프랑스 해군은 날이 밝은 뒤 전투가 시작될 거라 예상하고
최소한의 경계만 취한 후 병사들을 휴식시켰습니다.
하지만 넬슨은 시간을 끌 생각이 전혀 없었습니다.
아부키르만의 옅은 여울을 통과한 영국 해군이 프랑스 해군의 측면을 기습공격했습니다.
동시에 영국 전열함의 대포가 일제히 불을 내뿜었습니다.
이 포격으로 프랑스의 기함 '르 오리앙'이 불타 올랐고
이내 거대한 폭발음과 함께 산산조각이 나버렸습니다.
1천 명의 프랑스 선원은 공중으로 산화하였고
프랑스 해군은 양쪽에서 거세게 들어오는 영국 해군의 공격을 버티지 못했습니다.
결국 이 한 번의 전투로 프랑스 함대는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받게 되었습니다.
나일강 해전으로 불리는 이 전투는 프랑스에 넬슨의 무서움을 다시 한번 알려주었으며
또한 피라미드 전투의 대승으로 프랑스에 유리했던 전황을
한순간에 뒤엎은 사건이었습니다
해군을 잃은 프랑스 군은 이제 이집트에 고립된 처지가 되었고
이 소식을 접한 나폴레옹의 머리가 복잡하게 돌아가기 시작했습니다.
나폴레옹은 이집트를 완전히 장악하기 위해 남아있던 이집트의 군대를 추격합니다.
하지만 프랑스 육군의 위력을 직접 경험한 이집트 군은
나폴레옹 본대와의 정면 싸움을 피하며
흩어져있던 프랑스의 수비군을 집요하게 공격합니다.
나폴레옹은 드제에게 명령하여 이집트군을 수색해 섬멸하라고 지시합니다.
9월 9일. 상황을 관망하던 오스만 제국이
나일강 해전의 소식을 듣고는 프랑스에 선전포고를 합니다.
다음 달에는 카이로에서 이집트 시민들의 대규모 봉기가 일어나는데
프랑스 군대가 이를 무참히 진압하면서 민심도 프랑스를 떠나고 있었습니다.
이제 아랍인들에게 프랑스군은 맘루크의 지배를 벗어나게 해줄 구원자가 아니라
단순한 침략자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오스만제국의 군대를 저지하기 위해 나폴레옹은 시리아로 진군합니다.
나폴레옹이 이끄는 군은 엘아리시와 가자를 함락시키는데 성공하지만
이 과정에서 많은 피해를 받게 됩니다.
더 이상의 피해를 원하지 않았던 나폴레옹은
야파를 포위한 뒤 수비군에게 항복을 권유합니다.
목숨을 살려주기로 약속받은 (2022 현재 이스라엘의 텔아비브) 아파의 수비군이 결국 투항하는데
나폴레옹은 약속을 어기고 아파의 수비군은 물론 주민들까지 처형시킵니다.
이때 프랑스 군은 탄약을 아끼기 위해
포로들을 총검으로 찔러 죽이거나 바다에 빠뜨려 익사시켰다고 합니다.
그리고 야파에 주둔한지 얼마 뒤 프랑스 군에 페스트가 창궐합니다.
이때 나폴레옹이 페스트에 걸린 병사들을 방치했다는 비판을 받았는데
이러한 여론을 무마하기 위해 나폴레옹은
자신이 페스트에 걸린 병사들을 돌보는 그림을 화가들에게 그리게 합니다
많은 전력을 상실한 나폴레옹의 다음 목표는 아크레였습니다.
아크레에는 수비 병력이 거의 없었기에 나폴레옹은 쉬운 승리를 예상했습니다.
하지만 시드니 스미스 제독이 이끄는영국 해군이 한발 먼저 도착하여
수비를 굳히고 있는 상태였습니다
나폴레옹은 나일강에 이어서 다시 한번 영국에 발목을 잡혀버린 것입니다.
계속되는 전투로 인해 대부분의 공성포를 잃은 프랑스군은
공성전에서 많은 피해를 받습니다.
아크레의 거센 저항에 부딪혀 시간이 흐르는 사이
다마스쿠스에서 오스만제국의 군대가 접근해오고 있었습니다.
나폴레옹은 쥐노, 뮈라, 클레베르에게 소수의 부대를 주며
오스만 부대의 접근을 저지하라고 명령합니다.
그리고 쥐노가 이끄는 기병대가 나사렛 인근에서
적의 선봉 기병대를 격퇴시키는데 성공합니다
삼일 뒤에는 클레베르의 부대가 1500명으로 오스만군 6천 명에게 승리를 거두었고
조아생 뮈라는 절묘한 기병 돌격으로 오스만군 5천 명을 물리치는 활약을 펼칩니다.
계속되는 승리에 고무된 클레베르는
불과 2천 명으로 오스만 본대 2만 5천 명을 기습하지만
이 공격은 실패하고 오히려 적에게 포위당하게 됩니다.
상황이 불리해지자 나폴레옹이 결국 본대를 움직였습니다.
그는 전매특허인 빠른 기동으로 전장에 합류했고
나폴레옹에게 불의의 공격을 받은 오스만군은 결국 패주합니다.
오스만군을 물리치는데 성공한 나폴레옹이었지만
프랑스 군은 전투를 지속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결국 나폴레옹은 아크레를 포기하고 후방으로 퇴각합니다.
오스만제국은 기병대를 보내 퇴각하는 프랑스군의 후미를 공격하며
끊임없이 나폴레옹을 괴롭힙니다.
그렇게 초췌해진 프랑스 군이 카티아로 입성합니다.
4만 명에 달했던 프랑스 군은 이제 절반도 남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프랑스군의 패색이 짙어지던 이집트에서
유일하게 드제의 군대만이 홀로 승리를 거듭하고 있었습니다.
소탕 명령을 받은 드제는 불과 3천 명의 병사로 이집트군을 연달아 격파했습니다.
이러한 드제의 활약에도 불구하고 전황을 뒤집기에는
프랑스가 너무도 불리해진 상황이었습니다
아부키르만으로 무스타파 파샤가 이끄는 1만 5천 명의 오스만 군대와
스미스 제독의 영국 해군이 기습적으로 상륙했습니다.
아부키르를 수비하던 마르몽과 1300명의 수비대가 격렬하게 저항한 덕분에
나폴레옹은 탈출할 수 있는 시간을 벌 수 있었지만
끝내 항복한 아부키르 수비군에게 나폴레옹은 욕설을 퍼부었다고 합니다.
오스만군의 추격을 피해 나폴레옹은 북쪽의 알렉산드리아로 이동합니다.
오스만 제국은 이집트 군을 이끌고 있던 무라드 장군과
이동 중인 나폴레옹을 협공하기로 계획합니다.
하지만 무라드 장군이 합류하기 전에 뮈라의 기병대가 출격해 이를 격퇴시킵니다.
뮈라의 활약으로 나폴레옹의 부대는 무사히 알렉산드리아에 도착했습니다.
하지만 오스만군이 다가오고 있었고
나폴레옹의 곁에는 오직 6천 명의 병사만 남아있었습니다.
나폴레옹은 오스만군이 도시를 포위하기 전 선제공격을 결심합니다.
오스만군은 프랑스의 공격에 대비하여 세겹이나 되는 방어선을 구축합니다.
제1방어선은 양측 좌우 부대가 언덕에 포진하고 있었고
그렇기에 중앙은 좌우와 분리된 상황이었습니다.
란의 지원을 받은 뮈라의 기병대가 오스만군의 좌익을 공격했습니다.
우익의 오스만군을 뒤록 장군이 견제하는 동안
나폴레옹이 이끄는 주력군이 오스만군의 중앙군을 격파하며
오스만 군을 좌우로 분리시켜 버립니다.
결국 오스만군은 제1방어선을 포기하고 2선으로 퇴각합니다.
뮈라가 퇴각하는 오스만군을 끈질기게 추격하는 동안
좌우의 언덕을 점령한 란과 데스탱이 오스만 군을 향해 매서운 포격을 가했습니다.
제2전선 또한 붕괴되며 사기가 꺾인 오스만군은 후방으로 퇴각하는데
프랑스 군의 추격을 피하려 했던 오스만 병사 수천 명이 바다에 빠져 익사했다고 합니다.
나폴레옹은 제3 방어선도 점령하기 위해 공격을 지시합니다.
란의 부대가 좌측으로 이동하려 하자
오스만제국의 지휘관 무스타파가 5천 명의 병사와 함께 출격하는데
이를 뮈라의 기병대가 저지하며 양군이 격돌합니다.
뮈라는 전장 한가운데서 적 지휘관 무스타파를 발견하고는
기병도를 빼든 채 빠르게 돌격했습니다.
뮈라를 본 무스타파가 급히 권총을 꺼내 그의 얼굴에 발사하는데
간발의 차이로 총알이 뮈라의 얼굴 옆을 스쳐 지나갔습니
나폴레옹은 전투 중인 란과 뮈라의 부대에
적절한 순간 예비대를 보내주며 오스만군을 격퇴합니다.
이렇게 프랑스군이 오스만군의 측면을 포위하는 형세가 만들어졌습니다.
사방에서 프랑스군의 일제 공격이 시작되자 오스만군의 마지막 방어선도 무너지고
무스타파 장군과 오스만제국 최고의 정예 병력인
예니체리 1500명이 포로로 사로 잡혔다
최악의 상황에서도 나폴레옹은 기적적인 승리를 만들어 냈지만
그의 마음은 이미 이집트를 떠나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오스트리아를 포함한 유럽의 나라들이 프랑스를 재침공해 왔고
전세가 프랑스에 불리해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프랑스의 총재들이 나폴레옹을 견제하기 위해
불온한 움직임을 보인다는 첩보가 들어와 나폴레옹의 마음을 불안하게 만들었습니다.
1799년 8월 17일. 영국 함대가 사라졌다는 첩보를 입수한 나폴레옹은
소수의 측근들만 데리고 이집트를 탈출합니다.
이때 남은 프랑스 군의 지휘는 클레베르에게 맡겼는데
클레베르가 아침에 일어나니 나폴레옹과 다른 장군들은 이미 떠난 뒤였고
나폴레옹은 그에게 한 장의 편지를 남겨 인수인계를 했다고 합니다.
어이가 없어진 클레베르는 나폴레옹을 향해 욕설을 퍼부으며 저주했다고 합니다.
얼마 뒤 클레베르가 어느 무슬림의 손에 암살당하고
지휘관을 잃은 프랑스군은 결국 영국에 항복하고 맙니다.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은 결과적으로 실패했다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이탈리아 원정에서처럼 그는 우수한 지휘 실력을 보여주었지만
프랑스의 정예병 대부분이 무의미하게 손실되었고
오스만제국과 러시아를 적으로 돌리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집트에서 약탈한 재물도 결국 본국으로 가져가지 못하면서
군사적, 외교적, 경제적으로도 모두 실패한 전쟁으로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런 결과를 볼 때 이탈리아 원정으로 성공했던 나폴레옹이
다시 나락으로 떨어졌을 거라 예상하시겠지만
나폴레옹이 잘했던 것은 전쟁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이집트로 오기 전 나폴레옹은 파리에 자신의 선전 집단을 만들어 놓았고
이들은 이 전쟁의 결과가 시민들에게 알려지기 전 최대한 미화시키는 작업을 펼쳤으며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에 대한 여론을 긍정적으로 만드는 데 성공합니다.
병사들을 버리고 무사히 프랑스로 돌아온 나폴레옹은
이집트 전쟁의 실패를 만회하기 위해 특단의 결단을 내리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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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제타석 (Rosetta Stone)은 1799년 이집트 북부의 항구도시인 로제타에서 벽을 허무는 작업을 하던
나폴레옹 이집트 원정대의 공병대 장교 피에르 부샤르에 의해 발견되었다.
로제타 석은 가로 72cm, 세로 114cm, 두께 28cm인 현무암질 비석이다.
비문은 당시 이집트(프롤레마이오스 왕조; 그리스계 왕조)에서 쓰이던
상형문자(하이에로글리프;hieroglyph),
민중문자(데모틱;demotic),
헬라(그리스)문자 3가지 언어로 표기되었다.
로제타석은 기원전 196년 당시 즉위 1주년을 맞이한 13세의 파라오 프톨레마이오스(톨레미) 5세의 후원으로 제작되었다.
혼란스러운 국가의 질서를 바로잡고 왕권의 안정에 기여한 사제들에 대한 감사의 뜻을 표하기 위해
그들의 업적을 칭송하는 내용을 비석에 새겼다.
비문의 내용은 헬라( 그리스)어로도 기록되어 있어,
비석의 발견은 4세기 이후부터 잊혀진 상형문자를 해독하려는 학자들에게 큰 계기가 되었다.
(당시 언어 학자들은 헬라어(고대 그리스어)에 능통하였다)
장-프랑수아 상폴리옹(Jean-Franois Champollion, 1790-1832)
1815년 영국의 토마스 영은 타원형의 테두리 속의 상형문자가 파라오의 이름임을 알아내었다.
그리고 상형문자가 음절문자일지도 모른다는 가설을 세웠지만 해독에 더 이상 새로운 진전이 없었다.
그러나 1808년부터 비문의 사본을 구해 해독에 몰두한
프랑스의 샹폴리옹(10개 언어를 통달한 언어의 천재였으며,
당시 모교의 교수로 재직중이었다)은 오벨리스크의 비문 내용과
자신의 헬라(그리스)어와 콥트어(2세기부터 이집트의 크리스토교 사이에서 쓰이던 언어,
고대 이집트어에 바탕을 두고있다)
지식을 바탕으로 시행착오를 거치며 1822년 완전하게 해독하는데 성공하였다.
샹폴리옹의 연구 내용
로제타석의 비문을 분석하여 그리스문자 각각에 대응하는 민중문자, 상형문자를 밝혀내었다.
클레오파트라와 톨레미에 해당하는 상형문자
상형문자의 해독이 성공하자 유럽에서는 고대 이집트학이 크게 유행하기 시작하였다.
이후 많은 학자들이 앞다퉈 고대 이집트 역사를 연구하고, 유적들을 발굴하기 시작하였다.
이로써 오랫동안 베일에 가려진 고대 이집트 문명에 대한 많은 것을 밝혀내었다.
로제타석은 1801년 나폴레옹의 군대가 알렉산드리아에서의 전투에서 패배하자
그들이 발견한 많은 이집트 유물과 함께 영국군 손에 넘어갔다.
그리고 1802년부터 대영박물관에 보관, 전시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