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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장 혈우전(血雨箭)의 독계(毒計)
①
- 측천대전(測天大殿).
형산검파의 중심부에 위치한 이곳은 형산검파의 대소사(大小事)나 각종 의전을 집행하는 곳이다.
높디 높은 전당(殿堂)과 층층이 솟아 있는 관대(觀坮)와 자색의 격자창 주위로 단정한 회선(回線)무늬의 벽들이 서로 고색창연한 분위기를 뽐내고 있었다.
형산의 운명처럼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암흑에 둘러싸인 밤이었다.
측천대전에는 팔목 굵기의 황촉 수백 자루가 동시에 밝혀졌다. 촛불이 바람에 일렁일 때마다 구자명의 얼굴엔 근심스런 빛이 역력히 드러났다.
이 밤이 혈우전의 마지막 살인 시한이었다.
자주색 휘장이 형산의 위용을 자랑하듯 쳐져 있는 대전 한 가운데에 한 명의 금의를 입은 위엄있는 초로의 인물이 근심스러운 얼굴로 앉아 있었다.
바로 남악신검 구자명이었다.
그의 얼굴에는 초조한 기색이 얼굴 가득 고여 있었다. 주위에는 다섯 명의 중년인과 노년인이 역시 침중하고 피로한 안색으로 모여 있었다.
그들이 앉은 방위는 오행(五行)이었고, 오행의 중심부에는 구자명이 있었다. 무릎에는 모두 한 자루씩의 검이 언제라도 즉각 뽑을 자세로 놓여 있었다.
그들은 장문인인 구자겸을 마지막까지 보필하려는 결연한 의지와 언제 자신에게 닥칠지 모르는 죽음의 사신들을 경계하기 위해 절정의 오행검진을 펼치고 있었다.
"대체... 어찌된 일인가? 한 명도 모이지 않다니......!"구자명의 입에서 침중한 음성이 터져나왔다. 그 말에 오 인의 안색은 더욱 안절부절 못했다.
그들은 형산검파의 수뇌 인물들로서 남악오검(南嶽五劍)이었다. 삼검이 죽은 지금 오검밖에 남지 않은 것이었다. 구자명의 얼굴에는 더욱 짙은 그늘이 깔렸다.
"일곱째, 제자들에게 이곳으로 집결하라는 명을 전달했는가?"그 말에 수(水) 방위에 앉아 있던 청삼 중년인이 대답했다.
"분명히 전달했소이다, 장문사형."
"그런데 왜 아무도 모이지 않는 건가?"
"그... 글쎄올씨다."
그러다 그는 무엇인가를 깨달은 듯 낮게 앗! 하고 부르짖었다.
"그... 그러고 보니 이곳에 모인 우리들이야말로 놈들의 목표이겠군요?"그 말에 중인들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자신들이 스스로 적을 이롭게 만들어 준 꼴이 되고 만 것이다. 그들은 호신강기를 극성으로 끌어 올렸다.
육(六).
그들의 숫자는 육이며 혈우전이 예고한 사십사의 살인숫자에 꼭 부합되는 것이 아닌가? 오늘이 살인첩에 쓰여진 마직막 십일 째 되는 날이기도 하다.
구자명은 사태의 심각성에 그만 신음성을 토해냈다.
"음... 그렇군."
이때 일곱째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소제가 가보겠습니다."
쥐 죽은 듯이 고요한 좌중에 괴음성이 들려 왔다.
"크크크... 가볼 필요없다. 그들은 모두 깊이 잠들어 있으니까......!"사면팔방으로부터 소름끼치는 듣기 거북한 음성이 메아리치듯 울려오는 것이 아닌가?"서... 설마......!"
"......!"
구자명을 비롯한 남악오검은 안색이 급변하며 모두 자리에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구자명은 침중하게 물었다.
"그대는 누구인가?"
"크크크... 혈우전의 초혼사자(招魂使者)다."
"제자들을... 어찌 했느냐?"
"크후후훗...! 혈우전은 반드시 살인 예고대로 시행한다. 그들은 단지 중독되어 깊이 잠들었을 뿐이니 안심해라."구자명을 비롯한 남악오검의 얼굴에 안도의 기색이 스쳤다. 구자명은 진기를 극성으로 끌어 올리면서 일갈했다.
"초혼사자, 그대는 이제 그만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 어떤가? 이곳에는 그대들의 목표인 나머지 육 인이 모두 있지 않은가?"그러자 냉소와 함께 조소 어린 괴소가 울려나왔다.
"크크크큭...! 그렇게도 빨리 지옥에 가고 싶단 말인가? 어린애처럼 보채다니 말이야.......""닥... 닥쳐라!"
"장문인께 감히 모욕을 주다니......!"
스르릉!
남악오검은 분성을 터뜨리며 일제히 검을 뽑아 들었다. 그러자 눈부신 검광이 원을 그리며 대전을 살벌하게 메웠다. 그들의 오행검세는 이미 당금무림에 그 적수를 찾아 보기 힘들 정도의 천하무적이었다.
"크크크ㅋ...! 가소롭구나. 그 따위 장난 같은 검법으로 운명을 피할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남악오검은 모욕감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성질이 급한 칠검(七劍) 태성(太盛)이 노갈을 터뜨리며 신형을 날리려 했다.
"돌아오게, 사제, 놈들의 격장지계에 휘말리면 안되네."차분한 구자명의 음성이 그의 흥분을 가라앉혔다. 그는 오행검진의 천중에 몸을 고정시킨 채 일파의 지존다운 침착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초혼사자, 그대는 언제까지 두더지처럼 숨어 있을 셈이오? 우리는 준비가 되었소.""크흐흐흣...! 과연 남악신검답구나. 하나 아직 자시(子時)가 조금 남았다. 그동안 기도나 올리는 것이 어떤가?"구자명은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소. 그럼......."
그는 서서히 포단 위에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그가 침착한 모습을 보이자 남악오검도 따라서 마음이 가라앉는 것을 느꼈으나 조금도 긴장을 풀지는 않았다.
구자명은 그들에게 전음으로 말했다.
(사제들, 그동안 운공조식이나 해 두게. 놈들은 정말 시간을 지킬 모양이네.)그 말에 오검은 즉시 자리에 앉았다. 그들은 이미 뽑은 검을 다시 꽂지도 않고 무릎에 올려 놓았다.
형산의 운명이 걸린 마지막 일전(一戰).
그들은 어떻게든 혈우전과의 정면 승부라면 미련없이 생명을 던질 각오가 되어 있었다. 그들은 오직 구자명의 안전만을 생각하고 있었다. 흥분이 가라앉자 그들은 구자명의 말이 옳다고 생각했다.
'장문인의 말처럼 최후의 혈전을 위해 힘을 비축하는 것이 현명하다.'그들은 암암리에 운기조식에 들어갔다. 시간은 거침없이 흘렀다. 한없이 느린 듯하면서도 천리준마처럼 빠른 것이 또 시간이다.
어느 덧 해시(亥時)가 지나고 시각은 점점 자시로 치달았다.
그때까지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남악신검은 일각 일각이 한없이 지루하게 느껴져 견딜 수가 없었다. 그들은 벌써 조식을 끝냈으며 내공강기를 이미 극성으로 끌어 올려둔 상태였다. 혈관의 피 흐르는 소리까지 들으며 점점 더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구자명은 지긋이 눈을 감고 있었다.
대전 안은 개미가 기어가는 소리까지 들릴 정도의 적막이 휩싸였으며 들리는 소리라고는 대전 밖의 죽림을 흔드는 바람소리 뿐이었다.
이윽고 어딘가로부터 은은히 자정(子正)을 알리는 타종음이 들려왔다. 남악오검은 약속이나 한 듯이 일제히 장검에 손을 뻗었다.
바로 그때였다.
"크하하하하하......!"
느닷없이 사면팔방으로부터 소름끼치는 일진광소가 들려오는 것이 아닌가? 그와 동시에 일진광풍이 대전 안을 휩쓸었다. 수십 개의 굵은 황촉의 불빛이 꺼지듯 자지러졌다. 이때 허공으로부터 살기 띤 음성이 터져 나왔다.
"지옥으로 갈 때가 되었다!"
츠츠츠츳......!
남악오검은 일제히 검을 뻗으며 공력을 일으켰다. 그들의 검도는 이미 초상승의 경지에 있었다. 일단 공력을 주입하자 검끝에서는 한 자 길이의 검기가 치뻗었고 그로 인해 방원 오 장여는 물샐틈없는 검막에 뒤덮였다. 그들은 눈을 부릅뜨고 혈우전의 마두들이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이때였다.
휘휘휙......!
돌연 휘파람소리와 같은 파공성이 일어나며 대전 안으로 핏빛 인영이 날아들었다.
"왔다!"
남악오검은 동시에 부르짖으며 공력을 극으로 끌어올렸다.
형상 최고 고수들이 뿜어내는 검기는 이미 최절정의 검막은 쥐새끼 한 마리도 통과할 수 없을 정도로 그 위세는 실로 대단했다.
혈영은 수십 개였고, 그들은 무서운 속도로 남악오검을 향해 덮쳐왔다. 어찌나 빠른지 그들의 모습조차 보이지 않았으며 단지 핏빛 그림자만이 자신들을 향해 쇄도해 들어오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뿐이었다.
"차앗!"
"가랏!"
위이잉! 번-- 쩍!
남악오검의 검이 일제히 형산비전의 검법을 구사하며 뇌전처럼 줄기줄기 뻗어나갔다. 형산의 위명이 전혀 어불성설이 아니었음을 실감하게 하는 순간이었다. 다섯 개의 검은 제각기 전광석화같이 혈영에게로 쏟아졌다. 순간 그들은 눈앞에서 혈영의 허리가 절단되는 것을 느꼈다.
'베었다......!'
똑같이 그들은 내심 부르짖었다.
바로 그때였다. 중심에 서 있던 남악신검 구자명이 서서히 그의 애검 벽라검을 뽑고 있었다. 그의 눈에서는 짙은 살기가 흘러 나오고 있었다.
검을 뽑자 검집을 버렸다. 살 생각을 포기한 것일까? 그의 얼굴에 이제껏 볼 수 없었던 음침한 살기가 어렸다.
스스슥......!
그의 검이 문득 반원을 그렸다. 그의 앞에는 남악칠검이 등을 보인 채 서 있었고, 그의 검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칠검의 목을 잘랐다.
"으아악!"
칠검은 꿈에도 상상치 못했다. 느닷없이 목줄기가 섬뜩하다고 느낀 순간 그의 목은 이미 바닥을 구른 뒤였다.
이때 나머지 사검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자신들이 베었다고 생각한 것은 놀랍게도 사람이 아니라 붉은 헝겊조각에 지나지 않은 것이 아닌가?"소... 속았다!"
그들이 동시에 부르짖는 순간 그들은 귓전에 단말마의 비명을 들었다. 칠검이 목이 잘린 채 허위적거리며 앞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헉......!"
"사... 사제......!"
그들은 너무나 놀라 일시지간 뇌의 기능이 마비되는 것 같았다. 대체 어디서, 누가, 감쪽같이 칠검의 목을 베었단 말인가? 그들은 동시에 구자명을 보았다. 구자명은 벽라신검을 뻗은 채 비분 어린 표정을 짓고 있었다.
"장문인......!"
그들은 도저히 지금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혈우전의 무공이 과연 무엇이길래 자신들의 눈에까지 보이지 않을 정도인지 그 신묘함에 그들은 아연실색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구자명은 더욱 창노한 신색으로 비통하게 부르짖었다.
"상관하지 말고 앞을 주의하게!"
사검은 피눈물을 뿌리며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또 다시 처절한 비명이 들렸다.
"크아악!"
남악육검이 목이 달아난 채 앞으로 달려 나가다 푹 고꾸라지는 것이 아닌가?"이... 이럴 수가......!"
휘이이잉--!
음산한 바람이 불어 대전 안의 촛불이 일제히 잦아들었다.
"크아아악!"
또 한 마디의 비명이 어둠을 뒤흔들었다. 불빛이 다시 환해지자 사검(四劍)이 등과 가슴으로 피를 분수처럼 뿜으며 쓰러지고 있었다. 진정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이제 남은 것은 오직 이검(二劍)과 삼검(三劍) 뿐이었다. 그들은 공포에 질려 구자명을 바라보았다.
구자명은 넋을 잃은 표정으로 중얼거리고 있었다.
"사술(邪術)이다... 사술......."
이검과 삼검은 심장이 얼어 붙는 것을 느꼈다.
그렇다. 사술이 아니고서야 어찌 흉수의 그림자조차 비치지 않았는데 삼검이 차례로 목숨을 잃는단 말인가?그들은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장문사형... 아무래도......."
구자명은 문득 그들에게 말했다.
"이리 가까이 오게."
"......?"
"내게 방법이 있네."
이검과 삼검은 구자명의 말을 듣고 그에게로 신형을 옮겼다.
푹!
이검은 자신의 심장을 찌르고 들어온 검을 멀거니 바라보았다. 그 검은 다름아닌 구자명의 애검, 벽라검이 아닌가? 그렇지만 그는 형산의 장문인인 구자명을 의심할 수 없었다. 아니, 의심하기엔 때가 이미 늦은 것이었다.
벽라검!
분명 그것은 구자명의 검이었고 그 검을 쥔 손은 구자명이었다.
"끅... 사형... 왜......?"
그는 구자명을 바라보며 물었다. 입과 코로 선혈이 넘쳐 흘렀다. 그는 너무도 극심한 배신감에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이때 삼검은 미친 듯이 부르짖었다.
"사형......! 다... 당신, 미쳤소? 사제를 죽이다니?"
구자명은 담담히 말했다.
"그래, 난 미쳤네."
스윽--!
검을 뽑자 이검은 순식간에 나무토막처럼 쓰러졌다. 눈은 애통한 듯 부릅뜬 채였고 마지막 순간까지도 회의와 원망, 그리고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 얼굴 가득 박혀 있었다.
구자명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이검의 몸에서 검을 뽑았다.
삼검은 눈에 보기에도 섬뜩한 핏발이 섰다.
"악마--! 흉수는 너였구나!"
쐐애액!
그는 미친 듯이 검을 휘둘러 구자명에게 덮쳐갔다.
"크아아악!"
그러나 비명이 터진 것은 그의 입에서였다.
번-- 뜩!
돌연 천장에서 혈영이 유령처럼 떨어졌고 삼검의 등 뒤에 내려선 순간 삼검은 정수리가 화끈했다. 정확하게 두 동강으로 갈라진 것이었다. 삼검은 선 채로 몸이 좌우로 분리되며 넘어갔다.
"......!"
결국 남악오검은 모두 죽었다. 대전 안은 적막에 휩싸였다. 살아 있는 사람은 둘뿐이었다.
남악신검 구자명은 귀신같이 나타난 혈의인을 바라보았다. 그는 머리 끝에서 발 끝까지 온통 핏빛 장포에 휘감겨 있었다.
구자명은 벽라검을 석실바닥에 꽂으며 입을 열었다.
"잘했다. 이것으로 완료인가?"
혈의마인은 바닥에 엎드렸다.
"그렇습니다. 팔전주(八箭主)님."
팔전주? 그렇다면 구자명은 이중(二重)첩자였단 말인가? 그렇다면 한 문파의 장문인까지 매수할 수 있는 이 혈우전이라는 가공할 집단 앞에 강호는 풍전등화(風前燈火)와 같은 것이다.
"크크ㅋ... 이로써 형산검파는 끝났다. 살아남은 자들은 어찌됐느냐?"날카롭고 괴이한 음성이었으나 웬지 그다지 나이가 들은 음성은 아니었다.
부복하고 있던 혈의인은 즉시 대답했다.
"남은 자들에게는 모두 혈명단(血命丹)을 복용시켰습니다. 보름에 한 번씩 해약을 복용치 않으면 전신이 썩어 문드러질테니 그들은 본전의 명령을 듣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알겠다. 그럼 너는 대전주(大箭主)께 보고를 드려라.""복명!"
스슷!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혈의인은 홀연히 사라졌다.
구자명, 아니 팔전주는 방금 전까지 격전의 피냄새가 채 가시지 않은 대전 안을 둘러보며 중얼거렸다.
"이로써 남무림의 삼분지 이를 손에 넣은 것이나 다름없다. 후후... 사, 오, 육전주도 지금쯤 공적을 올리기 위해 혈안이겠지......."그는 고개를 들었다.
음침한 미소를 띤 눈에서는 사기가 흘러 나오고 있었다.
"두고 보시오. 대전주, 누가 가장 먼저 목표를 달성하는지를... 구전주(九箭主) 비매(妃妹)는 나만이 차지할 수가 있소이다."구자명은 벽라검을 뽑아 들어올렸다.
"흐흐... 좋은 검이군. 그러나 너의 운명도 다했다."
그는 손가락으로 검신을 퉁겼다.
땅!
놀랍게도 벽라신검은 그의 손가락에 퉁기자 허리가 두동강이 났다. 쇠를 무 자르듯 한다는 벽라검을 나무젓가락보다 더 간단하게 부러뜨려 버린 것이다.
구자명은 부러진 벽라신검을 홱 던졌다.
탁!
벽라검은 일직선으로 날아가 대전 상단벽에 걸려 있는 한폭의 초상화에 박혔다. 그 초상화는 바로 형산파의 개파조사의 초상화였다. 부러진 반검은 초상화의 얼굴에 정확히 박혔다.
"후후훗......!"
구자명은 괴소를 흘리며 신형을 날렸다. 그의 모습은 순간적으로 흐려지더니 자취를 감추었다.
그런데 그가 사라지자마자, 어딘가에서 소녀의 맑은 음성이 들려왔다.
"정말 잔인하고 교활한 자로군요, 공자님."
그것은 초초의 음성이었다. 담담하고 온화한 음성이 다시 들려왔다. 초초와 천우였다. 그렇다면 이들은 이 모든 것을 다 지켜보고 있었단 말인가? 그들은 왜 형산이 멸문지화를 당하는 데도 도와주지 않고 이렇듯 숨어 구경만 한 것일까?"팔전주란 자는 아직 젊다. 젊은 나이에 저 정도 실력을 갖추고 있는 것을 보면 혈우전의 무서움을 알만하다.""호호... 그런데 저 자는 구전주를 사랑하는 모양이죠? 비매라던가?""그런 모양이다. 아마 그들은 전주를 사이에 놓고 암투가 진행 중인 모양이다.""그것 참 재미 있겠는데요? 그런데 비매란 여인은 얼마나 예쁠까요?""후후... 글세."
"호호......! 재미있는 생각이 났어요. 만약 공자님이 그녀를 유혹한다면 어떨까요?""초초, 네 머리는 항상 그런 쪽으로 돌아 가는구나."
"호호... 아마 그녀는 공자님에게 홀랑 반해버릴 거예요. 그렇게 되면 팔전주라는 자도 헛물만 켜겠지요."천우는 초초의 마음을 이해할 수 없었다.
"농담은 그만 해라. 그건 그렇고 구대협(仇大俠)은 어떻게 할 생각이시오?"천우의 뒤쪽에서부터 처량한 음성이 들렸다.
"무서운 일이오. 노부도 한없이 부끄러운 생각 뿐이오."놀랍게도 그것은 바로 남악신검 구자명의 음성이었다. 천우는 구자명을 돌아보며 말했다.
"손을 쓰기엔 너무 늦었소이다. 만일 장문인을 그 자들이 납치해 가는 것을 내가 발견하지 못했다면 일은 더욱 커졌을 것이오.""이 은혜는 형산파 전체가 영원히 잊지 않을 것이오. 소협.""나는 그런 것을 바라진 않소."
"노부는... 봉황성으로 가겠소이다. 무황께 이 사실을......."천우의 코웃음이 들렸다.
"무황! 모두 그를 신처럼 여기는구료?"
"소협......."
"좋소. 아무튼 나는 손을 떼겠소이다. 우연히 당신을 구한 것 뿐이니 더 이상 참견하지는 않겠소.""......!"
천우의 냉막한 음성이 들렸다.
"초초야, 이제 우리는 그만 떠나자."
"네, 공자님."
그것이 끝이었다. 다시는 대화가 들려오지 않았다. 그들은 떠난 것이었다.
천우.
그는 본래 해대웅의 말을 듣고 초초와 같이 황산으로 달려온 것이었다. 혈우전이 형산을 멸문시키는 것을 그냥 두고볼 수만은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오던 도중 그는 두 명의 혈의인이 한 사람을 납치해 가는 것을 발견했다.
구자명은 벽라신검에 발려져 있던 독에 의해 정신을 잃었었고 혈우전의 졸개들이 그를 어디론가로 이송하던 중이었다.
천우는 즉시 구자명을 구해 냈고 그를 데리고 형산으로 올랐다. 그러나 이미 때가 늦어 그들이 도착하여 대전의 바닥 비밀통로에 당도했을 때는 모든 것이 끝난 뒤였다.
구자명은 통한의 눈물을 뿌렸으나 천우는 그에게 더 이상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그는 즉시 그를 버려두고 초초와 함께 떠났다. 십대문파는 그에게 그다지 탐탁치 않은 존재였기 때문이다.
형산의 혈겁(血劫).
그것은 이렇게 끝이 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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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산의 혈겁...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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