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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양[洛陽] 등봉[登封]의 관성대[觀星臺]는 고려[高麗]의 천문대[天文臺]
http://cafe.daum.net/munmoo-chosunsa/3U53/414
우리의 역사[歷史]인 조선사[朝鮮史],.............. 환국[桓國]으로부터 시작되는 우리의 장구[長久]한 역사[歷史]는, 조선[朝鮮]이 망하고 난후, 이제 일[一] 세기[世紀]를 넘어서고 있다. 조선[朝鮮]이 망하고 침략자[侵略者]들의 참화[慘禍]를 입은 우리의 역사[歷史]는, 식민사학[植民史學]을 추종하는 자들에 의하여 다시금 짓밟히고 왜곡[歪曲]되고 있으니, 선대[先代]의 조상[祖上]님들은 저 높은 천상[天上]의 하늘과 지하[地下]에서 통곡을 하고 계실 것이다.
역사[歷史]의 그 근본[根本]과 본 모습을 잃어버리고 왜곡[歪曲]과 변조[變造]와 조작[造作]으로 얼룩진 우리의 역사[歷史],........ 중요[重要]한 내용들은 삭제[削除]되고 멸실[滅失]되어, 우리가 역사서[歷史書]를 보면서도, 우리의 역사[歷史]에 대하여, 우리의 역사[歷史] 를 알 수 없는 전대미문[前代未聞]의 혼란[混亂]과 모순[矛盾]에 쌓여 있는 우리의 역사[歷史],......... 이를 다시 그 후손[後孫]들이 왜곡[歪曲]하고 짓밟는 우리의 역사[歷史]인 조선사[朝鮮史],........ 우리는 지금 어디에 서 있는 것인가 ?
황제[黃帝]로부터 시작되는 대륙사[大陸史]와 사서오경[四書五經]을 포함하여, 단군[檀君]으로부터 시작되는 조선사[朝鮮史]의 장구[長久]한 역사서[歷史書]를 살펴보고, 또한, 현재[現在]까지 전하고 있는 유적[遺跡]과 유물[遺物], 그리고 들어나고 있는 조선사[朝鮮史] 역사[歷史]의 강역[疆域]들을 대입시켜 보면, 우리 역사[歷史]의 본 모습이 나타나고 이를 그려 보게 된다.
소위 중국[中國]이라는 역대[歷代] 나라들이 황제[皇帝]의 나라라고 잠칭[僭稱]을 했든 아니든 간에, 우리의 역대[歷代] 왕조[王朝]들은, 만대[萬代]의 천자지국[天子之國]임을 의심[疑心]할 여지가 없다. 이를 역사[歷史]의 기록[記錄]으로, 고증[考證]하고 증명[證明]하는 일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사기[史記]로부터 시작되는 대륙사[大陸史]의 사서[史書]들은, 한결같이 요동[遼東]은 중국[中國]의 동[東]쪽에 있으며, 진시황[秦始皇]의 만리장성[萬里長城]도 음산지 요동[陰山至遼東]에서 끝난다고 기록[記錄]하고 있다. 음산[陰山]은 대륙사[大陸史]의 기록[記錄]에서도, 대륙[大陸]의 서북[西北] 지역을 가리키고 있다.
요동[遼東]의 동[東]쪽으로는 우리의 역사[歷史]인 조선사[朝鮮史]만이 있을 뿐, 그 어떤 다른 나라의 역사[歷史]가 존재[存在]했다는 전거가 없으며, 그 흔적[痕迹]조차 없다.
요동[遼東]은, 고조선[古朝鮮], 부여[夫餘], 고구려[高句麗], 발해[渤海], 고려[高麗], 조선[朝鮮]으로 이어지는 우리의 역사[歷史]와 장구[長久]한 세월을 함께 해 왔다. 천하[天下]를 통일 했다는 진시황[秦始皇]의 진[秦]나라도, 요동[遼東]을 경계[境界]로 하여, 동[東]쪽으로 조선[朝鮮]에 이르렀다고 사기[史記]는 기록[記錄]하고 있다. 또한, 요동[遼東]은, 불함산[不咸山]인 장백산[長白山]의 서남[西南]쪽에 있다고, 역대[歷代]의 사서[史書]들은 기록[記錄]을 남기고 있다.
장백산[長白山]의 서남[西南]쪽에는, 유주[幽州]와 요동[遼東]과 요서[遼西]가 있었으며, 고구려[高句麗]의 평양[平壤]지역도, 연[燕]의 지역이었다고 조선사[朝鮮史]와 대륙사[大陸史]는 전하고 있다. 평양[平壤]은 고조선[古朝鮮]의 고토[古土]이며, 고조선[古朝鮮]은 연[燕]과 접경[接境]하고 있었다. 불함산[不咸山]은 오늘날의 알타이산맥에 있는 벨루하산이 틀림없으니, 요동[遼東]은 천산[天山]과 알타이산맥이라고 부르는, 대륙[大陸]의 서북[西北]쪽에 자리 잡고 있는 것임에 틀림이 없을 것이다.
동명집[東溟集]
송목달부겸선지연[送睦達夫 兼善 之燕]
진[秦]나라 성[城] 동[東]쪽으로 발해[渤海] 바다 닿았으며 秦城東入渤海
연[燕] 지역은 북[北]쪽으로 오환[烏桓] 땅과 접하고 있도다. 燕地北隣烏桓
그대 멀리 군국[君國] 감을 인해 옛일을 묻거니와 爲因君行問古
역수[易水]의 물 아직 옛날같이 찬지 모르겠네 未知易水猶寒
카자흐스탄과 중국[中國] 이리[伊犁]의 접경[接境]지역인 천산[天山]일대에는, 자신들이 오손[烏孫]의 후손[後孫]이라고 자랑스럽게 말하는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으며, 이곳의 동북[東北]지역에 사는 사람들은, 이곳이 오환[烏桓]의 지역이라고 광고까지 하고 있다. 심지여 오손[烏孫]지역에 사는 사람들은, 관광[觀光] 상품까지 만들어 홍보[弘報]하고 있으며, 이곳에 있는 거대한 산[山]의 이름도, 오손산[烏孫山]이라고 부르고 있다.
오손[烏孫]과 오환[烏桓]은 모두 고구려[高句麗]내지의 일원들이니, 요동[遼東]과 고구려[高句麗]의 위치[位置]에 대해서는 굳이 설명할 필요조차 없다. 동명집[東溟集]에서,......... 진[秦]나라 성[城] 동[東]쪽으로 발해[渤海] 바다 닿았으며 秦城東入渤海,........ 연[燕] 지역은 북[北]쪽으로 오환[烏桓] 땅과 접하였네燕地北隣烏桓의 이 말은, 유주[幽州]와 요동[遼東]과 오환[烏桓]과 오손[烏孫]의 지역적[地域的] 위치[位置]를 시[時] 한편으로 그림과 같이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의 조선[朝鮮]말까지 평양[平壤]과 요동[遼東]은 경계[境界]를 접하고 있었으며, 이는 수 많은 역사[歷史]의 기록[記錄]들이 이를 증명[證明]하고 있다. 하물며 고구려[高句麗]와 요동[遼東]의 관계는 삼척동자[三尺童子]도 다 아는 사실[事實]이니, 더 무슨 말이 필요 하겠는가 ?
조선[朝鮮]의 한성부[漢城府]는 대륙[大陸]의 중앙[中央]인 지금의 서안[西安]에 자리 잡고 있었다. 그러므로 조선[朝鮮]의 팔도[八道]는, 한양[漢陽]을 중심[中心]으로 별처럼 벌여 놓았다고 사서[史書]는 기록[記錄]을 하고 있는 것이다.
고려[高麗]말까지 개성[開城]의 송악[松嶽]에 올라, 개경[開京]인 송도[松都]를 바라보며, 시[詩]를 통하여 천자[天子]의 도읍지[都邑地]인 신주[神州]를 노래하고, 이를 기록[記錄]으로 남긴 고려[高麗]의 대신[大臣]들은, 고려[高麗]가 망하는 순간까지 황제[皇帝]라고 부르며, 황도[皇都]의 기록[記錄]을 남기고 있다. 고려[高麗]의 대신[大神]들이 신주[神州]라고 하였는데, 천자국[天子國]을 논[論]해서 무엇을 할 것인가 ?
역사[歷史]를 조작[造作]하는 자들은 사서[史書]는 조작[造作]을 하였으나, 거대한 산세[山勢]와, 대하[大河]와 대택[大澤]과, 천리[千里]의 사막[沙漠]과 사해[沙海]의 바다는 조작[造作]할 수 없었다. 또한, 거대한 암석[巖石]으로 이루어지 유적[遺跡]은 조작[造作]할 수 없었으니, 붓장난은 할 수 있었으나 천지[天地]의 형세[形勢]로 이루어진 조물주[造物主]의 불가사의[不可思議]한 창조물[創造物]을, 감히 어찌 조작[造作]하고 다시 만들어 놓을 수 있었으랴, 또한, 수 많은 역사[歷史]의 기록[記錄]들과, 수 많은 역사[歷史]의 유적[遺跡]과 유물[遺物]들을, 어찌 모조리 둔갑[遁甲] 시킬 수 있었겠는가 ?
숭산[嵩山]으로 유명한 낙양[洛陽],.......... 낙양[洛陽]으로 유명한 소림사[少林寺],......... 소림사[少林寺]로 유명한 낙양[洛陽],....... 이 낙양[洛陽]의 남[南]쪽으로는 숭산[嵩山]이 있고, 등봉[登封]이 있으며, 이 등봉[登封]의 바로 남[南]쪽에 원[元]나라의 천문대[天文臺]라고 하는 유적[遺跡]이 있다. 이 천문대[天文臺]에 관해서는 널리 알려진 곳이라 부연 설명은 필요 없을 것이다.
이 천문대[天文臺]는 원[元]나라가 만들었다고 설명하고 있으며, 이 천문대[天文臺]안에는, 주[周]나라 주공[周公]이 만들었다는 측경대[測景臺]라는 것도 있다. 그렇다면 이 것이 원[元]나라가 만든 것이 맞는 것일까 ? 우리의 역사[歷史]를 찾는 분들 중에, 고려[高麗]의 개경[開京]이 숭산[嵩山]인근에 있었다고 주장하는 분들은, 이 천문대[天文臺]를 고려[高麗]에서 만든 것이라고 주장하는 글을 본적이 있다. 그러면서 그 근거[根據]로 이 천문대[天文臺]를 말하고 있다.
중국[中國]에서 주장하는 설[說]과 고려[高麗]의 개경[開京]이 숭산[嵩山]이라고 주장하는 설[說]을 뒤로하고 이 천문대[天文臺]가 만들어진 내력을 보기로 한다. 또한, 숭산[嵩山]의 소림사[少林寺]는, 고려[高麗]의 불교[佛敎]에 독실한 향관[鄕官]이 중건[重建]한 기문[記文]이 현재까지 전하고 있음을 알고 있어야 한다.
가정집[稼亭集]
유원고 아중대부하남부로총관 겸 본로제군오로총관 관내권농사 지하방사 증(贈) 집현 직학사 경거도위고양후 시 정혜 한공 행장 有元故亞中大夫,河南府路揔管兼本路諸軍奧魯揔管管內勸農事,知河防事,贈集賢直學士,輕車都尉,高陽候 謚正惠韓公行狀
公諱永 字貞甫 姓韓氏 高麗淸州人 曾祖光胤 本國及第 仕至朝請大夫,禮賓卿 卒贈金紫光祿大夫,守司空,左僕射 [중략]
공의 휘[諱]는 영[永]이요, 자는 정보[貞甫]요, 성[姓]은 한씨[韓氏]이니, 고려[高麗] 청주[淸州] 사람이다.증조[曾祖] 광윤[光胤]은 본국[本國]에서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조청대부[朝請大夫] 예빈경[禮賓卿]에 이르렀고, 죽은 뒤에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수 사공 좌복야[守司空左僕射]를 증직 받았다. [중략]
祖康 本國及第 用儒術相忠烈王 以匡靖大夫,都僉議中贊,脩文殿大學士,監脩國史,判典理司事,世子師致仕 卒謚文惠公 考謝奇 本國及第 仕至朝請大夫,右司議大夫,知制誥 [중략]
조부[祖父] 강[康]은 본국[本國]에서 과거에 급제하여 유술[儒術]로 충렬왕[忠烈王]을 보필하였으며, 광정대부[匡靖大夫] 도첨의중찬 수문전태학사 감수국사 판전리사사 세자사[都僉議中贊修文殿太學士監修國史判典理司事世子師]로 치사[致仕]하였다. 죽은 뒤에 문혜공[文惠公]의 시호[諡號]를 받았다. 부친[父親] 사기[謝奇]는 본국[本國]에서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조청대부[朝請大夫] 우사의대부 지제고[右司議大夫知制誥]에 이르렀다. [중략]
初 本國遣世家子第爲質子 公之考在選中 遂挈家而來 公由是少長輦轂 學于中國 大德七年 選充宿衛 [중략]
이에 앞서서 본국[本國]에서 세가[世家]의 자제를 원[元]에 보내 인질로 삼을 적에 공의 부친도 선발 대상에 포함되었으므로 마침내 가족을 이끌고 중국[中國]에 왔다. 공이 이 때문에 어려서부터 연곡[輦轂]에서 성장하며 중국[中國]에서 글을 배우다가 대덕[大德] 7년에 선발되어 숙위[宿衛]에 충원되었다. [중략]
十一年 入侍仁廟潛邸 爲上所知 至大初 制授承務郞資武庫提點 皇慶元年 除壽武庫使 延祐元年 移使利器庫 [중략]
11년에 인묘[仁廟]의 잠저[潛邸]에 입시하여 황상의 지우[知遇]를 받았다. 지대[至大] 초에 황제의 명으로 승무랑[承務郞] 자무고 제점[資武庫提點]을 제수 받았으며, 황경[皇慶] 원년[元年]에 다시 수무고 사[壽武庫使]를 제수 받고, 연우[延祐] 원년[元年]에 이기고 사[利器庫使]로 옮겼다. [중략]
元統元年 遷河南府路揔管 公始下車 訪求民瘼 利無不興 害無不除 河南當西北孔道 西自閿鄕 北自孟津 東自鞏縣 凡十一驛 人戶損乏 十室九空 [중략]
원통[元統] 원년[元年]에 하남부로 총관[河南府路摠管]으로 자리를 옮겼는데, 공이 부임하자마자 백성[百姓]들의 병폐를 물어 알아보고서 이익이 되는 일은 일으키지 않음이 없고 해가 되는 일은 제거하지 않음이 없었다. 하남[河南]은 서북[西北]의 교통의 요지에 해당하여, 서[西]쪽으로는 문향[閿鄕]에서 오고 북[北]쪽으로는 맹진[孟津]에서 오고 동[東]쪽으로는 공현[鞏縣]에서 왔는데, 이곳에 있는 11개의 역[驛] 모두 인호[人戶]가 없어져서 열 집에 아홉은 텅 비어 있는 상태였다. [중략]
檢校隱蔽 覆按得宲 蠲除其貧弱 僉補其豐厚 而又新館舍闢州路 建里門勸農桑 作惠民藥局以救窮民 收置銅儀以 謹測候 [중략]
이에 은폐한 것을 검사하고 사찰하여 실정을 파악한 다음에 빈약한 자를 면제해 주는 대신에 풍후한 자에게서 보충하도록 하였다. 또 관사[官舍]를 신축하고 주로[州路]를 닦고 이문[里門]을 세우고 농상을 권장하였으며, 혜민약국[惠民藥局]을 개설하여 궁민을 구제하는 한편, 동의[銅儀]를 장치하여 천체[天體]와 기후[氣候]를 신중히 관측[觀測]하게 하였다. [중략]
民旣悅服 則令之曰 講求治道 莫先學校 廟宇圮陋 齋舍傾頹 豈朝廷隆師重道之意乎 於是損俸勸率 興工修理 建大成門及東西廡序揔四十有九間 [중략]
이렇게 해서 백성[百姓]들이 일단 열복[悅服]을 하자 다시 명령을 내리기를 치도[治道]를 강구하려면 학교[學校]보다 우선하는 것이 없다. 그런데 묘우[廟宇]가 허물어지고 재사[齋舍]가 퇴락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스승을 높이고 사도[斯道]를 존중[尊重]하는 조정[朝廷]의 뜻이라고 하겠는가 ? 라고 하고는, 봉록[俸祿]을 덜어 내어 솔선하면서 공사를 일으켜 수리한 결과, 대성문[大成門]을 비롯하여 동[東]쪽과 서[西]쪽의 무서[廡序] 등 총 49칸[四十九間]을 건립하게 되었다. [중략]
糓 鄕人也 甞從之游 故詳公之德行與其家世云 [중략]
곡[穀]은 공[公]과 동향[同鄕] 사람으로서 일찍이 어울려 노닌 적이 있다. 그래서 공[公]의 덕행[德行]과 그 가세[家世]에 대해서 자세히 알 수가 있었다. [중략]
정혜한공[正惠韓公行]은, 당시[當時]에 부모를 따라 원[元]나라에서 성장하며, 학문[學文]을 닦고 벼슬을 한 분이다. 이 분이 하남부로총관[河南府路揔管]이 되어 고려[高麗]의 내지[內地]로 오게 된다. 원사[元史] 지리지[地理志]에 기록된 하남부[河南府]의 기록[記錄]을 보기로 한다. 정혜한공[正惠韓公行]의 행장[行狀]에서, 하남부로[河南府路]가 서북[西北]의 요지라고 하는 것은, 당시[當時]에 고려[高麗]는, 강도[江都]로 도읍[都邑]을 옮겼기 때문에, 하남부로[河南府路]를 서북[西北]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원사[元史] 지리지[地理志]
지제십일[志第十一] 지리이[地理二]
河南府路,唐初為洛州,後改河南府,又改東京 宋為西京 金為中京 金昌府 元初為河南府,府治即周之王城 舊領洛陽、宜陽、永寧、登封、鞏、偃師、孟津、新安、澠池九縣,後割澠池隸陝州 戶九千五百二,口六萬五千七百五十一 壬子年數 領司一、縣八、州一 州領四縣
錄事司 縣八 洛陽,宜陽,下 永寧,下 登封,下 中岳嵩山在焉 鞏縣,下 孟津 下 新安,偃師 下 [중략]
하남부로[河南府路]는, 당[唐]나라 초에 낙주[洛州]라고 하였고, 후에 고쳐서 하남부[河南府]로 하였다가 또, 고쳐서 동경[東京]이라고 하였다. 송[宋]나라 때에는 서경[西京]이라고 하였고, 금[金]나라 때에는 중경[中京] 금창부[金昌府]라고 하였다. 원[元]나라 초에 하남부[河南府]로 하였으며, 부[府]의 치소는, 주[周]나라 왕성[王城]이 있던 곳으로, 다스리는 지역은, 낙양[洛陽], 의양[宜陽], 영녕[永寧], 등봉[登封], 공[鞏], 언사[偃師], 맹진[孟津], 신안[新安], 민지[澠池]등 9현[九縣]이다.
녹사사[錄事司]라는 것은, 다루가치[達魯花赤]를 장관으로 하는 관제[官制]를 말하는 것이다. [중략]
원사[元史] 지리지[地理志]에 나오는 내용은, 지금 세상에 나와 돌아다니는 고지도[古地圖]와, 그 내용이 같다. 그렇다면 이곳이 원사[元史]의 기록[記錄]대로 당[唐]나라의 낙주[洛州]였으며, 금[金]나라의 중경[中京]이었으며, 송[宋]나라 때에는 서경[西京]이었을까 ?
당시[當時]는 고려[高麗]가 원[元]나라에 항복하고 원[元]나라의 압제를 받던 시대였으니, 행장[行狀]에서 말하는 것과 같이 하남부로[河南府路]는 맞을 것이다.
그러나 당[唐]나라가 이곳에 낙주[洛州]를 두고, 하남부[河南府]를 두고, 고쳐서 동경[東京]으로 하였다는 것은, 황당무계[荒唐無稽]한 말이며, 이는 대륙사[大陸史]인 당서[唐書]와도 정면으로 위배[違背]되는, 새빨간 거짓말이다.
또한, 금[金]나라의 중경[中京]과 송[宋]나라의 서경[西京]이라는 기록[記錄]은, 터무니없는 거짓이다. 금[金]나라는 대륙[大陸]의 서북[西北] 지역인 천산[天山]과 알타이산맥을 근간으로 하는 요동[遼東] 지역을 범하여, 그 동[東]쪽을 넘어선 적이 없었다. 당[唐]나라 또한, 대륙[大陸]의 천산[天山]을 넘어 서북[西北], 서남[西南]에 있던 족속이다. 이는 자신들이 기록[記錄]한 당서[唐書]에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
이는 대륙사[大陸史]와 조선사[朝鮮史]의 기록[記錄]들이 확고히 증명[證明]하고 있으며, 송[宋]나라 또한 다르지 않다.
우리의 역사[歷史]인 조선사[朝鮮史]는, 이러한 엉터리 조작[造作]에 의해서 반도[半島] 박히게 되고, 우리 역사[歷史]의 진실[眞實]을 외면하는 식민사학[植民史學]에 의하여, 역사[歷史]의 흐름이 또, 한번 단절[斷絶]되고 있는 것이다.
정혜한공[正惠韓公行]의 행장[行狀]에서도, 맹진[孟津]이라는 지명[地名]이 나오는데, 이는 대신[大臣]들의 문집[文集]들도 상당수가 원본[原本]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證明]하고 있는 것이다. 사기[史記]를 보더라도 기자[箕子]는 주[周]를 피하여 동[東]쪽에 있는 고조선[古朝鮮]의 지역인, 평안도[平安道]의 평양[平壤]으로 왔다고 수[數] 천년[千年]간의 역사서[歷史書]들은 일관되게 기록[記錄]을 하고 있으며, 근세[近世]의 조선[朝鮮] 말까지 이러한 기록[記錄]들은 이어지고 있다.
주[周]나라의 무왕[武王]은 맹진[孟津]을 건너 은[殷]나라를 멸망 시킨다. 그 맹진[孟津]이 지금의 낙양[洛陽] 동북[東北]쪽에 있음은, 조선사[朝鮮史]를 대륙[大陸]에서 지우기 위한 조작[造作]의 산물일 뿐이다. 조선사[朝鮮史]에서 관서[關西]와 서관[西關]을 가는데, 당시[當時]에 대신[大臣]들의 기록[記錄]들은, 만리[萬里]의 여정이라고 기술[記述]하고 있다. 또한, 고려[高麗]의 남경[南京]에 대한 기록[記錄]으로 들어가면, 지금 대륙사[大陸史]의 지명[地名]들은 철저히 왜곡[歪曲]과 조작[造作]의 산물임이 그대로 들어나게 된다.
함경도[咸鏡道]를 동북면[東北面]이라고 하는 것은, 서경[西京]인 서도[石]를 기준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지, 고려[高麗]의 개경[開京]이나 조선[朝鮮]의 한성부[漢城府]를 기준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는 당시[當時]에 대신[大臣]들이 남긴 문집[文集]을 통하여 알 수 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함경도[咸鏡道]를 동북면[東北面]이라고 한다고 해서, 경도[京都]를 기준으로 동북[東北]쪽에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역사[歷史]의 사실[史實]을 찾아가는 길을, 혼란[混亂]스럽게 할 뿐이다.
우리가 역사[歷史]의 사실[史實]을 찾아감에 있어서, 역사서[歷史書]에서 설명하고 있는 내용과 그 주장하고 있는 지역이, 사서[史書]의 기록[記錄]들과 부합[符合]되어야 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터무니 없는 주장들이 난무[亂舞]하고 있는 것은, 알 수 없는 일이며, 그러한 뜻을 의아[疑訝]스럽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의 역대[歷代] 왕조[王朝]들이 천자국[天子國]인가 ? 아닌가 하는 것은 거론할 가치도 없는 것이다. 대륙[大陸]의 중앙[中央]에 자리 잡고, 동서[東西]의 일 만리[一萬里]를 치달리던 대국[大國]의 본 모습과, 많은 생생한 기록[記錄]들이 이를 말해주고 증명[證明] 하고 있는데, 무엇을 더 논[論]할 것인가 ?
숭산[嵩山]은 천하[天下]의 명산이다. 등봉[登封]에서 숭산[嵩山]을 바라보면, 신선[神仙]이 노니는 선경[仙境]을 떠올리게 한다. 조선[朝鮮]을 건국[建國]한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가, 숭산[嵩山]의 남[南]쪽으로 도성[都城]의 터를 둘러보고, 터가 너무 좁다고 한말은 태조[太祖]의 웅혼[雄渾]한 기상[氣像]과 태조[太祖]가 천하[天下]의 영웅[英雄]이었음을 느끼게 하고도 남는다. 산세[山勢]는 그림과 같이 아름다운 천하[天下]의 명산임은 분명하나, 천하[天下]를 제압하고 호령하는 제왕[帝王]이 머물 자리는 아니다.
지금은 지나간 일이지만, 이곳에 천문대[天文臺]가 자리 잡고 있는 것에 대하여 많은 의문[疑問]을 가진 적이 있었다. 대개 천체[天體]를 관측하는 곳은, 제왕[帝王]의 도읍지[都邑地]에 있는 것이 관례였다. 그러나 이 등봉시[登封市]의 인근[隣近]에는, 그 어떤 왕조[王朝]도 도읍[都邑]을 둔적이 없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천문[天文]을 관측하고 천체[天體]를 관측하며, 기후[氣候]를 관측하는 천문대[天文臺]가 있는 것에 대하여, 의문[疑問]을 풀길이 없었다.
중국[中國]의 설명도 맞지를 않는다. 측경대[測景臺]를 주공[周公]이 만든 것이라고 하나, 이는 그들이 하는 말일 뿐이고, 원[元]나라 때에 천문대[天文臺]를 만들었다고 하는데, 원[元]나라가 이곳에 무엇하러 천문대[天文臺]를 만들겠는가 ? 고려[高麗]의 개경[開京]이 숭산[嵩山]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설명도 역사서[歷史書]와 부합[符合]되지 않는다. 이곳 숭산[嵩山]에서 서남[西南]쪽으로 가면 산이 첩첩[疊疊]인 산골로 들어가게 된다. 이 곳의 산골 동내에는 생활 도구들이 한국[韓國]의 시골과 똑같은 생활 도구들을 지금도 사용하고 있는 곳이 있다. 그 옛날 우리가 쓰던 도구들과 같은 것들이다.
멧돌에서부터 지게, 벼를 찧던 디딜방아, 그리고 절구 등이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을 보고 놀란 적이 있다. 지금은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지만, 당시[當時]의 역사[歷史]에 대한 지식은, 부족하기 짝이 없었다. 정혜한공[正惠韓公行]의 기문[記文]에서,........ 而又新館舍闢州路 建里門勸農桑 作惠民藥局以救窮民 收置銅儀以 謹測候, 또 관사[官舍]를 신축하고 주로[州路]를 닦고 이문[里門]을 세우고 농상을 권장하였으며,혜민약국[惠民藥局]을 개설하여 궁민을 구제하는 한편, 동의[銅儀]를 장치하여 천체[天體]와 기후[氣候]를 신중히 관측[觀測]하게 하였다. 라는 말은, 이 등봉[登封]의 동남[東南]쪽에 있는 천문대[天文臺]에 대한 역사[歷史]의 정확[正確]한 해답을, 우리의 역사[歷史]에 대하여 주고 있는 것이다.
현지[現地]에서 부르는 명칭[名稱]은, 관성대[觀星台]라고 하며, 주[周]나라의 주공[周公]이 이곳에서 천체[天體]를 관측했다는 것을 증명[證明] 한다는 고[古] 비석[碑石]이 있는데, 이것은 주공[周公]의 측경대[測景臺]라고 하고 있다. 또 해시계가 있는데 이것은, 일시계[日時計]라고 부르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설명들은, 자기들의 사서[史書]라고 하는 사마천[司馬遷]의 태사공자서[太史公自書]인 사기[史記]의 기록[記錄]과도 배치되는 모순[矛盾]된 설명이 아닐 수 없다.
우리의 역사[歷史]를 찾는 많은 사람들이 조선[朝鮮]이 천자국[天子國]인가 ? 아닌가에 대하여, 의문[疑問]을 가지고 있음을 알고 있다. 이에 대한 답은, 우리의 역대[歷代] 왕조[王朝]들은 대대로 천자국[天子國]이었음을 확실[確實]하게 말할 수 있으며, 이는 역사[歷史]의 수 많은 기록[記錄]들이 명확[明確]하게 증명[證明]하고 있다. 다만 역사[歷史]를 왜곡[歪曲]하는 자들이, 이를 변조[變造]하고 삭제[削除]하여, 역사서[歷史書]들의 일면[一面]만을 보고는 알 수 없게 조작[造作]하여 놓았을 뿐이다.
왕조실록[王朝實錄]에서 양성지[梁誠之]가 천단[天壇]에서 하늘에 제사를 올리는 것을 논[論]할 때, 우리나라는 하늘의 자손[子孫]이므로 마땅히 중국[中國]과는 관계가 없다는 말을 한 것은, 그에 대한 우리 역사[歷史]의 근본[根本]과 역사[歷史]의 연원[淵源]이 있기 때문에, 그러한 말을 임금에게 상주[上奏]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중국[中國]은 천자[天子]가 아니고 땅을 근본[根本]으로 하는 황제[皇帝]라고 한다고 말하고 있다.
이는 사기[史記]의 진시황본기[秦始皇本紀]와도 일치되는 말인데, 천황[天皇], 지황[地皇], 태황[泰皇]중에서, 가장 존귀[尊貴]했다는 태황[泰皇]을 취하여, 태[泰]자를 빼고, 황[皇]자를 취하고, 상고시대[上古時代]의 제[帝]자를 취하여 황제[皇帝]라고 했다고 태사공자서[太史公自序]의 사기[史記]는 기록[記錄]하고 있다. 황제[皇帝]는, 천제지자[天帝之子]와 근본[根本]이 다른 것이다. 천자[天子]는 천제지자[天帝之子]의 후예[後裔]들만이 가질 수 있는 존엄[尊嚴]한 것이다. 천제지자[天帝之子]의 왕조[王朝]들이 천자국[天子國]이 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임진왜란[壬辰倭亂]의 기록[記錄]들을 보면, 오묘[五廟]가 피난을 간다는 기록[記錄]들이 섞여 있다. 이것은 조선[朝鮮]의 제후[諸侯]에 해당하는 왕[王]들을 지칭[指稱]하고 있는 것이다. 조선[朝鮮]에서는 지방의 자사[刺史]들이 제후[諸侯]에 해당되고, 왕족[王族]의 일가들은 소국[小國]의 왕[王]과 같은 높은 신분과 지위[地位]를 지니고, 일국[一國]의 왕[王]으로 존숭[尊崇]을 받았다. 이러한 왕족[王族]들이 지방을 다스리게 되면 오묘[五廟]를 모시는 것이다.
이러한 기록[記錄]들이 조선사[朝鮮史]에 전해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역사서[歷史書]를 살피지 않고, 이에 대한 논쟁을 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意味]도 없는 것이다. 이러한 것은 조선사[朝鮮史]의 기록[記錄]들을 통하여 적나라하게 들어나고 있다. 천자[天子]의 조정[朝廷]은, 구묘[九廟]이며 칠묘[七廟]이다.
도은집[陶隱集]
하등극표[賀登極表]
繼天立極 端膺曆數之歸 守位曰仁 允協神人之望 翊戴伊始 謳歌悉均 欽惟道合彌綸 功存耆定
하늘의 뜻을 이어받아 법칙[法則]을 세웠나니, 이는 바로 역수[曆數]가 돌아옴에 응한 것이요, 자리를 지키기를 인[仁]으로써 하나니, 이는 참으로 신[神]과 사람의 소망에 부합[符合]하는 것입니다. 폐하[陛下]는 익대[翊戴]하는 처음부터 구가[謳歌]하는 것이 모두 똑같았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폐하[陛下]의 도[道]는 천지[天地]를 경륜[經綸]하는 데에 부합[符合]되고, 공[功]은 천하[天下]를 안정시킨 데에 있습니다.
惟大統之入纘 帝業重興 誕明詔之遠頒 皇猷益煥 爰副累朝之付托 聿觀萬化之更張 伏念猥襲世封 叨分省寄 風雲際會 恨莫陪於代來 天地久長 願恒申於華祝
들어와 대통[大統]을 이으시매 제업[帝業]이 다시 일어나고, 멀리 명조[明詔]를 반포하시매 황유[皇猷]가 더욱 빛을 발하니, 이에 누조[累朝]의 부탁에 부응[副應]하면서 마침내 만화[萬化]의 경장[更張]을 보게 되었습니다.삼가 생각건대, 신[臣]은 외람되게 봉지[封地]를 세습[世襲]하여 하나의 지방을 분담하여 다스리는 책임[責任]을 맡고 있는 까닭에 풍운제회[風雲際會]의 이 시대에 유감스럽게도 대래[代來]에 참석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천지구장[天地久長]과 같이, 화축[華祝]을 항상 올리기를 원[願]하옵니다. [중략]
우리의 역사[歷史]인 조선사[朝鮮史]의 기록[記錄]들을 통하여, 확연히 알 수 있는 천자국[天子國]의 위상을, 혼동[混同]하여, 조선[朝鮮]이 천자국[天子國]인가 ? 아닌가의 논쟁을 벌이는 일들은, 그 본질을 모르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다. 이에 더하여 조선사[朝鮮史]를 왜곡[歪曲]하는 자들이 이를 교묘[巧妙]히 악용[惡用]하여, 마치 조선[朝鮮]이 오묘[五廟]의 나라인 것처럼 만들어 놓았을 뿐이다........... 구묘[九廟]가 진경[震驚]하고 천자[天子]가 거가를 옮기고,........ 오묘[五廟]가 피난을 가야하는,...... 이러한 기록[記錄]들이 생생하게 전해지고 있는데, 왜 그에 대한 논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중국[中國]의 왕조[王朝]들이 모두 황제[皇帝]를 잠칭[僭稱]하고 있는 것은, 어떻게 보면 필연적[必然的]인 것이다. 그러나 십[十] 수년[數年]만에 망한 나라들이, 황제[皇帝]를 잠칭[僭稱]하고, 천년[千年]에서 오백년[五百年]을 오르내리는 조선사[朝鮮史]의 왕조[王朝]들에게 작위[爵位]를 주었다는 것은, 역사[歷史]의 사실[史實]과는 관계가 없는 것이다. 이러한 것들을 맞다고 주장하는 자들은, 역사서[歷史書]와는 관계가 없는 자들일 것이며, 우리의 역사[歷史]를 왜곡[歪曲]하고 날조[捏造]하는 자들일 것이다.
가정집[稼亭集]
송게이문서[送揭理問序]
揭君謂余曰 政出多門 民不堪命 方今四海一家 何中朝之法不行于東國乎 [중략]
게군[揭君]이 나에게 말하기를, 정령[政令]이 나오는 문[門]이 많으면, 백성[百姓]이 피곤해져서 감당하지 못하는 법[法]이다. 현재 사해[四海]가 한 집안이 되었는데, 어찌하여 중조[中朝]의 법을 동국[東國]에서는 행하지 않는 것인가? [중략]
余應之曰 高麗古三韓地 風氣言語不同華夏 而衣冠典禮自爲一法 秦漢以降 未能臣之也 [중략]
하기에, 내가 대답하기를, 고려[高麗]는 옛날 삼한[三韓]의 땅으로, 풍기[風氣]와 언어가 화하[華夏] 같지 않다. 그리고 의관[衣冠]과 전례[典禮]에 대한 하나의 법[法]을 독자적으로 행해 왔는데, 진[秦], 한[漢] 이래로 어느 나라도 신하[臣下]로 삼지 못하였다. [중략]
今在聖朝 親爲舅甥。恩若父子 民社刑政 俾皆仍舊 而吏治不及焉 [중략]
지금 성조[聖朝]의 시대에 있어서도 친분으로 말하면 구생[舅甥]의 관계요 은혜로 말하면 부자[父子]의 관계와 같아서, 민사[民社]와 형정[刑政]을 모두 예전대로 행하게 하고, 원[元]나라 관리의 다스림이 미치지 못하게 하였다. [중략]
가정집[稼亭集]
송정부령입조서[送鄭副令入朝序]
禹貢九州之外 聲敎所曁 東漸于海 而三韓之名未著也 自周封商太師之後 稍通中國 其在隋唐 征之不克 [중략]
우공[禹貢]을 보면, 구주[九州]를 다 설명하고 나서 그의 풍성[風聲]과 교화가 온 천하[天下]에 다 미친 가운데, 동[東]쪽으로는 바다[海]에까지 번져 갔다. 라고 하였는데, 삼한[三韓]의 이름은 아직 드러나지 않고 있다.그러다가 주[周]나라가 상 태사[商太師之後] 기자(箕子))를 봉[封]한 후에, 중국[中國]과 조금 통하기 시작하였다. 그 뒤 수[隋]나라와 당[唐]나라 때에는 삼한[三韓]을 공격하였으나 승리하지 못하였다. [중략]
及我王氏立國 歷宋,遼,金 或通或絶 彼亦無如之何 盖將有待焉者 [중략]
그리고 우리 왕씨[王氏]가 나라를 세움에 미쳐서는 송[宋], 요[遼], 금[金]의 시대를 거치는 동안 통교[通交]하기도 하고 절교[絶交]하기도 하였으나, 그들 역시 우리 고려[高麗]를 어떻게 해 볼 수가 없었다. 그러고 보면 아마도 좋은 때가 올 때까지, 기다린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한다. [중략]
가정집[稼亭集] 제14권
부여회고[扶餘懷古]
청구[靑丘]가 수기[秀氣]를 배태해 황하[黃河]에 응하면서 靑丘孕秀應黃河
온왕[溫王]이 동명[東明]의 가문에서 탄생하였나니 溫王生自東明家
부소산[扶蘇山] 아래로 옮겨 와 나라를 세울 적에 扶蘇山下徙立國
상서[祥瑞]로운 기적들이 그 얼마나 많았던고 奇祥異蹟何其多 [중략]
지나간 역사[歷史]가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주는 깊은 교훈[敎訓],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바르고 훌륭한 인재[人材]를 육성[育成]하고, 밝은 치도[治道]가 이어진 나라들은 장구[長久]한 세월을 유지 하였으며, 후대[後代]의 칭송[稱誦]을 받으며 후대[後代]의 사표[師表]가 되고 있다.
그러나 소인[小人]과 간신[奸臣]배들이 판을 치고, 곡학아세[曲學阿世]가 학문[學文]을 무너트리며, 지록위마[指鹿爲馬]의 고사[古事]와 같이 치도[治道]가 무너진 나라들은, 한때는 그 간신[奸臣]배들의 기세[氣勢]가 천하[天下]를 덮고, 손에 쥐고 흔드는 듯 보이지만, 그러한 것들은 일시적인 것에 불과 하다는 사실[事實]을, 역사[歷史] 기록[記錄]들은 지금의 우리에게 생생히 보여주고 있다.
오늘날 우리의 현실[現實]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개탄[慨歎]을 금할 수 없으며, 그저 할 말을 잃게 하고 있다. 이대로 세월이 더 흐른다면, 해를 가지고 달이라고 하는 자들이 나오고도 남을 일이다. 그러나 천운[天運]의 순환[循環]은, 차면 이지러지고, 이지러지면 다시 차는 것이다. 국가[國家]의 존엄[尊嚴]한 정도[正道]를 어지럽히는 자들은, 그 누구를 막론하고 각성[覺醒]해야 할 것이다. 바르지 못한 길이 오래 지속된 예는, 문자[文字]가 생긴 이래 찾아볼 수가 없다.
우리의 존엄[尊嚴]하고 숭고[崇高]한 역사[歷史]가 무너지고 나니, 위대[偉大]하고 웅혼[雄渾]한 우리 역사[歷史]의 맥[脈]은 단절[斷絶]되어 버리고, 그 후손[後孫]들이 마땅히 알아야 할 자기 조상[祖上]의 역사[歷史]도 모르는 기가 막힌 현실[現實]에 직면하게 되었다. 광복[光復]을 맞이하고 반세기[半世紀]를 지나며, 나라의 역사[歷史]를 바로 세우지 못하고, 비굴하고 자아[自我]를 잃어버리는 식민사학[植民史學]의 교육[敎育]을, 공교육[公敎育]을 통하여 가르친 폐단[弊端]은, 이제 그 본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리라.
천하[天下]에 정도[正道]가 사라지고, 옳고 그름이 없어진다면, 그러한 나라들은, 인간[人間]이 사는 나라가 아닐 것이다. 옛글에 이르기를, 수단[手段]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완력[腕力]으로 나라를 다스리자는, 이미 위정자[爲政者]가 아니며, 그러한 것은 정치[政治]가 아니라고 하였다.
대륙[大陸]의 서안[西安]과 낙양[洛陽],........ 그리고 남경[南京]과 북경[北京]은, 고려[高麗]의 송도[松都]와 고려의 강도[江都]이며, 조선[朝鮮]의 한양[漢陽]이며, 조선[朝鮮]의 한성부[漢城府]였다........ 靑丘孕秀應黃河, 청구[靑丘]가 수기[秀氣]를 배태해 황하[黃河]에 응하면서,......... 溫王生自東明家 온왕[溫王]이 동명[東明]의 가문에서 탄생하였나니,......... 그 누가 반도[半島]에서 백제[百濟]가 200개의 성[城]을 가지고 있다고 하였는가 ?
백제[百濟]는 화산[華山]의 부아악[負兒岳]이, 대륙[大陸]의 황하[黃河]를 끌어당기는 대륙[大陸]의 중심[中心]에서 나라를 세웠다. 백제[百濟]의 한산[漢山]은, 연꽃 세송이가 태고[太古]의 꽃을 피우고, 한산[漢山]의 부아악[負兒岳]이 중원[中原]을 굽어보는 곳에 지금도 의연히 서있다. 온왕[溫王]은 부아악[負兒岳]이 옥야천리[沃野千里]를 굽어보는 곳에 나라를 세우고, 대륙[大陸]의 중심부[中心部]에서, 칠백년[七百年]의 왕업[王業]를 누렸다.
조선[朝鮮]의 한양[漢陽]이 어찌 역사[歷史]의 연원[淵源]이 없을 수 있으랴 ! 삼한[三韓]의 한산[漢山]은, 화산[華山]이 되어, 태고[太古]의 연화[蓮花]는, 한성부[漢城府]의 경사[京師]에서 꽃을 피웠으니, 이름 하여 삼각산[三角山]이 되었다.
우공[禹貢]의 구주[九州]도 미치지 못한 대륙[大陸]의 삼한[三韓]은, 동방[東方]이라고 불렀다. 천산[天山]을 누르고, 역년[歷年]이 다하도록 만세[萬歲]를 누렸으니, 역사[歷史]의 연원[淵源]이 깊은 동서[東西] 일 만리[一萬里]에, 그 어느 곳인들 기록[記錄]이 없겠는가 ? 우리는 지금 반도[半島]의 한국[韓國]에서 우리의 역사[歷史]를 바라보고 있다. 아득하고 가이없이 외로이 끝없는 길을 가며, 우리의 역사[歷史]를 찾아 바로 세우려 하는 뜻은, 천자지국[天子之國]의 근본[根本]은, 본래 사해[四海]의 사표[師表]로서 만방[萬邦]을 다스리는데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