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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성문밖편지 원문보기 글쓴이: 성문밖편지
27. 오늘의 교회 무엇이 문제 인가? (3)
이번의 글은 앞에서 성경 해석과 적용에 있어서 잘못된 것을 지적 한 내용을 다시 재론을 합니다. 왜냐 하면 교회의 근본적인 문제가 바로 이와같은 시각 차이를 가져와 있기 때문에 오늘의 교회가 이대로는 안 된다고 말하는 것이고, 이것은 교회를 이해 하는데 본질적인 문제라 할 수 있어 보충 설명을 하려는 것입니다.
3. 전(聖殿) 문지방에서 흐르는 물(生水)?
에스겔서 47장 1절∼12절의 말씀 해석과 적용에 대한 오늘의 일반적인 교회 입장과 복음적인 입장의 차이를 설명하려고 합니다. 1절 "그가 나를 데리고 전 문에 이르시니 전의 전면이 동을 향하였는데 그 문지방 밑에서 물이 나와서 동으로 흐르다가 전 우편 제단 남편으로 흘러 내리더라"
"성전 문지방에서 흐르는 물은 마침네 창일 하여 헤엄할 물이 되었고,...이 물이 동방으로 향하여 흘러 아라비아로 내려가서 바다에 이르리니...이 물로 바다의 물이 蘇醒함을 얻고,...이 강물이 이르는 곳마다 번성하여 모든 생물이 살고 또 고기가 심히 많으리니....이 강이흐르는 각처에 모든 것이 살것이며...강 좌우 가에는 각종 먹을 실과 나무가 자라서 그잎이 시들지 아니하며 실과가 끊치지 아니하고 달마다 새 실과를 맺으리니 그 물이 성소로 말미암아 나옴이라 그 실과는 먹을 만 하고 그 잎사귀는 약 재료가 되리라"
① 교회당 주의자들의 설교
위의 에스겔서의 말씀으로 교회당 주의 자들이 설교를 합니다. "성전 문지방에서 흐르는 물," "성소로 말미암아 나오는 물" "이 물이 바다의 물을 살려 고기떼가 풍성 해지고, 이 물이 흐르는 강이 소성 하여 강가에는 각종 실과나무가 자라고, 실과나무에서는 달마다 새로운 실과가 열리고, 그 잎사귀들은 약 재료가 된다.
이 기막힌 생수, 이것은 성전 문지방에서 나온다, 이 생수로 헤엄을 칠만큼 넘치는 물을 얻고자 하는 자는 성전 문지방 곧 교회 문지지방을 부지런히 밟아라, 교회를 멀리 하는 자는 항상 메마르거니와 교회(당)를 열심히 찾는 자는 이 생수로 풍성한 삶을 산다. 이것을 믿는가?" 기막히게 멋진 설교가 된 샘일것입니다.
모든 분들이 다 그런 것은 아닐테지만 교회당 목회를 하는 이들의 대부분이 위의 말씀으로 설교를 할 때 본문을 이렇게 해석 적용을 해서 설교를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본문의 전(聖殿)을 교회당에 적용을 시키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신자들로 하여금 교회당을 열심히 찾게 만들고, 교회당을 섬기도록 독려를 합니다. 그래서 성서 지식이 깊지 못한 신자들은 교회당이 하나님의 성전 혹은 하나님의 집인 것 처럼 인식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당은 어느때는 성전이 되기도 하고 또 어느때는 교회가 되게 하기도 합니다. 여기서 정신을 차리고 생각을 해야 합니다. 깊은 생각 없이 성경해석과 적용을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 시켜 가르치니 하나님 앞에 범죄 행위가 된다는 것입니다. 교회당이 성전 입니까? 하나님이 거(居)하시는 전(殿)입니까? 만약에 이렇게 가르친다면 이것은 예사로운 것이 아니요, 적 그리스도적인 행위가 됩니다. 이것은 거짓 선지자들이 양의 옷을 입고 노략질 하기 위해 거짓을 진리로 둔갑시켜 가르치는 사기 치는 행위가 되기 때문에 심각한 검토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 하면 신약시대에 이르러서 사람의 손으로 지은 특정건물로 성전운운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전면 부인 하는 행위가 되기 때문입니다.
② 완성(폐지)된 성전
우선 예수께서 하신 말씀부터 생각 하도록 합시다. 요한복음 2:19-21절에서 예루살렘 성전을 두고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그리고 이어서 기록 하기를 "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르켜 말씀하신 것이라"고 합니다. 이 내용을 제자들이 이해 한 것은 예수께서 죽으신 후 3일만에 부활 해서야 비로소 깨닫게 된 것을 말합니다.(22)
그러면 성전 개념이란 그리스도의 몸을 의미 한 것이고, 그리스도가 부활 하심으로 성전의 의미는 완성이 된 것입니다.(다 이루었다/요19:30) 성전의 의미를 완성 시키기 위해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음의 고난을 겪으신 것입니다.
십자가로 성전의 의미를 완성 하셨다는 뜻은 당신을 영접 하고 믿는 당신의 백성들의 몸으로 성전을 삼으셨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오순절 성령 강림은 곧 그리스도의 영의 강림으로 주를 고백 하는 각 사람의 몸에 임 하셔서 믿는 자들의 몸을 성령의 전(殿)이라 한 것입니다.(고전3:16, 6:19)
그래서 성전의 개념은 사람의 몸 이상의 다른 것에 그 의미를 부여 하려는 행위는 절대로 용납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왜냐 하면 땅의 성전(건물)을 폐지하고 믿는자 들로 성전 삼기위해 십자가지신 사건이 무의미한 결과가 되기 때문이며, 또 다른 이유는 십자가로 폐지한 성전이 사람의 손으로 지은 건축물에 또다시 붙혀 지게 되면 그것은 곧 신당(神堂)개념이 되어 몸으로 이루어 져야 하는 교회의 의미가 종교개념으로 바뀌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교회가 이대로는 안 된다고 하는 것은 교회가 이방 종교와 같이 종교중의 하나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구조적 모순이 있다고 말 하는 것입니다. 이런 모순된 구조를 갖게 된 것은 성경 으로부터 된 것이 아니라 로마교회가 되면서 이방 종교문화로부터 만들어진 것이어서, 성경 말씀과는 이질적이고 억지가 된 성경해석과 적용이 될 수밖에 없는 결과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맞지 않은 옷을 입었을 때 불편 하고 어색 한 것 처럼, 오늘의 교회 구조와 성경이 그런 관계라고나 해야 할까? 목회 하신분들은 조금도 불편없이 성경해석이나 적용을 한다고 생각 할런지 모르겠으나 복음의 근본이해를 하고 성경적용을 하려 할 때는 불편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위에서 소개 한 에스겔서의 말씀처럼...부탁이 있다면 오늘의 개신교의 전체를 보고 앞으로의 교회를 생각 하면서 객관적 검토를 해달라는 부탁을 드리고 싶습니다.
③ 생수가 흐르는 근원
앞에서 "성전 문지방 으로부터 물이 흘러..."란 말씀을 오늘의 교회당에 적용 시키는 것이 잘못된 해석과 적용이라고 했습니다. 왜냐 하면 위에서 언급 한 것처럼 신약시대에 와서는 그리스도를 영접한 자들의 몸이 성전이라고 했고, 그 에게서 "영생 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4:13-14)하셨고, "믿는자는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요7:37-39)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생수의 근원지는 교회당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영접한 각 사람의 몸으로 부터란 것입니다. "믿는자는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요7:38) 하고 39절에서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르켜 말씀하신 것이라"고 말씀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교회당이 성령이 임 하신 장소가 아니라 믿는 각사람의 몸 이요, 성령이 임한 그들에게서 생수가 흘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우리믿는자의 역할이 전혀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깊이 생각 하면서 읽어야 합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이 판단을 해야 할 문제입니다.
교회당을 찾아서 그 곳에서(전 문지방) 생수(물)를 얻는다? 혹은 교회당으로부터 흐르는 물로 우리의 가정이 우리의 사회가 우리의 기업이나 일터가 소성을 하고, 열매를 맺게 한다? 그렇습니까? 그래서 열심히 교회당을 찾아야 하는 것입니까? 이 얼마나 황당하고 성경을 왜곡 시킨 가르침 입니까? 매일 혹은 매주일 우리가 교회당을 찾는 것은 교회당에서 우리가 생수를 얻기 위해서 교회당을 찾는 것입니까?
교회(당)는 예배를 우선으로 요구 하고
성령(예수)는 증거를 우선으로 요구 한다
우리는 한참 엉뚱 하게 뒤바뀐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생수를 얻어 내기 위해서 교회당을 찾는 다면 여러분은 항상 그리스도 밖의 사람이 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이미 영생 하도록 솟아난 샘물을 소유 한 자들이요, 우리에게서는 항상 생수의 강이 흐르고 있는 자들입니다. 이것이 없는 자들이라면 아직도 당신은 예수를 영접지 않은 자요, 성령으로 거듭나지 못한자 일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도 믿고, 성령으로 거듭난 확신을 하고 있는데도 여러분에게서 생수가 흐르지 않는 다면, 하나님의 약속이 잘 못된 것이 아니라, 여러분의 신앙형태가 잘못 되었기 때문입니다. 생수를 얻기 위해 교회당을 찾는 자가 아니라 이미 여러분이 소유한 생수를 밖으로 흘러 나게 해서 목마른자(불신자)로 마시게 해야하며, 마른 땅에서 싹이 나게 해야 하며, 죽어가는 바다를 살려 고기 떼가 살게 해야 하며, 나무들로 달마다 새로운 열매를 맺게 해야 합니다. 이렇게 하라고 성령(생수)을 선물로 주신 것입니다.
하지만 생수의 샘을 소유 하고 있으면서도 그 것은 가둬 둔채, 자꾸만 교회당에서나 생수를 구 하려는 신앙 형태가 되었기 때문에 당신이 소유 한 생수의 샘은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 한채, 썩은 우물이 되어 있을 뿐이란걸 깨달아야 합니다. 여러분이 처음 성령의 체험을 했을때 감격과 기쁨이 충만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시간이 가면서 그 감정이 살아진 것은 여러분 안에 임재 해 있는 성령을 갇둬 놓고, 자꾸만 밖으로부터 계속해서 생수(성령)를 얻으려고만 하기 때문에 당신 안에 있는 생수의 샘이 활동을 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된 것은 오늘의 교회 구조가 여러분을 그렇게 만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말을 이해 하기 위해서 마태복음 5: 13-16절의 말씀을 볼 필요가 있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너희는 세상의 빛이니..." 하신 말씀에서 이미 소금과 빛이 되었다(거듭 났을때)는 말씀을 주목 해야 하합니다. 여기서 생수, 빛, 소금,이런 단어들은 같은 뜻을 다른 말로 표현 하고 있다는 것이며, 다음은 "말 아래"(쌀 되는 말)는 Box혹은 틀을 의미 한 말로 지금의 교회당을 의미 한 말로 적용 시켜도 가능 한 말씀 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 하면 소금과 빛은 세상의 것이란 의미에서 볼 때 그런 해석이나 적용도 가능 하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소금이요 빛이라 한 것은 믿는 자들의 역할이 교회당에서 필요 한 것이 아니라 세상(불신자)에서 필요 하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세상에서 필요 한 것을 교회당에 묶어 두고 교회당 안에서 소금노릇 빛 노릇을 하도록 요구 된 오늘의 교회구조가 되어 있어 세상에서의 역할을 하지 아니한 탓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여러분 안에 있는 생수의 샘을 갇둬 둔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 증거가 앞에서 소개한 에스겔서의 "성전 문지방에서 흐른 물"에 관한 성경해석과 적용을 교회당에 두고 신자들로 교회당을 찾게 만든 경우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④ 생수를 흐르게 하는 활동
우리는 지금 성경과 교회구조가 맞지 않는 것을 말하면서 생수와 관련 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앞에서 생수의 샘은 곧 성령을 의미 한 것이라고 했는데,(요7:39) 그러면 생수의 흐름은 곧 성령의 활동을 의미 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성경과 오늘의 교회가 이 문제에 있어서 어떤 차이가 있는가를 비교검토 할 필요가 있습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 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1:8) 성령 강림 하심의 첫 목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그러나 오늘의 교회구조에서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 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교회당을 세우고 거기서 내게 예배를 드려라" 이렇게 성경이 고쳐져야 지금의 교회구조에 맞다는 것입니다.
이래도 이해가 안 될까? 그래서 수가성 여인과의 대화를 깊이 검토를 해야 한다고 말 한 것입니다. 여기서 예배문제와 오순절 성령 강림과의 절대적 관계가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성령 강림의 목적은 예배를 위한 것이 아니고 증거에 있는 것이며, 이것을 뒷받침 한 말씀이 수가성 여인 과의 대화에 있습니다.
여인으로부터 예배에 대한 질문을 받으신 예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여인아 내 말을 믿어라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리라"고 말씀 합니다.(신령의 예배에 관해서는 앞 글들에서 설명 했음) 이 말을 들은 여인은 즉시 성읍으로 달려가 기다리던 메시야를 만났다고 증거 합니다.
교회의 개념을 교회당(예배당)에 두려 하기 때문에 그 곳을 성전 이라 하고, 그곳에 나와야 그 문지방으로부터 흐르는 생수를 삶속에 흐르게 한다고 가르쳐, 예배에 우선을 두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증거의 삶은 차선이 되고 예배에 우선을 두게 된 다는 것입니다. 증거가 차선이 된 다는 뜻은 성령임재 하심의 첫 목적을 유기(성령 활동 하심의 제한) 하는 결과가 되어 내 안에서 흘러야 할 생수를 갇둬 버리는 결과를 만든 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난 글에 언급한바 있는 "예배가 우선 인가, 증거가 우선인가?"에 관 해서도 언급을 했던 것입니다. 이 말들은 서로 깊은 관계가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를 만난자(믿는자/ 생수의 소유자))들은 교회당을 찾아 예배를 드리는 것에 우선이 있는 자들이 아니라(예배당에서 생수를 얻으려는) 증거(생수를 나눠 주려는 자)가 우선되는 자들이란 것이고 그렇게 되기 위해 교회구조가 바뀌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배에 우선을 두기 때문에 예배당을 필요로 하고 , 예배당을 지어놨기 때문에 예배에 우선을 두려고 합니다. 하지만 신약 성경에서 예배를 요구 한 기록 보다도 증거에 훨씬 무게를 두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베드로 전서 2장 9절은 믿는자들의 신분과 역할에 대해서 말씀 하고 있습니다. 믿는자를 가르켜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 하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로 당신의 소유로 삼고 왕 같은 제사장을 삼으신 것은 우리로 우리를 부르신이 (예수)에게 예배를 드리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선전(選傳) 을 하게 하려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성령을 주심도 우리를 택하심도 하나같이 증인 되라는 것에 중점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증거란 불신자를 대상으로 한 활동이란 점에서 믿는자를 세상의 소금과 빛이라고 말씀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오늘의 교회구조가
예배당을갖고 예배에 우선을 두고 있기 때문에 교회당안의 소금이 되고 빛이 되어
교회당만을 우선으로 섬기는 결과가 되어, 성도는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의 역할은 차선으로 밀려나 지극히 소극적 형태로만 나타날 뿐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된 결과는 내 안의 생수의 샘은 영원히 흐를수 없는 썩어버린 샘이 되고 만다는데 불행이 있는 것입니다. 동시에 교회당을 중심한 목회(?) 하는 목사는 성경의 뜻을 빗나간 설교를 계속 할 수 밖에 없는 불행 한 설교자가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 마음 아픈 것입니다. 그래서 구조를 바꾸는 교회 개혁을 말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