②
흑암포(黑岩浦).
중원의 남단.
남해의 만경창파가 마주 보이는 포구(浦口)의 해일은 온통 검은 해암으로 뒤덮여 있어 이런 이름이 붙었는지도 몰랐다.
흑암포는 어촌이었다. 대략 이백여 호 남짓의 어가가 있었고 그들의 생업은 대부분 고기잡이였다.
팔월(八月) 열나흘(十四日).
이곳 한적한 흑암포에 일남일녀가 찾아들었다. 그들은 한 명의 화삼청년과 그의 서동(書童)으로 보이는 미소년이었다.
천우.
그가 초초와 함께 이곳에 나타난 것이었다.
쏴아아... 쿠쿠쿵......!
아득한 남해의 파도는 흑암에 부딪쳐 굉음과 함게 포말을 일으키며 부서진다.
남해는 망망대해였고 위대한 대자연의 무한대의 가능성과 자연의 거대한 힘을 보여준다. 힘찬 남아의 기상과도 같은 거침없는 파도와 중원의 원대한 야망처럼 대양은 광활하다. 알 수 없는 천우의 앞길처럼 수평선 너머로는 아직 아무 것도 보이지 않고 있었다.
천우는 묵묵히 아득한 수평선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은 끝을 알 수 없는 깊은 바다속처럼 고요했다. 웅혼한 기상으로 남해를 자신의 가슴 속에 다 담아내려는 듯 했다.
초초는 그런 그를 똘망똘망한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그녀는 그와 줄곧 동행하는 동안 천우의 신비스런 분위기에 익숙해져 있었다. 천우는 보통 때는 낙천적이며 장난기가 넘쳐 흐르는 쾌활한 성품이기는 하지만 그에게는 잘 노출되지 않는 누구보다도 풍부한 감성이 있었다.
초초는 그것을 느꼈다. 천우의 가슴 속에는 정열이 있었고 누구보다 따뜻한 피가 흐르고 있었으며 아름다운 이상이 있다는 것을 이젠 잘 알고 있었다.
초초는 천우가 결코 편격한 위인이 아님을 안다. 때로 천우는 광명정대하다기 보다는 약간의 마도적인 기질이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결국 그것이 천우의 본래 모습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 분이야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분이야......'그녀는 얼굴을 사르르 붉혔다. 그녀는 조숙하다. 군방원에서의 생활이 그녀의 나이를 뛰어 넘게 했으며 그녀는 벌써부터 천우에게서 이성을 느끼고 있었다.
천우라는 한 사나이의 영상이 그녀의 작은 가슴을 온통 지배하고 있었다.
"초초, 오래 전부터 나는 바다를 동경해 왔었다. 나는 한 번도 바다를 본 적이 없었거든.""......."
"바다는 어머니와 같다. 그 넓은 도량과 한없이 큰 포용력은 마치 어머니의 품과도 같기 때문이다."천우의 말에 초초는 놀랐다.
천우의 입에서 그런 감상적인 말이 흘러나올 줄은 몰랐기 때문이었다. 초초는 천우의 그런 점이 내심 좋았다.
"공자님의 어머님은 정말 자애스러우셨나 보죠?"
"자애......."
천우의 입가에 쓸쓸한 미소가 감돌았다. 망망한 바다를 멍하니 바라보며 말했다.
"그렇지. 어머님이야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부드러우며 현숙한 분이셨지. 후후... 그런 어머니를 가진 자는 드물거야."초초는 부러운 듯 말했다.
"공자님은 좋겠어요. 저는......."
그녀의 눈빛이 흔들렸다. 금방이라도 눈물을 흘릴 듯 했다. 그녀는 고아다.
어릴 적부터 버림받은 고아였기에, 모성(母性)을 알 리 없는 그녀였기에 그녀는 지금 한없이 천우가 부러운 것이었다. 그러나 만일 그녀가 천우의 과거를 안다면 어떤 표정을 지을 것인가?천우의 어머니가 줄곧 미쳐 있다가 죽기 직전에야 잠깐 정신이 들었다는 사실을 안다면 그녀는 천우의 과거 때문에 울 수가 없을 것이다.
"미안하구나, 초초. 너의 아픈 곳을 건드려서."
천우는 가여운 듯 초초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저는......."
초초는 그만 울고 말았다. 천우의 손길이 닿자 그때까지 눌러 참고 있던 부모님에 대한 그리움과 자신의 신세에 대한 서러움이 주체할 수 없이 솟구치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녀는 천우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그의 손이 그녀의 머리와 등을 쓰다듬었다.
"저는... 슬퍼하지 않아요. 공자님과 같이 있는 동안에는 말예요......."천우는 가슴이 뜨끔했다. 그는 그녀를 토닥여 준 뒤 말했다.
"초초, 너답지 않구나. 내가 너를 좋아하는 것은 네가 언제나 밝고 천진하기 때문이다."그 말에 초초는 얼굴을 들고 소매로 눈물을 훔쳐낸 뒤 생긋 웃었다. 여심이란 이렇듯 정인(情人)의 말 한 마디에 금방 웃을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요?"
"하하...! 얼마나 좋으냐? 과거란 흘러간 것이다. 너에게는 저 바다만큼이나 무한한 미래가 있지 않느냐?"초초는 생긋 웃었다.
"그래요, 공자님."
이어 그녀는 자신의 불행을 던져버리듯이 돌맹이 하나를 들더니 바다를 향해 힘껏 내던졌다.
돌멩이는 수면 위를 대여섯 번 차고 튀어 오르더니 물속으로 가라앉았다. 천우는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빙긋 웃었다.
그들는 흑암포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흑암포의 촌장(村長)은 어씨(魚氏)였다.
어노인은 바다에서 태어나 바다에서 잔뼈가 굵고 바다에서 늙은 전형적인 바닷사람이었다. 그는 굵게 옹이가 박힌 손으로 허옇게 센 머리를 긁적이더니 말했다.
"천노인(千老人)이라면 이미 오 년 전에 죽었습니다만......."천우는 이상하다는 듯 눈썹을 꿈틀했다. 그는 어노인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가 어떻게 죽었습니까?"
어노인은 곰방대를 서너 번 빨더니 고개를 흔들었다.
"글쎄올시다. 워낙 갑자기 죽어서... 의원의 말로는 뭐... 기혈이 심장에서 터졌다던가......?"천우는 흠칫했다. 그는 남천도의 관문을 지키는 일종의 수문장이었다. 도내(島內)의 도망자나 침입자를 미리 제압하고 감시하는 주요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서 도에서 파견한 사람이었다. 남천도로 보면 중책이니만큼 무공수위가 낮은 인물을 배치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그가 기혈이 심장에서 터져 죽었다면 두 가지 가능성이 있다. 하나는 고강한 장력에 의한 암습으로 외상없이 심장이 터져 죽었거나, 아니면 중독으로 일시에 기혈이 뒤집혀 급사(急死)한 것이었다. 물론 상대가 잘 아는 사람이었을 것이다.
초초는 아무 말도 없이 골똘히 생각에 빠져 있는 천우가 의아한 듯 눈을 깜빡이고 있었다.
천우는 다시 물었다.
"그는 혼자 살고 있었습니까?"
"그렇소이다. 천늙은이는 줄곧 혼자 살았습죠. 그는 고기 그물을 깁는 것으로 살았는데 아까운 늙은이었소.""그럼 그의 집은 지금 비어 있습니까?"
어노인은 고개를 저었다.
"그의 조카가 그의 일을 맡아 일하고 있습죠."
"조카?"
"허허... 기구한 일이오. 그 늙은이는 조카가 찾아온 다음날 죽었으니까. 그 천가 늙은이의 조카는 늙은이가 죽자 그곳에 눌러 살기 시작했소."천우는 잠시 침묵했다. 이어 담담히 물었다.
"그가 있는 집이 어디인지 가르쳐 주시겠습니까?"
모옥.
초라한 모옥은 언덕에 있었다. 마당에는 온통 그물이 널려 있었고 여러 가지 어구(魚具)들이 어지럽게 쌓여져 있었다. 천우와 초초는 모옥의 마당에 들어섰다.
마당에는 아무도 없었다.
천우는 입을 열어 사람을 부르려다 말고 눈썹을 찌푸렸다. 방으로부터 이상한 소리가 흘러나왔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곧 자지러질 듯한 교성과 헉헉대는 숨소리였다.
천우는 초초의 얼굴이 붉어지는 것을 보며 헛기침을 했다.
그러자 방안이 조용해지더니 약간 투박하고 신경질 섞인 음성이 튀어나왔다.
"누... 누구시오?"
천우는 즉시 대답했다.
"을목(乙木)의 기운이 뻗치니 누리가 온통 나무 그림자(木影)로다."그러자 방문이 벌컥 열렸다.
방안은 민망스러운 광경이었다. 남녀가 거의 벌거벗다시피 하고 있었다. 그 중 중년의 사내는 가슴에 털이 무성하게 나있고 얼굴은 사각형이었으며 눈이 가늘게 그어져 있었다.
그는 놀라운 듯 천우와 초초를 바라보았다.
"당신은 누구기에......?"
천우는 무겁게 냉막하게 일갈을 토했다.
"너는 신목(神木)의 구어(口語)도 잊었느냐?"
중년인의 안색이 급작스럽게 변했다. 경악으로 안색이 울그락붉그락 몇 차례나 변하더니 급기야는 그는 알몸을 가릴 생각도 못한 채 무릎을 꿇고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속... 속하, 신목을 뵙습니다!"
천우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너는 천노인의 후임으로 왔느냐?"
"그... 그렇습니다."
"저 여자는?"
방안의 여인은 삼십대였는데 수치심으로 얼굴이 벌개진 채 황망히 웃옷을 걸치고 있었다.
"소... 속하, 죽을 죄를... 이곳의 아낙네입니다."
천우의 눈썹이 심하게 일그러졌다.
"유부녀와 정을 통했단 말이냐?"
"그... 그것이......."
여인은 허겁지겁 옷을 걸치는 둥 마는 둥 하더니 달아나 버렸다. 그녀의 말려 올라간 속치마 아래로 허벅지가 희멀겋게 보이고 있었다.
"속하... 워낙 쓸쓸하여 잠시......."
천우는 신음을 흘렸다.
"음... 못본 것으로 하겠다. 너는 아직 해로(海路)를 기억하느냐?""무... 물론입니다. 하온데... 신목께서는......?"
"알 것 없다. 너는 임무만 수행하면 된다. 준비해라. 섬으로 가겠다."중년인의 안색이 크게 변했다. 그는 무엇인가를 급히 생각하는 듯 눈동자가 이러저리 바삐 움직였다.
"지... 지금 말입니까?"
"갈 수 없단 말이냐?"
"그... 그것이 아니오라... 그러려면 준비를 해야 합니다. 워낙 험한 해로가 되어서......."천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다. 언제면 출발할 수 있겠느냐?"
중년인은 염두를 굴리더니 말했다.
"삼일(三日)은 걸려야 될 것 같습니다."
"알겠다. 빨리 준비를 마치도록 해라."
"예... 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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