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에 관한 사도바울의 견해에 대해 특정 성경구절을 예로 들어 그것이 전부인양 주장하는 분들이 더러 있는데, 이상하게도 그런 분들은 맹렬하게 글을 쓰고 있는데, 안타깝게도 많은 분들이 침묵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예컨대 갈라디아서의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고 하여 우리의 죄가 예수님의 십자가로 인하여 완전히 소멸된 것으로 확신을 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 말의 의미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 옛사람이 죽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는 것은 나의 옛사람은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으니 지금 살고 있는 나는 내가 아니라 내안의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하나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육체 가운데 사는 마음은 하나님의 법을 섬기니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는 것이지요. 여기서는 직접적으로 육신의 불구속성은 언급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구절만 떼어 내서 해석하면 잘못 해석할 수 있지요. 천연가스님도 그 같은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즉, 이 구절만을 놓고 볼 때 천연가스님은 갈라디아 5장 24절을 들어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도 십자가에 못 박았다’고 하면서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자들은 이제부터는 자기의 삶을 살지 못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령으로 오셔서 그의 안에 살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는 오직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살아가게 됩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자는 다시는 그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못합니다. 그는 십자가에 못 박힌 채로 서서히 죽어가야 합니다. 그의 정과 욕심도 그와 함께 서서히 죽어갑니다.”고 하는 해석을 내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서서히 죽어갑니다.’는 것이 ①인간의 죄성의 완전 소멸인가, 아니면 ②인간의 죄성은 예수님이 다시 오셔서 구속의 사역을 하지 전까지는 성령의 인도를 받아 육적 욕망과의 끝없는 영적 투쟁을 통해 죄와 죄의 법에서 승리하여 인간의 죄성은 약화될지언정 절대로 없어지지 않는 것을 의미하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면 ③십자가에 못 박힌 정과 욕심은 성령의 도움을 받아 저절로 서서히 죽어가면서 소멸된다는 것인가 하는 점입니다. 만일 죄성의 소멸을 의미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해석이라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이런 해석을 허락하지 않고 있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갈 5:24)고 하여 많은 성도들이 이 구절만을 보고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아 소멸시킨 것으로 오해하게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구절만으로는 그렇게 볼 수가 있지요.
그러나 그 다음 구절을 보면 우리는 그 의미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즉,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격동하고 서로 투기하지 말지니라”(갈 5:25-26)는 말을 했다는 것입니다. 천연가스님은 ③번의 해석을 의미하는 것 같습니다. 만일 ③번이 천연가스님의 해석이라고 한다면 이미 우리의 몸은 정과 욕심과 함께 십자가에 못을 박아 못 박힌 채로 서서히 죽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믿음 안에서 별다른 행위 없이도 말이지요. 다 된 것이지요. 그렇다면 다른 말이 필요가 없어요. 믿어서 성도가 된 사람들에게는 다른 말을 할 필요도 없고, 다른 말을 해서도 안되는 것입니다. 저절로 서서히 죽게 되게 되어 있으니까요.
그런데도 바울은 믿음이 부족한 지 “서로 격동하고 서로 투기하지 말라”는 말을 한 것입니다. 아니 저절로 서서히 죽어갈 텐데 무엇 때문에 격동하지 말라고 하고, 투기하지 말라고 하느냐 이겁니다. 자신이 격동하고 싶어 합니까, 투기하고 싶어 하겠습니까?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것입니다. 격동해봤자, 투기해봤자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이지요. 다 끝났는데 왜 자꾸 행위를 말하느냐 이겁니다. 흔히 십자가에서 다 이뤘다고 하는 분들의 의견대로라면 성도들은 격동하지 않게 되어 있고, 투기하지 않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도 서서히 죽어가게 되어 있는데 왜 자꾸 격동하지마라, 투기마라, 육을 쫓지 마라고 행위를 말하냐 이겁니다. 다 십자가에서 소멸되어 끝났잖아요.
그런데 바울은 자기가 다 끝났다고 해놓고 자꾸 하지 마라는 것입니까? 그 이유는 명백한 것이지요. 사실 십자가로 말미암아 다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그러니 자꾸 하지마라는 말을 하는 것이지, 바보가 아닌 이상 왜 자꾸 하지마라고 하겠습니까? 다 끝났는데 가만 놔둬도 서서히 죽게 되어 격동하지 않게 되어 있고, 투기하지 않게 되어 있는데 왜 자꾸 행위를 말하느냐 이겁니다. 누가 올바른 말을 하는 것입니까? 사도바울입니까, 아니면 구원파와 같은 사람들입니까?
갈라디아서 6장을 보십시오. 바울은 이어서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네 자신을 돌아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갈 6:1)고 했습니다. 십자가에서 다 이루어진 신령한 성도들도 “시험받을까 두려워하라”는 것입니다. 시험받을 수도 있다는 정도가 아닙니다. 두려워하라는 것입니다. 무섭다는 것이지요. 만만히 불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또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갈 6:2)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다 이룬 줄 알았는데 짐을 서로 지라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법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십자가에서 다 끝났는데 무슨 또 그리스도의 법을 이루란 말인가. 그리스도의 법이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예수님은 이를 가리켜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말씀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막 12:30-31)고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서에서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롬13:10)고 한 것입니다. 이신칭의를 그토록 주장하였던 바울도 가장 중요한 계명이 무엇인가 하는 데에서는 사랑이라 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전13:3)고 했으며,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전13:13)고 했던 것입니다.
이는 바울만이 아닙니다. 야고보사도도 “너희가 만일 경에 기록한 대로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하신 최고한 법을 지키면 잘하는 것이거니와”(약 2:8)하고 그리스도의 법을 지키라고 했으며, 사도요한도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13:34)는 예수님의 말씀을 증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특히 요한은 예수님께서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요14:15)고 한 사실을 상기시켜 예수님을 사랑하는 자는 나의 계명, 즉 하나님을 공경하고,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계명을 지키라고 했던 것입니다.
그 이유는 명백합니다.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요15:10)고 한 것입니다. 아버지의 계명이 바로 예수님이 말씀하신 계명이요, 그 계명을 예수님도 지켜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과 같이 우리도 그 계명을 지켜야 예수님의 사랑 안에 거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요15:12)고 거듭 강조를 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개개인이 이뤄야 할 문제이지, 자신은 이루지도 않고 십자가에서 다 이뤘다고 용감하게 주장하는 분들, 참으로 안타깝다는 생각이 듭니다. 육신의 소욕(죄의 성질)이 소멸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다 이룬 것은 십자가에 돌아가시기 전입니다. 십자가에서 이룬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에서는 유대인들의 불신죄를 다 갚아서 청산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무 것이나 다 십자가에서 이뤘다고 하면 신앙이 좋다는 말을 듣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예수님을 위하는 것도 아니구요.
그래서 예수님은 자기 생각이나 인간이 만들어 놓은 교리의 폐해가 심각함을 알고 “너희가 하나님의 계명은 버리고 사람의 유전을 지키느니라”(막7:8)고 야단을 치셨으며, “너희가 너희 유전을 지키려고 하나님의 계명을 잘 저버리는 도다”(막7:9)고 개탄을 하셨던 것입니다. 지금 그 계명을 누가 버렸다는 것입니까? 오죽 하면 예수님께서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요14:21)고 하셨겠습니까? 그런데도 인간의 유전을 지키느라고 발악을 하는 인간들은 예수님의 이렇게 까지 하신 말씀을 단번에 무시해 버리고 있습니다. 십자가위에서 다 이루었노라고... 예수님과 함께 장사되어 다 이뤘는데 또 무엇을 하라는 것이냐고 발악을 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자기만이 다 아는 것 인양 비웃으며 다른 형제들을 내려다보고 있다는 것이지요. 이단이니 사단이니 하며 굿거리 장단을 맞추고 있는 것이지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폐한 것은 의문에 속한 율법입니다. “원수 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엡2:15)라고 분명히 율법의 어떤 것을 폐했는지 밝혔는데도 십자가만 나오면 까마귀고기를 먹었는지 다 폐했다거나 다 이뤘다거나 하는 헛소리를 하고 있는 분들이 있다는 것이지요. 이런 병은 어떻게 해볼 약도 없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인도를 받아야 하는데 ... 이해가 안됩니다.
이어서 바울은 이런 자들을 위해 이런 말을 했습니다. “만일 누가 아무것도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생각하면 스스로 속임이니라”(갈 6:3)고 했는데 이 내용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에 대해 성경주석에 쓰여 있는 그대로 옮기겠습니다.
즉, “아무것도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생각하면 - 바울은 동일한 주제 속에서 온전한 사랑을 실천하지 못하는 자들의 내적 상태를 지적한다. 다시 말해서 이웃의 무거운 짐들을 함께 나누어지지도 못하면서 의식적인 율법의 구조 속에 빠져 스스로 모든 율법의 요구를 지켰다고 착각하는 자들을 경고한다. 그들의 문제점은 자신의 재능이나 역할에 대하여 자신감을 가졌다는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교만한 상태에 빠져 하나님의 절대적인 판단 기준을 무시하고 율법을 자신의 유익과 종교적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해 지켰다는 것이다.”고 나옵니다. 지키지도 않으면서 지켰다고, 다 이루었다고 자기를 속이는 행위라는 것이지요. 다 이룬 것도 예수님이지 우리들이 무엇을 이루었다는 것입니까? 그것도 십자가상에서 이룬 것은 이룬 것이 아니라 죄값을 지불했다는 의미로 갚았다는 것입니다.
2. 바울과 야고보의 믿음과 행위
자 그러면 우리는 항상 바울과 야고보 서신을 비교하여 두 사도가 서로 상반된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인지 아닌지 알아 볼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바울은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 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갈 2:16)고 하여 의롭다 함을 얻는 것이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믿음이라고 했습니다.
이에 비해 야고보는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이삭을 제단에 드릴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약 2:21)고 하여 행함으로 의롭다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여전히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롬 3:28)고 하여 의롭다는 하심을 얻는 것은 믿음으로 된다는 것입니다. 야고보는 이에 질세라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 아니니라”(약2:24)고 하여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지 믿음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두 사도는 믿음으로냐, 행위로냐를 놓고 서로 상반된 견해를 피력하고 있다고 느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야고보가 믿음을 무시했느냐 하면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즉,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약 1:6)라 하여 오직 믿음을 강조하기도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바울과 야고보는 하나의 진리를 놓고 어떻게 서로 다른 견해를 말할 수 있는가. 흔히 행위냐 믿음이냐를 놓고 아직도 헷갈리는 분들이 많은 것이 기독교의 신학적인 문제 중의 하나입니다. 이러한 내용에 대해 극단적 선택을 하라고 한다면 둘 중에 하나는 틀렸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니 바울의 서신이나 야고보의 서신 중 하나는 성경에서 제외될 수도 있는 것이지요. 극단론자들은 지금도 이런 선택의 강요 속에서 일반 성도들을 혼미하게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럼 그런 사람들이 신앙이 부족해서인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진리의 깨달음이 부족할 따름이지요.
그러면 이것을 어떻게 봐야 하는가. 이는 바울이 말하는 행위의 개념과 야고보가 말하는 행위의 개념이 다를 뿐만 아니라 바울과 야고보의 당면한 문제가 다르다는 사실입니다. 즉, 서신을 받는 대상들이 각기 복음에 대한 이해와 인식을 달리하고 있기 때문에 나타나는 것이지요. 바울은 구원을 위해 율법을 준수해야한다고 믿는 자들에게 그것이 잘못되었음을 지적하기 위해 쓴 서신이고, 야고보는 구원에 대해 믿음을 지적인 개념으로 받아들여서 믿음을 드러내는 행위를 전혀 하지 않고도 이미 십자가에서 다 이뤘다고 하는 구원 완성론자들의 인식이 잘못되었음을 지적하기 위해 쓴 서신이라는 것입니다.
또한 바울이 행위로 의롭다 함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은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없는 율법적 행위로 의롭게 된다고 하는 자들에게 잘못된 것이라고 율법적 행위의 잘못된 개념을 바로 잡기 위한 것이고, 야고보는 예수그리스도를 믿되 지식적으로 믿는 자들에게 진정한 믿음은 곧 실천을 동반하지 않고는 의롭다 할 수 없다는 점을 말하기 위한 것으로 믿음에 대한 보충설명이라는 것입니다. 의와 행은 하나라는 것이지요.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자는 행으로 성화의 길을 가지 않으면 안된다고 보는 것은 칼빈에 와서 신학적인 정립을 보게 되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도 지금의 성도들은 성화의 문제를 거의 외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성화의 문제를 생각하지 않으면 어렵지도 않고, 힘들지도 않으며, 속이 편하다는 것입니다. 성경을 공부할 필요도 없지요. 감사하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성경은 단지 나의 믿음을 확인하고 은혜를 확인하는 정도로 전락하는 것입니다. 믿음 하나로 다 끝났으니 아주 은혜가 넘치지요. 그런 분들은 복음을 전파하다가 복음을 안받아들이면 아 선택에서 유기되었구만.. 불쌍하구만 .. 지옥문이 훤하이 하고 자신이 선택받은 데 대해 감사하며 콧노래를 부르며 다닐 지도 모릅니다. 선택과 유기의 확인을 실감하고 있으니 신이 난 것이지요. 이러한 잘못된 신학 때문에 신앙적 의무감도 없고 선택과 유기를 활동 속에서 실감하고 있다고 하며 은혜로운 하나님을 찬양하는 아이러니가 계속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3. 바울의 구원관
사도바울은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롬1:16)하고 말했습니다. 복음이 믿는 자에게는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된다는 것입니다. 믿지 않는 자는 복음에서 능력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어리석은 내용으로 치부될 수 있다는 것이지요.
따라서 믿는 이유는 바로 복음을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을 받기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롬 1:17)와 같이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는데 그것은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는다는 것입니다. 믿지 않는 자에게 하나님의 의가 나타날 리가 없는 것이지요.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의는 현재의 구원보다 미래의 구원에 이르는 개념임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와 같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산다가 아니라 살리라는 미래지향적이라는 것입니다.
로마서 5장은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롬 5:9)하여 피로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구원을 얻었다는 완료형이 아닙니다. 또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 즉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롬 5:10)하여 화목된 자로서 그의 살으심으로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구원을 얻었다는 현재 완료형이 아니라 미래 완료형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8장에는 소망으로 구원을 얻은 것으로 나옵니다. 13장에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니라"(롬 13:11)고 하여 구원은 믿음과 성령의 인도에 의하여 점점 구원에 가까워 오고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구원이 이렇게 단번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왜 오직 믿음을 강조했는가. 믿음이 구원의 완성을 의미하기 때문인가. 아닙니다. 믿는 자만이 의롭다 함을 얻는 것이요, 믿는 자만이 복음이 하나님의 능력이 되기 때문입니다. 모든 구원은 믿음으로부터 출발하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믿는 자에게만이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믿는 자만이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엡1:13)와 같이 믿는 자만이 그리스도 안에서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성령을 받는 것은 믿음입니다. 믿음만이 성령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은 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으로냐"(갈 3:2)고 묻는 것입니다.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믿음이라는 것이지요. 오직 믿음으로 성령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니라"(갈3:14)고 하여 이를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성령을 받아서 무엇을 할 것인가.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의 도우심으로 내 구원에 이르게 할 줄 아는 고로"(빌1:19)한 것과 같이 구원에 이르도록 도와준다는 것이지요. 즉, "갓난아이들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벧전2:2)하여 복음과 성령의 인도로 사랑을 실천하여 구원에 이르도록 성장하라는 것입니다. 이 말은 앞의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마음으로 뜨겁게 피차 사랑하라"(벧전 1:22)와 연관된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결론적으로 바울은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갈 6:8)고 하여 행한 대로 거두게 됨을 강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믿음이후에 행위를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육체에 심는 행위는 썩어진 것이어서 거둘 것이 없다는 것이지요. 육체에 심는 자는 가라지로서 거둘 것이 없기 때문에 불 못에 던져지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어서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갈 6:9-10)고 말했습니다.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낙심하지 말라는 것은 성경 주석에 ‘마지막 추수의 때가 지연된다는 것을 염두에 둔 표현이라며(Ridderbos), 임박한 종말을 눈앞에 두고는 누구든지 긴장하게 마련이지만, 간사한 인간은 이 '지연'으로 인하여 스스로 피곤해 하며 넘어지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피곤하지 아니하면, 피곤하여 넘어지지 아니하면 추수할 때가 이르러 거두게 된다는 것입니다. 한편 본절의 내용은 '너희는 선을 행하다가 낙심치 말라'는 살후 3:13의 내용과 매우 유사합니다. 그러나 본절의 행함의 의미는 ‘계속적이고 반복적인 행함’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육신의 죄를 섬기는 죄의 본성은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점점 약해지는 것입니다. 성령의 인도와 선행을 행함으로 서서히 죄의 본성이 약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능히 죄와 죄의 법을 이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죄가 소멸되느냐 하면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만일 인간에게 죄성이 소멸된다면 죄성이 소멸된 크리스찬끼리 결혼하게 되면 죄성이 없는 예수님과 같은 육신을 가진 자녀를 낳게 된다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죄없는 육신을 가지고 이 세상에 태어날 수 있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영적인 구원을 받았으니 당연히 예수님을 믿던 믿지 않던 이미 영적인 구원을 받은 자녀로 태어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실이 이렇게 됩니까? 아니 단 한명이라도 이런 자녀를 낳아본 역사가 있었습니까? 없었다는 것입니다. 만일 이런 역사가 일어났다면 무엇 때문에 사도바울이 “양자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린다”(롬 8:23)고 했겠습니까? 결국은 성경이 우리에게 주고자 하는 메시지는 영의 열매를 맺을 때까지 신앙을 지켜가라는 것입니다. 육신의 죄성은 소멸되지 않으나 성령의 인도를 받아 죄를 섬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영을 쫓아 영적 성장을 통해 죄를 약화시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끝까지 구원에 이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마24:13)는 말씀은 바로 이를 두고 한 말씀입니다.
바울의 핵심적인 내용은 믿는 자에게 복음은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한 것이며, 그 믿음으로 의에 이르나 육신은 죄를 섬기고, 마음은 하나님의 법을 섬기는 모순된 존재라는 것이지요. 그러나 믿음으로 예수그리스도 안에서는 성령을 받아 죄와 죄의 법을 이기면서 견디어 나가게 되면 구원에 이르게 된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물론 육체를 쫓게 되면 썩을 것을 거두어 구원을 상실한다는 것을 분명히 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구원을 소망으로 받아 몸의 구속 곧 양자되기를 간구하고 기다린다는 것입니다. 이 내용을 왜곡하면 안됩니다.
첫댓글좋은 설명에 감사드립니다. 한가지 예수 그리스도께서 율법을 완성하시고 폐하셨다고 할 때에 그에 대한 정확한 이해에 있어서 아쉬움이 있습니다. 폐하셨다고 하는 것은 율법 자체입니다. 옛 언약의 법으로서 기록되어 옛 언약의 백성들에게 지켜야한다고 하신 율법 자체입니다. 새 언약의 백성들에게는 이전 언약의 모두를 완성하시고 그분 안에서 녹여서 온전케 하신 새 법이 주어집니다.
오늘날 교회의 가르침, 개혁주의의 문제는 심화된 도덕법을 율법의 연장으로 본다는 것입니다. 심화된 도덕법과 율법의 도덕법은 다릅니다. 외형적으로는 비슷하지만 실상은 전혀 다릅니다. 그리고 법은 법으로서 삶과 죽음을 가르는 잣대입니다. 새 법을 준수하지 않으면, 율법 준수를 통한 의-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의-의 수준이라고 하더라도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합니다(마 5:20). 예수님은 농담을 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성경의 모든 말씀은 언제나 사실입니다. 진리는 사실에 기초하여 있습니다. 사실에 기초하지 않고는 진리일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구약의 율법을 완전하게 하셨다는 내용은 마태복음 5장에 비교적 자세하게 나옵니다. 예컨대 살인하지 말라고 했을 때 살인만 하지 않으면 율법에 걸리지 않던 사람들이 예수님께서는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마 5:22)고 하여 형제에게 노하는 것도 살인죄에 준하는 율법으로 강화시켰다는 것입니다. 살인은 노하는 데서 비롯되며, 노하게 되면 폭력을 행사하게 되고, 폭력을 행사하게 되다보면 사람을 죽이게 되지요. 예수님은 그 싹을 잘라버렸다는 것입니다. 간음하지 말라 등도 과거에 형식적으로 지키
려 했던 것을 음욕을 품는 자마다 간음한 것이라고 하여 성희롱이나 성추행을 정당화하려는 것을 아예 싹을 잘라버렸던 것입니다. 이 모든 율법을 사랑하라는 율법으로 완전하게 했다는 것이지요. 예수님께서 이 율법을 완성한 것은 십자가에서 완성한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돌아가시기 이전에 이미 다 완성하셨지요. 십자가에서 완성했다는 것은 자기식의 해석일뿐 그 어디에도 십자가에서 완성했다는 발은 없습니다. 다만 십지가로 율법을 폐했다는 의미는 다 아시는 바 대로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지요. 따라서 구원에 관한한 율법적 행위는 폐하셨다는 것이며, 거기다가 의문의 율법도 역시
폐했다는 것이지요. 의문(儀文)의 율법은 할례나 제사 절기 음식에 관한 규례 등과 같이 형식적인 "의식(儀式), 의식의 표(標). 의장(儀章)" 등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러한 율법은 폐했지요. 제사장을 통하여 속죄를 받던가 하는 등도 성소와 지성소를 가로막던 휘장을 갈라버려 성도들은 누구든지 예수님을 통할여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되었지요. 이 같은 의미에서의 율법이 폐해졌다는 것입니다. 십계명은 지금도 유효하지요. 도덕적인 삶과 규범으로써 말입니다.
불과 구름님의 문제제기에 동의합니다. 세례와 성찬 이 둘에서 우리는 기본적인 구원과 건설되어갈 구원의 이중성을 발견합니다. 일단 세례로 옛 사람이 끝나고 진리 안에서 거룩하고 하나님과 하나된 구원을 얻었지만 우리 안에 있는 아담의 타락한 형상이 고스란히 남아 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때부터 이미 다 해결하고 이기신 그리스도, 그 분으로 말미암아 정복해 가는 우리의 내부공사의 싸움이 계속됩니다. 다만 이 싸움의 방법에서 이견이 분분하며 잘못하면 율법의 행위로 되돌아 갈 우려가 있어 구원의 강한 확신을 주기 위해 다 끝났다고 일부가 강하게 주장을 하겠지요. 그리고 사실 강한 구원의 확신이 앞으로 나아가는
원동력이 됩니다. 율법인지 새 언약인지 어정쩡한 사람들에 비해서는 훨씬 생동감이 있습니다. 그리고 전도의 열매도 있고요. 그러나 그런 사람들에게 한국교회의 판도를 맡기기에는... 벌거벗고 칼 찬 수준밖에 안 됩니다. 그러나 그것도 하나의 도전이고 풍조이니 받아들이고 그 이상의 하나님의 구원의 로드맵을 제시하는 것이 매우 중요할 겁니다. 이제 세례의 의미만 붙잡고 왈가왈부 할 것이 아니라 성찬 곧 예수그리스도를 어떻게 수용해서 먹고 자라느냐 하는 싸움을 해야 할 겁니다. 그리스도안의 새 생명은 행위의 수고로 구원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먹는 양식에 의해 체질이 바뀌기 때문입니다. 서로의 진보를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영생의 문제를 논할 때 믿음(이신칭의)와 중생, 그리고 사랑의 실천을 말했습니다. 그런데 대부분 이신칭의에 매달려 있는 형편이지요. 또 하나 성찬(성례전)이 있지요. 어느 것 하나 빼먹으면 영생에 지장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볼때는 이신칭의만 제대로 연구가 되었지 중생과 성찬, 사랑의 실천에 대한 부분은 제대로 연구가 되어 있는 것 같지 않습니다. 성찬의 기원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시기 직전 최후의 만찬에서 떡을 떼서 주며, 내 살이니 먹으라, 또 포도주를 부우면서 마시라 내 언약의 피라고 한 데서 비롯된다고 하는데 잘못아는 것이지요. 원래 기원은 요한 복음 6장 29절 이하의 살과 피에 관한 말
씀이지요. 예수님께서는 '내 살과 내 피를 먹고 마시지 않고는 영생을 얻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즉 예수님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요 6:47)하시면서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요 6:53)고 하신 데서 내 살과 피를 먹고 마시라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어떻게 이룰 것인가를 고민도 하기 전에 최후의 만찬에서 성찬식을 상징적으로 실행하였지요. 그 누구도 실제의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신 사람은 없습니다. 이 내용을 오늘의 신학은 성도가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것을 십자가
에 못 박힌 예수그리스도의 대속사역에 참여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믿음으로 예수님의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님의 사역에 동참하는 것이 살과 피를 먹고 마신 것과 같다면 성찬식을 할 이유가 없지요. 또 그렇게 해석할 아무런 근거도 없습니다. 흔히 내 피와 살을 먹으라는 것은 피살을 받고 다시 태어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혈육으로 거듭나라는 의미와 같은 것이지 떡이나 포도주를 먹고 마신다고 영생을 얻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간단하게 말하여 믿음으로 칭의되어 사랑으로 생명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사랑과 성령님의 사랑으로 영적으로 중생되어 영적 양자로 중생한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영적으로만 구원을 받
아서 영적 양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몸의 구속이 아직도 안되어 성령의 도움이 없이는 죄의 법에 끌려가는 자신의 유약함을 어쩌지 못하는 존재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성령의 인도를 받아 영을 쫓는 삶을 살면서 죄와 죄의 법과 싸워서 이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사랑의 계명을 지켜서 성화의 길을 가서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가자는 것이지요.
좋은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구름님의 뜻은 십자가에서 다 이루어져 앞으로도 하나님 앞에 내가 더이상 죄인이 아니라는것은 잘못된방식이라는 것이지요.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믿음과 이웃을 사랑하는것)해야하고 육체로 심어서 타락하지않고 성령을 위하여 심도록 스스로 순종하며 살아야 한다는 뜻으로 알고 공감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불신죄를 청산하기 위해 예수님이 대신 지불한 것이고, 구원은 예수님의 부활의 역사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그 구원은 영적인 구원이기 때문에 육신이 아직도 죄의 법아래 놓여있는 신세라는 것이지요.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은 죽는 날까지 육신의 죄악의 욕망과 싸우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인간이 얼마나 게으릅니까? 인간이 목석이 아닌 이상 얼마나 정욕에 약합니까? 그러니 성령을 받아 죄를 이길 힘을 받아야 되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여 구원에 이르라는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서로 사랑하라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고 하셨지요. 그러나 십자가로 완전히 다 이루었다고 하는 분들은 사랑할 일도 없나 봅니다. 또 회개할 일도 없구요. 사도들이 구원에 이루라, 구원에 더 가까웠느니라 하는 것은 다 거짓말이라는 것입니다. 완전히 구원을 받았는데 또 무엇을 하라는 것이냐는 군요. 예수님이 믿는 자는 구원을 받았으니 그냥 놀라고 했나보지요.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키라고 했는데 그것이 안보이나 봅니다. 그래서 그런 류의 신앙을 가진 분들을 일컬어 구원파라고 하는 것이지요. 박옥수게열이 아니라고 해도 말이지요.
"그의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의 살으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으심이니,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롬 6:10-11)에서 처럼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죽은 자는 죄에 대해 죽은 자요,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산자는 하나님을 대하여 산자라 했지요. 죽음과 연합한 자는 죄의 사함받은 자요, 예수님의 부활과 연합한 산자는 구원받은 자이지요. 죄사함 받았다고 하여 곧 산자는 아닙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죄로 너희 죽을 몸에 왕 노릇 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을 순종치 말고,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롬 6:12-13)고 하여 완전한 구원을 받았다고 하는데도 여전히 죄가 너희 죽을 몸에 왕노릇하지 말고 몸의 사욕에 순종하지 말고 죽은 자 가운데 산자같이 하나님께 드리라는 것입니다. 완전 구원을 받은 사람들이 죽을 몸에 왕노릇하고, 몸의 사욕에 순종할 수 있으니까 그러지 마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완전구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린님 님이 믿는 분은 예수그리스도시며 불과 구름님이 아닙니다.예수 그리스도께서 님의 모든 죄들을 위하여 십자가에서 물과 피를 다 쏟으시고 고통 받으시다가 다 이루었다 하시고 죽으시고 장사되었다가 삼일 후에 님을 의를 위하여 아버지의 능력으로 죽은 자들로부터 일어나 다시 사신 분입니다. 불과구름님은 님을 위해서 살 한점 피 한방울도 찢기거나 흘리신분이 아닙니다.님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공로로 구원 받으셨습니다 속지마십시요 님을 구원 하신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다 이루었다 라는 주님 말씀만 믿으시고 내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불과 구름님은 님의 생각 속에 의심을 조성시켜 불신 하도록 하는 겁니다
첫댓글 좋은 설명에 감사드립니다. 한가지 예수 그리스도께서 율법을 완성하시고 폐하셨다고 할 때에 그에 대한 정확한 이해에 있어서 아쉬움이 있습니다. 폐하셨다고 하는 것은 율법 자체입니다. 옛 언약의 법으로서 기록되어 옛 언약의 백성들에게 지켜야한다고 하신 율법 자체입니다. 새 언약의 백성들에게는 이전 언약의 모두를 완성하시고 그분 안에서 녹여서 온전케 하신 새 법이 주어집니다.
그 새 법은 옛 법과 절대 무관한 것은 아니지만 옛 법은 절대로 아닙니다. 새 법이 옛 법과 상관 관계를 가지고 있지만 옛 법의 반복-일정 부분이라도-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옛 법은 옛 법이고 새 법은 새 법입니다. 우리에게는 새 법이 주어졌습니다.
새 법은 의식법을 완전케 하신 것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을 통한 죄사함, 시민법을 완전케 하신 것으로 세상과 달리 교회의 정체성을 드러냄, 도덕법을 완전케 하신 것으로 심화된 도덕법입니다. 이 모두는 율법과 상관 관계는 있지만 율법과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의 가르침, 개혁주의의 문제는 심화된 도덕법을 율법의 연장으로 본다는 것입니다. 심화된 도덕법과 율법의 도덕법은 다릅니다. 외형적으로는 비슷하지만 실상은 전혀 다릅니다. 그리고 법은 법으로서 삶과 죽음을 가르는 잣대입니다. 새 법을 준수하지 않으면, 율법 준수를 통한 의-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의-의 수준이라고 하더라도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합니다(마 5:20). 예수님은 농담을 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성경의 모든 말씀은 언제나 사실입니다. 진리는 사실에 기초하여 있습니다. 사실에 기초하지 않고는 진리일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구약의 율법을 완전하게 하셨다는 내용은 마태복음 5장에 비교적 자세하게 나옵니다. 예컨대 살인하지 말라고 했을 때 살인만 하지 않으면 율법에 걸리지 않던 사람들이 예수님께서는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마 5:22)고 하여 형제에게 노하는 것도 살인죄에 준하는 율법으로 강화시켰다는 것입니다. 살인은 노하는 데서 비롯되며, 노하게 되면 폭력을 행사하게 되고, 폭력을 행사하게 되다보면 사람을 죽이게 되지요. 예수님은 그 싹을 잘라버렸다는 것입니다. 간음하지 말라 등도 과거에 형식적으로 지키
려 했던 것을 음욕을 품는 자마다 간음한 것이라고 하여 성희롱이나 성추행을 정당화하려는 것을 아예 싹을 잘라버렸던 것입니다. 이 모든 율법을 사랑하라는 율법으로 완전하게 했다는 것이지요. 예수님께서 이 율법을 완성한 것은 십자가에서 완성한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돌아가시기 이전에 이미 다 완성하셨지요. 십자가에서 완성했다는 것은 자기식의 해석일뿐 그 어디에도 십자가에서 완성했다는 발은 없습니다. 다만 십지가로 율법을 폐했다는 의미는 다 아시는 바 대로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지요. 따라서 구원에 관한한 율법적 행위는 폐하셨다는 것이며, 거기다가 의문의 율법도 역시
폐했다는 것이지요. 의문(儀文)의 율법은 할례나 제사 절기 음식에 관한 규례 등과 같이 형식적인 "의식(儀式), 의식의 표(標). 의장(儀章)" 등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러한 율법은 폐했지요. 제사장을 통하여 속죄를 받던가 하는 등도 성소와 지성소를 가로막던 휘장을 갈라버려 성도들은 누구든지 예수님을 통할여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되었지요. 이 같은 의미에서의 율법이 폐해졌다는 것입니다. 십계명은 지금도 유효하지요. 도덕적인 삶과 규범으로써 말입니다.
불과 구름님의 문제제기에 동의합니다. 세례와 성찬 이 둘에서 우리는 기본적인 구원과 건설되어갈 구원의 이중성을 발견합니다. 일단 세례로 옛 사람이 끝나고 진리 안에서 거룩하고 하나님과 하나된 구원을 얻었지만 우리 안에 있는 아담의 타락한 형상이 고스란히 남아 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때부터 이미 다 해결하고 이기신 그리스도, 그 분으로 말미암아 정복해 가는 우리의 내부공사의 싸움이 계속됩니다. 다만 이 싸움의 방법에서 이견이 분분하며 잘못하면 율법의 행위로 되돌아 갈 우려가 있어 구원의 강한 확신을 주기 위해 다 끝났다고 일부가 강하게 주장을 하겠지요. 그리고 사실 강한 구원의 확신이 앞으로 나아가는
원동력이 됩니다. 율법인지 새 언약인지 어정쩡한 사람들에 비해서는 훨씬 생동감이 있습니다. 그리고 전도의 열매도 있고요. 그러나 그런 사람들에게 한국교회의 판도를 맡기기에는... 벌거벗고 칼 찬 수준밖에 안 됩니다. 그러나 그것도 하나의 도전이고 풍조이니 받아들이고 그 이상의 하나님의 구원의 로드맵을 제시하는 것이 매우 중요할 겁니다. 이제 세례의 의미만 붙잡고 왈가왈부 할 것이 아니라 성찬 곧 예수그리스도를 어떻게 수용해서 먹고 자라느냐 하는 싸움을 해야 할 겁니다. 그리스도안의 새 생명은 행위의 수고로 구원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먹는 양식에 의해 체질이 바뀌기 때문입니다. 서로의 진보를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영생의 문제를 논할 때 믿음(이신칭의)와 중생, 그리고 사랑의 실천을 말했습니다. 그런데 대부분 이신칭의에 매달려 있는 형편이지요. 또 하나 성찬(성례전)이 있지요. 어느 것 하나 빼먹으면 영생에 지장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볼때는 이신칭의만 제대로 연구가 되었지 중생과 성찬, 사랑의 실천에 대한 부분은 제대로 연구가 되어 있는 것 같지 않습니다. 성찬의 기원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시기 직전 최후의 만찬에서 떡을 떼서 주며, 내 살이니 먹으라, 또 포도주를 부우면서 마시라 내 언약의 피라고 한 데서 비롯된다고 하는데 잘못아는 것이지요. 원래 기원은 요한 복음 6장 29절 이하의 살과 피에 관한 말
씀이지요. 예수님께서는 '내 살과 내 피를 먹고 마시지 않고는 영생을 얻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즉 예수님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요 6:47)하시면서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요 6:53)고 하신 데서 내 살과 피를 먹고 마시라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어떻게 이룰 것인가를 고민도 하기 전에 최후의 만찬에서 성찬식을 상징적으로 실행하였지요. 그 누구도 실제의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신 사람은 없습니다. 이 내용을 오늘의 신학은 성도가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것을 십자가
에 못 박힌 예수그리스도의 대속사역에 참여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믿음으로 예수님의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님의 사역에 동참하는 것이 살과 피를 먹고 마신 것과 같다면 성찬식을 할 이유가 없지요. 또 그렇게 해석할 아무런 근거도 없습니다. 흔히 내 피와 살을 먹으라는 것은 피살을 받고 다시 태어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혈육으로 거듭나라는 의미와 같은 것이지 떡이나 포도주를 먹고 마신다고 영생을 얻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간단하게 말하여 믿음으로 칭의되어 사랑으로 생명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사랑과 성령님의 사랑으로 영적으로 중생되어 영적 양자로 중생한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영적으로만 구원을 받
아서 영적 양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몸의 구속이 아직도 안되어 성령의 도움이 없이는 죄의 법에 끌려가는 자신의 유약함을 어쩌지 못하는 존재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성령의 인도를 받아 영을 쫓는 삶을 살면서 죄와 죄의 법과 싸워서 이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사랑의 계명을 지켜서 성화의 길을 가서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가자는 것이지요.
좋은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구름님의 뜻은 십자가에서 다 이루어져 앞으로도 하나님 앞에 내가 더이상 죄인이 아니라는것은 잘못된방식이라는 것이지요.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믿음과 이웃을 사랑하는것)해야하고 육체로 심어서 타락하지않고 성령을 위하여 심도록 스스로 순종하며 살아야 한다는 뜻으로 알고 공감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불신죄를 청산하기 위해 예수님이 대신 지불한 것이고, 구원은 예수님의 부활의 역사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그 구원은 영적인 구원이기 때문에 육신이 아직도 죄의 법아래 놓여있는 신세라는 것이지요.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은 죽는 날까지 육신의 죄악의 욕망과 싸우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인간이 얼마나 게으릅니까? 인간이 목석이 아닌 이상 얼마나 정욕에 약합니까? 그러니 성령을 받아 죄를 이길 힘을 받아야 되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여 구원에 이르라는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그린님께서 잘 이해하셨다고 봅니다.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여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도 육신을 지배하는 죄와 죄의 법은 소멸이 안된다는 것이지요. 우리의 심령이 성장할수록 그에 비례하여 죄의 법의 영향력은 약화될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서로 사랑하라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고 하셨지요. 그러나 십자가로 완전히 다 이루었다고 하는 분들은 사랑할 일도 없나 봅니다. 또 회개할 일도 없구요. 사도들이 구원에 이루라, 구원에 더 가까웠느니라 하는 것은 다 거짓말이라는 것입니다. 완전히 구원을 받았는데 또 무엇을 하라는 것이냐는 군요. 예수님이 믿는 자는 구원을 받았으니 그냥 놀라고 했나보지요.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키라고 했는데 그것이 안보이나 봅니다. 그래서 그런 류의 신앙을 가진 분들을 일컬어 구원파라고 하는 것이지요. 박옥수게열이 아니라고 해도 말이지요.
"그의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의 살으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으심이니,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롬 6:10-11)에서 처럼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죽은 자는 죄에 대해 죽은 자요,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산자는 하나님을 대하여 산자라 했지요. 죽음과 연합한 자는 죄의 사함받은 자요, 예수님의 부활과 연합한 산자는 구원받은 자이지요. 죄사함 받았다고 하여 곧 산자는 아닙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죄로 너희 죽을 몸에 왕 노릇 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을 순종치 말고,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롬 6:12-13)고 하여 완전한 구원을 받았다고 하는데도 여전히 죄가 너희 죽을 몸에 왕노릇하지 말고 몸의 사욕에 순종하지 말고 죽은 자 가운데 산자같이 하나님께 드리라는 것입니다. 완전 구원을 받은 사람들이 죽을 몸에 왕노릇하고, 몸의 사욕에 순종할 수 있으니까 그러지 마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완전구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린님 님이 믿는 분은 예수그리스도시며 불과 구름님이 아닙니다.예수 그리스도께서 님의 모든 죄들을 위하여 십자가에서 물과 피를 다 쏟으시고 고통 받으시다가 다 이루었다 하시고 죽으시고 장사되었다가 삼일 후에 님을 의를 위하여 아버지의 능력으로 죽은 자들로부터 일어나 다시 사신 분입니다. 불과구름님은 님을 위해서 살 한점 피 한방울도 찢기거나 흘리신분이 아닙니다.님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공로로 구원 받으셨습니다 속지마십시요 님을 구원 하신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다 이루었다 라는 주님 말씀만 믿으시고 내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불과 구름님은 님의 생각 속에 의심을 조성시켜 불신 하도록 하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