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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hani.co.kr/arti/culture/book/937468.html
그러다 1916년에 한 정당에 가입하게 된다. 이 정당은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이었다. 이후 멘셰비키보다 더 급진적인 노선인 볼셰비키에 가담하게 된다. 블라디미르 레닌과 협력 관계가 된 그녀는 극동 지역의 공산주의 확산을 위해 떠나게 된다. 1917년에 소련 공산당에 입당했으며, 한국계 중에서 최초의 공산주의자로 꼽히게 되었다. 먼저 독일의 밀정으로 오해받아 체포되어 있던 이동휘를 구명 활동으로 석방하게 한 그녀는 소비에트 러시아의 지원을 받아 김립, 이동휘와 함께 한인사회당을 결성하게 된다. 이는 한국 최초의 볼셰비키 정당으로 1918년이다. 직책은 "극동인민위원회 외무인민위원". 비록 짧은 시간 존속했던 임시 조직이었지만,[6] 볼셰비키 측에서 "인터내셔널리스트"로 분류했던 인물이기도 하다. 또한 볼셰비키당 하바롭스크 시 위원회 사무국원(일부 국내 기록에서는 책임 비서라고도 한다.)이었는데, 소비에트 러시아의 특성을 볼 때 김 알렉산드라가 정말로 시 위원회 사무국장, 책임 비서(서기장)였다면 하바롭스크 시장이나 다름없다.
일본군의 시베리아 출병으로 위협을 느끼자 6월부터 100여 명의 조선인 적위대를 구성해 반일 항쟁에 돌입했으며,
한인사회당 창당 단 5개월 만에 백군과 일본군에게 체포되었고, 1918년 9월 16일 처형당했다. 이때의 유언은 아직도 남아 있다.
러시아 하바롭스크의 마르크스가24번지에는 김알렉산드라의 기념비가 있다. 비문은 아래와 같다.
한국계 최초의 공산주의자로 꼽히기도 하였다.
공산주의자로 유명한 이동휘가 공산주의를 배우기도 전에 김 알렉산드라는 극동인민위원회의 외교관이자
러시아 볼셰비키의 극동 방면 지도자 중 한 명이었다.
이동휘가 공산주의에 관심을 가지게 된 이유도 바로 김 알렉산드라에 의해 석방되었기 때문이다.[7]
러시아에서는 김병화재단에서 2008년 김알렉산드라의 에세이를 비롯한 자료를 모아 책을 낸 보리스 박에게 기념품을 전달한 바 있다. #참고[8]
항일 활동에도 족적을 남겨 건국훈장을 받았다.
1918년 9월 러시아 군사재판정. 수의를 입고 피고석에 선 한 동양인 여성을 향해 재판관이 제안한다.
“만일 ‘여성으로서’ 당신이 재판관들에게 자신의 범죄를 뉘우친다고 호소한다면
당신은 자유의 몸이 될 수 있다.” 이 여성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답한다.
“여성으로서? 당신의 표현은 나뿐만 아니라 이 세계 인구의 반을 점하는 모든 여성을 모독했어요.
당신은 여성의 권리를 인정하고 있지 않지요. (…)
만일 내가 당신의 말대로 여성으로서 자신의 범죄를 뉘우친다면,
나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배신하고 전 세계 여성 앞에 죄를 범하는 게 될 것입니다.”
재판관의 마지막 제안을 거절한 이 여성은, 최후의 순간에도 눈을 감지 않는다.
‘내 눈을 천으로 가리지 마라. 나는 죽음을 내 두 눈으로 똑똑히 보고 싶다.’
누구의 딸도 아닌, 혁명가 김알렉산드라의 불꽃 같던 삶
어떤 여성은 엄마라서 자신의 인생을 포기하지만, 어떤 여성은 엄마이기에 자신의 인생을 걸고 싸운다. "네가 살 세상은 달라야 한다. 국적도 민족도 인종도 계급 구별도 없는 세상이어야 한다. 모두가 평등한 세상." 김 알렉산드라는 엄마이기에, 모든 걸 걸고 싸웠다.
1917년 그녀는 보다 조직적인 노동투쟁을 펼치기 위해 기꺼이 볼셰비키(공산당원)가 된다. 김알렉산드라의 투쟁은 강주룡으로 이어졌을 결기를 떠올리게 한다. 그녀들은 자신들의 투쟁이 서로에게 그리고 후대에 어떻게 연결될지 전혀 상상하지 못했겠지만. 고무 공장 동무들의 임금 삭감을 저지하기 위해 "끝까지 임금 감하를 취소치 않으면 나는 근로 대중을 대표하여 죽음을 명예로 알 뿐"이라고 연설한 후 을밀대로 오른 강주룡의 결기는 알렉산드라의 그것에 닿아 있다. 그녀는 을밀대 고공 농성으로 임금 삭감을 막아내며 자신을 투쟁의 불쏘시개로 썼다. 이로 인해 감옥에 가게 되고 병을 얻어 고작 31세에 운명하지만, 그녀의 노동 운동가의 정기는 오늘의 여성들로 이어지고 있다. 자신의 안위에 연연하지 않고 보다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세계로 길을 내기 위해 불꽃 같은 인생을 살다 간 앞선 시대의 그녀들에게 경의를 표한다.
1917년 볼셰비키 혁명이 일어날 것을 누구도 예측하지 못했다는 역사의 고백처럼, 김알렉산드라의 시간 역시 한 치 앞도 내다보기 힘든 살얼음 같은 정국이 이어지고 있었다. 투쟁의 근거지였던 블라디보스토크도 백위군와 적위군이 내전을 벌였고, 일본군 또한 연합국의 일원으로 내전에 개입하고 있었다. 조선 독립과 사회주의 건설이 다른 뜻이 아니었던 조선 혁명가들에게 일본의 탄압은 실로 극악했다. 우랄 페름에서 볼셰비키로 크게 활약하고 있는 그녀의 존재는 일제에 눈엣가시였다.
1918년 하바롭스크 극동인민위원회의 외무위원장이 된 김알렉산드라는 이동휘와 함께 '한인사회당 적위군'을 조직해 백위군과 일본군에 맞서지만 큰 병력 손실을 입고 퇴각하게 된다. 그녀와 한인사회당 간부 13명은 아무르강을 오가는 기선으로 피신하지만 결국 백위군에 포위된다. 그녀의 죽음을 언급할 때 아무르강에 던져졌다고 전해지는데, 이는 사실과 다르다.
그녀는 백위군에 잡혀 모진 고문을 당하고 총살당했다. 이 참혹한 현장에서 그녀가 한 비장한 발언이 전해지게 된다. "내 눈을 천으로 가리지 마라. 나는 죽음을 내 두 눈으로 똑똑히 보고 싶다." 자신의 죽음을 목도하겠다는 의지는 어떤 삶이 빚어낼 수 있는 걸까? 눈을 가린 채 적 앞에서 죽음을 맞는 일은, 지금껏 겪어 낸 투쟁의 삶을 가리는 일일 것이다. 부릅뜬 눈으로 마지막까지 세상을 지켜보면서 죽음으로 삶을 가져가려 한 그녀의 다짐이 웅숭깊다. 그녀는 죽음 앞에 '심장 같은' 아이들의 이름을 불러 보았을까?
그녀를 잡아간 백위군은 그녀를 회유했다. 조선인이 왜 러시아 혁명에 끼어들었냐는 재판부의 힐난에, 그녀는 이렇게 답했다.
"조선인이기에 볼셰비키다. 억압받는 형제들의 자유와 해방을 위해 싸웠고, 영원히 그럴 것이다."
단지 조선만의 해방이 아닌 세계의 해방이 목적이라는 그녀의 국제적 인식은 자국의 이익을 위해서만 혈안이 되어 있는 백 년 뒤인 작금의 상황과 놀랍도록 대비된다. 김금숙 작가가 그녀를 조선의 딸이 아닌 '시베리아의 딸'로 명명한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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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민족의 부역자들이 자신들의 안위를 위해 역사를 바꿔 쓰고 있다.
독립가의 후손들이여 !!
이 일을 무시하지 말아라.
조상들이 지켜보고 있다.
어떤 여성은 엄마라서 자신의 인생을 포기하지만, 어떤 여성은 엄마이기에 자신의 인생을 걸고 싸운다
. "네가 살 세상은 달라야 한다. 국적도 민족도 인종도 계급 구별도 없는 세상이어야 한다.
모두가 평등한 세상."
어떤 여성은 0 부인이라 특권의식을 가지고 있다.
권력위에 앞 서 있고 우리의 국토를 개인의 이익을 위해 사유화 한다.
법 위에 살아 있는 권력자로서.
또한 민중과 백성을 위한 것은 포토그래픽으로 희화화 한다.
우리의 국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