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하가 어때서 69회
11월도 다 지나 갑니다. 우리 집에서 요즘 철수가 자주 입에 오르 내려요. 부모
님들은 저보다 더 앞서 가시네요. 아빠는 혹시나 어느날 갑자기 제가 깜짝 발표
라도 할까봐 걱정하시더군요. 오늘 아침도 식탁에 가족이 모였을 때 철수 얘기
가 나왔어요.
"네 맘대로 결정 하지마라. 아무래도 불안 해."
아빠는 고상하게 말씀하시죠. 후후, 엄마 눈치를 좀 보시면서 말입니다.
"무슨 결정이요?"
"그 철수 말이다."
"네? 걔는... 음... 걔하고 연인 사이 맞아요. 하지만 아빠가 생각하시는 건 나
중 문제인..."
"그게 말이다. 결혼해서 살면 말이다, 남자가 여자보다 잘나야 돼. 너 남자 속
이 얼마나 좁은 줄 모르지? 우리나라는 아들들을 그렇게 키웠어. 여자보다 잘나
야 한다."
"철수 못나지 않았어요."
"그렇게 말한다는게 이미 마음이 갔군. 연하에다 공대생이라며? 학위 받을 생각
은 아닐거 아냐. 평범한 직장인... 사회 생활하면 니가 더 많이 벌거다 아마.
넌 아무렇지도 않겠지. 하지만 걔가 못견뎌 할거야. 아내가 자기 보다 모든 면에
서 잘났다고 생각되면 처음엔 좋아할 지도 몰라. 그러나 남자들, 하나 씩 스트레
스를 받지. 나중엔 자기 염치에 못이겨 아내를 괴롭히지. 다 그래."
"당신도 그랬우?"
엄마가 끼어 들었죠. 아빠는 말을 그만 두시더니 벌컥 화를 냈습니다.
"우리 약국 이 약사 소개 시켜 줄게."
"네? 이 종석씨 말하는거에요? 저 약사 싫어요. 죽어도 약사는 싫어요."
아차, 울 아빠가 약사신 걸 잠시 잊었군요. 아빠가 입을 턱 벌리시더군요. 아빠
가 괜히 앞서 생각하시고 강압적인 태도를 보이시니까 저에게 반항심 같은 게 일
었다고 할까요. 제 목소리가 조금 커졌습니다.
"에잇! 누가 지 애미 안 닮았다 할까 봐..."
아빠는 그 말을 남겨 놓고 거실로 나가 버렸습니다.
"엄마 무슨 말이야?"
"말 그대로 네가 날 닮았단 말이잖아."
학교로 오는 동안 자주 웃었습니다. 지금까지 왜 몰랐을까? 아빠가 대학 졸업
도 하기 전에 결혼을 하게 된 실제 이야기를 오늘 아침 엄마께 들었어요. 후후,
나도 그래 볼까?
30년전만 해도 연애 결혼보다 중매 결혼이 많았을때죠. 우리 엄마 대단했어요.
호호.
"집에서는 결혼 얘기 들리지. 니네 아빠는 철없는 학생으로 밖에는 안 보였지.
답답하더라..."
엄마 얘기를 검토해 보면 이런 상상이 되는 군요.
"여기서 뭐하는거야!"
"당구 치잖아."
"나 집에서 또 선 보래."
"봐."
"뭐에요?"
"어짜피 너하고 난 안되는거야. 난 먹고 살 자신 있으니까 넌 좋은데 시집 가."
"이봐요. 홍영훈씨."
"가서 선 봐. 나 당구 쳐야 돼."
"나쁜 놈!"
"지금 내가 뭘 할 수 있어? 기다릴 수 밖에. 나 먼저 가지는 않을게. 가서 선
봐, 맘에 들면 후딱 헤치우구."
"야!"
"이게 어따 되고 하늘같은..."
"하늘 같은?"
이때 우리 엄마가 눈물을 찔끔 흘려야 그림이 되지요. 원망하는 눈빛에 아빠는
당황을 하고 당구대를 던져 버리고 엄마 곁으로 가 다독 거립니다. 같이 당구 치
던 놈, 아니 분들이라 해야 겠군요. 투덜 되겠죠. 못봐 주겠네 진짜, 애인 없는
놈 서러워 살겠나. 이런 식으로 말입니다.
아빠는 엄마를 달래고 엄마는 훌쩍 거리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당장 결혼 해. 오늘 우리 부모님 찾아 가 그렇게 말씀 드려?"
아빠는 당황이 되겠지요. 아직 결혼 생각은 못했기에. 엄마를 떼어 놓으며 황당
한 말투로 얘기했겠죠.
"얘가 진짜. 나 작년에 뭐 한 줄 알지? 선배 꼬임에 빠져 집에서 올라 온 등록
금 전부 털어 잠실 쪽에 땅 샀어. 나 그 등록금 벌려고 온갖 잡일 다해 봤다.
참 돈 벌기 힘들더라. 그 일 때문에 나 졸업하려면 아직 일 년 더 있어야 돼. 너
네 부모님이 날 달갑게 여기겠냐. 그리고 결혼하면 뭐 먹고 살래?"
알고 봤더니 울 엄마가 아빠 마지막 두 학기 등록금 대 주었더군요. 어떻게 등
록금으로 땅 살 생각을 했을까요? 그게 나중엔 제법 큰 재산이 되었고 10여년 전
에 엄마 개인 병원 차릴 바탕이 되었지만...
약간 화가 난 엄마는 또박한 발음으로 따지듯 말했을 겁니다.
"영훈 씨는 내가 먹여 살려. 자기는 그냥 자신감과 맷집만 있으면 돼. 오늘 우
리 집 가서 아버지만 물고 늘어 져."
"뭐? 무슨 말이야?"
아빠의 얼굴은 좀 우스운 표정이야 합니다.
"나 자기랑 사고 쳤다 그럴테니까 자기는 아버지께 무조건 나 데리고 살거라 그
래!"
"엉?"
"임신 진단서 그거 위조해 갈테니까 자긴 무조건 우리 아버지께 잘못했다고 빌
어."
"야..."
"왜요?"
"많이 맞을텐데... 너네 아버지 무섭던데..."
"씨... 맞더라도 장인어른 그러며 끝까지 버텨. 남자가 그럴 용기도 없니?"
"맞다가 죽으면?"
상상한 게 철수 때문에 좀 이상하군요. 아빠 모습에 철수가 자꾸 끼어 들었어
요. 엄마 모습엔 제가 끼어 들었고... 저도 안되면 저 방법 써 먹어야 겠군요.
호호, 근데 요즘 들어 결혼 얘기가 많이 나오네요. 철수와 결혼 하겠단 생각은
있지만 이,삼 년 뒤의 일일 줄 알았는데, 며칠 전 철수 집에 갔다 온 이후로 우
리 부모님이 좀 과민 반응을 보이시네요.
철수는 요즘 대학원 시험 때문에 열심인 척 하고 있습니다.
"열심히 하고 있는거야?"
"이거 완전히 거저 먹기야. 시험 보는 전 날 여관방에 모이기로 했어요. 우린
시험 소스 다 풀고 들어가는 거야. 영어 공부만 하면 돼."
"너네는 그러니?"
"아무래도 자기 학교 학생이 부려 먹기 쉬울테니까. 타학교 생들보다 유리한 점
이 많아요. 내가 들어갈 연구실 담당 교수님하고는 면담도 끝났고 프로젝트도 통
보 받았어요. 겨울 방학 때부턴 연구실로 출근해야 돼."
"아직 시험도 안 봤잖아."
"에이, 그 다 붙는거라니까."
"공대는 왜 그러니?"
"공대니까."
"넌 대학원 졸업하곤 뭐 할거야?"
"병역 특례 업체 간다고 했잖아."
"끝이야?"
"나름대로 생각하는 건 있어요. 아주 생각없이 살진 않을거야."
"후후. 우리 철수 잘나야 되는데..."
"엉? 암."
하루 하루 날짜가 지나갑니다. 학생들은 기말고사를 보고 있고 학교는 곧 또 방
학에 들어 가겠지요.
오늘 날씨는 많이 흐리네요.
초라한 겨울 풍경, 특히나 학교 오는 국도 주변의 겨울 풍경은 아련한 그리움
과 작은 가슴 떨림을 주지요. 허전한 느낌. 잘 몰랐는데 철수가 가슴 깊이 파고
들어 와 버렸나 봅니다. 이 년동안 바로 이웃에 살았던 기억. 지금은 그게 아니
죠. 가족과 함께 있으니 하나의 허전함은 들지 않는데 불과 몇 개월 전까지 좋았
던 기억들은 추억이 되어 날 허전하게 만드네요.
잠시 나갔다 온 사이 약대 로비 자판기 앞에서 철수와 배선배가 종이컵 하나씩
을 들고 다정하게 얘기를 하고 있는 걸 보았습니다. 철수가 상당히 여유를 찾은
것 같네요. 이젠 자주 삐치지 않을까요?
"선배님 나와 있었네요?"
"어? 응. 얘가 너 찾아 왔길래."
"철수 왔니?"
"응."
"난 이만 들어 가 볼게. 철수야 언제 셋이서 당구 한 번 치자."
"그러죠."
배선배도 이제는 철수를 인정하는 듯 내가 오자 여유있는 미소를 던져 주고 자
리를 피해 주었습니다.
"배선배와 제법 친해졌나 보다?"
"친해져 보여요? 빠큐다 새꺄!"
바로 고개를 돌려 배선배가 들어 간 방향에다 대고 손가락질을 해 버리네요. 니
가 그러면 그렇지.
"같이 커피마시더니 왜 그래?"
"새끼가 친한 척 하잖아요."
"야, 말 버릇 고쳐."
"계속 반말해 놓고선 뭐 선배니까 반말해도 되지? 왜 묻나 그걸..."
"왜 그래?"
"헤헤. 괜히 그래 보는거야. 그래도 기분 나쁘네."
"뭐가?"
"짜식이 지가 은정일 알면 얼마나 안다고 말끝마다 은정인 말이지... 저 사람하
고 그렇게 친해요?"
"너만큼은 아니니까 걱정 마."
"하하, 당연히 그래야지."
"당연히?"
철수 방에 가 차 한잔 하고 집으로 돌아 갑니다. 나올 때 내가 살던 방 문을 쳐
다 보았습니다. 그립네요. 저 곳이 말입니다. 나하고 얘하고 많은 추억이 깃든
곳인데...
"발표 언제 나?"
"곧 나겠지."
"흠, 어, 나 갈게."
"조심해서 가요."
밤에, 새벽인지 모르겠어요. 잠이 들었었는데 전화 벨 소리 때문에 깼어요. 얼
떨결에 받았죠.
"여보세요."
"누나야."
"어, 철수구나. 근데 몇 시야?"
"모르지."
"야, 나 자다 받았어."
"꼭 전화할 일이 생겨서..."
"뭐?"
"거기 눈 와요?"
"눈? 잘 모르겠는데?"
"창 밖에 함 봐바요."
"잠깐만."
창 밖엔 흠, 조금씩 눈 발이 흩날리고 있었습니다. 올 겨울 첫 눈인가 봅니다.
하지만 눈이라고 하기엔 너무 초라한 진눈개비 였습니다.
"오긴 오네."
"와요?"
"근데 별로야."
"거긴 별로야? 여긴 엄청 많이 와. 아마 거기도 곧 많이 올거야."
"그것 때문에 전화 한거야? 너 어디야?"
"여기? 공중전화 박스."
"안 추워?"
"좀 춥지만 첫 눈이잖아."
"애처럼 왜 그러니?"
"애처럼? 그게 말이지, 음..."
"뭐?"
"작년에 누나가 첫 눈오면 데이트 하자고 했잖아. 작년엔 승주 때문에..."
"치. 그래 내일 첫 눈 온 기념으로 근사하게 데이트 하자."
"그래. 내일 대학로 갑시다."
"그럴게."
"하하, 그 대답 들을려고 전화 한거에요. 가르쳐 줄까?"
"뭘?"
"지금 새벽 두시 이십 팔분이네."
"나도 시계 봤어."
"그럼 오늘 봅시다. 다시 잘 자요."
"알았어. 너도 잘 자."
"푸하하! 눈사람 만들어야지."
"그렇게 많이 왔어?"
"자꾸 쌓여. 그럼 안녕. 돈은 여전히 빨리 떨어지네. 쟈스트 모우먼트!
누나!"
"왜?"
"사랑하옵니다."
"으으으..."
"뭐야?"
"닭살 돋아서..."
"엉? 그러니까 누나가 그런 말 못 듣는거야."
"후후, 나 잘래."
철수란 애, 말 그대로 애네요. 데리고 살면 심심하진 않겠어요. 창 밖에 작고
하얀 것이 조금 씩 떨어집니다. 눈, 철수는 눈이 오면 마로니에 거리에서 목도
리를 휘날리며 여자 친구와 걷고 싶다고 했죠. 작년 첫 눈 올 때 그렇게 하자고
약속 하고선 그냥 지나쳤네요.
이쒸, 철수 그 녀석 잘 자던 날 깨워 밍숭맹숭하게 만드네요. 한 번 깼다가 다
시 잠이 들기가 쉽지가 않았습니다. 닫았던 창을 열어 밖을 보았죠. 눈이 내리
긴 하지만 쌓이긴 힘들겠어요. 수원 쪽은 어느정도로 눈이 올까? 괜히 궁금
하네요. 철수가 보고 싶어 졌어요. 잠도 오지 않은데... 그럴까?
갑자기 떠 오른 생각에 서둘렀습니다. 옷을 갈아 입고 학교 갈 준비를 했죠. 어
짜피 가야할 학교 몇 시간 앞 당긴다고 해가 될 건 없겠죠. 자기가 내 단잠을 깨
웠으니 나도 걔 단잠을 깨운다 해도 녀석이 뭐라 투덜되지 못할겁니다.
"오늘 일이 있어 일찍 학교 갑니다."
식탁에 메모 한 장 남겨 놓고 새벽 세시경에 집을 나섰습니다.
새벽에 국도 길은 위험하지요. 더군다나 서울을 벗어나자 눈 발이 굵어 졌습니
다. 평소 같으면 한 시간이 채 걸리지 않는 거리지만 조심하다 보니 거의 두시
간 가까이 걸려 율전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정말 철수 말대로 율전엔 눈이 많
이 왔어요. 지금도 함박 눈에 가까운 눈이 내리고 있고 쌓인 눈은 큰 눈사람을
만들수 있을 만큼 쌓여 있었습니다. 허허, 철수 방에 불이 켜져 있더군요. 히죽
웃으며 철수 방으로 갔죠. 근데 철수가 없더군요. 초인종을 마냥 누를 수도 없었
습니다. 다들 자고 있을텐데 초인종 소리가 부담되었습니다. 이 녀석 어딜 간거
야. 어랏! 철수 방 문은 잠겨 있지 않았습니다.
이불, 자다가 일어 났다는 게 이불 모양에서 바로 표가 나네요. 어디 잠시 나갔
나 봅니다. 한 두번 들락 거렸던 곳이 아니라서 혼자 들어가 있는 것에 부담스러
움을 느끼지 않았습니다. 십 분이 지나고 이십분이 지나도 철수는 들어 올 생각
을 하지 않았습니다. 어딜 간 걸까? 이 새벽에 말입니다.
발자국 소리가 들렸습니다. 뛰어 오는 소리. 그리고 방문을 열고 철수가 들어
왔습니다. 푸하하!
얼굴은 빨갛다 못해 검붉었고 목도리는 목을 감고 있는게 아니라 머리와 턱을
둘러싸고 있었습니다. 추리닝 바지에 위에는 패닝조끼를 입고 두툼한 장갑엔 눈
을 이따만큼 묻히고는 방 문을 열고 들어 와 나를 보고는 놀랐습니다.
"앗!"
"너 어디 갔다 온거야?"
"누나가 여기 왜 있는거야?"
"니가 잠 깨운 바람에 그냥 학교 와 버렸다."
"에? 그 깜깜한 새벽에 여기 내려 온거야?"
"그래."
"이 여자가... 사고라도 나면 어떡할려고 그래?"
"조심해서 왔으니까 걱정 마."
"언제 온거야?"
"한 삼십분 쯤 전에."
"그 남자 방에 함부로 들어와도 되는거야?"
"한 두번 들어왔니? 넌 도대체 어디가서 뭘 하고 온거야?"
"헤. 뭐 했는지 보여 줄까?"
"뭐?"
"옥상으로 따라 와 봐요."
녀석은 장갑과 목도리를 풀다 말고 내 손을 잡아 이끌더군요. 녀석의 손이 얼음
처럼 차가웠습니다.
푸우! 진짜 애군요. 옥상 바닥은 엉망이었습니다. 곱게 쌓였다면 너무나 아름다
웠을 옥상은 파헤치고 뭉쳐지고 밟힌 눈 때문에 아주 지저분해 보였습니다. 옥
상 한 구석에 놓인 눈사람 두개. 제법 컸어요. 거의 내 허리 높이 까지 오는 눈
사람 두개.
박철수, 홍은정. 이름을 파 놓지 않았다면 누가 누군지 알 수없을 만큼 닮은
두 개의 눈사람.
"새벽에 이거 만들었니?"
"응."
"내일 학교는?"
"파장 분위기잖아. 내가 사랑스럽지 않아요?"
"참, 철없이 보인다."
"재밌게 살아야지. 다음에 눈 오면 같이 만들어요. 이따만하게..."
철없이 보이는 철수가 참 순수하게 사랑스러워 보이는 건. 저 행동, 아이처럼
두 팔로 커다란 원을 그리는 저 모습 때문은 아닐거에요.
"에구. 야, 박철수?"
"왜?"
"이게 나야?"
"응."
"이게 여자 같아 보여? 내 엉덩이가 이렇게 크니?"
"바보네에... 그거 허리야. 머리 엔드 몸뚱이. 누나가 짚은 곳은 허리 쯤 되겠
다."
녀석이 손으로 가리키며 설명을 하는군요. 나도 그 정돈 알지.
"두개가 똑 같잖아."
"얘도 진짜 애네. 대충 생각해라. 눈사람이 다 거기서 거기지. 그런 거나 따지
다니... 낭만이 없어 낭만이..."
"치. 춥다 내려가자."
"헤헤, 누나!"
"앗 차가워! 너 어디다 손을 집어 넣는거야."
"어? 나의 실수."
"너 죽었어."
녀석이 장난친다고 손을 집어 놓은 곳은... 흠,흠. 목 뒤로 넣었는데 내가 놀
라 몸을 빼다가 그의 손이... 흠,흠. 눈 뭉치를 만들어 어색함을 무마하기 위해
냅다 던졌습니다.
"퍽!"
그것도 못 피하냐. 그의 얼굴에 눈 뭉치가 주루루 흘러 내립니다. 히히.
"어쭈, 댐비네?"
"퍽!"
짜식이 여자라고 봐주지 않더군요. 그래 너죽고 나죽자.
연하가 어때서 70회
헤헤, 히죽! 아까 그 감촉은 뭐랄까? 누나와 자칫집 옥상에서 내가 만든 작품들
을 감상했었다. 장난 삼아 차가운 손을 누나 목 뒤로 넣었는데, 누나가 놀라 몸
을 빼는 것이 아니고 돌리는 바람에 모양새가 이상하게 되었었다. 빼도 박도 못
하고... 아무래도 그 뭉클했던 감촉은... 하하.
누나가 시비를 걸어 왔다. 눈뭉치를 내게 던졌다. 가소로왔지만 누나의 웃는 모
습이 좋아 좀 놀아 주었다. 아무도 보는 사람 없는데 이런 애들이나 하는 눈싸
움 쫌 하면 어때.
"씨, 껄핏하면 울고 있어."
나 솔직히 많이 봐주었다. 누나가 내게 눈뭉치를 던졌을 때 피할 수 있었지만
하는 모양새가 귀여워 그냥 맞아 주었다. 나중에 누나가 하는 짓은 장난이 아니
더라. 저 여자의 내면에 깔려 있는 폭력 성향을 느낄 수 있었다. 저 번 어색한
사이 될뻔 했을때 부터 눈치 채고 있다. 내가 맞아만 주니까 자기 실력이 대단하
다고 생각했는지 마구잡이로 던졌다. 내 표정엔 상관 없이 에잇, 에잇! 하면서
마구잡이로 던졌다. 그러나 나 그냥 맞으며 웃었다.
"이제 내려 가요."
"호호, 나 눈싸움 잘하지? 이거 재밌다."
"맞는 나는 별로 재미없어. 추워요, 이제 내려 가요."
"나 눈싸움 처음 해보는거다? 너도 던져 봐. 바보 같이 맞지만 말고."
"맞아 준거야. 그만하고 내려가요."
"에이, 맞아주긴 뭘 맞아 줘? 내가 잘 던졌잖아."
"안 내려 갈거야?"
"철수야? 던져 봐, 던져 봐 빨리."
"가소롭..."
"퍽!"
말하고 있는데 맞으니까 아팠다.
"헤헤. 아프지? 너도 던져 봐."
"장난이 아니잖아!"
아픈 것 까진 참을 수 있었는데 쌩글 웃으며 놀리는 누나의 얼굴은 참을 수 없
었다. 그래서 나비처럼 날아 벌처럼 쏘았다. 눈 뭉치를 재빨리 만들어 파파팟,
뛰어가서 바로 일미터 근방에서 누나 얼굴에 대고 냅다 던졌다. 조준 사격했다
는 말이다. 퍽! 그랬더니 울었다. 씨...
그 눈 좀 맞은게 뭐라고, 나 누나를 부축하고 내려와야 했다. 간접 포옹이라 기
분은 좋았지만 엄살 엄청 심한 거 같았다. 누나는 눈물을 찔끔거리다 침대 위에
앉아 계속 거울만 쳐다 보고 있다.
"많이 아파요?"
"내 얼굴 봐 지금 어떻게 됐는지?"
"그러길래 왜 잠 자는 사자의 코털을..."
"너 나에게 감정 남아 있지?"
째려 보니까 무섭다야. 누나 콧등 위가 다른 부위에 비해 유난히 빨갛다. 저기
맞았나 보다. 감정? 생긴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없어지면 안돼지.
"응. 누나에게 감정 많아."
"뭐야?"
"연인 사이에 감정 없이 지낼 수 있나? 러브! 애정."
"치."
"거울 그만 봐요. 미안하잖아."
누나가 거울을 놓더니 주위를 살폈다.
"아침 차릴 거 있어?"
"없는데..."
아침? 해가 뜨려면 한 시간 가량 지나야 한다. 고로 아침 얘기가 나올 시간이
아니다. 아침 밥이야 해 뜨면 나가서 사 먹으면 된다.
"그럼 뭐 먹을 거 없어?"
"없어. 배 고파요?"
"응. 잠도 오구."
"뭐 좀 사올까?"
"지금 문 연 곳이라야 편의점 밖에 없지?"
"그쵸."
"그냥 자자."
"응?"
"아침 먹을 때까지 자자구."
"뭐야? 이 여자가 정말."
"깜깜해도 아침이잖아."
"방바닥 차가워. 나는 어디서 자라고?"
"너? 그럼 넌 자지 마."
"에? 같이 자자는 말은 안하네?"
"이 좁은 침대서 어떻게 같이 자."
"허허! 내가 남자라서 같이 못자는 건 아니고?"
"다음엔 내가 껴안고 자 줄게."
"허허! ... 정말? 언제?"
"너랑 나랑 같이 살게 되면."
참 자연스럽게 말하네. 진짜 나 데리고 살려고 저러나? 생긴건 참 현대 여성으
로 보이는데 생각은 ...
누나는 내 보호(?)아래 내 침대에서 잠이 들었다. 피곤할만도 했겠지. 책상 의
자에 앉아 잠이 든 누나를 보았다. 사랑스러웠다. 보고만 있어도.... 나도 잠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모른척 누나 옆에 가 자 버릴까? 보고만 있으려니 눈이 자
꾸 감겼다.
"으허! 따뜻하다."
나 대중 목욕탕 왔다.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고 에헤라, 그러며 잠대신으로 피
로를 풀었다. 오늘 하루가 신날 것이다. 첫눈 온 날, 누나와 난 대학로가서 데이
트 하기로 했다. 생각만 하고 실제로 이루어지지 않았던 게 삼년이다. 하하.
잠이 많이 왔다. 시간도 이른데 수면실 가서 잠시 잠을 청해 보기로 했다. 아
침 먹을 수 있을 때 돌아가 누나 깨워 주고 밥 얻어 먹을 생각이었다.
"에이쒸!"
잘 자는 내 배 위에 시크먼 털로 뒤덮힌 근육질의 다리 하나가 떡 올라 왔다.
우욱! 엄청 역겹다. 옆에서 빨가 벗고 자던 어떤 아저씨가 몸부림 치다 나를 덮
쳤다. 우욱! 재수 열라 없다. 자던 잠 다 달아 났다. 욕탕에 다시 들어 가 샤워
를 하고 나왔다. 아까 그 털많고 시커먼 다리를 생각하면 여전히 몸이 건질거리
만... 내 다리를 쳐다 봤다. 아까 그 다리에 비하면 내 다리는... 호호, 섹쉬함
그 자체다. 적당히 자란 털, 하얗고 미끈한 모양새. 어떻게 이렇게 섹쉬할 수
가... 나중에 누나 배 위에 올려도 그녀가 별로 싫어하지 않을 것 같다. 헤헤.
가볍게 몸도 풀고 머리도 말리고 가푼하게 아침을 맞이 할 준비가 끝났다. 아
침? 근데 욕탕의 시계는 아침이 아니었다. 12시 10분. 분명 가고 있는 시계였
다.
"아저씨, 저 시계 맞아요?"
"응."
그때까지 별로 못 느끼던 허기가 갑자기 몰려왔다. 의식적으로 저 정도 시간이
니 엄청 배가 고플 것이라고 느꼈나 보다.
집으로 뛰어 가다 배가 고파 식당에서 밥 한끼 먹었다. 누나가 내 방에 있을
것 같지 않았다. 벌써 등교 했을 것이다.
어엉! 내 방문을 열고 난 배시시 웃었다. 누나는 내 침대 위에 이불을 돌돌 말
고 입을 헤, 벌리고 그대로 자고 있었다. 완전 태평천하다. 어떻게 남자 방에서
저렇게 태평스럽게 잘 수가 있나.
"누나! 이봐요, 누님! 야, 홍은정! 자기야, 부인! 여보 마누라. 헤이 걸!"
천정이 참 멀리 느껴져 천정 한 번 쳐다 보고 배시시 웃었다. 이렇게 불렀는데
도 안 깼으니까 분명... 흐흐. 검지 손가락을 세웠다. 뾱! 뭉클한 느낌이 너무
도 좋다. 진짜 안 일어 나네.
"누나!"
마구 흔들어 깨웠따. 누나는 일어 났지만 얼굴 표정이 별로 좋지 못하다.
"머리 아파."
"내 새벽에 그 짓할때 알아 봤어. 많이 아파요?"
"응."
누나는 콧물까지 흘렸다. 안돼는데... 머리에 손을 짚어 보니 제법 따뜻했다.
"감기 걸린거야?"
"모르겠어."
"약사도 감기 걸려요?"
"씨..."
"학교 안 가?"
"못 가겠어."
"오늘 데이트는?"
"응? 저녁엔 괜찮아 지겠지."
"뭐 좀 먹어야 되지 않나?"
"나 좀 더 누워 있을게. 한 시간 뒤에 깨워 줘."
그 좀 놀았다고 감기가 걸리나? 누나는 일어 났지만 다시 누워 버렸다. 지 집인
양 참 자연스럽다.
밥 먹은 것도 있고 해서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었다. 밖으로 뛰어 나갔다. 오
호, 오늘 날씨는? 청아한 겨울 빛을 머금은 한 송이 늦게 핀 국화같다.
"25살 여자. 눈싸움 하다 감기 걸렸음. 약 지어 줘요."
"어떻게 아픈지 말해야지."
"머리에 열이 있고 콧물을 찔끔 흘림. 그리고 일어 날 생각을 안함."
"누구 말하는거야?"
"이름 홍은정. 지금 내 방에서 자고 있음."
"응?"
"새벽부터 날 찾아 와서는 눈싸움 했어요. 그러고서는 못 일어 나네."
"자알 한다아! 너네 둘이는 시간이 갈 수록 애 같아지니?"
"애? 애같아 지는게 뭔데? 그런 생각은 스스로 족쇄 채우는 거야. 재밌게 살아
야지."
"말은 여전히 잘하네. 그래 많이 아픈 것 같던?"
"멀쩡했는데... 그렇게 많이 아픈 것 같진 않아."
"요즘 감기 잘 못 걸리면 며칠 앓아 눕는데..."
"그러면 안되는데. 나랑 놀아야 되요."
"첫! 철수야? 철 좀 들어라."
"언젠간 들겠지. 참 누나는 날 잡았어요?"
"요즘 식장 알아 보고 있어. 3월달 둘째주나 셋째 주가 될 것 같애."
"좋겠네."
"바빠서..."
"언제 한 번 소개시켜 줘요."
"누구? 그이? 그럴게. 아저씨 같을텐데?"
그이? 얘도 맛이 갔네. 아저씨라면?
"결혼 한 번 했던 사람이에요?"
"뭐얏!"
"약 줘요 빨리."
"잠깐 기달려 봐."
약국 안은 처음 시작할 때보다 제법 약국 같아져 보인다.
"내 앞으로 달아 놔요."
"뭐야?"
표정이 약 값 안내고 가면 고소해 버릴 것 같다. 표독하다고 해야 되나? 그렇다
고 내가 낼 것 같냐?
"약 값 이거 얼마나 한다고... 아픈 사람 누나 친구야."
"너 애인이잖아."
"나는 그럼 뭐야?"
"너? 정리해야 될 사람 제 1호."
"에?"
"나 이제 결혼하면 도움 안돼는 남자들 다 정리할거야."
"거, 말이라도 참 섭하네요."
"허허, 너 그런 생각 많이 했잖아. 결혼하면 잊어진다며?"
"기분 나빠서 외상!"
결혼하면 정리해야 될 사람 1호? 아무리 장난이었지만 씁쓸하다. 내가 어딜 봐
서 정리 될 사람이냐. 은정이 누나도 그러면 어떡하나? 맞다. 같이 살면 된다.
내가 같이 못 살 이유가 없다. 그래도 빨라야 이년 뒤인데...
"누나 이거 식후에 먹어야 되지?"
"응."
"집에 먹을 거 없어요. 우리 은정씨 아무것도 안 먹었어. 죽이라도 좀 만들어
줘요."
"여기서 어떻게 만들어?"
"누나 여기서 밥 잘 만들어 먹잖아. 그 친한 친구가 아프다는데..."
"씨. 약 값도 안주구선."
냄비 하나 들고 뛰었다. 식기 전에 먹여야 된다. 가픈 숨을 몰아 쉬며 방에 들
어 갔더니 누나가 침대 위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
"어?"
"너 어디 갔다 오는거야?"
"아프다 해서 약 지어 왔지."
"들고 있는 건 뭐야?"
"이거? 죽."
"니가 만들었어?"
"나 이런거 못 만들어. 좀 괜찮아요?"
"아니 추워. 여기 더 못있겠어."
"추워요? 난 괜찮은데."
"너 학교 안가?"
"파장 분위기랬잖아. 누나는?"
"나 집에 갈래."
"아프댔잖아. 죽 좀 먹고 약도 먹고 조금만 더 있다 가요."
아프다면서 누나는 머리 감고 세수 하고 간단하게나마 화장도 했고 옷 매무시
도 신경을 썼다. 죽 다 식었다 씨. 누나가 머리를 말리는 동안 잽싸게 죽을 다
시 댑혔다.
"이거 좀 먹어 봐요."
"맛있어?"
"모르지."
누나가 한 숟가락 떠 넣더니 쌍을 찌푸렸다.
"이거 누가 만들었니? 디게 맛없어."
몸 상태가 안좋긴 안좋은가 보다. 입 맛도 잃었나 보다. 나도 한 숟갈 떠 먹었
는데 먹을 만 했다.
"진짜 맛없네. 이래 가지고 시집 가겠나."
"누구? 이거 정희가 끓였니?"
"응."
"너 가서 또 일러 줄거지?"
"맛 없다고 한 거? 당연하지."
억지로 먹이고 약까지 먹였다.
"나 집에 좀 데려다 줘."
그럴 줄 알았어. 내 그럴 줄 알았다. 서울엔 옅은 눈이 쌓여 있었다. 그런데로
낭만이 있어 보였다. 젖은 도로는 선명했고 가로수 잔가지에 붙어 있는 눈꽃들
은 추운 날씨 덕에 존재의 가치를 인정받고 있었다. 지금 쯤 대학로는... 겨울
을 시작하는 연인들의 모습, 차운 공기 속에 즐거운 입김을 뿜어되는 수많은 사
람들의 모습, 팔짱을 끼고 걷는 여인들. 목도리를 한 청년... 좋겠다. 누나는 뒷
좌석에 앉아 내 겉옷을 감고 덜덜 떨고 있다. 히터를 거의 최고에 올려 놓았는데
도 추운가 보다.
저 모양을 보고 오늘 첫 눈 왔으니 대학로 가자라는 소리를 어떻게 하겠는가.
올해도 텄다 c바.
왜 새벽부터 날 찾아와 가지고서는 오늘 잡아 논 그 데이트를 망쳐 버리냐. 아
침에 눈싸움 할 때부터 오늘 데이트는 파장나기 시작했던 것이다. 내년 첫 눈 오
는 날을 기다려야 한단 말인가? 으이쒸.
"몸조리 잘해요."
"고마웠어."
"왜 새벽에 찾아 와가지고..."
"재밌었잖아."
"푹 쉬고 빨리 나아요?"
"알았어. 나 들어 가 볼게."
나 아무래도 시험의 사나인가 보다. 푸하하! 학력고사 마지막 세대로서 나에게
다가왔던 그 수많은 시험들. 학력고사. 운전 면허 시험. 기사시험. 대학원 시
험. 실기까지... 나 다 패스 했다. 푸하하. 비록 면허 시험 주행에서 한 번 고배
를 마셨지만 눈감아 줘도 된다. 아자! 철수 잘 난 놈이다. 대학 사년간의 생활
이 주마등처럼 지나간다. 서러웠던 시간, 미팅했던 기억을 말하는 것이다. 암담
했던 시간, 아버지께 구박 받던 시간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가슴 졸였던 시
간, 누나에게 차일까봐 애태웠던 시간. 모든 게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내 곁에
있는 사람들. 푸헤헤, 은정이 누나도 내 곁에 남아 있다. 기분 좋다 헤헤.
"오빠 대학원 들어 갔다면서요? 축하해요."
"어? 그래. 그거 뭐... 수희에게 들었니?"
"네."
"음. 너도 열심히 해라."
축하를 제일 먼저 해 준 것은 큰 은정이가 아니라 작은 은정이었다. 작은 은정
이. 헤헤. 그 뒤에 또 전화가 왔다. 어떻게 알았을까?
"누구세요?"
"흠, 나야 이승주."
"어, 승주형이 어떻게?"
"너 대학원 간다고 했잖아."
"네."
"오늘 너네 학교 대학원 발표 났다고 들었어. 어떻게 됐어?"
"저요? 당연히..."
"떨어졌어? 하하 농담이야."
이게 진짜.
"근데 어떻게 알고...?"
"너네 학교에 친구 있어."
"누나 말인가요?"
"걔 말고도 있어. 하여튼 축하 해."
"네."
아무리 연적이었지만 고맙네.
"은정이와는 잘 지내지?"
"네."
"흠, 그래 둘이 참 잘 어울려 보이더라."
"형은?"
"나? 나 취직했어. 새해가 되면 연수 들어 갈거야."
"잘됐네요."
"다 그렇지 뭐."
"전화해 줘서 감사합니다."
"그래. 다음에 기회되면 한 번 봐."
작은 은정이에게 전화를 받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승주에게 전화가 왔었다.
우리 집 전화번호는 어떻게 알았지? 새끼 나 뒷조사 한 거 아니야? 근데 가장 먼
저 축하해 주어야 할 은정이 누나는 뭐하는거야. 바로 큰 은정이에게 전화를 걸
었다.
"누나!"
"철수구나. 안그래도 전화 하려고 했어. 오늘 대학원 발표 났다며?"
"승주형 전화 번호 어떻게 돼?"
"엉? 갑자기 그건 왜?"
"갈쳐 줘요."
"왜에?"
"소개팅 시켜 주게."
"뭐어? 야!"
"배 아프니?"
"그건 아니지만..."
"다섯살 차이면 좀 많을까?"
"누구 소개 시켜 주려구?"
"은정이."
"나?"
"누나가 나보다 두살 적냐? 은정이가 자기 혼자 뿐인 줄 아나 봐. 심각하다 심
각해."
"뭐가 심각 해. 잠깐 기다려. 참, 축하 해 철수야."
"뭐 다 붙는건데 새삼스럽게."
하하, 겸손하게 한 손으로 앞머리를 뒤로 쫙 넘겼다. 겸손하게 아랫배에 힘을
줘 보기도 했다.
승주에게 연락했다. 누구 예쁜 여자애와 같이 나갈테니 만나자고 했다. 은정이
에겐 수희 시켜서 소개팅 시켜 준다고 꼬셨다. 그리고 수희를 내 대신으로 내 보
냈다. 전혀 안면이 없는 사이가 아니라서 대충 만날 것이라 생각하고 나는 일선
에서 빠졌다. 나 몰라라 했다는 말이다. 어떻게 될런지 모르겠지만 승주 그 새
끼, 싫은 척 하지 않았다. 나쁜 놈이다. 아무래도 누나에게 마음이 많이 떠났나
보다. 아니면 너무 강한 상대를 만나 포기를 했던지. 나? 하긴 넘을 수 없는 태
산같아 보였을 테니 돌아 가야겠다는 마음이 들었겠지. 그 둘이 잘되기를 빈다.
작은 은정이는 나이만 적었지 누나와 비슷한게 많다. 이름 같지, 같은 약대생이
지. 키 크지. 잘 빠졌지. 성격 더 좋지. 잘난 척 안하지. 여러모로 누나보다 나
은게 많다. 승주 땡 잡았다. 승주? 나보다 나이 많은 것 빼면 같은 공대생이지,
키 더 크지, 쩝! 생긴거?
"수희야? 내가 더 잘생겼지?"
"그 오빠가 훨 낫던데."
수희는 대학 가더니 날 대함에 있어 예전 같지 않다.
성격?
"성격은 내가 낫지?"
"그 오빠는 매너도 있고 그릇이 커 보이더라. 오빠처럼 쫌생원 같지 않던데?"
수희는 대학 가더니 애가 영 맛이 간 것 같다.
"근데 은정이가 소개팅 하려고 하던?"
"응. 못할 건 뭐야?"
"둘이 어떻던?"
"처음엔 늘 그렇듯이 어색했지만 그 오빠가 잘하더라. 은정이도 애교가 있잖
아."
"둘이 잘 될 것 같던?"
"응."
난 착각 속에서 살았나 보다. 은정이가 날 좋아하고 있지나 않았을까. 승주가
아직도 은정이 누나를 못잊고 있지 않았나. 아니었다. 그 년,놈들! 그래 그딴 식
으로 잘 살아 봐라. 내겐 은정이 누나 뿐인가 보다. 은정이 누나 곁에도 이제 나
뿐인가 보다. 은정이 누나, 이제 착각에서 벗어날 때야, 누나에겐 나 밖에 없는
거 같어. 쪼금 걸리는 배군이 있지만 내 상대가 되지 못한다. 푸하하! 그래 한
사람이면 됐지. 누나는 내가 아니면 가엾게 된다. 그 거만한 아가씨가 챙겨주고
떠 받드는 사람이 없어지면 이 험한 세상 헤쳐나가기 힘들 것 같다. 그 잘난 아
가씨는 계속 착각하면서 살다가 어느 순간 현실을 깨닳겠지? 그래 그녀 곁에는
바보 같은 내가 있어야 한다. 나 밖에 없다. 아자! 이제 따지지 말자.
은정이와 승주가 소개팅을 한 날, 그날 한 밤중에 누나에게 전화를 걸었다. 헨
드폰에 전화한 것 아니다. 그리고 핸드폰이면 어쩔거여. 집 전화비 아버지가 내
는건디...
"홍은정씨 되십니까?"
"이 밤에 왠일이야? 나 방금 잠자리 들었는데."
"아, 제 목소리를 바로 알아 보시는군요."
"여전히..."
"바보 같다구?"
"잘 아네? 무슨 일이야?"
"사랑하옵니다."
"으으으으..."
이게 진짜. 아직도 날 가지고 노네. 그냥 전화 끊어 버렸다. 그랬더니 바로 전
화가 왔다.
"야!"
"왜요?"
"잠 깨웠으면 놀아 줘야지."
"내가 장난감이냐?"
"응."
"이런 씨."
"넌 내가 사랑하는 장난감이야. 사랑해에 철수야."
"으으으으...."
꼬끼요오! 졸라 닭살 돋았다.
연하가 어때서 71회
방학이 한 창 깊어 간다. 크리스 마스도 코 앞으로 다가 왔고 96년 한 해도 얼
마 남지 않았다. 나는 한 동안 신경 쓸 일이 없었다. 연구실에 내 자리가 마련되
지 않았고 학사 과정 모두 이수한 뒤라 진짜 한가한 한량 신세라고나 할까? 오
죽 심심했으면 군 제대 한 달 조금 더 남은 승헌이 면회까지 갔다 왔겠는가.
"이거 미친 놈이네? 잘 자던 잠 너 때문에 깼잖아."
"뭐 이런 새끼가 다 있냐? 면회 왔으면 고맙다고 해야지?"
"그건 일,이병 때나 그런거구. 일요일이라 잠 좀 자려고 했더니."
"진짜 싸가지 없네."
"이왕 온 거 먹을 거 좀 사와라? 그 은정이 누나하고 같이 좀 오지."
"나 혼자 와서 불만이냐?"
"응. 엄청!"
기껏 친구 군대 면회 갔다가 좋은 소리 못듣고 돌아 왔다. 이런 걸 두고 유식
한 말로 헛수고 했다라고 한다. 기분 나쁘다. 근데 말병장 높아 보였다. 헤헤.
내 친구가 군 제대할 나이인데 나 결코 어린 놈 아니다, 하하.
"푸하하! 이거 누나 맞아요?"
"야아."
"고등학생일때는 디게 이상하게 생겼네. 이 얼굴이 이렇게 됐단 말이야?"
"그때도 예뻤어."
"저 번 면허증 사진도 이상하더니만. 대학 졸업 앨범 줘 봐요."
크리스마스 주간을 맞이하야 누나 집에 놀러 갔었다. 누나가 날 초대했었다. 어
머님이 날 한 번 보자고 하신 모양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여전히 이른 것 같지
만 어머님이 부르시는데 가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다 진짜 누나하고 맺어지는
건 아닌지... 헤헤, 그럼 봉 잡았지! 하여간 누나와 함께 있는 시간이 좋다. 누
나가 사는 이 공간이 그리 낯설지 않은 이유는 누나 때문이겠지.
어머님이 퇴근 하실 때까지 긴장도 풀 겸 누나 방에서 앨범들을 구경하며 놀았
다.
"대학 때는 그런대로 예쁘게 나왔네? 누나 성형 수술 했어요?"
"그런거 안 해."
"근데 고등학교 앨범에는 왜 이래?"
"씨."
"다른 앨범 줘 봐요."
내가 끼어 있지 못한 시절의 누나 모습, 누나 솔직히 어릴 쩍 모습도 예뻤다.
참 곱게 자란 것 같다. 아주 어릴 적 사진을 봤는데 입고 있는 옷차림이라던가,
표정, 그리고 그녀를 품고 있는 배경들이 그 시대와는 맞지 않게 고급스럽고 세
련되어 보였다. 가족 사진, 그래 아버님, 어머님 외에 누나 곁에 있는 사람이 없
다. 친척들도 별로 많지 않은지 누나 가족 사진들은 내 그것에 비해 조금 단조롭
다. 누나 부모님은 그것이 아쉬웠는지 누나를 행여나 하는 마음으로 참 곱게 키
운 모양이다. 사진에서 바로 표가 났다. 누나의 포즈와 표정? 어린 애 치고는 부
끄럼도 없고 상당히 발랄하고 끼도 있어 보였고, 어린 공주? 연예인 같아 보이기
도 했다. 좀 꿀린다 씨. 내 가족 사진 보면 대부분 어슬프게 우스며 정 자세다.
쉽게 말하면 누나는 사진기를 의식하지 않고 아주 자연스러운 모습이고 내 어릴
쩍 사진들은 자, 사진 찍을 테니 포즈 취해라, 그래 놓고 아, 이제 찍는구나 생
각하며 다소 떨리는 행동을 한 모습들이 대부분이다.
"자, 이건 고등학생 일때의 앨범."
"그래요? 여기 그럼 승주 있겠네."
"그래 있다."
찬찬히 넘겨 보았다. 아주 뒷 쪽에 승주와 같이 찍은 사진도 있었다. 둘이 장난
치나? 마네킨이 따로 없다. 승주는 차렷 자세, 누나도 뻣뻣하게 굳어 있다. 뭔
가 이거 어릴 적에는 그렇게 자연스럽더니 이건 영...
"야, 예쁘다."
"이쁘지?"
"누나 말한 거 아니야. 여기 두 명이 제일 많이 나오네? 요즘도 만나는 친구들
이에요?"
"응."
"이 누나가 제일 예쁘네."
"얘? 얘가 예쁘니?"
"응. 이름이 뭐에요?"
"그거 알아서 뭐하게?"
"그 질투하지 말고 갈쳐 줘요."
"내가 질투를 왜 해? 걔? 배지수."
"이름도 예쁘네. 다음에 소개시켜 줘요?"
"남자들 이상하네. 난 잘 모르겠는데 다들 얘가 예쁘대."
"뭐가 이상해. 척 봐도 예쁘네, 누나는 택도 안되는디?"
"뭐야!"
"여자 앨범이라고 여자들이 많구나."
"정말 내가 턱도 안된단 말이야!"
이 여자 진짜 단순하네. 하여튼 여자들이란 쯔쯧!
"다른 거 줘봐요."
"이건 대학 때 사진들."
"두 권이나 돼요?"
"끼우지 못한 게 더 많아."
신입생 엠티 간 사진, 약대생들 떼거지로 어디 간 사진. 아까 그 두 명은 몰랐
는데 자주 만나고 돌아 다녔는지 대학 때 사진에도 제법 등장했다. 우리 동아리
아는 형들도 보였고 정희 누나도 자주 보였다. 다른 앨범, 푸헤헤! 여기 주역은
나였다. 하하, 나하고 누나하고 사진을 이렇게 많이 찍었던가? 나하고 같이 찍
은 사진이 승주보다 훨씬 많고 모습도 자연스럽다. 나, 어릴 적 사진처럼 어색
한 포즈가 아니다. 연예인 뺨친다. 좀 잘나온 내 모습 위를 손가락으로 가리켰
다.
"낭자!"
"응? 낭자?"
"여기 잘 생긴 청년은 누군지요? 참 잘 생겼구료."
"그러고 싶니?"
"진정 궁금해서 묻는 말이요."
"갖다 버릴래."
공주는 공준가 보다. 정리 했다는 앨범들만 열 권이 넘는 것 같다. 앨범에 끼우
지 못한 사진들 다 합치면 얼마나 된다는 말인가? 난 기껏해야 두 권? 그나마 가
족 사진, 수학 여행 때 사진 빼 버리면...
"이 것들은?"
"이건 외국 나가 찍은 사진들."
"음."
"그 때 그 사진 봤지?"
"뭐요?"
"할슈타르 호수 가에서 찍은 사진."
"에? 그렇게 어려운 이름을 어떻게 기억하나?"
"흠."
저건 세살짜리 꼬마가 봐도 비웃는다는 것을 바로 알겠다.
"그거 왜요?"
"꼭 한 번 같이 가자."
"돈이 어딨나?"
"신혼 여행을 거기로 갈까?"
참 생각하는거라곤... 나하고 같이 가고 싶다와 신혼 여행을 같이 말했다는
건? 진짜 그런 꿈 같은 일이 일어 날까? 확인 사살을 해 보자. 말이 좀 그렇다.
그냥 확인을 해 보자.
"신혼 여행이라 함은... 저하고 신혼 여행 간다는 말입니까?"
"갑자기 왠 깍듯한 존댓말? 응."
누나는 고개까지 까닥 거린다.
"에이 쒸!"
기분은 좋았지만 버릇 때문에...
"왜 또 에이쒸야?"
"이게 뭐야. 백한번째 프로포즈 안 봤어요? 다른 영화도 마찬가지야. 나 아직
누나에게 프로포즈 안했어. 결혼 얘기는 말이지. 남자가 하늘이 내려 준 어떤 계
기가 있어 여자에게 멋있는 프로포즈를 하고 여자는 거기에 감동을 받아 그래,
저 사람이야. 그런 느낌을 받은 뒤에 나와야 하는거야. 누나는..."
"내가 뭐?"
"야아~ 오늘 날씨도 좋은데 결혼 할래? 이런 식이잖아. 그것도 여자가 먼저."
"훗! 상상도 못하니? 프로포즈 그 딴게 무슨 소용이 있어? 그건 확신을 못하는
연인들이나 하는거구. 우리 같이 좋아하는 사이는 자연스럽게 결혼 하고 싶다는
생각이 싹 트는거야."
"나는 자연스럽지 못한디?"
"왜?"
"누나야, 우리 만난지 삼년도 안됐어. 뭐가 확신이 드는데? 나는 급작스럽다."
"너랑 살면 재밌을 거 같애. 아기자기 할 것 같지 않니?"
"무슨 결혼을 재미로 하는 줄 아나. 어째 나보다 더 철이 없어 보이냐?"
"흠, 나도 생각하는 게 있어서 하는 말이야. 네가 보기에 어쩌면 단순해 보일
지 모르지만 내 머리속에는 수많은 계산들과 가정들이 들어 있어. 그래서 내린
결론이야. 이제는 확신이 섰어. 너 데리고 살거야."
데리고 살아? 내가 무슨 애완 동물이냐. 장난감이라고 하지를 않나. 아무리 연
상이지만 너무 한다. 데리고 산다는 거에 반박을 하면 저 여자 분명 말꼬리 잡
고 늘어 지겠지? 안되면 삐치는 행동하다가 또 울어 버릴지 모른다. 때릴 수도
있다. 여기 누나 집이다. 전적으로 내게 불리하다. 좋은 말로 타일러야 겠다.
"삶이 생각처럼 쉬우면 차암 좋지. 어려운 문제들 코 앞에 닥처 봐. 부부 싸움
하는 남,녀들 다 연예시절 사랑하던 사이였고, 행복할 거라 확신하고 결혼했을거
야. 그렇지만 싸워요. 이혼하려고 법정에 서는 부부들? 다 서로 사랑했던 사람들
이야. 그들이 왜 싸우고 갈라서는데? 생각처럼만 됐다면야..."
"너 그런 말을 왜 해?"
"지금은 우리 둘이가 이리 좋아 보여도 나중은 어떻게 될 지 모른다 이거지. 결
혼을 너무 쉽게 생각하지 말라구. 나 학생이야. 내 친구들 군 제대하면 이제 삼
학년이야. 그런 내가 지금 결혼 얘기할 때냐?"
"씨, 지 생각만 하고 있어. 내 친구들 학교 졸업하구 결혼 얘기 많이 해. 아까
말한 지수란 애는 직장 삼년 차구, 맞다 정희는 곧 결혼한다."
씨이... 연상을 사귀면 이런데서 불리하구나.
"그래도... 누나 나이도 아직 일러. 현실은 생각처럼 재밌지도 쉽지도 않아요."
"그래 내 말대로, 한치 앞도 알 수 없는 세상, 생각처럼 재밌지도 쉽지도 않은
세상, 그래도 기대는 하고 살아야지. 우리가 살아가야 할 현실 문제들, 좋은 상
상들도 꾸며 놓는 게 나쁜 건 아니잖아. 왜 굳이 어렵고 나쁜 쪽으로 생각을
해?"
"내 얘기 들은거야? 재밌게 살려면 뭔가가 있어야지. 나 아무것도 없어요. 좋
은 쪽으로 생각해도 결혼 얘기는 너무 일러. 그리고 여자가 먼저 하는 게 어딨
냐?"
"아무것도 없긴 뭐가? 나 있잖아. 그리고 여자가 먼저 하면 어때서?"
이 여자 답이 없다. 아무리 외동딸로 곱게 자랐다지만, 그리고 뒷머리 한 번 넘
기고 내가 아무리 멋있어 보이고 사랑스럽다고... 나도 누나하고 살고 싶지. 뭐
먹고 살겨? 결혼하면 독립하는건디... 우리 힘으로 헤쳐 나가야 된다 말이야. 학
비는 어떡할겨.
"나중에 내가 직장 구하고 기반 잡으면 그때 얘기 합시다."
"언제? 이년 뒤에? 그때까지 이 관계가 유지될까? 설사 유지 된다치더라도 그제
서야 결혼 이야기 나오면 준비과정이다 뭐다 일년 그냥 가 버릴테고 그러면 나
그냥 서른 되는데? 내가 그때까지 너만 보고 아가씨로 남아 있겠니?"
"좋은 쪽으로 생각하자면서?"
"그래, 나 그냥 생각한거야. 결혼 얘기 나오면 과민 반응 보인건 너야. 지금 생
각하고 확신을 해도 결혼은 빨라야 내년 말이나 후 내년이야."
"그때도 빨라. 그때도 나 학생인데... 너도 아직 학생이잖어? 뭐 먹고 살래?"
"너? 어쭈, 박철수? 이제 완전 맞먹는다?"
"엉? 제가 그랬어요?"
"동아리 91학번 중에 내가 아는 애들이 많지? 93이 91에게 이런 식으로 대하는
걸 알면...?"
연상의 여인을 사귈지라도 학교 선배는 가급적 피해야 되는구나.
"나도 이제 원생이야. 학번 그 너무 따지지 마요."
"그래 너 원생이야. 설마 대학원까지 나와서 굶어 죽겠니? 나 약사 자격증 있
어. 먹고 살 수 있단 말이야. 너도 기사 자격증 땄잖아."
"우리는 이걸로 취직 안돼요."
누나 어머님이 오셨다. 아버님은 아무래도 약국 문 닫고 오시면 조금 늦으시나
보다. 개인 병원이야 뭐 다섯시나 여섯시 넘으면 의사는 어디 갔는지 보이지 않
는다. 약국은 열 시 넘어서도 문 연 곳 봤다.
"안녕하세요."
"오, 그래. 철수 왔구나."
몇 번 보긴 했지만 참 친하게 대해 주시네?
"저녁 안 먹었지?"
"네."
"나가서 먹을래?"
"나가서? 그럼 아빠는? 아줌마 곧 갈 거잖아."
"밥 솥에 밥 있겠다. 냉장고 열면 반찬 있겠다? 너네 아빠는 손이 없니 발이 없
니? 챙겨 먹겠지 뭐."
푸훗, 잘못하면 웃을 뻔 했다. 우리 엄마도 간혹 저러시는데. 우리 아버지 그
럼 굶으신다. 울 아버지 챙겨 주실때까지 단식 투쟁하신다. 우리 엄마 우리 아버
지 못 이기신다. 우리 엄마는 우리 아버지께 쨉도 안되시는데. 누나 집은 좀 다
른가 보다. 하긴 방법이야 다 다르겠지. 그치만 서로 아껴주는 마음은 다 같은
것 같다. 우리 아버지 우리 엄마 의견에 따르는 일 많다. 아버지가 이기는 척 해
도 엄마 말을 무시하지 못하고 이끌린다.
맞벌이 부부. 누나 어머님은 바로 떠나지 않았다. 파출부 아줌마 보내고 난 뒤
아버님 저녁 차려드실 수 있게끔 상을 차려 놓고 외출을 하셨다.
누나 어머님 덕에 샤브샤브 얻어 먹었다. 저녁 잘 대접받았다는 말이다. 어떻
게 된게 누나와 어색해지고 다시 친하게 된 지 한 달 조금 넘었는데, 그것보다
누나와 사귀기로 한 지 이제 반 년 조금 더 됐을 뿐인데 어머님 얘기에는 작년까
지 포함해서 누나와 첫 만남 때부터 누나가 좋아하는 연인은 나였다. 어떻게 된
겨? 어머님 말씀을 들어 보면 누나와 나의 교제에 대해 상당히 긍정적으로 생각
하시는 것 같다.
"얘는 혼자 자라서 버릇 없이 보일 수도 있어. 참는 성격도 약할걸. 가급적 자
기 하고 싶은대로 키웠거든."
"아닙니다. 남을 잘 배려하는 것 같던데요. 그리고 윗사람 대하는 태도도..."
"흠, 그건 겉으로 보이는 거지. 같이 오래 지내다 보면 감출 수 없는 무언가가
드러나게 돼."
"네에."
"얘는 좋아하는 사람에겐 간도 쓸개도 내 줄 애지만 그 좋아하는 사람 폭이 좁
아. 이래라 저래라 간섭하거나, 누르려고 하는 사람하곤 안 어울려. 만약 선 봐
서 서로 잘 모르는 상태서 잘난 배경만 보고 시집 보내면 얘 몇 달 못 살고 소
박 맞을거야. 아니다 지가 못살겠다고 뛰쳐 나오겠지."
이야기는 즉 나는 잘나지 못했다? 너무 하십니다 어머님.
"나는 철수가 마음에 들어. 쟤가 하는 얘기를 들어 보면 그렇게 느껴져. 친구
같구 동생같구, 어떨 땐 오빠 같게도 느껴진다는 그 말. 그리고 서로 이제 잘 알
잖아."
오빠? 얘가 언제 날 오빠 같게 느꼈다구, 구라가 심하십니다 어머님.
누나는 별 말 않고 앉아 있었다. 어머님 말에 동의한다는 뜻인가 보다.
"철수는 참 착해 보이네. 우리 은정이가 얘기 했던 대로 일거 같아. 나는 둘이
사귀는 데 있어 나이는 별로 안 따질게. 그러니 철수는 나이 가지고 너무 신경
쓰지마. 알았지?"
"네."
누나 어머님은 나를 지칭하거나 부르실 때 꼭 이름을 불러 주셨다. 참 고맙고
정겹다. 우리 아버지는 누나를 처자라고 불렀는데. 하여간 내가 좋은 쪽으로 비
춰졌다니 기분 좋은 일이다. 진짜 누나와 같이 살게 되는 건 아닌가? 그러면...
그 생각은 너무 기분 좋은 상상이 된다.
연하가 어때서 72회
되짚어 보면 누나와 같이 지낸 삼년동안의 추억이 참 많다. 현재 공유하고 있
어 잘 못 느끼고 있지만 혹시나 헤어져 살다 보면 난 이 추억을 회상할 때 눈물
흘리지도 모른다.
오늘 크리스마스 이브날, 난 내가 대학 들어 오면서부터 꿈 꾸었던 그, 여자 친
구와 팔장을 끼고 대학로를 걸어 보자던 그 꿈을 현실로 만들고 있다. 은정이 누
나와 대학로를 나왔다. 후훗! 예전 누나에게 그 꿈 얘기를 했던 적이 있다. 오래
전 일도 아니다. 그 이야기를 들어 주었던 사람이, 당시는 연상이라 큰 기대를
하지 않았던 그 여자가 오늘 내 여자친구가 되어 나와 팔짱을 낀 채 겨울 나그네
가 연상 되고 앙상한 나뭇가지 그림자가 놓여진 마로니에 공원을 걷고 있다. 기
분 좋다. 누나도 내 말을 기억하고 있었는지 걷는 동안 한 번도 팔을 빼지 않았
다.
"아!"
"왜?"
"목도리를 안 가져 왔다."
"꼭 목도리를 해야 되니?"
"여자도 내가 생각했던 사람이 아니다. 눈도 안온다. 내 상상과 다르다."
누나 질문을 무시하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솔직히 너무 기분이 좋으면 긴가
민가 할 때가 있다. 내 기분이 지금 그렇다. 지금 이 곳에 나온 행복해 보이는
수많은 연인들, 그 중에서 내가 제일 행복한 것같다. 내 옆에 있는 이 여자, 사
랑스럽고 예쁘고 나이도 많고... 나이 많은 것은 빼자. 하여튼 다들 공주겠지만
내 공주가 제일 잘나 보이고 예쁘고 사랑스럽다. 누나가 나를 째려 본다. 기분
나쁜 일 있나?
"너어? 팔 빼버린다?"
빼 봐? 확 따져볼려다 참았다. 이 행복을 깨기가 싫다.
후후, 내 상상했던 것과는 조금 다르지만 오히려 더 좋다. 누나를 데리고 정처
없이 돌아 다녔다. 그냥 오늘은 마냥 걷고 싶었다. 자랑하고 싶었다. 이 공원에
오신 신사 숙녀 고삐리 여러분! 나도 애인과 여기 나왔습니다. 너네들 재지 마
란 말이야. 이런 기분에서 커피숖이나 카페 같은 곳을 들어 가지 않고 벌써 여러
번 지나쳤던 마로니에 공원을 걷고 또 걸었다. 누나의 발걸음이 조금씩 느려지
기 시작했다.
"우리 어디 들어가자."
"다리 아파요?"
"응, 그리고 추워."
"저기 빈가지 밑 벤취에 앉을래요?"
"춥다니까."
"이왕 내 소원 들어 주는거 확실히 들어줘요."
"쩝. 에구 어쩌다 이런 애같은 애와 사귀게 되어 가지고..."
"누나도 애야."
"치."
겨울이라 그냥 놓여 있는 빈 벤취. 지나는 사람은 많은데 앉는 사람이 없는 걸
로 봐서 바닥이 많이 차가울 것이다. 영화 같은 걸 보면 남자가 숙녀를 위해 손
수건을 깔아 주기도 했다. 나? 손수건 안가지고 나왔다. 목도리라도 있었으
면... 참내, 이 여자 바로 앉아 버렸다. 겉옷이라도 벗어 깔아 주려고 했는
데...
"왜 안 앉자?"
찹지 않나? 아무렇지도 않게 앉아 나를 올려다 보는 누나를 신기한 듯 내려다
봤다. 저건 공주가 하는 짓이 아닌데. 옆에 앉았다.
그냥 별말 없이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 구경 했다. 누나 입에서 섹쉬한 입김이
플래폼에 반가운 사람을 태우고 도착한 증기 열차의 연기 같이 뿜어져 나온다.
"장갑 한 번 벗어봐요."
"왜?"
"손 시럽지 않아요?"
"응. 그런데 왜 장갑을 벗어?"
"벗어봐요."
헤헤, 누나의 손을 따뜻하게 해주기 위해 내 두손으로 누나의 한 손을 포개었
다. 따뜻하지?
"앗 차가워. 너 손 데울려고 그런거야?"
무드라곤 지렁이 뒷다리 만큼도 없네. 하긴 내 손이 누나 손보다 훨씬 차가웠
다. 누나 한 손을 잡고 내 두툼한 무스탕 호주머니에 넣었다.
"따뜻하지?"
"이런 건 어디서 배웠어?"
마음에서 우러나와 이런 짓 하면 감동할 줄도 알아야지. 헤헤, 그래도 이젠 누
가 봐도 연인처럼 보일 것이다. 혹시 승헌이나 동엽이가 이 모습을 본다면 어
이, 얼레리 꼴레리, 그런 짓 하면 안 쪽팔리냐? 이렇게 놀릴 수도 있다. 그러면
나 자신있게 대답할 것이다.
부럽냐 새꺄!
해가 지고 가로등이 켜질 때까지 벤취에 앉아 사람 구경 했다. 그냥 같이 있는
게 좋아서 추위도 잊고 별 말도 없이 나란히 앉아 있었다.
"언제까지 앉아 있을거야?"
누나가 한 참만에 입을 열었다.
"이렇게 앉아 있으니까 좋지 않아요?"
"추워 죽겠어."
누나 얼굴을 보니 콧물이 찔끔 새어 나오는 모습이다.
"그런데 왜 안 말 않고 앉아 있었어요?"
"너 때문이잖아 씨."
씨? 누나는 억지로 앉아 있었나 보다. 뭐 이런, 아니다 돌려 생각해 보니 또
날 웃음 짓게 만든다. 그동안 추위에 벌벌 떨었으면서 나를 위해 내 옆에 다소곳
이 앉아 주었던 이 여자가 마구 사랑스럽다.
"우리 내기 할래요?"
"무슨 내기?"
"누가 늦게 얼어 죽나."
우쒸, 농담 한마디 했기로 서니 한 대 패 버리고 바로 일어 서 버리나.
따뜻한 커피로 몸을 녹이고 9시 조금 넘어 일찍 대학로를 떠났다. 누나는 공주
기 때문에 집에 데려 줘야 했다. 줘야 했던 것이 아니다. 나 스스로 그러고 싶었
다.
"잘 들어 가요."
"잠깐 기다려. 집까지 태워 줄게."
"후. 그럴 걸 왜 데려다 달랬어요?"
"싫어?"
"그건 아니지만."
집 앞까지 누나의 배웅을 받았다. 떠나는 누나의 뒷 모습을 보면서 참 헤어지
기 싫다는 느낌을 받았다. 처음 느낀 것은 아니었지만 오늘은 참으로 누나와
더 같이 있고 싶다는 느낌이 들었다.
같이 살고 싶다.
"해피 뉴 이어. 일천 구백 구십 칠년!"
"야, 박철수. 해피 뉴 이어를 영어로 했으면 끝까지 영어로 해야지."
"그냥 넘어 갑시다."
작년은 걸렀지만 올 해는 다시 누나와 타종식 구경을 갔다. 이 번에는 당당히
허락 맞고 열쇠 얻어서 집을 나왔다. 졸라 추웠다. 사람들도 엄청 많았다. 곳곳
에 피어나는 사람들의 입김, 그 속에는 올 한 해를 꿈 꾸는 수 많은 희망들이 섞
여 있겠지.
"철수 넌 올해 소망이 뭐야?"
"응? 그냥 잘 사는 거. 대학 졸업 하는 해니까 올해는 조금만 특별했으면 좋겠
다. 누나는?"
"나? 몰라. 나도 그냥 살 사는거."
"누나야."
"왜?"
"어쩔 때 보면 누나와 난 천생연분 같아. 하늘이 내려 준 연분."
"그래? 호호. 언제 그런 생각이 드는데?"
"방금 같은 경우."
"응?"
"누나를 보고 이 여자 참 정신없는 여자네. 이런 느낌 들 때."
"뭐야!"
누나는 정말 정신 없는 여자였다. 내가 목도리 매고 즐거워 하니까 기분 삼아
대학로까지 걷자고 했다. 무서움? 여기서 대학로까지 얼마나 된다고. 깜깜한 밤
거리를 누나와 걸었다. 그리고 대학로, 종각과는 다르게 조금 썰렁한 분위기.
그 곳에서 또 걸었다. 빈 벤취에 앉아도 보고 우연히 보게 된 몰래 뽀뽀하는 연
인에게 혀도 차 보았으며 나 잡아 봐라는 식으로 뛰어 다녀도 보았다. 가로등에
서로 등을 대고 기대어 하늘도 보았다.
"이제 저 하늘은. 알기나 할까, 이름이 바뀌었다는 걸?"
"갑자기 왠 분위기? 알 수 없겠죠. 1997년. 그 건 사람이 자기 편의에 의해 지
어준 건데."
"그렇겠지? 왜 한 해 한 해 이름이 바뀌고 있는 지 저 하늘은 모르겠지? 태연하
겠지, 나이가 들어 감을."
"나이 들어 가는 게 싫어요?"
"모르게 잊혀 지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이유도 모른 채."
"승주 생각 나요?"
"야! 또 한 해가 갔구나. 그리고 내 년엔 올 한 해도 잊혀 지겠지?"
"갑자기 왜 그래요?"
누나가 피식 웃더니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멍한 표정으로 날 봤다. 그리고 살
포시 입을 열었다. 날 사랑한다는 말을 할 줄 알았다. 그래서 분위기를 잡은 거
라고 잠시 기대했었다. 가로등 아래서 짧은 입맞춤, 너무 낭만 적일 것 같다. 누
나는 머리를 긁적였다.
"우리 아까 종각 갈 때 뭐 타고 갔었지?"
뭐여 이거.
"누나 차."
"그거 어디 세워 놓았니?"
"여긴 아닐 걸."
"그렇지?"
홍은정. 누나를 처음 봤을 때 느낌은 이렇지 않았다. 이지적이고 약간은 차가
워 보이는 모습. 뉴스 앵커에나 어울릴 것 같던 누나가 점점 개그맨이 되어 간
다. 내가 옆에 있어서 날 닮아 그러는 건가? 얼빵해졌다고나 할까? 그래 내가 죽
일 놈이다.
아까 보다 훨씬 썰렁하고 무서운 밤 거리를 다시 걸어 종각으로 갔다. 나는 깡
패라도 나타날까봐 겁나 죽겠는데 누나는 뭘 믿고 저렇게 히죽 웃는 밝은 표정인
지 모르겠다.
"겁 안나요?"
"너 쌈 잘하잖아."
날 믿고 저런거였나. 나 솔직히 두 명 이상만 나타나도 누나 지켜주지 못한다.
내 한 몸 지키기도 힘들다. 깡패 나타나고 나 바로 도망 가버리면 졸라 억울해
하겠지? 내 옆에 이 사랑스러운 여자가, 음 한 떨기 꽃 같은 이 여자가, 무슨 꽃
인지는 말 못하겠지만 하여튼 내 여인이 깡패에게 휩싸인다면? 나 혼자 살자고
도망갈 수 있을까? 그 상황이 되면 나는 과연 어떻게 행동할까?
"은정씨."
"응?"
"깡패 세명 이상 나타나면 나 솔직히 누나 못 지켜줘."
"왜?"
"왜긴. 두 명이 나 엄청 두들겨 패고 한 놈은 누나 이상한 곳으로 끌고 가
면..."
"그래서?"
"혹시 깡패 나타나면 누나는 바로 도망가요. 뒤돌아 보지 말고 도움 청할 수 있
는 곳으로 뛰어 가란 말이지."
"넌?"
"난 졸라 깡패들 약올린 다음 누나와 반대편으로 도망을 가는거지."
"깡패들이 너 안 따라가고 나 따라오면? 아니면 너 바로 잡힐 경우는?"
"할수 없지. 나 생각보다 잘 달려요. 만화처럼 남자 주인공이 여자 뒤에 세우
고 뒤돌려차기 몇 번, 기합 몇 번해서 깡패들 물리치는 거. 그래서 여자가 뿅 가
는거. 말짱 거짓말이야. 어쩔 수 없어. 그 점은 여자들이 알아야 돼. 솔직히 깡
패들 만나면 피차 겁나는 건 마찬가지야. 왜 남자가 여자를 못 지켜주면 나쁜 놈
이 되는거야?"
"그 얘길 왜 하는데?"
"남자가 여자 버리고 도망가는 거, 그거 꼭 욕할 문제만은 아니다?"
"그래서 넌 나 버리고 도망갈거라는 거야?"
"응."
"너 혼자 살려고?"
"그 말이 아니지. 나라도 살자."
"야!"
한 대 맞았다. 누나 상당히 기분 나쁜 표정이었다. 팔짱을 풀고 쪼로로 혼자 앞
서 가 버린다. 이런 걸 두고 긁어 부스럼 만든다는 거다. 가만히 있었으면 되었
을 것을. 에고. 쫓아 갔다.
"화 났어요?"
"너 정말 그랬단 봐?"
"하하, 고래사냥2 봤어요?"
"봤나? 잘 모르겠어. 왜?"
"거기 보면 김수철이가 그 여자 주인공과 도망다니다가 깡패들 만나잖아. 결국
여자를 깡패들에게 뺏기지만 걔 노력하잖아요. 엄청 두들겨 맞으면서도 깡패들
발 붙잡고 늘어지는 모습. 그게 오히려 진실이야. 세상에 덩치 세명 때려 눕히
는 멋있는 놈이 몇 명이나 돼."
"넌 그렇게 할 수 있어?"
"때려 눕히지는 못해도 물고 늘어질 수는 있지."
"그래?"
"응."
호호, 누나가 가던 걸음을 멈추고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이런 걸 말 한마
디로 천냥 빚을 갚는다라고 하는거지. 맞나?
"근데 누나?"
"왜?"
"두들겨 맞을 수는 있는데 요즘 깡패들 무섭잖아."
"또 무슨 말이야?"
"칼로 푹 찌르면 어떡하지? 그래서 나 죽으면?"
"그런 말을 왜 해?"
"야, 영화 같겠다. 칼을 맞고 피를 흘리면서도 누나를 지키기 위해 깡패 발을
붙잡고. 하하, 누나는 도망가면서도 안타까워 뒤 돌아 보고 난 누나를 향해 어여
가, 라고 헤치며 한 손을 흔든다. 캬!"
"치. 진짜 영화 하나 만들어라. 말이 씨가 된다고 진짜 깡패들 나타나겠다."
"나 죽으면 누나 몇 년 안에 딴 놈에게 시집갈까?"
"이게?"
"나 없더라도 행복하게 살아요."
"야아."
"아, 슬프다."
"너 진짜 유치하구나?"
"인제 알았어요?"
"네가 만약 그런 일로 세상을 떠나면 나 널 그리며 평생 혼자 살거야."
"참 내, 말로는 누가 그런 말 못 해."
"잊을까?"
"그럼."
"정말 잊어 버릴까?"
"그럼 세월이 다 약인데."
"훗! 우리도 서로 떨어져 살다 보면 서로에게 잊혀져 갈까."
"아마도."
"진짜 데리고 살아야 겠다."
우쒸, 여전히 같이 살아야겠다,가 아니고 데리고 살아야 겠다네.
"내가 애완 동물이니? 왜 데리고 살겠단 말을 해?"
"왜 그런 말 하는 지 가르쳐 줄까?"
"뭔대?"
"나 졸업하자 마자 결혼 할 생각이거든. 너 그때 학생이잖아. 어떡하니, 데리
고 살아야지."
"엉?"
그 참, 이제 이 여자가 나 사랑한다는 것은 믿겠는데, 그렇다고 요즘처럼 연애
따로 결혼 따로인 세상에 이런 사이 됐다고 바로 결혼할 생각을 갖는다는 건. 이
건 둘 중 하나다. 이 여자가 보기와는 다르게 좀 구닥다리 생각을 하고 산다는
것과 내가 남주기에는 너무 아깝게 아주 멋있다는 거.
새해 첫 날부터 참 많이도 걸었다.
새해 연휴가 끝나고 난 졸업식을 하기도 전에 대학원 연구실에 자리가 생겼다.
방학이었지만 난 다시 율전에서 자취 생활을 시작했다.
누나도 곧 학교를 나오기 시작했다.
아쉬움, 공대와 약대는 그리 멀지 않은 거리에 있었다. 하지만 하루 중 누나를
보는 시간은 짧았다.
어둠이 물들고 하루를 떠나 보내는 시간 누나는 잠시 내 자취방에서 차 한잔의
시간을 가져 주고 서울로 떠났다. 그런 하루, 하루들도 한 달을 꾸려 갔다.
같이 있고 싶다는 아쉬움은 커져 갔다. 다 내 잘못이다. 삐치지만 않았어도 누
나는 내 바로 이웃에서 밤을 보내고 나와 좀 더 긴 시간을 가졌을텐데.
나는 꿈을 키워 나가기 시작했다. 진짜 누나와 내 미래를 같이 하겠다는 꿈. 과
연 이루어 질까.
연하가 어때서 73회
"초컬릿 먹어라."
"에?"
"오늘이 발렌타인 데이란다."
후후, 괜시히 한 번 기대했었다. 오늘이 발렌타인 데이라는 걸, 여자들보다 남
자들이 아마 더 잘 기억하고 있을지 모른다. 혹시나 했는데 역시... 쿠쿠 누나
는 날 사랑한다. 왠일이냐 저 여자가 초컬릿을 다 사주고... 쿡쿡 아이 좋아, 아
이 좋아. 그러나 버트
"그래요? 근데 이게 뭐야? 수퍼에서 파는 오백원짜리 달랑 하나? 포장도 안 되
어 있고 카드도 없어?"
"초컬릿 줬으니까 다음달 14일에는... 알지? 예쁘게 포장 된 사탕 박스 기대할
게."
누나는 집에 가기 전 잠시 내 방을 들렀다가 판대기 초컬릿 하나 달랑 던져 주
고는 많은 것을 기대했다.
"승주형에게도 이랬어요?"
"아니, 난 발렌타인데이 같은 거 안 좋아했어. 초컬릿 처음 줘 보는거야."
"칫! 이 것도 초컬릿이여?"
상표가 훤히 보이는 초컬릿을 흔들어 보이며 누나에게 따졌다.
"성의가 중요한 거야. 다음달에 기대할게 철수야."
"요즘 누룽지 사탕이 유행하더라. 그거 하나 사서 노나 먹읍시다. 내 마음을 듬
뿍 담아 몇 개 던져 줄게."
"오늘부터 딴 남자 찾아봐야 겠다."
에이 여우야! 후후, 그래도 기분은 좋다. 기대 받는 다는 것, 괜찮은 거다.
내가 방을 뺀 것이 잘 한 것일까요? 많이 아쉽네요. 사랑한다고 인정해 버리니
까 철수와 마냥 같이 있고 싶다는 생각이 자주 들어요. 하지만 하루 동안 철수
를 곁에 두는 시간은 많지가 않네요. 그래서 아쉬습니다.
사랑하게 되면 예뻐지고 싶고 예뻐지면 보여주고 싶고 같이 있는 시간은 아쉽
고 그래서 그리움은 곁에 있지만 커져 가나 봅니다. 주위 사람들이 행복해 보이
고 나 또한 행복하며 내가 살고, 사랑하는 사람이 살아가는 이 세상이 아름다와
보이는 것, 느껴보지 못했던 기분, 나는 아직 애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는 철수
를 정말로 사랑하나 봅니다. 자주 하늘을 쳐다 보며 내 감성을 들추어 내고 따스
해지는 바람 따라 내 마음 저며 보는 이유도 내가 지금 사랑을 하고 있기 때문이
겠죠. 승주를 마음에 두고 있을 때도 이 정도까진 아니었는데. 후후, 만 삼년 전
이군요. 백 미러에 비쳐진 철수의 첫 모습, 후후, 상당히 못마땅한 모습이었죠.
근데 그 녀석이 내 사랑이 될 줄이야.
나른한 오후가 지나고 저녁 바람이 불어 오는 시간에 철수에게 삐삐를 치고 연
구실을 나왔습니다.
약대 앞 현관에서 철수를 기다렸지요. 오늘 저녁은 잠시간 같이 걸을 수 있는
데이트라도 할 요량으로 약대 현관 앞에서 철수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호호, 저기 철수가 보이는군요. 공대 쪽에서 철수가 빠른 걸음으로 씩씩하게 걸
어 오다 나를 보고는 웃습니다. 그리고 손을 한 번 흔들더니 뛰기 시작합니다.
그도 나만큼 나를 보고 싶어 했나 봅니다. 귀여운 것.
푸후! 웃으면 안되지요. 철수는 나만 보고 신나게 뛰어 오다 돌부리에 걸려 진
짜 완벽하게 앞으로 꼬꾸라졌습니다. 이걸 연인사이의 사랑이라고 믿어야 될까
요? 분명 사랑하는 건 맞는데 잠시 헛갈립니다. 걸음마 시작한 아기가 엄마를 보
고 아장 아장 걸어오다 뭐에 걸려 넘어 졌을 때 그걸 본 엄마의 느낌. 난 철수
를 보고 바로 그 느낌이 들었습니다. 많이 놀라 철수에게 달려 갔어요. 철수는
상당히 아픈 표정이었지만 고개를 푹 숙이고 아파하기 보다는 억울해 하는 표정
을 짓더니 더 빠르게 내게 달려와 바보스럽게 씩 웃고는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나와 걷기 시작했습니다.
"하하! 누나."
"안 아파?"
"하하. 내 뒤에 사람 많아요?"
머쩍은 듯 웃더니 간사하게 작은 목소리로 물었습니다.
"많지는 않지만 널 보는 사람이 제법 되네."
"빨리 뜹시다."
철수는 아무렇지도 않게 빠른 걸음으로 교문까지 왔어요. 나오자마자 다리를 절
룩 거리네요.
"다친거야?"
"아까는 쪽팔려서 몰랐는데 아파요. 정희 누나네 잠깐 들렸다 갑시다."
철수는 손바닥을 펼쳐 내게 보여 주었습니다. 두 손바닥이 모두 까져 있습니다.
"안 아파?"
"아프지. 누나 얼굴이 제법 안스러운 표정이네요. 하하."
"지금 그런 말이 나오니? 많이 아프겠다."
정희를 찾아 갔어요. 소파에 앉은 철수는 바지를 걷어 올렸습니다. 그리고 정희
와 나를 번갈아 봅니다.
"생각보다 많이 까졌네."
철수의 무릎 팍은 심하게 까져 피가 새어 나오고 있었어요.
"너 왜 그리 조심성이 없니?"
"얘 왜 이런거야?"
"소독할 거 좀 찾아 줘."
남자는 좀 다르군요. 친구도 다르군요. 다친 놈은 철순데 걱정은 나만 했어요.
철수는 날 빼꼼히 쳐다 보더니 바로 바지를 내려 버리더군요.
"에이, 이 정도로 무슨 소독이냐. 그냥 놔두면 다 낫아요."
"바지 걷어 소독하게."
철수는 바지를 걷는 대신 나와 자기를 손가락질하며 정희에게 묻더군요.
"정희 누나. 누나가 볼 때 우리가 연인사이처럼 보여요?"
"아니, 남매 같애."
이것들이... 억지로 바지를 걷게 해서 소독을 하고 연고를 발라 주었어요. 덧나
면 어쩔려구...
"누나 집에 몇 시에 갈거야?"
"나 이제 학교 안 갈거야."
"그럼 바로 집에 갈거야?"
"네 방에서 좀 놀다 갈건데."
"잘됐네. 지금 바로 서울 갑시다."
"응?"
"나 곧 졸업식이잖우. 오늘 정장 한 벌 맞춰야 돼."
"그래?"
"저 번 앨범 찍을 때 누나가 못 마땅했잖아. 좀 골라줘요."
"하하. 그래 이 누나가 섹쉬한 걸로 골라 줄게."
"섹쉬할 것까진 필요 없고 멋있기만 하면 돼."
"벌써 졸업이니? 세월 참 빠르다."
"너도 졸업한 지 일년 밖에 안됐잖아."
"너도? 많이 맞먹네 너?"
"그럼 홍은정씨."
"왜 박철수씨?"
"헤헤."
정희는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찼지만 세상 모든 사람들이 같은 모습으로 사랑하
는 것은 아니죠. 좀 유치하면 어때.
"정희야 다음에 봐."
"잘 있어요. 포스트 아가씨."
철수를 옆에 태우고 신나게 서울로 왔습니다. 그리고 갤러리아 백화점, 명품관
을 포함해서 말이죠. 청담동 일대를 철수에게 맞는 옷이 아니라 내 마음에 드는
옷을 입히기 위해 돌아 다녔습니다.
"누나야, 아무거나 사면 안될까?"
"조금만 더 돌아 다녀 보자."
"나 50만원 넘어가는 옷은 못 사요."
"입어 보는 건데 뭐."
철수는 지치는가 봅니다. 내가 너무 내 입맛에만 맞추었나? 그래도 별 투정 안
하고 같이 다니는 걸 보면 철수와는 성격적인 트러블도 많지 않을 것 같네요.
"이거 그냥 살래."
"아니야, 이건 좀..."
"누나야, 옷걸이가 별론데 너무 많은 기대하지 마요."
"니가 어때서?"
예전 미팅 깨진거 들먹이며 날 깎아 내릴 때가 어제 일처럼 선명하게 떠 오른
다. 근데 오늘은... 그래서 여자 마음은 갈대라 그러나? 좀 이상한 비유같다.
"으씨. 누나하고 나하곤 성격이 안 맞는것 같애. 같이 살면 힘들 것 같다."
"그렇게 힘드니?"
"응."
"오늘은 솔직히 너무 늦게 나왔다. 내일 다시 올래?"
"에?"
무슨 이런 여자분이 다 있냐. 일곱시경에 왔다가 지금 아홉시가 넘었다. 나혼
자 왔으면 벌써 집에 들어 가 발닦고 새로 산 옷 들춰보며 히죽거리고 있을 시간
이다.
누나가 그런대로 맘에 들어 한 정장은 조끼도 없는데 60만원이 넘어가는 거였
다.
"나 최대가 오십만원이야."
"특별한 날 입는 거잖아."
"나 돈 없어요."
"내가 조금 부담할게."
"나 그리고 셔츠랑 넥타이도 사야 된다 말이야."
"그건 내가 졸업 선물로 하면 되잖아."
"누나 돈도 못 벌면서 그래도 되는거야?"
"응."
우리 얘기가 이상했나? 옆에 서 있던 점원 아가씨가 미소 지으며 물었다.
"두 분 사이가...?"
"에?"
"남매 사이에요?"
"닮아 보여요?"
이건 누나가 한 질문이다. 날 보고는 한 번 비웃어 주고 점원에게는 아장되는
미소를 보이며 누나가 되물었다.
"연인 사이 같기도 하고..."
"은정씨 이걸로 합시다."
난 남매 하기 싫다. 나 장남으로 자랐다. 내가 더 이상 저 여자에게 동생으로
인식되어져서는 아니되었다.
집에 가서 수희에게 자랑을 했다. 옷을 입고 온 갖 포즈를 취하며 자랑을 했
다.
"너네 오빠 멋있지 않냐?"
"옷은 잘 골랐네. 근데..."
"근데 뭐?"
"옷걸이가 좀."
"뭐야? 너 예전엔 안 그랬잖아."
"그때는 주위에 남자라곤 오빠 뿐이었잖아."
돌아 다닌 보람이 있었다. 누나에게 끌려 다닐 땐 피곤했지만 아버지도 어머니
도 수희도 다들 옷 잘 샀다고 말해 주었기에 피곤했던 것은 잊혀졌고 사랑스런
누나의 모습만 더 선명하게 기억된다. 하하.
내 옷에 대한 우리 아버지의 평가?
"얼마 줬냐?"
"30만원도 못 줬어요."
"그럼 잘 샀네."
내 대학 사 년간을 마감하는 졸업식 날, 우리 가족 모두가 내 졸업을 축하해 주
기 위해 학교에 모였다.
"오빠? 시골서 다녔는데 졸업식은 왜 서울서 해?"
더 이상 수희는 날 존경하지 않는다.
"그 은정이는 안 오냐?"
"어? 아버지. 이름을 기억하시네요."
"올거냐?"
"온다고 했어요."
"그래? 흠."
"은정이? 걔 온다고 했어? 오빠 나 은정이에게 연락해 볼까?"
자다가 봉창 두들기나.
졸업식? 졸업식이 거행되는 곳에선... 따분하다는 이유로 나 혼자 있었다. 졸
업 앨범하고 학위 받아서 주차장에서 기다리시는 가족의 품으로 돌아 갔을 때 어
떻게 알았는지 은정이 누나와 정희 누나가 거기 있었다. 둘 다 나는 본체 만체
했다.
우리 아버지와 이야기를 정답게 나누던 누나들은 내가 오자 이번엔 수희와 인사
를 나누기 시작했다.
"너 많이 이뻐졌다?"
"언니 시집 간다며?"
"그래, 오랜 만이지?"
은정이 누나는... 요조 숙녀의 모습으로 정희 누나 옆에 서 있었다. 정희누나
도 역시 정숙한 예비 아줌마의 모습으로 수희 곁에 있다. 수희? 많이 어려 보였
다. 수희는 은정이 누나와는 초면이다. 정희 누나에게는 반갑게 인사를 했으나
은정이 누나에게는 아래 위로 꼬아 보는 태도를 취했다. 정희 누나가 웃으며 은
정이 누나에게 수희를 소개하는 식의 눈 표정을 지었고 은정이 누나도 안다는
듯 웃음으로 수희에게 고개를 돌려 반갑다는 표정을 지었다. 수희가 기분 나쁜
투로 먼저 은정이 누나에게 말을 붙였다.
"언니 이름이 은정이에요?"
"네."
네? 가증스러운 것.
"언니가 그 나이 많은 처자에요?"
"응?"
누나 내 동생 교육 다시 시키리다.
내 졸업식 날 회식? 점심때 소갈비 집을 갔었다. 그 자리에서 난 아무것도 아니
었다. 그 자리의 주인공은 은정이 누나, 조연은 정희 누나와 아버지. 비중있는
배역으로 우리 어머니. 양념으로 엑스트라 한 명 내 동생 수희. 나? 나는 그냥,
그냥 끼어 있는 사람1.
나한테도 질문 좀 해 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