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Daum
  • |
  • 카페
  • |
  • 테이블
  • |
  • 메일
  • |
  • 카페앱 설치
 
카페정보
headhunter
 
 
 
카페 게시글
게시판 스크랩 [180] 인생이란 무엇인가?
신충우 추천 0 조회 26 07.01.03 19:44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신충우 파일 180]

 

우리 인간은

먹기 위해서 사나

살기 위해서 먹나?

우리 인간은

종족 번식을 위해서 섹스를 하나 

즐거운 삶을 위해서 섹스를 하나? 

우리 인간은

죽기 위해서 사나

살기 위해서 죽나?

이 의문은

‘인생이란 무엇인가’를

원초적으로

돌아볼 수 있는

인간 모두의 자문이다.

 

인간이고 싶다.

인격을 가진 인간으로 살고 싶다.

누구의 남편

누구의 아버지로서가 아닌,

누구의 아내

누구의 어머니로서가 아닌

하나의

인격체로 살고 싶은 것이다.

 

마주 보면 둘이 되고 감싸 안으면 하나가 된다.

가족은 옳고 그름을 떠나 같이 가는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이 무시당하는 것이며

그것도 사랑하는 가족으로부터 무시당하는 것이다.

가족은 힘들고 어려울 때 같이 있어 주는 것이다.

 

사랑하지 않으면

분노와 증오도 없다.

 

부모는 누구나 자기 자식이 모든 면에서

한계가 없는 인간으로 성장하고

가능성을 마음껏 발휘하며

깊은 감사의 마음을 갖고 생활하길 바란다.

그러나 아이들은 부모의 뒷모습을

그대로 보고 배우며 닮은 꼴로 자란다.

 

부부싸움을 하면

프랑스 사람은 애인을 찾아가고

미국인은 변호사를 찾아간다.

그렇다면 우리나라 사람들은?

‘칼로 물베기’란 것도 인정사정이 있던 호시절 이야기.

한번의 다툼으로도 이혼을 감행하는 것이 요즘 세태다.

 

남는 마음이 아픈 기억들 뿐이라 할지라도

어느 때고 눈길 마주쳤을 때

서로 상처받지 않도록

소중한 인연 깨진 얼음처럼

갈라지지 않도록 하라.

 

우리는 남의 인생을 따라 다니다

정착 자신의 인생을 보지 못한다.

 

아직도

어딘가에 있다고 생각치 마라.

두리번 거리지 마라.

지나가는 남자들을 쳐다보지 마라.

지나가는 여자들을 쳐다보지 마라.

어디를 쳐다봐도 그(그녀)는 없다.

 

집착을 버려라

버릴 수 있는 것 다 버려라

버릴 수 없는 것 마저 버려라

 

이타심 ․ 동정심 ․ 이해 ․ 사랑 ․ 양심 ․ 정의감 같은,

사회적 유대를 공고히 하고

인간이 스스로에게 존엄성을 부여하는

가장 인간다운 덕목들은

유전적으로 물려받은 것인가?

진화심리학으로 인간 감정 ․ 도덕의 기원을 포착하려는

『도덕적 동물』저자 로버트 라이트는

“인간은 화려한 윤리적 장구로 무장한 종(種)이자,

이를 오용하려는 성향을 지닌 비극적 존재“라고 말한다.

인간의 도덕성은 종의 번영을 위해 진화하지 않았으며

앞으로도 그러리라는 보장이 없다는 것이다.

 

우리의 삶이 아름다운 건

시시각각 죽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나 아닌 나와의 다툼에서

찾을 수 있는 나.

힘겹게 걸어온 걸음들이

오히려 나를 일어서게 할 수 있다.

 

인생이란 무엇인가를 반추해 본 것이다. 저자는 일에 미쳐 살아왔다. 불철주야 일벌레처럼 일해 왔다. 일을 하지 않으면 무엇인가 잘못될 것 같은 불안감 때문에 더욱 일에 매달렸다. 일 중독증에 빠졌던 것이다. 가족보다 일을 우선시 해온 것도 사실이다. 일에 인생(人生)의 가치(價値)를 부여하고 그 속에서 보람과 성취감(成就感)을 찾아 왔다.

 

“엄마앞에서 짝자꿍 아빠앞에서 짝자꿍

엄마 한숨을 잠자고 아빠 주름살 펴져라

햇님 보면서 짝자꿍 도리도리 짝자꿍

우리 엄마가 웃는다 우리 아빠가 웃는다.”

우리 동요 <짝짝꿍> 가사이다.

 

옛날 우리 선조들은 아기가 태어나면

제일 먼저 이런 놀이를 통해 세상을 접하게 했다.

도리도리 까꿍

도리도리 짝짝꿍

곤지곤지 잼잼이

바로 그것이다.

 

도리도리의 도리는

길 도(道)자에 이치 리(理)로,

사람이 마땅히 지켜야 할 바른길이라는 뜻이다.

까꿍은 본딧말이 각궁(覺弓)으로, 양심을 깨닫는다는 뜻이다.

도리도리 까꿍은 근본의 자리로 돌아가고자 하는 마음을

아이에게 어릴 때부터 심어주는 것이다.

 

그러면 짝짝꿍은 무슨 뜻인가?

우리 민족의 상징인 태극기를 보면

가운데 활 궁(弓)의 모양이 있고 아래 위로 음과 양이 나뉘어 있다.

짝짝궁이란 음과 양이 짝을 이룬 상태, 즉 태극의 상태를 말한다.

마음에 있어서의 태극이란

나도 모르게 움직이는 마음의 음과

내가 아는 상태로 움직이는 마음의 양이 합쳐진 상태이다.

도리도리 짝짝꿍이란 ‘정신차려 도리를 알거라’는 말이다.

 

곤지곤지의 곤지는

땅 곤(坤)에 땅지(地)로,

즉, 땅의 기운이 서려 땅이 만들어진 이치, 기가 움직여 우주가 창조된 이치를 말한다.

마음이 움직여 기가 움직이고 기가 움직이니 어떠한 현상이 나타나는 것을 표현한 것이다.

잼잼은 ‘잡아라’는 우리말로

곤지곤지 잼잼이란

‘네 마음대로 이 세상이 만들어지는 이치를 잡아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도리도리 짝짝꿍, 곤지곤지 잼잼은

도리도리 짝짝궁하고 곤지곤지 잼잼하여 각궁하라는 말이다.

쉬운 말로 ‘정신차려 도의 이치를 깨치라’는 훈육으로

우리 한민족의 인격을 형성하게 하는 정신이자 사상이다.  

 

서두의 질문으로 다시 돌아가  보자. 인생(人生)이란 무엇인가. 대중가요처럼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것”인가. 요즘은 학력, 결혼, 직업이 인생의 진로를 좌우한다. 인간은 돈, 권력, 명예를 잡기 위해 동분서주한다. 이들은 서로 연관성을 갖고 있다. 그러나 돈이 있다고 권력과 명예가 주워지지는 않는다. 그래서 졸부(猝富)들이 권력과 명예를 잡기 위해 실세들과 혼맥을 맺거나 판검사, 대학교수, 의사들을 사위로 맞아 들이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세상을 살면서 보면 최후에 남는 것은 명예(名譽)인 것 같다.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라는 말이 이를 반증하는 것 아닌가.

 

“결혼하기 전에는 두 눈을 뜨고 결혼한 뒤에는 한 눈을 감으라”는 말이 있다. 최대한 신중하게 결정할 게 결혼이지만 일단 검은 머리 파뿌리 될 때까지 함께 살기를 작정했다면 가급적 허물을 덮어주고 감싸면서 살아가야 한다는 얘기다. 그러나 말이 그렇지 이게 어디 쉬운가. 멀었던 두눈도 결혼하고 나면 번쩍 떠지니 말이다. 그래서 영국 작가 오스카 와일드는 “서로의 오해에 바탕을 둔 것이 결혼”이라고 했고 독일 시인 하이네는 결혼을 “어떤 나침반도 행로를 발견하지 못한 거친 바다“에 비유했다. 기혼자들은 이 말에 동감할 것이다.

 

결혼은 이인삼각(二人三脚)경기이자 마라톤과 같다. 남녀가 한쪽 다리를 같이 묶고 경기를 하자면 마음을 모아 호홉을 같이 하며 서로가 보조를 맞추어야 앞으로 나아 갈 수 있다. 우선 보폭과 보행 속도를 맞추어야 하고 한쪽이 실수로 너머지면 손을 내밀어 일어 나게 해야 하고 장애물이 나타나면 함께 치워야 한다. 또한 마라톤은 엄청난 고통과 인내가 수반되는 데 결혼도 마찬가지다. 서로 다른 환경에서 자란 남 남이 만나 자식 낳고 살다보면 좋은 날보다 마음 상하게 되는 날이 더 많다. 이에 따라 선인들이 양가 가족 친지와 지인들을 모아 놓고 그 앞에서 결혼식을 하게 하는 지혜(知慧)를 보인 것이다. 외견상으로 좋게만 보이는 결혼은 살다 보면 참고 인내해야 할 일들이 많기 때문에 이같은 공개적인 약속을 하게 한 것으로 보인다. 결혼식을 올리지 못하고 살던 부부들이 나중에 자식을 낳고도 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일 것이다.

 

산에 오르면 내려와야 하듯이 인간은 부침(浮沈)속에 산다. 높이 올라가면 올라간 만큼 내려올 때 그 충격이 크다. 평범한 사람들은 부침을 모르고 살 수도 있다. 인간살이는 피라미드와 같은 조직 속에서 이루어지므로 위로 올라가면 갈수록 주목을 받고 경쟁은 더욱 치열해 진다. 신분의 부침은 가정생활에도 영향을 미친다. 요즘은 과거에 달리 수입규모가 가정생활에 차지하는 비중이 높아져 가정불화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우리는 옛날보다 모두가 다 잘 살게 됐지만 대부분 불행하다고 생각한다. 절대적인 빈곤은 어느정도 해결됐지만 상대적인 빈곤이 새로운 문제로 등장한 것이다. 인간의 물욕(慾心)은 끝없이 무엇인가 자꾸만 채우려고 한다. 부를 축적했다고 벼슬(국회의원)을 사려고 하고 권력이 있다고 유부남이 젊고 예쁜 여자를 탐하고 무료하다고 중년부인 어린남자와 여관방을 전전하는 등….

 

그러면 인간의 행복은 어디에 있는가. 행복은 신기루와 같아 ‘저산 너머에 있는 것 같아 가보면 그곳에 없고 그 너머에 있는 것처럼’ 또 보인다. 쫒고 쫒다 보면 쫒는 자만이 지친다. 행복은 저 산너머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자기 자신의 마음 속에 있는 데…. 발견하지 못하는 것 뿐이다. “본인이 행복하다고 느끼면 그 사람은 행복한 것”이다. 행복은 본인이 느끼고 찾는 것이지 누가 가져다 주는 것이 아니다. 행복은 돈, 권력, 명예와 아무상관이 없는 무형의 자산이다. 일전에 TV에서 보잘 것 없는 작은 식당을 하며 즐겁게 이웃을 돕고 사는 부부를 보면서 ‘이것이 인생이고 행복이 바로 이런 것이구나’ 하는 느낌이 들었다.

 

자성이 필요하다. 고백이든 참회든 해야 한다. 고백(告白)은 마음 속에 숨기고 있던 것을 털어놓는 것이고 참회(懺悔)는 자신이 범한 죄과를 깨우쳐서 회개하는 것이다. 후자는 불교 · 개신 ·가톨릭교 등에서 종교적인 용어로 쓰이는 경우가 많다. 불교에서는 타인에게 자기 죄의 용서를 비는 뜻으로 쓰인다. 개신교에서는 '회개'라는 용어를 사용하며 죄악으로 가득찬 마음을 하느님의 은혜의 세계로 복귀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가톨릭교에서는 '고해'라고 하여 세례를 받은 자가 사제에게 죄를 고백해 용서를 받는 의식절차를 뜻한다.

 

우리 인간은 왜 사는가? 이 질문에서 두가지 뉘앙스가 느껴진다. 첫째는 말 그대로 ‘왜 사느냐?’라는 것이다. 누가 갑자기 이런 질문을 했을 때 뭐라고 답할 것인가. 태어났으니까 살 수 밖에 없겠다고 말 할 것인가. 이것은 존재적인 대답이다. 두번째는 ‘무엇을 위해 사느냐?’ 즉 삶의 목적이 무엇이냐는 것이다. 이에 대한 대답은 가치적인 것이다.

 

인간은 항상 ‘자신이 누구이며 왜 살아 가는가?’에 대해 궁금해 한다. 사고하는 인간이기 때문에 숙명적으로 갖는 자문이다. 인간만이 오직 자신의 정체성과 존재의 이유와 가치에 대해 궁금해 한다. 이 땅의 어떤 생물체도 인간 외에는 자신이 왜 사는지에 대해 고민하지 않을 것이다. 즉, 다른 동물은 아무생각이 없이 그저 먹고 자고 싸고 놀고 그러다 생을 마감한다.

 

우리 인간이 생각하는 존재의 이유와 가치는 여러 가지이고 천차만별이다. 그러니까 인간이라는 존재는 끊임없이 자신이 왜 존재하는지에 대한 의문을 품고 그 의문을 해결해 나가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우리 인간은 인식하면서 살아가고 살아가면서 인식한다. 유아는 날 때부터 엄마 젖을 알아보고 빨아먹을 수 있다. 우리는 나무의 녹색과 향기를 인식한다. 나무가 저 앞에 서 있으므로 그것을 피해 돌아갈 수 있다. 타인의 마음과 의도를 읽는다. 사랑이 불변적이 아니라는 것을 경험한다. 인간의 보편적 본질이 무엇인지 차츰 깨닫는다. 이것이 인간의 인식이다.

 

이 세상의 모든 존재에는 똑같이 적용되는 존재 원리가 있다. 그것은 범주로 범주 간에는 다시 의존하고 결합하는 일정한 법칙들이 있다. 그것은 범주의 범주이다. 예를 들면 높은 존재는 낮은 존재보다 자유롭다. 그러나 반대로 낮은 존재는 높은 존재보다 강하다. 정신은 바위보다 자유롭다. 하지만 바위도 그 어느 것에도 의존함이 없이 바위로서 존재할 수 있다. 반면에 정신이 존재하려면 살아 있는 육체가 있어야 하며 육체를 구성하는 무기체 또한 있어야 한다. 육체 없는 정신은 있을 수 없다. 즉 정신은 의존적이며 따라서 약하다. 이 세상은 공평하다. 돌멩이는 무식한 대신에 강한 존재력이 있다. 생명이 있는 것은 돌멩이보다는 자유롭지만 다른 것을 먹지 않고서는 살 수 없다. 철학에서 말하는 존재이다.

 

우리는 이성과 교제를 하게 되면 사귈 이성의 눈, 코, 귀의 생김새나 몸매에 대한 인식보다도 그나 그녀가 가진 외모나 성격이 내게 어떤 가치를 지니며 나를 얼마만큼 매료시키는가에 더 관심을 갖는다. 이것이 가치이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프랑스 철학자 르네 데카르트(1596∼1650년)의 말이다. 존재(存在, Being)란 사전적으로 실제로 있음, 또는 있는 그것. 지구 상에 존재하는 온갖 생물을 말한다. 철학적 용어로서의 존재는 첫째 ‘있다’고 말할 수 있는 모든 것의 총괄이다. 원래는 일반적인 유(類)로서의 존재자를 뜻한다. 존재자는 실재자뿐 아니라 비실재자도 포함한다. 비실재자, 예를 들면 천마(天馬)도 그것이 ‘천마로 존재하는 것’으로 사고되는 한에서는 ‘일종의 존재하는 것(가상물)’이기 때문이다. 또한 ‘존재하지 않는 것(비존재자)’도 어떤 뜻에서는 존재자의 일종이다. 왜냐하면 ‘존재하지 않는 것’도 ‘존재하지 않는 것’인 상태에서 사고되며 또한 ‘그러한 것으로서’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존재자는 일체의 것을 총괄하는 유(類)이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일체의 것에 관한 하나의 지혜로서의

철학을 ‘존재자인 한에서의 존재자에 대한 원리 · 원인의 지식’이라고 규정했다.

 

둘째는 보다 엄밀한 뜻으로 존재는 존재자에서의 ‘존재의 작용’이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그 무엇’이며 ‘그 무엇’인 한에서 우리들에게 알려진다. 존재자에서의 이 ‘그 무엇’은 각 존재자에게 고유한 것이며 존재자가 속하는 유(類)와 종(種)에 따라 특수화된다. 이 ‘그 무엇’의 특수성에 의해 존재자는 그것과는 상이한 다른 존재자와 구별된다. ‘무엇’은 그것의 ‘무엇인가’를 한정하는 것, 그것의 ‘존재본질’이다.

 

이에 반해 모든 존재자에게 적용되는 ‘있다’라는 술어는 모든 존재자에게 똑같이 해당되는 공통적인 것이다. 모든 존재본질이 어느 일정한 유 안에 한정되는 데에 대해 ‘있다’는 술어는 유의 한정을 초월한다. 따라서 이것은 엄밀한 뜻에서의 유가 아니라 유를 초월하는 것, 즉 ‘초월자’이다. 모든 존재자에 공통된 ‘있다’는 말이 뜻하는 ‘존재의 작용’이 ‘존재’이다. 모든 존재자는 특수한 존재본질과 공통된 존재의 작용으로 이루어진다.

 

존재자에 대한 우리들의 인식은 각 존재자에 대해서 ‘무엇인가’라고 물을 때 우선 특수한 존재본질로 향하게 된다. 그리고 그렇게 하는 한에서 우리들의 지식은 특수화되고 특수과학의 지식이 생기게 된다. 존재자가 존재자인 한에서 갖는 공통된 ‘존재’는 은폐되고 ‘존재’에의 물음은 잊혀진다. 특수한 존재자에의 물음에서 잊혀진 이 존재의 공통된 뿌리로서의 존재, 그 자체에의 물음으로서 ‘철학의 물음’이 생긴다.

존재 문제를 그 자체로서 분명히 한 최초의 철학자는 파르메니데스(고대 그리스 철학자, 엘레아학파의 시조)였다. 그에 의해서 존재에 대한 문제는 '있다'라는 말로 파악되었고 존재자는 '있다'라고 하는 말이 모든 제약을 떠나 갖는 충분한 의미에 따라 완전무결한 것(모든 비존재를 배제하는 것)으로서 사고의 대상이 됐다. 여기서 불완전한 존재자는 모두 비존재자로 여겨졌고 무우주론(無宇宙論)에 귀결됐다.

 

후대에서의 존재론 문제는 생성소멸하는 세계 안의 모든 존재자를 어떤 의미에서 존재한다고 보는가, 또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는가에 달려 있다. 비존재의 문제는 플라톤에서 처음으로 파악됐다. 존재는 비존재가 있기 때문에 우리들에게 나타난다(따라서 존재와 비존재는 서로 배척하는 것은 아니다). 존재의 시현(示現)이 이데아(플라톤 철학의 기본 개념으로 동사 이데인(보다, 알다)의 파생어)이다. 존재와 비존재의 관련에 존재론의 문제가 있으며 이를 밝히는 방법이 변증법(辨證法)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있어 존재는 존재본질과의 연관에서 문제시된다. 모든 '있는 것'은 어떤 '그 무엇'이며 이 '그 무엇'이 그 존재본질이다. 존재본질은 어느 일정한 것인 한에서 어떤 유(類) 안에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최고의 유로서 10개의 카테고리를 들었다. 그러나 '있다'라는 술어는 모든 유에 속하는 것의 술어가 되므로 카테고리의 범위를 늘 초월하는 것이며 일정한 유 안에 포함되는 존재자를 다루는 특수한 과학에서는 취급되지 않는다.

 

존재는 이런 뜻에서 선(善) · 진(眞) · 일(一) 등과 함께 후에 초월자(超越者)라고 일컬었다. '있다'라는 술어를 종합적으로 다루고 그것이 어떤 뜻을 가지며 어떤 원리에 입각해 있는가를 탐구하는 학문을 아리스토텔레스는 '존재자인 한에서의 존재자의 원리학'이라고 규정하고 이것을 '제1철학(후에 형이상학)'이라고 이름지었다. 이것은 철학사에서 존재론의 최초의 체계적인 시도였다.

 

고대 말기로부터 중세에 이르는 그리스도교 사상은 성서에 나오는 하느님의 말을 세계존재를 해명하는 열쇠로 삼은 것이 그 특색이다. 모세(이스라엘 종교적 지도자이자 민족적 영웅)가 전했다고 하는 '나는 존재한다(Ego sum qui sum)'라고 하는 신의 자기시현(自己示現)의 말은 원리인 신의 존재와 피조물인 세계존재의 관계를 푸는 열쇠로 일찍부터 주목돼 여기에 독특한 존재의 사색이 전개됐다. '존재론적 증명'으로서 안셀무스(캔터베리 대주교이자 영국 국교회의 스콜라 신학자) 내부에 결정(結晶)된 존재의 사변(思辨)은 이 독자적인 존재론이 낳은 훌륭한 성과의 하나이다.

 

이어 이탈리아 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슬람교권으로부터도 신학적 사변의 전통을 흡수해 이 존재사변을 아리스토텔레스의 존재론에 접합시켰다. 신은 '존재 그 자체' 즉 존재의 작용 그 자체가 그 존재본질이 되는 것이다. 이에 대해 세계의 존재는 각 존재에 따라 서로 다른 존재본질을 지닌다. 그러나 그 존재본질은 존재를 포함하는 것이 아니므로 신인 존재 그 자체에 원인지어져 존재한다. 이리해 토마스 아퀴나스에 의해 그리스도교의 창조론은 존재론적으로 해석됐다.

 

근세철학의 인식론적 · 관념론적 경향은 존재문제를 철학의 주제로부터 멀리했다. 이 경향은 20세기 전반기 이래 실존론적 · 형이상학적인 철학에 의해서 시정되기 시작했으나 독일 실존주의 철학자 M.하이데거가 이 편향을 근본적으로 비판하고 존재문제를 철학의 주요문제로 회복시켰다.

 

인간의 삶은 존재로 보아야 하나 아니면 가치로 보아야 하나. 우리 인간은 레몬의 맛은 혀끝으로 느낄 수 있고 노란색은 시각으로 지각된다. 그러면 레몬이 발산하는 상큼한 매력은 우리 영혼의 어떤 기능에 이해 파악되는가? 어떤 것의 미와 매력은 결코 그것의 길이와 면적의 계산에 의해 결론지어지는 것이 아니다. 아름다움은 마음으로 직접적으로 느껴지는 것이다. 바꿔 말하면 가치는 감정적으로 직관되는 것이다. 모든 가치인식은 직관이며 직관 가운데 특히 감정적 직관의 작용이다.

 

감성에는 맛과 색, 쾌락과 고통을 느끼는 감각뿐 아니라 기쁨, 슬픔 등의 감정 상태와 가치에 대한 느낌이 있고 사랑과 미움 같은 능동적 작용도 있다. 수학 공리 같은 증명 불가능한 기본 전제들은 지성적 사고가 아니라 감정적 직관으로 파악된다. 감각적 느낌은 감각적가치를 느끼며 생적 느낌은 생적 가치와 더불어 건강의 느낌, 늙음의 느낌을 느낀다. 정신적 느낌은 인식적 가치, 윤리적 가치, 그리고 미적 가치와 종교적 가치를 느낀다. 가치 인식에는 개개의 가치에 대한 느낌뿐 아니라 두 가치의 높고 낮음을 비교해 그 가운데 높은 가치를 선호하고 낮은 가치를 배척하는 가치 높낮이 감각(가치 선호와 가치 배척작용)도 있다.

 

사랑과 미움은 감정 영역의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다. 단순한 느낌은 있는 그대로의 가치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이기만 하는 반면에 사랑은 있는 가치뿐 아니라 대상이 가능적으로 가질 수 있는 가치, 그리고 이상적 가치를 찾아내며 숨겨져 있는 가치도 발굴해낸다.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면 그의 좋은 점을 자꾸 찾아내며 그의 이상적인 모습을 그리게 되고 그의 결점도 마음속에서 잘 다듬어 받아들이게 된다. 그러므로 사랑은 단순한 수용작용이 아니라 자발적이고 창조적인 작용이다.

 

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에 관심을 갖는가에 따라서 내가 접촉하고 추구하는 가치 세계가 달라지고 나의 삶의 목표가 달라진다. 아름다움을 사랑하는 사람은 예술가가 되고 자연을 좋아하는 사람은 과학자가 된다.

 

철학사에서 감정은 언제나 저급한 것으로서 천시당해 왔다. 특히 플라톤을 비롯한 합리주의자들은 감정이 혼란한 사고와 같은 저급한 인식의 단계일뿐 아니라 윤리적 오류의 근원이라고 보았다. 플라톤에 의하면 감정은 탄생 이전의 순수하던 영혼이 탄생 순간에 육체와 결합되면서 육체로부터 흘러들어온 것이다. 합리주의자들은 마치 감각이 감성의 전부인 듯이 착각하고 감성 가운데 가치 느낌이나 직관과 같은 탁월한 인식적 도덕적 기능이 포함돼 있음을 간과했다. 그런 합리주의와 반대로 프랑스 수학자이자 철학자 파스칼은 수학 공리나 신의 존재까지도 가슴으로 느끼고 파악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파스칼의 사상을 그대로 이어받은 것이 현대의 막스 셸러(독일 철학자)의 감정론이다.

 

셸러에 의하면 감정과 이성의 관계는 마치 눈과 귀의 관계와 같다. 눈은 볼 수만 있고 들을 수는 없으며 귀는 들을 수 있지만 볼 수는 없다. 그와 마찬가지로 감정이 느끼는 것을 이성이 이해할 수 없으며 이성이 파악하는 것을 감정이 납득할 수 없다. 감정과 이성은 서로 이해할 수 없다. 이성이 감정에 의해 이해받을 수 없는 것이라고 해서 이성이 저급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없듯이 마찬가지로 감정이 이성에 의해 이해받을 수 없다고 해서 감정이 저급하다고 볼 수는 없다. 오히려 감정은 이성이 볼 수 없는 것을 보는 능력이다. 감정은 적어도 이성과 동등한 수준의 인식이라고 할 수 있다.

 

감정은 이성이 납득할 수 없는 감정만의 독특한 논리를 따른다. 그 누가 보아도 사랑스럽지 않은 어떤 남자를 어떤 여자가 사랑할 수도 있다. 이성은 볼 수 없고 감정만이 볼 수 있는 것은 바로 가치세계이다. 이성과 전혀 이질적인 감정만의 논리는 바로 가치질서와 가치법칙이다.

 

가치철학(價値哲學)은 철학적 인식의 대상은 사실의 문제가 아니고, 당위 또는 보편타당적 가치의 탐구·확립에 있다고 보는 관점으로 가치론이다. 어떤 사물이 지니고 있는 의의나 중요성을 말하는 가치를 ① 인간의 감정이나 요구나 관심의 대상이 되는 것(호오·선악 따위), ② 인간 정신의 목표가 되는 보편타당의 당위(진·선·미 따위)로 보는 것이다.

 

가치에는 유용성의 가치, 즉 도구적 가치, 감각적 가치, 생적 가치, 진선미의 정신적 가치, 그리고 종교적 가치가 있다. 가치에는 높낮이가 있다. 감각적 가치는 생적 가치보다 낮으며 정신적 가치는 생적 가치보다 높다. 이러한 가치의 높낮이에도 시대와 장소에 따라 가변적인 도덕과 예술양식과 같은 상대적 가치질서와 영원불변한 절대적 가치질서가 있다.

 

그러면 어떤 근거와 기준으로 가치의 높낮이가 결정되는 것일까? 맛있는 생크림케이크와 독일 시인 릴케의 시집을 비교해보자. 케이크가 제공하는 미각적 쾌락은 잠시 동안에 불과하지만 시의 내용은 지속적으로 머리에 남아 있다(지속성). 케이크는 세 사람이 나눠 먹으면 다 없어지는데 시집은 쪼개지 않아도 여러 사람이 읽을 수 있으며 무수한 사람들이 읽어도 닳아 없어지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다(불가분리성). 케이크가 주는 즐거움은 그렇게 깊지 않지만 시가 주는 정신적 만족감은 아주 깊은 것이다(만족의 깊이). 이와 같이 가치의 지속성, 불가분리성, 만족의 깊이 등이 가치 높낮이의 기준이 된다. 이 기준은 현대의 가치론적 윤리학자 막스 셸러에 의해 제시된 것이다. 가치에 관한 철학적 탐구가 보다 진보된다면 얼마든지 다른 기준이 보다 타당한 것으로 나타날 수도 있다.

 

이와같이 가치론이 인간의 삶을, 인식론이 인간의 인식을 다룬다면 존재론은 인간 존재를 다른 존재와 더불어 다루는 것이다. 우리 한민족은 현세적인 세계관을 갖고 있지만 동방을 대표하는 예의지국(禮儀之國)으로 관습과 도덕에 의해 인식과 존재 보다는 가치적인 삶을 살려고 한다. 인간은 인간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인간적인 것이 아니고 스스로의 노력에 의해 인간적으로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아무리 화려한 윤리적인 장구로 무장을 한다해도 진화심리학적으로 동물적인 속성을 지니고 있어 종의 번영을 위해 근본적으로 존재적인 삶을 살려고 한다.  인간은 강물처럼 흐르는 존재이다. 우리는 지금 이렇게 이 자리에 앉아 있지만 순간마다 끊임없이 흘러가고 있다. 늘 변하고 있는 것이다. 날마다 똑같은 사람일 수 없다.

 

철학(哲學)은 ① 세계 인생 지식에 관한 근본 원리를 연구하는 학문, ② ‘세계관이나 인생관’을 비유해 이르는 말이다. 철학에는 만장일치의 전제나 이론이 없다. 철학사는 각기 서로 다른 주장들 간의 각축전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철학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도 아직까지 일치된 대답이 전혀 없다. 누구나 살아가는 철학이 있게 마련이다. 상인의 철학은 많은 돈을 버는 것이다.

 

[신충우 동서철학사상연구소장]   

 
다음검색
댓글
최신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