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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인민군 아닌 빨치산의 신세가 되었다
韓 明 郁 (한명욱- 전 북괴군 대좌)
【패전 모르고 지리산에】
-나는 안내兵 따라 산간 부락에-
지리산 한 골짝을 끼고 자리 잡은 우리들. 나는 후방 부사령관이란 허울 좋은 탈을 쓰고 은둔생활을 해야 했다.
그런데 이곳은 아주 깊은 산간으로 기암괴석의 절경은 더 말할 수 없었다. 심산계곡에 절해고도와도 같은 이곳은 먹을 것만 있으면 그만이었다.
절지삼림 속의 나는 독보 천하에 유아독전 격이 된 나의 착잡하고 외롭고 쓸쓸한 심정을 달래줄 만한 고장으로 충분했다.
수려한 경관과 산세가 외롭고 적적하면서도 불타는 내 심정을 달랠만한 곳이었다.
그러다가도 내 마음은 곧 변하여 우울해졌다. 산에 의지하고 살 수 없었기 때문일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쫓긴 자, 지휘계통을 잃은 패잔병으로 볼 때는 이곳이 낙원이요, 지상천국이었다.
사실 나는 그때 국군과 유엔군이 인천상륙을 감행했고, 남진하던 인민군이 낙동강전선에서 국군과 유엔군의 호된 저항에 부딪쳐 지리멸렬하고 있다는 사실을 까마득하게 모르고 있었다.
전선이 인민군에게 다소 불리하다고는 느꼈지만 완전 패주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6·25에 남침한 우리들이 패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로 생각했고 승리는 기정사실이고 우리 손에 의해 한반도는 통일된다는 생각뿐이었다.
목포·군산 등지에 국군이 나타났다고는 하나 그것이 대수롭게 생각되지 않았고 광주 지구에서 경찰이 치안 유지에 나섰다고 하나 곧 인민군에 의해 점령되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면서도 나는 전세의 불리를 실감하면서 지리산 기슭에 숨기 시작했다.
나는 그곳 지형을 잘 안다는 한 통신병의 안내를 받으며 산중의 한 마을에 당도했다. 마을이라고 해야 가옥 10여 채가 이곳저곳에 분산돼 있었다.
통신병이라고 해야 무전기 하나 없는 병사로 이름만이 통신병이지 연락병이나 다름없었다.
“부대장님. 이곳은 여군들의 교육장이고 대기소입니다.”
“그래, 자네는 어떻게 여기를 알았나?”
“며칠 전 업무연락 차 다녀 간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좋아 수고 했어……”
나는 용기를 냈다. 그가 남자이든 여자이든 상관할 것 없었다. 국군이 아니고 인민군이면 그만이었다.
여군들만의 세계…… 마음 한 구석으로는 오히려 두렵기까지 했다. 집이라야 초가 10여 채이고 그 둘레에는 감나무들로 싸여져 있어 아주 조용한 곳이었다.
【산중서 여자 빨치산 교육】
- 내가 만난 내무성 보안대 여군들-
나는 사실 상부로부터 이 훈련소의 책임자로 유배된 것이다. 그것은 영암에 있을 때 소위 군당부나 도당 간부들과의 마찰이 상부에 보고되어 발령장도 없이 이곳으로 가게 된 것이다. 다시 말하면 영암지구 후방부사령관으로 제구실을 다 못했다는 질책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것에 상관하지 않았다. 사람이 제 잘못을 깨닫기 어렵듯이 내가 하는 모든 행동, 내가 한 지난날의 모든 일은 인민군을 위해서도 그렇고 “공화국”을 위해서도 잘못이 없다고 판단되었다.
그래서 나는 언젠가는 나의 정의로움이 판명될 것으로 믿고 만사를 운명에 맡길 수밖에 없었다.
내가 '6·25남침'의 여세를 몰아 광주를 거쳐 목포에까지 진두에 섰던 사실은 그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뿐더러 그 공은 알아주리라고 생각했다.
더욱이 내가 미군 딘 소장을 생포했다는 것은 인민군의 진로에는 물론이요 사기진작에도 적지 않게 이바지했다고 자부하고 있었다.
이런 생각을 하며 연락병을 따라나섰다. 내가 도착하자 여군단장이 쫓아와 나에게 이곳 총인원이 256명이라고 보고했다.
그 대부분이 산중에 숨어 있다는 것이다. 나는 그들이 건강한 모습으로 나를 환영해 준 데 대해 진심으로 고맙다고 인사하고, “동무들의 전투와 노력과 혁명과업 수행에 추호도 낙오 없이 총력을 다해 줄 것을 당부한다”고 격려했다.
내가 이렇게 안내되어 들어간 집 문안엔 인민군관복이 한 벌 걸려 있었다. 얼른 계급장을 훔쳐 보았더니 대좌계급이었다.
그런데 왜 나를 이와 같은 여성천국으로 유배시켰을까? 이것은 하나의 시험대가 틀림없었다. 그렇다면 나도 여자가 되어야지 남자행세를 하다가는 귀신도 모르게 죽게 된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여군단장 동무, 동무의 전 부대 소속은?”
“네, 내무성 산하 보안대 교통중대원인데 전라남도 광주까지 내려왔습니다.”
“영암에 위무사령부가 있다는 소식은 들어 보았소?”
“네, 알고는 있었지만 그러나 가 보지는 못하였습니다.”
여군대위의 성명은 김옥순(金玉順)이라고 했다. 9월 15일경 이곳에 입산했다는 것이었다. 김대위의 고향은 평양시 선교리였다. 이 여군단의 업무는 오직 군사훈련과 빨치산 교육이었다. 나는 철저한 교육훈련을 당부했다. 나는 상관하지 말고 계획대로 교육에 정성을 다하라고 했다.
【지리산 빨치산아지트 구축】
- 대원들에게 유격교육시키고 -
교육의 목적은 대원들로 하여금 일치단결하여 혁명을 받들어 행동할 것이며 그에 앞서 사상교육이 중요하며 군사훈련이란 행동이며 행동의 전제는 사상이라는 것을 나는 강조했다.
이곳에서의 나의 한마디는 김일성의 그것보다 더 준엄했고 절대적이었다. 지상명령이요, 생사여탈의 권한까지 가질 수 있었다.
“지금 우리들은 일시적이나마 후퇴를 하고 있다. 이 후퇴가 앞으로 한달이 될는지 1년이 될는지 나도 모르는 일이다. 현 전선의 사정으로 봐선 당장은 남진할 가망성은 보이질 않는다. 그러니 1년이 될지 10년이 될지는 모르지만 우리들 주변 정세와 정보에 따라 행동이 자주 변동될 것이다. 그러니 유격생활 면에서도 마음을 느긋하게 가지고 훈련에 임해 주기 바란다.”
이러한 나의 훈시는 그들로 하여금 절대적이고 유수한 지리산 유격대원으로 양성시키는 데 있었다.
우리들의 아지트 생활근거지는 적이나 타인에게 절대 비밀로 보장할 것과 사태가 위급해질 때 우리들이 할 일은 를 만들어야만 했다.
BT란 아지트와는 달리, 두 사람 내지 세 사람씩 조를 짜서 대원들도 모르게 극비밀리에 지하 땅굴을 파 두었다가 사태가 위급해졌을 때 조원들만이 살짝 들어가 사라지는 곳을 말한다.
나는 당장 죽더라도 사령관이었다. 김대위 등 간부들에게 유격전술교육에 바쁜 나날을 보냈다.
그리고 나는 유사시를 생각해서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5일간의 비축미를 준비하도록 명령했다. 그리고 나는 적에게 포위 되었을 때 밤에는 밥을 짓지 말고 대낮에 식사를 짓도록 하되 연기가 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맹감나무 줄기를 얻어다가 불을 피우도록 했다.
물론 맹감나무는 충분히 준비시켰다.
【항재전선서 항재교육을】
- 나는 시간 나는 대로 교육 독려 -
“김대위! 혹시 1보 전진 6보 후퇴란 말을 알고 있는가?”
“듣기는 했습니다만은 무슨 뜻인지는 잘 모르고 있습니다.”
“1보전진이란 적의 방향을 전혀 모르고 있을 때 적진지를 찾아내기 위함이고, 6보후퇴란 적을 유인, 완전히 포위하여 생포 또는 투항하는 것을 말함이요, 인해전술이란 글자 그대로 많은 병력으로 적을 완전 포위하며 피리 불고 징을 치면서 적으로 하여금 공포와 혼란케하는 전술로 중국과 같은 광활한 곳에서 사용하는 전법으로 우리나라에서는 그리 사용치 않는다.”
나는 김대위를 만날 때마다 전술에 관한 나의 상식을 이야기해 주었다.
교육이란 학교에서 배우는 것만이 아니라 언제 어디서 누구에게나 배우는 것이 교육이다.
군인이든 농민이든 노동자이건 사회인이건 간에 배움이란 항상 중요한 것이다.
프랑스의 나폴레옹군을 패망시킨 영국의 웰링턴 장군은 그의 승전에서 개선하던 중 환영인파에게 말하기를 이긴 것은 우리가 아니라 이튼의 교정에서 가르쳐준 학교선생님들 이라고 찬양하였다. 또 보·불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고 개선하던 프로시아의 몰트케 장군은 열광적으로 환영 나온 군중들에게 답하기를 승리한 것은 우리가 아니라 몇 십 년을 잘 먹지도 못하면서 목숨을 걸고 교육에
이바지 해온 학교 선생님들의 공에서 이루어진 것이라고 말했다.
이와 같이 두 명장은 다함께 승전보에서 학교선생님들의 교육의 은덕을 기리는 데 인색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러한 나의 소신은 변함없었다.
그래서 항상 전쟁준비를 하면서 항상 교육을 잊지 않았다. 전쟁의 한편으로 그 전쟁서 이길 수 있는 교육을 시키는 것이 나의 주장이요, 실천사항이었다.
그것은 군인의 경우는 더욱 그러하다. 수시로 변화하는 적의 전술을 정확히 간파하고 대처하는 자세는 교육 없이는 우러나오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바쁘면 여자생각도 없어】
- 꽃밭에 보낸 두 달 못 잊어 -
9월도 다가고 10월에 접어들고 있었다. 여군단 꽃밭에서 세월 가는 줄 모르고 지냈다. 남들은 유별나게 생각했을는지 모르지만 나로서는 그렇지도 않았다.
자나 깨나 내가 지휘하던 부대를 잊어본 적은 없었다. 그것이 지휘관을 지낸 사람의 심정일는지도 모른다. 낮에는 여군들의 교육과 훈련과정을 지켜보면 지도해 주느라고 눈코 뜰 새가 없었다.
이렇게 다람쥐 쳇바퀴 돌리듯 생활하다보니 남성적이라고 생각했던지 여군들은 나를 잘 따라주고 무엇하나 어려운 것이 없었다. 이와 같이 꽃 중의 꽃 속에서 생활하기란 매우 힘이 들고 어느 누구 한 사람도 눈 맞아 보질 못했다.
만약 어느 한사람에게 관심이 쏠리게 되면 그들의 질투가 상부에 고자질을 하기 때문에 또 금방 소문이 두려워 몸조심했다. 만약 인민재판에 회부되기만 하면 그 자리에서 죽는 판이었다. 그러나 나두 20대의 젊은이고 보니 고통을 심했다. 나도 사나이였다. 그러나 나는 인내심으로 살아가야만 했다. 매일 같이 아가씨들의 시중은 받고 있을망정 손목 한번 잡아본 적이 없었다.
이와 같은 동거생활이 지속될수록 그들은 더욱 끈질기게 나에게 접근하는 것 같았다.
한 달이 지나던 그 어느 날 희소식이 날아 왔다.
도당위원장으로부터 명령이 날아왔다. 무장부대로 돌아와 통솔하라는 명령이었다.
나의 눈은 자동차 헤드라이트만큼이나 커졌다. 그리고 이것이 참말인가 하고 의심도 해보았다. 내 마음은 마치 부모님을 만나는 것처럼 설레기 시작했다. 당장이라도 쫓아가고 싶었다.
【인민군은 당군, 당 명령에】
- 인민 위해서가 아니라 당을 -
인천상륙작전으로 낙동강 공격선이 무너진 9월의 인민군 전선은 지리멸렬 분산되었다. 나는 전남지방 후방군 위수사령관이었기 때문에 나를 따르던 숱한 인민군들은 미처 후퇴하지 못하여 그 대부분이 지리산을 중심으로 산중에 숨어들었다.
재빠른 놈들은 태백산 줄기를 타고 북으로 도망친 놈도 있지만 평지서 방황하던 놈들은 대부분이 포로가 되었다.
그러나 나는 당시까지도 포로가 되지 않았다. 아니 포로가 되지 않기 위해서 산중에 숨은 것이다. 도 국군이나 유엔군에 포로가 되면 즉결처분이 되는 줄만 알았다.
또 그렇게 교육을 받아왔다. 때문에 당시 나의 뇌리에는 포로란 생각지 않았다.
끝까지 싸우다 죽는 게 당과 인민을 위하는 길인 줄만 알았다. 다시 말해서 나는 인민군대좌로 당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할 각오밖에 없었다. 더욱이 인민군은 인민을 위해서 존재한다고 하기보다는 당을 위해 존재하는 군대이기 때문에 죽으나 사나 당을 위해 죽을 각오밖에 없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인민군이 아니라 '당군'이라고 하는 게 좋을는지 모른다.
이때까지도 포로란 전혀 염두에 두지 않았던 나는 두 달 이 지리산에서 버티면 우군이 와서 다시 남한을 해방시킬 것이라고 믿고 또 싸울 각오가 돼있었다.
원래 그렇기도 하지만 이때부터의 인민군은 그 지역 '도당'의 지시를 받아 행동해야 했다. 다시 말해서 군인이 아닌 유격대로서 사회불안을 조성하는 게 목적이었다.
이렇게 하여 나는 1950년의 겨울을 지리산 땅굴에서 두더지생활을 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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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지 : 護國 (1983년 9월호) 국방부 간행
한명욱 : 전 육이오 참전 북한군대좌.
: 1951년 지리산에서 토벌군에 생포 귀순
: 이후 공비토벌참가.
;포로생활 석방/경주에 정착
: 저서 /나는 남침의 선봉이었다.( 을지사.82년)
/딘 소장(미 24사단의 윌리엄 F 딘)은 내가 생포했다(82년.국방부)
첫댓글 오송지하차도 현장서 웃음이 나와?…충북도 간부 처신 ‘빈축’
오윤주입력 2023. 7. 16. 22:50수정 2023. 7. 16. 2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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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폭우]원희룡 장관 안내하는 모습 영상·사진 퍼지자
누리꾼들 비난에 “경황이 없었는데 죄송하다”
충북도청 고위 간부(뒷줄 노란 점퍼)가 16일 웃으며 원희룡 국토부장관과 오창 지하차도 침수 사고 현장을 걷고 있다. 유튜브 화면 내려받음
충북도청 고위 간부(뒷줄 노란 점퍼)가 16일 웃으며 원희룡 국토부장관과 오창 지하차도 침수 사고 현장을 걷고 있다. 유튜브 화면 내려받음
충북도청 고위 간부가 ‘오송 지하차도 사고’ 현장을 찾은 원희룡 국토부장관을 웃으며 안내하는 영상·사진이 16일 인터넷 커뮤니티를 통해 번지면서 빈축을 사고 있다.
영상·사진을 보면 이 간부는 잇몸을 드러내고 웃음 띤 얼굴로 원 장관과 걸으며 이야기를 나눈다. 이를 본 누리꾼들은 ‘욕하고 싶다’, ‘제 정신이 아니네요’, ‘웃음이 나오냐’ 등 댓글로 비판했다. 이 간부는 충북도의 도로·교통 등 책임자로 이날 현장을 찾은 원 장관에게 사고 상황·경위 등을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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