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Daum
  • |
  • 카페
  • |
  • 테이블
  • |
  • 메일
  • |
  • 카페앱 설치
 
카페정보
카페 프로필 이미지
문무의 조선사
카페 가입하기
 
 
 
카페 게시글
문무의 조선사 해설 북해(北海)도, 발해(渤海)도 넘쳤다.
문 무 추천 1 조회 426 18.11.03 14:19 댓글 28
게시글 본문내용
 
다음검색
댓글
  • 18.11.03 21:45

    첫댓글 북해(北海)나 발해(渤海)에서 해(海)의 의미는 말씀하신대로 내륙호(內陸湖)가 분명합니다. 더 정확히 설명하면 내륙해(內陸海)로 내륙에 있는 짠물바다를 ‘해(海)’라 한 것이죠....오늘날 우리가 보통 말하는 바다는 ‘해(海)’가 아니라 ‘양(洋)’인 것 같습니다. 지금은 해양(海洋)을 가까운 바다와 먼 바다를 합해 부르지만, 옛 사람들은 ‘내륙해’와 ‘지금의 바다’를 구분지었다 생각됩니다.

  • 18.11.03 21:46

    이와 유사한 단어가 몇 개 생각납니다만,
    1;우주(宇宙) ; 둘다 집우,집주의 집이란 뜻이지만, 宇는 공간적의미의 집이고, 宙는 시간적 의미의 집이라더군요..... 뜻이 약간 다르죠..
    2;낭패(狼狽) ; 둘다 이리낭 이리패로 이리란 뜻이지만 서로의 의미는 다르죠...狼은 앞다리 가 길고 뒷다리가 짧은 이리이고, 狽는 앞다리가 짧고 뒷다리가 긴 이리라 합니다. 그래서 둘은 항상 같이 다녀야지 둘 중 하나만 없어도 다니질 못하니 그야말로 낭패인 것이죠..그 러한 동물이 있을까 생각해보았는데 하이에나가 狼에 해당되는 것 같고 호주대륙의 캥거루가 狽에 해당되는 것 같습니다.

  • 18.11.03 21:47

    옛 사람들이 캥거루를 보고 어떻게 표현 했을까 궁금하더군요..
    3;토양(土壤) ; 둘다 흙토,흙양입니다. 土와 壤은 어떤 차이일까요....土는 우리가 아는 보통 의 흙(보통 밭에있는 평범한 흙)이고, 壤은 입자가 아주 곱고 부드러운 흙을 나타냅니다. 뻘흙이나 머드팩과 같은 그런 흙이 壤인 것이죠....

  • 18.11.03 21:49

    조선사의 중요 지명중 하나인 평양(平壤)의 땅은 그래서 강가의 넓은 평지여야 그 지명과 어울립니다. 중국의 수 많은 노천탄이 있는 땅에 비가 내리고 황토물 대신 검은 물이 흘러 가다 넓고 평평한 땅을 만나면 커다란 호수(이 호수가 발해라 생각됩니다.)를 이루고, 검은 물의 고운 입자는 천천히 침전 되어 가라 앉게 되는데 건조한 겨울철이 되면 그야말로 壤이라 할수 있는 곱고 검은 땅이 널따랗게 펼처지죠... 평양이 위치할 곳도 그런 곳이 아닐까 생각되고 또 연행록에 나오는 검은 모래사막도 바로 이 땅이라 생각됩니다...

  • 18.11.03 21:50

    예전엔 많은 단어를 생각했었는데 지금은 잘 떠오르지 않는군요... 찾아보면 위의 세 단어 말고도 많이 있습니다. 북해(北海)나 발해(渤海) 역시 오늘날의 바다가 아닌 짠물로 된 내륙호이고, 그래야 많은 비에 물이 범람하여 홍수 피해를 입은 것입니다. 유연 지방은 모래개천의 불모지라 한 실록을 보아도, 당태종이 수렁에 빠저 허우적 댓던 것도 이런 뻘흙때문이었죠.. 모래개천의 불모지에 그 개천이 바로 요하입니다.
    지금의 뽀하이만을 역사속의 발해라 하는 것은 말이 안됩니다...

  • 18.11.03 21:52

    학봉속집 제1권 <조천기행(朝天紀行)>
    ~~~전략~~~
    사령 고개 지나서 반산에 도달하니 / 行經沙嶺抵盤山
    백 리 걸친 진흙창이 수레를 뒤집누나 / 百里泥淖飜輜輧
    평양에서 흙 졌던 게 어제만 같은데 / 平陽負土如昨日
    옛 다리는 상기도 당황 정벌 기억하네 / 故橋尙記唐皇征
    모래 바람 날마다 사람 얼굴 때리고 / 風沙日日擊人面
    구름 짙어 음산한데 변방 바람 사납네 / 雲頑日曀邊風獰
    행인들은 삼월에도 두꺼운 옷 입고 있고 / 行人三月尙重裘
    모래밭엔 봄풀이 싹트는 게 안 보이네 / 磧裏不見春草萌
    ~~~후략~~~
    당 태종이 흙을 졌던 평양은 어디일까요...위의 시(詩)대로라면 사령고개 지나 반산에 도착한 그곳입니다..

  • 18.11.04 03:02

    현재 지형과 조선 초기 중기 그 이전 지형이 많이 다릅니다. 이 점을 생각해야 합니다.

  • 작성자 18.11.04 09:32

    안녕하세요.
    <맑은영혼>님! 그리고 <대륙역사>님!
    좋은 의견과 설명입니다. 위에서 말씀드린 "북해와 발해"는 전한(前漢)과 후한(後漢)때의 이야기므로 기원전과 기원후의 아주 가까운 전후(前後)시기라고 보아집니다.
    과학자들이나 지리학자들도 오늘날 대륙의 동해안 주변은 많은 지형변화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고, 내륙에서도 황하의 물줄기가 많은 변화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하였습니다.
    이 황하의 물줄기가 흐르는 도중에 거대한 호수를 만들고, 그곳이 발해였다는 주장도 있고, 또 실제 역사서에서도 천리(千里)가 되었다는 내해(內海)가 있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 작성자 18.11.04 09:37

    여러가지 도출된 추정결과로 보면 : 북해(北海)와 발해(渤海)는 내해(內海)임이 분명하다고 봅니다.
    북해와 발해주변의 지세를 설명한 기록을 찾는다면, 역사서에서 말하는 북해와 발해를 확실하게 찾을 수 있다고 보아집니다.
    "대륙역사"님께서 말씀하시는 조선(朝鮮)초기와 중기 그 이전의 지형이 많이 다르다는 것은......나라의 땅이 달랐다는 의미일까? 생각이 되는 구절입니다.
    관심과 성원에 감사드리며,
    늘 건강하시길 기원합니다.

  • 18.11.04 13:31

    북해나 발해가, 기원 전후의 옛날에는 뚜렷이 있었겠지만 세월이 흘러 오늘날에는 아마도 사라지고 없을수도 있읍니다. 그러나 연원직지가 쓰여졌던 1800년대에도 관해정(觀海亭)이란 정자가 있어 바다를 바라보았다 했으니 발해는 있었을것으로 생각되며, 이 발해는 강을 낀 형태로 지금의 동정호(양쯔강을 끼고 있는것과 같이)처럼 그러한 곳이라야 홍수가 나 물이 넘칠수 있읍니다.

  • 18.11.04 13:42

    연행사들의 여정중에 애를 먹었던 것 중 하나가 물 먹기가 어려웠다는 사실입니다. 이 떨떠름한 물맛은 아마도 소금기 어린 물이라서 차를 끓여 겨우 먹었다는것을 보면, 땅에 스민 소금기가 민물과 섞이어 바닷물맛 같은 물이지 않을까 합니다. 즉 그 여정은 과거 짠물 호수(~~海)와 같이 했다는 것이죠..

  • 18.11.04 13:55

    역사속의 북해와 발해는 지금 지도에는 없을것으로 생각됩니다. 만약 있다 하더라도 작은 저수지 정도이거나 하천 정비를 하지않았을때의 사진속에, 혹은 그림속에나 있을 것 같습니다.
    청명상하도에 나오는 곳이 아마 발해가 아닐까 합니다.

  • 18.11.04 21:26

    참고로 청명상하도는 개봉을 그린것이라고 합니다..

  • 18.11.04 14:06

    망해정기(望海亭記)에
    '산해관의 동문과 남문 사이로 자성(子城)을 쌓아 바다까지 연결시켰는데, 성이 끝나는 곳에 망해정이 있다.' 라 했는데 위 그림에 물 한가운데 다리같은 것으로 연결된 작은 성이 있는데 바로 망해정기에 나오는 '자성(子城)'아닌지요....
    청명상하도 속의 고성이 산해관의 본모습이 아닐까요...?

  • 18.11.04 19:18

    1902년 북경을 다녀간 프랑스의 해군장교이자 소설가인 삐에로 로띠라는 사람의 북경에서의 마지막 날들 이라는 기행문에 보면, 영하의 해변에 있는 페칠리 만이라는 문장이 나옵니다..즉 1902년 현재의 발해는 하란산 좌측의 사막지대가 당시에는 물이 차있어 북직예만이라 했다는 의미입니다..고려때나 조선초기에는 어떠헀는지 모르겠으나. 구한말 발해의 위치가 어디였는가를 이방인의 기록에서 찾을 수 있었습니다.

  • 18.11.04 20:42

    1902년 당시 발해가, 하란산 좌측 의 사막지대(당시에는 물이 차 있었다는)였다는 말씀이신지요...?
    그곳이 발해였다면 조선의 연행사들도 그곳을 경유하여 북경(어디인지 모르지만)으로 갔었다는것인지요...?

  • 18.11.04 21:19

    당시의 고지도를 보면 영하의 위치가 지금의 중위보다 북쪽에 위치하고 있는것으로 나오고 있습니다.따라서 발해의 위치가 타당성을 갖게 됩니다..반도조선에서 가는 모양새와 같은 모양새라고 볼수 있습니다. 이런 현상은 이미륵 선생의 압록강은 흐른다라는 소설을 보아도 기차를 타고 발해만을 지나는 것이 나오는데. 이것이 바로 하란산 좌측에 있었던 북직예만-발해만 으로 보면 아주 나이스하게 정리가 되는것 같습니다.

  • 18.11.04 21:24

    북경의 위치와 관련해서는 과연 천산넘어를 봐야하는지 더욱 연구가 진행되어야 할 것이지만, 대륙에서 이주해오신 분의(지금은 돌아가셨지만) 증언에 의하면 북경은 주천에 있었다고 하십니다. 당시 외국인 찍은 사진을 보면 자금성 뒤쪽에는 석탄언덕이 있었다고 하는데, 구글어쓰로 보면 주천 주위에 노천탄광이 거대하게 존재하고 있는것으로 보입니다..즉 연경의 모래가 검었다는 것은 석탄 분진에 의한것으로 판단이 됩니다.

  • 18.11.05 09:55

    北京은 燕京과 같은 곳일까요?

  • 18.11.05 19:30

    이미륵선생이 기차를 타고 발해만을 지났다 했는데 아마도 그 시기는 1919년 이후일것입니다. 중국 란주에서 장액 주천으로 연결된 철도가 언제 완공되었는지 모르겠읍니다. 1900년초에 북경에서 천진까지 철도가 있었다는데 1900년 초에 란주 장액 주천으로 연결된 철도가 있었는지 모르겠읍니다. 본 까페에 게재된 북경의 옛 사진(1900년경)에는 분명 북경에 철도가 있는데 란주 장액 주천으로 연결된 철도가 1900년경에 없었다면 그곳은 발해가 될수 없읍니다.

  • 18.11.05 19:41

    그리고 '북경은 주천에 있었다'란 증언에 공감은 하지만 현재의 주천이 1900년 이전의 주천인지는 모를일입니다. 현 우리나라 원주(치악산이 있는)에서 가까운곳에 주천(영월군 주천면)이 있는데 주천는 원주와 가까이 있어야 한다...라고 생각됩니다. 그런데 원주는 제 추정상 북경 근처에 있어야 하거든요....그 이유는 원주를 평량이라고도 했는데 현 감숙성 평량시에 공동산이 붙어 있어 원주와,평량, 공동산은 한 셋트이고 공동산 에서 조금 더 가면 북경이라 했기때문입니다.

  • 18.11.05 19:48

    자금성 뒷쪽에 석탄이 산처럼 쌓여있던것은 당시 북경에서 사용된 주 연료가 석탄이었고 이 석탄을 가까운 탄광에서 말과 낙타로 실어 날라 쌓아노은 석탄 무더기 입니다..연경의 모래가 검었다는것이 석탄 분진이라는것은 연행록에도 나와있어 정확한 것이고, 유연지방의 검은모래사막이라는 것도 다 이 석탄분진입니다...북경의 위치는 석탄과 불가분의 관계입니다...

  • 18.11.05 19:51

    유연(幽燕) 지방은 모래 개천의 불모지이므로 토지의 소출이 없는데, 황경(皇京)은 사방의 재물이 모두 모여드는 도회이므로, 이에 의지하여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승정원일기 고종9년 1872 4 4>
    바람이 불면 길 가는 사람은 눈을 뜨지 못한다. 그중에서도 북경이 가장 심한데, 이곳은 석탄(石炭) 앙금으로 된 지방으로서 가루가 쌓여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옛날 문자의 ‘치진(緇塵 세상 풍진 속에 분주하여 의복이 더럽혀짐)’이란 것이 곧 이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연원직지 유관별록 천지산천>

  • 18.11.05 19:51

    대개 산해관 안팎이 다 너른 들이요, 검은 흙이라. 여기에 이르러 지기(地氣)가 명랑(明朗)하여 갑자기 별계(別界)를 이루었으니, 먼 산이 푸른빛을 띠어 출몰(出沒)하여 고움을 드리우며, 일대 난하 물이 둘러 반월형(半月形)이 되었는지라<무오연행록 6권 1799 2 15>

  • 18.11.05 19:53

    발착수가 어디인지 알 수 없으나, 요동 진펄 천 리에 흙이 떡가루처럼 보드라워서 비를 맞으면 반죽이 되어 마치 엿 녹은 것처럼 되어, 자칫하면 사람의 허리와 무릎까지 빠지고 겨우 한 다리를 빼면 또 한 다리가 더 깊이 빠지게 된다. 이에 만일 발을 빼려고 애쓰지 않으면 땅 속에서 마치 무엇이 있어서 빨아들이는 듯이 온 몸이 묻혀서 흔적도 없어지게 된다. 지금은 청(淸)에서 자주 성경으로 거둥하므로, 영안교에서부터 나무를 엮어 다리를 만들어서 진펄을 막되, 고가포(古家舖) 밑에 이르러서 비로소 그치는데, 2백여 리 사이에 한결같이 뻗쳤으니 이는 비단 물력(物力)이 그처럼 굉장할뿐더러, 그 나무끝이 한 군데도 들쭉날쭉한 것이

  • 18.11.05 19:56

    없이 2백 리 사이에 두 쪽이 마치 한 먹줄로 퉁긴 듯이 되었으니,......<열하일기, 성경잡지 7, 14일>
    간편한 옷을 입고 가벼운 짐 괴나리 메고 / 短後輕裝一蒯緱
    맑은 가을 변방 산천 필마로 달려갈 제 / 關河匹馬走淸秋
    진흙 마른 계주 길 삼천리 길을 가다 / 泥乾薊路三千里
    북녘 솟은 의무려산(醫巫閭山) 웃으며 가리키리 / 笑指醫閭出北州...농암집 제4권 연경(燕京)에 가는 홍생 세태(洪生世泰)를 증별하다

  • 18.11.05 20:03

    위의 몇가지 예문을 보면, 유주의 땅이 대략 어떠했는지를 짐작할수 있읍니다.
    아무래도 '서경(書經)'은 왜곡이 안되었다고 보면,
    서경 에 기주의 땅은 희고 연주의땅은 검다 했으니 서경이 쓰여졌을때 부터 조선말기(1800년대)연행사들이 다녀갔을때까지 유연지방은 이동되지 않았을 것입니다.그 옛날부터 근대까지 같은 자리에 있었다는게 제 생각입니다.......

  • 작성자 18.11.06 17:12

    안녕하세요.
    <송계님, 대부여님, 맑은영혼님!>
    관심과 성원에 감사드립니다.
    <맑은영혼>님과 <송계>님의 말씀을 새겨듣고 있습니다. 연행기에 따르면, 또는 원전(原典)에 따르면.....많은 의문점들이 있습니다. 특정 지명(地名)과 그에 따른 지형지세가 중요하다고 보며, 또 전한과 후한에서 매우 중요시 하던 "도요장군"에서 핵심인 "요수"의 위치등 여러가지 감안할 사항이 있다고 보아집니다.
    연경과 북경이 같은 곳인가? 이 점도 매우 중요하다 봅니다.
    연경(燕京)은 燕(연)과 관계가 있고, 北京(북경)은 燕(연)과는 무관하다고 보는데, 또 북평이 북경이냐? 하는 문제등 여러가지 난제가 가로막고 있죠.
    건강하시길 빕니다

최신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