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조가 간행한 월인석보가 수타사 사천왕상에서 발견된 사연
[절따라 전설따라 홍천 수타사 편]
조선 세조는 스스로 호불(好佛)의 군주라고 선언할 정도로 왕자 시절부터 불교를 크게 숭상하였다. 이 때문에 세종 28년(1446)에 소헌왕후가 사망하자 어머니에게 갖은 효도를 다하던 세조는 크게 슬퍼하며 죽은 어머니의 명복을 빌기 위해 스스로 불교 서적을 공부한 후 한국어로 석보상절을 지어 바친다. 이후 세종 29년(1447) 세종이 둘째 아들이 지은 석보상절을 읽어본 후 크게 감동하여 석보상절에 대한 찬가인 월인천강지곡을 짓는다. 이후 세조가 즉위 후 다시 월인천강지곡과 석보상절의 내용을 합한 후 증보, 수정하여 월인석보를 편찬하는데 그 배경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첫 번째는 세조 3년(1457) 세조의 장남인 의경세자가 죽자 이를 애통히 여기며 울던 세조가 죽은 아버지 세종 대왕에 대한 죄송스런 마음과 먼저 떠난 아들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근 2년 동안에 걸쳐 증보(增補) 수정하여 간행하였다는 것. 실제 표방한 편찬 배경이며 현재 정설이다. 두번째는 겉으로는 죽은 부모와 일찍 죽은 아들을 위해 만들었다고 되어 있지만, 실제론 어린 조카 단종을 몰아내 죽이고 왕위에 올라 사육신 등 많은 신하를 죽인 끝에 세조가 얻은 정신적인 고통, 회한과 두려움, 무상(無常)의 깊은 수렁에서 벗어나 죄를 씻고 구원을 얻기 위하여 추진된 것으로 보는 설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