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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콤한 인생] 09
#헬스클럽 욕실의 휴게실
가운을 걸치고 화장대 앞에 앉아있는 혜진.
헤어드라이기로 머리를 만진다.
헤어드라이기의 바람에 날리는 머리카락.
#동. 수영장 (혜진의 의식)
물속에서 솟구쳐 오르는 준수.
물에 젖은 머리카락을 터는 준수.
#동. 욕실의 휴게실(현재)
헤어드라이기의 바람을 얼굴에 쏘이고 있는 혜진.
두 눈을 감고 얼굴을 맡기고 있다.
#동. 수영장(혜진의 의식)
바닥을 치고 물 위로 솟구쳐 올라왔다 물 속으로 다이빙하는 준수.
혜진이 두 손으로 가슴을 감싸고 서있다.
물 속을 바라보는 혜진.
물속에서 혜진의 주위를 돌고 있는 준수.
#동. 욕실의 휴게실(현재)
헤어드라이기를 끄고 거울을 보고 있는 혜진.
문득 화장을 하기 시작한다.
#동. 수영장 (혜진의 의식)
여전히 풀 속에 앞가슴을 두 손으로 가리고 서있는 혜진.
주위를 살핀다.
준수의 모습 보이지 않는다.
저도 모르게 불안해지는 혜진.
가슴을 가렸던 손을 내리고 본격적으로 준수를 찾는다.
풀 사이드에서 솟구쳐 오르는 준수.
가쁜 숨을 내쉬는 준수.
난간을 짚고 풀 위로 올라가는 준수.
풀 사이드에 길게 몸을 눕히고 가쁜 숨을 내쉰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혜진이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웅크리며 가만히 웃는다.
#동. 욕실의 휴게실(현재)
입술에 루즈를 바르고 있는 혜진.
입술을 웅크렸다 폈다 해본다.
그러다 문득 한숨을 내쉬며 맥이 빠지는 혜진.
#동. 주차장
오는 혜진.
넓고 복잡한 주차장에 차들이 꽉 찼다.
멈추는 혜진.
혜진: ...
잠깐 방향을 잃고 두리번거리다 차를 찾아가기 시작한다.
“내가 왜 도망쳤는지 아세요?” 준수의 목소리.
혜진 본다.
준수가 차 사이에 서있다.
준수: 오타루의 산장에서요. 난 밤새도록 죽을 궁리를 하고 있었다구요. 그래서 도망친 거예요. 살고 싶어서.
혜진: ...
차를 찾아가기 시작한다.
혜진과 떨어져 차 사이를 이리저리 피해 따라가며 계속 떠들어대는 준수.
준수: 갑자기 살고 싶어졌다구요. 이런 말 있죠. 희망을 갖고 살면 언젠간 괜찮은 날이 온다구요. 아무리 어렵고 힘들어도 희망을 잃지 않으면 결국은 소원을 이루게 된다구요. 그런 말 믿으세요? 난 안 믿어요. 거짓말이거든요 그건. 그냥 해 보는 소리들이거든요 그건. 어려서부터요. 난 그걸 깨달았다구요. 희망을 버리면 편해진다는 걸요.
혜진: ...
초조해지는 혜진.
필사적으로 차를 찾는다.
안 보인다.
빠른 걸음으로 두리번거리며 차를 찾아가는 혜진.
준수: (계속 떨어져 따라가며) 그래요, 화가 좀 나기도 했죠. 이렇게 아름다운 부인을 집에다 두고 바람을 피고 있는 그 사람이 죽이고 싶도록 미웠어요. 그 앤 내 마지막 희망이었거든요. 그게 부질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 애한테 희망을 걸었었다구요. 네. 좀 불편하게 살고 싶었어요. 사랑이라는 것두 해보고 싶었구요. 조금은 진실해지고 싶었다구요. 그런데 그걸 다 망쳐버린 거예요. 성공한 한 남자가 그 앨 심심풀이로 건드려 본 거 아닌가요.
혜진: (노려보는)
준수: 하지만 그건 중요한 게 아니었어요.
혜진: ...
귀를 막듯이 돌아서 차의 리모컨 키를 사방에 대고 마구 눌러대는 혜진.
준수: 내 앞에 서 있는 사람이 더 중요했다구요. 그 사람이 누구든 날 붙잡아줄 사람이요. 그 쪽두 그랬잖아요. 누군가 필요했잖아요. 내가 아니래두 그 누군가요.
외치는 준수.
계속 리모컨 키를 눌러대는 혜진.
준수: ... (물끄러미 바라보다) 지하 삼층에 주차하셨어요. 여긴 지하 이층이구요.
혜진: ... (준수를 본다)
준수: ...
가만히 주차장 통로를 손짓하는 준수.
#동. 지하 삼층 주차장.
차문 여는 혜진.
차에 탄다.
혜진: ...
프론트 윈도우 너머 앞쪽을 바라본다.
주차한 차들 사이에 준수가 서있다.
시동 거는 혜진.
다시 한번 준수를 본다.
하염없이 혜진을 바라보고 있는 준수.
혜진: ...
기어를 넣고 차를 움직이는 혜진.
준수 앞에서 꺾어져 출구 쪽으로 가는 혜진의 차.
준수: ...
그저 우두커니 서있다.
그 얼굴에 차가 커브를 도는 타이어의 마찰음.
혜진의 차가 주차장을 한바퀴 돌아 다시 그 자리에 주차한다.
#어느 찻집.
혜진: ...
마치 무언가를 다짐하듯 입을 꼬옥 다물고 앉아 있는 혜진.
준수가 쟁반에 커피와 케잌을 담아가지고 와서 앞에 앉는다.
준수: (신이 나서) 이 집은 커피보다 케잌이 더 맛있어요.
혜진: (자르듯) 확실히 해 두고 싶어서 다시 돌아온 거예요.
준수: 무슨 말인지 알아요. 말하지 않아두 안다구요.
혜진: 내가 후회하지 않는다고 한 건...
말을 끊고 준수를 바라보는 혜진.
케잌 하나를 손으로 집어 고개를 쳐들고 통째로 입에 처넣고 있는 준수.
노려보는 혜진.
서너 번 씹고는 꿀꺽 케잌을 목구멍 속으로 넘기는 준수.
그러다 저도 우스운지 웃는다.
혜진: ...
가만히 한숨을 쉬고 고개를 돌리는 혜진.
준수: (케잌을 입 안에 문 채) 오늘이 마지막이라는 거죠? 그렇죠? 그 말이죠? (입 안의 남은 케잌 마저 삼켜버리고) 그냥 마음속에 담아두고... 그냥 간직한 채 사시겠다고 했죠?
혜진: ...
본다.
준수: 그게 좋은 뜻인지 나쁜 뜻인지 밤새도록 생각하고 또 생각했어요.
혜진: (찡그리며 뭐라고 하려는데)
준수: 그게 우연이었다고 쳐요. 아니 낯선 곳에서 만난 두 사람이 그러니까 영화처럼 말이죠. 비행기 사고로 무인도에 떨어진 두 남녀가.
혜진: (헛웃음 웃으며) 기가 막혀서.
준수: 내 말을 이해 못하겠어요?
혜진: (바라본다) ... (웃음이 사라진다)
준수: (바싹 앉으며) 절망에 빠진 사람은 무슨 짓이든 하죠. 자신만 망쳐버리는 게 아녜요. 남들도 다 망쳐버린다구요.
혜진: 그래서요?
준수: ...
혜진: 날 망쳤다고 생각해요?
준수: ... (한숨을 푹 내쉬고 의자에 기대앉더니) 난 그런 뜻으로 얘기한 게 아닌데...
혜진: ...
준수: 난 그게 끝이 아니고 시작이라고 말하고 싶은 거예요.
혜진: (안되겠다 싶어) 무슨 시작?
준수: (안타까워서) 그게 끝인지 알았는데 알고 보니 시작이었다구요.
혜진: ... (노려보는)
준수: ... (말이 떠오르지 않아 안절부절 못하다가) 하나만 물어 볼게요. 그날 이후 변한 게 아무 것도 없어요? 달라진 거요.
혜진: ... (가만히 바라보더니) 난... 내가 한 일이 아니라고 할 생각 없어. 실수라고도 생각하지 않고 후회하지도 않는다고 말했지?
준수: ...
혜진: 준수씨가 어떤 목적을 가지고 나한테 접근해 온 거라고 해두 난 괜찮아. 그런 일에 휩쓸린 나 자신은 용서할 수가 없지만 준수씬 용서할 수가 있어. 하지만 더는 안돼. 이런 식으로 계속 이어가는 건.
준수: (막으며) 왜 자꾸 선을 그으려고 하세요. 여기서 여기까지는 여기고 여기서부터 여기까지 있었던 일은 그저 과거의 한 지점이고 뭐 그런 식으로 선을 그을 필욘 없잖아요. 그냥 지금 감정에 충실하면 안돼요?
혜진: 어떤 감정?
쏘아붙이는 혜진.
준수: ...
혜진: 그러고 보니 준수씨 좋은 사람 아니네.
준수: (놀라서) 내가 왜요.
혜진: 그 때처럼 지금도 날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믿고 있잖아.
준수: (단호하게) 좋아하니까요.
혜진: ...
멍해지는 혜진.
준수를 바라본다.
그 시선에 준수의 얼굴이 물에 적셔진 수채화처럼 얼룩 거린다.
그 위에 혜진의 소리.
“나는 그런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 좋아서 그저 좋아서 맺어지는 관계와 필요에 의해서 맺어지는 관계는 무엇이 다른가. 결국 같은 것인가. 그렇다면 산다는 것은 얼마나 쓸쓸한 것인가.”
얼룩졌던 준수의 모습이 제 자리로 돌아온다.
준수: (또 한번 단호하게) 좋아하니까요.
혜진: ...
준수: ...
웃고 있는 준수의 얼굴 위에 혜진의 소리.
“좋아한다는 말이 굳이 사랑한다는 말과 구별되어도 좋다. 말이 아니라 눈빛으로, 누군가 나를 좋아하는 눈빛으로 바라봐준다면...”
혜진: 난 애들을 사랑해.
준수: ...
웃음이 그 자리서 멈춘다.
혜진: 이 세상의 그 무엇보다 만약 애들을 지키기 위해선 내 목숨과 바꿔야 한다면 난 추호의 망설임도 없이 그렇게 할 거야.
준수: 그게 이거하고 무슨 상관이 있어요.
혜진: 애들을 위해선 가정이 필요하구 그 가정을 버릴 만큼 준수씬 중요한 사람이 아니라는 거야.
준수: 그런 걸 어떻게 저울에 달아서 무게를 정해요. 애들 이백 그램 가정 삼백 그램 합해서 오백 그램 내 인생 사백 그램. 그러니까 오백에서 사백을 빼면.
혜진: 정말 준수씨 나쁜 사람이네.
파르르 떠는 혜진.
준수: ... (혜진의 눈길 피하지 않고 바라보는)
혜진: 남편과 가정이 있는 여자가 바람을 피워놓고 웬 애들 타령이냐 그거죠?
준수: ... (바라보는)
혜진: 그거 아냐!
또 한번 파르르 떠는 혜진.
준수: ...
혜진: 왜 대답을 못해.
준수: 잘 알고 있잖아요. 그게 아니라는 거.
혜진: ... (무너질 듯한)
준수: 오타루에서 우리가 안 만났다고 쳐요. 지금 처음 만나고 있는 거라구요. 그래두 결과는 똑같을 거예요. 난 그래요. 그 쪽은 안 그럴지 모른다고 해두 좋아요. 난 그 만큼 좋아해요.
혜진: ...
물끄러미 준수를 바라보는 혜진.
애원하듯 혜진을 바라보는 준수.
문득 눈물이 치솟아 고개를 돌리는 혜진.
준수: 나 좀 보세요.
혜진: ...
준수: 나 좀 쳐다보라구요.
혜진: ... (본다)
준수: 사람이 사람 좋아하는데 무슨 요란한 장식이 필요한 거 아니잖아요. 그런 감정을 말루 표현할 순 없잖아요. 그 쪽두 마찬가지죠. 오타루만 아니었다면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나요? 그 때는 남편이 바람핀 게 너무 화가 나서 애들도 눈에 보이지 않았다는 건 아니잖아요. 죽는다는 핑계로 뭘 찾아 나선 거죠. 지금은요, 지금은 다 해결됐어요? 남편은 용서해줬고 애들이 중요하니까 그냥 적당히 살겠다는 거예요? 아니잖아요. 지금도 누군갈 원하고 있잖아요.
혜진: ... (바라보는)
준수: 예전의 생활론 못 돌아가요. 그게 잘못된 걸 알았는데 어떻게 돌아가요.
혜진: ...
준수: 기다리고 있을게요. 신호만 보내세요. 언제든지 달려올 거니까요.
준수 일어나 카운터로 가서 계산한다.
움직이지 않는 혜진.
밖으로 나가버리는 준수.
무너지듯 의자에 몸을 기대는 혜진.
가만히 두 눈을 감는다.
혜진: (소리) 내 몸 안에서 뭔가 스물 거리며 일어나고 있다. 간지러운 느낌. 비릿한 생선냄새가 베어있는 바닷물처럼 역겨우면서도 친밀한 냄새가 코끝에 느껴진다. 잊어버렸던... 잊고 살았던 삶에 대한 그리움...
감은 혜진의 눈가에 감도는 쓸쓸한 미소.
#준수의 오피스텔
준수 와서 우편함을 열고 편지들을 꺼낸다.
쓸데없는 홍보물들을 골라 쓰레기통에 처넣는다.
경비원: (오버) 집 앞에 누가 기다리고 있을 거야.
준수: (힐끔 보고 계속 우편물 정리한다)
경비원: 무슨 일로 그러냐고 물어봐두 대답을 안 하길래 요즘 집에 안 들어온다고 둘러쳤는데 그래두 부득부득 집 앞에서 기다리겠다는 거야. 행색을 봐서 형사같기두 하고. 그런 냄새가 난다니까.
준수: ...
우편물 다 쓰레기통에 처넣고 망설이듯 서있다.
경비원: 귀찮은 일은 피하는 게 상책이야.
#동. 준수의 방 복도
엘리베이터 열리고 내리는 준수.
복도를 바라본다.
박병식이 준수의 방문에 기대 쭈그리고 앉아있다.
준수: ...
멈칫 엘리베이터에 가서 타려다 박병식 본다.
박병식이 물끄러미 준수를 보고 있다.
#어느 선술집 안
소주병 따는 박병식.
박병식: 한 잔 하지?
준수: ...
박병식: 얘기가 좀 길어질 거 같애서. (술 따르고) 아줌마, 여기 안주도 좀 갖다 줘요.
한잔 마시는 박병식.
준수: 성구에 대해서 알고 있는 건 강회장님한테 다 말씀드렸는데요.
박병식: 성구씰 마지막으로 본 게 언젠가.
준수: ...
박병식: 참, 작년 겨울에 일본에 같이 가서 거기서 헤어지곤 못 봤다구 했지.
준수: ... 네.
박병식: (서류 봉투에서 서류 꺼내며) 이건 불법이긴 한데 내가 알아보니까 성구씨가 최근까지 여기저기서 신용카드를 쓰고 다녔더라구. (서류 내밀며) 삼월에도 카들 썼구 사월에도 썼구.
준수: (웃으며) 살아있으니까 카들 쓰고 다니겠죠.
박병식: (아랑곳 않고) 이건 이태리서 쓴 거고 여긴 블란서... 다시 일본으로 와서 동경에서 썼구... 북해도도 갔었네, 지난 이월에...
서류 가리키다 준수를 힐끔 본다.
준수: ...
박병식을 빤히 바라보고 있다.
박병식: 그러니까 성구씨가 살아있는 건 틀림없잖아, 그지?
준수: 네.
박병식: 그런데 왜 준수씨한테 연락을 안 하지. 둘이 단짝인데.
준수: 강회장님 부탁으로 몇 달째 성구의 행방을 찾아다녔어요. 그런데 그걸 나한테 물어보시면 어떡하죠.
박병식: (뭐라고 하려는데)
준수: 강회장님한테 돈을 받았으면 알아서 성구의 행방을 찾아내야죠. 그게 댁의 일 아닌가요. (일어나려는데)
박병식: (웃으며) 성질은 왜 부려. 나두 답답해서 물어보는 건데.
준수: 이번이 처음이 아녜요. 몇 달씩 연락 끊고 잠수하는 게 특기라구요. 성구는요.
박병식: 성구씨두 그걸 알고 있나?
준수: 뭘요.
박병식: 수정이란 아가씨가 죽은 거...
준수: ... 모를걸요.
박병식: 강회장님이 돈으로 입 틀어막고 있는 건 알고 있을 거 아냐.
준수: 짐작은 하고 있겠죠.
박병식: 내가 조사해보니까 증거두 없더구만. 그 아가씨가 성구씨가 모는 차에서 떨어져 그렇게 됐다는...
준수: ...
박병식: 목격자두 없고.
준수: 본인이 그렇다고 하니까 그런 줄 아는 거죠.
박병식: 누가?
준수: ...
박병식: 성구씨가 지 입으로 그랬단 말이지? 자기가 운전하는 차에서 성구씨 실수로 그렇게 된 거라구.
준수: 형사세요?
박병식: 아이 아냐 아냐.
준수: 내가 성구한테 빌붙어 먹고 산다는 건 알고 계시죠?
박병식: 내 말은.
준수: 그러니까 날 옭아 넣어 볼까 하고 이것저것 따져 묻는 거잖아요.
박병식: (웃으며) 성구씨가 죽은 것두 아닌데 뭘 옭아 넣어? 그렇잖아. 버젓이 살아서 돌아다니는 사람을. (웃으며) 오버센스야 그건.
준수: 내 뒷조사 하지 마세요. 그러지 않아두 여기저기 아픈 사람예요. 뒤돌아봐야 속만 쓰린 사람이라구요. (또 일어나려고 하는데)
박병식: 하나만 더 물어볼게.
준수: ... (앉는다)
박병식: 정말 성구씨하고 연락 없어?
준수: 없어요.
박병식: 감출 거 없잖아. 죽은 그 아가씨 집하고 보상 문제도 합의가 됐구 경찰에서도 단순한 과실로 처리 됐는데.
준수: 성구가 그것 때문에 종적을 감췄다고 생각하세요? (어이없다는 듯 웃으며) 성구 그런 애 아녜요. 설령 자기 실수로 수정이가 차에서 떨어져 죽었다고 해도 눈 하나 깜짝 하는 애가 아니라구요.
박병식: 그럼 왜 도망 다녀.
준수: ... (본다)
박병식: 도망 다닐 이유가 없잖아.
준수: (비웃듯) 그거야 성구한테 물어보셔야죠. (일어나더니) 성구한테 연락 오면 전화 드릴게요.
밖으로 나가는 준수.
박병식: (보고 있다 생각나서) 이봐 내 명함이라두 가져가야지.
부리나케 명함 찾는다.
#동. 앞
나오는 준수.
하늘 본다.
강렬한 햇빛.
찡그리는 준수.
손으로 햇빛을 가린다.
#강변의 길 (밤)(회상)
질주하는 지붕을 오픈 한 스포츠카.
수정: 세워. 찰 세우란 말야.
뒷좌석에 끼어서 악쓰고 있는 수정.
액셀레이터를 더 밟는 준수.
차가 급커브를 돌아 나간다.
그 바람에 취해서 조수석에 늘어져 있던 성구가 준수 쪽으로 몸을 기대며 쓰러진다.
반대편으로 핸들을 꺾는 준수.
성구가 조수석 문에 몸을 부딪치며 좌석 밑으로 상체를 처박는다.
뒷좌석의 수정도 문 쪽으로 쓰러지며 비명을 지른다.
준수 더욱 엑셀레이터를 밟는다.
곧게 뻗은 강변길을 무섭게 달려가는 스포츠카.
#다른 길(밤)(회상)
경찰차, 레커차, 앰뷸런스 등의 불빛이 요란하다.
구급요원들이 길바닥에 내팽개쳐진 수정을 조심조심 들것에 실어 앰뷸런스로 옮기고 있다.
순경이 오토바이에 타고 앉아있는 준수에게 간다.
순경: 신고한 사람이 당신이야?
끄덕이는 준수.
수첩 꺼내 준수에게 이것저것 묻기 시작하는 순경.
앰뷸런스가 경적을 울리며 사고현장을 떠나간다.
앰뷸런스를 따라가다 보면 길옆에 처박혀있는 앰뷸런스.
#김포공항 출국장 부근 쉼터.
준수가 온다.
선글라스를 끼고 쭈그리고 앉아있는 성구 옆에 앉는다.
준수: 비행기표하고 여권. 그리고 은행에서 삼백 만원 바꿨어. 여기 일 정리하면 곧 뒤따라 갈 거니까 그때까지 호텔에 처박혀 있어.
비행기표, 여권, 돈 봉투 건네주는 준수.
성구: (출국장 눈짓하며) 나갈 때 괜찮겠어?
준수: 아직 경찰에서 조사중야. 출국정질 시킬 정도로 밝혀진 건 없을 거구.
성구: (한숨 푹) ... 재수가 없으려니까. 대체 그 계집앤 왜 내 찰 탄 거야. 아무리 꼬셔도 죽어라 버티더니.
준수: 명심해. 내가 갈 때까지 전화두 걸지 말고 혹시 누가 찾아두 전화 받지 마. (일어나는)
성구: 준수야. 정말 내가 운전 한 거냐.
준수: ... (물끄러미 내려다보는)
성구: 야 임마, 좀 말렸어야지. 술이 억수로 취한 놈한테 차키를 주면 어떡하니. 휴우. (한숨 내쉬는)
준수: ... 정말 아무것도 기억이 안 나니.
성구: 안 나. 그 기집애하고 술집에서 실랑이 한 거밖엔.
준수: ...
성구: (일어나며) 너 오피스텔 금고 번호 알지. 올 때 거기 있는 돈 다 꺼내와. 한 일년 짱 박혀 있어야지.
준수: 회장님이 손쓰시겠지. 일년은 무슨.
성구: 아버지 얘긴 꺼내지두 마라. 그 영감 얼굴만 생각해두 구역질이 난다. (옆의 가방 집어 들며) 잘됐지 뭐. 젊은 년 데리고 잘 살라지.
출국장으로 걸어가는 성구.
바라보고 서있는 준수.
성구: (돌아서더니) 부탁한다. 일 잘 해결하고 와. 핑계 김에 세계 곳곳에 깃발이나 꽂아보게.
웃으며 손 키스를 보내고 출국장 안으로 들어가 버리는 성구.
#어느 병원의 중환자실 앞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중환자실의 안.
산소 호흡기를 꽂고 의식 불명으로 누워있는 수정.
수정의 어머니가 수정을 붙잡고 울부짖는다.
말리는 간호사와 간호보조원들.
준수: ...
바라보고 있다.
그 입가에 보일 듯 말 듯한 미소.
#거리(현실)
햇빛.
손으로 그 햇빛을 가리고 서있는 준수.
#준수의 오피스텔 안(밤) (회상)
컴퓨터 화면에 확대되어 있는 성구의 싸인.
스틱을 움직여 성구의 싸인 선을 따라 그어보는 준수.
투명지에 성구의 싸인을 위로 해보는 준수.
실제 준수의 싸인에 투명지를 대보는 준수.
딱 들어맞는다.
백지에 능숙한 솜씨로 성구의 싸인을 하는 준수.
계속 성구의 싸인을 해보는 준수.
그 위에-
“수정이가 죽기 전에 일기장이 발견됐는데 거기엔 자네 이름이 가득 차 있었다는 거야.”
#거리(현실)
준수: ...
햇빛을 가리던 손을 내리는 준수.
박병식: 내 말은 수정이가 좋아한 사람은 성구씨가 아니라 (준수를 손짓하며) 자네였다는 거지.
준수: 그래서요.
박병식: 그렇다면 성구씨가 반항하는 수정일 별장으로 납치를 하려다 사고가 났다는 건데.
준수: 이거 아세요, 아저씨. 악어와 악어새.
박병식: ...
준수: 악어새는 아무리 배가 고파도 악어가 입을 벌리지 않으면 아무것도 먹을 수가 없다는 거요.
박병식: (웃으며) 자네가 악어새다 그 거야?
준수: 난 항상 생각했다구요. 내가 악어의 입 속에 머리를 처박고 악어의 이빨 사이에 낀 찌꺼기를 파먹고 있는데 악어가 갑자기 하품을 하는 겁니다. 입을 쩌억 벌리고... 그러다 입을 꽉 다물면...
박병식: (재밌다는 듯 본다)
준수: 나한테 아무리 물어봐도 아무것도 못 알아낼 겁니다. 사건의 진상을 알고 싶으면 아마존이나 아프리카로 가보세요. 악어를 찾아서.
준수 가버린다.
바라보는 박병식.
박병식: (뒤에다 대고) 신용카드를 쓰고 다닐 리가 없잖아. 사람을 죽이고 도망 다니는 주제에.
못들은 척 가는 준수.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싱긋 웃는 박병식.
#다른 거리.
준수 온다.
멈춘다.
망설이듯 서있다.
홱 뒤돌아본다.
오가는 사람들.
준수: ...
박병식 보이지 않는다.
마치 박병식을 노려보듯 인파 속을 노려보고 서있는 준수.
#혜진의 집 앞(저녁)
혜진의 차 온다.
집 앞에서 멈춘다.
나리 나래 차에서 뛰어내려 대문 앞으로 달려간다.
나리: 아줌마.
여행용 가방 옆에 앉아있는 성숙.
나리와 나래를 껴안는다.
좋아하는 나리와 나래.
차에서 내려 바라보는 혜진.
#동. 거실(저녁)
나리: (복순이 안고) 아줌마 얘가 복순이야, 이쁘지.
성숙: 이쁘진 않은데 귀엽네.
나래: 이뻐요, 아줌마. 얼마나 이쁘다구.
성숙: (놀리듯) 이쁜가?
나리: 한번 안아보세요.
복순이 내민다.
성숙: (정색하며) 난 강아지 무서운데.
나리: 안 물어요, 아줌마. 한번 안아보세요.
복순이 더 내민다.
성숙: 싫어 나리야.
소파 위로 올라앉는 성숙.
나래: (좋아서) 복순아, 아줌마 물어.
성숙을 놀리는 나리와 나래.
무서워하는 시늉 더 하는 성숙.
혜진: (부엌에서 나오며) 방에 가서 놀아, 아줌마 피곤해.
나리: 가자, 복순아.
복순이 내려놓고 달려가는 나리와 나래.
뒤쫓아 가는 복순이.
성숙: 귀엽다.
혜진: (찻잔 내려놓으며) 강아지?
성숙: 니 애들.
혜진: (웃으며) 애들 때매 살지 뭐. (웃고) 근데 웬 가방이 저렇게 크니. 가방 보니까 잠깐 다니러 온 게 아니네.
성숙: 말두 마. 아오끼상 때문에 미치겠다. 돈두 못 벌어 오는 주제에 손찌검까지 하고.
혜진: 아오끼상 일본서 제일 잘나가는 광고회사 다녔잖아.
성숙: 거기 그만둔 게 언젠데.
혜진: (웃으며) 사고 쳤어?
성숙: 그 얘긴 나중에 하자. 구질구질해. (집안 둘러보며) 집 크네. 동원씨 진짜 능력 있네.
과장해서 감탄사를 연발하는 성숙.
혜진: 며칠 있다 돌아가. 그래두 그만한 사람 없어.
성숙: 너는.
혜진: 내가 뭐.
성숙: 남편 바람 좀 폈다고 파르르해서 북해도로 가출했었잖아.
혜진: 바람? 내가 언제 우리 남편이 바람폈다고 했어.
성숙: 뻔하지 뭐. 니가 집 나갈 이유가 뭐니. 이렇게 잘 사는데.
혜진: ... (뭐라고 하려다 그만 두는)
성숙: 혜진아, 니 집에 한 달만 있자.
혜진: (펄쩍) 안돼.
성숙: 너 누구 덕에 킹칼 잡았는데. 그날 신주쿠에서 동원씰 집에 못 가게 붙잡은 게.
혜진: (막으며) 한 달은 안돼. 이 삼일은 몰라두.
커피 잔 쟁반에 담으며 일어나는 혜진.
성숙: 야, 나 커피 다 안마셨어.
혜진: 동원씨 회사에서 이 삼일 밤새울 거야. 그 동안만 재워줄게.
부엌으로 가는 혜진.
성숙: (뒤에다 대고) 니 남편이 날 보면 잡아먹니.
혜진이 부엌에서 다시 나온다.
성숙 말해놓고 놀라서 숨을 멈춘다.
그런 성숙을 바라보는 혜진.
성숙: (웃으려고 하며) 야, 그냥 해본 소리야. 별 뜻 없어. 그냥 튀어나온 말이라구.
혜진: 참 성숙이 너 험해졌다.
한 숨 내쉬고 다시 부엌으로 간다.
#동. 부엌
들어와 커피 잔 치우는 혜진.
성숙: (들어오며) 니가 몰라서 그래. 아오끼상 정말 달라졌어. 옛날의 착하고 수줍음 많던 아오끼상이 아니라고. 괴물로 변했다니까, 무지막지한.
차임벨 소리.
혜진: 서울에 너 갈 데 많잖아. 그러니까 그런 줄 알어.
거실로 나가는 혜진.
성숙: (위에다) 기집애, 다 죽어가는 걸 살려줬더니.
삐죽한다.
밖에서-
“와아 아빠다.” 나리의 고함소리.
흠칫하는 성숙.
반사적으로 옷매무새를 고친다.
#동. 거실
이층 난간에서 팔짝팔짝 뛰고 있는 나리와 나래.
동원: (웃으며) 아빠가 집에 들어온 게 그렇게 반가워.
나리: 응. 엄마가 공부만 하래. 놀아주지두 않고.
나래: 맞어.
동원: 알았어, 아빠가 샤워하고 놀아줄게.
나리: 야, 신난다.
혜진: 니들 엄마가 이층으로 올라간다.
나리: 네, 공부합니다.
나래 손잡고 방으로 들어가는 나리.
손 흔들어주는 동원.
혜진: 집에 들어온다고 전화하죠.
동원: 회사에서 먹고 잤더니 온몸이 찌뿌드드해서 샤워 좀 하려고 들어왔어. (부엌 쪽 보더니) 아이구 이게 누구야.
성숙이 부엌 기둥에 등을 대고 기대서 마치 소녀처럼 몸을 꼬고 있다.
동원: (웃으며 성숙을 손가락질하며) 하나두 안 변했네, 성숙씨.
반갑게 다가간다.
서양식으로 마주 안고 볼에다 입을 맞추는 동원.
그런 모양을 바라보던 혜진이 가만히 한숨을 내쉰다.
동원: 언제 서울 왔어요?
성숙: 며칠 됐어요.
동원: 섭섭하네. 우리 집부터 와야지.
성숙: 십년 만에 서울 왔더니.
동원: 벌써 십년이나 됐나. 성숙씨 마지막으로 본 게.
성숙: 난 동원씨가 날 못 알아볼 줄 알았는데.
동원: 못 알아보다니.
성숙: 나 늙었잖아요.
눈을 흘기며 교태를 부리는 성숙.
혜진: ...
기막힌.
동원: 아이구 고대롭니다. 이 몸매하고.
웃으며 성숙의 몸을 훑어보는 동원.
혜진: 뜨거운 물 받아놓을게요.
동원: 아냐, 샤워만 하고 옷 갈아입고 나갈 거야. (안방으로 가다 성숙에게) 참 어려운 걸음 했는데 우리집서 며칠 쉬다가요.
성숙: (몸을 꼬며) 난 몇 달 푹 쉬다 갈려고 했는데.
동원: 그래요, 그럼. 이층에 방두 하나 비어있는데.
성숙: 정말요?
동원: (혜진 가리키며) 이 사람 심심한데 잘 됐지 뭐.
성숙: 동원씨 불편하잖아요.
동원: 별 말씀을 다 하십니다. 한달두 좋고 두달두 좋고 일년두 좋습니다.
웃어대며 안방으로 들어간다.
성숙: 고마워요, 동원씨.
뒤에서 소리치고 웃던 성숙이 혜진 보더니 웃음 그친다.
혜진: ...
차가운.
성숙: 봐주라 한 달만.
울상을 지어보이는 성숙.
#어느 레스토랑 앞(밤)
동원의 차 와서 멎는다.
파킹맨이 달려와 차문 열어준다.
내리며 팁 주는 동원.
동원: 차 안 긁히게 잘 봐.
안으로 들어가는 동원.
#동. 안(밤)
들어오는 동원.
안을 살펴본다.
다애가 식탁 위에 손가락으로 뭔가를 쓰고 있다.
그러더니 한숨을 푸욱 내쉰다.
동원: ...
싱긋 웃더니 간다.
동원을 보더니 어깨를 움츠렸다 펴는 다애.
동원: 오래 기다렸어?
다애: 갈까하는 중에요.
동원: 그러면 안 되지. 오늘같이 특별한 날에.
다애: 무슨 특별한 날요.
동원: ...
지그시 웃더니 손가락을 튕겨 웨이터를 부른다.
웨이터가 와인을 가지고 온다.
와인 병 집어서 상표를 확인하는 동원.
동원: 용케 구했네.
웨이터: 시중에 한 병 남아있는 걸 운 좋게.
동원: 고마워.
다애: (힐끔 와인 병 보며) 뭔데 한 병밖에 안 남아있다는 거예요.
동원: 로마네 콩티 1991년산.
웨이터에게 와인 병 주며 따라는 시늉.
다애: 비싼 거다 그 거죠.
동원: 돈으로 따질 수 없는 가치.
다애: 잠깐만요. (웨이터에게) 그 거 얼마짜리예요.
와인 병 따는 거 멈추고 동원 보는 웨이터.
다애: 십만 원 넘는 거면 따지 마세요.
동원: 오늘이 무슨 날인지 정말 몰라?
다애: ...
동원: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젓는)
다애: (번쩍 정신 나서) 내 생일? (다시 생각하더니) 그런가.
동원: 해피버스데이.
소리 안 나게 박수를 쳐주는 동원.
다애: 그렇네.
재밌어 하며 웃는 다애.
#혜진의 서재 안(밤)
반바지 차림에 헐렁한 남자 셔츠로 멋을 부린 성숙.
성숙: 와아, 뭐가 이렇게 으리으리하냐. 여기가 뭐하는 방인데.
혜진: 동원씨 서재 겸 사무실.
성숙: (모니터 컴퓨터 등을 보며) 무슨 첩보사무실 같으네. 공공칠 영화에 나오는.
혜진: 우리가 밤일 때 미국은 낮이잖아. 미국 주식시장이 요동을 치면 여기서 밤새워 일해.
성숙: 근사하다.
의자에 앉아 두 발을 책상 위에 올려놓는 성숙.
못마땅해서 조금 찡그리는 혜진.
성숙: 니 남편 몇 백억씩 굴리는 펀드매니저 됐다고 하더니 실감 난다 얘.
혜진: (비위 상해서) 몇 백억이 아니라 몇 천억이래.
성숙: 그런데 대체 뭐가 불만이야.
혜진: ...
성숙: (힐끔 뒤돌아보더니) 너 사고 쳤니? 북해도에서.
혜진: (펄쩍) 아니.
성숙: (다시 모니터 등 보며) 복 터졌다 너. 이럴 줄 알았으면 내가 잡는 건데.
혜진: (기막혀 소리 없이 웃는데)
성숙: (돌아보며) 그냥 해보는 소리야.
천치처럼 웃어 보이는 성숙.
성숙보다는 책상 위의 성숙의 다리가 더 신경 쓰이는 혜진.
#어느 레스토랑 안(밤)
생일 케잌.
타고 있는 촛불.
물끄러미 바라보는 다애.
동원: 뭘 해.
다애: ...
동원: 촛불 꺼야지.
다애: ...
촛불을 확 불어 끄는 다애.
소리 안 나게 박수치는 동원.
동원: 해피버스데이.
다애: ...
한숨을 내쉰다.
동원: 왜.
다애: 한심해서요.
동원: 뭐가 왜.
다애: 나일 벌써 이렇게 먹었나 생각하니까...
동원: 나이 따지기엔 아직 젊잖아.
다애: ... (물끄러미 동원 본다)
동원: (웃으며) 덧없이 나이만 먹었다?
다애: 징그러워요. 내가 벌써 스물...
동원: (막듯이) 그래서 내가 이걸 사왔지.
주머니서 보석상자 꺼낸다.
당장 눈이 쫑긋해서 보는 다애.
동원: 열어봐.
다애: 뭔데요.
동원: (미소)
다애: (찡그리며) 반지?
동원: (웃으며 고개 젓는)
다애: (환해서) 귀걸이.
동원: (끄덕)
다애: ...
좋아서 얼른 열어보는 다애.
다이아몬드가 박힌 귀걸이 한 쌍.
얼른 집어 들어서 보더니.
다애: 이거 설마 큐빅은 아니겠지.
동원: 다애 좋아하는 다이아몬드.
다애: 되게 크네. 이건 몇 캐럿이에요?
동원: 해봐.
다애: ...
망설이듯 동원 본다.
동원: 또 따지려고 한다.
다애: ...
다시 환하게 웃더니 하고 있던 귀걸이 빼고 동원이 준 귀걸이를 한다.
지그시 웃으며 바라보는 동원.
다애: 어때요.
동원: 진짜 주인을 만나야 다이아몬드는 빛이 난다고 하더니 정말 예쁘다.
다애: 나요 이거요. (귀걸이 가리킨다)
동원: 둘 다.
다애: 잠깐만요. (일어난다)
동원: 어딜 가려구?
다애: 거울을 안 갖고 와서 저기 가서 좀 보고 오려구요.
새끼손가락으로 레스트 룸을 가리키는 다애.
끄덕이는 동원.
싱긋 웃고 가는 다애.
동원: ...
느긋하게 와인 한 모금 마신다.
#동. 레스트 룸 안 (밤)
거울 속의 다애.
귀에서 빛나는 귀걸이.
입 꽉 다물고 노려보고 있다.
문득 눈물이 솟구치려고 한다.
얼른 귀걸이를 빼는 다애.
손이 떨리고 울음이 자꾸 치밀어서 귀걸이가 잘 안 빠진다.
#동. 안(밤)
다애 온다.
동원: (핸드폰 걸고 있다) 그래, 좀 늦을 거야. 야근 준비들 하고 기다리고 있어.
다애 앉는다.
동원: (다애 보며) 며칠만 고생하면...
그러다 다애 귀에 귀걸이가 없는 걸 발견하고 전화 끊는 동원.
동원: 맘에 안 들어?
다애: ...
동원: 그 귀걸이엔 특별한 의미가 있다구.
다애: 미안해요. 이쁘고 갖고 싶지만.
식탁 위에 손에 쥐고 있던 귀걸이를 가만히 올려놓는 다애.
동원: 그게 무슨 의미냐 하면 앞으로 다애를. 뭐랄까 독립적이랄까. 그러니까 한 인격체로서... 휴우. (한 숨 쉬고) 한마디로 잘라 말하기 되게 힘드네. (생각하더니) 그래, 내가 다애한테 새로운 제안을 하겠다는 거야. 첫째, 앞으로 무슨 일이 있어도 집으로 찾아가지 않겠음. 다애 사생활에도 일체 간섭하지 않고. 또... 만일 다애한테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군말 없이 깨끗하게 물러날 것이며... 또...
다애: (바라보는)
동원: 내 말은... 다애가 만나고 싶을 때만 날 만나면 된다는 거야. 그럼 부담 없잖아. 싫어두 만나야하는 게 아니라 싫으면.
다애: (막듯이 좀 신경질적으로) 나 잘 알잖아요. 나란 애가 어떻게 되먹은 앤지.
동원: (놀라서 보는)
다애: 갖고 싶은 거 있으면 못 참구요. 평소엔 밥 한 끼 사먹는 것도 아깝다가요. 길거리 지나가다 쇼윈도에 걸려있는 예쁜 옷 보면 주머니 탈탈 털어서 우선 사구 보구요. 내 또래 애들이 나보다 비싼 핸드백 들고 있으면 카드가 펑크 나는 한이 있어두 더 비싼 걸 사들고 다녀야 직성이 풀리구요... 나 그런 애잖아요.
동원: (웃으려고 하는)
다애: 고치려구 해두 나 그 버릇 못 고쳐요. 그러니까 날 도와줘야죠. 이런 귀걸이 앞에 내놓고 나보고 뭐라고 하면 내가 어떡하겠어요.
동원: 다애야.
다애: 세상에 나 같은 애 많잖아요. 왜 나만 고집하세요. 동원씨 능력이면 얼마든지 나보다 더 이쁘고 착하고 멍청한 애 고를 수 있잖아요.
동원: 없으니까 그렇지.
다애: ...
동원: 아무리 찾아봐도 다애 같은 애가 없으니까.
다애: 착한 거요 멍청한 거요 이쁜 거요?
동원: 셋 다.
다애: 나 농담하는 거 아녜요.
동원: 그런 생각두 해봤다구.
다애: ...
동원: 너 나한테 함부로 하잖아. 내 속이 편했겠어. 지금까지 살면서 이런 식으로 무시당한 적 없다구. 그런데도 참고 있는 내가 화가 나서 몇 번이나 깽판을 쳐버릴까 했는지 몰라.
다애: (바라보는)
동원: 단념하지 못하는 이유를 생각해 봤어. 여러모로.
다애: ...
동원: 난 말야.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일은 하지 않는 성격이야. 불분명한 건 딱 질색이라구. 그런데 이율 못 찾겠는 거야. 너한테만은.
다애: (픽 웃으며) 그럼 정말 날 좋아하는 거네.
동원: ...
다애: 그런 거다 그 거죠.
동원: 그래.
다애: (바라보는)
동원: (다애 말을 기다리다 안 해서 한 마디 하려는데)
다애: 좋아요, 좋다는데 뭐.
식탁에 놓인 귀걸이 집어 하나씩 귀에 거는 다애.
바라보는 동원.
다애: 이차 가요 우리. 이런 데 말고.
#어느 가라오케 안(밤)
악쓰며 노래하는 다애.
탬버린 치며 반주 맞추는 동원.
#동원의 사무실 안(밤)
핸드폰 걸고 있는 대진.
대진: 안 받는데.
현필: 어디 가서 한 잔 하시겠지. 하루 종일 선물 고르러 다니시던데.
대진: 부장님 이거(새끼손가락) 있는 거 아냐.
현필: 사모님 선물이겠지. (헛기침 하고) 석환아, 편의점 가서 맥주나 좀 사와라.
석환: 몇 병이나요.
현필: 야, 넌 왜 애가 그렇게 답답하냐. 분위기 보면 모르냐.
대진: 그러다 부장님 들어오시면.
현필: 안와, 내가 그 양반 한두 해 모셨냐. 오늘은 개판 쳐두 되는 날 입니다.
#어느 가라오케 안(밤)
춤추는 다애.
노래하는 동원.
옆 테이블의 장년 사내 셋이 무대로 나와 다애 옆에서 춤을 추며 추근 댄다.
동원이 노래 부르며 사내들을 가로막는다.
이리저리 피해 다애한테 다가가는 사내들.
역부족인 동원.
이윽고 한 사내가 다애의 손을 잡고 추근거린다.
뿌리치는 다애.
뒤에서 다른 사내가 다애를 끌어안다시피 한다.
춤추다 말고 돌아서 사내의 뺨을 후려갈기는 다애.
사내가 다애를 후려치려고 한다.
그 손을 꽉 잡는 동원.
사내의 다른 손이 동원의 얼굴을 후려갈긴다.
나뒹구는 동원.
동원을 밟으려는 사내.
사내의 뒤에 매달려 때리는 다애.
다른 사내가 다애를 떼어서 밀어 버린다.
동원이 일어나 다애를 민 사내에게 덤벼든다.
제법 격투가 벌어진다.
막상막하다.
동원이 점점 밀린다.
다애가 하이힐을 벗어 양손에 들고 정신없이 휘두른다.
비명을 지르며 머리를 감싸 안는 사내들.
#어느 파출소 안(밤)
여기저기 상처가 난 사내 셋이 장의자에 나란히 앉아있다.
순경: 당신들 집단 폭행이야. 집단 폭행이면 무슨 죈 줄 알아요.
고개 푹 숙이는 사내들.
순경: 직장두 있고 번듯한 사람들이 무슨 짓이야.
으름장 놓고 돌아서는 순경.
동원이 앉아있다.
순경: (동원 머리 살펴보더니) 많이 다치셨네. 병원 가봐야겠어요.
동원: (난처한)
순경: 어떡하실래요. 저 사람들 폭행죄로 집어넣을까요.
동원: 아니요. (당황해서) 됐습니다. 취해서 한 실순데.
순경: 그럼 화해하겠다 그 거죠.
동원: (끄덕)
순경: (사내들한테) 당신들 재수 좋은 줄 알어. (으름장 놓고 일어나서) 이분한테 고맙다고 인사드려요.
사내 셋 어정쩡 일어나서 동원에게 꾸벅 절한다.
#동. 앞(밤)
나오는 동원.
다애가 기다리고 서있다.
다애: 괜찮아요.
동원: (끄덕)
다애: 아까 보니까 머리에서 피나던데 어디 좀 봐요.
동원의 머리 살피는 다애.
동원: 귀걸인 어쨌어?
다애: 이 거요?
귀부터 만져보는 다애.
귀걸이 없다.
동원: 잃어버린 거 아냐.
다애: (키드득 웃으며) 내가 누군데. 쌈 나길래 귀걸이부터 챙겼지.
손바닥을 펴 보이는 다애.
그 손바닥 안에 귀걸이 한 쌍.
#다애의 집 앞(밤)
동원의 차 와서 멎는다.
앞에 나란히 앉은 동원과 다애.
동원: ...
다애: ...
다애가 먼저 차문을 열려고 한다.
다애의 팔을 잡는 동원.
다애: (본다) ...
동원: 딴 데 가자.
다애: 명자언니 가게 가서 자라고하면 돼요. 지 집두 있고.
동원: 남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아서 그래.
다애: 그런다고 명자가 모르나.
동원: 우리 헤어진 걸루 하자구. 그래야 다애두 언제든지 새 출발 할 수 있잖아.
다애: ... (물끄러미 보더니) 새 출발...
동원: ...
다애: 그래서 그래요?
동원: 그래야 내가 덜 미안하잖아.
다애: 그럼 우리... 새로 시작하는 거네요.
동원: ...
다애: 좋아요 뭐.
반쯤 열었던 차문을 꽝 닫는 다애.
차를 뒤로 빼는 동원.
다시 왔던 길로 나가는 동원의 차.
준수: ...
어둠 속에서 노려보고 있는 준수.
사라지는 차.
점점 어둠 속에서 이글거리는 준수의 두 눈.
#다애의 액세서리 가게 안
명자가 티브이에 DVD를 틀어놓고 태극권 흉내를 내고 있다.
제법 멋을 부리는 명자.
한 발을 들고 멋지게 턴하다 멈춘다.
준수가 문 앞에 쓰러질 듯이 서있다.
초췌하고 피곤한 모습이다.
명자: ...
놀라서 멀뚱멀뚱 바라본다.
준수: 다애는요...
명자: (발 내리며) 다애 어제 외박... (흠칫해서) 새벽에 들어와서 집에서 자고 있어요.
준수: ...
명자: 어디 아퍼요, 준수씨.
준수: ...
대꾸 없이 내실로 들어가는 준수.
따라오는 명자.
소파에 몸을 내던지듯 눕더니 움직이지 않는 준수.
명자: 다애 늦게 나올 텐데.
준수: ...
대답 없다.
기웃거리듯 준수를 살피는 명자.
잠이든 것 같은 준수의 초췌한 얼굴.
#혜진의 거실.
진공청소기로 바닥을 청소하고 있는 파출부.
핫팬츠차림으로 소파에 앉아 잡지를 읽고 있는 성숙.
파출부가 일부러 성숙 발밑으로 진공청소기를 밀어 넣는다.
두 다리만 싹 올려놓고 잡지 뒤적이는 성숙.
그런 성숙이 밉상 맞아 삐죽하고 더 요란하게 청소를 하는 파출부.
혜진이 들어온다.
혜진: (미끄러워서) 아줌마, 좀 이따 하지.
파출부: (못들은 척) 네?
혜진: 나중에 하라구요. 지금 정신없으니까.
파출부: 이거요?
성숙을 흘기며 청소기 끌고 부엌으로 가는 파출부.
성숙: 서울이 좋긴 좋네. 파출부 집에 두고 손에 물 하나 안 묻히고 사니. (일부러 부엌에 대고) 근데 서울 파출부들은 다 저 모양이냐. 어디 눈치 보여서 살겠냐.
파출부: (부엌에서 얼굴 내밀며) 청소할 때 좀 비켜주면 안돼요. 그랬으면 벌써 청소 끝냈을 거 아녜요.
혜진: 아줌마.
파출부: 상전 하나 더 생겼네.
이층으로 올라가는 파출부.
혜진: 어디가요 아줌마.
파출부: 이층 치워야죠. 저 양반 시중드느라고 아침 내내 아무 것도 못했어요.
이층으로 올라가서 방문 열고 문 꽝 닫는다.
성숙: 와아, 무섭네.
입을 따악 벌려 보이는 성숙.
혜진: 못 들은 척 해. 사람 구하기 힘들어. 옷 좀 갈아입을게.
안방으로 가는 혜진.
성숙: 혜진아, 내가 그렇게 불편하면.
혜진: (돌아본다) ...
성숙: 너 나한테 왜 그러니. 하나밖에 없는 친군데.
혜진: 우리 집에 있으려면 옷 좀 제대로 입고 있어.
안방으로 들어가는 혜진.
성숙: (화나서) 집에서 그럼 뭘 입고 있으리. 솜바지 저고리 처 입고 있으랴.
파출부: (이층 방문 열고) 아이구 내가 못 살아. 웬 빨래 감이 이렇게 잔뜩 쌓여있대.
옷을 한아름 안고 나와 복도에 내던지는 파출부.
성숙: 세탁비 내가 따로 줄게 궁시렁거리지 좀 말아요.
#동. 안방
침대에 걸터앉아 있는 혜진.
성숙: (소리) 아이구 저 아주머니 꽤나 투덜거리네.
가만히 한 숨 내쉬는 혜진.
핸드폰 진동소리.
두리번 핸드폰 찾는 혜진.
핸드백과 주머니를 뒤져본다.
계속 들리는 진동음.
핸드백 뒤집는 혜진.
잡동사니와 함께 침대 위에 떨어지는 핸드폰.
플립 열어보는 혜진.
남편이라는 발신인.
혜진: (버튼 누르고) 저예요.
“나 한 이틀 출장 좀 다녀와야겠는데.” 동원의 소리.
혜진: 옷 챙겨놔요?
“입은 채 갔다 와두 돼.”
혜진: 내복이랑 양말이랑.
“사 입고 버리면 되지 뭐. 그런 줄 알어.”
전화 끊기는 소리.
혜진: ...
방문 흔드는 소리.
성숙: (밖에서) 혜진아, 방문 좀 열어봐. 할 얘기가 있어. 혜진아.
혜진: ...
벌렁 침대에 누워버리는 혜진.
계속 방문 두드리고 흔드는 소리.
“혜진아 방문 좀 열어보라니까. 혜진아.”
혜진: ...
저도 모르게 답답하고 안타까운 흐느낌이 터져 나오는 혜진.
몸을 돌려 침대에 얼굴을 묻어버린다.
#다애의 액세서리 가게 안
간단한 여행용 가방 들고 들어오는 다애.
명자: (가방 보더니) 어디 갈려구?
다애: 잠깐 어디 좀.
명자: 오늘 새 물건 들어오는 날이잖아. 너 없으면 나 혼자 어떡하라구.
다애: 여기서 돈 찾아서 물건 값 치뤄.
은행통장과 도장이 든 비닐 백 꺼내 내주고 돌아서는 다애.
명자: 다애야, 잠깐만.
다애: 갔다 올게.
문 열고 돌아보던 다애.
문득 멈춘다.
준수가 내실 문 앞에 서있다.
다애: 언제 왔어?
반갑게 다시 안으로 들어오는 다애.
준수 본다.
부스스한 모습의 준수.
다애: 안에서 잤어? 머리 모양이 이게 뭐냐.
곤두서있는 머리를 툭툭 쳐서 눕혀주는 다애.
그 손을 가만히 밀어버리는 준수.
다애: (애써 웃으며) 왜 그래. 잠 덜 깼어?
준수: ...
여전히 다애만 노려보는 준수.
명자: (얼른 통장 집어 들며) 나 은행 갔다 올게.
쪼르르 달려 나가는 명자.
다애: (준수 힐끔 보고) 되게 무섭게 구네.
내실로 들어가는 다애.
그 팔을 낚아채 잡아당기는 준수.
화가 나서 준수의 손을 뿌리치는 다애.
더 잡아당기는 준수.
그 바람에 준수의 가슴에 안기듯 부딪치는 다애.
준수: 똑바루 살라고 그랬지.
다애: ...
준수: 올바르게 살라구.
다애: 니가 뭔데.
준수: 다애야.
다애: 니가 뭔데 내 인생에 상관이야.
악쓰듯 준수의 얼굴에 대고 소리치는 다애.
준수가 반사적으로 두 손으로 다애의 얼굴 꽉 잡아 쥔다.
얼굴을 잡힌 채 준수를 노려보는 다애.
다애의 얼굴을 잡은 채 부들부들 떨고 있는 준수.
그 얼굴과 얼굴-
- 9회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