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기(禮記)』에 “대부는 칠십이 되면 벼슬에서 물러난다.[大夫七十而致事]”라고 하였다. 동양에서는 고래로 이 조항이 고위 공직자의 은퇴시기를 정하는 기준으로 사용되었다. 그런데 조선 후기에 칠십도 아닌 팔십대에 우의정으로 발탁된 인물이 있었으니, 미수(眉叟) 허목(許穆·1595∼1682)이 그 주인공이다. 조선시대에 70세가 넘도록 정승으로 재직한 사람이 없지는 않았다. 대표적으로 세종대의 명상 황희는 87세까지 정승의 직위에 있었지만, 그는 64세에 우의정이 된 뒤로 20년 가까이 줄곧 정승 자리를 지킨 경우이다. 그런데 미수는 이와 달리 거의 평생을 재야의 학자로 지내다가 81세가 되어 우의정으로 발탁되었다. ‘백세시대’라는 말이 익숙해진 현대라도 흔치 않을 일인데, 그 시대에 이처럼 파격적인 인사가 이루어졌다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그것이 가능했던 상황과 미수라는 인물이 궁금해진다.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기언』. #조정을 뒤흔든 한 통의 상소 미수가 우의정에 발탁된 과정은 매우 드라마틱하다고 할 만하다. 1660년 66세로 사헌부 장령이 된 미수가 올린 한 장의 상소 때문이었으니 말이다. 그 상소는 ‘예송’이라 불리는 논쟁의 발단이었다. 소현세자가 일찍 세상을 떠나 효종이 인조의 두 번째 장자로서 나라를 이어받았으니, 대왕대비께서 효종을 위해 재최 삼년복을 입어야 예법에 맞는데, 지금 예를 강등하여 기년복을 입으셨습니다. 서자(庶子)를 세워 후사로 삼은 경우에는 삼년복을 입지 못하니, 첩자(妾子)이기 때문입니다. -「추정상복실례소(追正喪服失禮疏)」 1659년(기해년)에 효종이 승하했을 때 효종의 어머니 자의대비의 복제(服制)를 기년복으로 정한 것이 오례(誤禮)라는 주장이었다. 이 상소에서 가장 중요한 대목은 ‘기년복은 효종을 인조의 적자가 아닌 첩자로 본 데서 나온 것’이라는 말이었다. 부왕 효종의 국상 복제가 잘못 정해졌다는 것만도 놀랄 일인데, 효종을 첩자로 취급했다는 말에 현종은 펄쩍 뛸 수밖에 없었다. 복제를 다시 검토하라는 엄명이 내려졌다. 기해년 복제는 송시열의 주도하에 서인들이 정한 것이었다. 실상 송시열은 효종을 서자로 본 것이지 첩자로 본 것은 아니었으나, 예학에 정통한 미수가 『의례(儀禮)』 「상복조」를 근거로 제시한 주장은 매우 논리적이었다. 하지만 집권 서인들은 장자와 차자를 구분하지 않은 『경국대전』에 근거한 것이라며 기왕에 정한 복제를 그대로 밀고나갔다. 더 큰 파장을 막기 위해서라도 달리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결국 미수의 상소는 채택되지 못했고, 그가 삼척부사로 좌천되는 것으로 일은 일단락되었다. ▲고전(古篆)의 일인자로 지칭되는 미수의 수필원고본 『동해비첩』. 동해비는 현재 삼척군에 있는 척주동해비(陟州東海碑)이다. 보물 제592호.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15년 뒤에 일어난 일대 반전 그런데 1674년(갑인년) 효종의 비 인선왕후(仁宣王后)가 죽었을 때 예송이 재연되었다(갑인예송). 시어머니인 자의대비의 복제를 대공(大功 9개월)으로 정하면서, 서인들이 효종을 서자로 보았다는 사실이 드러났던 것이다. 『경국대전』에는 장자·차자와 달리 장자부·차자부에 대한 복제가 기년복·대공복으로 구분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갑인예송은 서인 고관들과 현종 사이에서 전개되었으나, 이 과정에서 15년 전 미수가 올렸던 상소가 다시 크게 부각되었다. 복제 문제로 서인 주요 인사들이 축출되고 남인들이 대거 등용되면서 정국이 개편되었다. 그러다 현종이 서거하고 숙종이 즉위하면서 더 큰 반전이 일어났다. 숙종이 81세나 된 고령의 미수를 우의정으로 전격 발탁했던 것이다. 왕실 복제의 중요성은 짐작할 수 있지만, 미수의 상소 한 통이 15년이 지난 뒤까지 그토록 큰 파급력을 지녔던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미수가 왕실 예제의 특수성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송시열의 예론은 보편적 규범을 따르기 때문에 국왕도 사대부와 동일하게 다루어진다. 즉, 효종이 왕위를 계승했더라도 차자이므로 장자로 대우할 수 없다고 본 것이다. 반면 미수는 효종이 왕위를 계승한 만큼 적장자의 예를 따라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국왕은 사대부와 동일시될 수 없는 절대적 존재임을 인정한 것이다. ‘군약신강(君弱臣强)’이라고 지칭되는 현종대를 이어 즉위한 숙종에게 이 점은 매우 중요하게 받아들여졌을 법하다. 실추된 왕실의 권위를 바로잡고 왕권을 강화하려면 그에 맞는 논리가 필요했을 테니 말이다. 미수의 상소에는 그에 맞는 정치이념이 제시되어 있었던 것이다. ▲1690년(숙종16) 미수의 학문과 정신을 기리고자 건립한 나주 미천서원. 이곳 장판각에 『기언』 목판이 보관되어 있다. #독창적이고 독보적인 문집『기언(記言)』 이런 뚜렷한 행적 때문인지 미수는 사람들에게 정치가로 각인되어 있지만, 그는 실제로 조선 유학사에 뚜렷한 족적을 남긴 뛰어난 학자였다. 미수의 학문적인 업적과 특색을 잘 살펴볼 수 있는 것이 바로 기언이다. 나는 말을 조심해야 한다는 성현의 가르침을 두려워하여 평소에 말을 하면 반드시 글로 써서 날마다 살펴보며 힘썼다. 그러므로 이 글을 『기언』이라 이름하였다. -「자서(自序)」 기언은 미수가 직접 엮은(自編) 문집이다. 일반적으로 특정 인물의 사후에 그 제자나 후손이 유작을 정리해서 만드는 것이 문집임을 생각하면, 미수가 기언을 자편한 것이 매우 특별한 일인 것을 알 수 있다. 게다가 미수는 ‘기언’이라는 독특한 이름도 스스로 정하였다. 기언은 ‘말을 기록하다’는 뜻이다. ‘언’은 모범이 될 만한 말과 글, 곧 진리이다. 그런 측면에서 보면 기언은 평범한 문집이라기보다 후대에 남기려는 의도로 적었던 ‘언’, 미수 나름의 진리라고 하겠다. 기언은 육경(六經)을 근본으로 삼고 예악(禮樂)을 참고하고 백가(百家)의 변론을 널리 포괄한 것이다. 이 글은 간략하면서도 두루 갖추어졌고, 장황하면서도 체제는 엄격하다. 「자서(自序)」의 한 대목에서도 그런 자부심을 느낄 수 있다. 기언에서 볼 수 있는 또 하나의 독특함은 글을 수록한 방식이다. 문집에 사용되는 문체별 분류가 아닌 학(學), 예(禮), 문학(文學), 고문(古文), 유림(儒林) 등의 주제별 분류 방식을 택한 것이다. 이것은 미수가 문체보다는 글에 담긴 내용과 사실(진실)을 중시했기 때문이다. 이 점은 ‘말을 기록하다’라는 기언의 뜻과도 상통하는 것이다. 미수의 기언 편집 작업은 88세로 임종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그 과정에서 스스로 서문을 두 번이나 지었다.
기언의 표제(標題)는 유서(類書)처럼 주제별로 되어 있는데, 이는 모두 선생이 직접 편집한 것이다. 그러므로 선생이 만든 기준에 따라 간행한다. 학(學)ㆍ예(禮)ㆍ유림(儒林) 등의 편목(篇目)은 중복된 듯하지만, 그렇게 한 데에는 선생의 깊은 뜻이 담겨 있는 것 같아 함부로 고치지 않는다. -「범례(凡例)」 미수 사후 문집 출판을 담당한 제자는 범례에서 이렇게 밝혔다. 기언의 독특한 구성에 대해 ‘선생님의 뜻’이라며 독자들에게 이해를 구한 것은, 그 제자들도 기언의 편집 의도를 잘 이해하지 못했음을 뜻한다. 미수의 구상은 그만큼 독창적이었다. 어쩌면 그는 제자들이 자신의 의도에 맞게 문집을 엮지 못할 거라 생각하여 기언을 직접 편집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미수는 기언을 완결시키지는 못하였다. 범례에 언급되었듯이 수고본에는 중복 수록된 작품도 있고 표제와 내용이 일치되지 않은 곳도 있었다. 그렇지만 제자들은 첨삭을 가하지 않고, 미수가 머릿속으로 구상하며 엮어가던 모습 그대로 기언을 간행하였다. 유례없이 독특하고 독보적인 문집 기언은 그렇게 탄생하였다. 미완성의 기언이 완성을 본 것이었다.
■기언(記言)
원집과 속집은 미수가 직접 엮은 것이다. 80세 이전의 저술을 정리한 것이 원집이고, 그 이후부터 88세로 임종할 때까지의 저술, 그리고 원집에 빠진 글을 수록한 것이 속집이다. 미수 사후에 제자들이 원집과 속집에 빠진 글을 정리해서 붙인 별집은 문체별 분류 방식을 따랐다. 모두 93권에 달하는 거대 문집이다. 1689년 숙종의 명으로 간행하였으며, 연보는 5대손 허뢰(許磊)가 1772년에 간행하였다. 한국고전번역원에서 2006∼2008년 번역, 8책으로 출간하였다. ▲한국고전번역원이 번역, 8책으로 펴낸 『기언』 번역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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