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 27:1-10
▣ 재판과 십자가 처형-마태복음 27장-
1. 그리스도와 유다(27:1-10)
어떤 이들은 유다가 예언을 확실하게 성취시키기 위하여 예수님을 고의적으로 팔았다고 말함으로써, 그를 영웅으로 삼으려 한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유다를 가리켜 영웅이 아니라 “마귀“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셨다(요 6:70). 따라서, 예언이 성취되었을지라도 유다는 여전히 고의적인 죄를 범한 죄인인 것이다(마 26:24). 돈에 대한 사랑(어쩌면 주님의 나라에서 지도자가 되려는 욕망)때문에 그는 제자들 가운데 끼어 있었으나, 그의 마음은 결코 그리스도와 함께 하지 않았다.
후에 유다는“내가 죄를 범하였도다“라고 말하지만 엎질러진 물이기 때문에 이런 말을 한 것이지 진지한 회개의 증거로서 한 말은 아니었다. 그는 진리를 거부하고 거짓말을 믿었다. 사단은 그를 자기의 소유물로 삼았다(요 13:3/요 13:27). 사단은 살인자이며(요 8:44), 유다는 자기의 생명을 빼앗겼다. 그런데 유다가 그리스도는 무죄하다고 말하는 것에 주목하자. 그는 예수님을 “주님“(25:25 은 “랍비“를 의미)이라고 부르지 않았다. 그렇지만 어느 날 그를 주님이라고 부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빌 2:9-11).
토기장이의 밭을 산 것은 스가랴 11장 13절의 예언이 성취된 것이다. 예레미야 18장과 19장 역시 토기장이의 밭과 관련이 있다. 따라서 예레미야가 당대에 했던 말을 스가랴가 나중에 다시 썼을 가능성도 있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세상을 구속하는 일에 지불되었으나, 유다의 죽음으로는 나그네의 묘지를 샀다! 사단이 실제로 줄 수 있는 유일한 유산은 멸망과 죽음에 대한 말뿐이다."
마 27:11-32
2. 예수 그리스도와 빌라도(27:11-32)
이 로마 총독의 불안정하고 우유부단함을 알아보려면 복음서에 언급된 모든 부분을 읽어야 한다. 매 번 군중들 앞에 나가게 될 때마다 그는 예수님에게 의문을 가지게 되면서도, 어떻게 하든지 결정을 피할 방도만을 모색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에 대한 결정을 피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빌라도는 자기의 양심과 아내의 경고를 받았으나, 고의적으로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넘겨 주었다. 이것이 하나님의 계획인 것은 사실이다(행 2:23). 그러나 빌라도에게 죄가 없다고 할 수는 없다. 사도행전 3장 13절은 유대인들 자신에게 허물을 돌린다.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은 인간의 자의적인 선택이나 그에 따른 죄책을 결코 부인하지 않는다.
빌라도는 군중이 바라바가 아니라 예수님을 놓아 달라고 할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이것은 실수였다. 예수님은 “백성들이 선택하는 대상“이 결코 아니다. 인간들은 언제나 구세주가 아니라 죄인을 요구한다. “바라바“는 “아버지의 아들“이란 뜻이다. 백성들은 살인자를 위하여 하나님의 아들을 거절하였다! 바라바가 도둑떼의 두목이었을 수 있고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달린 두 강도들과 한 패였을 수도 있다. 빌라도 역시 그리스도가 무죄하다고 증거한다(24절).
25절에 나오는 유대인의 요구는 응답되었다. 그리스도의 피는 그들과 그들의 후손들에게 돌려졌고 그 민족은 “자신들이 찔렀던 주님을 바라보며 회개할 날이 이르기까지“ 피값을 치러야 할 것이었다(슥 12:10). 주후 70년에 예루살렘이 멸망한 것, 유대인들의 흩어짐과 박해, 앞으로 환란 기간 동안에 이스라엘 땅에 내려질 하나님의 진노, 이러한 일들은 모두 그들이 요구한 것에 대한 응답인 것이다.
판결이 난 죄인이 자신의 십자가를 지는 것은 관례였으며 자신의 죄를 공개적으로 증거하는 일이었다(요 19:17), 그러나 중도에 군인들은 시몬에게 주님의 십자가를 지게 하였다. 여기서도 그리스도는 죄가 없는 것이 나타났다. 시몬이 참 죄인이었다(예수께서 십자가 아래 쓰러져서 도움이 필요했다고 말하는 것은 성경이 아니고 로마 카톨릭의 전설임에 유의하자)."
마 27:33-54
3. 예수 그리스도와 구경꾼들(27:33-54)
십자가에 달리실 것이라는 생생한 예언들은 시편 22편에 나와 있다. 본 장에서 이러한 예언들이 얼마나 많이 성취되었는지 알아보자. 갈보리는 오늘날의 인간의 모습을 보여 주는 훌륭한 상징이다!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의 죄 때문에 괴로워하고 있는 동안 군인들은 주님께서 세상에서 가지고 계셨던 적은 소유를 제비뽑고 있었으며, 유대인들은 주님께 욕을 하고 백성들은 앉아서 침을 뱉는데, 로마의 군사 한 사람은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라고 고백하였다.
선지자와 왕으로서의 그리스도의 직분이 조롱당하는 것에 유의하자. 그들은 성전에 대한 주님의 예언을 부인하였으며(40절/ 요 2:19/마 26:61), 왕권에 대한 주님의 주장을 되풀이하여 비웃었다(37, 42절).
어두움이 임한 것은 초자연적인 일이었다(45절). 유월절은 음력 보름에 열리므로 빛이 사라질 수 없는 일이었다. 주님의 아들이 세상의 죄를 지고 인류를 위하여 하나님의 진노를 맛보는 동안 하나님께서는 십자가를 가리우고 계셨던 것이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자기 아들을 버리시는 비밀은 우리가 헤아려 알기에 너무도 깊은 것이다.
주님이 죽으실 때 생긴 세 가지 사건들은 감명을 준다. 휘장이 찢어진 것은 주님의 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로 가는 새롭고 생명력 있는 길이 열려졌기 때문이다(히 10:19-25). 이 기적이 나중에 많은 제사장들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믿게 하는 근거가 되었을 것이다(행 6:7). 무덤이 열린 것은 주님의 죽으심이 사망을 정복했기 때문이다(히 2:14-18). 그리스도께서 첫열매이시기 때문에 주님이 부활하신 후까지 성도들은 무덤에서 나오지 않았다(고전 15:20/고전 15:23). 유다와 빌라도가 그리스도께서 무죄임을 고백한 것처럼 로마 군인도 주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였다(54절). 이처럼 진노의 인간조차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는 것이다."
마 27:55-66
4. 예수 그리스도와 그 친구들(27:55-66)
주님께서 구속 사역을 끝마치셨을 때, 그리스도는 다시는 적들의 손에 닿지 않으셨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담당하신 동안 하나님은 인간이 죄악을 행하도록 버려 두셨으나 그 일이 끝나자,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친구들로 하여금 그를 돌보도록 하셨다. 요셉과 니고데모는 신자들이었음이 분명하다. 그렇지 않고는 예수님의 시신을 장사지냄으로서 유월절을 더럽히려고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들은 더이상 유월절 어린 양을 필요로 하지 않았으며 하나님의 어린 양을 발견하였던 것이다. 니고데모는 주님의 사역 초기에 주님을 만나러 밤에 왔었으며(요 3장), 공회에서 주님을 옹호하였다(요 7:45-53).
니고데모와 아리마대 요셉은 공회가 제안한 “상고하여 보라“(요 7:52)는 일을 실행했을 것이다. 그들이 구약 성경을 상고하였을 때 성령의 조명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고난과 영광을 이해했을 것임이 분명하다. 다니엘의 예언에서 주님이 언제 죽으실 것인가를 이해했을 것이며 다른 성경들을 통하여 왜, 그리고 어떻게 죽으실 것인가를 이해했을 것이다. 이렇게 하여 이들은 무덤과 향료를 준비하였으며 예수께서 죽으시자 곧바로 손을 쓸 수가 있었다. 하나님은 그의 섭리 안에서 이처럼 자신의 아들의 시신을 돌보셨으며, 그리하여 이사야 53장 9절이 성취되었다.
유대의 지도자들은 제자들이 잊어버린 것을 기억해 냈다. 곧, 그리스도가 3일후에 무덤에서 나올 것이라는 약속이었다. 사단과 그의 자녀가 성경을 그리스도인들보다 더 잘 안다는 것은 얼마나 불행한 일인가! 유대인들은 그리스도를 “사기꾼“이라고 불렀는데 이들은 어느 날인가 그 민족이 간교한 사기꾼인 적그리스도를 영접할 것과, 그와 언약을 세울 것을 거의 모르고 있었다. “너희가 할 수 있는 대로“라는 말은 빌라도가 말할 수 있는 전부였다. 그러나 이 땅의 인봉은 주님께서 약속하신 대로 무덤에서 나오는 것을 방해할 수는 없었다.
▣ 마태복음 27장 32절에 대한 추가 연구
로마 군인들에게는 어떤 임무를 수행하기 위하여 아무 시민이라도 “징발“할 수있도록 허용되어 있었다. 그리고 시민들은 순종해야만 했다. 구레네 시몬이 십자가를 질 때 부끄러움에 가득 찼을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리스도와의 이러한 대면이 그의 생애를 변화시켰을 것이라고 믿는 것이 불합리한 것은 아니다. 어떤 이들은 로마서 16장 13절과 마가복음 15장 21절에서, 그리스도인이 된 시몬이 그의 아들들을 주님께로 인도했음을 시사한다고 본다."
======================
마 2
▣ 그리스도의 부활-마태복음 28장-
이 장은 왕의 부활에 대해 기록하고 있는데, 이것은 복음의 위대한 절정 부분이다.
1. 그리스도의 부활의 중요성
1)부활은 주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명한다(요 10:17-18).
2)부활은 성경의 진실성을 증거한다(행 2:31/시 16:10).
3)부활은 우리가 죽을지라도 장차 부활할 것을 확신시킨다(살전 4:14-).
4)부활은 사악한 자들이 받을 미래의 심판을 입증한다(행 17:30-31).
5)부활은 복음의 핵심적인 진리이다(고전 15:1-6).
6)부활은 우리가 받을 미래의 유업의 기초이다(벧전 1:3-).
7)부활은 그리스도의 하늘의 제사장 직분의 기반이다(히 7:23-28).
8)부활은 그리스도인의 생활에 능력을 준다(갈 2:20/엡 1:18-20).
2.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증명
1)그리스도의 부활은 역사적인 사실로 받아들여지고 있으며 주님의 부활에 의문을 제기하거나 부인하는 사람은 그가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지 않았다는 증거를 제시해야만 한다. 그리스도를 십자가에서 멸망시키려 했던 그 사단은 이제는 사람들이 그리스도께서 아직 죽어 있다고 믿기를 원한다. 유대인과 군인들 사이에 마태복음 28장 11-15절의 소문을 퍼뜨린 장본인이 바로 거짓말장이인 사단이다.
2)그리스도의 인격은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할 것을 요구한다. 하나님의 아들로서 주님은 죽음의 주관을 받으실 수는 없는 것이다(행 2:24).
3)그리스도는 죽은 자로부터 부활하시겠다고 약속하셨다. 주님의 덕스러운 생활은 주님께서 언제나 진리를 말씀하셨음을 입증한다. 그의 원수들조차도 그에게서 아무런 잘못을 찾아내지 못했다. 주님은 무덤에서 나왔든지 아니면 거짓말장이였든지 둘 중의 하나이다.
4)목격자가 그리스도를 보았다고 증거하였다(눅 24:33-36/요 20:19/요 20:26)/ 행 1:3/행 21-22). 500명 이상의 사람들이 동시에 그리스도께서 살아 계신 것을 보았다(고전 15:6). 어떤 불신자들은 이 초기 목격자들이 “최면“에 걸려 있었거나 또는 “스스로 만들어 낸 환상“으로 괴로움을 당하고 있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500명이 동시에 바보가 될 수 있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5)초기 신자들의 변화된 생활은 주님이 죽은 자들로부터 살아나셨음을 입증한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이 부활을 기대하지 않았다고 본다 해도 그들의 생애에 일어난 괄목할 만한 변화는 그들이 그리스도를 만났다는 점에 대한 증거가 된다. 베드로는 한 때 무서워 떠는 겁장이였으나 다음에는 위대한 설교자가 되었다.
6)바울의 개종은 그리스도께서 살아 계심을 입증한다(행 9장). 만일 환상이나 신화였다면 이 헌신적인 유대 랍비를 그리스도의 열정적인 설교자로 변화시킬 수는 없었다.
7)신약성경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 교회가 지속되어 온 일, 주일날을 중시해 온 역사 등은 모두 그리스도께서 살아 계시다는 증거이다.
8)물론 가장 훌륭한 증거는 죄인이 회개하는 것이다. “주님이 살아 계심을 어떻게 알 수 있느냐고요? 그분은 나의 마음 속에 살아 계십니다!“"
3. 빈무덤
우리는 그리스도께 헌신적이었던 이 여인들을 칭찬하지 않을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이들이 빈 무덤을 보며 천사들로부터 부활의 소식을 듣게 하심으로 이들의 사랑에 보상하셨다. 돌은 그리스도께서 밖으로 나오실 수 있도록 굴러간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보고 주님께서 안 계신 것을 알게 하기 위해 굴러갔다! 부활의 참된 멧세지는 “와서 보라... 가서 말하라!“는 것이다. 신자들에게 있어서는 매 주일이 부활의 날이다.
무덤 안의 세마포는 누에고치의 껍데기와 같이 그리스도의 몸의 형체대로 거기 있었던 것을 명심하자. 이것은 주님의 시체를 누군가 훔쳐간 것이 아님을 입증한다. 주님은 수의를 통과하여 부활하셨고, 세마포만 남겨졌다. 만일 시체가 도난당하였다면 친구들이나 원수들이 훔쳐갔을 것인데, 만일 친구들이 가져갔다면 거짓말을 위하여 자기의 생명을 기꺼이 내놓지는 못했을 것이다."
4. 지상명령(28:16-10)
마태복음에 나오는 산의 장면에 주목한 일이 있는가? 5-7장에서는 산상설교가 베풀어졌고 17장에서는 변화가, 감람산에서는 24-25장의 예언들이 행해졌다. 27장의 갈보리산에서는 십자가에 달리셨으며, 이제 제자들과의 마지막 만남이 갈릴리의 어느 산에서 이루어졌다. 이 구절에 나오는 “만국“(보편성)이라는 말에 유의하자.
1)모든 능력(권세)-이분은 이제 더이상 갈릴리의 비천한 하층민이 아니라, 전능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통하여 그리스도는 사단과 죄와 사망을 정복하셨으며, 그 손에 모든 권세를 받으셨다. 마태복음 4장 8-10절에서는 사단이 그리스도를 산으로 이끌어 세상의 모든 나라들에 대해 제의하였다. 이제 갈릴리산에서 그리스도는 모든 능력을 갖고 계시다는 것과 사단을 패배시키셨음을 선포하셨다.
2)모든 민족-“제자를 삼으라“는 말은 사실상 “가르치라“는 의미이다. 이것은 모든 민족에게 복음을 전하라는 사명인데, 10장 5-6절에서 오직 유대인에게만 전하도록 한정되어 있던 것으로부터의 뚜렷한 변화를 보여 준다. 복음 전도만이 그 사명인 것은 아니다. 사람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한 후에는 세례(침례)를 주어야 하는데, 이는 지교회의 회원으로서 교제하는 것을 나타낸다. 또한 이들은 가르침을 받아야 하는데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가르치는 것을 나타낸다.
우리의 사명이 다만 “영혼들을 인도하는 것“만이 아니라, “제자를 삼는 것“임을 명심하자. 주님께 인도하여 그리스도인의 교제를 하게 하며 믿음으로 육성하는 일을 지교회보다 더 잘 감당할 수 있는 기관은 없다.
3)모든 것-제자란 배우는 사람이며 이들에게는 “예수께서 분부한 모든 것“을 배워야만 한다. 이 말에는 하나님의 말씀 전체가 포함되어 있다. 사람은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아야 한다.“ “모든 성경은 ...하기에 유익하다.“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전체 뜻을 가르치지 않는 교회는(행 20:27) 지상 명령을 순종하는 것이 아니다.
4)항상-“내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 !“는 것은 굉장한 약속이다. 마태복음 1장 23절에서 주님은 “임마누엘“이라고 불리웠는데, 이 말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이다. 여기서 주님은 그 이름을 재확인하신다. 주님은 그의 성령을 통하여, 말씀을 통하여, 섭리하시는 돌보심을 통하여, 우리와 함께 계신다. 이 말씀은 리빙스턴으로 하여금 가장 암흑의 대륙인 아프리카의 한복판으로 가게 한 약속이었고, 시대를 통해 내려오며 그리스도의 사자들을 격려하고 능력을 준 약속이었다.
마태복음은 그리스도의 복음과 아울러, 모든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할 그리스도인의 책임에 대해 언급하며 끝맺고 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니며, 모든 사람이 적어도 한 번은 복음을 들을 기회를 갖게 되는 것도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