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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나는 내가 언제 죽을지는 모르고 내가 죽는다는 사실만 안다. 나도 죽고 당신도 죽는다. 그런데 사람들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자신의 마지막을 마주하지 않으려고 한다. 그러나 죽음에 대해 올바른 관점을 가질 때에만 삶에 대해 참된 관점을 가질 수 있다. 죽음은 인생 여정의 의미를 밝혀주는 목적지다. 우리가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지 확실히 안다면 그곳에 도착하기 전에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 확실히 알 수 있다. 전도서는 마지막을 염두에 두고 우리의 우선순위와 목표, 우리의 가장 종요한 열망과 가장 깊은 욕구를 빚으라고 요청한다. 죽을 준비가 되어 있을 때에만 정말 어떻게 살지 배울 수 있다.
제 1 장. 흉내 놀이(전 1장 1-11절)
‘흉내 놀이’의 세계와(아이들의 소꿉놀이) 진짜 세계는 차이가 있다. 전도서는 실제 세계에서 살도록 돕는다. 전도서는 믿는 척하기 게임을 날려버리는 도구처럼 작동한다.
“헛되다.”(1장 2절. 히, 헤벨)는 말은 ‘무의미하다’고 번역하나 정확히는 ‘숨, 바람’이라는 의미다. ‘안개, 수증기, 연기 한 가닥’ 등의 뜻이다. 그 의미는 ① 삶이 짧다는 것이다. 연기는 실재하나 일시적이고 금방 사라진다. 영원한 영향력, 지속적인 흔적을 남기지 않고 나타났다가 사라진다. ② 삶은 불가사의하다는 것이다. 연기는 실재하지만 움켜잡아 주머니에 넣고 나중에 쓰기 위해 간직하려고 해보면 손가락을 비켜간다.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많이 일어난다.
⇒ 시 103편 15-16절. 인생은 그 날이 풀과 같다. 사람들은 적어도 자기 말고 다른 사람이 암에 걸릴 거라고 상상한다. 자신의 삶은 모래가 아니라 화강암으로 지어졌다고 생각한다. 1장 3절, “무엇이 유익한가?” 크게 망가진 세상에서 살아 있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가? 내 모든 수고의 영원한 기념물로 나는 어떤 소중한 것을 남길 것인가? 우리의 삶은 가냘픈 숨이다.
1장 9절. “해 아래에는 새 것이 없나니” 사람들은 새로운 것을 갈망하나 전도자는 우리를 만족시킬 새로운 것은 없다고 한다.
⇒ “해 아래에”는 세속주의자의 관점이라고 하지만 그것이 아니고 세상이 이렇다고, 이것이 현실이라고 신자든 무신론자든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다고 말한다. ‘해 아래’는 공간 표시가 아니고 시간 표시로 보는 것이 더 낫다(창 1장 14절, 해 – 시간 표시). “저 곳이 아니라 지금을 가리킨다.” 인생은 짧고 죽음을 준비할 때 우리는 어떻게 살지 배울 수 있음을 가르친다. 해 아래, 즉 이 세상에서, 자신이 묻힐 세상에서 우리가 살고 있다는 것은 피할 수 없는 현실이다. 전도자는 죽음의 현실이 뼛속까지 파고들어 우리 마음에 깊이 자리 잡기를 바란다. 우리가 지상에서 사라질 날이 신속히 다가온다는 현실이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과 그 세상 속에서 자신을 이해하는 방식에 속속들이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이 삶을 배우는 첫 걸음이다. 인간이 되는 것은 피조물이 되는 것이고, 피조물은 유한한다. 사람들은 결코 영원하지 않은 것(우리)을 영원하게 만들려고 애쓰고 결코 통제되지 않는 것(세상)을 끊임없이 변화를 통해 통제하려고 애쓴다. 전도서는 그런 시도를 뒤로 하라고, ‘흉내 내기’ 놀이를 중단하고 그 대신 역사나 창조 세계를 스승으로 삼으라고 한다. 세상의 리듬 자체가 우리가 사람으로서 창조 질서의 일부가 된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보여주는 나침반이다. 색다른 것에 의미와 행복과 만족이 깃든다는 생각을 멈추어야 한다. 어느 날 우리는 죽어서 사라질 것이고 세상도 우리를 기억조차 하지 못한 채 계속될 것이다. 우리가 죽고 100년 후, 우리가 살았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제 2 장. 거품 터뜨리기(전 1장 12절 - 2장 26절)
신자가 된다는 것은 이 세상에서 나그네와 부적응자가 되는 것이다. 우리는 이 세상에 영원한 뿌리를 내리지 않고 참된 소속감을 이곳에 두지 않는 여행객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유목민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세상과 동화되어 거주민 그리스도인이 되려고 한다. 이 세상의 좋은 것들을 아주 단단히 붙잡으려고 한다.
전도자는 거품을 터뜨리는데 거품을 터뜨리기 위해 사용하는 뾰족한 바늘은 죽음이라고 한다. 죽음은 모든 인간이 지상에서 일을 추진할 때 맞닥뜨리는 중요한 현실이다. 사람은 죽음이라는 필연을 생각에서 지우고 직면하지 않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인다.
그런데 미래의 죽음은 현재의 삶을 완전히 무의미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삶을 변화시키려고 현재에 비추시는 빛이다. 죽음은 철저히 삶을 즐길 수 있게 하고 삶을 선물로 받아들이는 심오한 기쁨을 발견하는 사람이 되게 한다. 하나님의 세상에서 삶은 선물이다.
인간의 거창한 추구. TV 광고 가운데 “햄릿 담배는 행복입니다.”가 있다. 블레즈 파스칼은 “모든 사람은 행복을 추구한다.”고 했다. 사람들이 하는 거의 모든 일은 자신을 행복하게 만들기 위한 것이다. 우리 삶의 표면과 가장 심층에서, 우리는 행복을 갈망하고 행복을 위해 살아간다. 2장 1절에 “너는 낙을 누리라.”라고 하였다. 인생의 만족과 의미를 얻기 위해 지혜, 웃음, 즐거움, 술, 큰 사업, 소유물에 몰두한다. 그래서 손에 쥐었지만 행복이 물처럼 손가락 사이를 빠져나가 훨씬 악화되었다. 자신의 제국을 살펴보니 모든 게 허무하고 무의미하여 바람을 잡으려는 것과 같다.(2장 11절) 행복이란 사라지는 수증기다.
인간의 영원한 문제.(죽음) 전도서 2장 14절에 “그들(어리석은 자, 지혜로운 자) 모두가 당하는 일이 모두 같다”고 하였다. 죽음은 지혜로운 자와 어리석은 자 모두를 괴롭힌다. 그들은 자신들의 인생에서 제각각 무언가를 이루지만 머지않아 구별되지 않을 것이다. 2장 16절에 “지혜자도 우매자와 함께 영원하도록 기억함을 얻지 못한다.”고 했다. 모두에게 “죽음”이 있기 때문이다. 언젠가 죽음이 오는 것을 생각하여 우리가 하는 일이 대체 왜 중요한지 의문을 품지 않는다면 죽음의 현실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차분히 앉아 죽음을 정면으로 맞닥뜨려보아야 한다. 파스칼은 “인간 불행의 유일한 원인은 자기 방에 조용히 머무는 법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고 하였다. 파스칼은 “열정 없이, 일거리 없이, 오락 없이, 응용 없이, 완전한 휴식 상태에 있는 것만큼 사람에게 견디기 힘든 것은 없다. 그때 사람은 자신의 무가치함, 자신의 버림받음, 자신의 부족함, 자신의 의존성, 자신의 무력함, 자신의 공허함을 느낀다. 자기 영혼의 깊이를 감당하지 못하니 권태, 우울, 비애, 슬픔, 원한, 절망은 솟아오를 것이다.” 고 말한다. 사람의 문제는 죽음이 우리 모두에게 닥친다는 것이다. 우리 가운데 누구도 영원하지 않고 우리가 하는 일도 영원하지 않다. 우리는 죽을 것이다.
인간의 참된 관점. 전도자의 처방은 2장 24절에 사람이 “먹고 마시며 수고하는 것”이라고 한다. 이것은 그에게 존재하는 전부이기 때문이 아니고 그것이 “거기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죽음은 피조물로서 우리의 한계에 맞추어 우리를 재설정해주고, 우리 삶에서 항상, 매일, 날마다 바로 우리 앞에 있는 하나님의 좋은 선물을 보도록 도와준다. 이런 선물 안에 살면서 그 속에서 하나님의 손길을 느낄 기회를 얻는다. 전도자의 전체 요지는 세상이 내게 맞추는데 이용될 수 없고, 삶은 지배가 아니라 누리기 위한 것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2장 24-26절에 “하나님”이 연속적으로 세 번 언급이 되고 하나님이 주시는 것에 강조점이 있다. 24절, “하나님의 손에서 나오는 것” 26절, “하나님은 그가 기뻐하시는 자에게는 지혜와 지식과 희락을 주시나” “하나님을 기뻐하는 자에게 그가 주게 하시지만” 하나님이 우리에게 기쁨을 주셔야지 그것 자체는(예. 집, 차 등) 우리에게 만족을 주지 못한다. 전도자는 우리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이웃과 올바른 관계를 맺게 해주는 세상 속 존재 방식에 깊이 몰두해 있고, 인간의 모든 행복은 창조주와 올바른 관계를 맺도록 만들어진 의존적인 피조물이라는 자신을 진실하게 볼 때 온다고 말한다.
제 3 장. 이런 때, 저런 순간(3장 1-22절)
1절,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만사가 다 때가 있나니”
2절, “날 때가 있고, 죽은 때가 있으며 …”
우리의 삶은 전부 서로 맞물려 우리 개인의 이야기를 구성하는 서로 다른 수많은 조각, 곧 사람, 사건, 환경, 시간, 장소로 이루어져 있고 가끔 작은 조각 이야기의 의미는 나중에야 깨닫는다(레고 조각처럼). 레고와의 차이는 우리의 삶은 펼쳐진 조립 설명서가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께는 있다. 3장 1-8절은 세련된 문학 기법으로 반대 극단을 나란히 두고 있다. 그 가운데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다.”는 표현이 삶 전체를 담아낸다. 삶과 죽음이라는 큰 그림을 서술한 다음의 나머지 내용은 우리 대부분이 한 두 번 이상 관여하거나 접하는 다양한 삶의 경험과 온갖 인간 활동이다.(전체는 14쌍, 28개 항목임) 그 내용은 관계성을 가지고 있다. 우리 인생의 계절을 얽혀 있는 관계망 밖으로 빼내려고 한다면 우리의 삶은 무미건조해지고 단조로워질 것이다. 우리의 시간은 해와 달의 패턴에 따라 인생의 계절을 정하지 않고 딸과 자매가 되는 때, 아내와 연인, 그 뒤 엄마와 할머니, 또 미망인이 되는 때에 의해 표시된다. 이것들이 하나님이 주시는 계절이다. 우리는 이런 일 가운데 어느 것도 통제할 수가 없다. 9절에 이 모든 것이 “무슨 이익”이 있는지 묻는다.
위로와 도전(9-22절). 죽음을 준비함으로써 사는 법을 배우는 길 하나는 죽음은 심판을 의미하고, 그것이 유익한 일임을 깨닫는 것이다. 이 깨달음은 나의 현재 행동에 의미와 무게를 더해 주고, 내가 경험한 상실과 불의가 하나님 앞에서 목소리를 내게 해준다. 과거사는 과거의 것이지만, 하나님은 과거사를 잊지 않으신다. 일어나는 모든 일 하나하나가 법정에 설 날이 있을 것이고, 그것은 위로와 도전을 동시에 준다. 14절에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모든 것은 영원히 있을 것”이고 11절에 “하나님은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다. 내 인생의 다양한 때는, 나는 볼 수 없을지라도 전체를 아름답다고 여기시는 선하고 지혜로운 하나님은 보실 수 있는 더 큰 그림의 일부다. 사람은 그 그림에 아주 제한적으로만 접근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 지혜다. 11절에 사람은 하시는 일의 시종을 측량할 수가 없다. 우리가 큰 그림을 이해하도록 만들어지지 않았다. 우리는 시간 속에 살기 때문이다. 세상 속에서의 성장은 작아지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아이들처럼 되기를 바라신다. 아이들은 자기들이 볼 수 없는 것을 부모들이 볼 수 있고, 자기들이 알 수 없는 것을 부모들이 알기 때문에 부모들이 가장 많이 안다고 믿는다. 부모가 선하고 지혜롭고 친절하면 아이는 처음부터 마지막을 볼 수 없더라도 두려울 것이 하나도 없다. 우리가 영원하신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는 이유다. 15절에 “하나님은 이미 지나간 것을 다시 찾으신다.” 우리에게 역사는 사라지나 하나님께는 그렇지 않고 과거를 현재로 가져와 결산하신다. 16절에 재판하는 곳에 악이 있고 정의를 행하는 곳에도 악이 있다고 하신다. 법정이라는 공간에서 적절한 시간에 정의가 시행되지 못할 때 창조 세계 질서 자체가 와해된다. 우리 안에는 정의를 향한 갈망이 내재되어 있다. 과연 정의가 시행되는 때가 있을까? 하나님은 모든 불의 하나하나, 모든 시간 하나하나, 모든 행동 하나하나를 회수하셔서 정의를 시행하시는 때가 있다. 이것이 위로다.
도전. 3장 17절, “의인과 악인을 하나님이 심판하시리니” 하나님께서 의인과 악인을 심판하신다. 하나님이 시간 밖에서 모든 것을 바라보시고 마지막에 의인과 악인을 모두 심판하실 것임을 알 때, 우리는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을 통제해야 한다는 의무감에서 벗어난다. 우리는 우리의 모든 때가 법정에 설 날이 있음을 알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우리는 안목을 갖고 지금 우리가 있는 이곳에 언제까지나 있지 않을 것임을 깨달아야 한다. 전도서는 만사가 때가 있음을 지금, 오늘, 배우라고 말한다. 그러면 적어도 하나님이 써 가실 내 삶의 장을 준비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다. 피조물로서 나의 실존적 한계를 받아들이고 하나님의 선하고 지혜로운 손에서 오는 내 인생의 계절을 받아들일 때(예. 봄이 오면 봄으로 받아들일 것), 내 마음에 만족이 깃든다. 이런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하나님의 선물이다.
제 4장. 낮아지는 삶(4장 1-16절)
존 스타인백, 『에덴의 동쪽』에서
- 「사람이 죽음에 이를 때, 그의 은사나 영향력, 천재성과 무관하게 사랑 받지 못한 채 죽는다면, 그의 인생은 자신에게 실패일 수밖에 없고 그의 죽음은 냉혹한 공포일 수밖에 없다.」
내 삶은 어디로 향하고 있는가? 이것은 현대 지성의 지배적인 질문이고, 우리가 줄곧 대답하려고 노력하는 질문이다. 저마다의 방식으로 이 질문에 답하면서 오늘 많은 시간을 보낸다. 이런 질문이 전혀 없을 수도 있다. 그냥 분주하게 손안의 업무에 집중할 수도 있다. 사람들은 자신의 생각과 계획을 자기 자신으로 채우고, 세상을 항해 하면서 의미와 행복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을 끊임없이 고안해내는데 전도자는 바로 그것이 고통의 근원이라고 말한다.
전도자가 사용하는 단어는 4장 6절에 “평온함”이다. 이것은 ‘마음의 평화와 영혼의 안정’을 뜻한다. 이 단어는 세상에서 자기 자리를 알고, 자신의 삶의 경계선에 만족하고, 기쁜 마음으로 수고의 결실을 누릴 줄 아는 이들의 깊은 행복감을 포착하는데, 그런 안식의 자리에 이르는 길은 내가 아니라 우리를 위해 사는 것이다. 우리가 누리는 것을 나누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웃을 미워하여 자신을 파괴하는 것. 1절, “모든 학대를 살펴보았다.” 모든 시대 모든 곳을 막론하고 세상은 자기 사랑과 타인 증오로 가득 차 넘친다. 전도자는 지구촌 모든 구역에서 벌어지는 잔인무도한 폭력에 맞닥뜨려 있다. 그는 희생의 눈물을 보지만 닦아줄 사람은 보지 못한다. 학대 받는 약한 자를 옹호해줄 사람이 없다. 전도자는 세상을 실제 그대로 바라보고 있다. 신자로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복음과 고통의 세계를 연결시킬 때 결코 진부하거나 순진하지 않아야 한다. 세상은 우리 밑에 있는 이웃의 머리를 기꺼이 짓밟는 곳이다. 우리가 가질 수 있는 것이란 경제적 이익이 전부라고 생각하면서 이익을 추구할 때, 다른 사람들은 상처를 입을 것이다. 이것이 현실이다.
4절, “모든 수고와 모든 재주로 말미암아 이웃에게 시기를 받으니” 시기심은 오랫동안 7가지 대죄에 속했다. 친구라면 누구나 당신의 슬픔과 실패를 공유할 수 있지만, 당신의 기쁨과 성공을 공유하려면 진짜 친구가 필요하다. 사람들은 자신이 주목 받고 싶고 관심 대상이 되고 싶어 한다. 예수님은 내가 당신을 사랑해야 한다고 말씀하시지만 나는 종종 ‘어떻게 하면 당신이 소유한 것을 가질 수 있을까?’를 생각한다. 만일 당신을 향한 사랑 저변에 시기심이 있다면, 나는 당신을 학대하는데 가담하고 있는 것이다. 전도자는 인간의 마음 깊은 곳을 탐구한다. 이 모든 분투의 수고, 노력과 노력, 또 노력, 이 모든 것의 동기는 바로 나다. 나는 어떻게 빼앗는 자가 아니라 주는 자, 나 자신의 주인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종이 될 수 있는가? 이웃을 올바르게 사랑하는 것을 생각할 때 두 가지 극단을 막을 수 있다. 안일한 게으름과(5절) 병적인 분주함(6절)이다.
게으름. 게으름은 이웃을 미워하는 한 방법이다. 어리석은 사람은 결국 자기 살을 뜯어먹는다.(5절) 게으름뱅이는 삶을 받아들이고 자신을 타인에게 주는 대신 자기 자신에게만 몰두하고, 그 결과 그에게는 자기 자신만 남는다. 그들은 스스로 파멸한다. 광적인 분주함. 내일의 삶이 오늘의 삶보다 더 나아질 것이라고 생각한다.(이사. 승진. 학위 취득. 결혼 등) 왜 잠시 멈추어 진지하게 오늘을 누리지 않는가? 병적인 분주함은 기독교 사역의 고질병이다. 한계를 모르는 훌륭하고 경건한 복음의 과업을 달성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늘 해야 할 일이 더 있고, 그 일을 완수하지 못하면 영원한 죄책감을 안고 살게 된다. 마이클 호튼은 목회자들이 사역의 유산을 남기기 위해 여기 있는 게 아님을 상기시킨다. 우리에게는 어떤 유산도 없다. 그리스도께서 죽음을 통해 시행하시고 이제 말씀과 성령을 통해 하늘로부터 나누어 주시는 유산, 즉 언약을 갖고 있다. 목회자가 깨달아야 할 것은 자기들은 “왔다가 가지만, 유산은 계속 확산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유진 피터슨은 자신의 회고록에서 “메시아 바이러스”에 감염되었음을 깨달았다고 기술한다. 그는 사람들의 구주가 되어 그들의 모든 필요 하나하나를 주시해야 한다는 병든 사상의 숙주가 되었을 뿐, 하나님이 사람들의 삶에서 하고 계시는 일에 주목하도록 돕지 못했다고 고백한다. 당신이 소유하리라고 생각하지만 전혀 통제할 수 없는 삶을 갈망하는 대신, 지금 당신이 소유한 삶을 살라.
내 이웃을 사랑하여 나 자신을 사랑하는 것(7-12절). 전도자는 회사 최고 경영자를 우리에게 소개한다. 그는 줄곧 정상을 차지했지만, 거기서 혼자 살고 있다. 그에게는 아이도 없고, 가족도 없고, 친구도 없고, 유일한 동료는 그의 일과 재산이다. “그는 레스토랑에서 모든 사람을 위해 음식을 살 수 있지만 그의 곁에 앉으려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전도자가 보기에 인생의 가치는 사람이 벌어들이는 수입이 아니라 관계 맺는 사람들에게 있다. 인생의 가치는 당신이 구입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주는 것에 있다.(4장 9-12절) 열심히 일하는 것은 잘못이 아니다. 그런데 누구를 위한 것인가? 전도자는 우리가 하는 모든 일 가운데서 우리에 자신만을 위해 살고 있지 않은지 묻고 있다.
제 5 장. 올려다보고, 경청하기(5장 1-7절)
성경에 의하면 하나님은 자신의 세상에서 온전한 예배를 찾으신다. 신 6장 4-9절. 하나님은 유일한 여호와이시고, 반드시 온전한 인격이 그분께 다가가 예배해야 한다.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즉 당신의 모든 것으로 말이다. “경청하라” 이 점에서 전도자는 신명기의 모세와 신약의 주 예수님 자신과 연결된다. 신명기 6장 4절의 첫 단어는 “들으라.”다. 네가 경청하는데 도움이 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해서, 하나님의 말씀이 네 귀를 통해 들어가 네 의식 과정 안에 자리 잡고 한 인격으로서 너의 확고한 일부가 되게 하라고 모세는 말한다. 그분의 계명이 네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에 스며들게 하라. 귀는 그리스도인의 일차적인 감각기관이고, 그 귀로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하는 것이 우리의 주요한 영적 훈련이다. 삶은 선물이고, 하나님의 말씀은 다른 모든 것보다 존중하고 사랑하고 중시해야 할 가장 귀중한 선물이다. 전도서는 우리의 눈을 하나님의 세계에 사용함과 동시에 우리의 귀를 하나님의 말씀에 사용해야 할 필요성을 일깨우는 하나의 긴 묵상이다. 세상은 타락했고, 우리가 완전히 만족할 만큼 세상을 해석하기란 불가능하다. 당신이 항상 세상을 읽을 수는 없다. 하지만 당신은 성경을 읽을 수 있다. 그리고 당신이 성경을 읽을 때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경청하라.
하나님의 말씀 경청하기(1-3절). “가까이 하여 말씀을 듣는 것이 우매한 자들이 제물 드리는 것보다 낫다.” 5장에서는 카메라 렌즈가 종교적 예배에 집중된다. 전도서는 외과의사의 메스를 조용히 들이댄다. 자신들이 전부 알고 있고 또 자신들의 생각과 자신들이 해야 할 말이 하나님의 말씀보다 훨씬 흥미롭고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식의 예배는 한낱 말의 낙서일 뿐이다. 그들은 “악을 행하면서도 깨닫지 못한다.” 그들은 하나님을 속이는데 너무 익숙해져 있다. 꼼수가 일상이다. 그것이 사는 방식이고 하늘에서 한 번도 천둥이 떨어지지 않았기에 틀림없이 그런 식으로 계속 미적거려도 된다고 생각한다. 5장은 4장과 연결된다. 4장은 학대 문제를 다루고 있고 5장은 예배를 말한다.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예언자들로부터 사도 바울까지, 이웃을 학대하고 오로지 자기만을 섬기면서도 기도 모임에 나타나 만사형통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을 시종일관 비판한다. 전도자는 우리를 똑바로 바라보고 하나님께 다가가는 것이 위험할 수도 있음을 말한다. 하나님이 당신의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 그리고 또 당신이 자기 아내나 자기 동료나 자기 가족을 대하는 방식에 대해 정말 관심이 없으시다고 생각하면서 그분께 다가간다면 말이다. 생각에 앞서 입을 떠벌리거나 말하지 말라. 그분을 올바로 경배하려면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필요하고, 그분이 어떤 분이시고 그분이 무엇과 같은지 보여주는 계시가 필요하다고 전도서는 가르친다.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나는 땅에 있으며, 이 엉망의 상황을 내가 당신보다 더 많이 이해하고 있지 못하다는 엄숙한 사실을 겸손하게 인식하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 우매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하는 대신 자신의 말을 쏟아낸다.
하나님께 말하기(4-7절). 하나님께 드리는 우리의 말에 초점을 맞추는데 당신이 무언가를 하겠다고 하나님께 말했다면, 실행하라. 하나님은 어리석은 수다를 전혀 기뻐하지 않으신다. 명세했다면(서약) 그대로 실행하라. 하나님은 하늘에 계셔서 의로운 자와 악한 자를 모두 심판하실 것이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보고 듣고 아신다. 한 분이신 하나님은 온전한 예배자를 원하신다. 여기에 대고 ‘예. 예’라고 말하고 저기에 대고 ‘아니. 아니’라고 말하지 않는 예배자, 자기 진심을 말하고 자기 말이 진심인 그런 사람. 하나님께 얘기하거나 다른 사람에게 얘기할 때 단순함이 우리의 진정성을 보호한다. 정직한 신자들은 어떤 종류의 맹세나 서약에 의지할 필요가 없다. 하나님의 실재를 매일의 삶에 적용한다. 하나님이 하늘에 계셔서 내 마음을 펼친 책처럼 자기 앞에 펼치시는 하나님의 실재와 더불어 살 때 그분을 경외하며 서 있는 것이다.
제 6 장. 삶의 한계를 사랑하는 법(7장 1-25절)
두 가지 선택지가 있다. 하나는 다 이해할 수 없음, 죽음, 불의, 학대가 있는 현실에서 문제를 회피하는 방식이다. 도피주의의 길이다. 7장에서 제시하는 또 하나는 모든 부조리 한복판에 있는 하나님의 세상에서 지혜롭게 사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7장은 지혜 자체의 한계와 더불어 사는 법을 배우라고 한다. 죽음과 파멸의 전화벨이 언제나 울릴 수 있는 것이 우리 인생의 한계다. 죽음이 우리에게 초대장을 내밀고 있다는 것과 지혜는 선하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죽음의 초대(1-6절). 삶은 죽음에 의해 제한된다. 죽음은 우리에게 메시지를 전하는 전도자다. 죽음에는 우리를 향한 초대가 있다. 죽음이 우리의 삶에 가져오는 한계 자체가 삶에 대해 가르쳐준다. 좋은 이름이 좋은 기름보다(저녁 파티보다) 낫다(1절). 하지만 “죽는 날이 출생하는 날보다 낫다”(1절)는 것은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아이가 태어나면 기쁨을 준다. 그러나 아이가 얼마를 닮았다는 등, 간단한 얘기밖에 할 말이 별로 없다. 전도자는 사망일이 출생일보다 더 훌륭한 교사라고 한다. 그 사람이 죽으면 그 생에 대해서 많은 얘기가 나온다. 생명보다 죽음이 낫기 때문이 아니라 아기 침대보다 관이 더 나은 설교자이기 때문에 낫다고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정말 중요하지 않았음에도 우리가 많은 시간을 들였던 그 일들은 이제 공허하고 의미가 없는 일처럼 보인다. 오히려 주고받았던 사랑이 훨씬 더 많은 의미를 갖는다. 장례식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 장례식이 끝나면 빨리 술집이나 가야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만취 상태에서 인생의 중요한 문제를 다루는 사람은 없다. 지혜로운 사람은 장례식장에 앉아 관을 바라보며 언젠가 자기 차례가 올 것임을 깨닫고 ‘죽음이 내 차례가 될 때, 내 삶은 어떤 가치가 있을까? 사람들은 나에 대해 뭐라고 말할까?’ 생각한다.
죽음은 피상적인 사람이 되지 말고 깊이 있는 사람이 되라고 초대를 한다. 어떻게 울지 아는 사람만이 참으로 웃음의 의미를 알 수 있다는 것이 전도서의 메시지다. 전도자는 훌륭한 죽음을 준비하는 것은 훌륭한 삶을 사는 것임을 깨닫게 한다. 하나님이 종료 시간을 알리실 것임을 알기 때문에 그들의 삶은 실제로 활기가 넘치고 세계와 자기 가정과 창조 세계의 선함에 참여한다. 죽음은 설교자의 옷을 입고서, 삶은 유한하고 우리가 삶을 제대로 활용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은 유한하니 그들을 더 깊이 사랑하고 그들을 제대로 사랑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지혜의 한계(7-25절). 네 가지 내용을 말한다. 탐욕, 조급함, 분노, 향수. 장례식장에 가서 죽음이 돈에 관해 전하는 설교를 경청함으로 마음의 부패를 막을 수 있는데, 돈으로 살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지 말라고 한다. 값어치 있는 것은 무엇이든 발전하고 자라는데 시간이 걸린다. 버럭 화를 내는 그런 사람이 되는 게 가치 있다고 생각하면 우매한 자다. 10절에 옛날이 오늘보다 낫다고 생각하는 것은 지혜가 아니다. 이 네 가지는 모두 도피주의의 변형이다. 탐욕은 우리의 책임에서 도피하게 하고, 조급함은 현실에서 도피하여 상황이 지금과 달랐기를 바라는 것이고, 분노는 우리가 바라는 대로 존재하지 않은 상황에 대처하지 목하는 무능에서의 도피다. 향수는 믿음 가운데 현재와 더불어 싸우거나 미래를 바라보는 대신 과거에 안주하려는 도피주의다.
제 7 장. 죽음에서 깊이로(9장 1-12절)
9장 7절은(“너는 가서 기쁨으로 네 음식물을 먹고 즐거운 마음으로 네 포도주를 마실지어다. 이는 하나님이 네가 하는 일들을 벌써 기쁘게 받으셨음이니라.”) 전도서의 핵심이다. 지금 당신이 누리는 삶은 하나님의 손에서 온 선물이다. 당신은 이 삶을 잠시 누릴 것이고, 어느 날 하나님은 종료 시간을 알리고 다시 가져가실 것이다. 오늘 아내와 함께 인생을 즐기라. 내일 아내가 없을지도 모르니. 혹은 당신이 없을지도 모르니.
인생에서 확실한 한 가지 사실(1-6절). 전도자는 인생에서 확실한 사실을 오래, 철저히, 면밀하게 바라보도록 요청하는데, 그것은 우리의 죽음이다. 전도자는 우리가 누구든 우리가 무엇을 했든 관계없이 죽음이 우리 모두에게 다가온다는 사실과 씨름하고 있다. 죽음은 냉혹한 현실이다. 죽음은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을 한꺼번에 데려간다. 살아 있다는 것은 우리가 죽었을 때 갖지 못할 기회의 날을 우리 손에 쥐고 있는 것(4절)이다.
잘 죽는다는 것은 신이 되고 싶어 하는 피조물에게 하나님께서 두신 한계가 죽음임을 깨닫는다는 뜻이다. 잘 죽는다는 것은 죽음이 단지 우연히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내가 죄인이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임을 깨닫는 것이다. 매번 관을 볼 때마다 세상은 타락하여 깨어져 있고 죽음의 저주 아래 있고 나도 그 일부임을 깨닫는다는 뜻이다. 잘 죽는다는 것은 내가 태어난 그 날부터 사형 선고 아래에 있었음을 깨닫고 내가 이 세상에서 소유한 모든 것을 언제든 놓을 수 있다는 뜻이다. 죽음을 준비하는 것은 어떻게 살지는 생각한다는 의미다.
인생에서 불확실한 여러 가지 사실(11-12절). 반대쪽 극단은 ‘불확실함’이다. 경주는 빠른 사람에게 유리하고 싸움은 강자에게 유리하다. 그러나 항상 그런 것은 아니다. 정황이 변하고 예상치 못한 사건이 일어날 수 있다. 해 아래에서는 어떤 한 사건이 우리의 치밀한 계획을 바꾸어 놓을 수도 있다.(12절)
전도자의 대답은 단순하다. 언젠가 당신이 죽는다면, 오늘을 살라. 당신이 언제 죽을지 모른다면, 할 수 있을 때, 바로 지금을 살라. 삶의 여정을 따라가는 지혜의 길은 하나님의 당신에게 주신 선물을 즐기는 것이다.
인생에서 지혜로운 단순한 사실(7-10절). “기쁘게 즐겁게 먹고 마시라.” 7절 하반 절, “하나님이 네가 하는 일들을 벌써 기쁘게 받으셨음이니라.” 하나님은 당신의 즐거움을 하나님 자신의 즐거움으로 받아들이신다. 하나님이 당신에게 즐거움을 주셨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선물을 주실 때,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기뻐하신다는 표이다. 하나님의 선한 선물에 대해 올바르게 응답하는 방법은 음식과 포도주와 가족이라는 선물을 즐기는 것이다.(8절) 사랑하는 배우자와 함께 인생을 즐기고 하나님이 당신에게 주신 사람을 소중히 여기고 보호하라. 만약 당신이 바빠서 두 사람이 공유한 삶을 즐기지 못한다면 바빠도 너무 바쁜 것이다. 그러면 서로를 잃는다. 하나님은 손과 음식과 음료와 문화와 아름다움이 어우러진 물리적 세계 속에 당신을 두셨다. 할 수 있을 때 그 일을 하라. 자신이 죽어가고 있음을 제대로 아는 사람이 가장 활기차게 살아가는 사람이다. 우리는 영원히 살기 위해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니고 지금을, 오늘을 살기 위해 여기에 있고, 무엇보다 여기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또 그들을 위해 산다.
당신은 창조 세계에서 자신이 숭배하지 않는 것만 참으로 즐길 수 있다. 섹스를 신으로 삼고 그것을 숭배하는 남성은 실제로 정상적인 즐거움이 불충분하고 부족하다고 느껴 도착적인 것만 즐기는 습성에 사로잡힌다. 당신이 하나님의 선물을 숭배할 때 그 선물은 자신이 약속한 것을 결코 전해주지 못하고 그 대신 공허하고 무너진 상태에 당신을 남겨둘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분의 나라로 기꺼이 맞아들이는, 우리가 즐길 가장 성대한 잔치를 벌여 환영하는 주인과 같으시다. 죽음과 질병과 불확실성과 재난과 슬픔과 비탄 이 모두는 이 땅에서 안전을 추구하지 않도록 우리를 떼어놓기 위해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수단이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은 우리로 하여금 하늘에 대한 향수를 품게 한다. 하나님의 선한 세계는 다른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즐기기 위해 존재하고, 우리는 나중에 함께 먹을 것을 기대하며 지금 먹고 마신다. 모든 음식은 앞으로 올 잔치의 맛보기다. 그리스도가 없는 이들이 종종 먹고 마시는데 탐닉하는 이유는 그것만이 그들이 죽기 전에 해야 할 전부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이들이 먹고 마시는 것은 우리가 죽은 뒤에 할 일과 약간 비슷해 보이기 때문이다. 이 선물의 냄새와 맛과 느낌은 본향의 그것과 비슷하다.
제 8 장. 무지할 때 알아야 할 것들(11장 1-6절)
관점. 우리가 인생에서 벌어지는 일을 바라보는 관점에 영향을 주는 것은 무엇인가? 신문? TV? 성경의 지혜 문학은 세상을 바라보는 우리의 관점을 변화시키기 위해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한 가지 방법이다. 전도서는 인생을 죽음의 관점에서 생각하라고 가르친다. 무덤 곁에 서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배우라. 우리가 젊음을 생각해야 하는 시점은 노인이 서 있는 그 지점이다. 전도서는 해 위 삶의 관점에서 해 아래의 삶을 생각하고, 영원의 관점에서 시간에 대해 생각하라고 한다. 또한 전도서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것의 관점에서 우리가 아는 것을 바라보라고 한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세 가지. ① 우리의 미래가 어떻게 될지 알지 못한다.(1-2절) 미래는 예측할 수 없다. ②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 어떻게 이루어질지 알지 못한다.(5절) 아는 척 하는 것은 지혜가 아니라 어리석음이다. ③ 어떻게 성공이 보장되고 실패를 피하는지 알지 못한다.(6절)
우리가 아는 세 가지. ① 지혜로운 삶은 재산에 구애 받지 않고 관대하게 베푼다.(1-2절. 일곱에게나 여덟에게 나눠 줄지어다) 인생의 소유에 구애 받는 사람은 지혜롭지 못하다.(눅 12:16-21) 예수님의 죽음은 삶을 완전하게 내어주신 것이고, 그로써 다른 사람에게 생명을 주신다.(요12:24. 한 알의 밀) 그것이 우리 삶의 모범이다. 무엇을 얻는 길은 그것을 주는 것이다. 아낌없이 나누어주라. ② 지혜로운 삶은 성공도 실패도 최종 목표가 아니다. 사람의 마음의 큰 욕망 중 하나는 성공에 대한 갈망이다. 어떤 사람은 위험과 실패 가능성만 보는 경향이 있어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 일종의 죽지 않은 상태의 삶이 있다. 성공에만 매달려 활력을 얻지만 예측 불가능한 일에 대한 여지가 전혀 없는 삶이다. 그것은 진정으로 살아 있는 게 아니다. 삶은 수익이 아니고 선물이니 누리려고 해보라. ③ 지혜로운 삶은 그 자체가 보상이다. 사람들은 종종 삶은 자신의 것이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선물을 주시며 더 많은 보상을 얻기 위해 하나님의 선물을 사용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부나 성공의 선물을 얻기 위해 일을 사용해야 한다고 생각하나 전도자는 일 자체가 그냥 누려야 할 선물이라고 한다. 친구는 자체가 선물이다.(이용하지 말 것)
죽기 전에 꼭 하고 싶은 일을 담은 버킷리스트(bucket list. 죽기 전에 하고 싶은 일들을 담은 목록)를 실천하라. 삶은 한 번 뿐이니 지금 그렇게 하라.
제 9 장. 한 발은 무덤에(11:7-12:8)
나이가 들면 거울과 마음의 분열, 즉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보이느냐 대 우리가 자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의 분열이 일어난다. 젊음은 신속히 사라지고 온갖 어려움과 고통, 슬픔에 시달리는 계절인 노년에 접어들 것이다. 우리 사회는 이 불가피한 쇠락을 여러 가지 방법으로 처리한다. ‘어머털 족’(amortals. 죽을 때까지 젊은 시절과 똑같이 살아가려는 사람)까지 나온다. 전도자는 우리에게 죽음에 갇혀 살기보다 죽음에 의해 빚어진 삶을 살라고 한다.
심판이 다가오고 있으니 기뻐하라는 긴급한 현실주의. 전도자는 전 생애에 걸쳐 즐거움을 추구해야 한다고 말한다.(11:7-8절) 전도자는 선하신 하나님이 선한 세상을 만드셨다고 재차 말하고 우리가 살아가면서 그 선함과 영광을 보지 못하는 것은 최악의 어리석음이라고 한다. 젊은이가 젊음이 얼마나 좋은지 모르고 허비할 때가 많다. 온 몸으로 젊음을 최대한 활용하라. 우리가 하나님께서 만드신 세상을 즐길 때 우리가 사랑한다고 말한 하나님의 선하심을 이해했음을 보여준다. 즐기지 못하는 것은 범죄다. 그것은 부모가 후하게 베푼 선물을 즐기지 못하는 것과 같다. 더글러스 존스는 기독교 문화가 교회사 곳곳에서 실패한 이유는 “기쁨의 결여 때문”이라고 하였다. 기쁘게, 즐겁게 살지 않는 것,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부어주신 풍성한 선의 우물물을 깊이 마시지 않는 것은 죄다. 그게 죄인 이유는 그분의 성품에 대한 부정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인생의 선물을 얼마만큼이나 수용했는지 해명해야 할 날이 언젠가 있을 것이다.(11:9) 인생의 작은 일에서부터 기쁨을 발견하고 감사로 시작해보자. 작은 일을 즐기고, 맛보고, 사랑하고, 웃고, 기뻐하지 않을 때, 우리는 모든 일에서 기쁨을 잃어버리는 상실을 향해 가고 있는 것이다. 짜증은 죄다. 저자는 짜증이 특히 남성들에게 고질적이라고 평가한다. 하나님의 세계에서 당신의 즐거움을 재조정하는 훈련을 하려면 마음에서부터 시작하라. 작게 시작하라. 어디선가 시작해야 한다면 아무 데서든 시작하라.
인생은 살기 위한 것임을 기억하는 차분한 현실주의. 전도자는 청년들에게 그냥 ‘하나님’을 기억하라고 하지 않고 ‘창조주’를 기억하라고 한다. 창조 교리가 잘 사는 삶의 원천임을 깨닫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창조주를 기억하는 것은 하나님이 악한 세상이 아니라 선한 세상을 만드셨음을 기억하도록 한다. 짜증은 감사하지 않는 죄와 함께 자란다면 염려는 우상 숭배 죄와 함께 번성한다. 염려는 자신의 인생이 숨에 불과하다는 사실에 대해 우매한 자가 보이는 반응이다.(제프리 마이어스의 말) 예수님도 우리가 피조물이고 하나님은 우리의 필요를 채우는 창조주이심을 상기시킨다.(마6:25-34) 창조 질서의 타락은 그 모든 선함과 아름다움을 제거하지 않았다. 우리가 그에 반하여 산다면, 우리는 창조주를 잊은 것이다. 전도자는 나이가 드는 것에 대해 생생한 은유와 암시로 표현하는데 그 날이 되기 전, 당신은 어떻게 살 것인가?
제 10 장. 핵심 정리(12:9-14)
나는 어떻게 나의 창조주를 기억하고, 또 나는 왜 나의 창조주를 기억해야 하는가? 나는 어떻게 또 왜 하나님의 세상에서 지혜롭게 살아야 하는가? 전도자가 4가지 전해주려는 것이 있다.
기쁨. 전도서는 우울하고 비관적인 책이 아니고 기쁨을 주기 위해 기록되었다. “전도자는 기쁨을 주는 말을 찾으려고 힘썼다.” 하나님은 금욕주의자가 아니다. 당신은 어떻게 창조주를 기억하는가? 어떻게 하나님을 아는 줄 아는가? 하나님의 기쁜 말씀을 경청하고 또 그분의 말씀이 기쁘다는 사실을 발견할 때다. 하나님의 말씀이 당신에게 웃음을 주기 위한 것임을 깨달을 때 당신은 창조주를 안다.
아픔. 전도자의 말은 못과 같아서(12:11) 그의 말은 상처를 낸다. “너는 죽을 것이다” 이것은 목자가 주는 날카로운 말씀이다. 그 중 일부는 날카로운 끝으로 당신에게 다가올 수도 있다. 어떤 말씀은 당신으로 하여금 똑바로 앉아 주목하게 한다. 말씀은 당신으로 하여금 가던 길을 멈추고 뒤돌아서서 올바른 방향으로 가게 만든다. 창조주를 기억하여 하나님의 말씀이 당신의 환상을 몰아내게 하고 고통스럽더라도 당신의 어리석음을 직시하라. 성경의 기쁨과 성경의 아픔은 태도 측정기, 당신의 영적 온도를 재는 길이다. 당신이 하나님을 아는 때는 이렇다. 가끔 하나님의 말씀이 당신의 교만을 낮추고 당신을 눈물 흘리게 만들 때, 당신의 기대를 뒤집을 때, 당신의 우선순위를 뒤바꿀 때, 당신의 행동에 맞설 때, 당신의 생각에 도전할 때.
관점.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을 지키는 것이(12:13) 인생에 관해 받아들여야 하는 관점이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과 창조주 하나님을 기억하는 것은 마땅히 하나님께 드려야 할 모든 경배와 사랑, 순종으로 그분을 대하는 것이다. 여호와를 경외하고 창조주를 기억하는 것은 무릎을 꿇고 사는 법을 우리에게 가르친다.
준비(12:14). 하나님의 심판이 있다. 우리는 그분을 만날 준비를 해야 한다. 마감 시간을 놓치지 않았다. 아직 준비할 시간이 있다. 죽음과 심판이 다가오고 있다. 인생에 대한 이 중대한 기준점이야말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삶을 바꾸어놓을 수 있는 바로 그것이다.
첫댓글 죽을 준비...
그분을 만날 준비를 하고~
죽음과 심판이 다가오고 있음을 기억하며 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