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의전당 콘서트홀 │ 20260612
라흐마니노프 인터내셔널 오케스트라
미하일 플레트네프 M. Pletnev (지휘)
다니엘 로자코비치 Daniel Lozakovich (바이올린)
고티에 카퓌송 Gautier Capucon (첼로)
앨런 메르시에 Helene Mercier (피아노)
사실 전날 롯데콘서트홀에서 열린
로자코비치의 슈만 바이올린 협주곡 공연에 더 관심이 있었다.
하지만 근무 스케줄 때문에 갈 수 없었고,
대신 금요일 예술의전당 공연을 선택했다.
베토벤 삼중협주곡이라면
로자코비치의 연주를 듣기에도 충분히 매력적인 프로그램이라고 생각했다.
공연은 베토벤의 《코리올란 서곡》
Coriolan Overture, Op. 62 으로 시작했다.
플레트네프 지휘자가 등장에 박수가 쏟아졌다.
그런데 첫인상은 기대와 조금 달랐다.
코리올란 서곡은 마치
영화 ‘죠스‘ 에서 상어가 출현하기 전의
긴박한 표현처럼 모든 악기들이 집중해서 다같이 한목소리를 내줘야 하는데,
첫 도입부에서 팀파니의 진입 박자가
아주 미세하게 빨라서 시작하자마자 당황했다.
연주 전체의 문제라고 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워낙 강렬한 시작을 요구하는 곡이다 보니
그 순간의 집중력을 흐트러뜨렸고
이질감이 귀에 남았다.
이후에는 안정감을 찾았지만,
첫 몇 마디가 남긴 인상은 생각보다 오래 지속되었다.
😭😭😭
이어진 베토벤 삼중협주곡.
Triple Concerto in C Major Op.56
연주자들의 면면은 화려했다.
다니엘 로자코비치와
고티에 카퓌송,
그리고 피아니스트 엘렌 메르시에.
하지만 솔직히 말하면
기대했던 만큼의 만족감을 주지는 못했다.
초반 피아노 고음부에서 음이탈이 있었고,
그 이후에도 피아노가 곡 전체의 중심을
충분히 잡아주지 못한다는 인상을 받았다.
흔히 삼중협주곡의 피아노 파트가 어렵지 않다고들 말하지만,
이 작품에서 피아노는 단순한 반주자가 아니다.
바이올린과 첼로 사이를 연결하고, 화성을 채우고, 음악의 중심축을 형성해야 한다.
그 역할이 다소 약하게 느껴지자
곡 전체도 생각보다 평면적으로 들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자코비치의 연주는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음색은 여전히 아름다웠고,
무리하게 자신을 드러내기보다
선율을 자연스럽게 이끌어가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카퓌송의 첼로 연주 역시 안정적이었다.
베토벤의 삼중협주곡은 어찌보면 첼로협주곡처럼 들린다고해도 과언이 아닐정도니까…
무엇보다 좋았던 것은 연주가 끝난 뒤의 연주자들의 모습이었다.
세 연주자는 무대를 여러 차례 반복해서 다시 찾았고, 관객들에게 정성스럽게 인사를 건넸다.
서로를 향해 악수를 나누고, 관객을 향해 깊이 고개 숙이는 모습에서 진심 어린 감사가 느껴졌다.
연주만큼이나 인상적인 장면이었다.
역시 로자코비치는 좋구나~~ 😘🥰🥰
후반부의
라흐마니노프의 교향시 《The Rock》.
솔직히 말해 크게 기대하지 않았던 작품이다.
이름만 알고 있었을 뿐, 제대로 들어본 적이 거의 없어서 유튜브 영상으로 미리 예습이 필요했던 곡이다.
하지만 이날 공연에서 가장 강한 인상을 남긴 작품은 단연 이 곡이었다.
음악은 첼로와 비올라를 중심으로 한
저음 현악기의 깊고 장엄한 울림으로 시작한다.
거대한 무언가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는 듯한 시작이었다.
그리고 그 위로 목관악기가 바람결처럼 스쳐 지나간다.
바이올린이 공간을 열고, 하프가 은은하게 빛을 더한다.
특히 하프의 사용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음악 전체의 색채를 바꾸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
흥미롭게도 이 곡을 들으면서
나는 러시아의 라흐마니노프보다
림스키 코르사코프의 《세헤라자데》를 떠올렸다.
목관과 현악이 만들어내는 공기감,
그 위에 얹히는 하프의 반짝임,
그리고 이야기하듯 흐르는 관현악의 색채 때문이었을 것이다.
《바위》라는 제목 때문에
처음에는 무겁고 단단한 음악을 상상했지만,
실제로는 바위보다도
그 주변을 감싸는 바람과 구름이 아름다운 협곡 지형이 먼저 떠올랐다.
마치 여름의 노르웨이 피오르 해안 위를 스쳐 지나가는 구름과 바람에 가깝고,
그 이미지는 체호프의 소설보다도,
레르몬토프의 시에 나오는
“황금빛 구름이 거대한 바위 위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떠난다”
는 구절과 묘하게 통하는 것도 같아보인다.
유튜브 영상으로 곡을 접했을 때보다 훨씬 더 좋았다.
아마도 이 곡은 라이브에서 진가가 드러나는 작품일 것이다.
홀 전체에 퍼지는 현악기의 층과 하프의 잔향, 목관의 색채는 스피커로는 전달되기 어려운 부분이니까.
15분 남짓한 작품이지만 오히려 빨리 끝나는 아쉬움이 컸다.
조금 더 다양한 전개와 구성이 추가되었다면
30분 규모의 작품으로도 충분히 확장될 수 있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 듣고싶은데… 😭😭🥹🥹)
더 놀라운 사실은
이 작품을 완성했을 때,
라흐마니노프의 나이는 20살이었다.
그리고 이 곡을 들은 차이코프스키는
젊은 작곡가의 재능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교향곡 2번과 피아노 협주곡 2번을 쓴
거장의 모습은 아직 보이지 않을지 몰라도,
뛰어난 관현악 감각과 색채에 대한 재능은
이미 충분히 완성되어 있었다.
마지막으로 연주된
플레트네프의 《Rachmaniana》는
흥미로운 작품이었다.
하나의 거대한 교향곡이라기보다,
플레트네프가 기억하는
라흐마니노프의 여러 표정을 모아놓은
음악적 수첩 같은 느낌이랄까..
플레트네프가 직접 쓴
“라흐마니노프 소품집” 에 가까운 셈이다.
8개의 짧은 곡들은
하나의 서사를 따라가기보다 각기 다른 인상을 남겼다.
오히려 플레트네프가 편곡한
《호두까기 인형》 피아노 작품집을 떠올리게 했다.
각각의 곡은 독립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었고,
그 안에서 플레트네프가 바라보는
라흐마니노프의 여러 모습들을 엿볼 수 있었다.
물론 이날 가장 강한 인상을 남긴 작품은
《The Rock》이었다.
첼로와 비올라의 깊은 울림,
바람결처럼 스며드는 목관,
그리고 그 위에 더해진 하프의 색채는
예상치 못한 감동을 안겨주었다.
그러나 공연을 떠올릴 때
가장 먼저 기억나는 것은 특정 작품 하나가 아니다.
역시나 기대를 저버리지 않은 로자코비치의 연주,
여러 차례 무대로 나와 정성스럽게 인사하던 협연자들,
러시아 음악의 색채를 섬세하게 그려낸 플레트네프와 오케스트라까지.
공연에는 몇몇 아쉬운 순간도 있었지만,
그것마저 포함해 한 편의 아름다운 저녁이었다.
로자코비치를 보기 위해 예술의전당을 찾았지만,
예상치 못한 젊은 청년 라흐마니노프의 예술성을 만나볼 수 있었던 여름 밤.
그것으로 충분히 만족스러운 공연이었다.